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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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진 사람들과

이름 없는 땅에너 자라난 무섭고 아름다운 이야기

<나인>으로 관심이 생겼고 <천 개의 파랑>으로 홀딱 반했으며 <어떤 물질의 사랑>으로 돈독해진 팬심을 품게 된, 천선란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노랜드>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소설집인데 발표 지면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2021년 작품들이다. 등단하자마자 왕성한 활동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그야말로 쏟아내듯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시한번 놀랐다.

김초엽도 그렇고 천선란도 그렇고 등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와 문학상을 휩쓸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내는 것이 신기하면서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기대되는 젊은 두 작가이다.

[흰 밤과 푸른 달]

뿔은 그저 창이었고, 이겨야 하는 건 창을 쥔 몸, 총도 뚫지 못하는 두꺼운 가죽과 인간의 운동력으론 잡을 수 없는 속도, 그리고 당해낼 수 없는 힘의 차이, 인류에게 필요한 건 힘이었다. 크람푸스의 목을 비틀어 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의, 반은 염소, 반은 악마인 뿔 달린 외계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서는 총칼이 아닌 머리를 뜯어낼 힘이 필요했다.

"시술의 안정성은 보장되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강압적인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원들은 전부 가족을, 그러니까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선택을 했습니다. 모두가 잘 적응했고, 비극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는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왔으니까요" (p. 13)

크람푸스라는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인류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갈 때 인류의 과학은 늑대인간 유전자를 만들어냈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전사들은 크람푸스를 물리쳤으나 그들의 강인함은 또다른 위협이 되었다. '진화는 침략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희생이었지만 인류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착한 미래는 통로 같았다. 머물지 못하고 지나가야만 하는 단계 (p. 23)' 명월은 늑대인간전사가 되었다. 강설은 그런 친구의 모습이 낯설고도 두려웠다.

싸우는 게 아니라 지킨 거야.

싸운 게 아니라 지킨 거라고.

나는 이게 지키는 수단이야. 나는 이렇게 해야 지킬 수 있었어. (p. 22)

한때 영웅이었다가 이젠 불가해한 위협이 된 늑대인간전사들은 우주로 나가려 한다. 가족과 지인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려 센터를 방문했다. 명월은 강설을 초청했다. 강설은 혼란스럽다. 고아원 동기이자 절친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둘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그때 센터에서 만난 한 사람이 강설에게 묻는다. '강설씨,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두려운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갔는데, 강설씨가 두려워하는 건 뭐에요? (p. 52)' 명월이 지키고자 하는 것 강설이 두려워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바키타]

문명이 멸망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비슷하게 파멸이나 괴멸, 몰락, 함몰, 종말 같은 단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한다면 애석하게도 저는 번영이라 말하겠습니다. (p. 60) 조금만 생각해봤다면 정말 이상한 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한 행성을 한 종이 절반 가까이 정복하고 있었다는 게 소름 끼칩니다. (p. 61)

바키타 라는 외계 종족에 의해 인간은 멸망직전? 다른 행성으로 이주겸탈출을 한 듯 하다. 어느정도 자리잡은 후 지구에 남겨두었던 배아통을 회수하러 지구에 온 '나'는 그동안 변한 지구에 대한 보고를 하며 현재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진화한 것으로 보였다. 바키타와 함께 사는 인간 그리고 바키타와 떨어져 숲속에 숨어사는 인간, 그들은 외형부터 문화까지 판이하게 다른 진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시대는 통행권이 없으면 바깥 외출을 할 수 없었고 무장한 군인만이 텅 빈 거리를 활보할 만큼 극도로 예민한 시대였다는 걸 기억합니다. 오래가지는 않았죠. 바키타가 인간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걸, 그리고 바키타가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화합물을 먹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냈으니까요. 우리가 몇천년 동안 쌓아둔 쓰레기를, 그 골칫거리를, 인류의 죄를 주식으로 먹어 화합물의 흔적이 남지 않는 분비물로 배출한다는 걸 알아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바키타가 어떤 무기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p. 69)

바키타와 두 인간종족을 관찰하다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떠나게 된 '나'는 마지막 보고에 이런 말을 한다. '저는 벌써 고민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첫 번째 지구에 대한 기록을 남길 것인지에 관해.' 그리고 '우리가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p. 79)' 라고. 그동안 아니 지금 아니 앞으로 인류가 지구에게 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푸른 점]

시에라, 너는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정말 언젠가 네가 그렇게 끄트머리이자 시작점인 곳에 서게 된다면 네가 믿는 것을 잃지 않기를 바라. 네가 믿고 있는 것이 답이야. 그걸 잃지 마. 가끔은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니까, 알겠니? (p. 86)

시에라가 어린 시절 엄마가 했던 말을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시에라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후 엄마가 일하던 연구소 직원 전체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후 연구소에서 예측했던 데로 옐로스톤 화산이 폭발했고 지구는 다시 화염과 빙하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류는 지구와 똑같은 행성을 찾아 우주선들을 출발시킨다. 시에라는 그 마지막 우주선의 선장이었다.

폭동은 절망에서 옵니다.

"폭동은 희망에서 와" (p. 103)

태양계를 떠나기 직전 지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깨어나야 할 시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냉동수면상태에서 깨어난 시에라는 '우주의 푸른 점'을 보기 위해 우주선 밖으로 나간다. AI 가 그토록 말렸건만... 그렇게 시에라가 본 것은...

[옥수수밭과 형]

초등학교 첫 등교 날 자폐아라는 단어와 천재라는 단어가 내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었다. 고등학생이던 형은 수업을 듣다 코피를 쏟으며 병원에 실려 갔다. (p. 113)

푸코와 형의 사이는 각별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형은 푸코를 바쁜 부모대신 업어주고 놀아주며 존재 자체로 사랑해 주었다. 푸코네는 유전자변형 옥수수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푸코와 형은 그 옥수수밭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책도 읽고 간식도 먹으며 놀곤 했다. 하지만 형이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 푸코는 차가워진 형 옆에서 새벽을 보냈기에 형의 죽음을 확실히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옥수수밭에서 형을 만났다.

