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부터 오늘까지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다. 화가 났고 화를 터뜨리고 싶었다. 아주 실컷! 그런데 마음이 점점 괴로워졌다. 미워하면서 화를 품을수록 더 심하게 괴로워졌다. 미움의 눈덩이가 경사진 언덕을 굴러내려가며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작은 불이 큰 산불로 번지면서 그와 나 사이에 놓인 다리를 활활 불태웠다. 다정한 계곡에 놓인 소박하고 오래된 그 다리를. 이 모든 상황이 내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벌어지는 풍경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괴롭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든 미움은 우선 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워서 괴로운 게 아닌 것 같다. 실은,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운 게 아닐까. 오래전부터 막연히 짐작해 왔는데 왠지 그 짐작이 맞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잘 안 돼서 괴롭나?

 

우리말에는 화 대신 쓸 수 있는, 왠지 모르게 귀여운 표현이 있다. 삐지다. 이 말은 특히 어린아이를 향해서 잘 쓰인다. "쟤가 화났어."라고 하는 대신 ", 삐졌어." 하고 속삭대며 우리는 응큼하게 웃는다. 장난스럽게 들리는 '삐졌다'는 표현은 '화났다'는 표현과 다르게 상황을 덜 심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 어린아이의 화는 절대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 아이는 진심으로 속이 상하기 때문이다.

 

 


 

 









풀밭에서 잔뜩 화가 난 저 아이의 이름은 스핑키. 스핑키는 엄마, 아빠, 누나, 형에게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핑키를 화나게 만든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 같다.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차례로 마당으로 나가 스핑키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스핑키는 절대 한 명도 용서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오래 묵은 화가 틀림없다. 

 

스핑키는 대략 여덟, 아홉 살쯤 돼 보이는데 그 나이에는 별일도 아닌 일에 잘 삐진다. 툭하면 서운해하고 화를 낸다. 아마도 자의식이 싹트는 나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새싹처럼 돋아나는 이때의 자의식은 아직 연약해서 쉽게 상처를 입는다. 아이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 화를 낸다. 화를 '내야만' 하고 '낼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유형무형의 적들과 싸우는 고독한 전사 같다.

 

우리의 스핑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실컷 화풀이를 한다. 형과 누나와 엄마가 아무리 빌고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아빠가 설교를 하고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그들의 호의를 내팽개친다.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는 그림책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29쪽에 이를 때까지 스핑키에게 복수할 기회를 무궁무진하게 베풀어주고 나서 단 3쪽으로 상황을 간단히 마무리해 버린다. 스핑키에게 속이 후련해질 만큼 실컷 화를 내게 해준 것이다. 무릇 화풀이는 이렇게 해야 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실컷.

 

살아보니, 마음의 앙금을 풀어내려면 실제 경험했던 부당함에 대해 딱 그만큼만 되갚아주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다. 반갑게도 스타이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밉살스러운 누나가 꽃을-팽개쳐버릴 꽃을-따주고  거만한 형이 무릎을 꿇고-백번을 꿇어도 용서 못할 테지만-사랑하는 엄마-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더 서운한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멋지게 차려줘도 끝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복수는 유혹적이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스핑키를 심하게 편애해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복수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건 그림책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현실의 가족은 스핑키의 가족처럼 다정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설사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해도 가족 가운데 한두 명쯤은 쌀쌀맞거나 인색하거나 무심하다. 아이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사랑의 말을 해주는 가족과 친구는 아주 드물지 싶다. 그래서 작가는 그림책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화풀이를 할 수 있게 아이에게 멍석을 펼쳐준다. 연약한 아이들에게. 바깥세상에서는 이렇게까지 못하지. 아무렴. 여기서나 실컷 화풀이해. 난 네 편이야 하면서. 누구는 그랬다, 편애란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난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화난 아이가 또 한 명 있다. 맥스다. 맥스는 늑대 옷을 입고 벽에 못을 박고 포크를 휘두르며 개를 위협하며 놀다가 엄마한테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란 말을 듣는다. 맥스는 엄마한테 맞받아쳤다.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 엄마는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 가둬버렸다. 바로 그날 밤 맥스의 방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큰 바다가 열려서 아이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간다.

