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세계사 세트 - 전3권 - 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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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은 어떻게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는가

프랑스 혁명기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통찰한 걸작

"나폴레옹 전쟁은 전 지구적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세계사>라는 책이 나왔을 때 몹시 탐이 났더랬다. 서양고전을 읽으며 세계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역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프레임을 알려주곤 했기에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 수준의 근대사가 또 어떻게 새롭게 깨우쳐질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었다. 처음에 나온 합본 양장의 두께가 어마어마한 벽돌이라 그 아우라에 소장욕이 뿜뿜하면서도 섣불리 손내밀지 못하다가 분권세트로 다시 나왔다기에 가독성 면에서는 좀 낫지 않을까 싶어 와락 도전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멋진 책이었다!

분권세트는 총 3권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1, 2권과 부록이 한 세트이다. 부록은 주석과 참고문헌 그리고 색인만 싣고 있는데도 300페이지가 넘는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문헌과 꼼꼼한 주석을 덧붙였는지 그 분량만으로도 확인이 되는 듯 싶다. 본문에 해당하는 1권과 2권의 분량은 1천 페이지가 넘는다. 한권씩만 봐도 5~600페이지 책이니 이것만도 벽돌책이다. 하지만 은근 긴박감 있게 읽혀서 막상 시작하고 나면 예상보다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역시 제대로 된 역사책은 소설 못지 않게 재미가 있다. ㅎㅎㅎ

나폴레옹 전쟁은 그 규모와 충격에서 다른 모든 유럽 분쟁을 압도한 전쟁이고, 19세기 당대인들에게는 '대전쟁 Great War'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 내부의 경쟁관계로 촉발되긴 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은 식민지와 무력을 차지하기 위한 전 세계적 투쟁으로 이어졌고, 규모와 범위, 강도 면에서 역사상 최대의 분쟁 중 하나를 대표한다. 프랑스와 헤게모니를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와중에 나폴레옹은 간접적으로 남아메리카 독립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고, 중동 지역을 재편했으며, 영국의 제국적 야심을 강화하고, 미국 세력의 부상에 기여했다. (p. 11~12) 나의 의도는 1792년과 1815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된 채 펼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 진동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반향을 낳았다는 사실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p. 17)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러 지역은 저마다의 발전 경로를 밟게 되었ㄷ고, 전쟁이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 자체는 대체로 유럽의 사안으로 남아서 외부 세계에 제한된 영향만 미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야심과 그 야심을 좌절시키려는 유럽의 시도들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저 멀리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게 되었다. (p. 19) -서문 中-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나의 상식 수준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혼돈의 시대에 불세출의 인물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황제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가 유배당하는, 그러니까 지극히 나폴레옹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사건으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전쟁에 한 개인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그 전쟁을 나폴레옹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에 국한시키는 경향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전쟁의 범위를 세계사적으로 아니 전 지구적 범위로 넓혀 차근차근 논증해나간다. 그리고 그 논증은 성공한다.

이 책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시작부터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의 집권까지의 혁명기를 개관한다. 이 부분은 추후 사건들에 대한 배경을 담고 있는데, 선행하는 10년간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러 사건들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시간 순서대로 또 지리적으로 구성했다. 이 부분은 1801~1802년 동안 유럽의 일시적 평화로 시작하여, 혁명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획득한 것을 공고히 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들과 그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살펴본다. 8장과 9장은 종국적으로는 나머지 유럽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게 될 갈등으로 터져나오는 프랑스-영국의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하의 장들에서는 서유럽과 중유럽에 맞춰진 전통적인 서사에서 초점을 옮겨 스칸디나비아아와 발칸반도, 이집트, 이란, 중국, 일본, 남북아메리카대륙과 같은 다른 분쟁 지역들을 살펴보고, 나폴레옹 전쟁이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했는지를 실증한다. 세번째는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을 추적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나폴레옹 전쟁은 아시아에서는 거의 해소되었으므로 서사의 초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나폴레옹의 패배와 빈 회의의 소집으로 막을 내린다. 결론에서는 전쟁 이후의 세계를 폭넓게 둘러본다. (p. 19~20)-서문 中-

서문부터 굉장히 논리적이었다. 서문에서 이미 이 책의 대강을 개괄할 수 있으며 마치 핵심요약만 쏙 뽑아놓은 듯 해서 결론까지 다 알게 된 마당에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론을 안다고 해서 그 과정을 모른다면 어찌 그 결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내용들은 다 그 과정 속에 있다. 엔딩을 다 아는 드라마일지라도 굳이 한편한편 다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한편한편에 드러나는 사건들과 인물의 심리변화를 보는 것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러하다. 결론은 서문에서 알고 시작하지만 그 결론이 어떻게 추출된건지 알아나가는 과정은 굉장히 탐색적이고 흥미롭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나폴레옹 전쟁'을 나폴레옹 개인에 대한 위인전처럼 풀어내지 않고 세계사적 프레임으로 그 전쟁의 전후과정을 살펴본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사실 나폴레옹 개인은 그닥 두드러지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과 앞뒤의 맥락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읽을수록 이쪽저쪽 입장이 다 이해되면서 이 세계사적 전쟁이 새롭게 인식되어져 갔다. 훌륭한 책이다.

프랑스 혁명의 기원을 둘러싼 논의에는 하나의 역설이 자리잡고 있다. 혁명의 참여자들과 후대의 평자들은 혁명을 전 지구적 사건으로 인식했지만 그 가운데 거의 누구도 혁명의 지구적 원인들을 탐색하지는 않았다. (p. 32)

프랑스 혁명은 시민혁명의 기원이다. 그 이후로 여기저기서 시민혁명들이 뒤따랐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정신과 의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전에 전쟁이 있었다. 전쟁 전에 무역분쟁이 있었다. 혁명이든 전쟁이든 어쨌든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그 시작에는 유럽의 아귀다툼(p. 57)이 있었다.

혁명적 변화를 향한 탐구는 복잡하게 꼬인 경로로 드러났고, 흔히 자유, 평등, 우애가 아니라 그보다는 환멸과 억압, 소요를 낳았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밟은 길은 구체제에서보다 더 중앙집권적인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진 한편, 공포정치는 부르봉 왕가의 이른바 절대왕정을 크게 능가하며 국가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주었다. 전쟁은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 역사가 프랑수아 피레는 "혁명이 전쟁을 수행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전쟁이 혁명을 수행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p. 194)

나폴레옹 전쟁의 출발점은 1803년 5월 아미앵 강화조약의 붕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혁명의 시대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위협했고 장기간에 걸친 프랑스와 영국 간 경쟁관계는 나폴레옹 전쟁의 결정적 배경이었다. 10여년간의 혁명의 시대에 프랑스 시민들은 정변에 무감해져갔고 질서와 안정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때 군사적 성공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나폴레옹 장군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나폴레옹은 군사지도자로서의 현명함에 더불어 정치적 책략가로서도 상당한 능력자였다.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기 위해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민 다수가 새로운 국가수반에게 허락한 무비판적인 승인을 활용하는 다양한 전략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합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최초의 정치지도자였고, 그런 관행은 20세기에 어디서나 만연하게 된다. (p. 204)

보나파르트에게 책임을 씌우는 사람들은 프랑스의 이해관계는 부자연스럽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반면, 영국이나 영국의 대륙 맹방들의 이해관계는 자연스럽고 훌륭하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p. 304)

나폴레옹은 영국을 혐오했다고 하지만 개인적 혐오로 그 엄청난 전쟁을 일으킬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데 논리적이었다. 구체제는 무너져가고 신체제는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저마다 패권국가로 발돋움하려고 머리싸움하던 시대였다. 그 주인공이 프랑스와 영국으로 좁혀졌을 뿐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두 나라는 프랑스는 대륙에서 영국은 바다에서 힘을 키웠다.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구체제의 패권국가들이 있었다. 그 맹방들의 계산에 따라 세계사의 흐름도 바뀌곤 했다.