"형이 상상해봤는데, 만약 푸코랑 다르게 생긴 애가 본인이 푸코라고 하면서 푸코의 기억과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애를 푸코라고 생각할 거 같아. 사람이든 로봇이든 강아지든 기억이 같으면" (p. 117)

[제, 재]

내가 재 할게, 너는 제 해. 헷갈리잖아.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재미있지 않겠어?

나는 그애가 남긴 쪽지를 보고 좋아했다. 그것이 나를 뺏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는 내게 이름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애초에 나도 재 였는데.

모든 기사는 '해리성 인격 장애가 있는 천재 아이'라는 제목으로 퍼졌다. (p. 131)

한 몸에 서로 다른 두 인격체가 산다. 잠이 들고 나면 다른 인격체가 깨어난다. 하나의 인격체가 오래 존재하기 위해선 최대한 잠을 덜 자야 했다. 두 인격 중 한 명은 천재과학자였고 한 명은 평범했다. 모두들 천재소녀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 선은 '제'에게만 웃었다. 평소와 다르게 깨어났다고 느끼던 제에게 재의 계획을 알려준 것도 동생 선 이었다. 하나의 몸 두개의 영혼, 하나의 몸에 하나의 영혼만 남기려면 누구를?

[이름 없는 몸]

너는 내 친구이다. 너는 내 죽은 친구이다. 너는 나보다 2개월 뒤에 태어났으며 그때부터 열아홉 살의 마지막 날까지 나와 이곳에서 함께 살았던, 그렇지만 죽은 내 친구이다. 너는 1년 전에 죽었다. 내 쌍둥이 같던 친구이다. 그런데 나는 총을 가지고 있고, 너를 겨누고 있다. 나는 1년 전에 죽은 내 친구를 다시 죽여야 한다. (p. 171)

영화 <부산행>이라던가 드라마 <킹덤>을 보지 않았다면 쉽사리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을 것 같은 작품이었다. 좀비를 소설로 읽게 되다니 그런데 하염없이 슬프고 짠한 이야기라니 독특한 소설이었다. '나'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일하다가 엄마의 부음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간다. 절대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그 곳에. 죽음이 가득한 그 곳에. 거기서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 (p. 219)

'나' 는 '이름 없는 몸' 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나보다더 친구를 더 '이름 없는 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총을 들었다.

[ㅡ에게]

이름을 불리지 못한 영혼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곳에서 성불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 그게 귀신이지 뭐예요,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차사는 아니라는 말도 해주지 않고 이름이 기억나면 부르라며 떠났다. (p. 263)

작품을 그냥 읽었을 땐 그저 짠하게 읽히는 단편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뒷장에서 [수록 작품 발표 지면] 리스트를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르포 매거진 <추적 불꽃 - 우리, 다음> 2021 수록]

단 5페이지의 이 짧은 작품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이 되다니... 울컥했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누군가의 한없는 다정함과 친절함은 가라앉은 슬픔 위에 떠 있는 돛배와 같아서 그 안에 타 있는 이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침몰하지 않을 수 있다. (p. 284)

지구가 환경재앙으로 또 멸망직전에 있다. 2주 후면 마지막 운송선이 지구를 빠져나간다. 전등사에 있던 스님과 동자승들도 출발했다. 효원과 효종 스님만 남았다. 효종스님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효원의 선택에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날, 멸종됐다던 저어새가, 한쪽 눈 아래만 노란 저어새 한 마리가 법당에 날아들었다. 과거에 효종스님이 살려주었다던 그 새일까 효원이 궁금해 하며 보살폈는데, 그 새가 날아가고 효원에게 날아온 것은

[ 두 세계 ]

"유진이 좀 어려웠지?"

어려웠다. 그건 그 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유라뿐만 아니라 그 애의 부모도 동의했던 부분이었고 같은 반 친구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그 애를 표현했다. 맞추기 어렵다거나 성격이 비틀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애에게 붙은 어려웠다란 의미는 조금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유라만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애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기운의 출처는 '죽음'이었다. 항상 밝고, 항상 역동적이었으나 그 애의 에너지는 전부 죽음이 원동력이었다.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 하나. (p. 310)

유진과 유라는 쌍둥이였다.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달라서 본인들이 말해주기 전까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만큼 쌍둥이 같지 않은 자매였다. 유진은 몇 년 전 자살했다.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더라도 유라에겐 슬프고 황망한 사건이었다. 유진의 세계를 유라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유라의 세계를 유진이 원하지 않았던 것 만큼.

유라는 원래부터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직접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책이라는 물질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학생 시절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서점에 찾아가 아무 책이나 샀다. 구매한 책을 전부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글자와 글자가, 단어와 문장이 서로 얽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게 늘 신기했다. 유라에게 책은 소비재라기보다 소장품에 가까웠다. 그래서 되도록 어떤 형태든 책이 주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그런 유라를 기가 막히게 찾아 스카우트 한 사람이 노랜드의 현 대표이다. 대표는 소설 기반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개발해 책을 보다 현실감 있게, 오감으로 읽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p. 315)

대표가 꿈꿨던 지금의 '노랜드'의 것은 여타의 영상물과 달랐다. 노랜드에서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감각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다. (중략) 무엇보다 노랜드의 가장 큰 핵심은 소설 속 인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의 인공지능화가 이루어지고, 그 인물은 자신이 속한 소설 속의 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독자는 등장인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짐에 따라 소설을 더 심도 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된다. (p. 316)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노랜드'의 등장이다. 나는 단편모임집이더라도 표제작의 이름을 따온 책보다 소설집 자체의 제목을 가진 책을 좋아하는데 <노랜드>에 [노랜드]라는 소설이 없어서 좋았다. 그래서 제목에 생각해보게 되고 그러다 이렇게 딱 맞는 소설속 '노랜드'를 알게 되고 나니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노랜드 라는 제목은.