 

 


 

 








맥스는 이 나라에서 괴물들의 왕이 되어 마음껏 놀았다. 스핑키가 실컷 화를 터뜨렸던 것처럼 맥스도 괴물들의 나라에서 실컷 못되게 놀았다. 부정적 감정을 풀어놓고 야생적인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지칠 때까지 놀고 나자 맥스는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 괴물들을 뿌리치고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엄마가 가만히 놓고 간 저녁밥이 있었다. 밥은 아직 따뜻했다.

 

작가 모리스 샌닥도 아이에게 무척 너그럽다. 엄마에게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란 말을 들은 아이 마음은 무사할 수 없다. 괴물딱지라니! 그래서 맥스에게 용기를 듬뿍 불어넣어서 엄마한테 지지 않고 소리치게 해 줬다.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 스핑키의 아빠는 스핑키가 나잇값을 못 하고 어린애처럼 군다고 설교를 했는데 윌리엄 스타이그는 그걸 허튼소리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스핑키를 이렇게 변호해 준다.  

 

사실, 아빠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데, 스핑키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주 정상적인 아이랍니다.

 

 

맥스의 세계도 역시 그림책이니까 가능하다. 괴물딱지 같은 녀석잡아먹어버릴 거야라는 말싸움은 현실 속에서 잘 벌어지지 않는다. 화난 감정을 거리낌없이 말로 내뱉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현실 엄마는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아이가 엄마한테 잡아먹어버린다고 말하는 상황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더 큰 반격을 불러올 걸 알기에 아이들은 겁이 나서 그런 말을 쉽사리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다. 대신 속에 담아둔다. 언어화되지 못한 채 어떤 검은 감정의 덩어리로. 어린 독자들이 스핑키와 맥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그건 두 아이가 자기 대신 어른들에게 실컷 화를 내고 복수를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제 스핑키와 맥스는 속이 후련해졌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스핑키의 가족은 인내심이 바닥나서 슬슬 약이 오를 참인데 이 절묘한 순간에 스핑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식구들이 잘 몰라서 그랬는지도 몰라. 지금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식구들이 나한테 그렇게 군 게 꼭 식구들만의 잘못일까? 화를 풀면서도 우스운 꼴이 되지 않으려고 스핑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을 위해서 밥상을 근사하게 차렸다. 맥스 또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가서 진짜 괴물이 될 뻔했는데 다행히 엄마가 따뜻한 저녁밥으로 맥스를 무사히 그 나라로부터 데려왔다.

 

이 두 작가의 그림책 세계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다. 사랑이 핵심이다. 사랑이 아이의 화난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고 원초적인 괴물들의 세계로부터 불러들인다.     

 

특히 윌리엄 스타이그는 우리가 언제 너그러워지는지를 잘 아는 것 같다. 아이들은-사람은-사랑을 받으면 너그러워진다. 하루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 몸에 활기가 있듯이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마음에 힘이 생기고 넉넉해진다. 삼시세끼 밥이 굳이 진수성찬일 필요가 없듯이 사랑도 대단하고 위대한 어떤 것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 얼음산을 넘어 눈바람을 뚫고 약초를 구해오는 효심 같은 어마어마한 사랑은 받기도 힘들고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산다는 일이 배가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듯이 마음의 일도 고프고 부르고의 연속이어서 소소한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먹여줘야 하는 걸지 모른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혹시 우리의 무의식은 무한히 깊고 큰 사랑을 원하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내가 가진 사랑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과 상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너무 초라하고 너무 섭섭한 건 아닐까?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서 속을 끓이는 까닭, 미움과 분노로 내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소중한 관계의 다리를 불태우고 끊어버리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혹시 그래서는 아닐까? 불경에서는 만족할 줄 알라고 했는데.

