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프린트 - 이기적 인간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가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부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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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100인<포린폴리시>'세계100대사상가'

이 시대 최고 석학이 밝힌 인간 사회 진화의 청사진

"우리는 서로 돕고 배우고,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블루프린트'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이 직관적인 단어를 검색해보니 '청사진'이라고 나왔을 때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영알못의 비애란 단어 뜻 그대로의 해석도 믿지 못하고 일단 검색부터 하게 된다는 ㅠㅠ

'청사진'이라는 단어는 무언가의 지향점, 계획표, 이상향 등의 의미로 전달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간 사회 진화의 청사진' 을 줄여서 '청사진'이라고 제목을 지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제에서 원제와 약간 차이가 있다. 원제의 부제는 'THE EVOLUTIONARY ORIGINS OF A GOOD SOCIETY' 즉 '좋은 사회의 진화의 기원' 인데 한국어판 부제를 보면 '이기적 인간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가' 이다. 부제는 항상 책의 주제를 담고 있기 마련인데 그 주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점이 생기곤 하므로 원서와 한국어판 은 그 관점이 달랐달까. 여하튼 제목만으로 내용을 얼추 짐작해보자면, 이기적 인간 투성이로 보이는 현대사회에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기원에서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진화적으로 증명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의 본문으로 가기까지는 상당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정재승 박사의 추천 및 해제에 이어 리뷰를 통한 추천사들이 연이어 길게 인용되고 있다보니 본문은 50페이지에 가까워져서야 시작된다. 이 엄청난 칭찬들로 시작하는 이 책이 과연 어떤 책이길래 이토록 찬사를 거듭하고 시작하는 걸까?

약30만년 전 시작된 인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종은 선해지도록 진화했다. 우리는 사랑, 우정, 협력, 학습을 비롯한 여러 놀라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바로 이 능력들이 우리의 운명을 빚어내는 지각판 운동에 해당하는 힘들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게다가 이 힘들은 모든 인류 집단이 지니고 있다. 모든 인류의 공통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선한 힘들이 어떻게, 왜, 출현했으며, 이 힘들이 인류가 마찬가지로 지닌 폭력과 악의 성향을 상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다루었다. 이 지식을 활용해 계속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P. 7 -한국어판 서문 中-)

저자는 친절하게도 한국어판 서문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인사부터 희망적이다. 성악설 성선설 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선설 입장이랄까. 하지만 저자의 이 책은 인간 개인의 본성을 성선으로 풀어낸다기 보다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혹은 인간사회의 성선에 대한 본성을 기원적으로 추적하여 풀어내는 책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하다거나 인간사회는 착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특성이 어떤 사회를 추구할때 그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더라 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달까.

인간의 본성과 인류 진화의 궤적을 꿰뚫는 이 책은 탁월한 걸작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바로 집어 들어 읽으시길 강력하게 권한다. (P. 8)

라고 강력하게 추천하는 정재승 박사가 나름 자세하고 긴 해제를 덧붙이고 있는데, '사실 이렇게 서너 줄이면 충분한 '이 책의 소개'에 덧붙여 긴 해제를 사족처럼 다는 이유는 이 책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더 많은 독자가 접했으면 하는 간절하 바람에서다. 묵직한 주제와 책의 불륨감에 압도되어 새로운 개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인간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에 틀림없이 매료될 것이다. (P. 8~9)' 라며 그 사족?!처럼 긴 해제를 시작한다. 중요한 포인트는 '희망의 메시지' 라는 것이고 '탁월한 걸작' 이라는 것이다. 정재승 박사의 책들을 나름 긍정적으로 읽어왔던 터라 이 정도의 찬사를 주는 책이라면 일단 믿고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비록 600페이지를 넘는 벽돌책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그런 정도의 칭찬을 받을 만한 책이었다. '이 책은 좋은 사회에 대한 진화적 '결론'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나누게 될 수많은 토론과 실천을 위한 '서론'이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갈 '우정과 환대 사회'의 씨앗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심어주시길 부탁드린다. (P. 19)' 정재승 박사의 마무리에 왠지 심쿵했다. 정말 멋진 표현이로고...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는 개인 선택과 전체 사회 구성 사이의 개념적 간극을 이어주는 선구자다. 그는 시의적절하고 매혹적인 이 책에서 과거 진화에 뿌리를 둔 우리 본성의 더 선한 천사들이 어떻게 깨달음과 사랑으로 가득한 문명을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 스티븐 핑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저자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시의적절하게 나온 탁월하고 도발적인 역작이다. 나는 책 한 권을 읽고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런데 크리스타키스는 엄밀함과 박식함을 술술 넘어가는 글솜씨와 결합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저자다. 자신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실험을 포함해 흥미로운 연구 결과로 가득한 이 책은 이 힘든 시대에 희망을 품을 이유를 과학에 근거해 제시한다. -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저자

굉장히 유명한 사람들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의 리뷰가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위 두명의 추천사가 인상적이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을 통해 본 스티븐 핑거의 해결책은 너무 서구백인우월주의적이라 실망스러웠고, <정치적 부족주의>의 분석은 명쾌했지만 희망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두사람의 분석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까지 포괄하여 논리를 전개시킨다. 그 중에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도 등장하는데 이 책에서의 비현실성에서도 저자는 나름의 현실적 분석을 찾아내는 것을 보며 그 넓은 학문적 범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의 엄청난 이력을 보면서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책을 읽어나갈 수록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하는 것을 보면 매번 감탄하게 된다. 여하튼 추천사들을 통해 느껴지는 메세지는 이 책이 '시의적절한 책'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인간본성의 연구를 총망라한 통합서 한 권을 읽는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달까.

