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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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상에서 단 다섯 번만 일어났던

대멸종이 재현되고 있는 순간을 살고 있다.

이 책에는 13개 장에 걸쳐 여섯 번째 대멸종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장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한 종이 등장한다. (중략) 멸종은 소름 끼치는 주제이며, 대량 멸종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매혹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두 측면, 즉 멸종에 대해 알게 되면서 느낀 흥분과 공포 모두를 전달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매우 특별한 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p. 23 - 프롤로그 中 -

저자는 과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 이지만 이 책은 과학책임에 분명하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과학자의 전문성을 넘어설 수는 없겠지만 특유의 집요함과 광범위한 조사는 때로 그 어떤 과학자의 책보다 더 전달력 강하게 주제에 접근하게 한다. 또한 칼럼처럼 쓰여진 대중적인 서술은 이 책의 어려운 주제를 쉽게 읽도록 해준다. 그러니 주제의 무게에 이해의 무게까지 더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된다. 이해되면 될수록 더해가는 마음의 무거움만 느껴도 충분히 버거울 테니. 왜냐하면 이 책의 주제는 '멸종' 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대.멸.종.

양서류는 지구상의 모든 대륙이 판게아라는 하나의 땅이었던 시기에 출현했다. 그러다 판게아가 분열하면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환경에 적응했다. (p. 37) 오늘날 양서류는 지구상의 동물 중 가장 위기에 처한 강 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얻었다. (p. 44) 종들이 사라지는 데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 과정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늘 동일한 범인인 '일개의 나약한 종'을 만나게 된다. (p. 45)

'일개의 나약한 종'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인간이다.

세계 곳곳에서 개구리들이 사라지고 있다. 조용해져서 좋겠다고?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인류보다 먼저 태어나 인류보다 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양서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저자는 이미 멸종한 개구리부터 확인시켜 준 후 '멸종'의 기원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그 시작은 진화론의 출발전 생명의 나무부터 시작된다.

칼 린네가 이명법 체계를 고안했을 때, 그는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중략) 다룬 것은 오직 한 종류의 동물, 즉 현생 동물 뿐이다. (p. 53) 퀴비에는 '현재 존재하거나 화석에 남아 있는 코끼리 종들'이라는 강연에서 멸종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p. 66) 퀴비에의 절멸종 목록이 길어질수록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p. 73) 생명의 역사가 길고 변화무쌍하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동물로 가득한 때가 있었다는 퀴비에의 주장을 들으면 그가 당연히 진화론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퀴비에는 진화라는 개념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발전시킨 동료들을 깔아뭉개려고 했고 그 시도는 대게 성공적이었다. (p. 76) 라이엘이 보기에는 멸종 역시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감지되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85) 라이엘은 당대의 스티븐 핑커라고 할 만한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보스턴에서 열린 그의 강연에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p. 86) 찰스 다윈도 <지질학 원리>에 열광한 독자 중 한 명이었다. (p. 88)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글호 항해에서 다윈이 발견한 것은 자연 선택이 아니라 라이엘이었다. (p. 89) 한 전기 작가는 라이엘이 다윈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라이엘이 없었다면 다윈도 없었다" (p. 91) "종이 완전히 멸절하는 과정이 그 종이 만들어지는 과정보다 일반적으로 더 느리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새로운 종의 탄생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다윈에 따르면 그런 일을 불가능하다. 종 분화는 너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이어서 사실상 관찰 불가능하다. 다윈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토록 느린 변화를 볼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p. 95)

생물의 분류부터 화석에서 비롯된 지질학의 발견을 거쳐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차근차근 자연의 변화를 밝혀내는 것처럼 보였다. 다윈의 후계자들은 '서서히 멸절'했다는 관점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토록 점진적인 변화로 설명되지 않는 대멸종의 증거들이 쌓여갔다. 그리고 1991년 소행성 충돌설이 확인되었다. 격변은 실재했고 대멸종의 원인들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대량 멸종을 아우르는 일반론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또다른 대멸종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가오는 대멸종의 원인만큼은 이미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급격한 '종의 멸종'을 확인했다.

