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를 여러권 읽고보니 이제 그 책의 작은 크기와 세 편의 짧은 단편이라는 구성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 시리즈가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세계는 여전히 낯설다.
[마그눔 오푸스]
【 산모에게 태몽을 전할 때, 이야기의 많은 부품들이 탈락되거나 변형된다. (p. 15)】 1938년생 양계진 씨는 손자의 태몽을 꾸었다. 【1992년 어느 겨울, 양계진 씨는 이름 모를 늪에 발을 들인 적이 있다. (p. 21)】 파킨슨 병을 앓게 되면서 구부러져가는 손가락으로 끝끝내 부여잡고 싶었던것은, 그때 그 늪에서 잡은 잉어의 꿈을 생각나게 하는 손자였다. 【아가야, 내가 너를 어떻게 잡아 왔는데 (중략) 아가야, 너를 잃으면 이제 다시는 널 잡아 올 수 없어. 나에게는 이제 그런 힘이 없어. (p. 27)】 하지만 손자는 할머니와 그 늪에 가보길 청했고 수십년만에 찾은 창녕의 그 늪에서 양계진씨가 만난 것은 두려운 용왕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태몽은 산모가 꾸는 게 아니라 으뜸으로 배짱 있는 식구가 꾸는 것이다. (p. 37)】 맏딸의 태몽을 꾸었던 아버지의 혼령과 대화를 나눈 이후 양계진씨는 마지막으로 용왕을 만난다. 【이것을 가지시고 (중략) 내가 가져간 보물일랑 이제 그만 잊어주시오 (p. 40)】 하지만 양계진씨가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용왕은 잉어의 주인이 아니라 태양의 주인이었다. 손자의 태몽을 꾼 할머니가 손자를 지키기위해 용왕에게 저항해온 시간은 기실 그녀만의 '마그눔 오푸스'였던 것이다. 연금술사들이 금을 만들고 철학자의 돌을 만들듯이 할머니의 작은 태양은 용왕에게 '걸작 (p. 40)' 이었다.
[아나톨리아의 눈]
【 1)소설가는 실제 보드게임의 공용 장비인 구각뿔 주사위 두 개를 반드시 사용할 것. 2)텍스트는 주사위를 굴려 나온 합:0~99 사이의 값만큼 전진할 수 있다. 3)주사위를 굴리는 횟수는 열 번으로 제한하는 데, 열 개의 평면 픽션을 새로운 십면체 주사위의 눈으로 구부려 접기 위함이다. 4)위의 세 가지 규칙은 석촌동에 거주하는 게임 기자이자 보드게임 마스터 이명규의 마스터링 아래 협의되었다. (p. 47)】 주사위는 구르고 굴러 2 - 66 -77 - 50 -18 - 71 - 49 - 70 - 6 - 26 이라는 열 개의 숫자를 결과로 내놓았고 작가는 그 숫자에서 연상되는 짧은 글들을 소설 속의 소설인양 써놓았는데 '창녕에는 지금도 집안사람들의 집성촌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p. 72)】 라며 앞의 단편과 이어지는 듯도 싶지만 주사위의 결과가 운명이 아니라 운이듯이 그저 잠시 지나가는 문장이었을 뿐이다.
[고스트 프리퀀시]
【소설가 김태용은 2019년 1월 29일 한 주택에 초대받았다. 은평구 역촌동에 지어진 이 적색 양옥집은 다만 불란서 주택으로 알려져 있을 따름이었다. (p. 93) 소설가는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집 안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아직까지 이 버려진 장소에 남아 있구나. (p. 96)】 소설가는 <On - going Project 역촌 40 : 백오십점일평방미너> 라는 낭독전시를 기획하고 2021년 그 공연에 '나'는 시인 박지일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반복적인 의성어 텍스트만을 다양한 사람들이 반복해서 낭독하느 그 전시공연 참가 이후 시인 박지일은 악몽에 시달리는데 다른 참가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무언가 픽션이 되면 그것은 사라진다. 소설가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든 목소리는 굽이치는 파혼을 남기게 마련이며, 그러므로 글쓰기는 오래 전부터 잉크를 빌려 목소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안티 노이즈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p. 98)】 소설가 김태용은 폐가의 음성을 텍스트화 함으로써 시인 박지일은 의성어의 악몽을 시로 씀으로써 '안티 노이즈'에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유투브 동영상의 노랫소리에 들려오는 에디슨의 혼령의 목소리를 텍스트화 하면서 그 목소리에서 벗어난다. 【무언가 픽션이 되면 그것은 사라진다. (p. 130)】 그러니까 '반복재생되어 들려오는 소리' 라는 고스트 프리퀀시 (혼령 잦은 출몰)는 텍스트화 하여 픽션으로 만들고 나면 그제야 진정한 허구가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어지는 작가의 에세이 [운명의 수렴] 에서 저자는 소멸되어 가는 육체의 시간의 수렴인 죽음에 대한 필연성을 강하게 자각하면서도 【지난 시대의 소설가들은 지금도 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뛰어난 책들은 이따금 작가보다도 오래 살아남아, 이렇게 각기 다른 방에서 여전히 울려 퍼집니다. 그러니까 소설은 저에게 목소리입니다. 문학이기 전에, 이야기이기 전에. 모든 시대에 그것은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소설가는 어떤 목소리를 남길지 고민해야 합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까마득한 미래까지 울려 퍼질 목소리는 오직 자기 자신과 부딪칠 때 영구적인 진동을 얻습니다.... (p. 143) 다다르기 전까지는, 어디에 수렴하게 될지 알수 없다. (p. 144) 】 라며 수렴을 향헤 가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진동을 만들어낼지에 대한 우연성을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소 문학평론가는 해설의 제목을 [주술과 언어의 유물론] 이라고 거창하게 붙이고선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의 운명적 연쇄가 부챗살을 이루며 서사의 장력을 지탱한다. 상세하고 화려하며 커다란 부채, 이것이 신종원 세계의 특징적인 형상이다. (p. 150)】 라고 작가만의 개성을 예찬하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항상 그렇게 분류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한 그러니까 작가를 양성하는 과 출신의 작가들과 그러한 과들과 전혀 무관한 전공이나 직업출신이지만 작가가 된 작가들로 나뉘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러한 구분을 할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고스트 프리퀀시> 같은 책을 읽었을 때다. 작가적 작가주의랄까... 그들만의 소통방법 그들만의 세계에서나 통용되었을 법한 문장들로 멋드러지게 포장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건지 전달력이 떨어지는 소설들. 물론, 그런 전공 출신 작가들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비전공 출신 작가들도 그런 작가적 작가주의의 문장들을 구현할때가 있곤 하지만 '문예창작'적 특유의 색이 진하게 느껴지는 그런 단편들이 있다. 이 책 속 신종원의 소설처럼.
대중적 인기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연극을 보러가면 파릇파릇한 학생들이 관객의 다수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교수나 선배의 연기를 보기 위해 왔을 그들에겐 그 연극이 연극 자체였을까 수업의 연장이었을까... 여하튼 일반 대중으로 보는 나와는 다른 시각으로 다른 공감을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연극을 찾아보는 나는 어떤 생각이었나를 문득 생각했던 시간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시간이 겹쳐졌다. 지금까지 9권이 나온 트리플 시리즈 중 5권을 읽은 애독자로서 이 책의 젊은 패기는 여러모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