혹자들이 그런 것처럼 유럽 내 세력 균형을 둘러싼 영국-프랑스의 경쟁관계가 이 전쟁을 촉발하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일축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듯하다.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관련이 있었다. 양국의 갈등은 두 제국주의 간의 대립, 각자가 국제적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조종함으로써 국가 이익을 수호하고자 하면서 야기된 갈등이었다. (p. 314)

그래서 저자는 프랑스 대 영국의 전쟁을 코끼리 대 고래 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쟁은 두 나라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 편에 누가 붙느냐에 따라 상황은 수시로 변했다. 문득 전래동화 한편이 생각난다. 동물들간의 줄다리기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육지동물들이 허리에 허리를 잡고 바다동물들이 꼬리에꼬리를 물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동물들이 하나하나 늘어가던 이야기였는데... 결과가 어찌됐더라는 기억이 안난다. ㅋ 여하튼, 이 동화와 비슷한 상황이었달까. 누가누가 편먹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졌기에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의 맹방을 지키거나 추가하기 위해 끊임없는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의 유럽지도가 자리잡아가게 되는데 독일과 이탈리아가 특히 그러했다. 이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는 수백개의 퍼즐조각같은 상태였다.

대륙 봉쇄 체제는 그러므로 상호 연관된 세 부분, 즉 영국 상품에 대한 봉쇄를 통해 영국의 경제력을 위축시키기 위한 군사적 승리의 활용, 대륙에서 경제 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경제 권역의 형성, 대륙에서 프랑스 헤게모니의 공고화로 구성되어 있었다. (p. 415) 1807년이 저물 무렵 대륙 봉쇄 체제의 기본적인 윤곽이 잡혔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착수한 가장 중요한 정책 이니셔티브였다. (p. 416) 나폴레옹의 유럽 제국이라는 비전에서 대륙 봉쇄 체제의 중요성과 프랑스 제국의 궁극적 붕괴에서 그 체제가 한 역할은 도저히 과소평가할 수 없다. 비록 나폴레옹 제국은 일시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언제나 대륙에 대한 정치적 비전을 품고 있었다. (p. 417)

당시는 혁명의 시대, 이 혁명에는 시민혁명도 있지만 산업혁명도 있었고 과학혁명도 있었다. 봉건체제는 무너졌고 다양한 산업과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었다. 무역은 각국의 주요 수입원으로 자리잡아 갔고 해외 식민지로 인해 그 범위는 그야말로 전 지구적이 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대륙의 장군, 대륙봉쇄체제가 영국산업에 타격을 주고 대륙산업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으로 유럽내에 산업 공동화를 일으켰다. 그에 비해 영국의 해외무역은 경쟁자 없이 독점적으로 세를 키워나갔다. 이익에 따라 오늘의 맹방이 내일의 적국이 될 수 있는 시대였다.

프랑스 역사학자 루이 베르제롱이 평갛나 대로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은 시대에 뒤처지기도 하고 앞서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계몽 전제군주이자 근대 국가의 선지자였다" 유럽에게는 나폴레옹 정권이 근대 세계에 대한 신선한 관점이자 그 자원과 국고를 고갈시키는 권력의 행위를 의미했다. (p. 503) 한 국민의 운명이란 그 국민의 정치이며, 그 정치들이란 나폴레옹의 정치, 즉 전쟁과 정복의 정치, 착취와 억압의 정치, 제국주의와 개혁의 정치였다. 핵심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폴레옹 제국은 어떤 목적들에 복무했는가? (p. 504)

나폴레옹의 정치와 그가 일으킨 전쟁들을 중심으로 보면 나폴레옹 개인적 야욕으로 오독할 수도 있을 시대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주변 상황들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나폴레옹 체제'는 프랑스가 지배하는 영토들에서 봉건제의 잔재를 폐지하고 혁명의 원칙들을 주장함으로써 구체제 사회들에 대한 명확한 도전을 대변했다. (p. 507)'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황제가 되었지만 로마제국처럼 유럽대륙의 황제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동맹을 맺고 정복한 지역에는 프랑스 시민혁명의 자유와 정치체제가 안내되었다. 억압의 지배속에 자유와 평등을 일깨우다니 모순으로 보이지만 그게 가능했던 시대가 나폴레옹의 시대였다.

나폴레옹 정권은 결코 하나의 '유럽적' 정체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프랑스적인 그 본질을 초월하지도 않았다 결국에 제국의 생존 자체가 프랑스 무력의 지속적인 우위에 의존했지 제국 지배의 대중적 지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초월적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것은 동등한 국가들로 구성된 연방의 이상이 아니라 보편 제국의 이상, 그 정신에서 유럽연합보다는 샤를마뉴 제국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p. 510)

당대 하도 잦은 연맹과 맹방의 관계 속에 혹자는 지금의 UN의 기초가 닦이지 않았나 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저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유럽연합이 아니라 프랑스가 주축이 된 제국에 가까웠다. 나폴레옹은 급진적이었고 점령지에 대의제라던가 헌법 그리고 시민의 자유 등을 소개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물질적 자원이었다. 문제는 이 물질적 자원을 갈구한 나라가 프랑스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말이다.

3차, 4차 대불동맹전쟁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격파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전통적인 서사가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건이었다. 중유럽에 미친 심대한 영향과 더불어 이 무력 분쟁들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광범위한 파문을 불러일으키며 발트 지역에서 세력 균형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p. 601) 저강도 영국-러시아 전쟁-한 러시아 역사학자가 인상적으로 표현한 대로 '연기 없는 전쟁'-이 그 뒤로도 오래 이어졌다. 이 갈등은 나폴레옹 전쟁의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 잊히는 경향이 있는데, 대체로 그것이 대규모 전투로 이어지지 않았고 주로 지중해와 바렌츠해, 발트해에서 러시아와 영국 전함 간 국지적인 교전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기가 났든 안 났든 그것은 나폴레옹 전쟁의 더 큰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p. 638) 오스만 제국은 15세기와 16세기에 획득한 영토들에 다른 제국적 경쟁자들이 꾸준히 침범해오면서 커져가는 위협에 직면했다. '유럽의 병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유럽 내 세력 균형 문제와 단단히 묶여 있었다. (p. 672)

