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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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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넘친다. 소설 속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도 전에 하나의 의식이 또 다른 의식을 덮어버린다. 서사와 관념이 혼동되는 이 언어들 틈에서 분명한 것은 없어보인다. 소설의 세계가 구체적인 형체를 드러낼 때에도 그 의식의 불규칙적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존 쿳시의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는 인물이 환경에 추동되어 사건을 벌이는 정통적인 소설과 달리 오로지 의식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서술자의 관념 속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오는 언어들이 지시하는 대상은 불분명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실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보다, 오히려 실체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가공되지 않은 채 서술자의 관념 속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오는 말들은 이성과 상식을 거부한다. 그 언어 속에서 냉혹함과 공허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관념 속에서 스며나오는 호소의 목소리가 자연히 불러 들이는 감정이다.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 뒤섞인 직소 퍼즐을 맞추기 위한 신중함은 불필요하다. 화자의 의식 속에서 모든 사건은 왜곡되거나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의식 속에서 규칙없이 유영한다.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하나의 끔찍한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나 서술자의 시선은 그 살인사건의 동기나 심리에 대한 해명에 머물지 않는다. 그 끔찍한 사건이 의식의 한 구석에 놓여진 채 또 다른 생각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온다. 그러는 사이에 살인 사건의 희생자는 태연스럽게 부활한다. 이 때 즈음 독자들은 서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의식과 실재의 불분명한 경계는 심지어 정신착란자의 의식 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 마저 들게 한다. 마침내 서사를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고독한 여성화자의 강박으로 가득 찬 내면에 집중할 때 소설 속 세계는 분명한 형태를 갖춘다.  

마그다는 백인 농장주의 딸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하에서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는 줄곧 타자로 비춰진다. 여성으로서 그녀의 육체적 열등함은 화자 자신을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 틈에서 조차 초라한 존재로 격하시킨다. 관계에서 오는 애착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존재로서 애착에 대한 갈구는 살인이라는 형태의 강박증으로 나타날 정도로 강렬하다. '나는 처분되었다'와 같이 자신을 수동적인 존재 혹은 무생물체로 치부하는 냉소가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고, 이는 끝에 가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자기 연민의 목소리로 바뀐다. 이런 나약한 화자의 의식은 관습적 주종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도, 육체적 정신적 주종관계에서 결국 타인에 종속되어 버리는 비극적 운명을 야기한다.  

서술자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관념의 총체다. 그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이 여성 화자는 환상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환상을 밀어 넣는 식으로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게 만들어 놓는다. 때로는 냉혹하고 때로는 탐미적인 의식의 일면을 드러내 보인다. 주지적인 언어로 감정을 호소하는 독특한 형식의 독백에는 공허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다. '내 목소리들과의 싸움'이라고 화자 스스로 일컫는 이 독백들은 상대방과의 소통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결국 거울에 반사되듯 튕겨 나가 허공을 떠돈다.  

독백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은 결국 하나의 모노드라마로 읽힌다. 힘의 우월함을 기반한 아버지나 핸드릭은 마그다에게 끝없는 갈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이 몰두하는 완전한 형태의 여성성을 지닌 안나는 마그다의 의식이 끊임없이 동일시하려는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서사의 공간이 되는 '나라의 심장부'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절대 고독의 세계로 침잠해가는 마그다의 의식 뿐이다. 관념적이고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녹록치 않은 문장들은 그 의식의 균열 상태를 보여준다. 애타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결국 소통에 실패하고 좌절해버린 한 여인의 의식이 유령처럼 떠도는 이 광활한 세계의 중심부에는 열망과 고독에 대한 사유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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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1-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와서 읽는데 리뷰가 좋아요.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중인데 읽고났더니 더 못쓰겠네요. 읽긴 읽었되 소화는 덜 되었나봐요. 잘 읽고 갑니다.^^

깐짜나부리 2011-01-27 03:48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 존 쿳시의 작품이 유난히 소화하기 어렵긴 하죠. 저는 서사를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읽기 시작하니까 차라리 편하게 읽히더라구요. 그렇지만 여전히 난해한 책인 건 사실이랍니다.

