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 책 정리하기 5탄: 태양의 전사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와우!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인 채로 10년 이상을 놔둔 책이었다. 내가 감히 무시했던, 이 시대의 고전이다. 이 책 역시 표지 탓을 해야 하나... 어쨌든, 책의 운명 내지는 작가의 운명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책과 작가는 무의미한 존재다. 시간과 함께 묻히고 사라진다. 다행히 나처럼 표지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눈밝은 현명한 독자들 덕분에 이 작품은 아직도 건재하다. 진작에 이 책을 읽고 별점과 평을 남긴 위의 독자분들을 존경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다. 지리적으로는 아마도 그리스 어딘가인 것 같고, 시대적으로는 청동기다. 아직 철기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 사냥과 목축이 주축이었던 '황금빛' 부족의 한 소년의 성장기가 중심 줄거리인데,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것은 특정 연령대에만 한정되지 않는, 전 연령대의 독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두 개, 세 개 줄거리가 꼬이면서 굵직한 드라마를 연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시도와 좌절과 극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상당히 굴곡져 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의 예상을 종종 무너뜨려가면서, 마치 독자들과 게임을 하듯 뜻밖의 방향으로 휙휙 길을 틀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물들의 경우에도 특히 주인공의 심리가 간단치 않다. 다른 인물들의 개성 역시 잘 살아있다. 그래서 이 점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데 상당히 기여한다. 이 때문에 줄거리만 쉽게 죽죽 읽어나가지 못하고 한 줄 한 줄 음미하게 되고 때로는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게 된다. 

 

작품을 읽으면서 특히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웠다. 하나는, 문장.

문장은 단순히 미려한 것으로 훌륭해지지 않는다. 핵심은, 당연히, 문장을 만들어내기 이전의 사고와 감수성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백조가 방향을 돌리자 드렘은 두 개의 얕은 물웅덩이 사이 보석처럼 영롱한 초록빛으로 빛나는 판판한 풀밭 위를 낮게 날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대한 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햇살이 하얀 깃털 위에 내리비쳤다. 그림자가 땅을 달리는 검은 거울상으로 함께 날았다. 눈으로 빚어진 새와 그림자로 만들어진 새. (p.75)

 

세상이 갑자기 몹시도 상냥해진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자주 느꼈지만, 그건 드렘의 커다란 흰 백조와도 같이 눈이 시리게 선연한 아름다움이었지 지금껏 상냥스러움은 느껴보지 못했다. (pp.311-312)

 

묘사도 묘사거니와, 하늘의 새와 땅의 새 그림자를 '거울상'으로 압축할 수 있는 명민함, 세상을 '몹시도 상냥'하다고 느껴서 거기에 '상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감수성이 내게는 너무나 신선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철저한 시대적 고증이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청동기 시대의 부족 문화와 식생활, 거주 형식, 의생활, 생존법, 부족의 구성, 성인식 같은 것들에 대한 서술은 철저한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소설은 학술서가 아니므로 그 내용이 백퍼센트 정확해야 할 필요는 없고, 이것이 소설이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소설은 어쨌든간에 최대한 정확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로즈마리 서트클리프는 의무를 다했다. 그녀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청동기 시대의 한 부족의 삶을 소설로 구축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의 빈틈을 채우는 그녀의 경이로운 상상력 덕분이다.

 

이 작품에서 아홉 살 어린 소년은 기대와 실망과 고통의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공동체의 유능한 성인 구성원이 되었다. 현대 시대에도 여전히 소년들은 성인이 된다. 나도 그랬다. 성인으로 가는 그 길에서 겪는 실패와 성공은,이후의 다른 시기에서 경험하는 그것들보다 더 생생하다. 최초의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이 어리고 여리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기억이다. 여린 살은 매서운 겨울 바람에 더 유약하니까. 이것은 심리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성인식의 목표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모양은 다르지만 실질은 동일한 것 같다. 아이가 공동체의 유능한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을 위한 도전과 응전, 실패와 좌절.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한편으로는 '살아있다'는 느낌과 직결되는 듯싶다. 이 강렬한 체험이 그 이후에는 점점 막연하고 먼 북소리처럼 희미해지기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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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전사 비룡소 걸작선 28
로즈마리 셧클리프 지음, 찰스 키핑 그림, 이지연 옮김 / 비룡소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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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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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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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여러 번 읽었다. 매번 새롭게 읽힌다. 나이가 들고 삶을 더 체험하게 되면서 깊게 이해되는 대목들이 있다. 사상의 깊이도 깊이려니와 아름다운 문장에도 감탄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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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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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의 죽음이 참 젊게 느껴진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는 중독성이 있어서 줄지어 여러 권을 읽었다. 다작하는 작가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단점이 사노 요코에게도 있다. 내용이 중첩된다는 것. 그녀의 솔직한 수다를 얼마나, 언제까지 들을지는 결국 듣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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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사의 단청 세계 - 불교건축에 펼친 화엄의 빛
노재학 지음 / 미술문화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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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이 미안해질 정도로 밀도 높은 책이다. 

 

우선, 풍부하고 희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물이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다녔지만 좀처럼 눈길이 닿지 않았던 천정과 벽, 지붕, 구석구석에 이렇게도 아름다운 작품들이 숨어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진부하더라도, 여기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글.

책은 보는 것 이전에 읽는 것이고, 문장은 단순한 단어의 집합이 아니어서, 독자는 글로 저자의 마음을 읽는다. 하나의 정신 세계,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무형의 세계를 말이다. 노재학씨는 서문에서, 절로 사진을 찍으러 갈 때면 언제나 정장 차림을 했다고 한다. 절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서문의 두 번째 줄에서 밝힌 이 말에 이미 나는 저자에게 매료당했다. 저자에게서 사진 작업은 '찍는' 행위가 아닌 '감탄'과 '경건'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나 큰 대상 앞에서-가령 우주라든지, 신이라든지-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느낌이 실은 모든 종교의 핵심일 거라 짐작한다. 저자의 경건한 발걸음을 뒤따라가며 특별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구경했고, 덕분에 많이 배웠다.

 

이 책을 꿰뚫는 대 명제는, 사찰 장식은 본질적으로 불국토를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법당을 장식한 연꽃이며 탱화, 절을 구성하는 건축적 구조와 구조물 하나하나가 모두 불교 교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법당 또는 절 자체가 하나의 화엄 세계여서, 천정에 그린 연꽃은 현실의 꽃이 아니라 불보살을 상징하는 '화엄의 꽃'이다. 이 명제 하나만 기억하고 읽는다면, 어려운 내용과 분량이 주는 저항감을 견디고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다.  

 

처음 책을 받아서 휘리릭 넘겨볼 때는 사진의 질이 좀 아쉬웠다. 다 읽고 나서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사진의 질을 높이려면 아마도 책값이 훨씬 높아지겠다 싶다.

 

불교에 대해 기초적이나마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글 읽기가 즐거웠다. 그동안 현실의 절집에서 경험한 이런 저런 일들, 불교 정신의 왜곡과 부패함에 분노하고 등을 돌렸더랬다. 불교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가 싶기도 하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풀렸다. 사실, 무엇을 믿는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믿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부처님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는 사람이 있기에 나같은 사람은 그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자리한 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돈이 안 될 게 분명해 보이는 이런 책들을 꾸준히 내고 있는 출판사, 미술문화를 최근에 알게 됐다. 기본을 잃지 않고 꿋꿋이 걸어가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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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IN 2022-03-0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리뷰.. 감동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