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펭귄클래식 7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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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은 가족의 이야기이자 사회비판적 우화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을 담은 매우 복잡하고 다면적인 작품이다. 어떤 주제를 잡고 읽어도 생각할거리가 넘쳐난다. 전공자라면 작품의 얼개와 언어구사면에서도 도전적인 호기심을 느낄 것 같다.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한번에 이해하기는 어렵고 언뜻 보면 막장 아침드라마 같은 극단적인 파국의 드라마다.

 

우선 가족 이야기로서, 이 작품에는 두 아버지가 나온다. 한 아버지는 리어 왕으로, 그는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눠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 의도는 애초에 순수하지 못했다. 왕은 묻는다.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한다 말하겠느냐? 그에게는 부녀간의 정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보상을 베풀겠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사랑이 수량화될 수 있다는 것, 그에 따라 물질적인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은근하고도 노골적으로 '받은만큼 나를 돌보라'는 요구다. 리어 왕에게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거래일 뿐이다. 아버지의 이기심과 자식의 이기심이 적정 선에서 계약을 하는 것일 뿐, 사랑은 다만 '향기로운' 번역어에 지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왕이 가장 사랑한 세째 딸 코렐리아는 "폐하를 사랑합니다만 자식의 도리에 따른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진실로 아버지를 사랑하며 이것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전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기심에, 사랑의 변질에 거부한다. 그리고 설사 진실된 사랑이라 해도 부녀 간의 사랑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구속할 수는 없다는 뜻도 암암리에 드러낸다. 

리어 왕은 분노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번에 부녀의 정을 끊어버린다. 그는 극단적으로 충동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 반추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결국 그는 자신을 그대로 빼닮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두 딸에게 전 재산을 주었으나, 그들에게 버림받고 미쳐서 폭풍우 치는 들판을 헤매게 되며, 끝내는 세째 딸의 주검을 품에 안은 채 생을 마감한다.    

 

<리어 왕>에 나오는 두 번째 아버지는 글로스터 백작으로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하나는 적자인 에드거로서 좋은 청년이며 효자다. 둘째는 에드몬드인데, 그는 서자이고 아버지를 수단으로 삼아서 재산과 명예를 얻고 싶어한다. 그는 애초에 비뚤어진 본성의 소유자다. 리어 왕이 첫째와 둘째 딸에게 왕국을 분할해주면서 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와중에 에드몬드는 계략을 써서 아버지와 에드거 사이를 이간질함으로써 에드거를 내쫓고 아버지 역시 철저하게 배신한다. 아버지 글로스터 백작은 결국 두 눈까지 잃고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아버지는 이기적이거나 어리석다. 그들은 자식을 소유물로 착각한다. 그들은 아버지이되 무조건적 사랑을 모른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유형의 자식들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한쪽에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동생을 질투하는 두 딸과 자신을 서자로 만든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이 있고,  맞은쪽에는 결함을 지닌 아버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으로 감싸는 막내딸과 적자가 있다. 괴물 같은 자식들과 천사 같은 자식들이 인간의 선악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에서 끊임없이 본성을 언급한다. 인간은 선악을 본성으로 타고 나기는 할 테지만, 그것은 인간 내부에서 공존하는 것이라서 아버지의 일부를 자식은 하나의 인격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리어 왕은 자신의 악한 두 딸들을 향해 말한다. "너는 나의 살, 나의 피, 나의 딸이다. 아니 너는 차라리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질병이라서 내 것이라 불러야만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고로부터 이어져온 부동의 진실, 즉 사랑이 아닐까 한다.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에서 천상적인 사랑의 자락을 리어의 막내딸 코딜리아와 글로스터의 아들 에드거에게 드리워놓은 듯 싶다. 악랄한 자식 에드몬드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힘과 명예가 아니라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른다. 리어 왕의 두 딸이 서로 질시하며 에드몬드를 차지하려고 싸웠던 것 역시 그들에게 결핍됐던 사랑이었는지도. 두 딸은 이 싸움으로 죽었고, 에드몬드는 죽으면서도 비로소 충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에드먼드는 사랑받았다. 나를 위하여 한쪽이 다른 쪽을 독살하였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런데 그렇게 선하고 명예로운 코딜리아와 에드거의 내면에도 혹시나 무의식적인 공격성이 숨어있지는 않을까? 나를 소유하려는 아버지, 나를 의심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것의 검은 그림자가 코딜리아를 난국의 희생 제물로 만들고, 에드거로 하여금 사회 가장 밑바닥의 떠돌이 미치광이로 가장해서 스스로를 자학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이들의 희생과 추락이 혹시 아름답게 변장한 공격성의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책을 덮은 뒤에도 왕의 큰딸과 둘째 딸 그리고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 에드몬드의 냉혹함이 오래 마음을 붙잡았다. 나는 그들이 오히려 리어 왕보다 안쓰럽다. 그들의 결함과 결핍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으므로. "형체를 바꾸고 본성을 감추고 있는 것이 당신을 괴물로 만들게 하지 마시오."라는, 큰딸에게 주어지는 경고가 실은 나를 비롯한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말은 아닐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폭풍우 속으로 뛰쳐나간 늙은 아버지 리어 왕을 보며 큰딸은 아버지를 다시 데려오려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고집불통들에게는 자기 스스로 초래한 상처들이 엄한 선생님과 다름없어야만 합니다." 미움이 냉혹함으로 변할 때, 그래서 연민을 지울 때, 우리는 괴물이 된다. 우리 안의 결함과 결핍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한없이 냉혹해진다면 말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작품인 동시에 매서운 사회비판을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리어 왕은 두 딸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폭풍우 치는 들판으로 나간다. 딸들은 신하 없이 혼자 몸으로 자기들 밑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하지만, 리어 왕은 자기 자신을 거친 자연 속에 내팽개치고 자학적으로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딸들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그는 폭풍우 속에서 미쳐버린다. 그리고 비로소 사태의 본질, 삶의 본질을 본다.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급작스럽게.