유라는 노랜드에서 일하고 있다. 유진의 기일이 지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랜드 에서 서비스 중이던 한 작품에 문제가 발생한다. [아락스]라는 작품의 결말이 달라졌다고 독자에게 항의가 들어온 것이다. [아락스]는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꿈많고 진취적이었던 아락스가 남장을 하고 승선에 성공하여 모험에 떠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결말이 바뀐 것이다. '아락스가 죽었다. (p. 319)' 원인을 파악하던 유라는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 유라의 세계와 달랐던 유진의 세계,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그 역관계가 성립할 서로 다른 두 세계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저는 전쟁의 중심지로 왔어요. 이곳으로 오며 박원사에게 물었어요. 무엇을 알아냈나요? 아니. 그들은 누구인가요? 몰라. 목적이 무엇인가요? 몰라. 어디에서 왔나요? 몰라. 우리는 왜 공격하나요? 몰라.

몰라.

몰라.

마지막으로 정말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서 묻지 못했어요. 지금도, 물을 수 없죠. 누구에게도.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니까요. 그냥 저는 궁금했어요. 그들이 정말 싸움을 원했나요? 우리가 먼저 공격한 건 아니죠? (p. 368)

이인은 특수부대군인이다. 외계인과의 전쟁이 한창인 곳에 파견나와 있다. 그들과의 싸움터엔 늘 안개가 자욱했고 어떤 병사들은 살아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병사들은 시체가 되어 오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어느날 '109일간 우주 생명체와의 전쟁 종료 (p. 379)' 가 되었다. 이인은 마지막 인원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추모를 꼭 하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 간 해변에서 사고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존재를 만났다.

인간이 이 행성에 첫 발을 내딛기 훨씬 이전에, 몇 번의 생명체의 멸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있었다. 북대서양, 그 아래, 인간이 발견했던 문명. 모든 것이 다 떠나도 이 행성은 끝내 흔적을 끌어안는다. 자신들이 떠났어도 이 행성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듯, 인간이 사라져도 이 행성은 수세기 동안 인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p. 411) 아주 오래전 이 행성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의 꿈으로, 서로의 생각으로, 서로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모든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매개는 이곳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소리로 퍼져나가듯 그들의 대화는 안개처럼 뿌였게 퍼져나간다. (p. 411~412)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서 환경재앙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이 예견되고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의 모습이 묘사되거나 지구를 떠나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 소설로 읽혀지기도 했다. 더구나 매 작품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의 죽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죽음속에서 내내 삶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들이기도 했다. 살아돌아 오라고, 살아 존재하라고, 그런 모습으로라도 다른 세계에서라도 살아나가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소설들이기도 했다. 어둡고 슬픈 데서 느껴지는 묘한 희망이었다.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떠나보낼 예정인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한 나머지 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살던 시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나 매 순간 곁의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마음이 퍽 지칠 때면 나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을 본다.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주를 떠올릴 때마다 고요한 그곳에 홀로 시끄럽게 돌고 있는 지구가 좋았다. 밖은 저토록 조용한데 이 안은 지나치게 시끄럽고, 지나치게 피곤하고, 지나치게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평생 좋아하는 노래만 듣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주의 시간으로 내 삶은 노래 한 곡 같아서, 한 곡 정도면 내내 행복해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나는 불안으로 꽉 찬 나를, 나만 한 크기가 아니라 좁쌀만 한 크기로 만들고 싶어서 우주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2년 동안 청탁 받은 소설들을 모으고 모아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으며, 한 단어를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분명 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아놓고 보니 소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여전히.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실집을 이렇게 엮어 당신께 보낸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길게 한 것 같지만. (p. 417~428) -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 하나의 작품 같아서 몇 문장만 끊어 옮겨 올 수가 없었다. 10편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을 때도 어디서 멈춰야 할지 알수 없어 하나의 작품을 다 읽고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편이지만 스릴러 소설처럼 긴박하게 읽히는 묘미가 있었다. 설정이 비슷해보여도 다른 인물과 다른 사건들이 등장할때마다 빨려들어갔고 비슷한 결말에 도달한것 같아도 한명한명 다른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름없는 땅, 노랜드는 지금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미래 어딘가에서 발견될 수도 있지만 천선란 세계에서의 노랜드는 슬프면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방금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도 다시 가보고 싶어진다. 이 이름없는 땅에 다시 발디뎌볼 수 있을 작품들을 또 기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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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스테판 에노.제니 미첼 지음, 임지연 옮김 / 북스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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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역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을 보면서 '세상 참 좋아졌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역사책을 즐겨 읽는 편이라 이런저런 종류의 역사책들을 읽어왔는데 갈수록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역사는 보고 또봐도 볼때마다 새롭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음식의 역사가 아니라 짤막한 프랑스 역사가 아니라, 프랑스 통사를 음식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들로 엮어내다니, 그래서 한입씩 크게 베어물면 한 시대를 번쩍 훑어볼 수 있다니 이역시 구미가 당기는 책이었다. 그러니 크게 한입 베어먹는 수밖에. ㅎㅎ

이 책의 저자는 2명인데 부부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자란 남편은 영국에서 식품 분야의 광범위한 경력을 쌓다가 지금은 독일의 고급 치즈 상점에서 일하고 있고, 미국에서 국제 문제 연구원 겸 편집자로 일하다가 영국으로 공부하러 왔던 부인은 런던에서 현 남편을 만나 결혼 후 전쟁학 박사를 취득 후 강사로 재직 중이다. 연애시절에 음식의 기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던 남편에게 부인은 본격적인 프랑스 역사로 엮어볼 것은 제안했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남편이 정말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 이 책이라고나 할까.

