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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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책에 대해서는 누구나 기대하는 바가 있다. 책이라는 소재가 요구하는 지적 무게감이라든지 2차 독서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는 방대한 정보 같은 것들 말이다.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인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책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러한 기대들에 비교적 잘 부합하는 소설이다. 건조하지만 지적인 문체,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 독창적인 스토리를 두루 갖추고 있어 독서노동이라는 행위가 주는 고통이 독서 후 쾌감으로 적절히 환원될 만큼의 만족감을 준다.  

이 소설의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책사냥꾼'이라는 전무후무한 직업군을 창조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은 언뜻 첩보영화에서 주로 그려지는 추격자 등과 유사한 형태의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그 대상이 '책'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직업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직업 철학은 곧 '책'만이 가진 본질적인 속성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결국 이 소설의 성패는 책사냥꾼의 직업 윤리가 서사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녹아들어 갈등을 조장하고 해소해 나가는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가는 이 부분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책이라는 속성에 대한 해답을 조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납치당한 딸이나 도둑맞은 귀중품을 추적한다고 하면 그 동기에 대한 해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쫓는 대상이 책이라면 달라진다. 책은 단순히 장정을 입힌 종이뭉치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구전되는 우리 민담 중에 이야기를 주머니 속에 가두어 두고 풀어 놓지 않아 화를 당할 뻔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 민담은 이야기들이 자기들을 가두어 둔 사람을 해치려고 모의하는 부분에서 위기를 맞는다. 이야기를 독점하려는 사람의 이기심은 독점되지 않으려는 이야기의 속성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야기가 널리 공유되기를 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책이란 널리 읽히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의 책사냥꾼들과 그들의 의뢰인은 책의 유통보다 책의 독점에 관심이 많다. 책을 자본주의의 논리로 환산하려는 탐욕스러운 책사냥꾼 제롬이나 희귀본을 독점하는 데 일생을 바쳐온 미도당의 윤씨 노인과 같은 인물은 특히 책에 집착하는 뚜렷한 이유를 상실해 버린 인물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보여지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서 책 자체의 물질적 속성에만 집착하는 평면적인 악당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필요한 책 이외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나름의 직업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주인공 반디에게서도 책의 가치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오로지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의뢰인의 명을 받아 책사냥꾼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뿐이다.  이들이 찾고자 하는 희귀본의 가치는 종종 화폐로 환산되고, 그 책이 귀중한 이유에 책의 내용이 지니는 가치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설 속 인물들이 치열하게 찾아 헤매는 희귀본이 책이 아니라 오래된 고고학적 유물이라든가 값비싼 보석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인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영혼이라면 그 내용을 실어 나르는 종이인 책 자체는 육신이다.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의 모든 인물들은 책의 육신에만 유독 집착한다. 간절히 소통되고자 하는 영혼의 외침을 묵살하고 오로지 책의 육신에 가치를 매기고 그것을 독점하려 애쓴다. 결국 소설은 감추어진 책을 둘러싸고 인물들이 벌이는 게임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작가는 책들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하며 흥미로운 정보들을 서사의 곁가지에 풀어 놓는다. 책이라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산물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해도 될 만큼 책과 책을 둘러싼 모든 메커니즘을 포착한다. 그러나 책에 관한 이 다양한 이야기들은 서사의 흐름 속에 자연스레 안착하지는 못한다. 책에는 수많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대부분은 영혼을 거세당하고 그 개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게임의 도구로서 책일 뿐이다. 작가는 책들의 영혼이 성장하는 요람으로서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하려는 듯 보였으나, 의미를 상실하고만 책들의 향연은 결국 책들의 무덤을 연상시킨다. 읽힐 가능성이 없는 미도당의 장서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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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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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는 그간 은희경이 만들어온 어떤 작품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초기의 냉소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작품군들과도 다르고 이후의 섬세한 감수성과 서정성을 보여주는 작품들과도 또 다르다. 작가 스스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지평을 열기 시작하는 첫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기성작가가 보여주는 신작 치고는 상당히 젊은 감각을 뽐내고 있다. 주인공의 연령대만 어려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형식 등 모든 측면에서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패기가 느껴진다.  

