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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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는 대체로 가족 간의 불화와 반목, 이해와 화합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플롯을 갖는다. 여기에 적절한 감동과 건전한 주제의식은 기본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감정의 과잉에 거부감이 없다면 눈물샘을 짜내는 신파도 어울린다. 특히 가족의 의미가 퇴색해 버린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가족이란 보편적인 화두에서 출발하여 극단의 정서적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 가족의 참의미의 재생을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감추어진 출생의 비밀 같은 가족사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모든 준비가 갖추어 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가족의 반목과 화해의 과정을 그리면서 독자를 감화시키고 가족의 참의미를 되묻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모든 재료를 다 갖추어 놓고, 의외의 방식으로 요리해 내 놓은 작가가 있다. 등단 6년 만에 새 장편 소설을 들고 돌아온 천명관이다. 그의 전작 <고래>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그가 가족이라는 소재를 결코 평범하게 풀어내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령화 가족>은 우리가 가족 이야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갖가지 요소들을 파괴된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 뭔가 뒤틀리고 억지스럽고 투박하다. 그러나 천명관이 전작에서부터 밟아온 기이한 행보를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완벽하게 극화된 인물들이 끝없이 기이한 행각을 펼치던 소설 <고래>를 기억한다면 말이다. 그는 뻔한 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하나다. 아마 그의 얼굴에는 "정해진 건 없다"라고 써 있는 건 아닐지.

소설은 각자의 삶을 향해 집을 떠났던 남매들이 몇 십년이 흐른 뒤 다시 한 집에 모이게 되면서 시작된다. 칠순을 넘긴 노모 밑으로 기식하러 들어오는 중년의 세 남매의 초라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가장 왕성하게 자신의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에 오히려 빈털털이가 되어 집으로 들어온 남매들의 애처러운 상황을 그리면서도 작가는 동정어린 감상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전과 5범에 하는 일 없이 식량을 축내며 방귀만 뿡뿡 뀌어대는 120키로 거구의 첫째 오함마,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루어 놓은 것이라곤 10여년 전에 세기의 졸작영화 한 편을 만든 것이 전부인 둘째 오인모, 바람을 펴 두 번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들어온 막내 미연에 발랑까진 그녀의 딸까지 합세해서 평균나이 사십 구세인 가족. 우여곡절 끝에 스물 네 평 아파트를 채운 다섯 가족의 훈훈한 이야기가 바야흐로 펼쳐진다고 하면 좋겠지만 이야기 속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피자 한 판을 시켜 삼촌에게 한 조각 건네지도 않고 혼자 먹어치우는 조카, 조카의 비행 현장을 포착해 그것을 빌미로 조카를 삥뜯는 삼촌, 조카의 속옷을 훔쳐내 수음을 하는 삼촌, 이혼 서류에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새 남자와 일을 벌이는 여동생. 이 가족의 일상은 이렇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는 막장 가족이 알고 보니 더 막장이더라는 기막힌 이야기다. 소위 막장 드라마가 욕먹는 이유는 갈 데까지 가본다는 식의 배짱 때문이다. <고령화 가족>은 뻔뻔스럽게도 그런 식의 막장 코드를 아주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고래>의 능청스러운 화법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는 것도 바로 이 막장코드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사실적인 삶에 근접해 있는 대신 상상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말도 안 되게 막 나가는 가족이 탄생한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스무 명 남짓 되는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아 옷대신 거적때기를 덮어 키우는 흥부 이야기도 오늘의 기준에서는 막장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천명관은 터무니 없는 일들을 늘어 놓으며 '이것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끊임 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 한 편의 막장드라마도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은 지니고 있다. 오로지 시선 끌기만을 위한 자극성 소재의 나열은 아니라는 점에서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와 차이를 보인다. 웬수처럼 지내던 형 오함마의 극적인 인생역전에 통쾌해하는 나(비록 그 결과가 참혹한 폭행으로 이어진다해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꺽꺽 울음을 터뜨리는 오함마, 난봉꾼 같은 삼촌에게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조카. 막장 가족에게 한 가닥 가족애가 비치는 순간 유쾌한 웃음은 찡한 감동으로 변한다.   