프랑스에 대한 끝도 없는 이야기를 빛내는 한 가지 특징을 꼽자면, 숭고함과 터무니없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역사의 많은 기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계몽된 국가라는 명성을 누리면서도 기이한 관습과 정치, 미식 습관으로 방문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면 당신도 장엄함과 재기발랄함, 유쾌함과 지독함의 조합이 이처럼 강렬하고 때로는 황당하게 느껴지게도 하는 프랑스의 특징을 만들어냈다는 데 동의하기를 바란다. (p. 7) -들어가며 中-

저자는 역사전공자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위해 학자들의 책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의외로 덕후들의 책이 더 훌륭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책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두루 거치며 살았지만 그 역사의 바탕이 프랑스 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음식의 기원이 프랑스에서 비롯된 것이 많아서인지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프랑스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무엇보다도 (최근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프랑스내에서 순.수.프랑스인 이라던가 프랑스민.족.주의 같은 우파적 의견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걱정하며 이에 대해 반론을 역사로 풀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 '순혈의' 정통 프랑스 요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사실상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앞으로 밝혀내도록 하겠다. (p. 10)' 이러한 태도는 결코 반프랑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재 프랑스내에서 퍼지고 있는 우려스러운 사회분위기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쓴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한편으론 멋있기도 했다.

책에서 한 입 크기씩 먹기 좋게 잘라놓은 역사는 51조각이다. 골족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의 시대를 두루 훑으면서 그 시대별로 중요한 사건들과 얽혀 있는 음식들 이야기를 함께 읽다보면, 그냥 역사로 읽었을 땐 몰랐던 프랑스인들의 문화를 좀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와인과 치즈와 빵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과 식습관을 좀더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며 이해하게 됐다. 나로선 이해하지 못했던, 그 음식들에 대해 정말 진심인 프랑스의 문화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달까. ㅎㅎ

와인은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기원전 600년 무렵 포카이아 출신의 그리스인 해운업자들이 세운 유서 깊은 프랑스 도시이자 항구인 마르세유 주변에서 작은 규모로만 생산되었다. (p. 17) 프랑스 교육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골족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첫째, 그들이 '프랑스인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p. 18) 두번째 사실은 마법의 물약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드루이드가 만든 이 물약을 마시면 굉장히 강해진다고 한다. (p. 19) 이 시대의 와인은 현대인의 입맛에는 그리 맞지 않을 것이다. (중략) 와인은 그 맛이 아닌 사교 행사와 종교 의식에 유용하다는 차별화된 특징으로 인해, 그리고 깨끗한지 의심스러운 물을 대신할 소독제로 알려지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p. 21)

골족의 기원에 대한 첫 장에서 포카이아, 와인, 마법의 물약 등의 단어들을 읽다보니 최근에 읽었던 <불멸의 열쇠>라는 책이 생각났다. 저자의 역사탐구가 최신 정보들로 다양하게 이루어졌구나 싶기도 했고 열심히 공부했겠구나 싶은게 책을 읽는 내내 느껴져서 재미와 유익을 동시에 잡은 역사대중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역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골족부터 시작한 내용은 '콩팥의 성모'라던가 '여성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라데군트 이야기등으로 기독교가 정착되던 시대를 빠르게 지나간 후 중세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폭넓게 풀어놓는다. 아마도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음식들이 혹은 그 기원을 알 수 있는 음식들이 그 시대를 많이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것 같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던 사람들은 평민들보다는 귀족이라던가 성직자들 같은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더욱 권력층의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역사읽기를 좋아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역사내용들 위주로 읽게 되긴 했지만 매번 등장하는 음식들의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수도사들의 치즈, 성전 기사단의 자두, 엘레오노레의 와인, 카타리파와 채식주의, 흑태자와 카술레(스튜의 하나), 흑사병과 식초, 식민지와 초콜릿, 프랑스의 사탕무, 초승달과 페이스트리, 루이14세와 완두콩, 루소의 음식에 대한 계몽주의식 접근법, 카페에서의 혁명, 빵의 평등, 감자와 기근, 나폴레옹의 다섯번째 크레프, 혁명 연회, 철도와 굴, 녹색요정 압생트, 땅콩의 비애, 군인반란과 웃는소 치즈, 사회주의자의 바게트, 레지스탕스와 키르 칵테일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프랑스 역사의 현재시점에 와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끔 현대를 오가며 음식에 대한 추이를 환원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대순으로 역사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특정음식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 읽으면 야사를 읽는 듯한 신선함이 있었고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역사를 좀더 편하고 쉽게 접근하게 할 수 있는 서술이라서 부담없이 읽히는 것이 좋았다.

지구상 가장 낭만적인 나라에서 낭만을 없애는 일이 가능할까? 아마도 힘들겠지만 우리 책이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에 대해 계속 전해져 온 신화를 해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 많은 프랑스 사람이 지역 시장에서 현지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사지만 교외의 기업형 대형 마트에서 장을 잔뜩 보기도 한다. (p. 423)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분열과 불평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p. 424) 프랑스 전역의 다양한 요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획일적이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용한 예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요리 또한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p. 426) 우리는 이렇듯 확대된 역사 이야기를 통해 꼭 집어 말하면, 국민전선 같은 극우 단체의 주장이 처음 접했을 때보다 얼마나 어이없는지 이해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p. 427)

먹고살기 힘든 시대일수록 선동가들은 자신들의 무책임을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탓으로 돌리는데 능수능란해진다. 하지만 잘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몫을 줄이고 있는 것이 과연 누구인지를.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우리만의' 무언가는 허상일 때가 많다. 역사는 한번도 멈추거나 섞어지 않았던 때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말한다 . 요리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이지만, 미식가들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이지만, '순수한 프랑스 미식은 없다. (p. 427)' 고. 외국인 혐오, 타종교 혐오, 타집단에 대한 혐오를 추동하는 이들의 선전문구에 현혹되지 말자. '순수한' 것은 없다. '순수한' 것이 옳은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현혹되려 할때 역사를 읽자. 비록 한 입 크기의 역사이더라도 배부르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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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페인팅 Final Painting - 화가 생애 마지막 그림을 그리다
파트릭 데 링크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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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꽃을 찬란하게 피워낸 화가들

그들은 생을 다하는 그 날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화가의 이젤 위에는 어떤 그림이 올려져 있었나?