나는 이 책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하나로 묶는 것이 더 많으며, 사회는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p. 44)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보는 내 관점,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관점은 공통된 인간성으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통성은 우리 진화의 기원이 같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즉 이것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p. 46) 이 범문화적 유사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전쟁까지 할 정도로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이토록 비슷할 수 있다는 걸까? 근본 이유는 우리 각자 안에 좋은 사회를 만드는 진화의 '청사진blueprint'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p. 49) 내가 볼 때 너무 오랫동안 과학계는 우리 생물학 유산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왔다. 부족주의, 폭력성, 이기심, 잔인함의 능력에 말이다. 반면에 밝은 면은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이제 나는 이 밝은 면이 왜, 어떻게 우리 본성으로 진화해왔는지 밝히고자 한다. (p. 50)

'진화의 청사진은 어떤 인간을 만드는가' 라는 제목에 머리말에 이어 이 책의 본문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사회, 공동체'라는 1부에서 인간의 DNA에 새겨진 사회성이라는 형질을 통해 다양한 공동체(우연한 공동체, 의도한 공동체, 인공 공동체)에서 어떤 사회가 유지되었는지 그 특성을 분석하고, '사랑, 우정, 관계'라는 2부에서 '결국 사랑'이라는 인간 본성이 사랑과 우정과 관계의 진화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 추적한 후, '유전자, 문화, 진화' 라는 3부에서 이 책이 전하려는 그 '희망의 메시지'를 총괄적으로 증명한다.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는데, 고원에서 옆의 높은 산을 보면 그 산이 높은 줄 모르고 그저 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고원에서 내려와 떨어진 평지에서 보면 그 산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어떤 고원 위에 올라서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봐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긴 하다. 일에 지칠때 초심을 기억하라는 말처럼, 인간과 사회에 지칠때 저자처럼 인간의 기원을 생각하다보면 '우리 진화 역사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이 궤적은 '좋음(선함)'을 향해 위어져 있다. (p. 582)'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의 넘치는 긍정에너지는 이 책의 무거움에 눌리지 않도록 꾸준히 읽게 만들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탄탄한 증거를 제시하다 보니 다양한 사례들을 읽다보면 지칠 수도 있다. 그럴땐 그 주제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길 추천한다. 이 책은 비교적 미괄식이라 ^^;;; 여하튼 그렇게 찬찬이 읽다보면 그동안 잊고 있던 '청사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희망적인 청사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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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 철학의 시대에서 정치를 배우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김예호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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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읽어야 할 동양 고전

시대를 초월해 삶을 가르치는 2600년 유학의 교과서

EBS books 의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를 좋아한다. 작고 얇아서 고전의 무게를 생각지 않고 일단 펼쳐들 마음이 생기고, 읽으면서는 이 작고 얇은 책 속에 고전에 대한 충실하고 충분한 이해가 가득하기에 매번 감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서삼경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유학의 고전, 대학과 중용을 한 권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자신들의 태생적인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상가들이 정치 무대 전면에 자유롭게 진출해 자신의 학설을 펼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당시 사상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학파로는 병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이었다. 병가는 당시 일어나는 보편적인 정치 현상인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장하며 부국강병을 철학의 중심 테마로 삼았다. 묵가는 강자가 약자를 무력으로 침탈하는 당시 상황을 비판하면서 약자를 보호하자는 보편적 박애주의를 주장했다. 도가의 경우 문명의 이기와 지식 등 인위적인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삶을 해치고 있으므로 모든 인위를 버리고 자연 원리를 따를 것을 주장했다. 법가는 예와 형(법)의 두 가지 통치 수단으로 다스리던 전통적 정치 방법을 법으로 일원화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직선적 역사관에 입각한 변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가의 경우 당시의 혼란은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나라 천자의 예제를 파괴해 발생한 것이므로 위정자들이 도덕적으로 각성할 것을 역설하며 주나라의 예치를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루는 유가의 경전 [대학]과 [중용]은 태평한 천하의 건설을 위해 위정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 실천, 앎, 통치 방법등을 논의한다. [대학]이 주로 평천하로 가는 정치 목적과 실천 원리에 대해서 논의했다면, [중용]은 주로 삶의 실천 윤리에 대해 말한다. (p. 16~17)

이 시리즈가 고전에 대한 입문서와 활용서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보니 고전 자체에 대한 본문 이해보다는 배경설명과 핵심 사항을 주로 전달해 주고 있기에 두꺼운 고전 읽기가 망설여지는 독자에겐 더욱 유용한 책이다. 시대상황을 비롯한 다양한 배경지식을 알게 됨으로써 고전 읽기의 사전 준비를 할 수 있고 간단히 요약된 핵심 사항을 이미 알고 고전을 읽게 되면 결국 본문 이해에도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 수록한 [대학], [중용]을 비롯한 동양 고전의 인용문은 모두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 라는 [일러두기]에서 알 수 있듯이 원문을 직접 번역 및 해석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쓴 책이므로 내용 또한 믿고 볼 수 있기에 더욱 훌륭한 시리즈라 하겠다.