에둘러 가고 있지만, 결국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로 되돌아 간다. 삼 남매가 한 집에 모이게 된 난감한 사건(?)을 겪고도 오히려 들뜬 마음이 되어 매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차려내는 어머니는 흔한 가족 드라마의 헌신적인 모습 그대로다. 아닌 척 하지만 이 가족들은 모두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낸다. 이렇듯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희생은 결국 이들이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가족 안에는 모든 형태의 가족이 공존한다. 핏줄을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가족도 이 안에 존재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과 결혼을 통해 새로이 가족 구성원에 편입된 이도 존재한다.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었든 결국 이들 가족은 동일한 운명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가족의 이상적인 형태를 말할 때, 가족의 형성 과정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재혼, 입양 등의 특수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가족들에 대한 편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작가는 이 가족의 모습을 통해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가족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낡은 소파 위에 앉아 이 가족에 대해 억측을 늘어 놓는 할머니들을 욕하려거든 겉만 보고 한 가족을 판단하는 그 모습이 혹시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예기치 않게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마련해 두고 도무지 심각해질 순간을 주지 않는다. 딸의 가출을 알게 되는 심각한 순간에 엉터리 맞춤법의 편지가 발견된다든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장한 분노가 표출되는 순간 유치장으로 장면이 전환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 사람 웃기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고래>에서 각종 법칙을 나열하며 잡다한 사건에 대한 서술을 대신했다면, <고령화 가족>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쓰여진 한 줄 요약글을 통해 구구절절한 인물 소개를 대신한다. 서술을 아끼는 대신 버라이어티한 대중 문화의 요소요소를 적절히 차용한다. 막장 일일 연속극으로 출발해서, 중년남자의 애환을 그린 인간극장이 되었다가, 청소년들의 비행 현장을 추적하는 피디수첩이 되기도 한다. 또 황당한 첩보영화가 되는가 하면 어이없는 촌극을 그린 시트콤이 되어 빵 터지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문제적 인물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전통적인 소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형식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소설 쓰기는 근대를 거슬러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전통에 오히려 근접해 있는 것 같다. '야이기꾼'으로서의 그의 특출난 자질은 여전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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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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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상세히 들여다보면 사건의 기술과 감칠맛 나는 묘사에 있어 소설적인 서술방식을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작가의 메시지가 오감을 통해 전해진다는 점에서 애덤 셀의 <토마토 랩소디>는 독특하다. 단순히 활자를 해독하는 독서 활동만으로도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에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다분히 작가가 의도한 듯 보이는 연극적인 구성 방식 때문에도 그렇다. 