영-프 간의 갈등은 두 제국만의 문제일 수 없었다. 타국과 유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고 그 범위는 중유럽 북유럽 오스만제국을 넘어 이란과 인도 그리고 아시아 아메리카까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이 연쇄적 연결고리들을 보면서 나폴레옹 전쟁이 왜 Great War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할 때 유럽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전쟁에 더 잘 동원되었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인정사정없었다. 유럽의 좁은 지리적 한계로 말미암아 서로 경합하는 정치 단위들은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 대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혁신하고 경쟁자들과 기술적인 대등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질적인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더 효율적인 재정과 과세 방식이 등장했다. (p. 831)

저자는 인도같은 커다란 대륙이 어쩌다 영국이이라는 작은 섬나라에 귀속될 수 있었을까 자문자답한다. '아시아에서 인도의 무굴 제국 같은 대제국들은 적응을 위한 군사적 압박을 덜 느꼈기에 근대화에 계속 무관심해도 되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p. 831)' 이러한 상황은 중국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도처럼 중국도 해외무역은 필요치 않았다. 다 자체적으로 수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유럽은 구하고자 하는게 많았다. 끝없이 갈구하고 욕망하며 찾아해맸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이 익숙했다. 우물안 개구리는 우물벽을 허물고 들어온 악어에게 먹히고 물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맑은 우물은 사라지고 탁한 늪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나폴레옹 전쟁의 지구적 파급효과를 잘 드러낸다. 나폴레옹 전쟁의 전통적인 서사에서 대체로 간과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에스파냐 제국의 붕괴는 유럽의 정치적 격랑의 직접적ㅇ니 결과였다. 동방문제가 오스만 제국의 운명이라는 핵심 문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서방문제' 즉 에스파냐와 그 제국의 영토를 중심으로 한 문제가 있었다. (p. 881)

그리고 미국이 있었다. 사실 프랑스 혁명도 미국의 독립전쟁에 자금을 댄 왕실의 재정파탄으로 인해 발발하게 된 건데 나폴레옹 전쟁이 미국의 무역과 영토확장까지 넓히게 해준 것을 보면 미국은 적어도 역사에서 만큼은 프랑스에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현실은 미-프 가 아니라 미-영 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러시아가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게 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1812년 여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결정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가장 커다란 시도였다.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프랑스 황제가 얻고자 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p. 925)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흔히 '잊힌 분쟁'이라는 딱지가 붙은 미국의 캐나다 공격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중략) 북아메리카의 사건들은 오랫동안 유럽의 거대한 투쟁들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들은 북아메리카의 운명에 중대한 의미를 띠었고 나폴레옹 전쟁에도 직접적인 파장을 가져왔다. (p. 949)

책을 읽다보면 종종 '전통적인 서사에서 간과되는' 이라든가 '잊혀진' 등의 수식어가 나오곤 하는데 이러한 수식어 뒤에 등장하는 실체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역사는 폭넓게 볼 수록 객관적일 수 있는 것 같다. 일방적인 사건도 일방적인 역사도 없다.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한쪽에서 보낸 영향이 다른 쪽에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 다시 새로운영향력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은 역사의 연결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듯 했다. 끝난게 끝난것도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패배했어도 프랑스는 건재했고 유럽 각국의 정치싸움도 여전했다.

빈 회의는 유럽 역사상 가장 쟁쟁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순간이었다. 그 독특한 성격은 패전국과의 강화는 이미 파리 조약에서 이루어졌고, 회의는 특정 무력 분쟁의 해소만이 아니라 유럽 전반의 평화정착을 다루기 위해 개최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빈 회의는 엄밀하게 말해서 대형 회의가 전혀 아니었다. 각국 대표들은 총회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전원 총회 대신 최강대국을 대표하는 일단의 대표들은 오스트리아 수도의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사교계로부터 떨어져 무대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황제와 국왕, 각종 군주들이 무수한 궁정인들과 쾌락을 좇는 이들을 대동하고 빈에 몰려왔고, 빈 궁정은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반쯤은 파산 상태로 전쟁에서 빠져나왔음에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는 이 모임을 주최하는 데 국고의 남은 절반을 걸었다. (p. 1035)

세계2차대전 후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와 중동에 자를 대고 국경을 그은 줄 알았더니 그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다. 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도착해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며 깃발 꼽는데로 여기는 내땅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럽대륙에서 하나의 제국은 쪼개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거기 살고 있는 일반 시민들과 관계없이 여기는 내땅 하는 식으로 지도자들 마음데로 영역이 나뉘어졌다. 그러한 유럽식 사고방식과 크게 변하지 않은 영토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우리네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평행 우주의 역사를 상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도 나폴레옹 전쟁이 다르게 끝났다면 유럽이 더 좋아졌을까 하는 억측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나폴레옹의 정복은 물론 착취와 더불어 지독한 탄압을 가져왔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혁명의 이상들을 토대로 수립된 각종 개혁 조치들도 함께 가져왔다. 그들은 법적 평등과 개인적 자유, 재산권의 불가침성을 약속했다. 종교적 관용을 선포하고 행정과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도량형을 표준화했다. 그의 결점들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리고 얼마나 많았든지 간에 나폴레옹은 유럽 대다수의 독재적인 통치자들보다 더 계몽된 인물이었고, 그의 패배는 근대 사회를 떠받치는 많은 이상들의 후퇴를 의미했다. (p. 1073)

'나폴레옹 전쟁은 어쩌면 종교개혁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사회 변화의 가장 강력한 동인이었을 것이다. (p. 1094)' 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p. 1119)' 라는 저자의 표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혁명의 시대에 나폴레옹 전쟁의 다른 결말을 상상하는 것도 의미있을 테지만 혁명의 시대에 나폴레옹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과연 세계사의 흐름이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까 싶다. 자본이 탄생하고 있었고 무역을 통한 이익이 중심이 되고 있던 시대였다. 이익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갈등 혹은 전쟁이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 (p. 1120)

역시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사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 나폴레옹 전쟁사가 왜 이렇게 벽돌책이 되었나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읽고나니 이렇게 세세히 풀어놨는데도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방면의 자료와 다각도의 관점에서 18~19세기의 전 세계를 전 지구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책을 완독했다는 개인적 뿌듯함으로도 오래 기억될 책일 것 같다. 훌륭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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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데이브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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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처 전하지 못한 메시지 한 장만 남긴 채.

해나는 오언과 결혼한지 2년차다. 열여섯 살인 오언의 딸 베일리와는 아직 서먹한 관계이지만 해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베일리를 이해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오언은 딸바보이고 해나를 사랑한다. 해나는 그런 오언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여느날과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오언은 출근했고 해나는 베일리의 식사를 준비중이었으며 베일리는 해나를 무시하기위해 제 방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던, 그런 평상시와 똑같은 아침이었다. 그런데 낯선 아이가 심부름을 왔다며 오언이 남긴 종이를 건네주고 갔다.

아직은 종이를 펼치지 않은 상태였다. 조용한 집 안에 잠시 서 있는 동안, 갑자기 종이를 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에 적힌 글을 읽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종이는 그냥 장난이고 실수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어도 되는 순간까지, 하지만 사실은 이제 더는 멈출 수 없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까지, 그저 이 종이를 손에 쥐고만 있고 싶었다.

마침내 나는 종이를 펼쳤다.

짧은 글이 보였다. 무슨 뜻인지 모를 한 줄짜리 글이었다.

