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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 (慧敏)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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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에서의 출가 그후 10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혜민 스님의 에세이 <젊은 날의 깨달음>은 종교서적이 아니다. '하버드'와 '출가'라는 이질적인 단어와 성당 안에서 찍은 젊은 스님의 사진은 무언가 부조화스럽다. 이 책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종교나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종교니 교육이니 하는 문제를 모두 포괄하여 살아가는 법에 대해 깨달은 점을 알려주고 있다.  

저자인 혜민스님은 버클리 유학시절 우연히 만난 티벳 승려의 영향으로 종교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버드에서 종교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중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이후에도 오랜 유학생활을 거쳐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인생 역정을 그려낸 책도 아니다. 이러한 인생을 걸어가는 동안 깨달은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 기록들은 거창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닿아있다. 한국인의 교육관에 대한 따끔한 비판, 명품에 집착하는 풍조에 대한 질책, 행복에 대한 사색들, 심지어는 자신이 터득한 외국어 공부법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어 있다. 몇 가지의 주제로 엮은 여러편의 글을 통해 사회현상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드러내기도 하고, 사물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내비치기도 한다.   

책 제목에 '하버드'를 내세우는 책들이라면 대개 하버드 입성을 위한 가치있고 실용적인 조언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의 성공적인 유학경력과 미국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까지의 길을 성공담의 형식으로 풀어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다.    

모든 글이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향해 집약되지는 않지만, 글들은 한결같이 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한 조언으로 보인다. 불자들을 향한 깨우침에 치닫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종교, 교육, 모든 사물들과 사회현상은 결국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것들이다. 스님은 결국 자신의 인생역정을 통해 온 모든 것에서 삶의 가치와 깨달음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든 것의 경계를 허무는 '삶' 그 자체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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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의 노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별궁의 노래 - 잊혀진 여걸 강빈 이야기
김용상 지음 / 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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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용상의 <별궁의 노래>는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빈이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역사소설이다.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던 소현세자에 대해서는 최근 김인숙의 소설 <소현>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는 터라, 소현세자빈의 이야기는 소현 세자에 대한 관심의 붐을 타고 얼마든지 흥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서문에 따르면 이 소설은 <소현>보다 앞서 출간되었다. 작가 서문의 이러한 언급은 분명 <소현>이라는 작품을 염두에 둔 의도로 보이나 두 작품은 시대만 공유하고 있을 뿐 비교선상에 놓기가 힘들어 보인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은 역사소설을 읽는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므로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그간 역사에서 조명하지 않았던 소현세자빈을 현대적 여성상으로 재해석한 시도는 참신하다. 다만 인물의 관계에서도 도식적인 선악의 구조를 답습하여 갈등구조를 단순화시킨 점은 아쉽다. 또한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산만하게 흩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역사소설로서 이 소설은 많은 미학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소설을 쓸 때는 완전한 허구의 창작물을 생산할 때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소설은 자칫하면 역사적 사건의 단순 나열에 그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와 창조적 허구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역사를 왜곡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내림과 동시에 허구적인 재미까지 보장해줄 수 있어야 훌륭한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에서는 시대와 언어의 정확한 고증, 인물에 대한 내밀한 탐구, 문체의 전아함, 실제 사건의 보다 극적인 구성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별궁의 노래>는 한 시대상의 정확한 고증이 빈약하다. 인물들의 말투는 현대어에 가깝다. 또 풍속과 세태의 고증보다 참고자료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사건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소현세자빈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묘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렇게 창조한 세자빈의 인물형에 큰 설득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다. 세자빈의 사회적 위치와 당대 사회 분위기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을 인물형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은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예컨대, 민생에 대해 고민하는 세자빈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그려진 것이 아닌데, 민생고를 이유로 들어 성리학을 비판하는 세자빈의 모습은 생뚱맞다. 대사를 통해 뜬금없이 성리학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보다 당대 사회와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어떠한 갈등을 그림으로써 그 입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의 서술에는 말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의 방식이 있다. 작가가 친절하게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를 일러주는 '말하기'는 독자를 편하게 하지만 독자의 상상을 차단해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반면 '보여주기'는 인물의 행동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그 성격과 심리를 짐작하게 한다. 이 때 독자는 소설 읽기의 녹록치 않음을 느끼지만 동시에 상상이라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행간을 채워놓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별궁의 노래>는 모든 것을 서술자가 알려주고 있어 독자의 독서활동에 필요한 노력이 그리 필요하지는 않다. 그런만큼 긴장감이 떨어지고 여운이 적다. '말하기'를 과도하게 사용한 문체적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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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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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은교>를 접했을 때, 지독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그것을 칭하는 말은 하나지만,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때로는 범속하고 위험한가 하면 치명적이고 관능적이다. 소설에는 이 모든 욕망의 빛깔들이 어우러져 강한 색채를 뿜어낸다. 이 책은 모든 감각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눈으로, 가슴으로, 전신의 감각으로 읽히는 책이다. 애초 이 책을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오인했던 것은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감각적인 관능의 미학 탓이리라.  