시간의안그림자 2011-04-1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으로 읽어 보기에는 문장들이 많이 고급스럽고 아까워 보입니다. 평론 잡지에 실려 있으면 제대로 옷을 입었구나 싶은 글 들입니다. 사실, 전문 평론가들이 한 권의 소설 안에 들어 가서는 분석하고 쇄분하고, 파괴하고, 해체해서는 다시 제 위치라는 의미의 조립 속에 그 작룸이 지닌 미학적 가치의 장점, 단 점, 부족한 점을 낱낱히 긁어 내 놓은 것을 읽고 있으면 말들의 고탑 같은 난해성 의미식 접근의 해석으로 문장을 풀어 놓고 있어서 많이 어렵다고 항상 느껴 보다가 이 방에 들어 와서 읽어 보게 되었던 평론들을 대하고 있으니 맛 깔스럽고, 고급스럽고, 일반 독자들의 시선을 좀 더 이끌어 주는데 편안하게 다 가 와 주고 있으니 좋은 향기가 글을 따라 묻어 나는 것 같아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집니다. 전문가들의 글들이 일반 독자들의 시선을 벗어 나게 만드는 데에도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의미 표현법의 지나친 문장 만들기와 전달에도 그 원인은 있다고 생각해 보는 독자인데, 평론 자격증도 소설처럼 좀 더 다양하게 범위를 넓혀서 뽑아 준다면 독자 분의 향기 나는 평론 글들이 훨씬 더 대중들의 뇌리에서도 그 의미의 느낌은 찍어 줄 텐데 생각을 해 봅니다. 자주 읽으러 들어 오겠습니다. 고급스럽고 맛깔 스러운 글들 많이 써 주세요

깐짜나부리 2011-04-12 22:33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일반 독자이다보니 좀 더 대중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해요. 그러나 서평을 쓸 때 여전히 고민이 많답니다. 이를테면 주관성과 객관성의 균형 문제, 다양한 아이디어와 글의 통일성 간의 충돌, 책에 대한 정보의 적절한 노출 정도 등등. 그래도 긍정적인 피드백에 힘이 나네요~
 
<도롱뇽과의 전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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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도룡뇽의 역사에 대한 방대한 기록이다. 물론 인류 역사에 도롱뇽의 자리 같은 것은 없다. 도롱뇽을 역사의 중심부로 끌어들인 것은 오로지 상상의 힘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소설은 무수한 증거자료들을 쏟아내며 시종 사실적인 어법으로 서술되고 있다. 내용의 재기발랄함과 건조한 문체 간의 이러한 부조화에서 작가의 재치가 마음껏 발현된다.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은 한 마디로 도롱뇽의 역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인 척 하는 소설이다. 

애초에 도롱뇽과 인간의 밀착관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현실의 영역을 훌쩍 뛰어 넘는 공상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단순히 공상소설로 치부하기에는 드물게 리얼리티를 잘 살린 소설이다. 낯선 상황 속에 익숙한 풍경이 쉴새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황당무계한 사건에 진실성을 부여하려는 형식적인 시도와 그 안에 담긴 생소하지 않은 인간 사회의 습속들은 가상의 스토리를 현실에 가장 근접한 위치까지 끌어올인다. 이렇듯 현실과의 견고한 접점으로 인해, 아침에 조간신문을 기다리듯 도롱뇽 역사의 다음 장을 당연한 듯 기대하게 만든다.  