지난 80만 년 동안의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수치다. 아마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보다 높았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2050년에는 CO2농도가 산업화 이전의 두 배인 500ppm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2~4℃ 상승하고, 이 온도 상승은 빙하 소멸, 저지대 섬 해안 도시 침수, 북극의 만년설 유실 등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p. 172)

지구의 기후변화는 지구의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생물다양성 감소가 일어날 것이라는 증거는 확실하다. 일부 내성이 강한 생물은 더 번성하겠지만 전반적인 다양성에는 손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대량 멸종 시기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p. 181)' 이산화탄소 증가는 기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산화탄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곳은 바다다. 바다가 그 이산화탄소의 많은 부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산호초는 단순히 해저의 열대 우림인 것이 아니라 바다 버전의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열대 우림이다. (p. 207)' 산호초도 사라지고 있다.

다음 세기의 기온 변화 규모는 빙하기의 온도 변동과 비슷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변화의 규모는 비슷할지라도 그 속도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관건은 속도다. 오늘날의 온난화는 마지막 빙기를 비롯하여 이전의 모든 빙기말에 일어났던 것보다 최소 10배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동식물의 이주나 적응도 10배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p. 235)

하지만 인류는 지구의 환경은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화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 수는 없다. 오직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뿐.

'의존 관계는 쌍방향적이어서 나무도 동물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중략) 지구 온난화가 적어도 생태 공동체의 재구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p. 245)' '한 개체군이 유실되었을 때 그 자리가 다른 개체군으로 다시 채워질 가능성은 그 서식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p. 261)'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 다. 인류가 지구를 변화시키는 속도를 지구 생명체의 진화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다면? 멸종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지질학적 분포라는 원리를 한데 뒤섞어 버린다는 점이다. (중략) 전 세계의 동식물을 재혼합하는 과정은 오래전 인간의 이주 경로를 따라 천천히 시작했지만 최근 수십년 동안 급격하게 속도를 높여 이제는 토착종보다 외래종이 많은 지역이 생길 정도로 진전되었다. (p. 282) 아시아의 종들을 북아메리카로, 북아메리카의 종들을 호주로, 호주의 종들을 아프리카로, 유럽의 종들을 남극 대륙으로 옮겨 놓으며, 우리는 사실상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으로 재편하고 있다. (p. 294) 국가적 다양성은 증가했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전 지구적 다양성은 감소했다. (p. 300)

지구의 빨라지는 오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교란시킨 생태계도 문제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지 못한 멸종의 방법중 하나는 인류의 사냥이었다. '수천만 년 동안의 숱한 가뭄에도 살아남았던 호주의 거대 동물들이 공교롭게도 정확히 최초의 인류가 도착하자 거의 동시-수백만 년을 단위로 하는 지질사적 의미에서-에 죽음을 (p. 324)' 맞았다. 이러한 과정은 같은 호모종인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일어났다. 그렇게 인류만 남아가고 있다. 그렇게 인류만 살아남은 지구가 가능하리라고 보는가?

나의 진짜 주제는 그들이 사라져 가는 과정이 보여주는 일정한 패턴이다. 나는 하나의 멸종 사건-홀로세 멸종 또는 인류세 멸종, 좀 더 완곡한 표현을 원한다면 '여섯 번째 멸종'이라고 해도 좋다-을 추적함으로써 그 사건을 생명의 역사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 위치시켜 보고자 했다. 그 역사는 동일 과정설이나 격변설 어느 하나를 따른다기보다는 둘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p. 368)

