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다른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건 가능할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서 두 사람은 맺어질 수 있다고 믿고, 그러기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우정이 오래가려면 전제가 있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사랑이 깊으면 다름이 문제 되지 않는데 사랑이 얕을 때 두 친구는 고민이 깊어진다. 다르다는 사실이 큰 걸림돌이 된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수 없어서 두 친구는 괴롭다. 한편으로 다른 전제가 더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제는 다를 텐데 그림책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민담이나 설화, 전설을 간단히 옛날이야기라고 치자. 이것들은 형식상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모두 상징적이고 비유적이란 점은 공통된 것 같다. 옛날이야기는 재미를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인간과 인간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생과 사라든가 선과 악,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 삶이 향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것 같은 문제들이 가장 빠르고 간결한 지름길을 통해서 핵심으로 달려간다. 그림책도 옛날이야기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문학 장르로 보자면 시만큼이나 압축적이다. 꼭 필요한 얘기만 하고, 때로는 말을 삼켜서-시인 나태주의 표현-생략된 부분을 우리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아모스와 보리스>도 옛날이야기처럼 읽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할 테니 그런 줄 알고 들어주세요, 하는 작가의 웃음이 담뿍 밴 첫 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옛날에 어떤 바다에 생쥐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 그 생쥐의 이름은 아모스였지."


아모스는 육지에 사는 작디작은 생쥐인데 바다가 좋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 부서지는 파도 소리, 조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가는 소리를 사랑했고, 바다 저 멀리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낮에는 배를 만들고 밤에는 배 타는 법을 공부해서 드디어 항해를 떠났다.  




아모스는 즐겁게 항해했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 아모스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검푸른 밤바다에서 발견하는 거대한 우주, 그 안의 작은 생명체로서의 자신, 만물과 하나가 되는 감동에 젖었다. 그러다가 아뿔싸!


"아모스는 온갖 생명체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취해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갑판에서 떨어져 바다로 빠지고 말았어."


로우던트라고 이름까지 붙여준 배는 무정하게도 돛을 활짝 펴더니 아모스를 버리고 멀어졌고, 아모스는 망망대해에 혼자 외로이 남았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고 비가 오고 다시 날이 개었다. 아모스는 지치고 힘이 점점 빠져서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까? 그저 무섭기만 할까? 내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갈까? 하늘나라에는 다른 쥐들도 있을까? 아모스가 이렇게 끔찍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데 물속에서 큰 머리통이 불쑥 치솟아 올랐다. 고래였다.  


"넌 무슨 물고기니? 너, 물고기 맞지!"

" 난 물고기가 아니야. 난 생쥐라고. 고등 동물인 포유류에 속하지."

"난 뭍에서 살아."

"아니 세상에! 바다에서 살긴 하지만 나도 포유류란다. 내 이름은 보리스야."


'귀찮지 않다면'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아모스의 부탁에 보리스는 기꺼이 아모스를 등에 태워주었다. 집까지 가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고, 두 포유류는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헤엄을 치며 나아갔는데, 그러는 동안 둘은 서로에게 깊이 감동하게 됐다. 보리스는 아모스의 가냘픔과 떨리는 듯한 섬세함, 가벼운 촉감, 작은 목소리,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에 감동했고, 아모스는 보리스의 거대한 몸집과 위험, 힘, 의지, 굵은 목소리, 끝없는 친절에 감동했다.


이 과정이 둘을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보리스와 아모스는 서로의 생활과 꿈을 이야기하고 깊이 감춰두었던 비밀을 나누었다. 고래는 육지 생활을 신기해했고 아모스는 바닷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반했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슬펐지만 서로를 영원한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덧붙였다.


"난 절대로 널 잊지 않을 거야."


아모스가 보리스에게, 목숨을 구해줘서 늘 감사할 테고 도움이 필요할 때 기쁘게 도와줄 거라고 하자 보리스는 바다로 돌아가며 혼자 웃었다. "저렇게 작은 생쥐가 어떻게 나를 돕겠어?"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아모스는 마음이 아주 따뜻해, 난 아모스를 사랑해, 정말 보고 싶을 거야."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하듯, 이야기는 이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지게 했다. 허리케인 때문에 해변으로 떠밀려온 고래 보리스를 아모스가 발견하고, 마음씨 고운 큰 코끼리 두 마리를 데려와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어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한번 아모스와 보리스는 헤어지게 되었다.