 

미움과 분노와 화라는 표현을 삐졌다, 부루퉁해졌다, 골을 낸다는 말로 바꿔보면 좀 나아지려나 하는 유치한 꿍꿍이도 해보면서, 이 두 그림책에 환호하는 어린 독자들처럼 나도 그림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부드럽게 녹으며 좀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용서로 가는 길은 이렇게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인가도 싶다. 상대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내 자신을 이해하고 내 마음과 화해가 이루어질 때 나는 마침내 용서라는 문을 열고 자유로워지리라 기대한다. 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문 자체가 사라지는 걸 경험하게 될 거라고. 그런 경험을 하길 희망한다. 내 생각은 아직 내가 못 이른 그곳에 이미 가 있다. 이제 나의 마음이 생각을 따라 가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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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네버랜드 클래식 48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허버트 포즈 그림, 김주경 옮김 / 시공주니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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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알고 푸는 수학문제처럼 이 작품도 그렇다. 풀이 과정에 놀라운 발견이 있듯이 이 이야기도 정답에 이르는 과정에 진짜 재미와 의미가 있다. 가끔 뻔하고 엉뚱한 구시대적 발상을 만나지만 상징과 상상이 깊고 다채로워서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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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을 어떻게 정의할지 고심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어린이 같고 어린이다운 마음, 실체로서의 동심이란 게 존재할 거라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적확하게 정의내리라고 하면 동심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동심이 실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평균 키나 평균 체중처럼 '평균'이라는 개념이 흔하게 쓰이지만 실제로는 평균 키나 평균 체중이 허상이듯 동심도 그런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동심을 만난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일한 엄마가 아픈 다리를 펴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안락의자를 사드리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동심이 아니면 무얼까.  












 

아이의 집은 일 년 전 화재로 모든 걸 잃었다.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했고 다정한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은 식기와 침대 같은 살림살이를 나눠주었고 음식도 가져와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락의자는 마련하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발이 아프다고 했고 할머니도 딱딱한 부엌 의자에 앉아야 했다. 그래서 안락의자를 사기 위해 어느 날 엄마는 식당에서 가장 큰 유리병을 가져와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식당에서 소금통, 후추통을 씻고 병에 케첩을 채우고 양파를 까는 소소한 일을 했고 그러면 식당 주인인 조세핀 아줌마가 돈을 줬다. 그중 절반을 아이는 유리병에 넣었다. 엄마도 팁으로 받은 잔돈을 유리병에 넣었고, 할머니도 물건을 싸게 사고 남은 동전을 넣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동전을 꼬박꼬박 모은 끝에 유리병이 동전으로 꽉 차는 날이 왔다. 세 사람은 식당이 쉬는 날 안락의자를 사러 간다. 은행에서 동전을 지폐로 바꾼 다음,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서 그들은 가구점을 네 군데나 돌아다니며 온갖 의자에 다 앉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꿈꾸어 온 의자를 발견했다. 이야기의 서두에서 아이가 꿈꿨던 바로 그 의자를!

 

그래요, 의자요. 멋있고, 아름답고, 푹신하고, 아늑한 안락의자 말이에요.
우린 벨벳 바탕에 장미꽃무늬가 가득한 의자를 사려고 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자를 요.


