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눈뜰 때 소설Y
이윤하 지음, 송경아 옮김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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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먼저 주목한 K-스토리의 등장

한국계 최초 휴고상 노미네이트 이윤하 작가 신작

디즈니+ 시리즈 영상화 확정

소설Y의 일곱번째 작품 <호랑이가 눈뜰 때>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었다. 가제본에는 편지가 하나 첨부되어 왔는데, 추천사와 작가의 인삿말이었다.

추천사에서 심완선 평론가는 한국계 미국인인 이윤하 작가가 '로커스상' 데뷔 소설부문을 수상하고 '휴고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던 작가라면서 한국문화적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SF소설을 쓰는 작가를 소개하고,

"저는 어린 시절의 절반을 한국에서 보내며, 부모님으로부터 영리한 호랑이와 구미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만난 옛날이야기가, 우주의 별들 속에서 펼쳐지는 미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라는 인삿말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의 옛날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 것처럼,

이 소설에는 전래동화적 판타지가 SF를 배경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제목부터 그런 느낌이 퐉 오지 않는가. '호랑이가 눈뜰 때' 라니.

"우주군 사령부가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주황 호랑이 부족의 환이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자기 제복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환을 체포하기 위해 발부된 영장이 있어. 체표되면 군법 재판에 회부될 거다" (p. 25)

열세 살 호랑이령 주황 세빈은 우주군 생도에 지원한 후 날마다 어떤 답장이 올지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여느날 처럼 부족훈련에 집중하고 있을때 우주군에서 소포와 편지가 동시 배달되었다. 소포는 세빈이 존경해마지 않는 삼촌이자 우주군 선장인 환의 칼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빈을 우주군 생도로 합격시켰다는 통지문이었다. 그야말로 '수상쩍은 '우연의 일치'로 보이는 (p. 41)' 상황이었다. 삼촌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는 것은 충격이었지만 우주군 생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빈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삼촌이 연루된 사건의 진실에도 다가가볼 수 있을 터였다.

"네 선서를 명심해라. 너는 별들 사이로 나아가서 크고 작은 동료들을 만나고, 전사의 방식을 배울 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너를 이끄는 나침반은 부족의 방식이어야 한다." (p. 44)

부족의 대표 가모장님은 세빈이 우주군으로 떠나기 전에 부족의 맹세를 하게 했다. 손바닥에 칼자국을 남기는 그야말로 혈맹이었다. 그리고 세빈을 부모보다 더 살뜰히 챙겨주던 순이이모는 행운의 징표로 은장도를 주었다. 그런데 세빈의 우주군 합류는 시작부터 좀 이상했다. 우주군도 아닌 특별조사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함선에 동승하더니 훈련한번 받지 않아본 생도 신분인 세빈에게 '비상사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침입자 경보 침입자 경보 모든 승무원은 침입자를 격퇴할 준비를 하라 (p. 124)

하지만 정말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특별조사관이 알려준 국경분쟁을 도우러 가느라 생도 훈련을 시켜줄 여유가 없다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분쟁지역으로 가는 우주선을 누군가 공격했고 침입했으며 탈취하고 있었다. 수백명의 승무원들은 모두 기절가스에 당했고 멀쩡하게 남은 사람은 세빈의 생도 방에 함께 있던 지와 유나, 남규 뿐이었다. 그리고 특별조사관의 비서였던 민.

"들어가.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나는 민의 말을 되풀이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미소 짓고 있었다. (...)

문이 불길한 짤깍 소리와 함께 닫혔다. 민은 창살 맞은편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다정함의 흔적이 없었다.

"자, 세빈. 넌 반역자 환 선장에 대해 네가 아는 걸 모두 말하게 될 거야" (p. 161)

세빈은 친구 생도들과 함선을 구하기 위해 나선 참이었다. 민에게 이끌려 저도 모르게 들어간 곳은 감금실이었고, 알고보니 민은 여우령이었다. 구미호 말이다. 세빈은 함선에서 삼촌 환의 냄새를 맡았으나 분명치 않았고 찾는 지휘관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여우령에게 홀려 감금되기까지 했다.

"너희 삼촌은 강력한 물건을 훔쳐서 '천 개의 세계' 당국에 넘기는 대신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고 했어. 그는 그것을 평화롭게 사용해서 세계들이 비옥해지고 번영할 수 있도록 테라포밍하는 대신 자기 적을 파괴하려고 했어."

"드래곤 펄?" (p. 165)

세빈은 태어난 순간부터 '적'으로부터 부족을 구하기 위한 훈련을 받으며 자랐으나 '적'이 누구인진 몰랐다.

세빈이 존경해마지않던 삼촌 환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데 믿을 수 없었고 잡혀갔다는 삼촌의 냄새가 세빈이 탄 우주선에서 나니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자신을 홀려 감금시켜놓고는 세빈도 공모자라며 죄를 추궁하는 민을 보며 세빈은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배를 탈취한 침입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이런 짓을? 그런데 세빈 앞에 삼촌 환이 나타났다.

