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Paperback)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원서
개브리얼 제빈 /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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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든 게임이든 그 무엇이든, 요즘은 어디든 '인생의 축소판'이 아닌 것이 없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게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는 게임에 대한 소설이고, 게임의 세계는 정확히 인생을 은유한다. 그래서 게임과 삶이 교차되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어내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이 소설은 탁월하게 그려낸다.

이 책의 인물들은 인종적으로, 성별적으로, 신체적으로, 기타 사회문화적 조건들로 인해 저마다의 결핍을 가진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게임 속 세계는 현실의 어려움을 뛰어넘는 세계다. 물론 게임 속의 세계는 현실보다도 잔혹하고 어떤 면에서는 삶의 고통보다 더 나을 것 없지만, 자기 것이 아닌 몸으로 자기 것이 아닌 고통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또한 매력적인 세계다. 그래서 인물들은 게임 속에 삶을 일치시킨다기보다 더 나은 버전의 삶, 또한 현실의 한계를 넘기 위한 수단으로 게임에 매료된다.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은 게임 속의 삶은 실제 삶보다 더 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인물들이 현실 세계의 불공평함을 암시하는 이름 "Unfair Game"이라는 회사를 만들어내도록 하고, 인물들은 Unfair Game 안에서 게임을 만들며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때로는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때로는 삶을 반영하는 매체로 '게임'이 스토리에 녹아드는 방식이 매우 자연스럽다. 인생의 각 단계마다 게임에서 해답을 찾는가 하면, 현실에서의 깨달음을 게임 속 세계에 투사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삶의 부침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여 게임으로 재현하여 그 안에 인생을 녹여낸다. 소설은 이러한 세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핍진하게 반영하고 게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재현하며 하나의 기업물을 보는 것과 같은 박진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기술적 요소와 그것을 둘러싼 비즈니스에 매몰되기보다 꾸준히 인간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 이 소설을 더 뛰어나게 만든다. 소설 속 주인공인 Sadie나 Sam은 저마다 내면의 결핍이 있고, 그로 인한 성격적인 결함도 두드러진다. 작가는 이들의 결핍과 그로 인한 갈등을 집요할 정도로 답답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밀도있게 묘사하며 연민을 갖게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도록 기어이 설득시킨다. 관계의 서사가 촘촘하게 묘사 되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현실의 한계에 부딪치고 좌절하지만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이 반복된다. 찬란한 청춘의 열정도,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도 언젠가는 무뎌지지만,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처럼 삶도 어떻게든 계속 되리라는 믿음으로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There are, he determines, infinite ways his mother doesn't did that night and only one way she does. (p.172)

The game is only over if you stop playing. There is always one more life. Even the most brutal death isn't final.(p.301)

"What's the game?" marx said. "It's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It's possibility of infinite rebirth, infinite redemption. The idea that if you keep playing, you could win. No loss is permenent, because nothing is permanent, ever."(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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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셔츠
존 스칼지 지음, 이원경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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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드셔츠'는 SF활극의 클리셰로 사용되는 용어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주연급 인물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는 하급 대원들이 대부분 빨간 제복을 입고 나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존 스칼지의 <레드셔츠>는 제목에서 보듯이 이 클리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앞으로 곧장 달려나가는 소설이 아니다. 읽을수록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선회한다. 처음에는 SF액션 활극인가 싶다가 다음 순간 무능한 상급자들에 대한 풍자로 이어진다. SF의 장르적 문법에 대한 거침없는 조롱이 펼쳐지고 숱한 클리셰처럼 인물들이 희생된다.

