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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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인생의 책 파이이야기. 그 감동의 반만 주어도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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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의 레시피 키친앤소울 시리즈 Kitchen & Soul series 1
이부키 유키 지음, 김윤수 옮김 / 예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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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하나의 상실에서 시작된다.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언제나 큰 법이지만, 특히 어머니(혹은 아내)란 존재의 부재는 유독 크다. 그러니 가슴 치는 풍수지탄의 사모곡이 도처에 난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온통 가정을 향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일찍이 깨닫지 못했다는 뒤늦은 후회의 심정은 시대와 공간이 바뀌어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49일의 레시피>는 이러한 상실과 뒤늦은 후회의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엄마(혹은 아내)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소설은 뜻밖에도 밝다. 가족의 상실에 따른 비애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게 하는 뜻밖의 이벤트가 시작되며 분위기는 반전된다. 소설은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와 후회에 집중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어 죽음의 문제가 천착하는 멜랑꼴리를 가볍게 비껴간다. 

71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 오토미에 대한 그리움과 쓰라린 후회로 실의에 빠진 아쓰타에게 한 방문객이 찾아든다. 그와 함께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결심한 딸 유리코도 집을 찾아온다. 이모토라고 하는 정체 모를 노랑머리의 방문객은 오토미의 생전 삶을 추억하게 하는 실마리를 던져 준다. 죽은 자의 영혼이 이승에 머문다는 49일 동안 남겨진 가족과 이상한 방문객은 오토미의 49재를 위한 큰 이벤트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졸지에 쓸쓸히 남겨진 아쓰타와 유리코의 생활은 이내 분주해지고 이들은 잃었던 웃음을 되찾기 시작한다. 가족의 빈자리가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는 과정은 억지스럽지 않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 아이와 말이 서툰 남미 출신의 젊은 남자는 어느 면에서 보나 아쓰타와 유리코와는 어울리기 힘든 모습이지만 이들의 느닷없는 출현은 텅 빈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상실의 아픔이 마냥 고독하게만 그려지지 않는 까닭은 빈자리를 채워주는 이들 방문객의 밝음과 엉뚱함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오토미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가 남긴 그림 레시피는 그 삶의 곳곳을 비추어 준다. 레시피는 자신을 위해 쓰여지는 법이 없다.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해 쓰여지는 레시피는 그 자체로 읽는 사람을 위한 헌신과 정성이 담겨져 있다. 음식 뿐 아니라 생활의 다양한 지혜를 아우르는 오토미의 레시피는 남겨진 가족에게 따뜻한 추억과 충만한 가족애를 선물해준다. 자신이 요리한 음식의 맛을 처음 인정받았을 때의 들뜸이 연상되는 자랑스러운 레시피 하나하나는 슬픔을 치유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 된다.  