"우리가 뭘 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지. 우리가 앞으로 뭘 할 것이냐가 중요한 거지" (p. 205)

우주선에서 멀쩡한 존재는 십대의 생도 4명과 민 그리고 침입자들이다.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어린 생도들의 파란만장 함선구하기 대작전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소설Y시리즈의 한 작품이니만큼 역시나 청소년들의 성장이 뚜렷이 읽히는 밝고 명랑한 소설이었다. 디즈니플러스 영상화 확정이라더니 정말 그럴 모양인지 시리즈물로서 미리 여기저기 심어놓은 회수되지 않은 떡밥들도 보이고... 후속작이 궁금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SF에 잘 사용되지 않는 한국 전통의 전래동화적 요소들이 넘쳐나니 때론 과한가싶다가도 꽤 흥미로운 시도같아 보이긴 했다. 여하튼, 호랑이령 세빈의 힘찬 출발에 응원을 보낸다. 이제 눈을 떴으니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모험을 보게 되려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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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부 종이접기 클럽 (반양장) - 천 개의 종이학과 불타는 교실 창비청소년문학 118
이종산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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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접으면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우린 한 팀이잖아. 무모한 일이든 용감한 일이든 다 같이 하자"

창비 소설Y시리즈는 영어덜트 문학 시리즈로 서평단에게 대본집 형태의 가제본이 제공된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소설Y 6기에도 당첨이 되어 작가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가제본을 받았다. 노랗고 예쁜 표지색처럼 이번 작품에선 또 어떤 예쁜 마음들이 펼쳐질까 ㅎ 그리고 작가는 과연 누구일까 ㅎㅎ

나와 소라, 모모는 도서부이자 종이접기 클럽의 부원이다. 우리끼리는 '도서부 종이접기 클럽'이라고 부른다. 종이접기 클럽을 만든 건 세 달 전, 올봄에 소라가 종이접기 책과 색종이를 도서실로 가져온게 계기였다. (p. 9)

세연과 소라, 모모는 한창 깨발랄한 중2소녀들이다. 책읽기와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세명의 단짝 친구들이 여느날처럼 도서실에서 종이접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상한 소리에 복도로 나가서 살펴보다가 세연은 낯선 사람의 부탁으로 종이학을 접어주게 되고 그 사람은 그 종이학을 태우더니 홀연히 사라지는데... 알고보니 소문으로만 듣던 도서실 괴담을 직접 경험하게 된 거였다.

"저희 종이학 귀신을 봤다며?" (p. 26)

"그럼 그 선배는 아직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겠네요. 선배님은 지금 고등학교 1학년 맞으시죠? 귀신 소동이 있었던 건 이 년 전, 선배님이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고요" (p. 39)

세명의 친구들 앞에 괴담수집이 취미라는 졸업생 선배가 찾아오고 괴담 관련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게 되는데, 세연 말고도 그 종이학을 접어달라는 유령을 만난 사람이 또 있었다. 선배 말고도 그 전에 도서부 담담 선생님이신 강지문 선생님도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소라가 벽을 가리켰다. 글씨가 커서 벽에 걸린 달력의 연도가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1937년. 나는 그 숫자가 믿기지 않아 벽으로 다가가 달력을 다시 봤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달력에 있는 연도는 분명 1937년 이었다. (p. 153)

그 후로 세연에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세친구들은 시간여행까지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그 유령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나무패들과 수이의 웃는 얼굴과 종이학. 그리고 내가 한 약속. 여름 방학 때 윤경희 성생님이 왜 내 앞에 나타났는지, 왜 종이학을 접어 달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약속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그가 사라지더라도 수이와 한 약속을 기억해 줄 사람이.

"기다릴게. 미래에서." (p. 212)

영어덜트 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고등학생이 주인공이곤 했는데 더 어려진 중학생 버전이라 풋풋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동화책을 읽듯이 포근하고 따스하게 호로록 읽히는 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왠지 므흣한 미소를 머금고 읽게 되는 이 소설을 쓴 작가는 누구일까 호기심을 남기고 이번 소설y 서평단 체험도 참 기분좋은 경험이었다. 고마워요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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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스톤 매혹의 컬러
윤성원 지음 / 모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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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스톤의 컬러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가치의 척도이자 가격표이다.