작품의 모티프를 이루는 것은 한 힙합 가사이다. 17세 소년과 힙합의 조합이라니. 비행과 반항으로 가득 찬 미성숙한 존재의 터프한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소년을 위로해줘>는 발랄하고 통통 튈지언정 터프하지는 않다. 작가는 터프함이 제거된 자리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메워 넣는다. 17세 소년의 성장담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극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은희경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새의 선물>이 떠오른다. 그러나 <소년을 위로해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새의 선물>과 닮은 점이 그다지 없다. 서술자의 성별과 나이에서 차이가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차이는 그 서술방식에 있다. <새의 선물>의 12세 소녀 진희는 연령에 비해 성숙한 사고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어린 서술자는 어른들의 내밀한 생의 비밀까지도 포착해낸다. 그래서 이 책은 12세 소녀의 시선을 빌렀을 망정 어른들의 이야기로 읽히는 측면이 강하다. 반면 <소년을 위로해줘>는 17세 소년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서술은 17세 소년이 보고 느낄 법한 인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17세 소년의 표현의 미숙함으로 인해 삶의 내밀한 속살은 간단히 표면화되지 않는다. 감정 또한 지나치게 미화되지 않는다. 문장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작가는 서술에 그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고 소년의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때문에 등단 20년을 넘어선 여성 작가의 목소리는 작품 속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과분한 지성과 완벽함을 부여받지 못한 미성숙한 17세 소년은 그래서 더 진솔한 내면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인다. 구어체의 서술은 독자를 향한 설명이기보다 자기 내면의 중얼거림에 가깝다. 연결어미나 명사형 종결어미로 끝맺는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은 17세 소년의 내면의 자유로움을 표현한 방식으로 보인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서술의 파격성은 정통성을 걷어낸 독특한 방식의 음악인 힙합과도 일맥상통한다.  

싱글맘과 단 둘이 살아가는 17세 소년 연우는 이사와 전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삶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단숨에 마음을 잡아 끄는 힙합 음악 하나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독고태수와 이사 온 자신의 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학생 채영의 존재는 연우의 새로운 삶 속에 강하게 침투한다. 여전히 소녀같은 여린 심성을 지닌 어머니 '신민아씨'와 그녀의 7세 연하의 애인 '재욱형'은 연우 주변의 몇 안 되는 어른이지만, 소설에서는 어른으로서이기보다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소년의 곁에 존재한다.  

소년은 달린다. 미래를 위해 달리고, 사랑을 위해 달리고,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달린다. 기뻐서 달리고, 울 수 없어서 달린다. 달리기는 소년에게 하나의 의식이다. 성장하는 것처럼 답이 분명하지 않은 삶의 과정 속에서, 소년은 해답을 구하려 애쓰는 대신에 거리를 끊임 없이 활주한다. 정답을 내어 줄 누군가의 존재가 소년을 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통해 스스로를 향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스스로 성장한다. 소년의 아픈 성장에 든든한 조력자는 없다. 이 책 <소년을 위로해줘>에서는 아이들을 포함해 모든 존재가 조금씩은 불완전하게 그려지고 있다. 외아들 연우를 방목하다시피 키워 온 젊은 엄마는 스스로의 사랑에 대해 갈등하고 학부모로서의 정체감을 키워나가는 중으로 그 자신만의 문제에 깊이 빠져 있다. 엄마의 애인 '재욱형' 또한 용감한 이단아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의로 한탄하는 중이다. 결핍 없이 완전해 보이는 태수의 부모님과 채영의 부모님 까지 완벽함이라는 껍질 속에 감추어진 균열로 인해 고뇌한다.  