저자는 여러 챕터에서 멸종하는 생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생물 하나하나에 대한 기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읽어보면 그 멸종의 원인들이 비슷한듯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고 아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초래한 멸종이 우리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p. 371)' 에 대해 이젠 우리가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류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현재로 인식되는 이 놀라운 순간에, 우리는 의도치 않게 어느 쪽의 지노하 경로는 열어두고 어느 쪽은 영원히 차단해 버릴지를 결정하고 있다. (p. 373)' 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또한 아직 오지 않은 멸종을 막을 수도 있다. 2014년에 나온 책이 지금 다시 한국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여전히 한국에서 읽히고 있지만 이제쯤은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 어느때보다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한국에서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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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클래식 아고라 2
일연 지음, 서철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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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삼국유사>라는 제목에서 '유사'는 빠뜨린 일, 남겨둔 일 혹은 버려진 일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빠뜨린 일들을 애써 모은 것일까? 바로 나라에서 펴낸 역사책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나름대로 의식한 표현이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는 여러모로 <삼국사기>와 비교되곤 하였다. 이를테면 <삼국사기>가 왕권의 강약과 귀족 세력의 부침에 따른 정치사를 바탕으로 서술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불교와 고유 신앙의 대립과 화해, 향가를 비롯한 문학과 미술작품 건축물의 조성 등 종교를 중ㅅ미으로 한 문화사의 영역을 해명하고 있다. (p. 11) <삼국유사>자체가 그런 혁신적인 생각의 산물이라 할 수는 없어도, 공식적인 사관의 평만이 유일한 역사의 눈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삼국유사>는 역사 이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성을 마련해 주려고도 한다. (p. 12) 우리가 미래에 이루려 하는 다문화, 다양성과 다원성을 지닌 새로운 한국은 이미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가 한 차례 이미 이루었던 것이다. (p. 16) 이 책은 다른 번역서들처럼 정확한 번역을 앞세우기보다, 일단 잘 읽히는 번역을 추구하였다. (p. 17)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역자는 <삼국유사>의 가치와 이 책의 특장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일단 잘 읽히는 번역을 추구하였다' 에 감사한 마음이다. 한자를 그대로 옮기기만했다면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엄두나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난해함이나 거부감없이 술술 읽힌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교과서에서 제목만 보던 역사책을 이렇게 쉽게 읽을 있는 시대가 오다니! 내가 그 <삼국유사>를 읽다니!! 와우, 정말 세상 참 좋아졌다. ㅎㅎㅎ

이 책은 총9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 이야기에 해당하는 1편과 2편이 절반 나머지 불교관련 이야기가 절반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의 역사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대체로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주 맥락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고려의 시초이야기랄까 고려의 용비어천가랄까 싶은 역사이야기였다.

또한 역사이야기이긴 하지만 대체로 신화적 이야기 였다. <삼국사기>와 대조되는 가장 큰 부분도 바로 이 점일 것같다.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일종의 야사같은 이야기들. 그래서 삼국의 역사라 할 수 있는 1편과 2편의 큰 제목은 '기이, 정치 현실과 신성한 환상' 이다. 기이하고 환상같지만 오래도록 전해져오는 역사이야기 라고나 할까. 그래서 출발은 언제? 고조선 이야기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만에 주나라 무왕이 기묘년에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 땅의 제후로 삼았다. 그러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훗날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령이 되었다. 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 (p. 23) 한 고조 유방때 연나라 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 연나라 사람 위만은 무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요새를 나와 동쪽으로 달려 패수를 건너 망명했다. (p. 24)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우거왕 대신 성기가 저항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중략) 마침내 한나라는 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 4군을 설치했다. [위지]에서 말한다. 위만이 조선ㅇ르 공격할 때, 조선왕 준은 궁궐의 여인들과 가까운 부하들만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는 남쪽 한 땅에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했다. (p. 27) [통전]에서 조선의 유민이 70여 나라로 나뉘었는데, 각각 그 영토가 100리 씩이라 했다. (중략) 마한은 서쪽에 54소읍이 있어 모두 '나라'라 했고, 진한은 동쪽에 12소읍이 나라를 자칭했다. 변한도 남쪽으로 12소읍이 나라를 칭했다. (p. 30)

내가 중고등학생일땐 기자조선이라던가 위만조선에 대해 배운적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중고교생들의 교과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온다. 역사가 과거이야기로 그저 지난 일이라 고정불변일 것 같지만 사실 역사는 매 시대 새롭게 읽히는 과거로서 변화한다. 이 변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각자의 역사관이 그만큼 중요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역사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삼국유사>라는 본문과 적절한 보충설명이 쉽고도 객관적으로 쓰여 있는 것 같아 믿음직해 보였다.