마지막 말, 마지막 노래, 마지막 작품... 누군가의 마지막은 '마지막'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두고두고 회자가 되곤 한다. 그것이 정말 마지막 이라서, 더이상은 들을 수도 부를 수도 볼 수도 없기에, 한껏 애틋해진 마음으로 그 '마지막'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곤 한다. 여기 화가들의 마지막 작품에 관심을 갖고 그 마지막 작품들을 모은 책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화가들 30명의 마지막 작품을 모아서 보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졌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의 짜릿한 활력이 인정받고는 하는데, 평론가 바바라 헤른스타인 스미스는 이를 '노망든 숭고함'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말기 작품들이야말로 작가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몸부림쳐 얻은 자유로움이다. 작품과 그 창조자 모두 그 어떤 진부한 가치나 기준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며,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일정한 나이에 도달한 그들(주로 남성)에게 기대하는 원숙함, 지혜, 사려깊음 같은 따분한 자질에 관심이 없다. (p. 7)

여기서는 5세기에 걸친 회화사에에서 주요 화가 30명을 택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의 마지막 작품이 의미 있고, 저마다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략) 죽음은 자기 마음대로 찾아온다. 그 사실을 아무리 망각하고 억누르려고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기 작품'이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작품이란 화가가 20대였을 때 그려진 것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p. 9)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화가의 마지막 작품에 대해 그 의미를 짧게나마 훑어본다. 저자가 말했듯 죽음은 자기 마음대로 찾아오지 인간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막' 이라는 개념은 매우 상대적이다. 죽음을 미리 알수 있는 사람은 없다. 화가들이라고 달랐겠는가, 지금 화가가 이젤 위에 얹어 놓은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줄은 화가 본인도 미처 알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500여년간의 기간에서 30명을 추려냈다고 말했다. 화가들은 시대순으로 등장하고 있기에,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이라하면 중세시대이고, 그 시대 혁혁한 변혁을 일으켰던 얀 반 에이크 로부터 저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중세 시대의 화가들은 실력을 인정받고 유명세를 얻고 나면 작업실에 제자들 혹은 조수들을 다수 받아들여 함께 작업했다. 함께 라고는 하나 조수들이 숙련될수록 화가의 참여는 적어지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후대의 미술학자들이 화가의 작품이 진품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의 손길이 어느정도까지 미쳤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었기에...

ㅡ 어떤 경우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작품이 완성되기도 했다. (p. 11)

ㅡ 여러 명의 조수를 두고 작업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많은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p. 17)

는 의미의 문장들은 중세 시대의 화가들 생애에서 내내 발견된다.

얀 반 에이크, 조반니 벨리니, 라파엘로, 티치아노, 틴토레토, 엘 그레코,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렘브란트 등 거의 대부분의 화가가 작업실에 조수를 두고 공동작업했다. 시대가 혼란스러워지고 화가의 삶이 불안정해진 고야 나 '인상주의' 화가들의 개인적 사생이 일반화 되기 전까지 내내 화가의 작업실은 거의 그림공장처럼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기존에 알고 있던 화가들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저자의 설명들이 미처 몰랐던 에피소드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예를 들면,

ㅡ 알브레히트 뒤러는 레오나르도에 비길만한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p. 29)

ㅡ 티치아노를 존경했던 루벤스가 이 초상화(티치아노의 자화상)를 소유했으며 그는 1640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앤트워프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겸 주택에 소장했다. (p. 38)

ㅡ 미술사가 남성 중심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현상 때문에 당대에 명성을 누린 틴토레토의 딸 마리에타가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은 이제껏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그녀가 비교적 일찍 1590년에 사망한 점도 여기에 한몫했다. (p. 43)

ㅡ 카라바조는 계속 도망다니며 (중략) 불안하게 지낸 생의 마지막 4년 동안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50여 점 중에서 거의 1/3에 이르는 양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p. 51)

ㅡ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국가를 위해서'라는 호소로 이 작품을 사는데 필요한 1천만 파운드가 모금되었으며, 애늩워프 태생인 반 다이크가 영국의 국민영웅 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p. 70)

라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밖에도 화가들 별로 인상적인 내용들을 조금 정리해보면,

못그렸다고 해야 하나 못생겼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미술 문외한인 내 입장에서 봤을 땐 초등생 그림 같은 몇작품만 알고 있던 화가 고야는 의외로 초상화 전문이라 놀랐고 윌리엄 터너는 초기 자신의 작품들을 노년에 수정한 다음 다시 전시하곤 했다는 점이 존경스러웠다.

혁신적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는 마네는 뜻밖에도 작은 여성 초상화나 꽃과 과일을 그린 정물화가 인기리에 판매되었고 반 고호가 외톨이라고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라는 저자의 설명은 신선했다.

고갱에 대한 설명이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마음에 들었는데,

작가는 자기홍보에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한 첫 번째 서양 작가로 자기 삶과 공개석상의 모습을 일종의 수수께께 같은 소설로 만들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은 보헤미안, 추방자, 반항아, 잉카의 후손, 아름다운 야만인, 순교자였다. (중략) 세상을 떠날 때쯤 고갱은 파리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전설이 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 가격은 급등했고 전시회가 개최됐다. 고갱의 현실도피와 신비하고 감각적인 이국적 정취는 당시 대중들의 마음을 끌엇으며, 그 후로도 작가는 계속해서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그 시대의 다른 남성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최근 들어 그의 전설적 요소를 벗겨내는 치열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에 고갱은 자기도취에 빠지고, 지나친 성욕을 가진 남성 우월주의자로, 몹시 서양 중심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시선으로 '원시적인' 사람들과 사회를 바라봤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정체성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한 인물로 널리 비치고 있다. 게다가 고갱은 젊고 '이국적인' 여성들에 대해 주로 성적이고 심미적인 대상으로 생각한 남성이었다. 오늘날의 규범과 가치관을 관습이 달랐던 과거에 적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더라도 이러한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p. 113~114)