<토마토 랩소디>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미각에 강하게 호소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토마토와 올리브가 만나 맛있는 피자가 되었다는 식의 유래에 빗대어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기발함이 돋보인다. 작가는 묘사에 있어서 생생함을 전할 수 있는 갖가지 요소들을 동원한다. 음식의 빛깔과 맛, 그 안에 숨겨진 절절한 사연까지 수다스럽게 풀어내며 독자의 오감을 자극한다. 열매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을 맛깔나게 풀어낸다. 나아가서 인물의 묘사에까지 싱싱한 채소들을 동원하는데, 이 모든 입맛 도는 묘사들은 마침내 뜨거운 햇빛을 가득 담은 남유럽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취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들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인물이기 보다는 외양과 성격에 있어 모두 뚜렷한 하나의 인상을 주는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이런 인물들의 동선은 구체적인 몇몇 장소에 한정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같은 느낌을 준다. 특이하게도 이야기의 서술자는 중간중간 불현듯 튀어 나와 포초 멘초냐의 극작법에 관한 눈문을 인용하는데, 이는 작가가 연극적 구성을 다분히 의도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연극에 비유하자면) 3막에 걸쳐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단순한 토마토와 사랑을 둘러싼 몇 가지 소동을 단조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나아가 인생의 참다운 의미까지 심오하게 전달한다. 소설은 표면적으로 토마토를 재배하는 청년과 올리브를 따는 처녀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사건의 얼개를 이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야기 속에는 수 많은 인물들이 두 남녀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얽혀 있다. 얽히고 섥힌 인물들의 관계 속에는 은밀한 욕망이 있는가 하면, 애잔한 동정이 있고, 치졸한 탐욕이 숨어 있다.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사회적 금기와 개인적 탐욕에 따른 장애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드러내기 위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포초 멘초냐의 논문을 들어 희극을 '단 것과 쓴 것이 뒤섞인 맛'이라고 말한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이 시골 마을에도 두 번의 쓴 맛, 즉 비극적인 사건이 찾아 온다. 논노와 교감하던 늙은 당나귀의 죽음이 그 하나고, 숱한 시련을 이겨낸 현자로서 다비도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논노의 죽음이 또 다른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설의 결말은 희극이다. 이들의 죽음이 환경에 완강하게 저항하다 맞이하는 비통한 죽음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평온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의 기쁨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죽음으로써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쓴 맛 없이는 단 맛도 없는 법.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긍정이란 측면에서 소설은 희극이다. <토마토 랩소디>는 외적 조건을 넘어선 순수한 감정 자체를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남녀의 본능적인 이끌림은 뜨거운 햇살 속에서 자연히 영그는 열매들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다비도와 마리 뿐 아니라 베니토와 보보같은 소외된 인물들 마저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듬는다. 그리하여 각종 미신과 종교적 제약으로 인해 억눌러야 하는 모든 금기들이 해방되고, 종교와 신분을 초월한 뜻깊은 화해를 이루는 순간은 의심할 바 없이 인생의 해피앤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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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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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작가가 아닌 마당에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때에는 소설이기보다 자서전에 가까울 거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작가 자신의 특이한 이력이 홍보문구를 크게 장식할 때에는 더 그렇다. 제네바 왕립 묘지에 매장된 '혁명적 창녀'라는 센세이셔널한 이력을 가진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소설 <검정도 색깔이다>를 읽으면서 당혹스러웠던 점도, 내용의 파격성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적 공정을 거치지 않은 글을 소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 매춘부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에 나섰던 한 창녀의 자서전으로 보는게 더 적합해 보인다. 소설의 본질이 허구라고 할 때, 이 소설의 어디까지를 허구로 보아야 할 지 경계가 모호하다. 소설 속의 일인칭 화자는 분명 허구적 인물은 아니다. 자전적 소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허구화된 작가도 아니고 그냥 작가 자신인 것 처럼 읽힌다.  무수한 영탄법으로 나타나는 특유의 문체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의 과잉이 문체에 깊이 파고들어 있다. 그래서 소설 속에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많이 드러난다. 독자는 소설 속 서술자가 이야기하는 울분이나 고뇌는 허구화된 인물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인과 관계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산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호소와 탄식으로, 사회의 부당한 시선과 처우에 대한 공감을 억지로 강요당하는 느낌 탓에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영탄조의 만연체를 견디어 내도 그다지 남는 것은 없다. 보편적인 도덕률에 반하는 파격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해 보이나, 그 관심을 제대로 충족시키기는 건 별개의 문제다. 매춘이라는 소재 자체를 통해 사회의 위선과 모순을 꼬집어낸다는 시도는 차라리 우리나라의 작가 황석영의 소설 <심청>에서 훨씬 훌륭하게 드러난다. 역동적인 소설의 무대를 통해 다채롭게 펼쳐지는 매춘의 대서사시가 생계를 위한 매춘에 직접적으로 내던져진 경험과 부당한 시선을 직접 견뎌낸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더 와닿는 것은, 매춘에 대한 사회, 문화, 역사적 환경에 대한 다각적인 고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검정도 색깔이다>는 자신의 삶을 그리로 이끌어 간 사회, 문화, 역사적 환경에 대한 언급 대신 혼자만의 독백에만 한없이 빠져든다. 소설을 이루는 환경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없이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작가의 삶 속으로 억지로 뛰어들어 공감하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주된 얼개를 이루는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고 사랑을 위해 흑인 사냥을 한다는 사실 또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하다. 작가의 직업적 특수성 때문에 소설의 내용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문제는 이런 정서적 괴리감을 극복할 만한 개연성을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흑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나 그녀의 삶이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평범하지 않은 소재로 인해 정서적 거리감을 안고 출발한 상태에서 개연성 없는 이야기의 도약과 자연스럽지 못한 흐름은 소설적 플롯을 기대하고 책을 펼친 사람에게는 실망만 준다. 소설적 구성의 미흡함 탓에 결국 그녀의 삶도 예술도 사랑도 붕 뜬 채 하나의 주제로 집중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한 아름다운 여성의 질곡진 삶에 대한 자서전으로 읽게 되면 분명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애초부터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탐미주의자들로 가득한 프랑스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레알의 삶은 진솔하고 정직하다. 그녀가 사랑에 대해 누구보다 솔직했고 열정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자신의 내면의 열정과 사회적 시선과의 괴리에서 느꼈을 감정들을 자조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다면 애초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하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작가는 독자의 공감과 연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바로 자신이기를 바랐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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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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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가 순문학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것은 최근의 일도 아니고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작가들은 끊임 없이 상상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내보인다. 현실 세계의 사실적인 반영만을 가지고 인간 세계와 그 내면에 대해 그려 보이기에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방향성이 없는 자유롭고 능청스러운 상상력을 실험하는 경향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지는 것은 이런 이야기판의 포화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저항일 것이다. 더 이상 이단이니 실험적이니 하는 단어를 곁들이지 않고도 독특한 소설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만큼 소설의 정통성의 경계는 이미 많이 희미해져 있다. 때문에 벨기에의 젊은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독특한 소설집 <육식이야기>에서 펼쳐 보인 상상력의 세계에 입문하는데에는 거창한 심호흡이나 준비운동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 <육식이야기>가 장르문학적 판타지와 구별된다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순문학이란 단어를 쓴다.) 