종이에는 "당신이 보호해줘"라고 적혀 있었다. (p. 18~19)

남편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대표가 횡령 및 사기죄로 기소될 거라는. 조사 대상자의 범위가 넓혀지고 있다는.

학교에서 돌아온 베일리는 멍한 표정으로 커다란 더플백을 해나에게 건넸다. 자신의 사물함에 아빠의 쪽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고. 그 가방에는 100달러짜리 지폐 수백 다발이 들어 있었다.

오언은 기술개발 책임자였고 회사대표가 가장 가까운 임원이었다. 자신에게 수사관들의 손길이 닿기 직전 오언은 잠적했다.

해나에게 법원집행관과 FBI수사관이 연이어 찾아왔고 절친인 기자 줄스는 오언과의 마지막 통화내용을 들려주었다.

해나는 휘몰아치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화가 났으며 불안했지만 오언이 남긴 쪽지의 의미는 분명히 깨달았다.

오언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이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떠난 오언에게는 정말 맹렬하게 화가 나다. 하지만 그가 신경 쓴다는 걸 알았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오언이 베일리를 사랑한다는 걸 잘 알았다. 오언이 떠난다면, 그건 베일리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떠나야만 해서 떠난 것이다. 그가 떠난다면, 그것만이 베일리를 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베일리를 보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일은 모두 베일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 말고 나머지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p. 67)

해나는 자신이 아는 오언을 믿었다. 베일리를 사랑하는 오언을 믿었다. 자신을 찾아와 오언에 대해 하는 말들을 의심했다. 오언을 둘러싼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해갈 수록 미심쩍은 부분 투성이였다. 해나는 그저 가만히 주입되는 정보들을 수긍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알아내고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녀 또한 베일리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지금 베일리의 보호자는 해나 한 사람 뿐이었다. 오언은 그걸 알고 그걸 믿고 사라진 것이었다. 왜일까? 왜 떠났을까?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두 사람이 소살리토에 오기 전까지 당신이 말해준 남편의 정보와 일치하는 자료는 단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어. 당신 남편은 다른 이름으로 살았거나, 지금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당신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해.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 거지"

"무엇 때문에?" (p. 195)

오언의 주변조사를 할수록 오언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말했던 고향, 학교, 가족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언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함께 살면서 해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오언이 말한 과거의 추억들이 있었다. 해나는 그 기억들에 남겨진 단서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오언의 과거를 추적해 간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건 베일리의 기억이었다. 해나를 만나기 전 오언과 베일리만 있던 시절의 오언에 대한 기억. 오언이 말했던 정보들은 모두 거짓이었지만 오언의 말과 행동 무엇보다도 마음은 진실이었다. 그것을 믿기에 해나는 진짜 오언을 알아야 했다. 베일리를 위해서라도.

나는 내가 충분히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한다면 베일리가 나에게 의지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인에게 의지해도 된다는 사실은 그런 방식으로는 배울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모두가 너무나 피곤해서 다정하게 대할 수도 없고, 너무나도 피곤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노력할 기력도 없을 때다. 그때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서야 그 사람을 의지해도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p. 215)

아빠가 사라지고 아빠가 말했던 과거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은 베일리에게도 충격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자신에 대한 정보들이 거짓이라는 의미였으니까. 사춘기 소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빠가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곁에는 해나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의 핵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언은 너무나도 두려운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오언은 살아오는 내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부터 베일리를 지키는데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있었다.

"그걸 알아내면 지금 오언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겠지" (p. 220)

애초에 베일리를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할 수 있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 함께 있었고, 우리 둘 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우리 둘 다 오언을 찾고 싶었고, 오언이 무엇을 숨기고 있건 간에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이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p. 221)

베일리의 기억과 오언이 했던 말들을 바탕으로 오언의 고향을 찾은 두 사람은 오언에 대해 조사해 나갈수록 더 큰 위험에 다가가고 있는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오언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묵직한 두께의 소설이었지만 시작부터 빨려들어가 휘리릭 읽히는 책이었다.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장면 하나 없는데도 스릴러처럼 긴박함을 느끼며 읽게 되지만 알고보면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극진한 사랑때문에 숨겨야 했고 지켜야 했고 알아야 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제목 때문에 재밌는 기분이 되었다. 원제는 The last hting he told me 로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인데, 한국어판 제목은 <그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 이다. 그러니까 원제는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초점을 두었다면 한국어판은 '말하지 않은 것' 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 관점의 차이가 재미있었다. 소설을 읽는 와중에도 나또한 오언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궁금해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원제대로 라면 오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는 소설인 것이다. 작중 화자인 해나 또한 오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중심에 두고 추적해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해나가 찾아내는 오언의 과거정보를 하나하나 모아가며 읽게 되지 않았나?!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굳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정보에 중점을 두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에 지켜야 하는 것일수도 있는데. 하지만 단단하지 않은 과거에 세워진 현재와 미래는 모래성처럼 부서질 수 있기에 과거를 무시할 순 없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두 가지 관점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킬링타임용으로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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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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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이라는 작품을 통해 애나 번스 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북아일랜드 분쟁을 배경으로 작가만의 독특한 여성서사를 보여주었던 <밀크맨>은 여러면에서 인상적인 작품이었기에 첫 장편 소설이라는 <노 본스>에 관심이 갔다.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받은 가제본은 비록 본문의 50% 정도 분량이었지만 애나 번스 특유의 표현은 여전했다.

첫 페이지의 주석에서 대문자로 시작하는 트러블은 벨파스트 분쟁에 있어 알아두어야 할 단어인 것 같다.

the Troubles -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약30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둘러싼 혼란기. 영국 본토인 북아일래드 내에서 친영국 진영과 친아일랜드 진영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며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3,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트러블이 있을 거야"

"오늘밤에 시작한대. 데리에서는 벌써 시작했고. 엄청 위험해진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우리가 여기 나와서 놀 수가 없다는 말이야" (p. 4)

어린 아이들이 골목에 모여서 놀고 있다. 새로운 소식을 나르며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트러블'에 대해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친구들에게 전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게 정말로 일어날지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다. 그저 평소대로 골목에서 놀 뿐이었다.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와 반겼다. 차와 빵을 대접받고, 차와 케이크, 차와 비스킷, 차와 감자칩, 차와 레모네이드, 차와 담배를 대접받았다. 어딜 가든 차가 나왔다. (p. 17)

제임시가 다음번 파견을 나왔을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제는 영국군이 아도인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어쨌거나 아도인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영국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쓰레기통 뚜껑을 쾅쾅 치고 호루라기를 불고 주먹을 휘둘렀고 밤이면 '살인자아아'하고 부르짖기도 했다. (p. 29)

1969년 영국군이 처음 벨파스트에 도착했을때 사람들은 군인들을 반겼다. 군인들이 순찰할 때면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건네주곤 했다. 하지만 곧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작가는 그저 계속 현재 시점으로 그 순간을 표현할 뿐이다. 긴 시간의 북아일랜드 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긴 시간 동안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은 소설속에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이유는 몰라도 폭력에 또 폭력이 이어지는 장면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1971년이었고 아무 동기도 없어 보이는 범죄가 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시체가 많이 나왔고 일부 신문이 뒤쪽 면에 기사가 부지런히 실렸다. (p. 30)

