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흘러가도록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57
바버러 쿠니 그림, 제인 욜런 글, 이상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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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마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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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금복이를 위한 기도 청동시선 6
서금복 지음 / 청동거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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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잘 읽지 않는 편이다. 너무 어려워서.

 

왜 어려울까, 생각해보면 시인들이 모두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수수께끼처럼 내놓기 때문이니까, 하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독자로서 심통이 난달까.

 

때로는 자신의 사유 속에서 보편성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시인은-다른 문학 형태도 어쩌면 비슷할 테지만-일기와 이상(말하자면, 진짜 시)의 중간 어디쯤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헤맬 때가 아주 아주 많을 것 같다.

 

서금복 시인의 이 시집에는 시가 아주 많이 실려있는데, 모든 시가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고, 이해되는 시들에 모두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시란 모쪼록 사람에게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내가 외면하리

나도 모르는 가슴속

깊은 우물까지 내려가

말간 물 퍼 올려

감추고 또 감춘 눈물샘까지

말없이 닦아주는 너를

('시에게'중에서)

 

 

바로 이런 염원과 사랑으로 시인은 계속해서 시를 쓰는 것이겠구나, 짐작해본다.

내 가슴속에 깊은 우물이 있어 말간 물을 퍼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을 나도 한때는 했었음을 이 시를 읽으며 기억해냈다...  시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환기시켜주는 존재'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세상의 모든 금복이를 위한 기도'는 시인의 시세계를 잘 설명해줄 대표적 시 같기도 하고, 굳이 그게 아니어도 이 시에는 우리를 씩 웃게 만들면서 마음을 너그럽게 녹여주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다음의 시를 여기에 적고 싶은 건, 시가 나를 따끔하게 야단쳐서 반성하고 다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내 못난 점을 대놓고 얘기해줄 사람은 거의 없을 뿐더러 그랬다가는 절교하기 딱 좋다... 

 

 

비싼 입값

 

뱉는다고 뱉었건만

그래도 못 뱉고 입 속에 가둬둔 말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았는지

속 썩은 이가 대여섯 개나 된단다

 

세상을 향해 앙다물었던 오기로

어금니마다 금이 갔단다

 

썩은 이 뿌리까지 파헤쳐 가며 신경 다독이고

금간 이 갈라진 틈마다 금으로 메웠다

 

금값이 점점 오르는 세상

금 한 냥 입 속에 모셨으니

비싼 입값 해야겠다

 

침묵을 모셔야겠다

 

 

말과 생각과 행동의 괴리를,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겪을 시인에게 건필하시라,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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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 채봉감별곡, 장화홍련전 - 딸들의 수난 시대, 네 아비가 누구더뇨 겨레고전문학선집 25
림호권 외 옮김 / 보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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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학자들이 펴낸 <조선고전문학선집>을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낸 선집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 보존한 북한학자들의 수고와 보리출판사에 깊이 감사한다. 심청전을 처음으로 제대로 읽으며 깜짝 놀랐다. 문학작품으로도 민담으로도 너무나 뛰어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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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걸작 - 밥 로스에서 매튜 바니까지, 예술 중독이 낳은 결실들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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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이 세상을 새롭게 본다. 예술 작품들은 예술가가 무언가에 헌신한 결과물이며, 아름다움 또는 미학에는 정답이 없다. 저자 키멜만의 말마따나, '예술가들은 그냥 보는 행위를 즐길 뿐, 옳게 보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감상자인 우리에게도 그게 더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다. 

 

한 치과의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전구를 일평생 수집했다. 그의 박물관을 예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그곳에서 전구라는 사물을 유심히 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구가 아니라 전구를 응시하는 우리의 행위이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 내지는 창작이란 감상자의 편에서도 일어나는 무엇이다.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데, 다른 눈으로 본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무엇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은 기본적으로 '로르샤흐 테스트' 같은 것이어서,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던 어떤 일, 어떤 경험,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일정한 몇 개 요소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내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 좋은 예술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좋은 예술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겠다.   

 

저자의 표현대로 '나 자신보다 훌륭한 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을 '봄'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내가 보지 못했던 가치있는 것들일 테다. 내 주변의 섬세하고 작은 것들,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 내가 무심하게 만지고 씻는 그릇들, 사물과 사물 간의 익숙하다못해 지루한 관계성 같은 것들... 

 

평생 집안의 사소한 사물들이나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만 그린 조르조 모란디나 샤르댕, 황량한 허허벌판에 수많은 피뢰침을 꽂거나 초거대 조형물을 만드는 소위 대지예술가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의 '보는 습관'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껏 눈길을 주지 않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응시'한다. 깊은 응시는 일종의 명상일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은 일생의 소명 같은 것일 게다. 이 책에서 키멜만은 작품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예술가들을 이야기하는데, 작품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경건해진다. '일이 잘되지 않을 때조차 날마다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들의 성실함 앞에서 어떻게 그들의 작품의 가치를 쉽게 운운할 수 있을까. 