<육식이야기>에 실린 14편의 기묘한 이야기들은 사고의 거침없는 확산으로 정리된다. 오렌지 껍질로 둘러싸인 육체를 가진 여인,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육체를 넘나드는 주교, 남이 자기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등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작품마다 등장한다. 이런 독특한 인물들은 또한 기름이 유출된 바다에서 희열을 느낀다든가, 거대한 식충 식물에 무한한 열정을 쏟아붓는다든가 하는 식의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상의 영역이 매우 독창적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즉, 현실의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채로 인간의 내면을 심오하게 파고들며 자유로운 상상을 펼친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성상의 방법 가운데 하나로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꾸준히 활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상상의 핵심이 되는 내화에 끊임없이 신빙성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현실 세계와 소통하는 자유로운 출구를 열어 둠으로써 상상력의 무한한 확장은 차단된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소설들은 이와 같이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의 주제를 파고들어 간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인력을 유지하는 힘은 작가의 지성에 있다. 작품 속 기괴한 상상의 세계는 철학, 과학, 예술과 같은 인류의 심오한 정신적 산물들을 통해 실현된다. 이런 까닭으로 이 책이 발칙하고 음흉한 외피를 쓰고 있음에도 진지하게 읽히는 것이다.  

이 소설집은 도덕과 상충되는 형태로서의 예술에 대한 절대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광기에 가까운 예술에의 집착을 보여주는 많은 인물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기름유출이라는 비극적인 사고를 눈 앞에 두고 "섬세한 취향을 지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도 황홀한 그 완벽한 끈적이는 검정 덩어리"라고 감탄할 수 있는 예술 지향주의적 태도가 바로 이 소설집 전체의 기반을 이룬다.    

책에는 기름 사고의 미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한 '기름 유출 사고 전문가 협회'의 존재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의 화룡점정을 위해 최후의 피와 뇌수를 유작 위에 뿌리는 화가, 거장의 창작 노트를 훔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펼치는 작가지망청년, 정체 불명의 생명체의 알을 예술 작품을 위한 캔버스로 활용하는 화가 등 기상천외한 예술가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작가는 이 예술가들을 묘사하면서 일체의 윤리적 성찰을 배제한다. 이런 예술 지향적인 작중 인물들의 특징은 고스란히 베르나르 키리니의 창작 태도와 이어진다. 오직 아름다움만이 최고이며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여기는 작가의 태도가 발칙한 상상력과 어우러져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야성적으로 팔딱거리게 한다.  