49재 대연회를 끝으로 아쓰타는 다시 홀로 남게 된다. 소설의 처음과 같은 상실이 또 한번 반복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쓰타의 태도는 처음과 달라져 있다.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에 대한 기대야말로 방문객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보다도 더욱 기적의 본질에 가깝다. 오토미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은 치유의 처방전이야말로 49일 동안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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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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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서와 같은 표지로 나와서 더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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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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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의 성패는 작가가 창조해 낸 인물에 얼마만큼 동조할 수 있는가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그 동조는 동정적인 공감의 형태로도, 냉소적인 비판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인물에 대한 입장이 분명한 입장은 그 인물의 운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 소설은 상당한 흡인력을 획득하게 된다. 존 케니디 툴의 <바보들의 결탁>과 같이 인물의 성격화에 특히 공을 들인 소설은 인물에 대한 입장 정하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소설에는 여느 소설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육체를 지닌 반사회적 동물-작가 자신도 '앞발'이라는 용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이 등장한다.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평가하자면 이그네이셔스라 불리는 이 반사회적 인물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의 무자비함에 깊이 실망하여 자발적 은둔을 선택한 냉소적인 지식인이다. 그러나 이그네이셔스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그려진다. 실상은 자본과 노동의 가치를 우습게 알며 무위도식하는 삶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한량이며 중세 암흑기를 이상적인 사회상으로 생각하는 현실성 없는 궤변론자이다. 엉터리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고란 사고는 있는대로 치고 다니는 안티 히어로를 자처하는 이 인물에게 반감을 갖지 않기란 힘들다. 그러나 형편없는 이 인물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의 시각을 드러내기에 작품 전반을 싸고 도는 짙은 페이소스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그네이셔스 뿐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입장 정하기가 곤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소설에는 숱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사회 부적응자이며 사회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과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권위가 떨어진 경찰,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흑인, 약아빠진 주점의 여주인, 엉터리 프로이드적 신념을 가진 자본가의 아내 등. 이들 대부분은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비주류의 삶 속에 내던져져 있지만 좌절이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락한 사회에 대한 부당함을 목놓아 외치고 자신이야 말로 가장 고결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거의 전부가 자아도취병에 걸려 자기 목소리만 내던지고 있는 꼴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인물간의 대화는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처럼 계속해서 핀트가 어긋난다.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사고뭉치 이그네이셔스와 현실적인 낭만주의자 라일라 부인, 상대방은 너무나 원치 않는 일을 호의랍시고 베풀며 자기만족에 빠지는 리바이 부인, 이해관계가 얽혀 한 지붕 아래서 일하면서도 약점 잡을 구실만 서로 엿보는 존슨과 레이나까지. <바보들의 결탁>은 다양한 인물군상들이 한 무대 위에서 펼치는 동상이몽의 향연이다.  

이 소설 속에서 실속 있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고는 없다. 모든 인물들의 행위나 존재가치는 공중에 붕 뜬 채 공허하게 떠돌고 있다. 작가는 인물들의 희화화를 통해 사회에 대한 풍자를 시도한다. 낙오된 지식인 이그네이셔스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향해 호소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 현학으로 가득찬 어설픈 권위를 흉내내는 글쓰기에는 젠체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조소가 묻어 난다. 무모한 행위를 수습하기 위한 궤변들은 말의 타락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타락한 세상을 한탄하지만 그 자신도 타락한 부적응자에 지나지 않는 이 모든 인물들은 우스꽝스럽고 비상식적인 행위를 통해 그들의 오류를 속속들이 드러낸다.  

그러나 한편, 대체로 사회적 약자이거나 실패자로 드러나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돌적이고 무대포격인 인물들의 행위가 냉철한 이성을 통해 보여지기 보다, 피식거리는 유머에 의해 묘사되는 탓이다. 정체 모를 거대 패러다임에 맞선 한 개인의 작은 부르짖음은 체제를 바꾸어 놓기에는 한없이 작은 움직임이기에 더욱 공허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부조리한 행위를 벌이는 인물들과 그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체제 양자에 대한 비판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공감과 비판 사이에서 인물들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정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장면의 효과적인 활용과 각 장면들의 절묘하고 유기적인 결합 등 이 소설에 활용된 뛰어난 기법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독창적인 캐릭터 창출의 효과이겠지만, 캐릭터에 대한 지나친 과장은 작품에 감도는 이질성을 상쇄시키기에는 오히려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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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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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운명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 아니다. 별수 없이 개인의 운명에 침투해 들어가는 역사의 크나큰 횡포(?)는 숱한 문학 작품 속에서 반복되어 그려져 왔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저항, 좌절, 냉소, 자포자기 등 각기 다른 형태로 역사의 횡포와 맞서 왔고, 그 누구도 그 영향을 비켜가지는 못 한다. 개인의 운명에 장난을 치는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전쟁과 개인의 관계만큼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것은 없다. 일방적으로 닥쳐 오는 폭력과 같은 휘몰아침에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휩쓸려 가는 부조리 속에서 개인의 운명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르 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은 전쟁이라는 환경 속에 내던져진 한 개인의 운명을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개인의 운명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시시각각 변화해 가는 개인의 운명 속에 역사의 횡포를 함의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문체는 다분히 회화적이다. 전쟁이나 정치와는 무관하게 동화 같은 연보라색 집을 꿈꾸고 완벽한 우정을 갈망하는 것이 전부인 한 여인의 삶에 투사된 전쟁의 모습은 치열하기 보다 시리고 또 아리다. 소설에는 전시 유럽의 암울한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무수한 명사구의 나열로 치열한 전시상황을 대신하고 명단이나 법령 따위의 의미 없는 인용을 활용하면서 현상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는 역사적 리얼리티에서 한발짝 물러나 에텔의 삶에 집중한다. 에텔의 유년기에서부터 강인한 숙녀로 성장하는 동안 안온했던 삶을 뒤흔들어 놓았던 역사의 횡포를 포착해나갈 뿐이다. '파리에 떠도는 침묵'이라는 한 구절 속에 험난해질 파리의 정세와 에텔의 운명을 함축해 놓고 격정적으로 휘몰아칠 앞날을 예비한다.  