한때 오만한 왕이었던 그는 말한다. '나는 아주 어리석고 실없는 늙은이라오. 더도 말고 덜도 말로 여든 살을 먹었소." 라고. 그리고 자신의 왕좌 아래로 내려다보던 모든 이들의 본질과 자기 자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너는 사물 그 자체로구나... 벗자, 벗어, 빌린 것들을! 자, 여기 단추를 풀어라." 모든 사회적 표피 아래 인간은 사물처럼 그저 가치중립적이며 미약하고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의 사회 고발은 느닷없기도 하다. "농부의 개가 거지에게 짖어대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권직이 있는 개한테는 복종하는 거지... 죄에 황금 칠을 하면 강력한 정의의 창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지는 것이다..." 리어 왕은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회의 부패를 꿰뚫어보게 된 것일까. 그는 단지 두 딸에게 버림받은 전직 왕이었을 뿐인데.  

어쨌거나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의 입을 통해 그 당시의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서문의 필자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을 1606년에 제임스 왕과 신하들 앞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미친놈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질병 아니더냐." 라는 대사를 들으며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하여간 그 뒤 1649년에 제임스 왕의 아들 찰스 1세가 처형당했고 왕국이 공화국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는 참으로 대담했다. 

 

그동안 나는 무의식 중에 셰익스피어를 모차르트와 견주었던 것 같다. 밝고 경쾌한 천재쯤으로. 그것은 <한여름밤의 꿈>이나 <마음대로 하세요> 같은 작품에서 받은 유쾌한 인상 때문인 듯 싶은데, 사실 여러 작품에서 셰익스피어가 다룬 주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리어 왕>의 비극성은 격렬하고 극단적이다. 거의 모든 인물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절단내 버리고, 근원적이고 신성한 것으로 여겨온 부모자식의 사랑 이면의 이기심과 악마성을 드러내며, 한 사회의 계급질서 자체를 조롱하는 <리어 왕>의 과격함과 비극성을 그 어떤 작품이 따라갈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세상의 기존 가치들을 모조리 비웃고 부정하고 전복시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문에서 필자 키어넌 라이언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작품 초반에 에드먼드가 에드거를 속이는 대목에서 그는 "제가 듣고 본 것만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아주 어렴풋하게만 말해서 그 끔찍한 실상 the image and horror of it은 채 보여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리어 왕이 세째 딸 코들리어의 주검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에드거가 비통해하며 말한다. 이것은 "그 참상의 이미지image of that horror인가?" 라고. 작품은 이렇게 처음과 끝이 'the image of horror'로 이어지면서 이 연극이 하나의 이미지임을 드러낸다.

