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국보 -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숨은 명작 문화재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보·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걸작 문화재 35점!

'얼굴 없는 국보'의 예술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밝힌다

역사읽기를 좋아하다보니 문화재라던가 유물유산에 관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고궁을 더 재밌게 느끼게 했고 박물관 가는 것을 더 즐겁게 만들어주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다보면 매번 놀라게 되는 것이 세상엔 어쩜 그리도 보물이 많던지 ㅎㅎ

하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본 스토리보다 뒷이야기가 더 흥미롭지 않나, 유물유산 이야기도 뒷이야기를 알고 나면 세상이 이런 일이 하면서 별것 아닌것처럼 보이던 것이 괜히 특별해 보이게 된다. 더구나 '지금 당장 국보·보물로 지정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숨은 문화재 이야기라니 어떤 보물들 이려나 어떤 뒷이야기들이려나 궁금하지 않을 수가.ㅎ

사실 국보로 지정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주관적이라 하겠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 제작 연대가 오래되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것, 제작 기법이 우수해 그 유례가 적은 것, 형태·품질·용도가 현저히 특이한 것,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 등 모호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국보·보물 지정 권한을 가진 문화재위원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서문 中)

저자는 역사나 문화재와 전혀 상관없는 학문을 전공했지만 한국사와 문화재에 빠져들어 공부하고 관련 일들에 참여하다보니 이렇게 역사관련 교양서도 쓰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뒷표지에서 '문화재 기자가 들려주는 비지정 국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라는 문구를 보니 아마도 기자로 활동하다가 문화재 칼럼까지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기자가 쓴 글이니 가독성은 담보된 책이 아닐까 기대가 되기도 했고. 하지만 문장표현방식이 굉장히 옛스러워서 퇴직한 기자분이 개인적으로 역사공부하면서 취미로 쓰신 건가 싶어졌다는;;;

여하튼 저자 왈, '예술사적, 역사적 의미를 고려할 때 진작 국보·보물로 지정돼야 마땅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지 못한 유물이 무수하다. 필자는 국보, 보물이라는 타이틀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런 문화재를 '무관의 국보'라고 부르고 있다. (서문 中)' 라면서 35점의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다. 전체 내용을 8챕터로 나누고 있지만 사실 챕터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여서 관심가는 보물 이야기를 골라 읽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무관의 국보' 라는 멋진 제목에 맞추어 35점의 보물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아쉽고 안타까운 뒷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더랬다. 아니 이런 문화재가 왜 국보나 보물 선정이 안되었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새로운 보물들을 발견하게 될 책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뭔가 좀 아쉬웠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들을 소개하고 있긴 한데, 왜 국보나 보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그런데 왜 선정이 안되었는지 그런 핵심이 빠져있는 것 같았다. 문화재 소개는 하고 있는데 그래서 뭐? 라는 기분이 든달까.

그나마 흥미로웠던 문화재는 쓰러져 있는 '열암곡 마애불' ,

그리고 김명국의 그림과 신사임당의 그림 그리고 각종 현판들은 하나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무관의 국보'에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때론 이 문화재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이 됬다는건지 안됬다는 건지 내용상 언급이 좀 불명확한 부분도 있었는데, 특히나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은 나름 자세히 그림들을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이 문화재가 어떤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건지 아닌건지 알수가 없었다. 하나의 에피소로 글이 써진걸 보면 '무관의 국보'인것 같기는 한데;;;

여하튼 표지도 멋지도 제목도 멋지고 숨은 보물을 발굴한다는 취지도 좋은 책이긴 했는데, 내용이 그에 못미치는 것 같아서 좀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 문화재 관련한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고 널리 읽히길 늘 응원한다. 기왕이면 좀더 재밌고 좀더 흥미진진하게 쓰여지면 더 좋겠고. 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겔의 정신현상학 - 자유의지, 절대정신에 이르는 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창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통철학의 완성이자 현대철학의 출발점

자유의지의 철학자 헤겔의 철학 세계

내가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헤겔이라니 하물며 정신현상학이라니 언제 읽어봤겠는가? 아니 읽어볼 엄두초자 내 봤겠는가? 하지만 EBS books의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라면 이 어마무지한 철학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그것도 짧고 굵게. 역시 멋진 시리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참으로 어려운 책이다. 문장의 앞뒤를 맞추어보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며,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가를 말하기도 곤란하다. 부분적인 이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아무도 이 책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분면하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대학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간이나 이책을 읽고 또 읽었으나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이 많이 남아 있다. (p. 6)-서문 中-