유학은 과거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던 성인과 군자들이 실천한 윤리의 내용과 방법을 재음미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이러한 유학의 특징은 "옛것을 서술할 뿐 새롭게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길 가만히 나의 노팽(과거 은나라의 현자)에 견주고자 한다" 라는 공자의 단적인 언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p. 23)

[대학]의 '지극히 선함에 머무른다는' 이상향은, 유가의 옛것을 숭상하는 상고주의, 그리고 이러한 의식에 기인한 옛 성왕들을 기리는 선왕관념, 배움을 중시하는 인문주의 각자의 위상에 맞는 직분 수행을 강조한 정명의 정치·윤리의식 등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발휘될 때 도달하는 경지라 할 수 있다. (p. 25)

공자의 사상은 인간의 현실적인 윤리실천을 강조하며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분리해 사고하려는 내용과 과거의 천명사상을 계승하는 내용이 혼재된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런데 [중용]에 이르러 '하늘'은 인간의 본성을 부여하는 절대적인 주체로 정의된다. (p. 27)

유가의 학문 유학은 공자로부터 시작된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사서이고 시경, 서경, 역경이 삼경이라 유학의 대표적인 경전을 사서삼경이라고 하는데 모두 그 출발점은 공자의 사상이었다. 공자가 살아생전 그렇게 주창했으나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던 사상이 어떻게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사상들 중 거의 유일하게 되살아나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계속해서 과거의 선왕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식의, 모든 좋은 것은 다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과거회상만 하고 있는 것 같은 (고리타분한) 사상이 말이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게 '인(仁)'의 도덕 정치를 권유했지만 어떠한 제후도 그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공자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p. 43) 맹자는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 알리는 것을 자신의 평생 소원으로 삼았다. 맹자는 스승인 공자의 도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매우 걱정한 인물이다. 맹자는 평생 천하를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유세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관직에 나아가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p. 45)

공자와 맹자는 둘 다 제후의 부름을 받기 위해 천하를 떠돌며 유세했지만 결국 쓰임을 받지 못한 이유도,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부국강병을 원하는 제후들의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p. 47)

그러나 한무제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단순히 과거 유교 경전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닌 당시 유행한 문화들을 흡수하면서 통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변모한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유학의 '천명'관념은 절대적인 위상과 권위를 지니게 되고 더 다양한 내용과 방법으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p. 51)

공자와 맹자의 시대까지는 통일된 제국이 없었다. 공자가 숭상하는 선왕들이 있었으나 진나라나 한나라처럼 통일된 제국을 이룬 나라들은 아니었다. 다양한 소국들은 각자의 이익에 맞는 정치사상을 취할 따름이었다. 유학은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너무나 태평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진나라 통일 이후 중국대륙에 거대통일 제국이 탄생했다. 한나라 무제에 이르러 제국의 중앙집권을 돕는 통치이념이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 사이 발달한 다양한 사상과 문화들까지 흡수한 새로운 모습의 유학이 그 통치이념으로 채택되게 된다. '천명', 왕이 곧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만큼 확실한 중앙집권화가 또 있을까.

개혁과 혁신의 성격이 약하고 안정을 추구한 유학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국가 전반의 총체적인 혁신을 해야만 했던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없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회정치적 혼란이 일정 부분 종식된 후 제국의 통치자는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추구한다. 그들은 혼란으로부터 야기된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적 통합을 위해 전시 체제에 요구된 과감한 혁신보다는 안정 속에서의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에 부합하는 사상이 바로 안정 속에서 변화를 추구한 유학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통일제국인 한나라에서 채택한 유학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에 유행한 유학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 71)

동양에서 '하늘'의 의미는 다양했다. 자연적이고 하고 신적이기도 하고 미지의 무엇이기도 했으며 절대적 무엇이기도 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던 '하늘'은 점차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유학의 '하늘'은 과거 순수한 도덕적 의지로 충만한 하늘이 아니라 아예 인간사를 주재하는 인격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p. 67)' 서양에서도 종교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던 것처럼 동양에서도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하늘에서 선택된 왕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수련하며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겠다는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이 부분이 신격화된 왕이 중앙집권화된 동양과 그렇지 못했던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다르게 만든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에서의 왕은 종교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면 권력을 획득하긴 했으나 그 권력을 '치국 평천하'에 쓰진 않았잖은가.

'유학의 도통과 정통성으 중시하는 내용은 당시 계급사회에 안정감을 줄 수 있었다. (p. 72)'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유학이라는 고전이 전해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대학과 중용의 핵심 사상을 요약한 이 책의 본문을 읽으며 찬찬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시작으로 각각의 첫 문장을 운 띄워놓아본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지극히 선함에 머무는 데 있다. (p. 37)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p. 133)

ps.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시리즈의 책들이 다 그러했듯이 참고도서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나중에 혹시 고전을 원문으로 읽게 될 수도 있으니까 참고할 수 있도록 옮겨놓아 본다.

[ 시경 ] 유교문화연구소, 성균관대 출판부, 2008

[ 논어정독 ] 임옥균, 삼양미디어, 2015

[ 장자 - 낙천적 허무주의자의 길 ] 김갑수, 글항아리, 2019

[ 맹자강설 ] 이기동, 성균관대 출판부, 2005

[ 한비자 정독 ] 김예호, 삼양미디어, 2018

[ 전국책 ] 유향, 진기환 옮김, 명문당,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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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 20세기 제약 산업과 나치 독일의 은밀한 역사
노르만 올러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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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핀 개발부터 히틀러의 마약 중독까지

전쟁과 마약의 위험한 거래에 관한 역사

역사를 그저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역사는 늘 새롭게 읽히고 새롭게 밝혀지는 것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알고 있는 역사라 할지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하는 책, 새로 밝혀진 사실들이 보완된 책, 새로운 가설들을 세운 책등 읽고 싶은 역사책들이 계속 생긴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때론 설레이기도 한다. 이번엔 최근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 이야기다.