이제 엄마는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화사한 장미꽃무늬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쉬고, 낮에는 할머니가 이 의자에 앉아 창밖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저녁을 먹고 안락의자에서 엄마 무릎에 안겨 잠이 들면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로 팔을 뻗어 불을 끌 수도 있다. 아이가 바라는 건 오로지 엄마를 쉬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아이의 마음은 순전히 그랬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또 어떨까. 경제 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을 만큼 가계가 힘들어지자 부모는 아이를 도시에 사는 외삼촌에게 보내기로 한다. 시골의 넓은 초원에서 할머니와 꽃을 키우고 밭을 일구던 여자아이는 느닷없이 익숙한 집을 떠나 삭막한 도시, 거대하고 황량한 기차역에 혼자 내린다. 엄마가 자신의 옷을 줄여서 만든 파란 원피스를 입고서.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씩씩하다. 낯선 장소 낯선 관계를 다정하게 대한다. 아이는 무뚝뚝한 외삼촌의 빵집에서 열심히 일을 도우며 크리스마스에는 외삼촌에게 시를 선물하고, 빵집에서 일하는 엠마 아줌마에게 꽃씨 이름을 가르쳐주는 대신 빵 반죽하는 법을 배우면서 틈틈이 꽃을 키운다.  














삭막한 도시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할머니가 보내준 씨앗, 흙을 담을 화분, 햇빛과 물만 있다면.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으면 더 풍성하게 피울 수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원예사 아가씨라고 불린 이 아이는 빵집 건물의 내버려진 옥상을 꽃밭으로 꾸미기로 마음을 먹는다. 엄마를 위해 동전을 모으던 아이처럼 이 아이도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건물 옥상에 멋진 정원을 완성했고 그걸 외삼촌에게 선물했다.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꽃 정원을 완성해서가 아니라 외삼촌에게 그걸 선물해서 아이는 행복했다. 선물은 꽃 정원이 아니었어도 좋으리라. 사랑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걸 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선물을 받아 들고 활짝 웃고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마음이 사랑이다.  

 













여기에 또 한 아이가 있다. 아픈 할머니 때문에 놀이 공원을 가지 못해 화가 난 아이. 엄마 아빠는 아픈 할머니를 모시느라 아이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다. 두 사람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홍시를 냉장고에 쟁여놓고 할머니의 병시중을 하는 데만 온통 신경이 가 있다. 아이는 방에 누워만 있는 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엄마 아빠가 많이 밉다.

 

다래는 방문을 쾅 닫았어.
할머니는 왜 맨날 누워만 있는 거야?
맨날 누워 있는 할머니 생각만 하고
다래 생각은 하나도 안 해주는
엄마 아빠가 너무너무 미웠어.
다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꽉 감았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할머니가 다래를 깨웠다. 다래, 아직 안 일어났니? 그리고는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피곤할 테니 둘만 살짝 다녀오자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얼려 놓은 홍시까지 챙겨놓았다. 다리가 아플까 봐 놀이공원 입구에서 자기를 업어주는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아이는 할머니에게 홍시를 먹여드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머니가 자꾸만 젊어졌다. 공원 입구에서는 엄마만큼 젊어지고 은하철도를 탈 때는 언니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무지개 아이스 바를 먹으며 할머니가 자기만 한 친구가 된 뒤에야 아이는 할머니 이름을 알게 되는데...  

 

"다래, 넌 나만 쳐다볼 거니?"
다래는 그때서야 아이스 바를 받아 들었어.
", 그럼 네가..."
"그래, 명애. 내 이름도 몰랐어?"

 

  

놀이공원의 정글짐 꼭대기에서 둘은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약속했다. 가을이 오면 나무들이 울긋불긋 정말 예쁘겠다. 우리 그때 또 놀러 오자.

 

명애와 다래는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하철 안에서 할머니는 그새 동생이 되어있었다. 아이는 할머니를 등에 업었지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살금살금 할머니 방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는 더 작아져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 명애를 조심조심 바닥에 눕히고 곁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다래는 자기 방에서 깜짝 놀라서 깼다. 엄마는 네가 홍시를 먹었냐며 냉장고에서 홍시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방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아이는 쭈글쭈글한 할머니 얼굴에 대고 속삭인다.

 

"명애야...
가을이 오면 우리 꼭 다시 놀러 가자."