한 선장이 두 손의 자유로움을 보장하는 직립보행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이 갖추어진 도롱뇽에게 도구를 쥐어주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도구를 사용하게 된 도롱뇽은 사냥을 하게 되고, 원시적인 형태의 상업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 도롱뇽들은 점차 조직적인 노동 체계를 획득하게 되고, 언어의 습득을 통해 인간과 유사한 사상과 문화를 이룩하기에 이른다. 인류 역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따른 듯 보이는 도롱뇽의 역사는 실상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닌 인위적으로 조작된 진화라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와는 차이를 보인다. 도롱뇽의 진보 과정에 대한 장광설을 쏟아내던 소설은 도롱뇽의 역사를 포괄하는 인류의 역사로 다시 줌 아웃된다. 도롱뇽을 역사의 주류 속에 편입시킨 인류는 노동과 기술력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한다. 그러나 곧 도롱뇽의 역사가 인간의 탐욕으로 초래된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전인류에 서서히 불안감이 감돌게 되고, 마침내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 도롱뇽의 역사를 포함시킨 이 소설은 두 가지 시각으로 읽힌다. 도롱뇽의 역사에 주목하면 인류의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인류의 역사에 주목하면 인류의 끝없는 탐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이 두 시선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은 도롱뇽의 역사가 장황하게 서술되는 2부이다. 도롱뇽은 인간이 이룩해 온 자취를 고스란히 따르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도롱뇽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인류가 벌여 온 수많은 산물들을 객관적으로 관망할 기회를 갖게 된다. 도롱뇽이란 동물이 인류의 공과를 고스란히 밟아 가도록 치밀하게 그려내면서도 그것을 원격조종하는 인간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있는 데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롱뇽과의 전쟁>은 단순히 인간에 준하는 능력을 손에 넣은 도롱뇽들이 마침내 인간의 영역을 점령하기 위해 침략을 감행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도롱뇽이 인간의 영역을 침입하려는 순간조차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이다. 도롱뇽이 과연 인류의 정복을 위한 야심찬 계획을 꿈꾸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롱뇽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단일속끼리의 무의미한 갈등에 도롱뇽이라는 거짓 명분을 내세우는 것으로 인간의 탐욕은 그 절정을 보여줄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과오들을 수정해 나가는 것으로 끊임없는 진보를 보이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인류의 치명적인 과오로 꼽히는 봉건제와 노예제같은 전근대적 악습의 뿌리는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인간은 물리적 정신적 우월함을 내세우며 언제든지 좀더 약한 존재를 억압할 준비가 되어있다. 도롱뇽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이러한 오만함이다. 한 세기 전의 작가인 카렐 차페크에게서 인류를 향한 예언가적인 날카로운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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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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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은교>를 접했을 때, 지독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그것을 칭하는 말은 하나지만,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때로는 범속하고 위험한가 하면 치명적이고 관능적이다. 소설에는 이 모든 욕망의 빛깔들이 어우러져 강한 색채를 뿜어낸다. 이 책은 모든 감각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눈으로, 가슴으로, 전신의 감각으로 읽히는 책이다. 애초 이 책을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오인했던 것은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감각적인 관능의 미학 탓이리라.  

작품 속에서 에로티시즘 속에 감추어진 예술가의 고뇌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세의 소녀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노시인의 노트에서 줄곧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느닷 없이 찾아 온 당혹스러운 애욕을 둘러싼 예술적 탐색이다. 은교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한 마디로 치명적이다. 그러나 일생에 처음 찾아온 진실한 사랑이 하필이면 5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물리적 간극을 감내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은 애초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랑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의 영혼을 자극한 하나의 큰 사건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굵직한 갈등의 한 가운데는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소설에는 시인의 노트와 함께 시인의 제자이자 스승과 동일한 대상을 갈구했던 서지우의 노트가 교차되며 나타난다. 두 개의 노트는 하나의 대상을 향한 두 개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이라면, 하나는 탐미적이고 보다 영혼에 가까이 닿아있는 욕망이다. 두 욕망이 만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은교라는 인물이다. 두 남자의 욕망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은교는 어쩌면 이들 사이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오랜 동안 이어져 온 애증의 씨앗이 은교라는 촉매제로 인해 비로소 싹을 틔운 것일 뿐. 욕망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위장한 채로 말이다.  