고전 관련 책은 저자가 참 중요하다. 특히나 번역서를 바탕으로 할 경우 번역서도 중요하다. 철학은 해석이 중요한 학문이므로 당연히 그 분야의 전공자 책을 읽음이 옳다. 이 책의 저자는 헤겔의 책을 50년간 읽어왔다니 그러고도 어렵다니 그 오랜 세월 고민해왔기에 그렇기에 이 짧고 굵은 책 한권으로 요약해줄 수 있었던게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헤겔의 책 원전을 번역한 본인이므로 더욱 믿을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한 자유의지의 개념을 밝혀보려 한다. 헤겔에게서 자유의지는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머릿속에서 판단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생사를 다투는 투쟁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자유의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한다. (p. 8)-서문 中-

'독일의 근대화 초기에 살았던 헤겔에게서 자유는 그의 시대를 끌고 가는 지도 이념이었다. 그에게서 역사는 자유의 역사이며, 국가는 자유의지의 산물이다. 헤겔이야말로 사르트르 이상으로 자유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 먼저 자유가 무엇인지 밝혀야 하지 않았을까? (p. 7)' 철학자들의 사상은 본인들이 살았던 그 시대를 떠나서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를 바탕으로 그들의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헤겔하면 절대정신이니 세계정신이니 하는 뭔가 거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철학을 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는데 헤겔 철학의 핵심중 하나는 '자유의지'였다. 하긴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에서 인간의 의지를 파고들지 않을 수 없는 건지도...

이 작고 얇은 책을 통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조금이나마 쉽게 설명하려면 핵심포인트를 잡는게 중요했을 터, 저자는 역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헤겔 철학을 풀어주는데, 쉽게 설명해주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마냥 쉬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읽었다. 조금이나마 이해한 문장이 있는게 어디냐 하면서.ㅎ

어떤 규범을 발견하더라도, 규범을 실천하는 의지는 또 다른 문제인데도, 철학은 이런 의지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p. 15) 베를린대학 입구 계단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철학은 다만 여러 가지로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의 말이지만, 헤겔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다. 철학은 이제 이 의미에서 실천적 의지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p. 18)

헤겔 철학이 실천의지를 중요시 여겼구나... 고리타분한 철학일 줄 알았더니 은근 역동적이었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도 낭만주의 철학과 더불어 낭만주의가 제시한 양심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헤겔이 낭만주의 비판에 나선 것은 그 시대 독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독일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간에 걸친 종교전쟁을 끝냈다. 이 종교 전쟁은 신교와 구교 간의 전쟁이었지만 유럽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세계 전쟁이었다. 전쟁 결과, 독일은 수십 개의 작은 국가로 분열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보듯이, 독일은 유럽에서도 선진 국가여쓰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근대 사회로의 발전이 중단되고 오히려 봉건 체제로 거슬러올라가게 되었다. 19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정치적으로 민족 통일국가와 민주주의가 확립되며, 사회적으로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반면 독일은 분열 속에서 여전히 중세의 봉건적 반동과 민족적 분열, 종교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독일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길, 다시 말해 독일을 통일하고 개혁할 새로운 정신이 필요했다. (p. 29)

새로운 정신의 필요성은 항상 불운한 시대에서 탄생하기 마련인가 보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서인가... 여하튼, 헤겔은 낙후된 독일을 일으킬 새로운 정신을 찾아내려 애썼다.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선진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역사를 발전시킬 원동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헤겔이 개인의 실천의지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다. 시대의 역사성이 발전을 못하고 있다면 개인의 실천의지가 더 중요해졌다고나 할까.

새로운 정신은 자아의 힘과 실체의 객관적 힘을 결합, 통일해야 한다. 새로운 공동체는 억압적인 체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아를 인정하는 자유의 체제여야 했다. 그러면서도 고립적인 개인으로 분산된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여야 했다. 이런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개인이 자발적으로 공동체에 복종하는 자유의지가 있어야 했다. 헤겔의 길은 곧 공동체적 자유의지라는 정신에 있다. (p. 32) [정신현상학]의 전체 구성을 본다면 헤겔이 추구했던 핵심이 곧 자유의지이고 헤겔이 도달하려 했던 최종 목적은 곧 공동체적 자유의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현상학]은 형식적 자유의지에서 실질적 자유의지를 거쳐 공동체적 자유의지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드라마이다. 그러나 이 책은 자유의지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중략) [정신현상학] 이 책은 포괄적인 사상사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헤겔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자유의지라는 실천적 문제이다. (p. 33)