"거대한 고래의 두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지.
조그만 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고.
아모스가 찍찍댔어. "안녕, 보리스!!"
보리스도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어. "안녕, 아모스!"
보리스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어.
아모스와 보리스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



이 그림책을 부러 찾아 읽었다. 친구가 무척 그리웠구나,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들여다보는 나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오랜 친구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아서, 관계를 더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동안 마음을 많이 앓았더랬다.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의 깨끗한 우정을 누리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건 상대의 잘못이라기보다 내가, 친구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가치관이 뚜렷해지고 시간에 쫓기고 현실의 문제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일까? 이런저런 이유들을 더 떠올려보다가 문득 이러는 건 무익하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을 이어주는 것, 너무나 다른 두 친구가 서로 영원히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대해 저 사람 좋은 윌리엄 스타이그는 진솔하게 답한다. "그건 잊지 않는 거야." 만날 순 없지만 잊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의 첫 만남과 우리가 나눴던 마음속 이야기들, 비밀들, 그리고 그럴 일이 생긴다면 꼭 도와주겠노라 약속하는 따뜻한 마음, 그 모든 걸 잊지 않는 거라고.


사람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에 대해 약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동의했었다. 그러나 사람은 물건이 아니고, 유통기한이란 말을 사람에 붙이는 순간 사람은 숭고한 존재에서 물건으로 끌어내려진다. 유통기한 대신 쓸 수 있는 더 좋은 말은 없을까? 그건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풀어서 얘기해야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가 영원히 친구로 남게 되면 좋겠다. 우린 영원히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함께 있을 순 없어. 너는 육지에서 살아야 하고, 나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난 절대로 널 잊지 않을 거야."



우정이란 지금 이 순간의 관계만 가리키는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어느 순간들, 그때의 그 바다, 그 밤과 그 낮의 일주일, 그때의 보리스와 아모스로, 그 순간과 그 순간 속에 놓였던 우리로 영원히 기억해 주는 일이 우정을 존재하게 한다. 내가 그렇게 기억할 때 친구는 영원한 친구가 된다. 마치 우리 내면에 순수한 아이가 언제나 살아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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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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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하게 돌아가는 지금의 세계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서 읽게 되었다. 1914년의 위기는 복잡했고,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대응 행위와 연결되어 있어서 유책성 문제는 간단치 않다. 1차대전의 주역들은 눈을 뜨고도 꿈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몽유병자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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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지 강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무조건 끌렸다. 지금도 그렇다. 깊은 산 어디에 작은 시원이 숨어있어 물은 시작되고 작은 물길을 이루며 흐르고 흐르고 흘러간다. 물길은 모든 물을, 작고 큰, 깨끗하고 흐린, 조용하고 시끄러운 온갖 물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며 점점 커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큰 하구를 열어 바다로 자신을 남김없이 풀어놓는다


여기에 강을 이야기하는 그림책이 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에 작은 강이 흐른다. 그림책의 영어 원제는 Letting Swift river go. 스위프트 강을 놓아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건 사랑이 깊은 나머지 강을 붙잡고 보내주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다. "강을 가게 해 줘, 놓아줘, 더는 잡지 마, 가야 할 곳으로 강을 놓아주렴."  

 

이 그림책은 저수지에 수몰된 작은 마을과 그곳 사람들에게 헌사된 이야기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그곳에는 아름다운 강이 흐른다. 마셔도 되는 맛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스위프트 강. 강을 끼고 사람들은 정답게 살고 있다. 교회와 방앗간이 길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놀기 위해 네거리에서 만난다.  

 

그림책의 주인공 섈리 제인은 친구들과 도시락을 싸서 공원묘지로 소풍을 가고, 뒤뜰 단풍나무 아래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면 멀리서 기차 소리가 울리고 가끔은 올빼미 기척도 들을 수 있었다. 침실 창가에는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스치며 불어 들어오고 겨울이면 아빠가 작은 호수에서 얼음을 잘라왔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고 전격적인 변화가 평화로운 일상을 전복시킨다.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 일대에 저수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깨끗하고 맑고 맛 좋은 강물을 내어주는 대신에 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샐리 제인의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을 이전하고, 아이는 가족 같았던 늙은 나무와 이별했다. 집도 방앗간도 교회도 학교도 허물어졌다. 친구들과는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안녕이란 말을 할 새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른이 된 샐리 제인은 아빠와 이곳을 찾아와 저수지로 배를 타고 나간다.  아빠는 물 밑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저길 보렴, 샐리 제인.
프레스콧 마을로 가던 길 자리야.
저긴 비버 시냇가 가던 길 자리고,
저긴 네가 세례를 받은 교회가 있던 자리란다.
학교가 있었고, 마을회관이 있었고, 오랜 된 돌집 방앗간이 거기 있었지.
다시는 그 모든 걸 못 보게 됐구나."