동심을 꿈꾼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모두가 나와 똑같은 마음일 거라 오해하면서 나는 동심을 꿈꾼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실함은 질료나 행동이나 이야기 같은 구체성으로밖에 잡을 수 없고 그걸 욕심껏 잡으려 하면 어느새 허망하게 사라지듯이-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리라-동심도 그런 것 같다. 엄마의 아픈 다리를 쉬게 해주고 싶은 안타까움, 활짝 핀 꽃으로 외삼촌을 웃게 만들고 싶은 다정함, 아픈 할머니를 아이로 돌려놓고 싶은 한없는 연민에서 나는 동심을 본다. 보드라운 아이의 웃음에서, 다정하게 잡아주는 손에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에서, 의심 않고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믿음에서, 자기를 활짝 연 품에서.  

 

달리 표현해 보자면, 사심 없는 마음이 동심의 얼굴 같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의심하지 않고, 내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 어른도 가끔 그런 마음이 되는 찰나가 있다. 오래 유지하기는 도저히 어려운 아주 짧은 동안에만 어른도 그럴 수 있다. 어른은 그 순간을 드물게 만나지만 아이는 그 순간을 아예 사는 것만 같다. 그건 누구보다도 우선 아이 자신에게 최고로 좋은 일이어서, 아이들은 모두 행운아다. 자라면서 우리는 행운을 하나씩 하나씩 길에 떨어뜨리며 잃어버렸다. 혹여 운이 좋다면 어떤 어린아이가 그걸 주워 우리에게 다가와 물을지 모른다. 이거 아저씨, 아줌마 거예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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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세계 - 아동청소년문학의 사유와 감각
김재복 지음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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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에 대한 성실한 사랑이 느껴지는 평론집이다. 소설 평론들은 평론가와 일부 작가만 이해할 수 있을 ‘닫힌‘ 글 같다.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건 불가능할까? 저자의 동시 평론들은 그렇기 때문이다. 동시를 얘기할 때 저자의 글은 살아숨쉬고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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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 작은 오두막에 두 동물이 비를 피해 들어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자 마음은 불안해지는데, 누굴까, 주저하다가 둘 중 좀 더 친절한 동물이-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여는 존재는 대체로 약자인 것 같다-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비바람이 정말 대단하지요? 그러자 상대가 화답했다. 아이고! 이런, 실례했습니다. 깜깜해서 누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어둠 속의 주인공들은 늑대와 염소였다. 작가 키무라 유이치는 잡아먹는 늑대와 잡아먹히는 염소를 한 공간 안에 들여놓음으로써 흥미진진한 상황을 연출했다.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가 닫힌 공간에서 대면하는 설정은 이야기 작법에서 흔하고 어린이문학에서도 즐겨 쓰인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면에서 키무라 유이치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과감하며 철학적이다.

 

<폭풍우 치는 밤에>는 총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책으로 시리즈의 이름은 '가부와 메이 이야기'. 가부는 늑대, 메이는 염소다.

  

 

메이와 가부는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서로 사는 곳이 가깝다는 얘기, 맛있는 먹이 얘기, 맛있는 먹이가 많은 산들산들 산에 대한 얘기 같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얀 염소와 늑대는 그들 엄마가 빨리 달리라는 똑같은 잔소리를 한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는데, 둘의 관계를 정작 주인공들만 모르고 독자는 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묘미다.

 