헤겔의 철학은 몰라도 헤겔이 말을 나폴레옹을 보고 '저기 세계정신이 온다' 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꽤 유명하다. 사실 나는 이 에피소드에서의 세계정신을 절대정신과 구분하지도 못했고,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생각하며 만든 교향곡 [영웅] 악보를 찢어버렸다는데 헤겔은 나폴레옹을 세계사적 영웅으로 간주했다고 하니 헤겔철학은 좀 문제있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헤겔이 나폴레옹을 '마상(馬上)의 세계정신(p. 224)'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서 그것이 칭송이나 찬양의 표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좀 알겠다. 그러니 혁명의 주인공을 우러르기 위해 만든 교향곡을 황제가 된 사람에게 줄 순 없어서 찢어 버렸을지라도, 그 사람이 역사의 흐름에서 '세계정신'일 수는 있는 거였다. 하지만 세계정신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그저 '개인'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정신은 개인의 정신이었다. 그런 정신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면서 앞의 정신보다 더 포괄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절대정신은 더이상 개인이 지닌 어떤 정신은 아니다. 절대정신은 하나의 공동체이다. (p. 232) 절대지는 [정신현상학]이 추구해왔던 자유의지가 실현된 결과 즉 진정한 공동체이다. 헤겔은 진정한 공동체는 이 자유의지의 실현을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절대지는 정신이 발전한 최종형태다. 그런데 헤겔은 이 절대지에서 학문이 출현한다고 한다. (p. 247)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정신 형태의 역사적 발전을 현재의 스크린에 투영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논리적 체계가 된다. 이 논리적 체계를 다시 역사적 시간 위에 투영하면 정신 형태의 역사적 발전이 ㅊ생긴다. 이 같은 형태의 발전에서 최종적인 형태가 절대지다. 절대지는 가장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정신의 형태다. 이 절대지에 이르면 이전의 정신의 형태는 모두 그 속에 내적 계기로 포함된다. 이 내적 계기가 이루는 논리적 체계가 곧 학문이다. 학문의 출발점은 논리학의 가장 추상적인 개념인 존재인데, 절대지가 바로 이 추상적 존재에 해당한다. (p. 248)

역시 어렵긴 어렵다;;; 개인의 실천의지가 역사 속에서 발현되는 과정에 따라 세계정신이 되고 그러한 세계정신들이 하나의 공동체적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또한 역사적 발전 과정인데 이 공동체적 절대정신이 발현된 것이 절대지이고 이 절대지에서 학문이 출현하는데 그 학문일 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다시 공동체적 절대정신이이라는 딱이 원이 아닌 순환고리가 머리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하긴 어려운게 당연한 것 아니겠나? 이 작고 얇은 책으로 헤겔의 철학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ㅎㅎ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또 아예 모르겠는 기분도 아니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뭐 조금은 알겠고 하지만 뭐 여전히 어려운 그러나 왠지 지적 세계가 풍족해진 것 같은 그런 기분?! ㅎㅎ 이 시리즈의 구성이 다 비슷하듯이 이 책또한 책 말미에 '철학의 이정표'라고 참고도서를 안내해주고 있으니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이 참고서들을 읽어보면 될 것이다. EBS books 오늘 읽는 클래식 헤겔편! 이번에도 역시 만족스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이 리히텐슈타인 베이식 아트 2.0
재니스 헨드릭슨 지음, 권근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사 거장들을 만나볼 수 있는 베이식 아트 시리즈!

미국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

화가의 이름을 몰랐을지라도 그림은 본 적있을 법한 만화풍의 그림, 상업적 그림이라고 하면 앤디 워홀이 주로 떠오를 테지만 그림을 보면 익숙하게 아하 이그림! 하게 되는 또다른 상업적 그림들의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미술전문 출판사인 마로니에 북스에서 베이식아트 시리즈로 나온 책들은 도판이 크고 선명해서 그림 보기에 참 좋으면서도 화가 한 명을 집중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화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는데 이번 화가는 '팝 아트의 창시자' 라고 불리는 대표적 미국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이다.

리히텐슈타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대상 지향과 피할 수 없는 미술가의 의도 지향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중시했다. 그는 이런 긴장감이 자기가 그린 이미지의 주된 힘일 뿐 아니라 이미지를 익살스럽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p. 11)

'리히텐슈타인은 미술시장의 주류와 관계를 맺으려 (p. 16)' 애썼지만 화가로서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계를 주름잡고 있을 때 리히텐슈타인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는 힘들었고 그렇게 리히텐슈타인은 자의반타의반으로 다른 방향의 표현법과 주제를 생각하게 되면서 디즈니애니메이션 캐릭터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산업인쇄 기법을 응용하고 만화캐릭터를 그리는 것을 넘어 말풍선까지 넣은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예술로 간주될 수 있었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Yes 이다. 심지어 리히텐슈타인과 비슷한 시기에 앤디 워홀도 만화 주인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 표현기법에 있어 더 창조적이었던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워홀의 그림을 제치고 갤러리와 계약을 하게 된다.