wow 완전 속시원한 해설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갱의 그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자, 유럽내에서 돈도 없고 인정도 못받던 화가가 유럽현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소식을 부풀려 유럽에 흘려보내면서 한편으론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돈 없이도 원주민이자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마음껏 취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고갱의 화가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전문가인 저자의 설명을 읽고나니 이제야 고갱의 허구적 가치가 좀 떨어지려나 싶어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저자의 가장 유명한 작품일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해서도 '비록 그는 캔버스에 '던져' 넣듯 한 번에 완성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했지만 우리는 그가 구도를 준비하는데 일년 이상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중략) 그림을 완성시킨 뒤에 고갱은 산속으로 들어가 비소를 삼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내는데 몰두한 그의 허구 중 하나일 뿐으로 추정된다. (p. 115)' 라고 일갈하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ㅎㅎㅎ

화가들의 화가라고 알고 있던 세잔도 '사후에야 비로소 작가가 받아야 할 응당한 대우를 온전히 인정받았다. (p. 121)' 라는 건 의외였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시대에 뒤떨어진 말년의 화가 (p. 126)' 라고 표현한 것이나 르누아르를 '영원한 행복을 그린 화가 (p. 138)' 라고 표현한 것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클림트의 일관성을 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쳐도, 고갱을 그토록 신랄하게 비평한 저자가 여성혐오발언을 수시로 했다던 '르누아르'의 진면목을 밝히지 않고 그저 아름답고 행복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설명한 것은 아쉬웠다.

유명한 화가들이라고 해도 현재 그 화가들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는 화가는 생각보다 드물었는데 에곤 실레 미술관이 있는 걸 보면서 그 짧은 생애를 살다간 젊은 화가가 남긴 작품들엔 '마지막' 이라는 의미가 몇 배로 더 들어가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절한 작가들의 작품은 그 희소성 때문이랄까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랄까 '마지막'의 상징성이 더 높아진다고나 할까... 에곤 실레 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딜리아니도 이른 나이에 요절 한데다 생애가 파란만장했기에 죽고나서야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 및 시력저하로 색을 잘 알아보지 못한 나머지 전작들과 달리 어둡게 채색했다고 그리고 나중에 수술로 시력을 회복하고 나서 그때 그렸던 어두운 색채의 작품들을 개탄스러워했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것 같은데 그 어둡게 그려진 대표작 [그란 데코라시옹] 이라는 수련 그림에 대해 저자가 높게 평가한 것도 좀 의외였다. 개인적으론 모네의 그림을 밝든 어둡든 다 좋아하지 않아서 뭐...;;;

뭉크의 성격이 고뇌에 차 있긴 했지만 '사업가, 협상가, 전문적인 애호가, 부유한 작가이자 사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단순히 고통받는 영혼 이상의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졌다. (p. 159)' 라는 설명이나 몬드리안이 '뉴욕에서 즐긴 열정적인 사회생활을 고려한다면 근엄하고 별나고 고독한 은둔자라는 이미지 역시 수정될 필요가 있다. (p. 164)' 라는 설명등은 고흐 때와 마찬가지로 고독한 이미지의 화가에 대해 신화적 고독함을 벗기려는 것 같아서 썩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해도 너무 신화적으로 꾸밀 필요 있겠나, 어차피 다 인간인데, 우리처럼.

앙리 마티스, 잭슨 폴록, 파블로 피카소 에 대한 과한 창찬은 그들의 작품이 추상화 이기에 더욱 개인적 호불호가 갈릴 내용들 같았다. 하지만 프라다 칼로 와 에드워드 호퍼의 생애에 대한 설명은 읽어봄직 했다.

이 책은 30명의 화가들에 대해 그 생애를 짧게 설명하고 마지막 시기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서너 작품씩 큰 그림으로 보여준다. 인쇄된 도판 질도 좋고 큰 사이즈로 그림을 볼 수 있으니 그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좋을 책이겠지만, 나는 화가들의 생애를 읽는 것이 더욱 좋았던 책이었다.

이십대에 죽건 100세 가까이 살다 죽건 그들의 마지막 작품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평소 하던 데로 그들의 그림을 그렸을 뿐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렸으나 그날 자신이 죽을 줄 몰랐으므로 그저 그리던 데로 자신들의 그림을 그렸을 뿐이었다. 마지막 이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었다. 그 그림이 '마지막' 이라는 것은 결국 화가는 몰랐고 화가의 죽음 이후 우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마무리 글 없이 본문만으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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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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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마야문명에 대해 관심있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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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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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초기 시대 유럽의 시각으로 바라본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역사책을 자주 읽는 편이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역사서들은 대개 서양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세계사책을 읽더라도 중심은 분명 서양 그 중에서도 유럽사이기 마련이고 그 유럽사와 아주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슬람사조차도 등한시되기 마련인데 그 유럽 열강들이 침략하고 정복했던 지역이라 그 죄를 숨기고 싶은 지역일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대한 역사는 그야말로 드물고 드물어 희귀하고 희소한 그런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모르니 멀게만 느껴지고 돌고돌아 풍월로만 접하니 신비하게조차 느껴지는 그런 역사인 마야문명에 대해 국내연구자가 낸 책이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서양인들이 파괴하고 없애버려서 그들의 역사조차도 침략자의 글줄로밖에 남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 배경과 속뜻을 알아가며 읽어야 할 역사이니만큼 전문가의 세심한 주의와 정확한 정보가 갖추어진 책은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초기인 16세기에 디에고 데 란다는 에스빠냐 신부 자격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이 책은 그가 마야문명 정복의 역사와 주변의 지리, 원주민들의 문화, 생활, 환경 등을 상세히 다룬 기록이다. 이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중남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p. 8) 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희소성이다. 상대적으로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많은 사료와 기록이 남았다. 반면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식민지 초기 종합적인 1차 사료는 여기에 소개하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유일하다. 그렇기에 마야문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게 된다. (p. 9) 마야 원주민을 탄압한 장본인의 책이 고대 마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란다의 종교적인 강경함과 원주민에 대한 시각이 책의 전반을 통하여 강조와 왜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저술 내용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조 알아두어야 한다. (p. 12) -머리말 중-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은 마야문명을 파괴한 스페인정복자들 중 마야문명 대부분의 자료를 불태우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종교재판으로 죽여없앤 란다신부가 남긴 기록이다. 파괴자의 기록을 바탕으로 역추적 해야 하는 마야문명에 대해 파괴자의 주관적 해석을 지워가며 읽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 더더욱 이 책의 가치가 빛난다 할 것이다.