인물의 변화해 가는 운명이 소설을 지탱하는만큼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은 다르다. 벨 에포크 시대에 평화로운 파리의 한 저택에서 일상을 지내는 브루주아 소녀 에텔의 일상은 평온하다 못해 나른하다. 의미 없는 수다, 긴박감이라고는 없는 정치에 대한 토론, 권태를 상쇄시키기 위한 작은 음악회. 그러나 이 풍요로움조차 에텔에게는 충만한 행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무렵 에텔은 연보라색 집에 대한 환상과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치열한 생을 겪고 있는 제니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통해 나른한 권태로 인한 허기를 달랜다. 그러나 경제적인 몰락과 가정의 붕괴를 차례차례 겪어가는 동안 유년의 추억은 하나 둘 사라진다. 환경은 꽃밭의 꽃처럼 길들어져 온 에텔을 강인하게 훈련시켜 왔고, 아버지의 오랜 연인으로 자신의 유년을 불행하게 했던 늙은 여가수 모드에게조차 동정을 가질 정도로 강인한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강인해진 에텔의 이면은 사라진 유년에 대한 갈구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연보라색 집의 형상과 제니아에게 품어온 동경, 낮잠처럼 나른한 살롱의 오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연보라색 집이 있어야 할 빈 집터는 '흉물스러운 장벽'같은 시멘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완벽한 여성상을 꿈꾸게 해 주었던 아름다운 유년의 친구는 새 의류 사업에 골몰하는 속물스러운 파리지앵이 되어 있다. 결혼과 이주로 새로운 삶을 꾸리게 된 에텔에게 유년의 결핍은 또 다른 허기로 다가온다.  

<허기의 간주곡>에서 나타나는 허기는 단순한 결핍의 차원을 넘어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모두 포괄한다. 평화로운 유년에서 벗어나 졸지에 격렬한 삶의 현장으로 내던져진 에텔은 단순한 역사의 피해자가 아니다. 에텔은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어 허기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결국 순간순간 그녀 앞에 놓여진 허기는 그녀 생의 다음 순간으로 망설임 없이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 된다. 마치 다음 악곡을 예비하는 간주곡 처럼. 에텔은 허기의 순간들을 견디고 '침묵'의 공간이던 파리로 되돌아온다. 그 곳에서 유년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백조의 산책길'이 그들이 떠나온 모리셔스 섬과 같은 이름임을 깨닫게 된다. 떠남과 떠나 온 곳으로의 되돌아옴, 이러한 공간의 순환은 그 어떤 곳도 환멸의 공간일 수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이 뿌리내린 모든 공간에 대한 긍정, 나아가 삶을 송두리째 휘몰아치는 모든 허기에 대한 긍정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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