위 내용에서 '삼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한,진한,변한과 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삼한 가운데 마한을 고구려, 변한을 백제, 진한을 신라라고 불렀던 최치원의 관점을 존중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사의 순서 또한 '마한-고구려-변한 백제-진한'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한을 백제의 모태로, 변한을 가야의 시초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역사적 지식과는 어긋난 것이다. 이는 삼한이 곧 삼국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p. 40)' 또한 '<삼국유사>의 모습은 일연의 역사관과 국제 관계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p. 34)' 라는 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알아두어야 할 것같다.

지금 풍속에 '경'을 서벌(서울)로 읽는 게 이 때문이었다. (p. 60)

이빨이 더 많아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서 잇금(이사금, 임금)이라는 말이 유래하여, 유리왕부터 지금까지 '임금'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p. 63)

미추왕릉의 서열도 박혁거세를 비롯한 박씨 왕족의 5릉보다 위에 두어 대묘라 하였다. (p. 71)

새로 알게 되는 깨알 역사 상식들이 재밌기도 했지만,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대 왕들의 신화적 이야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당시 한반도의 상황이 서양역사가 유래된 펠레폰네소스반도와 그닥 다를게 없었다라는 점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땅에서 세습이 아닌 왕위계승이 이루어졌고 자잘한 도시국가들로 느슨한 연합체가 이합집산했다는 점이 말이다. 다만 한반도는 바다로 나가면 주변이 뻥 뚫린 광활한 태평양이었지만 펠레폰네소스 반도는 지중해라는 닫힌 바다여서 무수한 문화들이 서로 얼키고설켰다는 점이 이후 역사의 향방을 가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어디서든 참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했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황제는 벼슬을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했다. 사치 때문에 나라를 망친 것으로 유명한 임금들인 삼국시대 오나라 마지막 임금 손호, 남북조 시대 진나라 마지막 임금 진숙보 곁에 묻고 비석을 세웠다. (p. 100)

고려의 군대가 수십 일을 머무르다 떠났는데, 지휘에 따라 단정했고 규율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서라벌의 남녀들은 기뻐하며 말했다.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늑대와 호랑이 같았는데, 고려 태조 왕건 공께서 오시니 부모님을 뵌 것 같네요" (p. 150)

안종은 고려 8대 현종의 아버지로, 이후 고려 임금은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결국 경순왕은 고려 임금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p. 153)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을 생각했을때 고려 라고 하면 고구려 에서 맥을 이은 나라가 아닐까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었나 보다. 이 책을 읽다보니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는 그 시작부터 멸망까지 짧게 다룬 반면 신라의 이야기는 굉장히 길고 자세했다. 사실 역사지도를 봐도 고려는 통일신라 땅으로 시작했다.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옛 고구려의 영역까지 넓혀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조선시대에 지금의 국경이 정해지기까지 결국 요동지역까지는 수복하지 못했다. 고려 시대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를 자세히 남긴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신라의 역사를 고려와 연결시켜서는 잘 모르는 것 같지?

역사가는 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리를 잃어 하늘이 더 돕지 않았고, 백성들은 의지할 데 없는 틈을 타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났다. 가장 왕성한 이들은 궁예와 견훤 둘이었다. 궁예는 본디 신라 왕자인데도 자기 집안을 원수로 삼아, 선조의 그림을 칼로 베었으니 너무 심하게 사나웠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며 반역할 뜻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그 도읍을 침략하여 왕과 신하를 다 짐승처럼 죽이니 천하에 으뜸가는 악당이었다. 그러니까 궁예는 신하들에 버림받고 견훤은 아들에게 불행을 당한 일이, 다 자업자득이고 누구 탓할 자격이 없다. 향우나 이밀 같은 능력자들도 한나라, 당나라의 천하통일을 막을 수 없었거늘, 궁예와 견훤 따위가 우리 태조를 당할 수 있었을까? (p. 177)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일연의 평가가 지금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평가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역사가의 평가는 시대마다 달라지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부분은 과연 어디일까?