불행히도 디에고 데 란다가 쓴 원본은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다. 본 한국어 번역본의 저본은 초간본을 읽고 요약하여 복사한 것이다. 이것마저 1616년의 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초간본의 제목은 'Relacion de las Cosas de Yucatan'으로 이를 직역하면 '유까딴 문물에 관한 보고서' 혹은 '유까딴 문물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된다. 한국어본의 저본이자 현재 전해지는 요약본의 제목은 '산 프란씨스꼬 교파 소속의 디에고 데 란다 신부가 쓴 유까딴 문물에 관한 보고서의 발췌본'으로 이 책이 발췌본 혹은 요약본이라는 사실이 제목에 명시되었다. 초간본은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식민지 시대 여러 사료에 언급되었다. 이 책은 (중략)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불행 중 다행히도 (중략) 최초 저술의 요약 필사본이 (중략) 발견되었고, 1864년 대중에게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중략) 본 한국어본은 1959년 앙헬 마리아 가리바이에 의하여 멕시코에서 출간된 가리바이본을 기초로 번역되었다. (p. 13) -머리말 중-

원본이 있는 과거의 역사책은 그 저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중요하고 원본이 아닌 번역본으로 읽는 만큼 어느 판본을 기초로 했는지도 중요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머리말부터 신뢰감을 탄탄히 심어주는 책이었다.

사실, 마야문명 이라는 단어가 낯설지까진 않더라도 잉카문명이나 아즈텍문명과 딱딱 구분짓지 못하는 나로서는 마야문명에 대한 첫 책으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말에 이어 [이런저런 일러두기] 에서 저자는 이 책의 원본과 번역, 주석 그리고 용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책에 대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여 한층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400여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사실 50~100페이지 정도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52개의 챕터 본문은 두어페이지 남짓으로 A4지로 치면 한장 안팎 정도가 될 듯한 분량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짧지만 주석의 양이 엄청나다. 본문의 반 정도 되는 깨알같은 주석이 본문 페이지 보다 분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이 책의 원본에 대한 해석에 있어 왜곡이 되지 않게끔 상당히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세심한 저자의 노력 덕분에, 그동안 나도 모르게 서양인의 시선으로 알고 있던 사실들을 많이 고쳐낼 수 있었다.

식인 풍습에 대한 내용은 16세기 이곳 원주민들을 정복한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부풀려지고 강조되었다. 식인과 인신공양 풍습은 원주민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로 이용되었다.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아먄적 행위이 대명사로 손가락질받던 인신공양은 인간의 피를 신에게 바침으로써 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의 독특한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야의 종교가 만들어낸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며, 실제로 마야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종교가 많건 적건 간에 인명의 희생을 요구해다는 점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인산공양의 전통은 서양 사람들이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몰아가는 가장 큰 구실이 되었고, 큰 의미에서 보면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야만인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마녀를 화형에 처하는 행위나 로마 시대의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행위도 일종의 종교적 인신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구체적인 타당성은 일단 접어두고서 종교적인 이유로 인간이 신체를 희생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사료에서는 마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구속하기 위하여 인신공양의 횟수나 정도를 부풀려서 원시성과 잔인성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p. 50)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불리는 란다신부의 기록은 곳곳에서 왜곡과 혐오가 넘쳐난다. 따라서 '그 당시 다른 사제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원주민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정복과 선교를 정당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생각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사실인 양 혹은 자신이 직접 본 것인 양 무분별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p. 55)' 라는 내용과 비슷한 내용의 주석 또한 곳곳에서 읽혀진다. 마야문명에서 인신공양이 없었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렇다고 수시로 무분별하고도 흔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수천년간 이어온 의식에서 인신공양에 희생된 사람보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시절 군인과 선교사들에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수가 훨씬 많을 것 같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희생또한 인신공양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누가 더 많은 목숨을 종교앞에 바쳤는가를 기준으로 했을때 월등히 서양인들이 앞서고 그러니 누가 더 야만적이고 잔인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공용어는 에스빠냐어다. 그러나 마야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마야문명의 후손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300여 년간의 식민 지배와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에스빠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 국가들에서 마야어를 듣는 일이 드물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원주민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비단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멕시코의 마야 지역과 과테말라, 벨리세의 내륙지역 등지에서는 읍내의 장터와 대도시의 공원에서 만나는 상당수 하층민이 대부분 일상 속에서 그들의 모태어인 마야어를 사용한다. 마야어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를 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고, 공식적인 수치에 큰 신뢰를 갖기도 힘들지만 대략 많게는 육백만명에서 적게는 이백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아직도 유럽 침략 이전 마야인들이 사용했던 마야어에서 조금 변화된 형태의 마야어를 사용하고 있다. (p. 73)

남미의 고대 문명들은 죄다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신비스러운 문명으로 알려져 있는게 아닐까 싶다. 마치 환상의 아틀랜티스섬 처럼. 하지만 남미의 고대문명들은 실존했던 역사였고 그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남은 한 끊어졌다고 할 수 없는 거였다. 마야어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토착어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니... 결국 역사연구와 언어연구 또한 인기와 비인기 혹은 주류와 비주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역사와 언어에는 학자들이 굳이 심도있게 연구하지 않아온 게 아닐까. 서양역사와 연결지어진 부분이나 그들 역사에 없던 고대의 시간들에 대한 호기심 약간 이거나 서양역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정도로만 연구해온 것이 아닐까. 그래놓고 사라진 문명이니 야만적 문명이니 폄하해온 것이 아닐까.

