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코 상
사노 요코 지음, 윤성원 옮김 / 펄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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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이래야한다, 자식은 저래야한다는 틀에 맞춰서 무수한 부모와 자식들이 진짜 자기 마음을 숨기고 속이고 꾸민다. 부모를 또 자식을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할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눈꼽만큼의 감상도 없는 진솔하고 진실하고 아프고 용감한 고백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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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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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번거롭고 힘들지만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 아이를 위한 글은 진실 즉 현실을 담은 새빨간 거짓말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노 요코. 그림책에 야생마의 기운이 넘치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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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습니다 - 때론 솔직하게 때론 삐딱하게 사노 요코의 일상탐구
사노 요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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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되어서야 내가 이 세상에 뭘 하러 왔는지 알았다. 이 세상엔 이렇다 할 볼일이 없다. 볼일은 없는데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지금껏 들어본 인생론 중에 가장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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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 개역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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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여행을 앞두고 내가 왜 여행을 하는지 내 자신도 알 수 없어서 사 둔 책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일 년이 지난 지금, 읽었다. 읽어보니, 이 책은 여행 전이 아니라 여행 후에 읽어야 할 책이 맞다. 

 

여행자는 마치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사람과 비슷하다. 뭔가를 찾아서, 내가 잃어버린 것, 혹은 내게 꼭 필요한데 갖지 못한 무엇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정신없이 여행을 다녀와서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대체 왜 떠났던 것일까?

 

여행에 대한 생각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너무나 다르다. 어떤 것도 정답이란 없고, 다만 '나'는 '여행'을 '왜' 꿈꾸는가를 위스망스와 보들레르와 호퍼와 플로베르와 훔 볼트와 워즈워드와 버크와 고흐와 또 러스킨을 읽으며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자 미덕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알랭 드 보통은 글을 기가 막히게 쓴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그의 글을 보면, 잘 설계된 사고의 도면 위에 심사숙고해서 어휘를 골라 벽돌 쌓듯 반듯반듯 쌓아올리는데, 자체적으로 완벽하게 논리가 맞아떨어지게끔 구성한다. 미적으로나 내용에서나 거의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5개 소주제로 나뉜 글에서 특히 시나이 사막의 여행기 한 꼭지만으로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낀다. 저자는 이 여행기에서 성경의 욥기를 다루는데, 욥기는 사실 내가 오랫동안 들여다봤던 이야기였다. 본능적으로, 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 이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느꼈다.

 

성경에서 욥은 매우 신실한 사람인데 하느님의 시험으로 극단의 고난을 겪는다. 급기야 욥은 하느님에게 따진다. 저는 착하게 살았는데 왜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하느님? 하느님의 대답은 언뜻 보기에 엉뚱하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

 

이 대화를 꼭 종교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비유일 수 있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고 위대하다는 낭만주의적 독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라는.    

 

알랭 드 보통은 '작아진 느낌을 얻기 위해서' 사막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시나이 사막의 황량하고 압도적인 공간 속에서 나를 압도하는 더 큰 힘,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서. 인간은 숭고함의 감정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본다. 자연의 광대한 공간은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이 깨달음은 우리의 약함을 새롭고 더 유익하게 생각하도록 이끌어준다는 보통의 말에 마음 깊이 공감한다. 

 

내가 속한 곳이 좁쌀 같은 이해타산의 인간 관계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곤두세우는' 좁은 사회를 넘어서 더 광활한 우주이며 나의 시간이 거대한 우주적 시간의 미미한 한 찰나라는 사실을 가끔 환기할 필요가 있다. 잘 살다가 갑자기 변덕을 부리듯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은, 밴댕이 속보다도 좁은 '인간 세계'와 그런 인간들 가운데 한 명인 '나' 때문에 숨통이 막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시나이 광야까지 가지 않아도, 내게 일어난 어떤 불행하고 불편하고 감당 못할 일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나의 지금 삶이 또는 나의 에고가 모든 것의 척도가 아니라는 깨달음까지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말로 깊숙이, 차분히, 잘, 성찰해본다면 말이다. 모쪼록 그러한 깨달음이 번개 치듯 나를 때려서 졸고 있는 내 정신을 깨워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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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의 바울 다시 읽기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호영 옮김 / 훗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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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바울을 연구하면서  '까다롭고 뛰어나며 여린 이 사람'을 존경하고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고 책 중에서 고백하고 있다. 나도 이 글을 읽으며 그랬다. 