 

셰익스피어는 이것을 의도했던 것일까? 극단적인 비극성으로 연극을 낯설게 만들고, 그로 인해서 관객이 줄거리가 아니라 비극의 이미지에 집중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일까? 진실은 이미지의 형태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렇게 추상화된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며 끝나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연극무대 밖으로 가지고 나와 실제 세상에, 우리 자신에게 입혀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통해 이 세상을, 우리 자신을, 인간의 본성을 바라본다. 모두 파괴되고 말아서 어쩔 수 없이 맨눈이 되어버린, 어쩔 수 없이 솔직해져버린 눈으로 말이다. 글로스터 백작의 두 눈이 파였다는 것은 어쩌면 이것을 상징하는 것일지 모른다. 기존의 관점은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을.    

 

셰익스피어는 작품 여러 곳에서 솔직함을 강조한다. 리어 왕은 코딜리아를 향해 '꾸밈을 모르는 저 물건'이라 부르고 리어 왕의 충신인 켄트는 '솔직한 것이 제 직업'이라 말한다. 주인공들이 모두 죽고, 모든 가치가 파괴돼 버린 자리, 처참한 마지막 무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까.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는가. 빈터, 빈 자리, 처음, 다시 모든 것을 바르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 혹시 이런 것들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고,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리어 왕>의 마지막 무대가 우리에게는 무에서 시작하는 첫 무대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비극의 이미지로 보는 이 세계를,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 리어 왕의 말대로 우리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고 태어나면서 우는 까닭은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기 때문인데, 에드거가 절망 속에서 자살하려는 아버지에게 주는 충고가 실은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 세상에 올 때만큼 세상을 하직할 때도 사람은 인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자, 갑시다." 뼈 속 깊이 신랄하고 냉철한 회의주의자가 주는, 겨울 찬 바람처럼 냉정한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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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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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라는 걸출한 인물에 대해 아주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평전 덕분이다. 혁명가로서의 체 게바라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특히 쿠바 혁명을 위한 게릴라 전의 생생한 현장을, 그리고 그 이후의 여정을 이 저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그를 일컬어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간'이라고 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말마따나, 뛰어난 지성과 뜨겁고 순수한 영혼으로 혁명을 실천했던 체 게바라의 인생은 책 한 권으로 요약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사실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간단히 정리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된다.) 그의 행적은 복잡했고 광대했으며 한편으로는 비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특별한 '관점'과 '해석'이 더욱더 필요한 것 같다.  

 