작품 속에서 에로티시즘 속에 감추어진 예술가의 고뇌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세의 소녀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노시인의 노트에서 줄곧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느닷 없이 찾아 온 당혹스러운 애욕을 둘러싼 예술적 탐색이다. 은교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한 마디로 치명적이다. 그러나 일생에 처음 찾아온 진실한 사랑이 하필이면 5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물리적 간극을 감내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은 애초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랑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의 영혼을 자극한 하나의 큰 사건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굵직한 갈등의 한 가운데는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소설에는 시인의 노트와 함께 시인의 제자이자 스승과 동일한 대상을 갈구했던 서지우의 노트가 교차되며 나타난다. 두 개의 노트는 하나의 대상을 향한 두 개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이라면, 하나는 탐미적이고 보다 영혼에 가까이 닿아있는 욕망이다. 두 욕망이 만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은교라는 인물이다. 두 남자의 욕망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은교는 어쩌면 이들 사이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오랜 동안 이어져 온 애증의 씨앗이 은교라는 촉매제로 인해 비로소 싹을 틔운 것일 뿐. 욕망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위장한 채로 말이다.

작가는 온갖 외적인 틀을 벗어던지고 본능적인 욕망 자체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욕망은 사회적 용인의 범위를 벗어날 때 비난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 용인에 대한 잣대가 적용되기 전 자연적 욕망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시인의 말처럼 욕망은 어떤 물리적 조건과 관계 없이 공정하게 찾아온다. 이를 규정짓는 것은 제도화되거나 암묵적으로 수용되는 틀이다. 이것이 17세 소녀를 사랑하는 노인의 마음을 비난할 수 있게 하는 매커니즘이다. 서지우의 욕망이 좀 더 통속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틀로 인해 욕망의 본질을 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시인과 서지우의 갈등은 더 젊고 덜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본질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육체의 노예는 '썩은 관'에 지나지 않는 노시인이 아닌 육체적 우월함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서지우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시인의 욕망은 외적으로는 그러지 못해도 적어도 영혼만은 일체의 제약에서 벗어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시인의 노트에 묘사된 은교는 강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쌔근쌔근, 뽀르르, 뽀드득뽀드득, 쫑쫑쫑' 같은 양성모음의 감각어와 함께 묘사되는 은교의 생동감은 쇠락한 노시인의 육체와 정신을 일깨운다. 시인에게 있어 은교는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는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그것이 17세라는 나이의 정체이며, 결국 70세와 17세라는 물리적 간격은 아무런 문제되지 않는다.

시인의 노트에 기록된 은교는 기실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은교는 세속의 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린 '보통 여자애'에 불과하다. 치정극에 등장하는 흔한 팜므파탈도 아니고 17세의 발랄한 생명력을 제외한 다른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은교는 하나의 상징, 즉 위대한 예술정신의 구체적 발현체로서 작품 속에 존재한다.

결국 은교는 시인과 서지우가 애타게 갈구하는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둘 사이에 감추어진 갈등을 발현케하는 대상이다. 은교를 통해 시인의 탐미적 예술성이 발현되고 재능을 갖지 못한 예술가의 열등의식이 깨어나게 된다. 서지우의 노트에 묘사된 세속적 욕망이란 사회적 권위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갈구이다. 시인의 노트에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타나는 욕망 자체의 예술적 승화와는 반대로 서지우의 노트는 현실적 애욕의 세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서지우의 세속적 태도의 이면에도 스승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존경, 양심이 존재한다. 서지우는 은교를 탐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몰두하는 은교'를 탐함으로써 예술적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 또한 은교를 탐한 것보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우둔함에 대해 더욱 큰 형을 선고하고 있음에서 이들의 갈등의 실체는 분명해진다.  