작가는 온갖 외적인 틀을 벗어던지고 본능적인 욕망 자체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욕망은 사회적 용인의 범위를 벗어날 때 비난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 용인에 대한 잣대가 적용되기 전 자연적 욕망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시인의 말처럼 욕망은 어떤 물리적 조건과 관계 없이 공정하게 찾아온다. 이를 규정짓는 것은 제도화되거나 암묵적으로 수용되는 틀이다. 이것이 17세 소녀를 사랑하는 노인의 마음을 비난할 수 있게 하는 매커니즘이다. 서지우의 욕망이 좀 더 통속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틀로 인해 욕망의 본질을 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시인과 서지우의 갈등은 더 젊고 덜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본질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육체의 노예는 '썩은 관'에 지나지 않는 노시인이 아닌 육체적 우월함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서지우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시인의 욕망은 외적으로는 그러지 못해도 적어도 영혼만은 일체의 제약에서 벗어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시인의 노트에 묘사된 은교는 강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쌔근쌔근, 뽀르르, 뽀드득뽀드득, 쫑쫑쫑' 같은 양성모음의 감각어와 함께 묘사되는 은교의 생동감은 쇠락한 노시인의 육체와 정신을 일깨운다. 시인에게 있어 은교는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는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그것이 17세라는 나이의 정체이며, 결국 70세와 17세라는 물리적 간격은 아무런 문제되지 않는다.  

시인의 노트에 기록된 은교는 기실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은교는 세속의 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린 '보통 여자애'에 불과하다. 치정극에 등장하는 흔한 팜므파탈도 아니고 17세의 발랄한 생명력을 제외한 다른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은교는 하나의 상징, 즉 위대한 예술정신의 구체적 발현체로서 작품 속에 존재한다.  

결국 은교는 시인과 서지우가 애타게 갈구하는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둘 사이에 감추어진 갈등을 발현케하는 대상이다. 은교를 통해 시인의 탐미적 예술성이 발현되고 재능을 갖지 못한 예술가의 열등의식이 깨어나게 된다. 서지우의 노트에 묘사된 세속적 욕망이란 사회적 권위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갈구이다. 시인의 노트에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타나는 욕망 자체의 예술적 승화와는 반대로 서지우의 노트는 현실적 애욕의 세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서지우의 세속적 태도의 이면에도 스승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존경, 양심이 존재한다. 서지우는 은교를 탐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몰두하는 은교'를 탐함으로써 예술적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 또한 은교를 탐한 것보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우둔함에 대해 더욱 큰 형을 선고하고 있음에서 이들의 갈등의 실체는 분명해진다.    

젊음과 숨막히는 관능이 일깨운 예술가의 치명적 사랑은 비극으로 종결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한 비극이 아니라 사제 간 재능과 욕망의 간극이 불러 일으킨 비극이다. 스승과 제자의 비극은 은교를 둘러싼 서로 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에 있다. 은교에 의해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 은교로 인해 감추어진 그들의 진실이 결국 비극의 실체인 것이다. 스승의 사형 선고를 기꺼이 받아들인 제자나 마지막 면죄부를 외면하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스승의 모습이 그것이다.  

유미적 텍스트와 치정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순수한 영혼을 향한 두 예술가의 갈망이다. 은교의 존재는 때로는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때로는 수치심을 자극한다. 한 여자를 둘러싼 두 예술가의 자기고백적 노트는 그들의 내밀한 욕망과 예술적 갈망에 대해 적고 있다. 그 예술적 갈망은 이들의 노트를 불 태운 은교에게로 전이된다. 관능적인 생명력으로 노인을 유혹하던 소녀는 노인의 영혼을 상속받아 '죽은 다음에도 살아'있기를 바라는 노인의 갈망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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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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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간유리를 통해 내다보는 현상은 몽환적이면서 아름답다. 설령 그 바깥에 있는 것이 악취가 풍기는 쓰레기 더미라고 해도 말이다. 문학 작품에서 이런 간유리의 반투명성은 현실을 색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황홀한 언어의 향연과 서정성이 현실의 비정함을 여과하여 비춰준다. 그런데 반투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 현상들은 독자의 상상 속에서 더 지독한 고통으로 탄생한다.  

