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장 클로드 카리에르.다니엘 비뉴 지음, 고봉만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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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16세기에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작품 그 자체로도 재미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법의 망으로 걸러지지 않고 법의 칼로 단죄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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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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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예술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다. 작가, 시인, 화가이기도 했다. 러스킨은 4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진 <Unto the last(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그의 개혁적인 사회사상을 설명한다. 이 책은 영국 노동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서이며, 간디는 이 책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논문들이 발표되던 19세기 당시에는 영국사회에서 격렬한 반감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당시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누리고 있던 영국사회는 자본주의적 경제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그의 글에 분노를 느꼈는데, 분노를 느꼈다는 것은 그의 지적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일지 모르겠다. 영국자본가들은 부를 추구하는 그들의 욕망이 도덕적으로 떳떳치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러스킨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요체는 '부에 대한 합당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논문 4편 전체가 시종일관 부에 대한 정의로 수렴한다. 그렇다면 러스킨이 말하는 부란 무엇인가?

 

그는 경제학을 '부자가 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만든 당시의 자본주의적 경제이론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그의 생각이 유물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경제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영혼과 정의, 도덕을 추구하는 경제학이었다.

 

자본주의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부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부를 평가하는 기준은 돈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소유한 백만원은 그 돈을 필요로 하는 타인의 절박함과 상응해서 그만큼의 힘을 갖는다. 따라서 부자가 되는 기술은 타인을 지배하는 위치에서, 불평등의 간격을 최대한 벌리는 것이다.   

 

'가장 싼 가격에 사고, 가장 비싼 가격에 팔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방식은 인간을 '탐욕을 추구하는 기계'로 정의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판 빵은 '누군가가 마지막 남은 동전을 긁어모아 산 것'일 수 있다. 그 빵은 비싸다. 누군가의 생명과 맞바꾼 것이므로. 

 

따라서 어떤 물건이 '가치 있다'고 할 때의 '가치'는 다르게 정의되어야 한다. 러스킨은 어떤 물건의 가치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유용한지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발이 필요한 사람에게 외투는 덜 가치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바르게 소비할 줄 모를 때 그 돈은 가치가 없다. 부란, 쓸만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물건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소유했을 때의 가치인 것이다.  

 

러스킨이 생각하는 모든 경제활동의 최고봉은, 현명한 소비 다시 말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가 아니라 그 돈을 무엇을 위해 쓰는가다. 우리는 자본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늘릴 수 있을까를 묻는 대신, 생명의 증식을 위해 이 자본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생명이 곧 부이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자신의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기에, 그리고 주류 시민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이상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역자는 '이상한'을 '별나라에서 온' 으로 번역해 놓았다.) 러스킨의 경제학은 도덕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당시의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고, 그의 도덕관은 기독교사상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비종교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탐욕을 추구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뼈 없는 인간을 가정한 체조이론이 타당하지 않듯이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은 타당하지 않다. 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글을 읽으며 지금의 사회를 생각한다. 러스킨이 이 논문에서 제안했던 노동별 임금고정은 대체로 엇비슷하게라도 이뤄졌다고 볼 수 있겠고, 어쨌거나 19세기 영국사회보다 현대사회는 경제적으로 더 윤택해졌고 노동상황도 더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러스킨은 머리말에서, 부의 획득은 한 사회가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적 조건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직이 존재한다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이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정직한지, 정의로운지를 생각한다. 러스킨은 '득실의 균형'이 아닌 '정의의 균형'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을 향한 조물주의 의도라고 하는데, 그것이 조물주의 의도인지는 논외에 부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사람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러스킨의 사상은 별나라에서 온 먼 그대가 하는 얘기로나 들리려나. 

 

러스킨의 충고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제부터 내가 내 자신에게 매 순간 물어야할 질문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 것인가?'가 아니라 '그 돈이 내 영혼과 타인의 영혼에 어떤 유익한 영향을 줄 것인가?'다. '정승같이 쓴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 별점 3개는 러스킨의 논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순전히 번역과 책 구성에 대한 평가다.

러스킨의 이 책은 두 번역본이 있는데 모두 절판됐다가 그 중 아인북스의 번역본이 새 표지에 새 제목 그리고 새 값으로 나왔다. 하지만 예전 번역본에서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예전 번역본에서는 띄어쓰기 오류를 비롯해서 의미 전달이 모호하고 오역으로 짐작되는 대목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러스킨의 글 자체가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번역문도 잘 읽히지 않아서 두 번역본을 같이 놓고 읽었다. 다른 번역본에서도 틀림없이 오역일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 있는데, 어떤 부분은 두 번역본의 해석이 너무 달라서 원문을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번역문에 수정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리라고 본다.       

자본주의 경제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러스킨의 기독교사상에 기반한 경제사상은 낯설 수 밖에 없다. 역자 주가 충실했지만 여기에 덧붙여 러스킨의 사상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다면 책을 읽고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다른 번역본의 옮긴이 해설이 상당히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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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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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행 그 자체가 자유다. 거대한 강을 따라가며 정신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헉을 보며 마음이 벅찼다. 완벽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다. 전반적으로 충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작품해설도 도움이 됐고, 삽화 감상도 내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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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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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독특하고 또 독특해서 낯설었다. 문화의 차이, 시대의 차이(저자는 1929년생), 코스모폴리턴이었던 저자의 삶,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개성에서 비롯된 결과이지 싶다. 이 기억에서 저 기억으로 옮겨가며 이어지는 사유가 묘하게 빛나는 진주 같은 글을 빚어낸다. 번역도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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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세트 - 전10권 - 개정판 홍명희의 임꺽정 1
홍명희 지음, 박재동 그림 / 사계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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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에 있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부럽지 않다. 살아서 펄떡대는 것 같은 인물묘사, 풍부한 민속학적 자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다채로운 우리말 표현들.

 

단테가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써서 (그때까지 빈약한 언어에 불과했던) 이탈리아어를 풍성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키웠듯, 한국어가 <임꺽정>을 통해서 화려하게 비상하지 않았나 싶다. 홍명희는 진정한 언어의 고수다!

 

작품 속에서 생생한 역사적 정보와 옛날 풍속과 민담들을 접할 수 있었다. 역사시간에 차라리 이 작품을 읽으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 많이 배웠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의와 인권에 대한 저자의 사고가 도적 임꺽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사회적 부당함과 개인적 불만이 애매하게 뒤섞이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되기 어려운데, 거기에 대한 성찰은 없다.   

 

임꺽정을 읽으며 신이 났던 것은 사회의 불의를 시원하게 한 방에 해결해주는 영웅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그 영웅이 실은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멈칫, 하게 된다. 이렇게 시시한 영웅이라니.

 

작품의 주인공이 반드시 정의롭고 옳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내면에서 선악의 갈등이 없다는 것,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통해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대리만족만 시켜주는 주인공 내지는 작품)이 실망스러웠다.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의 주인공들도 (현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정의로운 영웅들이 아니어서 몰입에 제동이 걸리기는 했었다. 인권과 정의의 대한 철학적 사유는 긴 역사를 통해 느리게 발전해서 지금에 왔다.

하지만 홍명희는 호메로스에 비하면 완전 현대인이 아닌가. <임꺽정>은 시대를 잘못 만나 도적이 된 잠재적 영웅의 이야기에서 멈추고, 위대한 이야기까지는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문학의 최고봉이 될 수는 없는, 유명인들의 찬사가 조금은 과분하다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는,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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