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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 홍콩, 영화처럼 여행하기
주성철 지음 / 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호주의 농장에서 만난 한 홍콩 여자는 홍콩의 한 잡지사에서 홍콩 시내 곳곳의 레스토랑이나 샵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다가 환멸을 느껴 사표를 쓰고 호주로 왔다고 했다. 그녀가 밝힌 이유는 이랬다. "Hong Kong is too small." 기사가 몇 차례 돌고 나니 더 이상 소개할 곳도 쓸 기사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홍콩을 방문했을 때 그 말이 정확히 이해됐다. 몇 군데 유명하다는 명소를 돌고 나니 북적대는 인파에 휩쓸려 현란한 간판들 사이를 한없이 걷는 것 말고는 할 것이 딱히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쇼핑 일색인 홍콩여행 정보들에 치여 관심도 없는 쇼핑 스팟을 의무적으로 훑고 돌아다녔으니 홍콩이 별볼일 없게 여겨진 것도 당연하다.
그 와중에도 센트럴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그 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콩영화 '중경삼림' 속 많은 장면들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맨션의 창문과 지척의 거리에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중경삼림' 속 연인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무심히 관광객들과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에스컬레이터는 이 영화로 인해 수많은 이야기를 담은 추억의 장소로 돌변한다. 영화기자 출신의 작가 주성철의 여행 에세이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얽힌 내 기억처럼 홍콩 곳곳에 숨겨진 수많은 장소들과 그 곳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침사추이와 센트럴은 물론이고 사루통, 란타우섬, 펭차우 등 홍콩 외곽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까지 아우르는 이 책을 읽다 보면 호주에서 만났던 홍콩 여자에게 홍콩은 결코 작지 않다고 되려 알려주어야 할 것만 같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홍콩영화가 우리나라 영화 시장을 압도했던 90년대에 그 영화들을 통해 알게 우리는 모르게 홍콩을 마음껏 호흡했기 때문일 터다. '영웅본색', '아비정전', '중경삼림', '천장지구' 등 영화를 못 본 사람들조차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영화의 장면장면이 홍콩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작가의 손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작가는 수많은 홍콩영화들을 추억하면서 영화 속 장소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홍콩의 각지로 독자를 이끈다. 장국영이 에프터눈티를 마시기 위해 즐겨 찾았다는 오리엔탈 호텔의 클리퍼 라운지, 장애가가 <심동>에서 시나리오를 구상하던 스텐튼 바, <아비정전>에서 유덕화가 장만옥과 키스하고 이별했던 캐슬 로드의 전화박스, <타락천사>에서 여명과 막문위가 처음 만난 맥도날드 등 의미없이 스쳐가기 쉬운 장소들이 제각각 이야기를 품은 향수어린 장소가 된다.
책은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지역들과 영화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장국영에 대한 추억, 홍콩 영화에서 양조위 유덕화가 차지하는 위상, 여행 중 우연치 않게 만났던 관지림, 오군여, 진가신에 대한 에피소드 등 홍콩 영화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구룡공원의 야외 수영장이나 사틴 만불사 등 가이드북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숨겨진 명소들을 찾아내 소개해주기도 하고 이미 사라진 구룡 성채나 카이탁 공항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소개되는 장소들에는 간략한 지도와 추천여정이 짤막하게 덧붙어 있어 여행가이드북으로도 손색이 없다.
같은 장소라도 장소에 담긴 이야기에 따라 그 인상이 달라진다. 셩완의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 곳이 '유성어'에서 장국영이 거닐었던 거리 부근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때의 기억이 고생스럽기보다 두고두고 이야기할 추억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홍콩 여행에 생생한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여행의 추억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 또한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극장가를 점령하기 전 비디오 대여점을 중심으로 상상 못할 인기를 누렸던 홍콩영화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홍콩영화와 홍콩여행의 적절한 화학적 결합은 홍콩을 추억하는 사람에게도 현재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풍부한 영감을 자극하며 설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