그는 고급예술에 익숙한 대중에게 가장 저급한 것, 가장 예술성을 박탈당한 예술을 제시함으로써 논점을 던졌다. 그는 "나는 어떤 것은 예술이고 어떤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구분 짓는 기준을 늘 알고 싶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p. 25)

'리히텐슈타인은 상업미술의 즉각적인 힘에 매료됐을 뿐더러, 상업미술 작품의 형태 속에 미술가의 의도가 효율적으로 나타나는 데 감탄했다. (p. 26)' 리히텐 슈타인은 디즈니주인공들을 그리고 광고지나 다른 상업적인 것들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그림에 대한 화가로서의 의도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의 독창적 그림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게 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팝아트계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그림에서 부러워한 것은 벤데이 점이었다. (p. 41)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만화풍도 특징적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가치를 높여준 것 중 하나는 '벤데이 점'을 활용한 표현법이었다. 그렇다고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모두 만화적이고 모두 벤데이 점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다양했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여러 해 동안 리히텐슈타인은 미술양식 시장을 어슬렁거리듯 거의 모든 현대 미술 운동에 반응했다. 그러나 그가선택해 응용한 양식들은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형태의 단위였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은 연대기적 순서를 지켜가며 미술사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p. 70)' 만화풍의 그림만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책을 보며 리히텐슈타인의 새로운 그림들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여러 가지 탐험을 했지만 모더니티의 미로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중에 많은 영역을 발견하고 또 재발견했다. 아마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 거슬리는 모순과 숨겨진 유머일 것이다. 그는 우리 보이는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 과연 21세기에 미술이란 도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p. 91)

그러니까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그가 어떤 스케치를 했고 어떤 만화 캐릭터를 그렸으며 어떤 아르데코풍을 묘사했고 어떤 화가의 그림을 참고했든 간에 전체적으로 모던하다. 그래서인지 깔끔한 모던풍을 좋아하는 나는 이 책 속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을 보는 내내 편안하고 좋았다. 그가 어떤 풍자를 담고 어떤 의미를 숨겨놓았든 상관없이 그림을 불편한 마음 없이 그저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화, 치유, 인간 - 삶이 흔들릴 때 신화가 건네는 치유의 말들
신동흔 지음 / 아카넷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화는 어떻게 내 삶이 되는가

신화를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한다. 그래서 꽤 많은 신화관련 책과 역사서들을 읽어왔는데, 신화가 내 삶에 치유의 말을 건넨다라... 신선한 접근이었다. 신화나 역사에서 교훈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로인해 위안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삶이 흔들릴때 그 삶에 치유까지? 게다가 흔한 그리스로마신화 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과 한국의 신화까지 합쳐서? 참으로 궁금했다. 이 책이.

삶을 일깨우는 영원한 신성의 이야기, 신화로의 새로운 여정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한다. 화두는 '내 안의 나'다. 세계의 신화를 거울로 삼아서 자기서사의 속성과 좌표를 살펴보고 나아갈 방향을 찾아보고자 했다. (p. 5) 나의 쉽지 않은 탐색의 여정에 거점이 돼주고 힘이 돼준 것은 한국신화였다. (p. 6) 우리 신화를 줄이고 외국 신화를 넣어 구색을 갖추는 대신 화두에 어울리는 신화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p. 7) -머리말 [치유적 신화 읽기] 中-

이 책은 신화들을 통해 '나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자기서사'에 신화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일까?

한 사람의 삶은 간단하게 얘기하자만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은 (1장)창조신화에서 나의 존재의 시원을 유추해 보고 (2장) 자연신화에서 세계와 나를 연결하며 (3장)영웅 신화에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4장)애정 신화를 통해 다시 연결과 확장을 하고 (5장)생사 신화를 통해 삶이 영원일 수 있고 영원이 삶일 수 있는 '서사'를, 그렇게 한 개인의 서사 즉 '나의 서사'를 신화로 보여준다. 낯설어 보이는 이 접근이 막상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보다 우리의 삶은 참 신화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ㅎㅎ

시끄러운 내적 갈등과 쉼 없는 피로의 시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오래 흘러운 원형적 신화들과 함께하는 명상과 치유의 여행이다. 한국 구전 신화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신화를 서사적으로 가로지르는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는 내적 실존을 깨워보고자 한다. 누군가를 위한 일임에 앞서, 나 자신을 향한 일이다. (p. 15) 신화는 무엇인가? 흔히들 신화를 '신의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정확한 답은 아니다. (중략) 신화는 '신성의 이야기'다. '신성'과 '이야기'가 결합하면 신화가 된다. (p. 16)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글을 읽고 막상 꼼꼼이 생각해보니 신화에는 신들도 영웅들도 그냥 인간들도 두루 등장한다. 때론 동물까지. 따라서 신화는 신성한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 그러니 신화를 신화답게 하는 신성성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요소를 탐구하다 보면 나름 신령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신화는 나의 삶으로 투영된다.