물론 평전은 객관적인 서술이 전제돼야 한다. 그 인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한 쪽으로 치우친 평가를 내려서도 안 되고 삶의 일부분만 부각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평전 안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부터가 사실은 굉장히 주관적인 작업이고, 그래서 주관 속에서 최대한 객관을 유지하는 것 혹은 최대한 합리적인 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평전은 체 게바라를 깊이 있게 해석해내는 작가만의 철학이랄까 해석이 좀 약해 보인다. 체 게바라의 행적과 주변인들의 기억, 평가, 그의 글 단편들을 잘 정리해놓기는 했지만 그 저변에서 체 게바라를 움직이게 했던 개인적 동력이랄까, 그의 철학과 시대정신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해석'은 적었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로,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세계상황이 별다른 사전 설명없이 곧장 제시는 점도 평전의 가독력을 매우 떨어뜨렸다. 낯선 상황과 용어 앞에서 독자로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데, 하나는 막연한 감으로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고(오독과 오해와 몰이해를 감수하고), 다른 하나는 책을 중간에 덮고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다. 어쨌든 글을 읽어나가는 데는 큰 방해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평전을 쓰고 읽는 이유는 뭘까. 특별한 한 인물의 삶을 통해서 개인의 삶을 더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건 아닌지. 그 인물이 속해있는 시공간적 좌표를 읽고 그 안에서 보편적 인간과 삶과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체 게바라는 확실히 특별했던 사람이었다. 이상적이고 뜨거웠으며 명철했고 인간적이었다. 사람을 너무 이상화시키는 건 위험하고 어리석다.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이 점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특별했던 사람이 특별한 행적으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지평을 더 넓혀놓았다는 점, 인간이 선량하고 정의로울 수 있는 한계를 더 확장시켰다는 점, 이것은 분명 체 게바라의 위대한 성취가 아니었나 싶다.

 

번역에 있어서도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 번역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아서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우선,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들이 꽤 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하나는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원문 자체에 담긴 정보가 우리에게 너무 낯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인은 번역의 두 번째 아쉬운 점과 연결된다. 체 게바라가 활동했던 시대와 장소는 지금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아주 생소하다. 우리는 같은 서구문화권에 속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시의 남미 상황은 우리에게 거의 이해불가다. 따라서 꼭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역자 주를 붙일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한 마디로, 독자를 위한 배려가 너무 없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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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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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정말 어렵게 어렵게 조금씩 나아간다, 고 느끼며 작품을 읽었다. 그만큼 어느 한 부분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고, 상반되는 철학들 사이에서 균형을 최대한 유지했다. 그러나 작품 안에 담긴 작가의 뜻은 분명하고 간단했다. 삶이 명분에 앞선다는 것. 작가는 이 작품에 앞서 다른 여러 글에서도 일관되게 이러한 가치관을 유지하는 듯이 보인다.

 

<남한산성>에서의 무게중심은 한 나라를 존폐 위기로 몰고간 사건에 있지 않고, 그 위태로움 앞에서 각기 다른 태로로 응전하는 여러 인물들에 있다. 인조, 최명길, 김상헌, 서날쇠, 이시백, 김류, 사공, 그리고 그밖의 인물들... 삶의 위기 앞에서 그들이 취하는 태도는 지위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달라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삶과 명분으로 나뉘었다. 

 

명분이란 실상 사대부에게나 중요한 것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대부의 진영에서 과감히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은 삶의 중요성을 대변한 인물처럼 보이는데, 이렇게만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만으로는 명분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김상헌이 사공과 사공의 딸 나루에게 갖는 애틋한 마음과 서날쇠에게 보내는 믿음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명분과 삶의 길은 어느 순간, 어느 길목에서 맞닿아 있고, 그 지점이 저마다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쓰라린 갈등과 회한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남한산성>을 읽으며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씁쓸하게 되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한 나라의 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는 살고자 한다"고 소박하게 실토하는 그 말에서 어쩌면 큰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고자 한다. 산다는 것. 양파의 껍질은 까도 까도 끝이 없다지만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끊임없이 양파를 까는 행위와도 닮았다. 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기로 한 인조의 결정은 남한산성에서의 겨울에서 다음해 봄까지의 하루 하루를 어렵게 통과하며 명분을 버리고 또 버린 결과였다. 명분의 껍질을 벗겨내고 남은 것은 '무'였다. 결국 우리의 하루 하루는 그렇게 삶에서 끊임없이 '덜' 중요한 것을 버리고 가장 깊고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내려가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결국은 '무'에 도달한다. 아무 것도 없는 자리로.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숭고한 무엇을 만난다. 인조와 최명길과 사공과 백성들은 그것을 '목숨'이라고 보았다. 김상헌은 그 자리에서도 마지막까지 '명분'을 지켰으나, 명분을 받치고 있는 그 자리가 삶의 자리임을 결코 '못' 보지 않았다.  