밖에선 아직도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밤이 깊어지며 배는 점점 더 고파오는데 두 친구는 이야기로 추위와 외로움과 배고픔을 잊는다. 작가는 서로에게 정체를 알려줄 듯 말 듯 끝까지 팽팽하게 긴장을 가져간다. 늑대의 발이 우연히 염소의 몸에 닿고 염소는 복슬한 털의 발 주인을 상상해본다. 혹시? 걸걸한 목소리도 미심쩍다. 하지만 염소는 곧 마음을 돌린다. 설마, 아니겠지 하며. 그때 문득 번개가 번쩍 내리치며 오두막을 환하게 밝히는데, 둘은 공교롭게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둠은 상대의 정체를 숨겨주며 오로지 이야기만 남긴다. 오로지 이야기만을.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진실로 들어가는 가장 곧은 길 같을 때가 있다. 하하하, 우리는 닮은 데가 정말로 많네요하하하. 깜깜해서 얼굴은 안 보이지만, 얼굴도 진짜 닮은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는 감탄스럽다. 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작가는 염소와 늑대에게 서로의 얼굴을 보여줄 듯 말 듯하다가 끝내 사실을 모르도록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권으로 이야기를 넘긴다. 폭풍우가 그치자 염소 메이와 늑대 가부는 헤어지면서 다음 날 낮에 만나자고 약속한다.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둘은 순수하게 기뻐한다.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정말 운 나쁜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친구를 만났으니 오히려 좋은 밤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내일 낮에 만날까요? 우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잖아요. 그럼, 우리 암호를 '폭풍우 치는 밤에'로 하지요


우리는 순수함을 주로 흰색에 비유하지만 이렇게 새까만 어둠도 순수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는 보여준다. 순수함의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듯이.

 

이어지는 시리즈는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 먹고 먹히는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순탄할 수 있을까. 숲 속 동물 사회에서 둘의 관계는 화젯거리가 되고 시선은 곱지 않다. 둘이 친구가 되는 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늑대 무리와 염소 무리는 분노한다. 어떻게 먹이와 친구가 된단 말이지? 어떻게 우리를 잡아먹는 적과 친구가 돼? 게다가 늑대는 염소에게 사냥 시간과 장소를 몰래 알려줄 수 있고 염소 역시 늑대에게 염소 무리의 위치를 귀띔해 줄 수 있으니 둘은 내통자라고 두 무리는 단정해버린다. 다른 여지는 없다.

 

이렇게 위태위태한 상황 속에서도 메이와 가부는 서로에게 좋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보름달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절벽이 있어. 거길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 자라는 산에 가보지 않으련. 우리는 좋아하는 친구와 좋은 걸 나누고 싶으니까. 위태로움은 외부에도 있지만 자기 내부에도 있다. 염소 메이는 늑대 친구가 혹시 자기를 잡아먹지 않을까 문득문득 두려워하고 늑대는 자꾸만 염소 친구가 맛있는 먹이로 보인다. 정말 괜찮은 애야. 먹어도 맛있겠지만... 그런데 같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단 말이야. , 맛도 좋겠지! 그래도, ? 귀가 쫑긋 움직이네. 조금만 깨물어 볼까? 친구니까 한쪽 귀만 맛보라고 하면 좋을 텐데. , 정말 배고프다.

 

이야기는 점점 파국을 향해 간다. 늑대 무리는 가부에게 염소가 어디에서 먹이를 먹을지 알아오게 시킨다. 염소 무리도 메이에게 늑대들이 언제 어디에서 염소 사냥을 할지 알아오게 시킨다. 둘은 궁지에 몰린다. 숲 속 모든 동물들이 주시하는 속에서 이들은 뭘 할 수 있을까. 도망치는 수밖에.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자신의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길 밖에. 둘은 결국 강 건너로 달아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 <안녕, 가부>는 강물에 뛰어든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둘은 기적적으로 거친 강물에서 빠져나온다. 숲 속 동물들은 둘을 지켜보며 속닥거린다. 늑대 무리가 자기네를 배신한 가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걸 가부는 이 속닥거림으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늑대들은 세상 끝까지 가부를 쫓아가서 갈가리 찢어 죽이고 메이를 축하용 먹이로 쓰겠다며 떠벌리며 숲 전체를 뒤지고 있었다. 둘은 더 멀리 도망쳐야 했다. 메이는 가부에게 말했다. 달아나자, 가부. 저 산 너머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 너머는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대한 어떤 얘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산꼭대기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둘은 상상했다. 저 산 너머에도 푸른 숲과 폭신폭신한 풀밭이 꼭 있을 거야. 그래, 틀림없이 있을 거야. 둘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올라갈수록 험해졌고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늑대들이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둘은 몇 날 며칠을 눈 속에서 배를 곯으며 걸었다. 눈발이 둘의 몸을 휘감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입도 벌리지 못할 정도로 거센 눈보라 속에서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늑대보다 몸이 약한 염소 메이가 추위에 먼저 쓰러졌다.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늑대 무리에게 잡아먹히든 얼어죽든 이제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메이는 가부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죽음을 앞뒀을 때 우리는 가장 진실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진실이 가장 또렷하고 맑게 보이는 순간은 죽음을 앞둔 때일 것 같다. 메이가 얘기했다. 친구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고, 내 목숨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친구를 만났다고.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나를 먹고 건강하게 이 산을 넘어서 푸른 숲으로 가라고.