지금껏 국가 사회주의 실체는 낱낱이 밝혀졌다. 역사 수업은 그에 대해 어떤 공백도 허용하지 않았고, 미디어들도 여백이 남지 않을 정도로 샅샅이 파헤쳤다. 이 주제는 그야말로 구석구석까지 철저히 연구되었다. 나치의 독일 국방군 역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연구된 군대였다. 우리는 이제 그 시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과 함께 제3제국은 낱낱이 해부된 채 땅속 깊이 묻힌 듯하다.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굴해 내는 것은 헛되거나 이상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p. 8)

'나치 독일의 중심에는 마약이 있었다'

[의약품 첨부 문서로 서문을 대신하며] 라는 저자의 서문은 제목 그대로 의약품 설명서처럼 쓰여있다. 증상, 진단, 내용물의 효능, 이 책의 위험성, 부작용, 보관상 유의사항 으로 말이다. 위트어런 이런 서문에서 마지막 문장이 마냥 웃을 수 만은 없게 한다. '유통 기한은 미래의 연구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p. 10)'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연구될만큼 연구됐다고 여겨지는 그런 역사들도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곤 한다. 저자의 이 책이 그런 부분을 채워주었다고 해도 '미래의 연구 결과'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역사는 이렇게 미래형 학문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잘 모르고 있다.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엄격한 반마약 정책을 시행했음에도, 히틀러 치하에서는 정말 강력하고 중독성이 강하고 악독한 물질이 인기 상품이 되었다. 이 물질은 1930년대에 <페르비틴>이라는 이름의 알약으로 제3제국 사회 곳곳에, 심지어 나중에는 독일이 점령한 유럽 국가들 내에서도 합법적으로 널리 퍼졌다. 약국에서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던 이 <국민 마약>은 1939년에야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 구입하도록 바뀌었고, 1941년에는 마침내 제국 마약법으로 규제되었다. 페르비틴의 주성분 메스암페타민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불법이거나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p. 17) 이런 약물이 제3제국 시대에 날개를 달고 비상한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p. 18)

이 책은 독일에서의 제약 산업이 어떻게 마약산업이 되었는지,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인간 깨끗한 피를 강조하던 히틀러가 어떻게 중독자가 되어갔는지 차근차근 근거를 하나하나 들이대며 상세히 풀어나간다. 읽다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렇게 되어갔던 상황이 이해가 가는 면도 있었다. 독일이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들의 광기에 대해서 말이다.

1883년경 미국 약사 존 펨버턴은 코카인과 카페인을 섞어 코카콜라라는 이름의 청량음료를 만들어 팔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음료는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었다. 1903년까지 오리지널 코카콜라에는 리터당 최대250밀리그램의 코카인이 들어 있었다. (p. 24)

19세기 초 아편의 핵심성분인 모르핀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고 1850년경 주사기가 발명되자 이 진통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모든 약국에서는 모르핀과 코카인이 처방전 없이 팔렸다고 한다. 무엇보다 코카콜라에도 들어있었다니;;; 사이다에 비해 중독적으로 콜라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건 다 이유가 었었던거다;;;

여튼, 다른 나라들처럼 식민지로 인해 부를 쌓지도 못하고 패전으로 나라의 존망까지 기울어진 독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번창한 사업이 화학산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약산업이었다. 게다가 '이 나라는 각성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전쟁의 참사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양한 고통을 야기했다. 그러다보니 1920년대 우울과 낙담에 빠진 수많은 사람에게는 마약의 중요성이 꾸준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은 그것을 생산할 노하우가 있었다. (p. 26)' 화학 산업 분야에서 독일은 이미 '세계의 공장'이었고 특히 마약은 '메이드 인 저머니'가 품질보증서와 다름없게 된 때였다. 아편을 포함한 의약품은 독일의 특산품이었다.

페르비틴은 시대정신에 더할 나위 없이 딱 들어맞았다. 이 약물이 시장을 장악했을 때는 이제 세상의 모든 우울증이 정말 사라질 듯한 시기였다. 적어도 나치 강압 체제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본 독일인들은 그렇게 믿었는데, 독일에서는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p. 65) 분위기를 조장하려고 모든 수단이 강구되었고, 거기에는 화학 물질의 도움도 빠질 수 없었다. 이로써 페르비틴은 독일 민족을 거대한 집단적 도취와 <자기치유>의 선전에 쉽게 빠지게 할 길을 열어주었다. (p. 67) 메스암페타민은 국가 사회주의 이념의 균열을 메워 주었고, 약물에 도취된 정신은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페르비틴은 개인이 독제 체제의 부품처럼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알약으로 돌아가는 국가 사회주의였다. (p. 68)

페르비틴은 각성효과가 뚜렷해서 피곤에 쩔던 군인들을 밤세워 날아가듯 행군하게 만들었고 겁없이 적진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부작용에 대한 연구를 할 시간도 없이 군인들에게 페르비틴이 뿌려졌고 복용 지침도 딱히 없었다. 전쟁초기 속도전에서 페르비틴의 효과를 본 군대는 점점 더 많은 페르비틴을 들여왔다. '독일 국방군은 화학 약품에 의존한 세계 최초의 군대 (p. 97)' 였다. 하지만 마약성 각성제가 부작용이 없을리 없었다.

연합군에 대한 이 찬란한 승리를 절대 오만한 군 장성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중략) 그러려면 자신이 지휘하는 공군력에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주어야 했다. (p. 122)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됭케르크의 불길한 <정지 명령>이었다. (p. 123) 히틀러에게 제발 다시 돌진해서 작전을 끝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독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군데 자신의 힘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p. 124) 페르비틴의 도움을 받아 스당을 돌파한 이후 독일 특유의 속도전을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만 이 속도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행했다. (p. 125)

그 유명한 됭케르크 탈출작전에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독일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승리'라고 불려지게 될 히틀러의 정지 명령 때문이었구나... 하지만 히틀러는 이 중대한 실책에도 자신의 무오류성을 확신했고 그의 측근들도 두려움과 감격으로 이 희극에 동참했다고 한다. 여느 독재자들이 늘 그러듯이 말이다. 하지만 페르비틴은 군대 뿐만 아니라 민간 사회에도 급격히 퍼지는 중이었고 독재자는 이러한 현실에도 무감하고 무지했다. 심지어 본인도 점차 마약류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저자가 찾아낸 것이다.