1944년 소련의 공격을 받은 루마니아는 나치 독일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소련의 강제 수용소로 넘긴다.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한다는 명목이다. 명목이야 어찌되었든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로 추방된다. 참혹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직접 이 불합리한 추방을 겪지는 않았지만 헤르타 뮐러는 한 시인을 통해 수용소 삶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전해듣고 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날카로운 펜 끝으로 고발하는 참혹한 현실은 뜻밖에도 몹시 서정적이다. 비극적인 역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미적이고 압축적인 언어로 묘사된 까닭이다. 서사는 간결하지만 그것을 묘사해내는 언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정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황홀한 언어로 독자를 기만한다. '숨그네, 배고픈 천사, 빵의 법정, 양철키스'와 같은 아름다운 조어(造語)들이 안내하는 곳은 지독한 허기와 고독에 잠긴 비극적인 현실 속이다. 마음껏 언어의 향연에 취해있는 사이 현실의 비참함이 가슴을 먹먹하게 쳐올린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극한의 고통 속에서 보는 아름다운 환각을 연상케한다. 성냥불이 꺼지는 순간 참혹한 현실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절묘한 대위법은 수용소의 현실을 하나의 심상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소의 비정함을 고발한다.  

반복되는 '배고픈 천사'의 공식 속에서 끊임없이 '심장삽'을 움직이는 수용소의 생활들. 여분의 옷 한벌과 그가 숨겨 놓은 빵 한 조각의 의미만을 갖는 죽은 사람들. 수용소로 추방당한 17세 소년 레오는 최소한의 존엄조차 사라진 이러한 수용소 내부의 풍경 앞에 담담하다. 그는 자신이 닥친 상황 앞에서 울부짖거나 부당함을 토로하지 않는다. 대신에 당시에 사용하던 사물들 속에 깃든 수용소의 기억들을 실을 풀어내듯이 끄집어낸다. 명아주와 시멘트, 슬래그벽돌, 실크스카프 등의 사물에 깃든 레오의 기억은 상황의 처절함을 오히려 담담하게 비춰준다.  

소설은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묘하게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굴복해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더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주운 돈으로 사먹은 음식들을 몽땅 게워낸 뒤, 식당에 아직 양배추 수프가 남았을까 걱정하는 레오의 모습은 비극의 또렷한 이미지를 새긴다. 어느새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좌절보다 더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한밤에 불시에 불려나갈 때나, 문득 다른 일자리에 배정을 받을 때면 언제나 총살 당할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들은 어느덧 허기와 익숙함의 노예가 되어 늘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배고픈 천사'의 품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뼈와 가죽의 시간'이 끝난 뒤, 갈망하던 세계조차 사라질 때 비극은 심화된다. '너는 돌아올 거야'란 할머니의 말을 주문처럼 가슴에 새기며 버텨왔던 세월의 끝에, 레오는 그 '돌아옴'의 의미조차 상실해버린다. 수용소의 시간과 수용소 밖의 시간은 그 질량이 다르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수용소 안의 시간이 멈추어어있는 동안 밖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5년 만의 생환에도 불구하고,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레오가 끝없이 수용소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는 고통의 세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고통의 세월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이들은 결국 수용소에서 함께 지내왔던 동료들 뿐이라는 사실은 고통의 종결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여러 편의 수필을 모아 놓은 것 같이 관조적인 서술에 의존한 각각의 이야기들은 수용소의 비참한 삶을 관통한다. 비참함은 구체적이기보다 상징적이다. 50년도 더 된 시절의 동유럽에서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이기보다 비참함이 형상화된 상징적인 공간에서의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숨결을 그네뛰게 하는 <숨그네>는 제목 그대로 독자들의 호흡을 뒤흔든다. 사물을 향해 내뱉는 참신한 비유와 같은 낯설게 하기, 처참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나약한 인간들의 실존, 무한한 서정으로 가득찬 상처받은 주인공의 내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 책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내보인다. 책장을 덮는 순간 깊은 꿈에서 깨어난 듯한 '몽롱한 각성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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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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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 세자는 한 번도 역사의 중심에 서 보지 못한 채 뒤안길로 사라져 간 인물이다. 이정환의 시조 '국치비가(國恥悲歌)' 두 수에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그 비극적 운명의 일면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의 10여년을 볼모의 신세로 적국의 땅에서 살아야 했으며, 환국한 지 2달여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니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던 숱한 왕족들 중에서도 가장 치욕적이고 고독한 삶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사적 기록의 빈약함 때문에 많은 문학작품에서 조차 원용되지 못했던 이 비극적 인물이 소설가 김인숙을 통해 새로이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소설 <소현>은 문학 속에서 수차례 변주되었던 치욕적인 역사의 한 장을 들추고는 있지만, 누구도 깊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소현 세자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왕족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신분인 세자의 삶을 살았으나 끝내 왕이 되지 못한 인물,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패배자에 불과한 한 인물의 고독한 내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간 세월과 환국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조선 권력층들의 충의와 청나라를 향한 이중의 시선을 드러내는데 치중한다. 