이처럼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이든 어른이든 할 것 없이 나름의 이적을 보이고 있지만, 대체로 미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상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행동이나 대사에도 멋부린 흔적은 없다. 그들 중 누구도 온전히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의 주체와 조력자 간 경계는 불분명하다. 강연우를 중심으로 그와의 영향관계에 있는 모든 이들에 조력자의 역할을 떠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조력자의 역할은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신민아씨'나 '재욱형'이 무심코 던진 조언들의 의미를 되새겨봄직함도 하지만 이들 또한 어른으로서도 완성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연우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년은 스스로 자라난다. 온 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배운다. 우정이라든지 사랑 같은 관계의 완전함을 위해 달리기와 힙합 같은 열정을 쏟아 넣을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 투신한다. 책에는 '힙합 따위'를 듣는다고 쏘아붙이는 어른도, 공부보다 '연애질'에 목을 맨다고 질책하는 어른도 없다. 현 교육체제에서 고등학생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입시와 성적 따위의 암울한 그림자가 걷히고 소년의 세계는 다소 낭만적인 색채를 덧입는다. 소설 속에는 성장에 반드시 수반되는 조력자가 제거된 대신, 스스로의 성장을 훼방놓는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기제가 최소화되어 있다. 스스로 뛰어들 수 있는 모든 일에 투신하고 '그야말로 세계는 이렇게 넓어지는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 소년의 성장이 시작되는 시점일 것이다. 급작스러운 진리나 교훈에 대한 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남과 이별과 슬픔 따위의 감정의 소비만으로도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 성장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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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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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히요의 말년과 트루히요의 암살을 둘러싼 소설. 그러나 정치적이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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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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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에 자신의 정치성향이 아니라 문학작품 때문에 수상자로 선정되었기를 바란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문학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공헌해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의 자족성을 내세우는 순수문학과 오랜 갈등을 겪어 왔지만, 순수와 참여 두 개의 축이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 아닌 이상 각각의 주장은 상호배타적일 필요가 없다. 작가는 사회에 대한 일정한 기여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쓸 수 있으며, 사회는 소재 차원에서 훌륭한 문학작품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 요사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문학과 정치성의 긴밀성을 역설적으로 밝힌 셈인데, <염소의 축제>는 소재로서의 사회 참여와 표현으로서의 유려한 완결성을 절묘하게 아우르며 그의 문학 세계를 훌륭히 집대성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구조의 세밀함에 있어서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지만 이야기의 본질에 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지구 속 어딘가에서 행해져 왔고 행해지고 있는 인류의 뿌리 깊은 악습인 독재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30여년 동안 군림하며 도미니카의 근대사를 폭력과 억압으로 물들여 놓은 독재자 트루히요를 되살려 낸다. 그러나 작가는 위대한 독재자의 업적을 일대기식으로 재구성한다거나 억압의 시대를 견디고 투쟁하는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옹호를 내비치는 식의 편한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점으로 독재자의 삶을 재구성함과 동시에 그 시선을 개인의 삶으로 돌려 독재의 과거와 미래를 뭉뚱그려 보여준다. 소설은 독재자의 말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며, 독재자가 한 개인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침투해 가는지를 긴 호흡으로 그려내고 있다.  

트루히요라는 신화적 인물을 중심으로 세 개의 시공간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재가 종식된 고향에 35년 만에 발을 들여 놓는 여인 우라니아의 시선은 다음 장에서 절대 권력으로 모든 이의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말년으로 옮겨 간다. 뒤이어 이야기는 네 명의 암살자들이 거사를 도모하는 역사적인 날 밤으로 이동한다. 이 세 개의 장면은 트루히요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이야기인 것처럼 동떨어져 있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사건과 사건이 맞물려가며 교묘하게 하나의 서사 속으로 수렴된다.  

서사에 긴장감을 불어 넣어 주는 핵심적인 장면은 네 명의 암살자들이 지키는 운명의 밤으로부터 시작된다. 트루히요의 출현을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암살자들은 각자의 삶에 침투한 트루히요라는 위대한 권력자의 모습을 회상한다. 트루히요를 둘러싼 개개인의 분노는 인물에서 인물로 옮겨가면서 트루히요가 행한 악행이 개개인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실종, 살해, 고문과 같은 비인도적인 보복 앞에서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은 치욕으로 일관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들 모두는 독재정권의 혜택을 충분히 입은 트루히요의 측근인 것으로 밝혀진다. 반정부 세력 뿐 아니라 트루히요의 신봉자들에게조차 해당되는 은밀한 정신적인 가학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의 면모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연인의 동생을 죽이게 한다든가, 측근들의 부인들을 공공연하게 범한다든가, 가족의 부당한 죽음이나 불행 앞에 분노조차 드러내 보일 수 없도록 심리적인 고통을 가하는 지독한 새디스트로 그려지는 이 독재자는 한편으로 뛰어난 정치 감각과 장악력으로 자신만의 신화를 완성한다.  

소설의 중반에 플래시백이 멈추며 트루히요의 출현이 임박해옴을 알리며 긴장이 고조된다. 트루히요라는 신화가 종식되는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트루히요가 살해된 후에 펼쳐진다. 소설의 압권은 트루히요가 암살당하는 장면이라기 보다 푸포 로만 장군의 시선으로 그날 밤의 사건을 되새겨 보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트루히요 암살 작전이 성공 했음을 확신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계획한 쿠데타를 실행하지 못하는 로만 장군의 모습은 답답하면서도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순간의 망설임으로 인해 대사를 그르치는 과정을, 잡아내기 힘든 작은 동작이나 심리 상태를 통해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작가는 사소한 하나의 결정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떤 악의적인 계획이 없었음에도 마침내는 트루히요 측과 반란군 측의 비난을 동시에 떠안은 채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장군의 모습에서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절대적인 힘의 원천에 다시금 주목하게 된다. 푸포 로만 장군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덤을 파게 했던 그 의문의 힘은 두려움이다. 트루히요 생전에 로만 장군을 지배했던 두려움은 트루히요가 죽은 뒤에도 죽지 않은 채로 그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 끈질긴 두려움이 훗날 훨씬 더 큰 공포를 가져올 때야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게 될 정도로, 그 두려움은 장군의 삶 속에 너무 깊숙이 침투해 있다.  