여러 신화에 그려진 태초 세계의 형상을 주요 단어로 표현하면 고요와 적막, 혼돈과 미분, 알, 물과 불, 어둠과 밝음, 흐름과 타오름 등을 들 수 있다. 구체적 형상이 없는 아득한 무정형의 세계이면서, 무엇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생명적 에너지와 창조적 역동이 내재한 세계다. (p. 18)

세계 곳곳에 다양한 인간들이 살아온 만큼 세상 곳곳에 다양한 신화가 존재하지만 막상 뜯어보면 신화들은 생각보다 무척 많이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화는 결국 인간들이 만든 이야기이고 그런 신화가 비슷하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던 인간들이 비슷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 랄까. 그러니 인간의 존재적 시원도, 달라 보이는 신화 속에서 결국은 비슷하게 발견하게 된달까. 가장 유사한 점은 '인간의 탄생이 신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p. 27)' 인간은 자신의 기원을 신화에서 찾도록 해놓았다. 인간에게 신성성이 있다는 것, 그러니 신화에서 인간에게 치유의 말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신화도 종국엔 인간의 이야기니까.

세계 여러 창세 신화는 태초에 수행된 창조의 불완전성을 말한다.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부자유는 어쩌면 우리가 속한 세계의 본원적 속성일 수 있다. 대극을 이루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얽히는 가운데 쉼 없이 역동하는 천변만화의 세상, 하염없이 부딪치고 부대끼면서 나를 살릴 무언가를 찾아서 심신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운명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또는 죽어가는 것이 이승 속 인간의 길이다. (p. 49)

신성성을 지닌 인간은 태초의 이야기부터 서로 상극인 것들이 서로 모순적인 것들을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갈등과 쟁투는 필연적이었달까. 그러니 끊임없이 질서를 추구하게 되었달까. 그래서 좀 괜찮은 조화를 만들어냈다고 여겨졌을 때 선을 넘는 인간에게 다시금 자연의 신성성이 깨우쳐 주는 것이다. 신성성이 있다해도 인산이 신 인 것은 아니라고.

신의 피조물로 만들어졌든 신의 자식으로 태어났든, 이 세상 자연 만물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 혈족으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신의 기운을 간직한 채로 살아 있으며,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 속에는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신화에서 인간은 여타 자연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창조물로 말해지기도 하지만, 별도의 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p. 67)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자연이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문명과 문화의 발달에 따른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 관계의 재구성이다. (p. 85)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태초의 거대한 창조신이나 거인 등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p. 87)'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수메르 신화에 나왔건 그리스 신화에 나왔건 북유럽 신화에 나왔건 인도의 신화에 나왔건 그리고 한국의 신화에 나왔건 여하튼, 거인이라든가 모신들은 후세대의 신들에 의해 밀려나긴 했지만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말은 없었다. 여전히 자연속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요컨대 문명의 역사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했다는 것은 단지 부분적인 진실일 따름이다. (p. 88)' 인간이 오만해질때 그 태초의 고대신들은 자연의 모습으로 다시 인간앞에 현현한다. 인간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

세계 신화에서 영웅의 위치는 크고도 특별하다. 영웅은 신화에 역동성을 부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곤 한다. (p. 123) 하지만 신과 영웅은 정체성과 속성 면에서 차이가 있다. (중략) 신은 개념 범위가 넓고 가변성이 크지만, 그 본래적 속성을 자연성과 영원성에서 찾을 수 있다. (p. 124) 이에 비하면 영웅은 명백히 인간의 속성을 지닌다. 자연이라는 크나큰 신적 세계 앞에 선 인간, 인간에게 그 세계는 만만치 않다. (p. 125) 신화 속 영웅은 인류의 표상인 동시에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의 표상이다. (p. 137)

어떤 신은 신이라기 보다 영웅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 속 오딘과 토르는 '전지전능한 무소불위 능력자가 아니다. 오딘은 한쪽 눈을 잃은 존재이며, 토르는 거인의 주머니에 속절없이 갇혀 휘들리는 곤경을 치른 존재다. 인간이 그런 것처럼, 그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끝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p. 141)' 그래서 저자는 과거의 인기신화였던 그리스로마신화보다 최근엔 북유럽 신화에 젊은이들이 더 많이 호응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신 도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과업을 해내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는 우리 인생에 주어진 과업을 해내는데 더 힘든게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하고.