지금까지의 히틀러 문헌들에는 그 다양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혹시 놓치고 있던 맹점이 있는 건 아닐까?이 책의 목적은 역사적 사건을 실제 일어난 그대로 정확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이 책에서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보다 다른 식의 독법과 접근 방식을 제시할 것이다. 히틀러를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연갈색 개버딘 양복저고리를 입은 뚱뚱한 의사 모렐을 통해 우회해야 한다. 그는 최소한 1941년 가을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역사학이 다루어 온 것처럼 그저 특이한 주변인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1941년 가을은 히틀러의 업무 능력이 눈에 띄게 꺾이고, 히틀러 연구자들이 그 원인을 찾ㅇ르 수 없어 하나같이 진공 상태라고 부르는 시점이었다. (p. 156) 달리 말해 모렐의 주사기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히틀러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려면 그 약물의 순환을 살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p. 157) 1941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주치의는 거의 매일같이 환자A를 치료했다. 1,349일 가운데 총885일의 기록이 남아 있다. 약물은 1,100번 기재되어 있고, 거기다 800회가 조금 안 되는 주사가 추가된다. 그렇다면 기록된 날에 하루 한 번 꼴로 주사를 맞았다는 소리다. (p. 162)

유대인을 마약하는 민족으로 치부하며 반마약정책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에게 칼을 휘둘렀던 히틀러가, 육식을 금하고 채식으로 금욕주의자처럼 일상을 영위하는 것처럼 알려졌던 히틀러가, 주치의로부터 거의 매일 주사를 맞았다. 대체 어떤 성분이었을까? 처음엔 그저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없애거나 활력을 높이는 약물들이었다. 하지만 전속 주치의 모렐은 다양한 성분을 임의로 혼합하여 히틀러에게 주사했다. '주사액의 성분이 매일 조금씩 바뀐다는 사실은 독재자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었다. 자신이 특정 물질에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모렐의 이 패키지 약물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독재자는 주치의 덕분에 자가 치료와 건강관리를 위한 완벽한 수단을 찾았고, 이후 점점 더 깊이 남용의 길로 빠져들었다. (p. 173)' 약하게 시작했더라도 적응된 신체에서 효과를 보려면 점점 세질 수밖에 없고 더이상 효과가 없는 성분은 다른 약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빠른 효과의 최적의 약품은 마약류였다.

모렐이 흰 종이에 검게 쓴 <오이코달>이라는 단어를 미국인들은 왜 몰랐을까? 이유는 해독하기 어려운 필체로 쓴 주치의의 기록을 영어로 번역한 공식문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문서에서 <미군 유럽 전역 군사 정보 서비스 센터>는 히틀러의 수많은 약물 가운데 오이코달을 <엔카돌>로 잘못 읽었다. (p. 207) <엔카돌>이라는 이름의 약품은 마약 목록에 없었기에 미 조사관들도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오이코달>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약이 없었다는 사실도 그게 오이코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읽기 어려운 주치의의 필체는 미국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오이코달은 C(코카인을 의미한다)와 모르핀의 혼합물과 비슷하다. (p. 208)

총통본부의 창문 하나 없는 음습한 벙커에서 히틀러는 주치의가 놔주는 오이코달을 탐닉했다. 총통의 생화학적 도취가 심해질수록 주변 사람들도 회의에 참석하거나 히틀러에게 불려간 시간을 무사히 버텨내기 위해 약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누구도 몰랐던 환자A의 상시적인 마약 섭취는 전염성이 있었다. 히틀러의 다중 독극물 중독상태는 주변 모든 이들의 현실감을 무너뜨렸다. (p. 215)' 히틀러의 전기 작가들은 이 명백한 마약 복용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가 발로 뛰어 찾아낸 문서들에 그토록 많은 마약류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마약을 탐닉했다고 해서 그의 죄가 마약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분명히 구분한다.

아편 중독은 기존의 강경 노선과 타인에게 대리 위임한 잔혹한 폭력성을 더욱 공고히 했고, 전쟁과 유대인 학살의 마지막 국면에서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목표와 동기, 이념적 망상, 이 모든 것은 마약의 결과가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틀러는 혼미한 정신 상태에서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고, 끝까지 제정신을 유지했다. 마약은 결코 결정의 자유에 제약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항상 자기 의지의 주인이었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깨어 있는 정신으로 냉철하게 행동했다. 그는 처음부터 도취와 현실 도피에 기반한 체계 안에서 끝까지 일관되게 행동했고, 지독히 철저했으며, 결코 미치지 않았다. (중략)즉,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심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그렇게 많은 마약을 스스로 복용한 것이다. 천하의 몹쓸 죄악이 경감될 수는 없다. (p. 273)

읽다 보면 히틀러는 마약체질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주치의에게 점점 더 세고 더 강하며 더 자주 주사를 놓아 달라고 했지만 그것이 마약중독이라고 여기진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대부분의 마약성 각성제들의 부작용이 히틀러에게는 신체적 징후 외에 정신적으로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주사를 맞고 오히려 더 정신을 또렷히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의 결정들은 마약으로 인한 오판이 아니었다. 그의 죄는 무엇으로도 경감될 수 없다. 저자가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 간 것은 이 책이 잘 쓰여진 책이라는 또하나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독재자와 측근들 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이젠 더 세고 더 강하며 더 자주 약물이 필요한 상태였다. 새로운 약이 필요했고 이젠 무작정 약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테스트를 하고 뿌려야 겠다는 생각들을 했다. 생체실험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 장소는 강제 수용소였다.