푸포 로만 장군의 일련의 행적들은 두려움이야말로 오랜 독재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임을 말해준다. 군중을 굴종하게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독재자와 그의 추종자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독재 체제를 수용하는 대다수의 국민들과 그들이 갖는 두려움이 그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말년의 트루히요는 요실금으로 바지를 적시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정력의 쇠퇴에 울부짖는 쇠약해진 늙은이에 지나지 않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신화, 즉 트루히요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죽은 직후에도 유령처럼 살아 남아 사람들을 굴복하게 만든다. 독재자가 죽어도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권력의 메카니즘이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연민이 향하는 곳이 처절한 고문 속에서 죽어나간 암살자들보다 조용히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여성 우라니아라는 점이다. 트루히요로 대표되는 폭력성과 야만성의 극단에는 섬세하고 연약한 여성이 존재한다. 우라니아의 삶은 한 독재자가 개인의 인생에 미친 치명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독재자와 권력의 관계가 염소와 정력의 관계로 자연스레 치환될 수 있다면, 권력의 발밑에 신음하는 민중들이 존재하듯이 정력의 극단에는 그 힘에 의해 짓밟히는 연약한 여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원치 않는 희생을 감내한 대가로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라니아의 모습을 통해 권력에 짓밟히는 가장 나약한 존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루히요의 유령은 체제가 발빠르게 변화해 가는 순간에도 가장 나약한 존재에게 붙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이라고는 하지만 온전히 정치소설만 읽힌다면 보편적인 공감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염소의 축제>는 지구상의 특정한 지역과 시대를 겨냥하고 있지만, 시공을 초월해 반복되어 온 독재 정권의 보편적 속성을 세밀하게 파헤치고 있어 범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낸다. 뿐만 아니라 독재라는 반인륜적 행태가 초래하는 본성의 억압이라는 근원적 문제 또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 인간 삶의 총체적인 문제를 포괄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바람대로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코 정치색에 기대고 있지 않음을 <염소의 축제>는 분명히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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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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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팩트를 걷어낸 김훈의 소설은 처음이다. 단 몇 편의 역사소설만으로 한 작가를 특징지워버린다는 것은 그 소설들이 유독 깊을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마법같은 문장들은 오직 전아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배경이 덧입혀졌을 때에만 살아숨쉬는 것이라 멋대로 생각해버린 탓도 크다. 그러나 잊혀진 유물을 복원하는 고고학자의 섬세한 손길처럼 유구한 세월 속에 잠들어 버린 인물들을 그 숨결조차 느낄만큼 가까운 곳으로 불러 들이는 힘이 비단 역사소설 속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님을 <내 젊은 날의 숲>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역사라는 팩트에 가두어져 있을 때와 달리 사유의 폭은 넓어지고, 감성의 흐름은 더욱 유연해지고 있음을 소설은 온 몸으로 증명한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인연이 남긴 흔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유폐시킨 질긴 인연의 흔적을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여로형 구조에 맞추어 추적하는 이 소설은 그러나 모호한 이 사유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어 주지는 않는다. 혈관을 흐르는 강력한 인연의 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인연과의 강력한 접촉으로 확인되는 성질의 것이련만, 작가는 '남방 한계선에 잇닿은 민간인 통제 구역 안에 있는 수목원'이라는 외따로 존재하는 듯한 극한의 공간으로 인물을 몰아 넣으며 철저한 고립 속에서 인연을 탐구한다. 민통선 너머 자등령에 위치한 숲은 세상과는 고립된 곳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고요한 상태로 그 곳에 존재한다. 한국 전쟁 당시의 격전지였던 치열함도 세월의 더께 아래로 감추어져 피아를 구별할 수 없는 백골의 형태로만 존재하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다가 들르게 되는 한적한 수목원은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민간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그 곳으로 주인공은 떠나온다.  