세계 여러 창조 신화에서 말하는바 하늘과 땅, 또는 남과 여 사이의 결합은 이처럼 만유의 본원적 속성과 연결돼 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운명적으로 반쪽이 되어버린 존재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내 온쪽이 되고자 하는 역동이다. (p. 181)

신이 가장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 이때일 거이다. 사랑하는 이의 예기치 않은 죽음이라는 신의 장난에 직면한 상태 (p. 247) 깨닫는 것은 그러한 살아냄이 제대로 된 죽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다시 나를 죽여야 할 때다. 일어서서 거듭나기 위하여. (p. 257)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경험할 다양한 '사랑'에 대해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신화는 말한다. 신은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법이라고. 천지간 세상을 나아가는 것은 너 자신의 몫이라고. 그 말은 신의 입을 통해서 발화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행위를 통해서 전해진다. 하나의 신령한 서사를 통해서. (p. 220)' 그 서사를 우리는 신화로 읽게 된다. 그렇게 신화는 우리의 삶 속에 계속 젖어들어 있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백년 해골이 무엇인가 하면 오래 흘러온 신령한 이야기로서의 신화가 그것이다. 보기에 따라 지난 시절의 허튼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관심을 주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만, 마음을 열고 그것을 품어서 서사적 연결을 이루어내면 삶에 질적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p. 269) 그 서사들이 오롯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그것을 온전한 나의 삶으로 살아낼 때, 존재는 모든 시공간적 경계를 너머서 영원성을 실현할 수 있다. (중략) 그 우주적 연결의 중심점이 어디인가 하면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이다. 그 연결성을 오롯이 인지하고 구현해낼 때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다. (p. 270)

신화관련 책이라고 해서 역사처럼 읽히는 책일 줄 알았더니 에세이에 가까웠다.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을 두루 섭렵해서 이렇게 개인의 삶에 하나하나 투영시킬 수 있다니 놀랍고도 신선한 책이었다. 신화를 좀 안다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이름들에 반가움이 더할 것이고 신화를 몰라도 그 신화적 에피소드의 개요를 저자가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신화를 한 권으로 압축해 경험하는 계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주 한국의 신화들로 풀어주는 내용들이 좋았다. 한국의 신화는 좀더 널리 잘 알려져야 한다. 우리네 신화도 세계 유명한 신화들과 그리 다를게 없다. 어찌되었든 신화로 풀어내는 개인의 서사가 잘 들어맞는 책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 270)' 이렇게 우리의 삶도 하나의 신화가 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평점 :
절판


엘리프 샤팍

197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과 영국, 요르단과 스페인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서 거주하고 있다. 소설가이자, 정치학자, 여성학자로서, 튀르키예의 역사, 종교, 젠더 문제, 정치적 혼란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쓴다.

대중서로 잘 알려진 영미권 작가 몇명 외에 외국 작가들을 거의 모른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뿐 작품을 몇 읽기는 했었는데;;; 하지만 터키 작가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 이다. 몇 년전에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소설을 통해 알게 됐는데 작품과 작가 모두 깊게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진한 터키향이라니! 그 역사성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새로 나온 소설 <이브의 세 딸>이 터키 작가의 소설이라는 안 순간 바로 픽! 그런데... <이브의 세 딸>은 터키소설이라기 보다는 그냥 현대소설이었달까. 재미있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터키향은 없었던... 어쩌면 오르한 파묵이 부모세대이고 엘리프 샤팍은 자녀세대라서 격세지감이 그 사이를 벌려놓은 것일지도... 어쨌든 굉장히 흡인력 강한 소설이긴 했다. 그야말로 시간순삭?!

제 아무리 겉으로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광기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유순하지도, 귀엽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제력을 잃을 가능성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몇 배는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가능성'이라는 건 맞지 않은 말이었다. 한때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민주적이며, 세속주의의 국가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튀르키예도 결국에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p. 7)