"아니 안돼. 가라. 넌 잉글랜드 놈이잖아. 이제 오지 마" (p. 40)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동기 없는 범죄 가운데 또 하나가 일어났을 뿐. (p. 41)

북아일랜드의 아도인 이라는 마을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톨릭계와 개신교가 길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곳에서는 친척관계일지라도 적일 뿐이었다. 너무 쉽게 목숨이 없어지곤 했지만 마을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모두가 보았어도 영국군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핸래티 선생만큼이나 못생긴데다 병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도 매한가지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다르게 창조하시므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미쳤는데, 방금 일어난 엄청난 시간 낭비가 기가 막히다는 듯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p. 44)

주요 화자는 어밀리아 이다. 어밀리아의 네댓살 시절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어밀리가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한 여자의 인생사로 읽혀지도 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라서 그랬을까? 소설 속엔 제정신인 어른이 단 한명도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학교 선생님은 애들을 때리고 욕하며 머저리 취급하고 부모는 자식을 죽일 만큼 패거나 형제자매사이엔 폭력을 넘어 강간까지 이루어진다. '하지만 엄마는 절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도무지 아무것도 이해를 못한다. 어리석고 늘 딴 데에 정신이 팔려 있고 생각이 없는 족속들이다. 아무것도 모른다. 항상 뭐든 엉뚱하게만 받아들인다. (p. 72)' 도무지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너무나 폭력적인 환경에서 어밀리아만이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하기 까지 할 지경이었다.

언니한테는 그저 재미있는 일이기만 하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는 정말 끔찍한 사람이 있다. 언니하고 나는 세상을 사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언니가 어떤 일들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게 나에게는 놀랍기만 했다. 언니 세계에서는 폭력이 비타민제를 먹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나하고는 정반대였다. (p. 105)

그렇게 어밀리아는 어쨌든 성장했다. 성장할수록 폭력이 너무나 끔찍할 따름이라서 어떻게든 피하며 살고 싶었다. '모두가 다 그쪽 성향인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서든 당연히 그랬다. 소요에 참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있었다. 종교적이거나 뭔가 영혼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 그러니까 사이에 낀 사람들, IRA는 아니어도 이런 시기에는 늘 동참하는 특수한 동조자들도 있어서, 이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나는 안한다고 말하기는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p. 111)' 어밀리아는 그 어느 쪽에도 서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한 태도는 공격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었다. 개인적 감정이 안 좋아도 대의적으로는 다른 명분을 내세우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였다.

"무슨 일이야?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대?" 하며 숙덕거렸다. 자기들끼리 사라진 아이들의 수와 정체를 헤아리면서 죽은 소년의 미스터리를 순식간에 풀었다. 당연히 목격자는 한명도 없었고, 경찰이 사람들을 붙들고 신문을 했지만 대개, 늘 그러듯이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p. 138)

'결투나 개인적 원한에 대해서는 아무 일 않고 묻어두는 게 최선이었다. (p. 146)' 딱히 큰 사건이 없어도 사람들은 수시로 죽어나갔다. 하다못해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으로도 죽었고 소년들의 장난에도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영국군 이나 경찰 모르게 폭력을 묻고 장례식을 치를 뿐이었다.

다들 첨한 일이다, 끔찍한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영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다음의, 새로운, 과격한 죽음에 묻혔다. (p. 147)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일상에서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수 없이 마주치더라도 따로 떨어져 서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갈등시키고 폭력을 부르게 하는지는 알수 없다. 그저 폭력들이 나열 또 나열되는 소설을 읽으면서, 비록 절반을 읽었을 뿐이지만 나머지 뒷부분의 절반은 점점더 증폭된 폭력이 점점더 잔혹한 죽음이 나오리라는 것이 예상되는 바 그저 마음이 저릿해져옴을 참을 뿐이었다.

<노 본스>는 <밀크맨>으로 2018년 부커상을 수상한 애나 번스의 첫 번째 소설이다. (중략) 이 소설은 1969년 영국인이 처음 북아일랜드에 왔을 때부터 1994년 정전 선언 때까지, 벨파스트 안의 아도인이라는 작은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을 한 장면 한 장면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형식으로 한줄기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형태가 아니라 분절된 단편들로 이루어졌다. (p. 236)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는 보통 남자들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주도하는 군사적 움직임을 따라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노 본스>는 어밀리아를 비롯해 가장 약한 존재들이 폭력의 무게를 가장 무겁게 짊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략) <노 본스>는 17년 뒤에 <밀크맨>이라는 독창적 문체와 강력한 목소리의 완성도 높은 소설로 재탄생할 토대와 씨앗을 고스란히 갖춘 소설이다. '노 본스'(No Bones)라는 원제를, '본'(Bone)이 소설에서 여러가지 중의적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그대로 음차해서 제목으로 삼았다. 소설에서 '본'은 아도인에 있는 어떤 장소의 이름이기도 하고, 여러차례 등장하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라는 뜻의 숙어 'no bones about it'에서 가져온 말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 '뼈'(bone)는 이 소설에서 여자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앙상한 몸, 욕구도 희망도 없는 몸, 섹슈얼리티가 거세된 몸을 뜻하기도 한다. (p. 238~239) -옮긴이의 말 중-

가제본에서 소설은 비록 원문이 절반 정도만 실렸으나 '옮긴이의 말'은 전문이 실린 듯 하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소설의 뒷부분도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어밀리아는 거식증이 걸릴 정도로 자신의 신체적 상태를 통해 폭력을 상징했는데 후반부에 가서는 정신적 상태마저 무너지는 것 같다. 그럴만한 시대였을 것 같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시대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었다.

ps. 뒷표지의 구병모 작가의 추천사가 너무 훌륭하다. 소설을 잘 쓰는 작가는 추천사도 이렇게 잘 쓰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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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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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없이 당도하는 불안에 ___ 대비하는

조용히 무너져가는 세계에 대한 ___ 상상

'녹색갈증' 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환경에 대한 소설인가 지구재난SF인가 뭐 그런 예상을 했었다. 썩 멋진 제목으로 보여서 책에 대한 궁금증이 더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났는데도 왜 제목이 '녹색갈증'인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검색해보니, 헐, '녹색갈증' 이라는 전문용어가 있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감정으로, 미국의 생물학 박사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주장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을 말한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본능이라... 그래서 소설속에서 여주는 그토록 '산'을 이야기했던 것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별 탈 없이 재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바라는 바도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음을 되새겼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다시금 윤조를 생각하지 않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의 사랑 윤조. 너는 나를 흥미진진하고 두근거리게 만들지만 사랑은 언제나 나를 망쳐왔다. 나는 오랫동안 문득문득 윤조를 불러내고 다시 없애버리는 일에 시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윤조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에 몰두했다. 최대한 윤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건 생각보다 쉬웠다. (p. 11~12)

프롤로그 中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13번째 작품인 이 책은 역시나 세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 <프롤로그> 가 있다. <프롤로그>도 하나의 단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뒤에 이어지는 세편의 작품은 제목은 각각이지만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서술로 <프롤로그>가 소설속의 소설임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프롤로그>가 이 책을 대표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윤조'라는 인물을 '산'에 대입시켰을 때 등식이 성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먹어봐야 아는 사람' 중에 '똥'역할이었다. 사람들은 어딘가 독특한 기척을 맡고 내게 다가왔다. 특별한 능력도 매력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망설임 없이 떠났다. 그런 경험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나는 스스로 특별한 축이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사실은 별게 아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하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으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만은 잘해내고 싶었으나 마음 먹은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창 밖의 날씨가 바뀌었다. 특별한 사람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범한 줄 알았으나 이상한 사람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서처럼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어 윤조야. 내 업보 였다.