구대륙의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원주민들에게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수치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죽었다는 점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유럽인이 최초로 정복한 카리브해의 섬들에는 현재까지 원주민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트리니다드, 토바고 같은 나라들이 바로 여기 해당되는데, 전염병도 원인이었지만, 초기 에스빠냐 정복자들의 살인과 학대, 무차별적인 노동 착취 역시 원인이었다. 전염병이 있기도 전에 상당수 원주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을 가장 중요한 원주민 사망 원인으로 볼 수 있으나 모든 책임을 전염병으로만 돌리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여기에는 유럽인들이 식민지 건설의 잔호감을 다소 완화하려는 기재가 다분하다고도 볼 수 있다. (p. 104)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몰살은 유럽인이 방문함으로써 함께 간 병원균들 때문이라고 전염병 때문이라고 알려진 것은 역사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병에 걸려 죽기 전에 군인의 칼에 신부의 종교재판에 농장의 노동 착취에 이미 많은 목숨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그 희생들을 전염병으로 면피해왔던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란다는 유까딴의 실세를 쥐고 있던 몬떼호뿐만 아니라 그의 일가친척과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몬떼호를 언급할 때는 항상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저술의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p. 111)

16세기가 면죄부가 판을 치고,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시대였음을 생각해보자. 특히 에스빠냐는 이러한 종교개혁을 거부하고 가톨릭을 끝까지 고집했던 몇 안 되는 유럽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한편 원주민 선교를 우선순위로 둔 가톨릭 사제들은 선교를 거부하거나 비협조적인 원주민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죽이는 등의 처벌이 극히 당연하 처사라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식민지 체제가 안정되면서부터 많은 원주민이 종교재판으로 처형되었다. 란다는 그 책임의 한가운데 있었다. (p. 147)

저자인 란다가 이 글을 쓴 목적이 여러 가지가 있음을 이미 옮긴이의 머리말에서 밝힌 바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유까딴에 있는 선교사들이 어려운 상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에스빠냐의 정부와 왕, 기독교 전파를 위하여 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에스빠냐의 왕과 고위 관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란다는 본인에게 불리한 이야기나 그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 등을 생략하거나 미화시켜서 이 글을 기록하였다. (p. 155)

이 책의 원제에 '보고서'라는 단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역자가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란다는 유까딴에 대한 기록을 순수한 문명관찰서로 남긴 것이 아니었다. 란다의 선교활동에 이어지는 잔혹한 종교재판들로 인해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되어 참석해야 할 만큼 내부고발적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재판에서 본인의 활동에 대한 논리적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었다. 그리고 란다는 그 재판에서 승리하여 당당히 유까딴으로 되돌아왔다.

란다는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를 가장 극단적으로 탄압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가 여러 지역에서 종교재판을 열어 원주민들을 우상숭배의 죄목으로 죽이고, 원주민 종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모든 조각품과 그림, 책 등을 불살라버린 사실을 여러 사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마니와 소뚜따, 과테말라 등에서 집행한 종교재판의 잔혹함은 매우 악명 높다. (p. 338)

나는 성경을 읽은 적이 없어 소돔에 대한 에피소드를 잘 모르지만 선교사들에게 소돔은 최대의 무기인것 같다. '란다는 자신처럼 원주민들을 강경하게 응징하지 않았다면 소돔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신념을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합리화하였다. (중략) 란다가 이 책을 집필한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으로 고발을 당하자 이를 소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그가 원주민들을 강경하게 처벌한 것을 합리화하려고 이러한 내용의 성격구절을 강조한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p. 288)' 란다는 수완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권력층과 친하게 지내며 자신의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선교사들이 다 란다같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 그때 그시절에 그곳에 란다가 선교사로 가게 된 것이 참 안타깝기 그지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란다의 기록을 통해 그 역사를 알아가야 한다니 더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종교를 중시하더라도 과거역사에 대한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다가 그리스나 로마에서 선교했다면 우상들이라며 자신들 조상의 조각이나 그림, 책들도 모두 불살라버렸을까...

그러니 너, 주님의 사제여, 악마를 섬기는 한심한 제사장들이 하는 짓을 똑똑히 보았느냐, (중략) 만일 네가 여기서 잘못된 점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며, 스스로가 지고한 주님의 사제라는 것을 자각하여야 한다. 사제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인간보다 더한 천사의 깨끗함으로 청렴하고 신중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p. 363)

잔혹한 란다는 스스로에게 신의 목소리로 당부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이 천사의 삶보다 더 훌륭하다며 자부심과 긍지를 뿜뿜 드러낸다. 읽을수록 기가차지만 역자의 상세한 설명덕분에 그나마 객관적으로 이해해가며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책을 내주신 역자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인디오들이 에스빠냐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학대를 받고 괴롭힘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디오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고 노예로 만들며, 악마들에게 인신공양 하는 것은 더욱 모진 모욕과 학대이기 때문이다. (중략)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당신의 몫으로 신에게 청하여 나의 소박한 봉사를 받아 주어 그러한 잘못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그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비호하는 것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주십시오. (p. 424)

끝까지 란다는 너무나 당당했으며 이 책의 집필의도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란다도 흘리듯 적어놓았다. 자신들이 오기전에도 유까딴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노라고.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 원주민들은 (여러)마을에 함께 모여 살았다. 행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땅은 깨끗했으며, 잡목들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좋은 나무도 많이 심겨 있었다. (p. 135)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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