작가는 소설 속에서 현대 터키의 상황을 힐난하고 있지만 작가의 이력을 보건대 작가가 얼마나 터키적인 터키인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스탄불 이라는 독특한 도시가 터키의 대표도시이기는 하나 과연 가장 터키적인가 라고 생각하면 그또한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모든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곳 그곳이 터키인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페리는 한마디로 '혼돈'적 자아를 지닌 여성이었다. 페리는 '겉보기에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 좋은 주부, 좋은 시민, 현대적이며, 세속적인 무슬림이었다. 이 나라가 겪은 격동적인 혼란은 결국 전부 그녀의 삶에도 녹아 있었다. 그녀의 삶과 과거, 다시 말하면 페리의 인생 이야기는 결국 튀르키예의 역사엿다. 페리가 느끼는 혼란은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겪는 국가적 혼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p. 9)' 작가는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나라이름까지 바꿔버린 혼돈의 현재를 페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글쎄... 그렇게 거창하게 확장되기 이전에 그저 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히고 그렇게 한 개인의 서사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신앙과 정체성 문제는 날반트오울루 가족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유성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가족을 둘로 쪼개 버렸다. 신앙심이 아주 깊은 민족주의자 작은 아들 하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편에 섰다. 큰아들 우무트는 한동안 결심을 못 하고 있었지만, 말과 행동에서 좌파 성향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마침내 좌파의 길을 확실히 선택했을 때는 급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양분된 상황은 페리를 힘들게 했다. 아빠 멘수르도, 엄마 셀마도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엄마의 완강한 종교적 믿음과 아빠의 단호한 유물론 사이에서 페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페리는 가능한 한 그 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였다. (p. 38)

2016년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하며 서술되는 이 소설은 현재는 파티의 어느 날 하루로, 과거는 페리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그 하루로 점차 다가와 합쳐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페리가 일곱살 때부터 어떻게 성장해서 서른 다섯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현재로 오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남편의 사업적 파트너의 초대로 파티에 가던 날 페리는 핸드백을 소매치기 당하고 그 과정에서 지갑에 묻어두었던 십수년 전의 폴라로이드 사진 한장을 오랜만에 보게 된다.

페리가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감춰 두었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었다. 그건 페리의 아주 오래된 추억이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담고 있었다. (p. 42)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 세 명이 사진 속에 있었다. 그들은 대학 학사모 가운과 목도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보드레이안 도서관을 등진 그들은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속에 영원히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p. 43)

옥스포드를 함께 다녔던 세 명의 친구, 바로 '이브의 세 딸' 이었다. 페리와 쉬린과 모나.

우무트는 불법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고문관이 발가벗기고 눈을 가린 상태에서 금속 스프링에 묶어 전기 고문을 가하자 그때 비로소 권총이 자기 거라 인정했다. 고환에 전극을 묶고 두 배의 전류를 흐려보내자, 정부 주요 인상에 대한 연쇄 암살을 계획한 세포 조직의 우두머리라고까지 '자백'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던지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그들이 뭐라고 하든 다 인정하고 말았다. (p. 55)

2016년과 1980년대 1990년대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과거 속 몇 에피소드들은 우리네 과거와 너무 똑같아서 이거 한국소설인가? 싶었다. ㅎ 아하... 그래서 터키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했던가 싶기도 하고.

페리가 하나님을 추궁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기도할 수도 없었고, 아빠가 권한 것처럼 창조주를 무시할 수도 엇ㅂ었다. 그 대신에 페리는 엄마와 아빠에게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든 비난과 불만을 글 포탄을 만들어 하나님에게 날려댔다. 모든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언쟁을 ㅓㄹ였고, 쉽게 대답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질문들을-아무도 듣지 못하게 낮은 소리로-하나님에게 물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많은 부당한 일을 허락하시는 거죠? 선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교도소 벽 너머, 감방의 창살 뒤를 보고 들을 수 있기는 하신 거예요? 만약 하나님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게 아닐 것이다. 아니, 만약 보고 듣고 계신다면,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절대 전능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p. 59)

페리는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고 성장하는 내내 집안에서 봐왔던 혼란의 원인인 종교적 견해 차이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공부하는 게 마음 편했고 책속에 파묻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열심히 하는 만큼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고 아빠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넉넉치 않은 경제사정에도 불구 옥스포드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옥스포드에서 한 교수가 '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종교와 신에 대한 질문들을 가득품고 있던 페리는, 더구나 가끔 '안개에 싸인 아기'환영을 보던 페리는 그 강의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답'을 찾고 싶었다.

본 수업은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헌에서 시까지, 신비주의에서 뇌 과학에 이르기까지, 동양 철학자에서 서양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에 기초하여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때 무엇을 말하는지 탐구한다. (p. 206)

페리는 아주르 교수의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쉬린이 자신을 바꿔놓았다고 극찬했던 바로 그 수업.

소수의 학생들로 구성된 세미나 수업이었던 그 수업에 참여해보니 모나도 있었다.

구성원들은 거의 상극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각양각색의 학생들로 모여져 있었고, 따라서 시작부터 끝까지 '혼돈'을 체감시켜주었다. 하지만 아주르 교수의 질문과 그가 바라는 이상은 매혹적이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자 하는 질문은, 여러분은 신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분 자신만의 경이로운 학문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의 학문은 달라야 합니다. 누구도 흉내를 내선 안 됩니다.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세요. 다양한 학문을 종합하세요. 신이 궁금하다면 절대 종교에만 집착하지 마세요. 종교적 다툼과 분쟁은 인류를 분열시키고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수학, 물리학, 음악, 회화, 시, 무용에 적용하세요. 예술은 탐구하는 것입니다. 신학도 탐구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믿든 안 믿든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p. 369)

페리는 아주르 교수의 수업에도 빠져들었지만, 아주르 라는 사람 자체에도 빠져들었다. 페리의 심리상태는 아슬아슬했다.