인물의 떠나옴이 도피의 형태를 띠는 것은 홀로 고요한 그 장소의 성질 때문이다. 그러나 세밀화가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은 곧 숲이라는 전체에 가려져 있던 자연의 내밀한 속살을 세밀하게 들추어내기 시작한다. 햇살과 잎사귀가 끊임없이 교감하고, 부지런한 새가 분주하게 지저귀고, 빛의 많고 적음에 따라 숱한 색을 만들어 내는 숲의 풍경을 본다. 계절에 따라 분주하게 변해가는 숲의 모습은 인물의 감추어진 내면을 일깨운다. 숲이라는 전체가 이루어내는 항상성의 이면이 시시각각 변화하듯 가족의 연을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주인공의 내면도 그리 간단치가 않다. 가족의 짐을 떳떳하지 않은 방식으로 짊어지고자 했던 아버지로부터, 그런 아버지의 마음의 짐을 함께 지기를 거부하는 어머니로부터 떠나온 주인공은 외따로 떨어진 그 곳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은 극사실화를 그리는 일을 업으로 하지만 정작 그 내면은 모호한 인물에게 있어 장구한 세월과도 잇닿아 있는 끈덕진 '종족의 운명'이 몇 차례의 죽음과 이별을 겪은 후에야 분명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인공이 이 마을로 옮겨 오기 직전에 자살했다는 이옥영의 잔상은 외지인으로서 이질적으로 마을에 섞여 있던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상기된다. 그녀가 외지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또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이 비극적인 운명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숲 해설사 이나모의 죽음은 그를 먼발치에서 한번 보았다는 인연만으로도 이옥영의 죽음보다 더욱 밀접하게 주인공의 운명 안에 침투한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자의 죽음을 문상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인연의 본질에 이전보다 좀 더 다가선 모습이다. 의도적인 동일시나 우연에 가까운 인연을 넘어서 마침내 찾아온 아버지의 최후 앞에서 주인공은 의외로 담담하다. 숲의 생멸에서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을 체감한 덕분으로, 아버지의 유골을 산골하여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주인공의 손길은 시종 담담하다.   

도피는 도피해 온 모든 것에 대한 긍정으로 치유된다. 가족을 타자로 인식하고 거리감을 유지하려던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 뒤 어머니의 통한의 눈물을 보며 그 역사를 따라 흘려 내려온 장구한 세월과 핏줄의 끈덕짐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된다. 아버지의 부정한 돈들이 자신의 생애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왔듯, 핏줄의 끈덕진 연이 그 자신의 삶을 깊숙한 곳으로부터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은 돌아감에 대한 망설임을 없애준다. 조부의 삶과 끈덕진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절름발이 말 '좆내논'이 아버지의 삶 주위를 떠돈다는 어머니의 하소연처럼 그 자신 또한 조부와 좆내논과 아버지의 삶 언저리를 떠돌 수밖에 없다는 혈연에 대한 강한 자각이 오히려 주인공을 자유롭게 해 준다. 숲을 떠나는 주인공과 숲에 남아 새들의 먹이가 된 아버지의 상반된 운명이란 것도 혈연의 끈질김을 통해 영원한 이별의 속성을 묻어버린다.  

감정을 분출하고 한없이 부대껴도 좋은 나이인 20대 여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그럼에도 사치스럽게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을 객관화해 자연물에 투사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극사실화처럼 세밀하게 파헤치기 보다 숲과 자연에 대한 상징을 통해 그려낸다. 화자의 감정은 사시사철 변해가는 숲의 모습에, 죽거나 이별하거나 고뇌하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이 그리는 세밀화의 모습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감정의 억누름은 자칫 현학적 서술로 빠져들 우려가 있지만 김훈의 소설은 현학적이지 않다. 3인칭으로 지칭되는 철저히 객관화된 타자에 대해 시종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서술자의 태도가 감정의 낭비를 방지한다. 김훈만이 지닐 수 있는 사유와 즉물적인 감각 사이의 균형감각이다. 본격적인 연애담은 진행되지도 않지만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애틋하고, 절절한 가족 신파 없이도 더 애끓는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감정의 과잉도 서사의 과잉도 없지만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김훈의 문장은 구체적인 감각을 활용해서 느낄 수 있는 선명한 빛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평소에는 인지되지 않는 또 다른 감각들이 세밀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의미의 적확한 전달, 사유의 치밀한 묘사, 이미지의 생생한 재현, 도식적인 상징에 매몰되지 않는 영민함까지 두루 갖춘 잘 정제된 문장이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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