 

 

샐리 제인은 물밑으로 아스라이 마을의 윤곽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옛 모습을 읽어내긴 어려웠다. 이제는 물고기들 차지가 되어버린 옛날 길들. 날은 차츰 어두워져 밤하늘에 별이 떴다. 물에 반사된 별빛은 개똥벌레처럼 빛났고 두 손을 모아 강물을 뜨는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에 스치던 바람, 선로를 따라 달리던 기차 소리, 친구들을 만나던 네거리, 지금은 가 버린, 물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간 모든 것그리고 물에 잠긴 세월 저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똥벌레를 잡아 병에 가두던 자신에게 했던 엄마의 말이었다.

 

"놔주렴, 샐리 제인."

 

 

샐리 제인은 점점 검어지는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강물을, 개똥벌레를, 별빛을, 소중한 추억들을, 흘러간 시간을 샐리 제인은 놓아주었다.  

 

인간 사회의 발전사를 놓고 어둡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책은 퀴빈 마을 역사 연구 협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글 작가와 그림 작가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결로 풀어내서, 사랑과 애도에 초점을 맞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가요는 노래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사소한 볼펜이며 시계도 잃어버리면 섭섭하고 오래 탄 자동차를 보내주는 일은 더 가슴이 아린 일인데, 하물며 깊이 미워하거나 깊이 사랑한 인연을 떠나보내기는 너무 어렵다. 작게든 크게든, 얕게든 깊게든, 내 마음의 일부가 같이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아프다. 마음이 떨어져 나간 생채기에서는 피가 흐르고 상처는 오래, 마치 영원처럼 오래, 아물지 않는다.  

 

샐리 제인은 스위프트 강 아래 잠긴 고향의 모든 것, 고향에서의 모든 아름다운 기억과 시간을 잊어야 했을까? 이제는 없는 그것을? 엄마의 말씀은 잊으라는 얘기가 아니었으리라. 개똥벌레는 병 안에 가둬질 존재가 아니고, 별이 있을 자리는 별빛 반짝이는 밤 강물이 아니라 하늘이며, 강물은 흘러가야 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며,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그림책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차분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 샐리 제인의 마음속에서 스위프트 강은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의 저편에서 엄마가 강을 놓아주라고 한 걸 보면.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실은 강의 목소리였는지 모른다. "나를 놓아줘, 샐리 제인. 나는 흘러갈 테야. 나는 강이니까."

 

그림책 표지를 본다. 아이가 다리 위에 서서 작은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이 뒤로는 정겨운 마을이 보이고 강가에는 나무가, 언덕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길이 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풍경은 이제 없다. 이곳으로 가려면 샐리 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처럼 풍경이 들어있을 것이다. 현실에는 이미 사라져 버린 풍경. 이 그림책은 수몰 마을의 역사를 한 장 한 장 넘기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역사는 샐리 제인의 마음속에서 재현되는 개인적 아픔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감아 그림책의 첫 장에서 마지막 장으로 과거의 시간들이 천천히 불려 나온다. 애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위해, 놔주어야 할 지점으로 이르기 위해, 책장은 한 장씩 넘어가고, 이야기는 되감기고 다시 풀려나온다. 현실에서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회상의 과정. 여섯 살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의 긴 세월. 계속 반추될 기억들.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따라 흐르는 것 같다. 강물이 이토록 내 마음을 이끄는 건 부드러움과 한없는 포용도 있지만 흘러간다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이지 싶다. 흘러서 간다는 것. 자신을 다 풀어놓을 곳까지 흘러가는 것. 한때 강이었던 존재가 마침내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무한히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강에 끌리는 까닭은 아마도 자유에 대한 끌림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한다.