확실한 논거들로 나치 독일의 군대와 독재자가 어떻게 마약에 중독되어져 갔는가를 실증하는 이 책은 다시한번 강조한다. 그들이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경감된다거나 그 원인을 마약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히틀러와 제3제국의 진면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1945년 봄 베를린 벙커에서의 마지막 몰락 단계가 아니라 1944년 7월29일의 암살 사건 이후 다중 독극물 중독에 빠진 몇 개월의 자멸 기간이다. (p. 331) 제3제국에서 마약이 느슨해지는 전의를 북돋우고 지도부의 전쟁 수행 능력을 유지하는 인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논제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그 시대가 중독성 물질을 너무 많이 복용했기 때문에 탈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마약은 우리와 우리 시대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을 강화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바람직한 현실과의 끈을 상실한 채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야기한 제3제국의 뒤틀린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p. 332)

이 책의 원제가 '한스 몸젠의 후기와 함께한 완전한 중독' 인 것처럼 책의 뒤에는 한스 몸젠의 후기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공로는 히틀러와 주치의 모렐의 공생 관계에 대한 묘사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이다. (p. 337)' 라는 평가에 나또한 박수를 보탠다. 역사를 바꾼 개인들에겐 그것이 망상이든 야망이든 여하튼 남다른 본심이 있기 마련인데 중요한 것은 '현실감'인것 같다. 그 개인들이 얼마나 현실감 있게 생각을 실행하는 가에 따라 역사는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 문화에선 좀 생소할 수 있을 이 '중독'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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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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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에피쿠로스의 현존 원고 전체8편 그리스어 완역

어떤 욕망에도 흔들림 없이 살게 하는 '아타락시아'를 누리는 길

내용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학창시절 외우기에 나름 소질있었던 사람이라면 자동반사처럼 외워진 개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에피쿠로스 하면 쾌락주의 라는 댓구가 아닐까 싶다. '쾌락'이라는 어감상 쾌락주의라고 하면 왠지 방탕스럽고 타락적인 어떤 욕망을 탐닉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데 '쾌락주의'만큼 잘못 번역된 사례가 또 있을까;;;; <서양의 노자, 에피쿠로스를 통해 배우는 평정심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 이라는 뒷표지의 문구처럼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사실 스스로의 마음을 수련하고 단련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도의 과정과 비슷하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완전한 평정심 '아타락시아'를 추구하기에 '쾌락'이라는 어감이 주는 느낌과는 너무 상반되는 철학인 것이다.

'쾌락주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은 방탕과 욕망 충족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에 있음을 강조하여 자연주의 철학과 마음돌봄 조류의 선구자가 되었고, 관찰과 추론에 대한 확고한 주장으로 과학적 사고법의 시조로 인정받는다. 그는 이후 500년 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존경받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경멸받는 철학자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600년 정도 지속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현대의 자연철학과 평등주의, 미니멀리즘 사상에도 정신적 배경이 되어주는 등 그영향력은 여전히 견고하다. (책 앞날개 내용 中)

책의 앞날개에서 에피쿠로스의 생애와 그의 철학을 간략하게 잘 정리해놓았는데, 그 소개글 중 '그의 학교는 고대 그리스 철학 학파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을 받아들인 최초의 학교였다.' 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철학이 당대에 존경과 경멸을 동시에 받게 된 이유는 여성도 평등하게 대했다는 선구자적 마인드 때문이기도 했다.

사상은 시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법,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고대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망하고 권력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기에 그의 철학은 그러한 혼란에서 완전한 평정심을 추구하게 되었고, 나름 융성하게 퍼져나가던 그의 철학이 쇠락한 시기는 기독교의 전파로 개인의 철학이 아닌 공동체적 종교가 자리잡아가면서 부터였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종교화되는 신에 대해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에피쿠로스에게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p. 20)

이제 나는 에피쿠로스의 모든 철학이 집약된 그의 세 편의 편지를 제시하여, 그가 이 저작들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고 가르쳤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나는 그의 [주요 가르침들]과 그가 한 말 중에서 인용할 가치가 가장 높은 것들을 선별해 제시함으로써, 당신이 에피쿠로스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고 판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규범론, 자연학, 윤리학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p. 35)

고대 철학자들의 저서가 온전히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처럼 에피쿠로스의 직접 저술한 저서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이 책은 에피쿠로스 사후 약 500여년이 지난 시점의 로마시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쓰고 정리한 글을 원전완역한 책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느낌이 쾌락과 고통, 이렇게 두 가지라고 말한다. 느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서 생기는데, 본성에 고유한 것은 쾌락을 낳고, 본성에 이질적인 것은 고통을 낳는다. 쾌락과 고통에 근거해 선택과 회피가 결정된다. 탐구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실제와 관련되고, 어떤 것은 단지 말과 관련된다. 이것이 철학의 구분과 진리의 기준에 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다.

주석> 고대 그리스인들은 본성에 고유한 것을 아가토스' 즉 '좋은 것' 또는 '선'이라고 하고, 본성에 이질적인 것을 '카코스' 즉 '나쁜 것' 또는 '악'이라고 했다. 이렇게 그들에게는 자연학과 윤리학이 서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선'이나 '악'이라고 말했을 때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p. 39)

역자 박문재의 현대지성 클래식 그리스어원전완역본을 여러 권 읽었기에 이번 책에서도 믿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역시나 주석과 해제가 탄탄해서 읽기 좋았다. 책을 읽는 내내 '쾌락'이라는 단어를 쾌락이 아닌 다른 단어로 읽을 때 좀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이해되어지는 면이 있었다. 쾌락이라기 보다는 즐거움 이나 만족 같은 단어 말이다. 어찌되었든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쾌락은 고통의 반대어다. 이 점만이라도 주지하고 있으면 쾌락의 오해에 덜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완전한 축복과 불멸을 누리는 어떤 존재가 천체들의 운동,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천체가 뜨고 지는 것을 비롯한 유사한 현상들을 이제까지도 정하고 주관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주석-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론적 사고에 젖어 이 모든 천체 운동과 현상을 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완전한 축복'과 '불멸'이라는 본성을 지닌 신들은 이런 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 (p. 67)