책제목과 표지에서 알수 있듯이 이 책은 보석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부제와 뒷표지문구에서 알수 있듯이 보석에 대한 이야기 중 특히 컬러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보석은 돌인데 돌이 보석이게 된 이유는 그 '색' 때문이니 보석에 대한 이야기중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화이트, 레드, 핑크, 오렌지, 옐로, 그린, 스카이블루, 블루, 퍼플, 멀티컬러 등 열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파인 주얼리에서 자주 쓰는 50여 개의 보석을 컬러별로 배치했다. (p. 8) 요약하자면, 색에 따른 분류가 기본이지만 광물의 본질적인 특성상 무 자르듯 명쾌하게 나눌 수 없었다는 말이다. 선택된 50여 개의 보석은 2023년 현재 글로벌 시장의 수요 공급과 트렌드를 반영한 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p. 9)

보석과 컬러에 대한 책이니만큼 시각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었다. 오른쪽엔 보석의 사진이 왼쪽엔 그 보석에 대한 설명이 배치된 책의 구성상 책의 두께 대비 책장도 술술 넘어가고 무엇보다 각각의 보석이 저마다의 매력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니 내겐 마치 화려한 박물관을 관람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내게 보석이란 음... 내가 직접 걸치는 악세사리라기 보다는 내게 닿을 수 없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여겨져서... ㅋ 가진게 없고 가질수 없으며 멀게 느껴지는 보석이 박물관의 유물과 다를게 무어 있겠나 ㅎㅎㅎ 그래서인지 각각의 보석이야기는 때론 상식처럼 때론 역사처럼 흥미롭게 읽혀졌다.

정확히 말하면, 캐럿은 크기가 아니라 무게다. 1캐럿은 0.2g이다. (p. 14)

다이아몬드 그만큼 '영원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보석이 또 있을까? 물론 고유의 단단한 성질도 한몫 했다. '정복될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아다마스에서 유래한 명칭만 봐도 그렇다. (p. 37)

첫번째 보석 '다이아몬드'부터 새로운 이야깃거리라 툭툭 튀어나왔다. 다이아몬드가... 오 그래? 하면서 읽게되는. ㅎㅎ

이런 식의 감탄과 호기심의 자극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그리스인들은 루비를 '모든 보석의 어머니'라고 불렀고, 로마인들은 다이아몬드보다 높이 평가하면서 '돌 가운데 꽃'이라 여겼다. 성경에도 붉은 보석이 네 번 등장하는데 모두 아름다움이나 지혜와 연계되어 있다. 대제사장의 흉패에 박힌 12개의 보석 중에서 제1열의 첫 번째 보석도 루비다. (p. 79)

산호는 특히 주요 산지인 지중해 일대에서 이집트와 로마 시대부터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부적으로 쓰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영웅 페르세우스가 괴물 메두사의 목을 잘랐을 대 흘러 넘친 피가 지중해에 떨어져 산호가 되었다고 한다. (p. 123) 진주, 호박, 상아와 함께 대표적인 유기질 보석인데 가치로만 따지자면 진주에 버금가는 이인자로 꼽힌다. (p. 125)

"이상하네, 내가 아는 토파즈는 파란색인데?" 사실 순수한 토파즈는 무색이다. (p. 195) 토파즈가 산스크리트어로 '불'의 뜻을 가진 'taoas'에 기원을 둔 이름인 만큼 노란 기가 도는 보석은 모두 토파즈로 불릴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p. 197)

페리도트는 보석을 뜻하는 아랍어 파리다트에서 유래된 프랑스어다. 고대에는 토파조스라고 불리다가 18세기 이후에야 페리도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옛 문헌에 토파즈로 기록된 보석이 있다면 페리도트일 확률이 높다. (p. 249) 페리도트는 한때 '가난한 자의 에메랄드'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지만 이렇듯 수세기 동안 부활과 재생의 의미로 폭넓게 애용된 보석이다. (p. 251)

터키석은 16세기의 프랑스식 표현이다. 풀어쓰자면 '튀르키예에서 온 돌'이 된다. 사실상 튀르키예에서 산출되지 않았음에도 프랑스의 상인들이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돌을 튀르키예의 시장에서 구매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은 것이다. (p. 295)

라피스라줄리는 한자어로 청금석, 즉 푸른 금의 돌이다. 기원전 7000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 지역에서만 산출되어 이름처럼 금값에 맞먹는 비싼 보석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대제사장의 흉패에 박힌 12개의 보석 중 하나가 라피스라줄리였다. 유대인의 기록에도 십계명을 새긴 명판이 라피스라줄리라는 설이 있다. (p. 327)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보석 이름의 어원이나 관련된 역사적 에피소드가 등장하면 더 재미있게 읽혀졌고,

보석의 나이로 줄을 세운다면 1열은 단연 지르콘의 차지다. 1956년에 미국의 지구화학자 클레어 패터슨이 지구의 나이를 45.5억년으로 발표했을 때 사용한 연대 측정 광물이 바로 지르콘이었기 때문이다. 지르콘은 우라늄 같은 소량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반감기를 이용해 암석의 생성 시기를 측정할 수 있다. (p. 287) 큐빅 지르코니아와 혼동되는 것인데 둘은 엄연히 다른 물질이다. 큐빅 지르코니아는 1970년대부터 인간이 다이아몬드 모조석으로 생산해온 이산화 지르코늄이고, 지르콘은 규산 지르코늄이라는 천연 광물이다. (p. 289)