 

가요가 가슴에 깊이 와닿는 나이가 있다는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는 가사가 이렇게 진실로 들릴 줄이야. 나이가 든 것이다.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나이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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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6-02-1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냇물이 흘러가는 이야기를 붓끝으로 사랑스레 담아낸
바바라 쿠니 님 숨결이
한결 새롭게 살린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엠마>나 <꼬마 곡예사>도
원작에 흐르는 줄거리를
한결 푸근하게 풀어내어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어떻게 살림을 지을 노릇인지
가만히 들려준다고 느낍니다.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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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글도 좋지만 책의 만듦새가 훌륭하다. 글과 그림의 배치가 조화롭고 적절하다. 표지와 본문 그림을 그린 한수정 작가의 그림이 헤세의 글을 더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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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기사에 이금이 작가가 소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금이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게 더 반가웠던 건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의 글 작가 티모테 드 퐁벨도 최종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그럴 줄 알았지! 그의 이야기 세계와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책이 '작품'이 된 건 티모테 드 퐁벨의 글에 이렌 보나시나가 그림으로 완벽하게 화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펜으로 그린 헐렁한 선, 수채화의 맑은 색감, 넉넉한 여백이 아이의 자유로운 여름 방학을 더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 가로 34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의 길고 큰 판형도 신의 한 수다. 책을 펼치는 순간, 화폭은 가로가 2배로 확장되면서 이야기 공간이 독자를 에워싼다. 100호가 넘는 대형 그림이 감상자에게 주는 효과, 아이맥스 영화관이 관객들에게 주는 바로 그 효과를 이 그림책도 노린 것이다. 글과 그림과 판형이 독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무한한 자유, 빛나는 자유다.      


여름이 되었다. 열두어 살 무렵의 남자아이는 집을 떠나 혼자 기차를 타고 삼촌 집으로 간다. 아이는 해마다 여름 방학을 삼촌 집에서 보내는 것 같다. 삼촌의 집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있고, 삼촌은 평생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집은 잡동사니로 꽉 차있다. 삼촌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카를 위해 책을 한 무더기 장만해 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넓은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그득한 집에서 보내는 담백한 시간은 아이에게 자유를 허용한다. 아이는 무한대로 펼쳐지는 자유를 얻는다.   


"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여름날을 생각했다.
너무나 아득해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여름날들."



아이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동네와 그 너머를 탐험한다. 삼촌의 집을 중심으로 아이는 나선을 그리면서 점점 더 멀리 나가본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고 작가는 묘사한다. 이것은 영원의 이미지다.


그러던 어느 날, 밀 수확으로 길이 막혀서 아이를 나선형의 행로 밖으로 이탈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는 길을 잃고 낯선 모랫길로 들어간다. 길을 따라 넘어간 모래 언덕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가슴을 벅차 오르게 만드는 드넓은 바다가 출렁대는 세상, 그리고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 에스더 앤더슨이 있는 세상이.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이 떨렸다.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불러본다. 다음 날은 비가 왔고, 비가 그친 그 다음날 아이는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바다에서 에스더 앤더슨을 만나려고. 거기로 가려면 길을 잃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길을 잃을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느슨한 탐색과 자유가 달팽이 집처럼 빙빙 나선을 그리고 이어진다. 어린아이는 안전한 보호자의 품 안에서 마음껏 자유롭다.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았던 달팽이 집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이는 바깥세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은 충격이어서 아이는 입이 얼어붙고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 기꺼이 길을 잃을 줄 안다.



어릴 때 나는 때로 심심했다. 심심하다는 말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으라면 딱히 한 단어로는 안 될 것 같다. 어린 나는 심심한 그 시간이 버거웠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이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낮 시간, 무한하게 풀려나가는 실타래처럼 지루했던 시간들, 눅진하게 쌓여 어린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무료한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작은 언덕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우리 집에는 영원처럼 길고 긴 낮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루에서 마주 보이는 건너편의 야트막한 초록 언덕도 정적이었다. 앞마당에는 칸나가 뒷마당에서는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만 식물들은 조용했다. 온 집이 죽은 듯이 고요했다. 뒷마당 광의 옥상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는 도로에는 장난감처럼 작은 차들이 달리고 하늘에는 푸름이 한가득, 흰 구름이 무료하게 모양을 바꾸며 떠 있었다. 그 모든 정적과 고요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진하고 거대했다. 해는 하늘 가운데 박아놓은 듯 기울지 않았고 언니며 오빠, 아버지가 돌아오고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집이 북적대며 활기가 도는 저녁 시간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의 아이처럼 자전거를 타고 길을 빙빙 휘감으며 조금씩 더 멀리멀리 나아갈 생각을 왜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장소의 탓도 없지 않았을 듯싶다. 나는 익숙한 집에 있었고, 저 아이는 집과 부모를 떠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잡동사니로 가득한 집에서 활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사는 삼촌에게 갔으니까. 낯설면서도 안전한 그곳에는 발견과 해방감이 충만했다!     



