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지 못하는 아이들 - 어떻게 엄마의 사랑을 잃어야 하는가
이수련 지음 / 위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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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있게 읽었다. 몇몇 부분은 지나치게 압축적으로 언급되어서 좀 더 설명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식만을 건조하게 늘어놓거나 자신의 생각을 단정적으로 전달하면서 아이의 양육자인 어른을 비난하는 식이 아니라, 아이의 본질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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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소년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3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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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소년>은 나에게 단순한 모험, 성장이야기 이상의 더 근원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로 읽혔다. 

 

옛날에 옛날에 어떤 낯선 나라에 가난하고 비열한 어른 밑에서 구박을 받는 연약하고 불쌍한 주인공이 살았다... 소설은 이렇게 전형적인 옛날이야기 혹은 민담처럼 시작된다.

 

아이들은 주인공에게 당장 마음이 끌릴 것 같다. 아이는 어른보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하고 독립해서 살아갈 수도 없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약자, 속상한 약자, 그래서 샤스타에게 자연스럽게 동질감을 느낄 법하다. 샤스타는 부모가 없는 고아에다가 못된 어른 밑에서 고생을 하는 처지였다. 샤스타를 데리고 사는 어부는 갓난 아이인 샤스타가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건져준 사람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나쁜 부모라도 아이들은 그 부모에게 매달리고, 아무리 나쁜 집이라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안정을 찾고 싶어한다. 그래서 샤스타가 어부와 집을 떠나려면 극적인 일이 벌어져야 했다. 어느날 샤스타를 노예로 사고 싶어하는 귀족이 나타나고, 샤스타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어부가 샤스타이 몸값을 놓고 귀족과 흥정을 벌인다! 그래서 이제  샤스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낯선 세계로, 바깥으로, 더 위험한 세상으로 나설 준비를 갖추게 된다. 

 

모험에 꼭 필요한 조력자는 말이었다. 브레라는 이름의 이 말은 샤스타에게 도망칠 것을 제안하고 자기자신도 도망칠 이유가 충분히 있었는데, 나니아에서 태어난 '말'을 할 줄 아는 말로서 어릴 때 불행하게도 납치를 당해 낯선 나라에서 갖은 모욕을 참으며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는 자신을 보잘것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샤스타와 달리 이런저런 이유로 자긍심이 넘치는 인물이다. 자긍심과 자만심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지.

 

(이야기가 단조로워지는 것을 막는 장치로서, 작가는 한 쌍의 여자아이-말을 등장시키는데, 남성과 여성의 조합은 세상의 조화로움을 상징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듯 싶다.)

 

샤스타와 친구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나니아로 가는데, 그 여정에서 나니아의 창조자인 신적 존재 아슬란은 이들이 자신들의 최선을 끌어내도록 돕는다. 이때의 최선은 최선의 능력이기도 하고 최선의 선함, 최선의 지혜로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슬란이 이들을 돕는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아슬란은 샤스타와 친구들을 직접적으로 돕지 않고 (내지는 은총을 내리지 않고) 이들이 이미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잠재된 가치와 힘'을 발현시킬 수 있게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도와준다. 신은 다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조력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지켜보는 것이 신의 역할이 아닐까? 정말 감탄해야 할 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지켜보는 신을 생각해낸 인간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샤스타는 나니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본래 위치를 찾아낸다. 샤스타는 왕의 아들이었다! '왕'의 아들이라니, 보잘 것 없는 아이에서 사회계층의 맨 꼭대기로 신분이 극적으로 솟구친 것이다.  

 

아이들은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내 엄마는 계모이고, 언니 오빠들은 이복형제들이며, 자기는 더 훌륭한 집안의 자식인데 불행하게도 비천한 위치로 떨어져 불행하게 산다고. 실은 내가 한때 그랬다. 아이들이 이런 상상을 하는 까닭은, 이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게 미숙한데 어른들은 내 마음도 모르고 나를 야단치기만 하고, 나의 자유는 의무에 뒷전으로 밀리고, 나는 귀한 대접을 받고 싶은데 사람들은 나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아이들은 생각한다.