작가의 절대적인 예술 지향은 작품 속의 공허한 울림으로만 그치지 않고, 소설의 미학적 구조를 확고히 함으로써 실천적으로 드러난다. 열 네 편의 소설 작품 중에는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 '살인청부업자의 추억',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 등과 같이 서사적 골격을 포기한 채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단순 열거로 이루어진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탄탄한 구성이 밀도 있는 주제와 어우러져 완전한 미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열네 편의 소설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구축한다. 동일한 인물과 주제가 여러 작품 속에 반복되고 변주되는 가운데 그 세계는 뚜렷한 색깔로 각인된다. 30대 초반인 젊은 작가가 에드거 앨런 포나 보르헤스같은 거장에 감히 비견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 대한 완벽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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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행 - 다르게 시작하고픈 욕망
한지은 지음 / 청어람장서가(장서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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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만큼이나 내외적 변화로 혼돈스러운 시기가 있다면 '서른 즈음'일 것이다. 제도화된 교육 하에 천편일률적인 길을 걸어왔던 또래들이 비로소 각각의 다른 길을 향해 분산되어 가는 시기이며, 결혼과 자아 실현의 중대 과업 사이에서 조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비로소 나이에 대한 압박이 느껴질 때이므로 30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일생에서 여러모로 중요하다. 

<서른 여행>은 특별한 서른을 맞이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다. 서른을 앞두고 있던 차에 반복되는 일상에서 삶의 의미마저 희미해져 갈 때, 작가는 용기있게 사표를 던진다. 이 충동적인 행동으로 행복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있다는 작가는 8개월 간의 긴 여행 체험과 여행지에서의 단상과 깨달음을 조심스럽게 풀어 놓는다.

이 책은 '서른을 맞이하기 위한 여행'이라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평범하고 친숙한 이야기에 가깝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여행하는 인도와 동남아라는 여행지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행지에서 겪는 일들도 대체로 누구나 겪을 법한 여행의 체험이다. 여행지가 독특하거나, 작가의 개성이 유난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책의 구성이 독특한 소위 '튀는' 여행기들 속에서 꽤 조신하게 섞여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튀지 않음이 공감의 폭을 더 넓혀 준다. 

대부분의 여행기의 시작이 그렇듯 여행의 시작은 일상에 대한 환멸에서 시작된다.이는 일상에서의 도피로 이어지고 여행 중 겪는 갖은 사건 사고들은 삶에 대한 깨달음의 지침이 된다. 이는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또 상당 부분 공감할 만한 것이다. 여행의 체험은 각기 다르지만 그 효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수긍할 만큼의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책은 주요 여정과 여행지에서의 핵심적인 체험의 서술에 치중하고 있다. 여행자에게 흔히 벌어지는 돌발적인 상황이라든지, 여행지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지역과 지역을 이동하는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들 중의 상당부분은 생략이 된 것 같아 아쉽다. 이를테면, 다르질링에 있던 작가가 다음 순간 바라나시로 이동해 있는데, 바라나시로의 이동을 결정하게 만든 고민의 과정들이 생략되어 있어 두 번째 찾은 바라나시에 대한 경험은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읽다 보면 일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데, 어떤 경로로 일행을 만나고 헤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생략되어 있어 여행의 체험이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한정된 지면에 개인적 체험과 보편적 체험 사이의 절절한 균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여행기의 생생함이 다소 줄어들어 아쉬운 감이 있다. 인도-네팔-태국-캄보디아-베트남-라오스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고스란히 다 담기에 책 한 권은 부족하지 않을까.  

여행 에세이를 찾다보면 의외로 산문이 중심이 되는 진솔한 여행기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메끈하게 잘 찍힌 사진과 책 자체의 비주얼에만 신경을 쓴 듯한 책들은 오히려 여행지의 생생함을 반감시킨다. 긴 여행에 비해 다소 짧은 내용이 아쉽지만, <서른 여행>은 최근 보기 드문 진지한 산문 여행 에세이라는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서른 맞이 여행이라는 의미 부여는 중요하지 않다. 일상의 반복에 지친 한 젊은이의 용기 있는 결정에 대해 느끼는 대리만족으로도 책은 충분히 재미있다. 물론 시간과 돈과 열정이 최소한이나마 뒷받침 되었어야 가능했을 일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누구나 꿈꿔봄직한 일에 대한 용기있는 실천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른 즈음이라는 상황적 특수성이 아니라, 특별한 결정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도 잘 쓰여진 여행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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