어릴 때의 나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 파스칼레.


















프랑스 소설가 앙리 보스코가 백 년도 전에 쓴 <아이와 강>의 주인공 아이는 시골의 들판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조그만 소작인 농가에 살고 있다. 밭과 나무 울타리, 식물, 멀리 떨어진 두셋의 농가 밖에 없는 단조로운 풍경에 갇혀서 아이는 쓸쓸하다. 그 풍경 너머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걸 파스칼레는 들어서 알고 있다. 강은 여름철이면 말라 버리지만 봄철에 알프스의 눈이 녹을 때면 큰 강으로 변해서 엄마 아빠는 파스칼레에게 절대로 강가로 가지 말라고 다짐시킨다. 강에는 사람이 빠지는 죽음의 구멍들이 있고 갈대숲에는 뱀이, 강가에는 위험한 집시들이 산다고. 파스칼레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료한 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딴 데 신경을 판 사이, 홀린 듯 집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조그만 오솔길들이 속삭이듯 나를 이끌었다.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 보는 거야. 어때? 첫 번째 모퉁이 길이 여기서 멀지 않아? 오베핀느 꽃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된단다.'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새들이 가득히 올라앉고, 푸른 열매가 잔뜩 달린 두 줄의 나무들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진 그 오솔길로 일단 발걸음이 내디뎌지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걸음을 멈출 수 있었겠는가?"


아이는 결국 강까지 걸어갔고 이끼가 덮인 부드러운 흙바닥에서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친척 할머니는 아이 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야, 이 떠돌이야! 바람둥이야!"


할머니는 아이가 다시 집을 나가 강으로 갈까 봐 사흘 동안 감시했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다시 자기 일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다시 몰래 집을 빠져나가 곧장 강으로 갔다. 강은 너무나 멋졌다. 파스칼레는 강기슭을 따라서 걷다가 말뚝에 매인 채 흔들리고 있는 나룻배를 발견한다.  


"배에는 노가 없었다. 삼으로 꼬아 만든 나룻배는 다 헐어빠진 밧줄로 비끄러매어져 있었다. 물이 어찌나 잔잔한지 밧줄은 강물 속에 가만히 잠겨 있었다. 이 고요함과 아늑한 분위기가 곧 내 마음을 끌어갔다. 나는 배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잠깐 망설이다가 발을 뱃전에 얹어 놓았다."


어떻게 해야 길을 잃는지 알았던 티모데 드 퐁벨의 남자아이처럼 앙리 보스코의 아이도 기꺼이 길을 잃는다. 절대 가지 말라는 강으로 가서 절대 타서는 안 될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퐁벨이 묘사하듯,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졌다. 배를 묶어놓았던 밧줄이 풀리고 표류를 하면서 파스칼레는 생전 가보지 않았던 강 중앙의 섬 모래밭에 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적이고 매혹적인 소년 가쪼를 만나 위험천만하고 가슴 뛰는 모험을 한다.   


어린아이의 시간은 영원처럼 펼쳐지고, 나뉠 수 없는 시간임에도 영원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길을 잃거나 '이리 와, 몇 걸음 더 나가보는 거야.'라는 오솔길의 속삭임을 들음으로써. 퐁벨의 묘사를 다시 빌리자면, 영원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훨씬 파격적이며 강력하고 풍부한 모험 이야기를 펼친다. 퐁벨의 아이와 보스코의 아이의 모험은 문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는 대단히 반문명적이며 냉소적이다. 영원 같은 여름 방학에 바다와 첫사랑을 만나고, 오솔길의 유혹에 넘어가 어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가 집시들이 사는 위험한 강을 향해 갔던 아이들이 이제 허클베리에 이르러서는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며 어른들의 세계, 문명 세계와 정면으로 대결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나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라는 허클베리 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허클베리는 술에 취해서 아이를 때리는 아빠 밑에서 방치된 채 숲에서 살다가 어느 날 아빠로 추정되는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한 과부댁의 양자로 들어간다. 과부는 허클베리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나 허클베리는 교양을 위한 모든 규범이 견딜 수 없다. 집 안에서 지내고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 식탁 예절을 지키는 것, 성경을 읽고 학교를 다니는 것 등등. 허클베리는 담배를 피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으며,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또 다른 아이 톰 소여와 갱단을 만들 비밀스러운 작당을 하는 아이다. 허클베리가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배우고 구구단을 육 단까지 외울 수 있었던 건, 다시 말해서 학교를 참을 만하게 여기게 됐던 건 선생의 구타 덕분이었는데, 이 대목은 이른바 교양을 자랑하는 서구 문명의 위선을 향한 마크 트웨인의 조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학교가 견딜 수 없이 싫어질 때에는 땡땡이쳤고, 그다음 날 얻어맞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갈수록 학교 가는 일이 점점 쉬워지게 되었죠."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악당 아빠가 돌아왔다. 허클베리는 다시 숲에서 아빠와 함께 살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강에서 표류하는 카누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당연히 모험으로 이어진다. 허클베리는 카누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도망을 치고, 동행하는 친구도 생겼다.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흑인 노예 짐이었다. 도망 노예를 숨겨주는 건 위법이지만 허클베리는 짐을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줄 안다.  