우리는 이것(천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적 존재를 끌어들여서는 안 되고, 신적 존재를 이런 일로부터 해방시켜 완전한 행복의 상태에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체 현상의 원인에 관한 모든 탐구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p. 84)

천체 현상은 여러 방식으로 설명해야 하므로 오직 한 가지 원인만을 고집하는 것은 미친 짓인데도, 생각없는 천문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런 천체 현상에 공허하고 헛된 오직 한 가지 원인만 제시하며, 신적인 존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 (p. 94)

신은 불멸하고 축복받는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훼손하지 않는 것만 모두 신에게 속한다고 생각하라. 신들은 존재하고, 신들에 대한 지식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들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p. 108)

고대에는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자연현상들에 대해 신적 존재를 대입시킴으로써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기원전에 이미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사고방식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자연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실제 보고듣고느끼는 현상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만이 참된 깨달음을 얻게할 수 있었다. 미신적이고 신화적으로 절대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불안 보다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로운 마음을 추구하는 것,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지금 봐도 굉장히 혁신적인 면이 있어 보였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던 쾌락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소박한 생활은 금욕이 아나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엇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불교의 수련이나 도교의 무위를 생각나게 하기도 해서 고대철학들의 여러 사조들 중 분명 차별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후의 철학은 극한의 금욕주의나 극한의 종교주의적 철학만 남은 것을 보면 '평화'를 추구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참 어려운 일같다. 여하튼,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마음대로 누리는 방탕한 쾌락이 아니라는 점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이 얇은 책에서 소개하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듬성듬성하다. 원전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남은 자료들을 완역한다고 해서 그 철학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자는 해제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들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짧지만 명쾌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로 '즐거움'으로 번역해도 되는 단어이고,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방탕한 쾌락은 참된 쾌락이 아니라도 단호하게 말했으므로, 우리말에서 부정적인 어감을 보이는 '쾌락'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삼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가 행복을 쾌락(즐거움)과 연결한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 (p. 170)

책의 이해를 돕는 그 다양한 설명들 중에서도 나는 초반의 위 구절이 그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받아온 오해를 날리는 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 쾌락이 그 쾌락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정말 안타까워서 자꾸 이 쾌락에 대한 오해를 얘기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본성적인 욕망의 적절한 충족을 통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아포니아),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에 따른 참된 지식으로 모든 거짓된 판단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아타락시아'(마음에 소란이 없는 평정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함으로써 견유학파가 지향하는 금욕 생활과 고행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p. 187)

에피쿠로스 학파는 600년 정도 지속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철학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다. (p. 192) 에피쿠로스 철학은 그리스본토를 넘어 지중해 세계 전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중략) 하지만 기원후 1~2세기에는 로마의 전통적인 가치에 더 부합했던 스토아학파 철학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고, 기원후 3세기 이후에는 기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면서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다가, 기원후 5세기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p. 193)

에피쿠로스는 천체 현상에 관한 이전 자연철학자들의 여러 설명 중에서 어느 것이 옳거나 가장 나은지를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이 유추에 따른 판단에 비추어 부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그대로 채택해 제시한다. 천체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철학의 중심은 자연학이 아니며, 원자론적 세계관과 인식론에 입각한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p. 196)

고대의 문헌들이 오랜 세월 보관되어져 오는 과정에 이런저런 선택들이 있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그 많았다는 책들이 단 한권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과거 어떤 시대의 철학들과 상충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더욱 안타까울 뿐인데... 생활방식과 신과 종교를 떠나 그저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유지계승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미련을 가져본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의 본성이 좀더 착해지지 않았을까 싶다는;;;; 그래서인지 '철학'을 해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조언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읽고 나서 가장 내 마음에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할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났다고 하는 것은 아직 행복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났다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젊었든 늙었든 철학을 해야 한다.

행복하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고,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을 해야 한다.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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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2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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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례에 걸쳐 벌어지며 승자와 패자가 끊임없이 뒤바뀐 중동전쟁.

이스라엘은 어떻게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을까?

중동국가들은 왜 패배했을까?

그리고 이 전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임용한이 말하는 중동전쟁의 본질!

이런저런 세계사책을 읽으며 항상 느꼈던 건 우리가 알았던 세계사는 세계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엔 다른 지역보다도 특히나 중동지역의 역사가 너무나 빈약했다. 현대사의 주인공은 서쪽인지 몰라도 문명의 태동은 동쪽에서 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쪽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쪽보다는 동쪽의 역사에 제대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중동 전쟁'이라는 제목부터 '토크멘터리 전쟁사, 차이나는 클라스 출연' 이라는 홍보문구까지 이 책은 역사에 관심있는 나로서는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이력을 보니 한국사 전공이다. 음? 그래 뭐 역사로 이어져 이어져 중동사에 세계사까지 섭렵했을 수 있지... 그런데 중동전쟁이 알고보니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을 말하는 거였다. 음? 내가 생각한 중동이 그 중동이 아니었네;;; 그래 뭐 그래도 중동지역에서 여전히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이니 알아두면 좋을 전쟁사겠지...;;;

저자는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의 말'에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기록을 남기는 자가 역사의 승자다. (p. 5)' 라고 말하며 자료수집 당시 이스라엘 쪽 자료 외에 다른 자료들은 그닥 많지 않아 본의아니게 분량을 양쪽 공정하게 할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이른바 중동전쟁의 시기는 1948~1973년 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가 봤을때, 어떤 전쟁사...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건국기에 가까웠다. 뭐.. 이스라엘이 그들이 일으킨 전쟁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했으니 그게그거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룸멜의 시선을 따라 동쪽으로 500킬러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이집트군 진지. 중위 가말 압델 나세르는 고요하고 황량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나세르 중위는 마음 속으로 타는 분노를 삭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룸멜의 등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가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이집트군은 할 일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영국은 이집트 정예 사단의 무장을 해제하고 병력을 후방으로 돌렸다. (p. 13)

일면 소설처럼 시작되는 이 책은 전쟁사 책이지만 종종 이런 식의 서술을 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여주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앞뒤 정황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본문 자체만으론 서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외국인 이름은 이름만으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세계대전의 양상이 어떤 상황이었던건지 설명이 없기에 소설 속 화자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레이션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첫 장이다. 생선을 먹었는데 머리도 꼬리도 없이 몸통 한가운데만 먹어서 무슨 생선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시작이었달까.