여하튼, 삼국의 이야기 끝에 저자는 가야의 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가장 빈약하게 배우는 부분이 가야인 것 같은데 최근 유적발굴도 활발하다 하니 이 부분의 역사가 좀 보완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조선부터 시작하여 삼국과 가야의 시작과 멸망을 다루고 나면 각 국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래됐는지를 시작으로 절이나 불상, 탑 등에 얽힌 이야기, 유명한 스님들의 일화 그리고 민간에 전해지던 이런저런 교훈적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대개가 설화적 이야기들이다 보니 약간은 전래동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신선하게 읽혔던 부분은 (아무래도 불교 이야기라서 그런가) 인도등의 외국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너희 신라 황룡사는 석가모니와 예전 세상 가섭 부처님들이 강연하던 땅이라,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래서 인도 아소카왕이 황금을 좀 모아 바다에 띄워 보내, 1300년 후 신라에 다다라 황룡사에 모셔질 수 있었다. 다 공덕과 인연 덕분이니라" (p. 233)

이렇게 땅에서 돌로 된 뭐가 자꾸 나온다는 점은, 샤머니즘 거석 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p. 240)

물고기 상징은 우선 수로왕과 아내인 허황옥의 상징물이 쌍어, 물고기 두 마리였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을 두고, 불교의 상징으로서 물고기처럼 눈을 깜빡이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한편 로마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도 물고기로, 예수의 시대를 황도12궁 물고기의 시대라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는 이렇듯 신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종교 신앙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소재였으므로, 만어산과 같은 물고기 산의 이미지가 가능한 것이다. (p. 278)

인도에서는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른다. '구구타'는 닭,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다. 인도에 전해지기로는, 신라가 닭의 신을 공경하므로 닭의 깃을 머리에 꽂아 장식했다고 한다. (p. 323)

지금은 없지만 황룡사가 정말 중요한 절이었구나 싶어 더 궁금해지고, 거석신앙이 불교와 연결된 점도 아하 그랬구나 감탄했고, 인도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신선했다. <삼국유사>가 이렇게 재밌는 책인데 그동안 왜 고전으로서 읽을 생각을 못했나 싶을 정도다. 역자는 <삼국유사>가 여러 이야기의 모음집이므로,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초심자의 경우 아무 곳이나 흥미로운 부분부터 띄엄띄엄 읽어나가는 방법도 권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1편과 2편은 아무래도 연대기적 역사이야기이다 보니 순서대로 읽고, 3편 이후 불교관련 이야기들은 자유롭게 읽어도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우리의 역사고전으로서 이렇게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 클래식아고라 시리즈 관련자분들께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이 시리즈의 1권인 <징비록>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2권인 <삼국유사>도 이처럼 즐겁게 읽고나니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도 절로 기대가 된다. '고전 회복 운동'으로 시작했다는 클래식아고라 시리즈, 꾸준히 지속되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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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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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은 고전, 역시 현대지성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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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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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 부흥기를 열다.

<돈키호테>저자 세르반테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준 역작

고전을 이 시대에 맞는 현대어로 번역하면서도 원전을 완역함으로써 그 완성도를 높인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45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고전 시리즈다! 믿고보는 현대지성 클래식!! ^^) 이번엔 라틴어 원전 완역본 <우신예찬>이다. '어리석음의 신' 우신을 등장시켜 그 어떤 신보다 찬양하는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를 신랄하게 꼬집으면서도 책장을 넘길때마다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대표 저작 이다.