 

세상에 적응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게다가 아이들은 모두 이상주의자이다. 이상주의자들이기에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과 세상은 더더욱 끔찍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른 세상을 꿈꾼다. 이를테면 나니아 같은...

 

어쩌면 기독교적 세계는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점에서 어린이가 꿈꾸는 세계와 많이 닮았다. 작가가 기독교의 세계를 판타지로 다시쓰기한 이 소설에서 나는 기독교 사상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열망을 읽었다. 이상향을 향한 뜨거운 바람을.

 

아이들은 이 소설에서 단순히 재미만 느낄까? 어떤 아릿한 통증 같은 것이 여운으로 남지는 않을까? 이상향은 절대 현실이 될 수 없는 세계인데, 두 세계의 괴리가 이 판타지 이야기 때문에 더 뚜렷하게 부각되는 부작용은 없을까? 하늘의 별은 절대 딸 수 없고, 나니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왕의 아들 딸이 아니고, 설사 왕자와 공주라고 해도 이것을 절대 증명할 수는 없다는, 그 어떤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읽었다면 그랬을 것 같다.

 

이 판타지 이야기는 여러 길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길을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가치있고 자기 역할을 다 했다고 하겠다. 이 이야기가 외로운 아이에게는 위안을, 혼란한 아이에게는 안정감을, 씩씩하고 행복한 아이에게는 만족감을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들이 힘을 내서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 놀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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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튀프론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20
플라톤 지음, 강성훈 옮김 / 이제이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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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글이고

흥미로운 대화이며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가르쳤는지(가르쳤다기보다 함께 대화를 통해 앎을 향해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를 고발하러 가는 원고의 입장인 에우튀프론과

고소를 당한 피고의 입장인 소크라테스가

경건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대화한다.

 

이 작품은 이 주제를 두 차원에서 접근한다.

하나는 경건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의 핵심인 '신'에 대한 논의의 차원이다.

 

경건을 정의해나가는 과정은 어떤 개념을 '정의하는 방법론'의 모범적인 예시를 보여준다.

에우튀프론은 신념을 가진 사람, 확신하는 사람인데

소크라테스는 그가 확신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 에우튀프론은 "지금은 제가 어딘가를 급히 가야"한다고 도망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있고

확신하기를 원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확실한 상태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확신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이 작품이 건드리는 다른 문제, '신'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마찬가지로 묻는다.

그 당시의 신에 대한 개념이 과연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소크라테서의 묻고, 묻고 , 또 묻는 그 집요함이

나는 정말 신선했다.

이 작품은 결론을 맺지 못한 채   

에우튀프론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끝나는데

이런 식의 글맺음을 나는 플라톤의 농담쯤으로 해석하고 싶다.

 

공교롭게 이 작품을 <논어>와 병행해서 읽었는데

<논어>에서도 이 작품과 겹치는 주제가 나온다.  

'아버지를 고발하는 아들'에 대해 공자는 말한다:

 

...정직은 그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흠을 숨겨주는 것 안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라면 묻지 않았을까, '무엇이 정직인가요?'

 

단순비교하기는 좀 위험하지만,

같은 문제를 놓고 대하는 동양과 서양의 태도를 보여주는 두 예가 참 흥미롭다.

문제를 검토하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플라톤의 철학은 풍성하고 생기발랄하며

수신, 효, 충을 지향하는 공자의 세계는 정적이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은 이 두 사람에게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나간다.

 

역자는 작품안내가 너무 길고 너무 어려워진 데 대해서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는데

전혀 그러실 필요 없으셨다.

역자의 안내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이렇게 재미있는 글인지 절대 몰랐을 것이다.

역자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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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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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매력적인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다. 문학적인 장치를 철학서에 활용하는 솜씨라니... 놀랍다. 텍스트를 잘 읽어낼 수 있게 길을 잘 제시해주는 역자의 글도 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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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복 - 누릴 복을 아껴라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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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생각해볼 좋은 글귀가 참 많다. 젊은이들에게는 좀 고답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래 리뷰들을 읽어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근심이 오히려 복으로 가는 길이 된다는 <덕근복당> 같은 말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힘이 되어줄 정말 좋은 조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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