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 책 정리하기 1탄: 독수리의 눈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무조건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호주 문학은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것 같다. 주로 영미, 스페인, 프랑스, 독일, 그리고 일본과 중국 문학만 알고 있다. 호주로 어학 연수도 가고 여행도 가고 이민도 꽤 가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호주는 낯선 나라가 아닌데도 그쪽의 문화며 문학이며 역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독수리의 눈>은 호주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시기는 아마도 백인이 호주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무렵인 것 같다. 작은 원주민 공동체가 백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겨우 살아남은 아이 두 명, 구답과 유달이 주인공이다. 아이들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전한다. 그러다가 다른 부족과 다행히 합류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백인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총을 가진 백인들의 힘은 원시적인 창으로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부족도 결국 백인들에게 몰살당하고 구답과 유달은 또다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백인을 피해 더 메마른 지역으로 숨어든다. 아이들은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렀지만 기적적으로 샘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두 아이와 그 원주민 가족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작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50개 부족 100만 명 정도였던 호주의 원주민이 현재는 호주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한 29만 명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호주의 역사를 찾아보니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 점령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주의 원주민들도 아메리카인디언들이 겪은 불행한 역사를 고스란히 겪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992년 마보 판결을 통해서 유럽인들의 토지 점유가 원주민들의 후순위로 결정됐고, 호주의 원주민들이 땅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증거가 있지 않는 한 토지 소유권은 원주민들에게 있다고 공표됐다는 점이다. 이 판결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현 호주 사회에서 적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부당한 역사를 뒤늦게나마 바로잡았다는 점에서는 참 다행이다 싶다. 

 

이 소설은 고발 문학으로서는 분명 가치가 있지만 여러가지로 아쉬운 점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은 호주 원주민들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들은 종교적 전통을 지켰고 훌륭한 예술품들을 남겼으며 발전된 교육 제도가 있었고 세대에서 세대로 지혜를 전수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소설 속 원주민들은 상당히 '원시적'이다. 이들의 무기는 석기시대마냥 돌칼과 창이고, 야생동물들을 사냥해서 생존을 해결하는 일이 전부인 듯 보이며, 백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양을 우리와 나눠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주문이다. 그저 무방비의 선량한 원주민이 포악하고 선진적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백인들에게 희생당했다는 사실만 부각되고 원주민들의 삶과 사회와 정신 세계는 서술되지 않는다. 자연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 정도가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언급되지만, 내 것과 네 것을 놓고 싸우는 유아들에게 '장난감은 같이 갖고 노는 거야'라고 타이르는 식의 단순한 말이 현대를 사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인간의 소유 의식은 본능이라고 할만큼 근원적이고 그 역사도 길어서 백인과 원주민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어느 쪽의 옳고 그름으로 단정짓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의 증언을 넘어 더 깊은 사유를 작품 속에서 읽을 수 없어서 독자로서 아쉬웠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역사를 얘기하다보니 이야기가 단순해져버렸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일 테고.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필연적으로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뉴스가 사건 사고만 보도하듯 역사책에 기록된 일들도 부당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은 종말로 미친 듯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의의 힘이 어두운 역사의 흐름을 같은 힘으로 밀어내고 있기에 아직도 세상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이미 저질러진 학살 앞에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처연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여러 번 읽었다. 매번 새롭게 읽힌다. 나이가 들고 삶을 더 체험하게 되면서 깊게 이해되는 대목들이 있다. 사상의 깊이도 깊이려니와 아름다운 문장에도 감탄하며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흔의 죽음이 참 젊게 느껴진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중독성이 있어서 줄지어 여러 권을 읽었다. 다작하는 작가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단점이 사노 요코에게도 있다. 내용이 중첩된다는 것. 그녀의 솔직한 수다를 얼마나, 언제까지 들을지는 결국 듣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산사의 단청 세계 - 불교건축에 펼친 화엄의 빛
노재학 지음 / 미술문화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값이 미안해질 정도로 밀도 높은 책이다. 

 

우선, 풍부하고 희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물이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다녔지만 좀처럼 눈길이 닿지 않았던 천정과 벽, 지붕, 구석구석에 이렇게도 아름다운 작품들이 숨어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진부하더라도, 여기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글.

책은 보는 것 이전에 읽는 것이고, 문장은 단순한 단어의 집합이 아니어서, 독자는 글로 저자의 마음을 읽는다. 하나의 정신 세계,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무형의 세계를 말이다. 노재학씨는 서문에서, 절로 사진을 찍으러 갈 때면 언제나 정장 차림을 했다고 한다. 절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서문의 두 번째 줄에서 밝힌 이 말에 이미 나는 저자에게 매료당했다. 저자에게서 사진 작업은 '찍는' 행위가 아닌 '감탄'과 '경건'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나 큰 대상 앞에서-가령 우주라든지, 신이라든지-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느낌이 실은 모든 종교의 핵심일 거라 짐작한다. 저자의 경건한 발걸음을 뒤따라가며 특별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구경했고, 덕분에 많이 배웠다.

 

이 책을 꿰뚫는 대 명제는, 사찰 장식은 본질적으로 불국토를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법당을 장식한 연꽃이며 탱화, 절을 구성하는 건축적 구조와 구조물 하나하나가 모두 불교 교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법당 또는 절 자체가 하나의 화엄 세계여서, 천정에 그린 연꽃은 현실의 꽃이 아니라 불보살을 상징하는 '화엄의 꽃'이다. 이 명제 하나만 기억하고 읽는다면, 어려운 내용과 분량이 주는 저항감을 견디고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다.  

 

처음 책을 받아서 휘리릭 넘겨볼 때는 사진의 질이 좀 아쉬웠다. 다 읽고 나서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사진의 질을 높이려면 아마도 책값이 훨씬 높아지겠다 싶다.

 

불교에 대해 기초적이나마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글 읽기가 즐거웠다. 그동안 현실의 절집에서 경험한 이런 저런 일들, 불교 정신의 왜곡과 부패함에 분노하고 등을 돌렸더랬다. 불교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가 싶기도 하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풀렸다. 사실, 무엇을 믿는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믿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부처님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는 사람이 있기에 나같은 사람은 그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자리한 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돈이 안 될 게 분명해 보이는 이런 책들을 꾸준히 내고 있는 출판사, 미술문화를 최근에 알게 됐다. 기본을 잃지 않고 꿋꿋이 걸어가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JIN 2022-03-0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리뷰.. 감동했어요
 
[eBook] 방언정담 - 사람이 담긴 말 세상이 담긴 말
한성우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담하고 다정해서 제목대로 ‘정담‘이다. 절판되지 않고 e북으로라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모국어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