당신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독창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행동거지와 성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냥하고 친절해 어느 때나 누구와도 잘 어울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연설문을 친구가 주는 기념품으로 기꺼이 받아서 읽고 간직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글을 당신에게 헌정합니다. 그러니 이 글은 이제부터 내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p. 12) 글이 가볍고 장난스럽다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을 내가 처음 쓴 것이 아니고, 이미 과거에도 위대한 저술가들이 자주 써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p. 13) 인생의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농담을 허용하면서도 학문에서는 농담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것, 게다가 실없게 들려도 사실은 진지한 성찰로 이끄는 농담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부당합니다. (p. 14) 다른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하겠지만, 내가 자아도취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리석음을 예찬하되 결코 어리석지 않게 예찬했습니다. (p. 15)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내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것입니다. (p. 16)

- 서문 中 -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친구 토머스 모어에게' 라는 제목의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연설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따라서 책이 내게 말해주는 듯 읽혀지면서 읽다보면 어느새 약간 우스꽝스럽고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청중의 웃음을 유발하며 호쾌하게 연설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읽혀지는 책이다. 서문부터 그 발랄함과 당돌함이 느껴지는 듯 한데, 자신은 우신을 예찬할 뿐이므로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즐겁게 읽어주리라 생각한다는 저자의 말은 이 책을 읽고 기분나빠할 누군가에게 마치 '웃자고 한 농담에 죽자고 덤벼들 건 아니죠?' 라고 미리 당부하는 것만 같다.

작가는 우신이 누구인가 라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로마적 고대의 신들로부터 계보적으로 엮어내기 시작한다. 우신은 어리석은 신이 아니라 삶에 쾌락을 더해준다며, 우신이 최고의 신이고 우신 없이는 인간의 모든 관계가 유지될 수 없으며 우신을 통해 국가와 영웅 그리고 제도 또한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이라고 예찬을 거듭하는 것을 읽다보면 '세상 뭐 있어 마냥 즐겁게 살자'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풍자를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학자들은 배고프고, 과학자들은 춥고, 천문학자들은 조롱당하고, 논리학자들은 멸시받아도, 오직 '의사만은 일당백의 몫을 해냅니다.' (중략) 특히 오늘날 너 나 할 것 없이 의사가 되어 행하는 의술이라는 것은 수사학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아부술에 불과합니다. 의사 다음으로 높은 자리는 법률가의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최고 윗자리를 내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p. 104)

이 구절이 특히 현실적으로 와 닿았는데 그 옛날 부터 의사, 판사 등의 '사'자 붙는 직업들은 이토록 선망의 직종이었나 싶어서. ㅋㅎㅎ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종교에 관련된 내용들이 많았는데 '가톨릭에 만연한 온간 미신들' 같은 경우 우상숭배를 그토록 처벌하던 종교에 이토록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상들이 성인들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었구나 싶어서 저절로 쓴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귀족, 예술가 부터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 군주, 주교, 추기경, 교황, 사제 등 콕콕 찍어 풍자에 풍자를 거듭한다.

인문주의 운동과 종교개혁이 맞물려 있던 시대에 나온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쓴 것과 달리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에라스무스가 이토록 신랄하게 당대를 풍자했다고 해서 종교개혁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다시 세우길 원했다. 여하튼, 이 책의 <해제>에서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특유의 상세한 설명까지 읽고 나니 가볍게 읽었으되 가볍게 마무리한 것 같지는 않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역시 고전은 제대로 된 원전번역본을 읽어야 한다. ㅎㅎㅎ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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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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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미와 추, 생과 사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를 체화한 도스토옙스키의 통찰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러시아문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은 그림전문 책은 아니지만 한 페이지를 과감하게 그림에 할애함으로써 그림 보는 재미도 있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알면 좋겠지만 몰라도 읽을 수 있으니 딱히 문학책이라고 할순 없지만 문학적으로 읽히는, 그러니까 미술과 문학이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에서 융합되어짐을 알게하는 그런 책이다.

지금부터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사랑한 그림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책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그건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미술관'이 되리라.

