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있는 일이다.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평균 몇 시간 간격으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모든 사건이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해서 말이다. 꼭 잠긴 방문뒤, 뻥 뚫린 마당, 싸구려 모텔 방, 고급 호텔 할 것 없이 한밤중이고 대낮이고 벌어지는 일이다. 이 도시의 사창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꼭지가 돌아 버린 손님들에게 폭행당하는 콜걸들, 남창들, 늙어 빠진 매춘부들, 길 한복판에서 두들겨 맞고도 경찰서에서 무시당하는 게 더 무서워 경찰서도 못 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트랜스젠더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이나 선생님들을 무서워하는 꼬마 아이들, 시아버지나 시동생과 같은 방에 있는 걸 두려워 하는 새 신부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눈이 돌아간 강박적 사랑의 분노를 경험한 젊디젊은 여자들, 남편의 성폭행을 입 밖에 낼 수도, 그럴 용기도 없어 입을 닫고 속으로 삼키는 주부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p. 76)
지금 튀르키예의 상황은 달랐다. 전선은 더 명확해졌고 진영은 더욱 뚜렷해졌다. 색깔도 흑백으로 바뀌었고 중도는 사라졌다. 부부 중에 한쪽이 더 종교적으로 독실하고 다른 한쪽이 더 세속주의적인 그런 결혼-자신들의 부모처럼-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회는 보이지 않는 유리 장벽으로 나뉘었다. 이스탄불은 거대 도시라기보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공동체 파편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이거나, '열렬한 반보수주의자'였다. (p. 152)
왜 사람들은 '뿌리'에 집착할까? 예를 들면 '가지'도 아름답지 않은가. '잎'과 '과일'도, 물론 뿌리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나무 자체를 사랑했다. 뿌리는 땅속과 땅 위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러니까 하나의 선이 아니다. 나무뿌리도 고정-또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는데, 사람들에게 반드시 '뿌리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하는 건 얼마나 모자란 생각에서일까? (p. 179)
서구에서 부르주아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고 봉건제에 반대하면서 한동안 진보적인 역할을 맡았었다. 반면, 튀르키예에서 자본가 계급은 진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고, 뒤늦게 떠오른 어설픈 사상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튀르키예에서 공산당 선언을 썼다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튀르키에에서 부르주아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회에 용해되어 버렸다. 여전히 일관성이 없었고, 신뢰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독립된 계급이 된 적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국가였다. (p.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