팔레스타인, 성경에는 '가나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언급된 이곳은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늘게 뻗어 있는 지대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농사가 신통치 않아 유목으로 살아가는 지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말처럼 비옥한 지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부의 레바논과 시리아처럼 무역으로 부를 쌓는 도시도 없었다. (p. 21)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든 특별한 조항은 바로 '토지 소유 금지'였다. 이것이 유대인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p. 2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좋은 의미인줄 알았더니 저렇게 해석하면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아보여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유대인의 계율에 토지소유금지 조항이 있어서 디아스포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그런데,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은 제국 지배령 중에서도 가장 낙후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매입하고 자그만한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p. 28)

가난한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대부분 아랍인 지주의 소작인으로 살았다. 조상 대대로 땅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 불쌍한 농부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 대해 법적 소유권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굳이 인식하려 하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등기상의 소유주가 누구든 땅을 갈고 소출을 먹는 사람들은 자신들이었다. 이거이 농부의 마음이고 농부식의 소유권이었다. (p. 49)

유목으로 살아가는 땅이라더니 토지소유를 할 수 없는 유대인이라더니,

농부로 살아온 팔레스타이인들이 아랍인들에게 땅을 사들인 유대인들에게 밀려났단다.

이 간극에 대한 부연 설명은 없다. 역사는 사실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객관적 사실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시작부터 이 책은 객관적역사를 사실 그대로 연대기적으로 제시하는 서술을 선택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자는 간혹 지나친 사견을 피력해서 읽는 이를 좀 거북하게 만들때가 있는데, 예를들어, 유대인들에게 국가건설이라는 로망을 심어주었던 헤르츨 가문의 비극을 다루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헤르츨의 아들을 보호하러 나선 프로이트에 대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개척자이긴 하지만 허황된 이론을 내놓기 일쑤였다. 수제자인 융도 프로이트의 집요한 엉터리 해석에 질려 영원히 그를 떠났다. (p. 36)' 라는 표현은 특히나 거슬렸다. 개인적으로 프로이트를 존경하고 있고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배경을 다른 책으로 이미 알고 있던 나로서는 저런 문장은 왜곡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전쟁사를 서술함에 있어 좀더 자연스러운 맥락적 보충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아쉬움은 본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전쟁사를 훑어감에 있어서도 또한번 느껴졌는데, 연대기적 서술을 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스라엘쪽에서 다시 아랍쪽에서 서술하다보니 중복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건 알지만 그 앞뒤 설명이나 연결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읽다보면 어?아까읽은것같은데? 하는 부분들이 자꾸 나와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여하튼, 전쟁은 펼쳐졌고 점차 강도도 세져간다.

팔레스타인은 태어나자마자 타향에 버려진 신생아나 다름이 없었다. 아랍 국가들이 신생아를 돕기 위해 모였지만, 순식간에 이해관계가 복잡해졌다. (p. 88)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랍국가들이 역사는 오래됐지만 오스만제국이나 서구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는, 근대 국가로 따지면 신생 국가나 다름이 없다는 점이다. 국민의 교육, 기술, 문화 수준은 더욱 그랬다.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고, 군대는 준비되지 않았다. (p. 89)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딱 한 가지 뿐이다. 1948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 질서는 아직 없었다. (p. 99)

총체적 난국이었고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가장 실속을 챙긴건 이스라엘 이었다. 그러니 나라까지 만들어냈겠지.

여기저기서 총탄이 날아다니고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전쟁 전투 씬이 아무리 격화되어도 서사적 연결 맥락은 여전히 뚝뚝 끊겨서 흐름을 잡으며 읽기가 힘들었다. 예를들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감정선을 유지하는 나라가 있었다. 북쪽의 이웃 시리아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는 마치 한국과 일본처럼 해묵은 적개심이 존재한다. (p. 250)' 이라고 시작하고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을 설명하면 나같은 사람은 대체 왜 그 두나라에 해묵은 적개심이 있는데? 라는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서 전쟁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늘 부연 설명이 없다.

이스라엘의 계산된 폭력은 대책 없는 폭력보다 더욱 무서웠다. (p. 185)

이스라엘군의 대응은 항상 도가 지나쳤다. 단순히 '적이 1발을 쏘면 우린 10발로 갚아준다'라는 보복 심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p. 251)

저자는 '우리가 아는 사실은 이런 불완전한 평화마저도 먼 길을 돌아와야 했고,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의 변화와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깨달음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결합한 증오와 편견은 평화를 향한 의지보다 더 강하고 질기다는 것이다. (p. 534)' 라며 중동전쟁사를 마무리하지만 나는 사실 이렇게 1970년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까지 이야기를 이어와야 하지 않았나 싶어 아쉬운 마무리였다. 이 책의 부제에서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라고 하지 않았나? 그 정치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은 아마 그 이후일텐데 싶어서 말이다...

여하튼, 이런저런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에 대해 시작과 전개를 거쳐 이스라엘 건국기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었기에 그 유용성은 어느 정도 있다 할 것이다. 그래도 다음엔 좀더 자연스러운 연결과 배경설명이 세세한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이 전생사 시리지의 한 권이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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