 

한 명분이 떠난 자리에 다른 명분이 들어서고, 이 명분이 떠나면 또 하나의 명분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살아왔다. 결국 삶이란, 아무 것도 없는 자리 그 자체인 것이고, 그 자리에 우리는 서날쇠처럼 밭에 똥물을 뿌리며 다시 농사를 짓는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눈물겨운 내일의 밥을 입에 떠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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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모험 비룡소 걸작선 56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카를로 콜로디 글,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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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관광상품으로 피노키오 인형이 사방에 보였던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작가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렌체 출신이었다. 그는 1800년대 초중반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이탈리아가 성립한 뒤에는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로 방향을 바꿨다. 곧바로 연상되는 우리나라의 작가가 있다. 방정환.

 

막 성립한 나라, 아직도 혼란 정국이었을 나라,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험난한 여정과 통일 이후의 흥분과 낙관으로 들떠있었을 나라, 그리고 어린이들의 처지는 틀림없이 너무나 열악했을 나라. 방정환처럼 콜로디 역시 이탈리아의 어린이들에게서 연민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지 않았을까.

 

피노키오 이야기는 삽화적인 짧은 사건들이-어찌보면-약간은 즉흥적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이 작품이 어린이용 신문에 짧게 연재됐던 동화였다는 사실, 그리고 어린 독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따라가고 있는 큰 틀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자유와 유혹, 시련과 극복이다.

 

인형, 그것도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진 피노키오가 갑자기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나 이 아이가 끊임없이 유혹에 넘어간다는 점,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상어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작가의 사상적 배경이 기독교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런 배경 위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열심히 배우고 정직하게 일하는 가치'인 것 같다. 이제 막 통일이 된 나라에서 당연히 가장 필요한 가치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이 가치를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고, 작가의 고유한 인간성이 엿보인다. 피노키오를 끊임없이 시달리게 만들었던 주변의 유혹들은 얼마나 음흉하고 폭력적인가. 동시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피노키오에게 충고하고 도움을 주는 선량한 힘들도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지만 꼭 그렇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사람은 약하고 어리석고, 다행히 세상에는 선량한 손길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품 말미에 결국 피노키오는 사람 아이가 되는데, 이것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환(!)되는 것을 연상시킨다. 긴 시련을 거쳐 사람 아이가 된다는 것, 이것은 새로운 또 한 번의 탄생이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예전에 자신이었던 꼭두각시 인형을 바라본다. 그 인형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팔을 달랑달랑 매단 채, 한가운데에 다리를 십자로 꼬고 서 있었는데,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해 보였다.' 피노키오는 그 인형을 바라보며 말한다.

 

"내가 꼭두각시였을 때 얼마나 우스웠을까!"

 

말썽을 피우고, 계속 어리석은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꼭두각시 짓은 분명 우습긴 했겠지만, 결국 사람 아이로 변할 수 있었던 내면의 힘, 순수한 정신, 따뜻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던가. 그것 역시 꼭두각시 인형의 안에 있었다. 아이든 어른이든, 고래 뱃속에서 뜨겁게 삶긴 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 뒤에는 어리석은 꼭두각시 짓을 그만 하고 싶다는 괴로운 자각이 있지만, 나는 그래도 피노키오가 꼭두각시 인형이 되기도 전의 그 평범한 나무토막-갑자기 떼굴떼굴 굴러서 노인을 찾아온, 말하는 그 나무토막에게 무한한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이것은 일종의 퇴행적 감정일 게 틀림없는데, "진짜 사람이 되다니, 정말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 아이 피노키오는 이제 다시는 재탄생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아이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하자면 재미가 없는 아이이고 왠지 사랑스럽지도 않다. 결국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서, 혹은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혹은 철학의 완결을 위해서 나아가지만, 그 끝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재미와 동력과 의미를 얻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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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작품 전체를 다 읽지 않더라도 1장만은 꼭 읽어보길. 이렇게 멋진 서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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