젊음과 숨막히는 관능이 일깨운 예술가의 치명적 사랑은 비극으로 종결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한 비극이 아니라 사제 간 재능과 욕망의 간극이 불러 일으킨 비극이다. 스승과 제자의 비극은 은교를 둘러싼 서로 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에 있다. 은교에 의해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 은교로 인해 감추어진 그들의 진실이 결국 비극의 실체인 것이다. 스승의 사형 선고를 기꺼이 받아들인 제자나 마지막 면죄부를 외면하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스승의 모습이 그것이다.

유미적 텍스트와 치정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순수한 영혼을 향한 두 예술가의 갈망이다. 은교의 존재는 때로는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때로는 수치심을 자극한다. 한 여자를 둘러싼 두 예술가의 자기고백적 노트는 그들의 내밀한 욕망과 예술적 갈망에 대해 적고 있다. 그 예술적 갈망은 이들의 노트를 불 태운 은교에게로 전이된다. 관능적인 생명력으로 노인을 유혹하던 소녀는 노인의 영혼을 상속받아 '죽은 다음에도 살아'있기를 바라는 노인의 갈망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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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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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1 명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누구나의 삶'이라 할 만큼 오늘날 젊은이들의 삶이 단조롭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개인의 삶의 빛깔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하게 대별된다.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11명의 젊은이들의 인터뷰를 묶은 이 책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청춘들의 교집합을 탐색해 나간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의 직업은 포토그래퍼, 패션 디자이너, 연극배우, 화가, 영화감독, 인테리어 잡지 에디터, 만화가, 뮤지션, 여행작가, 건축가, 시인이다. 제각기 다른 성장 과정을 겪어왔고, 각자의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지만 아낌없는 열정을 쏟아붓는 모습은 한결같이 닮아 있다. 자유로움과 치열함, 방황과 정착의 사이를 맴도는 격랑의 시기를 보낸 그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향해 지금도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성공의 잣대에 들이댄다면, 이들 인터뷰이들은 각각의 분야에서는 비교적 성공한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직업의 특성상 곤궁한 생활에 허덕이는 경우가 있지만, 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그 길을 순조롭게 갈 수 있도록 갈고 닦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결코 청년 실업 시대 혹은 88만원 세대의 통열함을 몸소 깨치며 발버둥치는 변두리의 대다수 젊은이들과 같은 고민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다. 누구나 지나온 아픔이 있고, 감추어진 열정이 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는 법이기 때문에.

이 책의 각 인터뷰의 말미에는 인터뷰이들에게 특별한 공간들을 소개해 놓고 있다. 그 공간 또한 특별한 곳이 아니다. 섬, 해수욕장 같은 조용한 여행지에서부터 좁은 골목, 방, 부엌까지 다양하다. 때로는 화장실, 옥상 등도 소중한 공간이 된다. 이들은 때로는 영감을 주기도 하고, 사색에 잠기게도 하고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생활 속에 스며있는 각자의 공간들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공간임에도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특이하다. 아마도 내가 이들의 삶에 별수 없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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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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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죽음이란 본인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닥치지 않는 한 그 실체를 실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죽음이 본인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당혹해한다. 자신이 6개월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아키모토 야스시의 소설 <코끼리의 등>은 누구나 생각해 봤을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다. 

두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이자 회사원인 40대의 한 남자가 말기암으로 6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바뀐다. 최초의 충격과 혼돈이 지나가고 나서, 남자는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남은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하여 그는 중학교 때의 첫사랑 여자, 하찮은 일로 절교한 뒤 20년 넘도록 만나지 못한 친구, 젊은 시절 사랑했으나 결혼하지 못했던 여자를 만나 각각의 방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의절했던 형제들과 사랑하는 여인,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가족들을 향해 남은 애정을 퍼붓는다.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고 차근차근 인생을 반추해 가는 이 남자의 이야기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범답안을 제공한다.

이 소설은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알게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를 그리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누군가를 서술자로 설정했더라면, 지독한 신파 드라마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어가는 인물을 1인칭 서술자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주인공 이후의 어떤 후일담도 덧붙이지 않는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 자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흔한 소재와 예측 가능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감동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투병과정의 묘사에 있어 치열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말기암 환자의 고통을 직접, 혹은 가까이에서 겪어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면 섣부른 판단일까? 6개월이라는 숫자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제시함으로써 투병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는 등 말기암 환자의 상황에 대한 구체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물론 이야기가 말기암 환자의 투병기이기보다, 죽음을 앞둔 남자가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병리학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구체성이 보장될수록 소설은 개연성을 확보하게 되고 한층 드라마틱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점은 여전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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