 

마이클 키멜만의 이 책은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책 전반에서 키멜만은 그들의 작품을 가볍게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지 말 것, 노력의 산물인 그들의 작품을 깊이 응시해보라는 조언, 그렇게 해서 열린 우리의 시선이 발견할 새로운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 말투는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 깊은 존경으로 (일방적인 찬사가 아니라) 일관하고 있어서, 내게는 이 책이 마치 사랑의 편지처럼도 읽혔다.    

 

책에서 소개되는 모든 작품들에 관심이 갔지만 특히 오노 요코의 작품 설명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샤르댕도. 

 

평이하게 쓴 글 같지만 한번에 읽고 끝낼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두 번을, 어떤 대목은 되돌아가서 거듭 읽었을 만큼 깊은 사색을 거쳐 나온 글이었다. 

 

얼핏 난해하게 느껴지거나 취향에 맞지 않거나 너무 유명해서 식상하기까지 한 작품 앞에서도 '회의'는 하되 '냉소'를 보내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이 피땀으로 창작한 작품 앞에서 그것이 감상자로서 내가 취해야 마땅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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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6탄: 하이타니 겐지로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두 작품을 읽었다. 1934년에 태어난 사람이니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옛날 사람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시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일본 어린이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이를테면, <너는 닥스 선생님이 싫으냐>의 첫 대목은 이렇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하고 교장 선생님이 말했지만, 새학기가 되어도 희망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리츠코는 생각했다.

가정교사는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오고,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학원에 가야 하고, 4학년이 되었는데도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할 수 없다.

"다 너를 위해서야." 엄마는 입만 열면 이렇게 말한다.

 

전형적이다. 지난 수년 간 읽어본 우리나라 동화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이 꽤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원 뺑뺑이를 돌고 저녁은 학원가의 식당에서 해결하며 새벽 2,3시까지 학원 숙제를 한다는 풍문은, 풍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렇지 않은 아이들도 물론 있지만 문제는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1930년대(!)에 태어난 일본(!) 작가가 쓴 작품이 바로 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짚고 있다는 것. 심란하고 심각하다. 한국을 포함해서 많은 사회들이 일본에서 진작에 시작된 이 병적인 현상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니까.  

 

또 하나, 전형적이라고 느낀 점이 있다. 작가의 시선 혹은 시선의 색깔이라고 해야 할까, 방향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 역시 기시적이다. 한국 동화 작가들의 서술 방식이나 서술 내용과 참 유사하다. 어른들의 과도한 욕심에 짓눌리는 어린이들을 '대변'하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른이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동심의 세계를 정답처럼 설정해놓은 듯한 느낌을 막연히 받았다. 선하고 착하고 눈처럼 순수한, 하지만 약하고 다친, 동심.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아이들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그들은 약하고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묘사한다. 아이들 스스로는 자기들이 약하고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바라봐지기를 원할까? 혹시 아이들은 "나는 그냥 새예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새 말예요!" 하고 말하고 싶지는 않을까? 아무 수식도 붙지 않은, 그래서 모든 수식이 붙을 수 있는, 그냥 '새'. 약하다는 말도, 아름답다는 말도, 부담스러운, 그냥 '새'로 그려지는 아이들이 나는 좋다. 작가가 이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이 느끼는 대로, 그들의 생동하는 힘을 직접적으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 3자의 거리감 없이, 이상적인 교육자이자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의 관념적 색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내 개인적 생각일 뿐이고, 어쩌면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일본 문화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상당히 묘한 분위기가 하다. 자폐적이면서 호의적이고 독립적이면서 협조적이고 규범적이면서 규범파괴적인 모순이 있다. 병적으로 완벽성을 추구하고, 그래서 동심조차 완벽하게 순수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일본 문화를 접할 때면 한국 문화만의 특성을 더 잘 알 것만 같다. 소탈함. 뒤틀리지 않고 시원시원한 느낌.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은 이런 소탈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정서를 '한'이라고 한다지만 나는 글쎄요... 동의하지 않는다. '한'의 정서는 일본과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참, 그러고 보니 <바다는 눈물이 필요 없다>도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작가도 말했듯이, 소설의 배경은 집필 당시에는 (그 당시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인데)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일본 모습이다.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 같다. 문명의 발전, 과학의 발전으로 세상은 좋아지면서 동시에 나빠지는데, 한 손으로 그린 그림을 다른 한 손으로 지우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 우리 인간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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