'귀한 돌'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우팔라' 또는 라틴어 '오팔루스'에서 유래한 이름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보석이다. 오팔은 실리카와 수분으로 구성된 비정질의 함수규산염이다. 즉 엄밀히 따지자면 광물이 아닌 준광물에 속한다. (p. 353)

보석은 돌 그러니까 광물이다보니 때로는 과학적 이야기로도 흥미롭게 읽혀졌으며,

오렌지색을 만들어내는 적색과 황색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로서 동양에서 가장 사랑받는 '투톱'컬러이기도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영국에 오렌지가 수입되기 전까지는 이 색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1512년이 되어서야 'orange'가 색을 묘사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p. 165)

한여름의 태양 빛을 닮은 호박은 오랫동안 동유럽의 왕실을 장식하고, 각종 종교 오브제나 공예품의 소재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p. 203) 덴마크에는 1933년부터 90년 가까이 호박 주얼리만 생산해온 브랜드가 있을 정도로 스칸디나비아 일대에서는 행운의 상징으로서 인기가 높다. (p. 207)

때로는 상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다양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했다.

누군가 가장 저평가된 보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단연코 스피넬이다. (p. 99)

순수한 칼세도니는 백색이다. 여기에 미량의 발색 원소나 미세한 내포물이 들어가 색을 갖게 되는데 다공질이다 보니 모든 색으로 염색과 탈색도 가능하다. 한 예로 오닉스는 원래 검정색과 백색의 직선 줄무늬가 나란히 배열된 보석이다. 따라서 시중에 유통되는 오닉스는 모두 인위적으로 검게 염색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p. 381)

하지만 가장 신선했던 점은, 보석의 다양성과 색 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가공성 이었다. 내가 아는 보석 이름이라곤 열가지도 대지 못할 것 같은데 세상엔 실로 엄청나게 다양한 보석이 있었다. 또한 보석이라고 하면 그냥 돌을 캐서 예쁘게 깎은 것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열처리를 하건 다른 물질을 삽입하건 표면에 어떤 처리를 하건 여하튼 보석은 그냥 예쁜 돌이 아니라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 책은 매 보석마다 다양한 이야깃거리부터 보관법 같은 깨알상식까지 알차게 담고 있는데 책의 뒷부분에는 젬스톤의 보석학적 특징과 용어정리까지 깔끔하게 추려져 있어서 보석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혀질 수 있을 것 같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보석에 대한 ~카더라 식의 흥미위주가 아니라 적절히 역사적이고 적절히 과학적인 그렇게 적절히 전문적인 보석의 이야기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달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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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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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교사,

비밀이 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헌병,

전선에서 도망치다 붙들린 군인 …

이 시대의 가장 재기 넘치는 거장 21세기의 발자크,

피에르 르메트르의 신작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신간안내의 무수한 광고문구들 사이에서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띄었다.1951년에 태어나 55세의 나이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첫 작품부터 상을 받더니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얻고 이내 늦깎이 신예에서 곧장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작가에 대한 그 소개가 말이다. 그는 과연 어떤 작품을 썼길래?!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시들해져 있었고, 누구보다도 쥘 씨가 그랬다.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나서 여섯 달이 넘어가자, 실망한 라 프티트 보엠의 사장은 더 이상 그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서빙을 하던 루이즈는 그가 <이 전쟁이 정말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라는 말까지 하는 것을 듣곤 했다. (p. 13)

첫 문장부터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왠지모를 나른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이 두툼한 소설은 실은 두 달여 간의 짧다면 짧은 날들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1940년 4월6일 - 1949년 6월6일 - 1940년 6월13일 로 이루어진 단촐한 차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세계대전이 벌어지진 않았으나 곧 터질것 같은 전쟁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시절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기막힌 상황들이 펼처지기 시작한다. 총동원령까지 내려졌음에도 전쟁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부터가 기막힌 생각이었지만 그 시절의 파리는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러운 그런 곳이었다.

「당신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안 해요」 깜짝 놀란 루이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p. 16)

초등학교 교사인 루이즈는 여가시간에 동네 레스토랑인 라 프티트 보엠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교사가 된 이후로 굳이 서빙일 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해온 쥘 씨의 식당돕는 일을 굳이 그만 둘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이 레스토랑의 단골 손님 중엔 20년 전 부터 토요일마다 와서 전면 유리창 옆의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고 가는 의사 선생이 있었다. 그 의사선생이 처음으로 루이즈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루이즈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루이즈는 당황했다가 기분이 나빴다가 호기심이 일었다가 기분이 썩 괜찮았다가 하는 혼란한 와중에 의사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예상되는 '만 프랑'을 대가로 요구했다. 그러나 의사는 그렇게 하자며 호텔방을 예약한 메모지를 건네는 것이었다. -0-