 

극단적인 율법주의자(즉 바리새파)의 일원으로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던 바울이 극적으로 회심하는 다메섹에서의 경험은 유명하다. 로마제국 하에서 사는 유대 공동체를 위협에 빠뜨릴 수도 있는 예수 추종자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빛에 눈이 멀면서 말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는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울이 누구인지 묻자 그 목소리는 대답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경험으로 바울은 하느님의 가치 체계가 인간이 이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깨닫는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 예수와 바울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상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 전반에서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학문적으로 충실히 고증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속했던 유대인 공동체와 예수추종자들과 계속해서 갈등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유대인으로 살았으나, 유대인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인류 공동체를 지향했다. 내가 이해하기로, 바울의 사상은 다음 두 가지로 귀결되는 듯 싶다. 

 

평등주의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다. 그 누구도 우위에 서지 않는 상호의존적이고 다원적이며 서로를 존중하는 공동체. 카렌 암스트롱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간단히 '함께 사는 경험'으로 요약한다. 그러니 내가 지혜를 얻었노라, '자랑'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부합할 수 없다. 바울은 '자랑하는 기질'을 경계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남을 세우는 사람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또 바울이 그랬듯이.

 

사랑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기일 뿐.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따뜻한 애정을 넘어서 실질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고, 민족과 계층과 지혜의 정도를 떠나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익숙한 사회의 경계 밖 낯선 이방인들의 세계로 들어가 예수의 정신을 전도하는 바울을 유대교 공동체는 할례와 토라의 준수 문제로 의심하고 공격했는데, 사실 비종교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하느님에 대한 신실함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신실함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길에서 유토피아를 꿈꿨던 이, 바울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꿈을 품었더랬다. 그러나 그는 땅 끝까지 이르지 못했고, 공동체들 간의 경계를 허물지 못했으며, 그가 꿈꿨던 세상을 보지 못했다. 그의 세상은 모두가 서로 돕고 의지하며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그 자리에 세우는 유토피아였다.

 

바울은 예수처럼 혁명가였다. 그의 사상은 그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나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수용하기도 소화하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말한다. 말하자면, 대단히 초라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정신은 살아서 빛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보니 비로소 당시의 맥락 속에서 바울이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비기독교인으로서, 바울이 추구한 가치에 감동하고 수긍하면서도 그가 가진 확신("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은 이해불가한 영역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확신하는 이들이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 한편으로는 두렵다. 확신과 광기 사이에는 유혹적인 끌림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힘을 상쇄하는 다른 선한 힘이 확신을 잡아준다면야 확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신약에서 바울의 서신들이 모두 바울의 것은 아니며 바울이 쓴 편지로 확실시 되는 것은 다음이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과 둘째 서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카렌 암스트롱은 바울 활동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잘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내용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다. 역사적으로 생소한 사회사인데다 낯선 라틴어 단어들도 심심찮게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 바울이 아니라 진실한 한 인간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정도 어려움쯤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 매우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한 역자주를 보면 역자께서 많은 공부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본문 안에 포함된 대여섯 줄이 넘는 역자주는 가독성을 매우 떨어뜨린다. 각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가끔씩 인용되는 성경 구절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이해 안 되는 어색한 우리말을 고집하는 이유도 의아했다. 가령, '가이사와 달리 메시아는 굳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같은 표현... 비록 성경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고 해도 일반서에는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써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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