  

가부는 당연히 메이를 먹을 수 없었다. 자꾸만 메이가 먹이로 보이긴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대신 목숨을 주어도 좋을 친구라는 말이 가부를 흔들었다. 산 아래에서 늑대들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메이는 눈구덩이에 누워있었다. 메이를 살리기 위해 가부는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가부는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가부의 몸은 하얀 눈덩이가 되어 구르고 굴러 작은 눈사태를 일으켰습니다. 눈이 연기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폭풍이 되어 모든 것을 죄다 집어삼키며 내려갔습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쳤고 저 멀리 푸른 숲이 보였다. 눈보라 속에서 가부와 메이는 높은 산을 넘었던 거였다. 메이가 소리쳤다:


가부. 숲이 보여. 푸른 숲이 진짜 있었어. 가부, 빨리 와 봐. 우리가 산을 넘은 거야. 가부! 가부! 메이는 그칠 줄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가부를 불렀습니다.

 

<안녕, 가부>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는다. 우리말에서 안녕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공통으로 하는 인사인데, 가부에게 하는 안녕은 헤어질 때의 안녕이었다. 슬프게 안녕을 하는 이야기. 어린이문학에서, 그것도 아주 어린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서 이렇게 슬프게 이야기를 끝내는 법이 있냐고 작가가 항의를 받지는 않았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은 건, 삼 년 뒤에 나온 시리즈의 마지막 권 <보름달 뜨는 밤에>는 푸른 숲에서 친구를 그리워하며 홀로 슬프게 지내던 메이 앞에 기적적으로 가부가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행복하게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전형적인 옛날이야기처럼 말이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행복은 무조건 이야기의 결론이어야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과연 그래야 할까, 다시 생각해 본다. 이야기로 은유되는 우리의 삶은 무조건 괜찮아야만 할까?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보고 나오며 무의식 중에 떠오른 말이 있었다. 우리는 괜찮고 또한 괜찮지 않다.

 

 

 

 

저 소녀의 이름은 주인이다. 영화 제목 <세계의 주인>의 주인은 주인공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주인임을 말하고 있다. 열여덟 살 주인은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다. 주변의 몇 사람만 알고 있던 이 사실은 영화 중반을 지나서야 밝혀지지만 영화가 하려는 말은 영화 초반에 이미 말해진다. 성폭행범 거주반대 서명운동을 하는 친구에게 주인은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문구를 명확하게 짚어서 말한다. 성폭행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고. 나는 성폭행이라는 단어 자리에 다른 말을 넣어도 이 명제는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위험하고 수많은 위협이 우리를 넘본다. 가난과 폭력과 재난과 부조리와 인간 본성의 어쩔 수 없는 야수성 같은 것들 앞에서 인간은 대책이 없다.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가 되고 염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고, 피해자의 영혼은 그것들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이 말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일종의 러시안룰렛과도 같아서,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피해자의 영혼은 그것들로 인해서 완전히 파괴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다짐하며 외친다. 잘 살아내겠노라고. 삶은 불행한 사건 속에서도 눈부시도록 빛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노라고. 마치 <댈러웨이 부인>의 첫 구절처럼 소녀는 삶의 생기로 터질 듯하다:


꽃은 자기가 사 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루시는 루시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들도 떼어내야 했고, 럼플메이어에서 사람들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생각했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떤 불행한 큰 사건이 개인에게 닥친다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뒤는 같을 수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남긴다. 우리의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깊고 때로는 얕을지언정. 어쩌면 사건으로 채워지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들을 파도처럼 넘어가며 우리는 살아간다. 수없이 반복하며 씻어내고, 파괴되어도 다시 회복해 가면서.

 

이 영화에서는 바흐의 <사냥칸타타> 9번 곡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가 반복적으로 흐른다. 바흐가 독일 바이마르공국의 작센을 통치하는 크리스티안 공작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칸타타 중 이 9번 곡에는 가사가 붙었다. 좋은 양치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들은 평화로이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바흐는 은근하게 권고한다. 그러니 통치자여, 당신의 백성들을 잘 다스리시라. 제목은 주로 '양들이 평화로이/한가로이 풀을 뜯고'로 번역되지만 원문은 '안전하게'. 안전하면 평화로울 수 있을 테니 번역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평화는 더 궁극적인 상태고 안전은 지금 당장의 내 환경과 직결되는 문제다.

 

영화에서 이 곡이 흐를 때마다 눈물이 났다. 괜찮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 연약한 소녀를 위해서 올리는 기도처럼 노래가 들려서였다. 양들이 안전하게 풀을 뜯게 해 주소서, 양들을 보호해 주소서, 이 소녀를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소녀를 위해 웁니다. 소녀로 대변되는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성모마리아는 죽은 예수를 안고 우신다. 성모의 눈물은 크고 깊은 슬픔의 강물이 되어 이 세상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한다. 우리의 눈물이 슬픔의 큰 강으로 흘러들어가 위로받는다. 그래서 성모는 영원히 슬퍼하시는 거라고 나는 느낀다. ’성모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다. 세상에 슬퍼하는 이들이 있는 한, 성모는 끝없이 슬퍼하신다. 크고 깊은 슬픔으로 우리들의 슬픔을 품어주신다.

 

우리는 괜찮고 또한 괜찮지 않다. 일본의 어린이문학 작가 키무라 유이치는 과감하게도 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그림책으로 전하고 있다. 어쩌면 우정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남은 친구가 '그칠 줄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떠난 친구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는 안타까운 사실을. 행복한 어린이는 이 이야기를 무서워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아파서 슬픈 아이는 오히려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메이의 울음 속에서 자신의 눈물이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안심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내 슬픔이 더 큰 슬픔 속에서 감싸이고 위로받는 것 같은 느낌과도. 슬픔을 따뜻이 감싸 안을 수 있는 건 실은 행복이 아니라 슬픔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가 <안녕, 가부>로 마무리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메이는 끝도 없이 울고-영화에서 주인이 세차장에서 차가 세차장을 통과할 때 엄마를 원망하면서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이 있는데 이 감정 폭발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으리라는 걸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절대 영영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도 언젠가는 훌훌 털고 일어나 그다음 걸음을 뗄지 모른다. 하얀 염소는 눈물을 닦고 푸른 숲으로 갈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염소가 그럴 수 있기를 마음으로 기원하리라. 하지만 등을 떠밀고 싶진 않다. 슬픔을 빨리 털어버리라고, 친구의 죽음을 빨리 잊으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다만 기도할 뿐이다. 신이시여, 어린 양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 같이 울어주소서라고. 충분히 위로받고 나면 털고 일어날 힘이 생기는 법이다. 기원전 8-7세기에 유다 왕국이 위태로울 때 예언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도 먼 먼 이상향의 약속이 아니라 기도가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이사야의 예언이 슬퍼하는 이들을 깊이 위로하는 기도의 말로 들린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사야 6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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