9백명이 넘는 병사들은 수만 세제곱미터의 콘크리트 아래에 묻힌 수 킬러미터의 지하 통로를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다. (...) 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탄약 상자를 쌓고, 열고, 분류하고, 옮기고, 확인하고, 정리하기를 반복했으니, 이 일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p. 40) 평소에도 깊게 잠드는 편이 아닌 가브리엘에게 이 지하 요새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기다리다 진이 빠졌다. (...) 기장이 상당히 해이해져 경계 근무 사이사이에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p. 42) 라울 랑드라드 병장이 그의 작업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휴게실에서였다. (...) 그에게 있어서 삶은 온갖 술책과 부정 거래가 우글거리는 연못이었다. (p. 43)

수학선생이었으나 통신병으로 징집된 가브리엘과 한 내무반에 라울 랑드라드 병장이 있었다. 그는 가브리엘과 극과극의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이 올곧다면 라울은 올곧지 않은 일만 골라 하는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은 라울이 벌이는 일들이 모두 마뜩찮았으나 그의 속임수와 폭력과 사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브리엘에겐 시간이 흐를수록 절대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라울이었는데 이 둘의 관계는 점점더 밀접해져만 갔다.

루이즈는 사흘 더 병원에 머물렀다.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려 할 때, 한 경찰관이 병실에 들어와 법원의 판결을 알려 주었다. 사인은 자실로 확인되었고, 매춘 시도 혐의는 기각되었다는 거였다. (p. 60)

호텔방에서 루이즈의 벗은 몸을 보던 의사는 돌연 권총자살을 했고 그 장면을 목격한 루이즈는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겉보기로만 봤을 때 매춘에 가까웠던 상황이었기에 루이즈에 대한 소문은 나빠져만 갔고 그렇게 루이즈의 일상은 무너져내렸다. 그는 왜?

데지레 미고가 처음부터 미고 변호사엿던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해에, 그는 석 달 동안 리바레탕퓌이제 마을에 단 하나 있는 학급의 초등 교사로 근무(...) 몇 달 후, 그는 에브뢰 항공 클럽의 조종자 데지레 미냐르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p. 82) 비행 클럽 금고를 들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 그의 얼마 되지 않은 경력의 하이라이트는 이베르농쉬르손생루이 병원의 외과 의사 데지레 미샤르 박사로 두 달 넘게 활동한 일이었다. (...) 데지레 미고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생농라브르테슈에서 태어나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곳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그 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그의 삶 자체만큼이나 다양했다. (p. 83)

한마디로 '사기꾼'이라 할 수 있지만 그냥 사기꾼이라고 폄하하기엔 뭔가 어떤 인간미와 묘한 신비로움이 있는 청년 데지레 미고가 다시 등장한 곳은 일촉즉발의 전쟁시국에서 혼란에 빠진 파리시내의 정보를 수습하고 검열해야 했던 공보국이었다. '콩티낭탈 호텔에서 데지레의 수직에 가까운 상승은 무수한 논평과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저 친구는 대체 어디서 온 거야?> 라고 사람들은 묻곤 했다. (p. 147)' 데지레는 이번에도 그 화려한 언변으로 주변을 휘어잡고 있었다.

「전시에 정확한 정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주는 정보야. 진실은 우리의 주제가 아니야. 우리에겐 보다 높은 임무가, 보다 야심 찬 임무가 있어. 우리는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책임지고 있는 거라고!」(p. 149)

자신감을 주고 소식을 알려주면서도 애매하게 말하는 것, 이게 바로 이 일의 어려운 점이었다. (p. 150) 지금 진정한 전쟁부는 바로 공보국이었고, 데지레는 그 대변인이었다. (...) 이것은 전쟁인 동시에 파티였다. (p. 151)

소문으로만 들려오는 독일의 진격, 넘쳐나는 정보 속에 사라진 진실, 어디선가 전쟁중이 확실했지만 파리는 아직 파티 중이었다. 그리고 파티는 곧 끝났다.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파리는 멘붕에 빠졌다.

「그 의사 말이야. 자기 애인을 데리고 올 때마다 우리가 잘해 주지 않았어? 그거, 다른 데 가서 하면 안 됐나? 그래, 어미 하나로 충분치 않아서 딸까지 데려온 거야?」 (p. 203)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루이즈에게 우연히 눈에 띈 어머니의 유품속엔 그녀가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가 있었다. 어머니가 왜 일생을 우울증에 빠져 창가에 앉아 있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을 힌트가 있었다. 그리고 의사선생이 왜 루이즈를 그렇게 쳐다보았는지도. '어머니가 의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살아 있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p. 239)' 루이즈는 배다른 오빠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 독일군의 진격이 파리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페르낭은 그동안의 망설임에 마침표를 찍었다. 알리스는 파리를 떠나되, 혼자 떠날 거였다. 왜냐하면 지산은 이시레물리노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p. 303) 그는 제목을 입고 건물 뒤뜰로 내려가서는, 거기 담겨 있던 감자의 흙이 아직도 밑바닥에 남아 있는 황마 자루 몇 개를 거냈다. 그런 다음,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제 그의 구원은 어느 환경미화원의 손에 달려 있었다. (p. 308)

헌병대장 페르낭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시 상황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짐작되자 아내를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은 뒤따라가 가기로 했다. 목표한 바는 쉽게 이루었으나 마지막으로 죄수 소송 임무가 주어졌고 이 임무가 그를 상상밖의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되는데...