도망치는 이 두 사람은 밤이면 배로 이동하고 낮이면 강어귀에 배를 숨겨놓고 마을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목격한다. 교양 있는 자들의 위선, 인간의 잔인하고 어리석은 본성, 그것이 빚어내는 비극, 또 인간의 선함까지.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을 통해서 노예제도 또한 통렬하게 비판한다.


허클베리의 모험 이야기는 솔직하고 명민하며 거칠면서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강을 따라 흘러간다. 한 강변 마을에 들러 이런 일을 겪고 다른 강변 마을에서 저런 일을 겪으면서 허클베리와 짐은 줄곧 강으로 돌아오고 강으로 도망친다. 인간들의 모순적인 사회에서 자연의 너른 품으로. 인간은 이성이 있으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신을 믿으나 신을 배반하며 선하나 동시에 악을 행한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있다. 인간의 희비극은 육지에서 벌어지고 강으로도 흘러들지만 강은 그저 무심하다.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가 있는 곳, 강에서 안심한다.     


"어느 곳에서도 아무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요-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만 어쩌다 먹개구리가 울어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 위를 저 끝까지 바라다보고 있으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선 같은 것뿐이었습니다-그것은 저쪽 강둑에 있는 숲이었지요-그 밖엔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다음 하늘에 뿌연 곳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다음 강이 저 멀리서 뿌옇게 밝아져 검은색은 찾아볼 수 없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낮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어린 나도 모험을 꿈꿨다. 모험은 골목길과 산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책과 상상 속에서 이뤄졌다. 꽝꽝 언 강을 따라 스케이트를 타고 내려오는 북유럽 동화를 읽으며 나도 주인공처럼 뺨이 얼얼해진 채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열차 도둑을 잡는 소년을 따라가며 가슴을 졸였다. 모험 이야기들은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다. 소설 속 누구처럼 나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내 진짜 엄마가 있어서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고, 내가 죽어서 식구들이 뒤늦게 후회하고 미안해하며 울었으면 좋겠고, 뭐 그런 상상을 하며 청승을 떨었다. 나는 썩 활기 넘치는 아이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장 숙제부터 하고 노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그래서인가 보다. 모험과 일탈에 여전히 은근하게 마음이 기운다.


어린 시절의 그 많던 시간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어릴 때는 영원을 알았다. 영원의 느낌을. 그런데 나이가 들며 그 느낌이 슬며시 사라지고 그 대신 단락 단락 끊긴 시간들을 살게 되었다. 풀린 실타래 같던 시간의 그 지루한 느낌들은 잊어갔다. 허공으로 끝간 데 없이 펴지는 광대한 시간들에 대한 기미를 어린 나는 느꼈으나 지금의 나는 관념으로만 이해한다.


우주의 시간은 영원하나 인간의 시간은 유년 청년 장년 노년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한하고 뻔한 전개를 따라간다. 영원은 곧 무한이다. 우리는 어릴 적 영원을 살았다.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이야기들은 영원을 글로써 잡아놓았다. 그래서 이야기 안에는 영원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영원, 마음과 꿈과 상상에서만 가능한 영원의 시간이 이야기 속에서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 가운데에는 집이 있었다. 나는 나선형 원을 그리면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까지 가려고 애썼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밀밭에서 수확이 한창이라 교차로를 지날 수 없었다. 두 시간이나 더 멀리 돌아 자전거를 타야 했다. 소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잡초 사이로 난 모랫길이 하늘로 향했다. 바퀴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 와 본 곳이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질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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