조선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의 하나로 꼽히는 병란의 전쟁 당시의 처참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전쟁 당시의 처참함 보다는 전쟁 후 패전이 가져온 고난의 세월이 더욱 아프게 그려진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민간의 삶이 전후 10여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비장함이 소설 속에 담겨있다. 패전이 가져온 절망과 혼돈은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 깊은 패배의식을 심어 놓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 모든 것은 결국 소현 세자의 고독한 내면으로 집중된다. 조선을 향한 그리움과 임금을 향한 충의만으로 버텨왔던 굴욕의 시간은 권력층의 야욕과 사대를 강요하는 적국에 의해 무위로 돌려진다. '희생'이라는 말에는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큰 것을 취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소현 세자의 희생은 굴욕과 상처만이 남았고, 적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결국 위대한 희생조차 될 수 없었던 소현의 일생은 변방의 나약한 소국으로서 겪어야했던 서러움을 응축한 국치비가(國恥悲歌)인 것이다.  

소설 <소현>은 소현 세자의 고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다양한 주변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소설적 재미를 더하고 있다.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투전판을 들락거리는 역관과 무녀의 이야기까지 두루 포용한다. 이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서사 줄기로 수렴됨은 물론이다. 소현과 봉림, 인조, 도르곤 등의 역사적 실존 인물에 만상, 막금과 같은 가공의 인물들을 첨가해 고루한 사실의 나열에 그칠 수 있는 역사소설의 한계를 극복한다. 또한 부분부분 추리적 기법을 첨가해 긴장감을 불어 넣으며,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각 인물들의 충의와 가치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 한계의 재해석 작업은 사료적 한계와 관점의 편협함에 따른 비판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역사의 재해석이라는 대범한 작업은 또한 소설이라는 장르적 이점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소설 <소현>은 역사적 팩트를 전아한 문체와 섬세한 필치를 통해 소설적 재미를 최대한 살려 그려내고 있다. 역사적 팩트가 작가적 상상력으로 확장되는가하면, 인물의 내면에 관계되는 상상의 세계는 작가의 말에 이르러 다시 역사적 팩트로 수렴된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최종판단은 유보하고 있지만, 결국 소현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자신의 역사적 입장을 작품에 드러낸다. 이처럼 역사적 재해석에 따른 비판적 독서는 필수겠지만, 이 품격 있는 역사소설은 소설적 재미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독서 활동에 따른 정신적 노동을 상당히 완화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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