기숙사를 나와 쉬린과 모나와 페리 셋이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 그러한 페리의 심리는 더욱 위태로워져갔다. 본인도 주변사람들도 그때는 몰랐었지만.

독실한 종교주의자 모나와 격렬한 반종교주의자 쉬린의 사이에서 페리는 '그녀가 다시 부모와 함께 사는 것 같았다. (p. 472)' 그럴수록 아주르 교수와 그 수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옥스퍼드의 세 젊은 이슬람 여성 : 한 명의 죄인과 한 명의 신자 그리고 한 명의 방황하는 영혼' 으로 쉬린과 모나와 페리 라는 세 명의 조합이 구성된 것이라는 오해에 빠진 순간 페리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아주르 교수의 교직생활을 파탄내고 자신의 삶을 죄책감속으로 던져 넣게 될 그런 선택을.

쉬린, 모나 그리고 페리. 무신론자, 독실한 신자, 우유부단한 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동 문화권의 성난 자매들. 이브의 세 딸들. (p. 502)

이들에게 벌어진 사건은 사실 그리 많지도 그리 크지도 않다. 553페이지라는 상당한 분량을 읽었는데도 마치 단편 하나를 읽은 것처럼, 뭔가 서사가 명확하지 않고 뭔가 이제 시작하려는데 끝난 것 같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적 스토리를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늘 있는 일이다.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평균 몇 시간 간격으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모든 사건이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해서 말이다. 꼭 잠긴 방문뒤, 뻥 뚫린 마당, 싸구려 모텔 방, 고급 호텔 할 것 없이 한밤중이고 대낮이고 벌어지는 일이다. 이 도시의 사창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꼭지가 돌아 버린 손님들에게 폭행당하는 콜걸들, 남창들, 늙어 빠진 매춘부들, 길 한복판에서 두들겨 맞고도 경찰서에서 무시당하는 게 더 무서워 경찰서도 못 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트랜스젠더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이나 선생님들을 무서워하는 꼬마 아이들, 시아버지나 시동생과 같은 방에 있는 걸 두려워 하는 새 신부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눈이 돌아간 강박적 사랑의 분노를 경험한 젊디젊은 여자들, 남편의 성폭행을 입 밖에 낼 수도, 그럴 용기도 없어 입을 닫고 속으로 삼키는 주부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p. 76)

지금 튀르키예의 상황은 달랐다. 전선은 더 명확해졌고 진영은 더욱 뚜렷해졌다. 색깔도 흑백으로 바뀌었고 중도는 사라졌다. 부부 중에 한쪽이 더 종교적으로 독실하고 다른 한쪽이 더 세속주의적인 그런 결혼-자신들의 부모처럼-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회는 보이지 않는 유리 장벽으로 나뉘었다. 이스탄불은 거대 도시라기보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공동체 파편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이거나, '열렬한 반보수주의자'였다. (p. 152)

왜 사람들은 '뿌리'에 집착할까? 예를 들면 '가지'도 아름답지 않은가. '잎'과 '과일'도, 물론 뿌리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나무 자체를 사랑했다. 뿌리는 땅속과 땅 위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러니까 하나의 선이 아니다. 나무뿌리도 고정-또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는데, 사람들에게 반드시 '뿌리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하는 건 얼마나 모자란 생각에서일까? (p. 179)

서구에서 부르주아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고 봉건제에 반대하면서 한동안 진보적인 역할을 맡았었다. 반면, 튀르키예에서 자본가 계급은 진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고, 뒤늦게 떠오른 어설픈 사상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튀르키예에서 공산당 선언을 썼다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튀르키에에서 부르주아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회에 용해되어 버렸다. 여전히 일관성이 없었고, 신뢰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독립된 계급이 된 적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국가였다. (p. 194)

소설 속에서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는 여성과 정치와 종교에 대해 쉬지않고 굵게 말하려 한다. 그래서 소설적 구성은 약하고 스토리도 빈약한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단숨에 읽게 하는 매력은 뭘까 신기한 기분이다. 그러니 이 책도 이 작가의 세계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있나. 오르한 파묵의 터키를 까맣게 잊게 만든 이 튀르키예 소설은 여러면에서 문제작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이 던진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일단 이 소설을 읽어봐야 겠지?!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