윤조와 항상 붙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던 건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윤조와 함께 있으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 솟은 팔과 등, 그 위로 부는 바람,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 같은 게. 윤조만 바라보는 동안 가족, 다른 친구 등 인간관계는 단절되었다. 성적도 살아가는 모양도 엉망이었다. 윤조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거워서 내게 미래라는 시간이 있다는 걸 잊어 버렸다. (p. 13)

나는 훌륭하게 살 생각은 없었지만,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살고 싶었다. 윤조와 그냥저냥 지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윤조와 연을 끊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윤조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안하고 지루한 삶이 적성에 맞는 듯 했다. 잊고 있던, 혹은 잊었다고 믿었던 윤조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쯤이었다. (p. 14)

프롤로그 中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소설가 지망생인듯 하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결국 이도저도 아닌 지루한 삶을 살고 있다. '윤조'는 '나'에게 소설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나'의 소설 속 주인공인 '윤조'를 생각하면 신나고 설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삶에는 일상이라는 것이 필요했고 꿈은 밥먹여주지 않으니까 윤조와 이별한다는 것은 글쓰는 것을 접은 것과 같았다. 그렇게 '편안하고 지루한 삶'에서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윤조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글을 쓰고 그 작품이 최고일것만 같던 기분이 어린 시절 꿈이었고 그 꿈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 쳇바퀴돌듯 그저그런 일상을 살아내는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제대로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쓰여진 '나'의 이야기가 프롤로그 뒤에 이어지는 세 편의 이야기들이다. 설탕으로 만든 사람 - 빈뇨 감각 - 뒷장으로부터

땀이 잔뜩 났다. 동시에 소변이 마려웠고 목이 말랐다. 나는 눈을 감고 눈 안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은 곧 바람과 벌레들의 울음, 나뭇잎이 단체로 흔들리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리를 불러들였다. 산으로 가는 법을 알려준 건 윤조였다. 그리고 그 전에는 윤조의 할머니가 윤조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지루한 삶을 견디기 어렵단다" (p. 25)

프롤로그 中

'나'는 생각으로든 실제로든 그래서 '산'에 간다. 동네뒷산 같은 산에 올라가는 것도 등산이고 계절을 느끼러 유명한 산에 가는 것도 등산이다. 등산이라는 활동은 땀이 나고 목이 마르고 숨통이 트이는 그런 것이었다.

윤조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내 마지막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어떻게 결말을 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중략) 나갈 준비를 하면서 소설을 쓰려고 애썼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고 비참한 예감이 들었다.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p. 41)

설탕으로 만든 사람 中

<설탕으로 만든 사람> 에서 '나'는 예전 애인 명을 다시 만나게 되고 '산'에 가게 된다. 명은 '나'가 '윤조'의 이야기를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코로나19이후 국경일처럼 되버린 추모일이었고 사람들은 마스크와 떠난 사람들의 옷가지들을 태웠다. '나'는 명과 [설탕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그림책 이야기를 했다. 야산에서 마스크와 옷가지들을 태우는 연기를 보며 명은 울적해했고 '나'에게 말했다.

너 설탕으로 만든 사람을 녹인다고 했잖아. 왜 녹이려고 했어? 이유 같은 거 없이 그냥 녹이고만 싶은 거잖아. 우리 그래서 헤어졌던 거야. (p. 69)

설탕으로 만든 사람 中

'산'에 다녀온 후 명은 '나'에게 말했다. '네가 설탕으로 만든 사람을 어찌하든지 말든지 이건 기억해야 할 거야. 너도 그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거. 넌 자꾸만 그걸 까먹어. 아니, 자각한 적이 없지. 나는 이제 오지 않을 거야. (p. 73)' '나'는 안다. 이제 명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나'는 일기를 쓰든 소설을 쓰든 무언가를 쓰는 것에 열중했던 때가 있었지만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갈망하고 원하는 것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 (p. 73)' 을 이제는 안다. '나'는 명이 떠난 후 자신이 글을 쓴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나왔던 집으로 돌아간다. 허구의 세계인 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인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집은 고요하고 어떤 의미로는 평온했다. 일정한 균열감과 스트레스가 시야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안개처럼 낮게 깔린 나날이었다. (p. 87)

집에 온 뒤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낮과 밤 상관없이 아무리 소변을 봐도 잔뇨감이 들었고 금방 또 소변이 마려워졌다. 자다 깨고 화장실에 가고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고 물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깨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아무리 물을 덜 먹으려 해도 엄마와 언니를 보면 목과 가슴을 지나 배 깊은 곳까지 찬물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의식적으로 물을 입에 대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p. 88)

빈뇨 감각 中

세 모녀는 한집에 살지만 서로에 대해 알려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가 왜 그토록 자꾸 사랑을 하고 이별한 후 그토록 울고 또 우는지, 언니가 왜 또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지 알수가 없지만 묻지 않는다. '자꾸만 물을 마시게 되는 건 목이 말라서라기보다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웃긴 상황에서 웃음이 나는 것과 비슷했다. 목에 생선가지사 걸리면 밥을 한 숟가락 삼켜 가시를 밀어넣는 것처럼 나는 물과 함께 다른 걸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렇게 믿으니까 정말 목이 마른 것도 같고 물을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p. 98)' 하지만 생선가지가 목에 걸렸을 때 밥 한 숟가락 푹 퍼서 삼킨다고 가시가 삼켜지던가? 빠질듯 말듯 걸린 가시는 계속 따끔거리고 밥을 떠 먹어도 켁켁 거려도 가시는 시원스레 빠지지 않곤 한다. 그러니 '나'가 아무리 물을 마셔도 삼켜지지 않는 것은 아무리 화장실에 가도 잔뇨감이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빈뇨 감각'이 '나'가 살아있다는 증명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겐 '윤조'가 필요하다.

대충 닫아 튕겨져 나온 두 번째 칸을 제대로 닫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익숙한 보석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열어볼까 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슬며시 뚜껑이 열렸다. 윤조가 보석함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당면처럼 쫄깃하고 흐물거리는 형태로 좁아터진 보석함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형상으로 굳어지는 모습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물함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윤조가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마치 내게 꿰어진 실을 감듯이. 나는 그 손가락에 이끌여 윤조 앞에 섰다. (p. 111)

빈뇨 감각 中

프롤로그 에 나왔던 '윤조'가 다시 등장했다. 프롤로그 에서 '윤조'가 '나'에게 보여주려 했던 할머니의 보석함은 '나'가 가지고 있던 보석함과 같은 것이었다. 열고 싶지 않아서 열지 않았던 보석함이 스르르 열리고 '윤조'가 왔다. 프롤로그에서 '나'가 윤조를 다시 만났을 때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던 것처럼 윤조는 '나'를 다시 만나자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마치 내게 꿰어진 실을 감듯이' 갑작스레 끝난 느낌의 프롤로그가 왜 그렇게 끝났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프롤로그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뒷장으로부터. 윤조가 다시 등장한 순간, 이 책의 마지막 작품명은 '뒷장으로부터' 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목이 말랐다.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윤조가 입을 열었다.