부유한 이들의 탈출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군복 차림의 병사, 농부, 민간인, 장애인 들이 뒤섞인 잡다한 무리를 이루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한 시청 차량에 탄 어느 유곽의 매춘부들, 그리고 양 세 마리를 몰고 가는 목동 등 도로 위엔 그야말로 온 백성이 모여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엇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거울이 된 거대한 장례 행렬이었다. (p. 459)

번역자에 의하면 이 작품의 원제는 <우리 고통들의 거울> 이라고 한다. 고통은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한 원제라고도 이야기 한다. <우리 슬픔의 거울> 과 고통의 거울이 함께 들어가 있는 문단은 피란민의 행렬을 묘사한 장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뭐라하든 큰 관계 없었을 장면, 피란민의 행렬 모습은 '장례 행렬' 같았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상을 했건 못했건 믿었건 믿지 않았건 벌어졌고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이 모든 이를 화해시켜 주었다. (p. 611)

이 소설은 고통스럽거나 슬프게 읽혀지는 작품은 아니었다. 묘하게 우스꽝스럽고 묘하게 피식거리게 되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거워야 할 내용이 가볍게 읽혀지는 묘한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묘하게 가짜같은 상황들이 1940년대 프랑스의 현실, 진짜 현실 이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데지레가 전하는 소식들 중에는 아주 기상천외한 것들이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너무나 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p. 617)' 거짓말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거짓말 같은 상황이 정말 현실이었다고나 할까.

유럽 근대 소설의 양대 산맥이 영국과 프랑스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 감성의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환상 소설, 모험 소설, 고딕 소설, 역사 소설이 주를 이뤘다면, 실제의 사회와 역사를 치열한 비판 의식으로 파헤친 리얼리즘 소설은 프랑스 문학의 본령이었다. 19세기 초의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빅토르 위고로부터 시작하여, 중반과 후반의 외젠 쉬,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를 거쳐 20세기 초반의 마르셀 프루스트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리얼리즘 작가들을 끊임없이 배출해왔다. (p. 623) 21세기 초반에, 가물가물해져 가던 이 영광스러운 횃불을 이어받겠다고 나선 작가가 나타났으니,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 이다. -옮긴이의 말 中-

작가는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 에 이어 <우리 슬픔의 거울> 로 세계대전 시대를 3부작 대하소설로 써냈다는데, 마지막 작품을 읽어서 그런가 굳이 그 이전 작품들까지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확인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로 있었는지, 전쟁이 현실이 되고나서도 그 전쟁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이 인생에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하는 이 소설은 분명 명작이긴 한데, 내가 프랑스의 리얼리즘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인지 묘하게 멀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굵직한 세계사를 소설로 새롭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겐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또다른 거울이 되고 모든 문학은 우리에게 또다른 슬픔을 알게 해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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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히브리스 - 인류, 그 거침없고 오만한 존재의 짧은 역사
요하네스 크라우제.토마스 트라페 지음, 강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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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파괴적 욕망으로 질주하는 오만한 유전자,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한 권으로 살펴보는 인류 진화의 천만년사

이 책의 부제는 [인류, 그 거침없고 오만한 존재의 짧은 역사] 이다. 수천년 수만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두고 '짧은 역사' 라니 이상한가?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구의 역사에 비해 인간의 역사는 정말이지 아주 짧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46억살이라는 지구의 역사에 견줘보면 고작 몇만년 정도의 인류의 역사는 거의 찰나의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찰나의 존재인 인류가 더할나위 없이 오만해졌다. 휘브리스는 고대그리스어에서 '오만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오만해진 인간을 '호모 히브리스'라 칭하며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이 책은 끝없이 승승장구해온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몰락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숱한 우연의 상호작용을 통해 파괴적인 속도로 진화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의 오지까지 정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아주 특별한 동물 종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단 한 번뿐인 성공 가도에 진입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수많은 진화 경로는 인간의 계통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침팬지와 보노보로 분화된 이후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그중 하나는 이미 우리 앞에 있다. 이 책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최초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p. 12) 이후 이들에게 최대의 적은 가장 위험한 동반자이자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역사의 흐름에 거듭 영향을 끼쳐왔던 치명적인 병원체였다. 21세기에 인간이 이 재앙을 극복했다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더 많은 것들을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어떤 것도 주어진 대로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다. (p. 13) 지금 우리는 정상에 있지만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무엇이 우리를 정상까지 인도했을까? 문명 창조의 주인공이 다른 유인원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작부터 특별했던 고고유전학 연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p. 14) -서문 中-

독일의 고인류 DNA연구자 와 독일의 저널리스트가 공동으로 쓴 이 책은 앞서 이 둘이 펴낸 책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과도 닿아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여행>이란 책을 읽으며 고인류학을 통해 '난민'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신선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었더랬다. 그후 코로나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이번엔 '호모 히브리스'라는 메세지로 책을 낸 것이다. 전작과 비슷하게 내용은 과학으로 가득하지만 핵심은 사회적으로 심플하다.