여기서 '미술관'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회화·조각 따위의 미술품을 모아 전시하는 곳을 가리키는 미술관(美術館)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나 비평가가 미술을 보는 관점을 뜻하는 미술관(美術觀)이다. 세계적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미술애호가로도 유명했지만 그 스스로 뛰어난 미술평론가이자 시사평론가이기도 했다. (p. 10)

우리는 이 책에 '전시'된 미술작품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미술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물들지 않은 자기 자신만의 시각으로 미술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으로 다시 한번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어본다면, 우리 역시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확장될 것이다. (p. 12)

-작가의 말 中-

저자에 따르면 러시아문학가들 중에서 도스토옙스키만큼 여행을 자주 다닌 작가가 없다고 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는 여행가는 곳마다 미술관에 꼭 들렀고 어쩌면 미술관을 가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 듯도 보일 만큼 그림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이러한 미술경험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문학은 그런 영감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 탄생의 순간을 초상화를 통해 조금 짐작해 볼 수도 있기도 한데,

'흥미롭게도 유럽 미술관들에는 왕과 귀족, 성직자의 초상화가 많은 반면 트레티야코프미술관과 러시아미술관에는 작가와 예술가의 초상화가 더 많다. (p. 85) 화가 바실리 페로프는 '예술적 사고에 몰입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의 순간'을 초상화에 담았다. 이 초상화의 진수는 작가의 영혼을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다. (p. 86)' 작가는 그림을 사랑하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남김으로써 우리에게 작가의 몰입어린 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사랑한 화가 역시 라파엘로다. 그는 라파엘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고, 그의 작품 <시스티나의 마돈나>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격찬했다. 바로 이 성화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이상을 찾았다. 그가 '라파엘로 그림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 121) '그림 읽기'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음미하면서 감상함을 뜻한다. (p. 130)

나도 라파엘로의 그 부드러운 그림들을 좋아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굉장히 종교적 찬미감으로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극찬했던 것 같다. <시스티나의 마돈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된 부분이 있으니 '라파엘로 그림의 배경에는 수많은 아기 영혼의 얼굴들이 그려져 있다. (p. 145)' 라는 점이었다. <시스티나의 마논나> 머리 위 부분을 확대하여 책에 실어놓았는데 배경으로 희미하게 수많은 아기 영혼들이 보여서 새삼 놀라웠다. 어린이에 대한 종교적 순수성을 찬미했던 도스토옙스키였기에 이런 아기영혼 그림들을 심어놓은 라파엘로의 그림에 더욱 심취했던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성(聖)과 속<俗)의 아름다움을 구분하고 있다. 그에게 최고의 아름다움은 '성스러움'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저 너머'의 초월성을 상기시키는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한 도스토옙스키는 영성의 아름다움을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속<俗)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략) 성(聖)과 속(俗)의 아름다움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어리석음의 미학(美學)'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아름다움은 어리석음을 내포한다. 그의 미적 세계관은 '어리석음의 미학'에서 나온다. (p. 149) '유로디비'란 중세 러시아 정교 전통의 '세상 속에서는 바보스러우나 영적으로는 가장 지혜로운 하느님의 사람'을 가리킨다. '유로디비'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속된 세상의 물정을 따라잡지 못하지만, 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삶의 신성함을 발견한다. 세상을 구원해줄 사람은 지식이나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p. 150)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순수한 어린이와 세상이치엔 어두워 백치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아름다운 캐릭터를 자신의 작품에 꼭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가 좋아했던 그림들이 대부분 종교적이되 아름답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문학세계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을때 그런 그림들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크게는 '성과 속' '미와 추' '생과 사' 라는 3부로 구성된 책이었지만 대부분의 글에 등장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 그림이 라파엘로의 작품이었다면 라파엘로의 그림을 글로 써 놓은 것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았달까. 따라서 이 책을 읽고나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꼭 읽어야겠구나 싶다.

도스토옙스키가 강조한 '눈'은 시각예술인 그림을 논하는 이야기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언급하는 화가들은 모두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눈의 소유자이다. 그러한 화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은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스토옙스키에게 창작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눈'에 대한 예술적 접근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예술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시각예술은 현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p. 331)

-에필로그 中-

이 책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는 그림을 본다기 보다 읽었다고 느꼈기에 그런 그의 문학작품을 우리는 읽는다기 보다 '보는' 경험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 유독 어리석이보이나 순수한 캐릭터들에 관심을 갖고 읽어야 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영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그런 면에서 읽는 내내 미켈란젤로가 떠올랐다. 천재예술가들은 종교에 대해서도 남다른 믿음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그러한 영감으로 그토록 천재적인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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