생선 가시가 걸린 채로 밥을 넘기면 목에 빵꾸 나. (p. 112)

빈뇨 감각 中

윤조는 '나'의 집에 원래 있던 식구처럼 자연스레 어울린다. 엄마도 언니도 윤조가 늘 거기 있었다는 듯이 군다. '보석함에서 기어 나온 게 윤조가 아니라 나인 것만 같았다. 엄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낮잠을 자는 엄마 곁에는 쪼그려 앉아 책을 읽는 윤조가 있었다. (p. 116) 해는 점점 길어지고 겨울방학을 누리는 아이들만 있는 것처럼 집은 평화로웠다. 어느날 새벽에는 언니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언니와 윤조가 맥주를 마시며 유투브를 보고 있었다. (p. 117)' '나'가 하지 못했던 행동을 윤조는 스스럼 없이 한다. 엄마를 위로하고 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는 그런 윤조를 보며 기이하게 여기지만 엄마와 언니는 오히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본다. 그럴때마다 윤조는 '나'를 보며 웃는다.

너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어?

웃기니까. 설마 내가 너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네가 쓴 소설 성장드라마 아니었잖아.

나는 윤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멀거니 그 애의 못된 표정만 쳐다볼 뿐이었다. 내 손안에서 썬캐처가 엉망으로 꼬여갔다.

나는 네가 설정해놓은 대로 자랐어.

윤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쏘아붙이듯 말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p. 119)

뒷장으로부터 中

'나'는 윤조의 등장과 윤조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윤조가 속한 곳에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해피 엔딩이 이어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 셋이서 한 번도 착착 맞아떨어지게 살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이상해. 윤조 하나 나타났다고 옳다구나 하고 평범하게 돌아가는 게. 엄마는 울지 않고 언니는 혼자 침잠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 나는 괴로울까. 나는 나를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인 걸까. (p. 122)' 윤조는 '나'에게 함정인 것일까? 윤조와 함께 한 이 짧은 며칠이 윤조가 가져온 해피엔딩인 것일까? '아무리 걸어도 위로 향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p. 143) 뒤로 걷기는 쉬웠다. 뒷걸음질 치는 건 내 특기니까. 뒤로. 더 뒤로. (p. 145)' 그렇게 '나'는 프롤로그의 뒷장으로 간다.

윤조는 버릴 것과 남겨둘 것, 버리고 싶으나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버릴 생각 없어. 윤조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상자와 옷가지를 발로 밀면서 걸어왔다. 두 손에는 벽돌만한 크기의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그 안에 무수히 많은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p. 145~146)

뒷장으로부터 中

읽을 수록 황정은 작가 생각이 났다. 빈천하고 지난한 삶임에도 꾸역꾸역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자 윤조 라는 (그림자이던 유령이던) 허구적 인물의 활용과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결말이. 아니나다를까, 세 편의 작품 뒤 이어지는 작가의 <에세이 - 내 어깨 위의 도깨비>라는 글에서 최미래 작가는 황정은 을 언급한다.

나는 어쩌면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순자 씨의 도시락은 황정은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것으로, 소라와 나나와 나기의 뼈를 길러냈다.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건 꽤 오래된 소망이었다. 계란프라이 하나에 양념간장을 뿌리거나, 밥에 오이지만 수북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순자 씨의 도시락. 나는 여전히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p. 154)

에세이 - 내 어깨 위의 도깨비 中

<계속해보겠습니다> 였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느껴졌던 황정은 작가에 대한 오마주 같은 기분이 <계속해보겠습니다> 에서의 순자씨 도시락 때문이었구나... 황정은 작가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것이 <계속해보겠습니다> 였는데... 그런 지난한 삶을 대체 왜 계속해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다가 결국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버리게 된 그 시작점이 된 작품이었는데...

1994년생으로 2019년에 등단한 이 신인작가의 작품은 사실 처음 읽었을 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문학평론가의 작품해설은 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역시 나는 평론가의 해설과는 맞지 않는듯;;;). 그래서 다시 읽으며 정리하다보니 그제야 이 책이 꽤 잘 쓰여진 작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에 대한 감상은 스포일러가 될 까봐 최대한 덜 자세히 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 책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수 밖에 없었다. 자세히 써도 어차피 줄거리가 스포될 것 같진 않은 작품이라서 ㅎ. 여하튼 그래야 이해가 되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그러니 이 작고 얇은 책을 처음 한번 읽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면 다시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처음에는 엮이지 않던 앞뒤가 보이고 엮이며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름 해피엔딩이라 (황정은 작가의 작품들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산'에 가보고 싶어질지도... 녹색갈증을 해소하러...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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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엄마 2022-07-0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고 갑니다~ ^^ 사실 책을 읽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어요 ㅠㅠ LILY 님의 서평을 읽고 나니 다시 책을 찬찬히 뜯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

LILLY 2022-07-02 11:15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북바이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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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만들고 소비하는가?

고전을 만든 시대와 사람에 관한 진실파헤치기

이 책의 제목이 왜 '책의 정신'인지 모르겠다. '정신'이라기 보다는 '사실' 이라던가 '정정'에 가까운 내용들이었다. 부제인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본문의 내용들을 더 잘 표현해주고 있다.

뒷표지 문구를 보면 '고전'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알려주는 책인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본문에 언급되는 책들 중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은 별로 없다.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책들에 대한 기준이 나와 달라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제목에 대한 의아함과 추천문구에 대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들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익숙하게 알려진 책과 그 책의 내용들이 사실은 왜곡되고 편협하고 의도적인 산물이었다는 프레임의 전환은 분명 중요한 포인트였다.

초판과 개정판의 가장 큰 변화는 2013년이 아니라 2022년이라는 출간 시기이다. 기본적인 내용이나 이야기 전개의 틀은 초판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문장을 다시 한번 더 고쳤다. 그 과정에서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한 개정 내용이다. (p. 4)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이다. (p. 5) -들어가는 말 中-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유명한 책이 사실은 그 정도의 가치가 없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치있는 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나를 다른 책들과 비교대조하여 정정해주는 책이다. 따라서 참고자료로서의 다른 책들이 무수히 필요하다. 저자는 '메타북'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쓰며 읽었던 메타북들을 소개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책을 자주 읽는데 한 권의 역사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참고자료들이 무수히 필요하곤 했었기에 '메타북'의 중요성에 백퍼 동의한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책 한권 제대로 읽는 데는 더 많은 메타북들이 필요한 법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지식의 세계에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읽어야 할 책의 세계는 확장되어 간다.