현생인류는 최소 5000년 동안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다가, 현생 인류가 유럽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p. 50)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시신을 눕히거나, 앉히거나, 함께 매장된 다른 사람 쪽을 향하게 하는 등 특정한 방식으로 시신을 매장한 무덤이 없지만, 크로마뇽인에게는 많다. 오늘날 고고유전학자와 고고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뼈는 대부분 뼈의 주인이 죽은 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하이에나와 같은 청소부 동물들에게 뜯어 먹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굴물이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주변 사람들을 매장함으로써 모면하려고 했던 광경이었다. (p. 60)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에 세계를 정복하고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p. 62)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처음 직립보행을 배우고, 고성능 뇌를 개발하고, 문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몇 년 전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생각했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대륙 전체에 흩어져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종의 용광로에서 다양한 인간의 계통이 혼합되어,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된 아프리카인으로 통합되었다. (p. 66)' 고유전학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이 내가 배웠던 과학지식이 잘못 증명된 지식이었었다는 점이다. 수십년 사이에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인류의 발달 관련해서 가장 널리 잘못 알려진 상식이 아마도 직립보행과 연결지은 한 그림일 것 같다. 인류는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계단식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다. 인간의 계통도는 아주 다양한 가지를 갖는 복잡하고도 동시적인 공존의 시대를 알려준다. 진화의 상식적인 그림은 바뀌어야 한다.


약 200만 년 전에 드디어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은 인간을 처음 유라시아로 이끈 진화적 도약이었다. 이들의 직계 조상은 일반적으로 직립보행을 하지 않았던 반면, 호모 에렉투스는 두 다리로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식단의 대부분이 고기나 짐승의 사체였기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 두 다리로 걷는 것만큼 효율적인 보행법은 없었고, 호모 에렉투스가 장거리 달리기에 적응하도록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몰이사냥 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p. 84)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들의 시대도 저물었다. 유라시아에는 현생인류처럼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의 계통에서 분화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만 남았다. 이 시기에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현생인류, '이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p. 85)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으로 '뇌'의 발달이니 '바늘'을 비롯한 도구의 사용이니 '언어'이니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몰이사냥'기술 인 건 아닐까 싶다. 호모종이 '몰이사냥'을 시작하면서 호모종이 출몰한 지역에선 대형동물들이 멸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모종은 세력을 불려나갔다.

다양한 인류 종이 공존하던 시대에 왜 우리 조상들은 점점 북쪽으로 밀려났을까? 네안데르탈인들에게 남쪽 지역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이 정말 없었을까? 진화의 잣대로 판단할 때 현생인류는 아주 짧은 기간에 힘들이지 않고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유라시아의 스텝 지대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반면 이 수십만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네안데르탈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과 다른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p. 128) 현생인류는 더 온화한 기후와 생존 기회가 더 많았던 남쪽에서 더 많은 것을 채워 나갔다. 북쪽으로 이동해 네안데르탈인과 혼형을 했던 현생인류는 자연선택의 이점도 함께 물려받았다. (p. 130) 과거에 보장받았던 생존, 극한 환경적 조건에 대한 유전자 적응 하나만으로는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가 생물학적 특성을 이긴 것이다.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 구석까지 진출하면서 주로 매머드 스텝 지대에 머물렀던 네안데르탈인에게 남은 선택지는 후퇴였다. (p. 131)

인류의 진화라고 해서 고고유전학적 연구만 들여다봐서는 곤란하다. 지구의 생태환경은 꾸준히 변화해 왔고 기후는 격변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인 진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만9000년 전에 찾아온 자연 재해는 오랜 방어전에 지친 네안데르탈인에게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었다. (p. 131)'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긴 시간 광활한 지역의 기후를 변화시켰다. 환경에서 살아남고 환경을 이용하는 종이 살아남기 시작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숨 가쁜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다른 모든 동물들의 생물학적 특성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개발된 사냥과 살인 기술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수많은 생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킬러로 등극했다. (p. 133)

하지만 이 때에도 호모종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단일종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호모 사피엔스만 남게 된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호모종은 다양하게 공존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거대 동물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동물권에서 절대 남획을 하지 않는 다른 인류 종들과 우리 조상들의 차이다. 매머드는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하며 수십만 년 후에도 안정적인 개체 수를 꾸준히 유지했고, 네안데르탈인은 하이에나를 보며 한 번도 스스로가 먹이사슬에서 사라질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p. 133)' 호모 사피엔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됐고 매머드를 비롯한 대형동물들이 하나둘 멸종해갔다. 인류진화의 역사는 어쩌면 킬러본능의 발달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힘든 시기를 버티기 위한 카니발리즘을 금기시했 (p. 136)'던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는 아이러니하다.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 이젠 뭐 그런 카니발리즘 금기도 사라진 것 같지만..