책은 다섯 가지의 주제로 이야기되고 있다.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 '과학혁명과 읽히지 않는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싱거운 논어' '본성과 양육의 갈등' '책의 학살' 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이중에서 '본성과 양육' 의 학자간 입장 차이에 대한 변화를 다룬 내용은 이 책에서 가장 분량이 긴 부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입장정리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짧고 굵게 아~! 하고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이런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평등이라는 낱말에 깊은 의미를 담지 못했을 것이며 정치적 성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전공한 문화사학자인 린 헌트는 그런 공감이 인권을 발명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만들어주었다고 설명한다. 그 배경에 음란한 소설의 독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의 발명에 특별히 영향력을 발퓌했던 세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 그리고 영국작가 리처드슨의 <파멜라> 와 <클라리사 할로> 이다. 세 작품은 모두 서간문으로 쓰인 연애소설이다. (p. 36)

중세말이라고 해야하나 근대초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프랑스대혁명 이전 시기에 사람들은 연애소설에 깊이 공감하며 열광했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계몽학자들도 당대에 인기있던 그런 연애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래서 '포르노소설이 프랑스대혁명을 일으켰다' 라는 문장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뒷받침한다. 당시에 일상적으로 읽히던 연애소설이 당대 사람들에게 평등의식을 고취시키던 공감의 소설이 지금은 포르노소설로 불리며 언제부턴가 배척되고 평가절하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보면 포르노그래피라는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p. 41)' 자연스러웠던 것이 부자연스러워지게 된 배경에는 항상 권력과 통제가 있었다. '국가권력은 왜 포르노그래피를 부정하는가? (p. 55)' 라는 저자의 질문은, 쾌락의 가치를 부정하고 노동의 가치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혁명의 시작을 대표하는 저작물로 꼽힌다. (중략)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역사상 가장 덜 팔린 책'으로 꼽힌다. (p. 78) 가장 큰 이유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p. 79)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측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 본격적인 작업의 결과가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였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일반인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쓰였다. 그것도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학술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속어로 썼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p. 89)

저자는 갈릴레오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실은 '상당부분 영웅화되었으리라고 봐야 한다. (p. 109)' 라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뉴턴의 <프린키피아> 도 설명한다. 뉴턴은 '뻔한 사실을 그대로 알아볼 능력도 없어 보이는 (p. 115)'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한 이후 <프린키피아>는 일부러 어렵게 썼다고 한다. 너무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을 위한 해설판이 필요했는데 이 해설판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먼저 등장했고 이후 프랑스 과학은 영국을 앞서기 시작한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프랑스어판의 표준으로 쓰인다는 이 해설판을 쓴 사람은 '볼테르의 애인이었던 에밀리 뒤 샤틀레라는 불세출의 여성 과학자 (p. 117)' 이다. 하지만 그녀는 갈릴레오처럼 영웅화되지 못했다. 영웅화는 커녕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당대에 새로운 이론에 대해 세상에 알려야 겠지만 읽히면 위험하기에 많이 읽히지 않도록 어렵게 쓴 책들, 그 책들을 대중화하기 위해 해설판을 쓴 사람들, 하지만 너무나 다른 결과들을 보며 읽고 읽힌다는 것은 다시한번 지배논리와 권력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누가 무엇이 읽혀지길 바라는지 생각해 보며 읽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망각하고 읽고 있는게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 문제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p. 132)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대단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론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 유명한 고전에는 재판에 대한 쌍방의 입장이 아닌 소크라테스의 일방적 입장만이 들어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닌데, '악법도 법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한 적 없는데 등등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그러니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문제를 만들었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소크라테스를 만들어냈을까.

이 오래된 고전들은 모두가 '편집된' 저작물이다. 편집의 원래 의미는 자료를 모아 좋은 것을 추려내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임의로 내용을 '누가'하거나 원래 문장을 '조금' 고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인쇄술이 시작되기 전에는 베껴 쓰는 방식으로 책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필사본이 그런 것이다. 필기도구가 원시적이었던 고대에 많은 글자를 정확하게 베껴 쓰는 일은 대단히 힘든 노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글자가 몇 자 빠지거나, 다른 글자를 써넣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을 슬쩍 고치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때로는 내용을 뭉텅이로 빼거나 넣기도 했다. (p. 141, 145)

플라톤이 만들어낸 소크라테스 관련 저작물 뿐만 아니라 공자의 <논어> 그리고 <성경> 또한 위와 같은 '편집된 고전'의 왜곡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오래된 고전들은 원래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가진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필요한 만큼 적당히 변형되어 오늘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변형시켜 살려낸 이들은 그 주인공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그 성인의 입을 빌려 민중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을 강요했던 것이다. (p. 146)' 라는 저자의 말은 지금껏 전해져 온 '고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는 듯 하다. 원본이 없는 고전은 고전 그 하나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저자가 서두에서 말한 메타북의 중요성은 고전읽기에는 특히 더 필수적이다.

고전은 작품 그 자체보다 맥락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텍스트보다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저작물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전과 관련한 현대의 저작물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그 텍스트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쓰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p. 165) 그 당시의 언어를 느낄 수 있도록 역주가 자세히 달린 텍스트가 최선일 것이다. 또한 의역보다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 좋은 면이 있다. 그래야 번역자의 주관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p. 168)

한글로 쓰이지 않은 책들을 번역본으로 읽으며 늘 고민스런 부분이긴 하지만 고전읽기에서는 누가 번역했는가가 더욱 상당히 중요하다.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고전을 읽으며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고전이 왜 살아남았을까, 누구의 의도로 어떤 목적에서 누구에게 읽히길 바라며 전해졌을까.

본성과 양육을 다루는 책들은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p. 193)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면 우생학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양육을 중시하면 누군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지는 수동성에 천착하게 될 수 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어느쪽이든 위험하다. 본성과 양육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리는 과학의 논리라기 보다 정치의 논리가 되기 일쑤 였다. 그 과정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학살하는 큰 이유인 이 두 가지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책은 적의 상징물이었고, 피통치자에게 자기 권리를 깨치게 하는 것이어서 통치자에게는 성가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책은 통치자에게 더 잘 통치하기 위한 지혜를 주는 생명과 영혼의 샘물 같은 것이었고, 잘만 활용하면 피통치자를 길들이는 데에도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p. 306)

과거 역사에서 책이나 도서관은 지배권력층이 달라질때마다 번갈아가며 불살라지고 파괴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값진 책과 문화재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던 것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책이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도서관과 책은 파괴의 대상이면서도 약탈의 대상이었다. (p. 311)' 완전히 없어진 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책을 고전이라 부르며 우리가 그러한 책들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데이터의 시대가 되었고 전자책이 흔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종이책을 고집한다. 책이 주는 물성을 애정한다. 불태우자고 마음만 먹으면 종이만 불태워지겠는가? 데이터센터도 화재가 발생하면 기록들은 다 사라진다. 불태워짐과 사라짐은 종이냐 데이터냐 존재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내용들을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고 '시간'이다. 과거에 비해서 다양한 정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 행운을 걷어차고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만을 고집하려한다는 건 큰 어리석음일 것이다.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긴 하지만, 넘쳐나는 책들 속에 우리가 읽어야 하고 남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계속 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자 의무이고 행복이자 행운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 책들이 우리의 '정신'을 바르게 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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