정글은 수렵·채집인에게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들이 우림에서 도망쳐 나와 고개를 쭉 빼고 아프리카 스텝 지대를 기웃거리며, 큰 뇌를 가진 열정적인 육식 동물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원시림은 제아무리 민첩한 수렵인이라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창·작살·활·화살로 원거리의 짐승을 찔러 죽이기에 이상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반면 원시림에서 잠재적인 먹잇감들은 몸을 숨길 기회가 많았다. 이곳에서 몰이사냥은 먹히지 않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p. 152)

호모 사피엔스는 몰이사냥 말고도 다른 기술을 익혔다. 이또한 다른 호모종이 멸종해 나갈때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였다. '수렵·채집 시대는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p. 179)' 농경의 시대가 열렸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했다는 초기 증거는 주로 약 1만1000년 전 아나톨리아의 괴베클리테페에서 발견되었다. (p. 185)' '아나톨리아에서 시작해 이곳에서 약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확산되었다. (p. 190)' '이들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수렵·채집인의 어두운 피부색은 점점 이주민들의 밝은 피부색에 자리를 내주고 영원히 사라졌다. (p. 191)' 밝은 피부색은 여러 차례의 돌연변이로 인해 생겼다고 한다. 인류는 어차피 모두 다 호모사피엔종 이다. 단 하나의 유일한 종이면서 DNA로도 큰 차이가 없는 종이 단순히 피부색으로 차별을 한다는게 어찌보면 참 무식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신석기 혁명의 특징은 우월한 농경민에게서 시작된 이주와 축출 움직임이었다. 아나톨리아인들은 이 방식으로 유럽, 근동지방,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유전적 특성을 형성했다. 이란의 신석기인들은 동쪽으로, 아마도 멀리는 인도까지, 그리고 아시아의 스텝지대로 전진했다. 오늘날 반투 유전자는 남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농경민들은 거대한 제국의 모든 비옥한 평야로 퍼져나갔다. 빙하기 말부터 세계의 다른 지역과 고립되어 있던 아메리카의 신석기 혁명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곳의 신석기 혁명은 이주한 농경민의 우세를 암시하는 유전자 이동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살아 있는 후손들은 약 1만20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p. 204)

유라시아에서 이주와 축출과 살상이 난무하며 횡적으로 퍼져나갈때 아메리카 대륙에선 종적으로 그런 이주와 축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좀저 친자연적이고 평등적이고 평화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상식은 참 변해야 할 게 많다. 여하튼 인간은 본격적으로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정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식민화의 역사는 DNA에도 새겨져 있었다. 원주민 남성은 자식을 낳을 기회를 박탈당하며 사라져갔고 원주민 여성은 정복자들의 혼혈자식을 낳으면서 인류의 DNA풀은 더 줄어들기 시작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다 다른 것 같지만 DNA적으로 봤을때 인류는 한뿌리다. 그래서 전염병에 취약한 것이다. 다른 종과의 결합으로 더이상 진화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팬데믹은 새삼스레 이것을 알려준 것이다.

지금까지 박테리아가 원인인 거의 모든 감염병은 고고유전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엇다. 반면 바이러스는 재구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유전물질이 DNA가 아닌, 그보다 훨씬 불안정한 RNA 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p. 280)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에피데믹과 팬데믹의 정점에 대해서만 확실히 알고 있다. 전염병은 덥고 습한 지역에서 많이 발생한다. 이런 곳은 병원체들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지만 쉽게 분해되기 때문에 고고유전학자들이 흔적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p. 281)

인류를 속절없이 무너뜨린 자연의 위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무지하게도 인간은 죽음을 가져오는 질병과 유행병들을 자신들이 창조하고 상상한 존재들, 즉 신의 형벌로 이해했다. 인간은 죽은 자를 매장하고 저세상으로 부장품을 보내는 인류 최초의 문화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깨달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했다. 인간도 자연 순환의 일부이자, 환경의 혜택에 의존하는 동물 중 하나이며, 최악의 경우 보이지 않는 적들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p. 290)

그래서 저자는 '20세기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히브리스로 만들었다. (p. 292)' 로 말한다. 하지만 '이제 지구의 한계가 인간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화의 특성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팽창,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리한 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 292)' 코로나팬데믹으로 인류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인간의 자연적 진화는 오래전에 끝났다. 인류는 하나의 종이다. 그 하나의 종이 정말 호모 히브리스가 된다면 멸종의 길은 앞당겨질 것이다. 그러니 호모 사피엔스로서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자연 나아가 지구와의 공존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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