소설의 인물들은 <스타트렉>의 세계관을 공유한 듯한 소설 속 세계에 살고 있다. 프롤로그같은 첫 장에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눈깜짝할 사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다음 장에서 '인트레피드호'에 탑승하게 된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지고, 함선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며 <스타트렉>의 분위기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스타트렉>이 보여주는 거대란 우주적 세계관을 부각시키는 대신 사건 사고에 휩쓸려가는 인물들의 내면이 두드러진다. 이 인물들은 마치 프로그래밍된 '프리시티'에 살고 있는 NPC처럼 자유의지와 상관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 미지의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음을 이들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레드셔츠>는 '인트레피드호의 연대기'라는 실제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자아의지가 박탈된 무력한 세계에 반기를 들어 현실세계의 각본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이야기' 속의 인물이 그 '이야기'의 메커니즘을 알게되는 설정은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허문다. '멀티버스'가 동일한 좌표에 놓인 여러 우주를 뜻한다면, <레드셔츠>의 세계관은 서로 다른 우주이면서 그 세계의 차원이 다르다. 멀티버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층의 텍스트가 상화작용하는 메타픽션이 된다.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넘나들며 서로의 세계에 상호영향을 미친다는 구성은 SF계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실험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스타트렉>이라는 텍스트가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적 레퍼런스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이 한국 독자에게 대중적으로 호소하기는 힘든 점은 아쉬우나, 실험적인 구성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은 감탄할 만하다. '우주의 신'이 '일개 방송작가'라는 깨달음은 작품 안의 인물들이 느끼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설정이지만, 이 세계의 신은 과연 방송 작가보다 나은 존재인가 하는 현실세계의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소설은 각본 안의 세계, 각본과 현실이 상호작용하는 세계, 현실의 세계를 차례대로 보여주며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존 스칼지식의 쉽지만 날카로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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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양귀자 지음 / 쓰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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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읽자마자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책이 있다. 거대 서사가 사라진 90년대, 눈 앞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책이 그런 책 중 하나다. 양귀자의 소설들이 대체로 그렇다. 서사가 풍성하면서도 글맛이 살아 있는 그의 소설들은 애초에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상기시켜준다.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말은 보통 사건의 전개가 빠르고 읽기에 쉽고 가볍다는 말로 폄하되는데, 어떤 소설은 주제의 깊이와 무게를 확보하고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가독성을 가진다. 양귀자의 <희망>도 그런 책이다. 화려한 수사로 가득 찬 문체는 아니지만 예리하게 파고드는 사유가 있어 글을 읽는 맛이 있다. 그래서 빨리 읽히지만 오히려 빨리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소설은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여관'을 배경으로 떠돌이들의 삶을 그린다. '떠남'을 전제로 이 곳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 인물들은 각자의 사연과 회한을 가지고 방황한다. 이 여관에 붙박여 살아가는 가족들조차 머무는 사람들은 아니다. 삼수생의 고단하고 의미없는 삶으로부터 떠나고 싶어하는 주인공에서부터, 가난과 보잘것 없는 소시민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누나, 민주주의를 억누르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세상을 바꾸려는 형, 미국으로 떠난 누이의 초대를 30년 째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까지 인물들은 한결같이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떠돈다. 이들의 삶은 '나성여관' 막내 아들 진우연의 시선으로 관찰되고 평가된다.

<희망>은 암울한 근현대를 관통해온 중년의 삶과 미처 청산되지 못한 억압과 폭력의 역사, 산업화 시대 한 가운데서 고인물처럼 머물러 있는 가족의 애환까지 그 시대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려준다. 떠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기구한 사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황량한 서울 변두리의 삶과 어우러져서 시대의 우울한 정조를 형성하고 연민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어둡지 않다. 여관 손님인 찌르레기 아저씨나 여관 손님이 두고 간 아이 민구는 산산이 깨어진 가족을 대신하는 유사가족으로 주인공에게 위안을 준다. 가진 것 없는 집안의 막내이자 뜻이 없는 대학 입시 시험을 치러야하는 청춘으로서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이 사람들과의 관계맺기를 통해 훌쩍 자라나고 삶의 길을 발견하는 성장 서사는 뻔하지만 감동이 있다.

집요하고 빈틈없는 일인칭 화자의 내면 묘사, 그가 바라보는 주변인들에 대한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시니컬한 논평이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대의 배경은 바뀌어도 삶은 남는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흘러간 시대지만 보편적인 공감을 획득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 가진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희망>은 흔한 제목이지만 '희망'이란 사실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이 갖는 의미는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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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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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오토픽션 세계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 후속작이다. 오토픽션은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사에 사실성을 강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오토픽션이 아닌 명백한 픽션의 형태를 취하면서 작가는 인물의 입을 통해 하고싶은 말을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설들은 문학적 형상화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토픽션은 말하자면 자신의 목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좋다는 면죄부를 부여받은 장르다. 이러한 장르적 면죄부를 등에 업고 에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작가의 삶과 목소리가 많이 투영되어 있다.

보통 소설 속에 작가의 말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다고 느껴질 때 불편하고 민망한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작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남에도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아마 소설에서 그려지는 작가의 개인적 측면이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아닌 지적인 면에 치우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가르치는 세계 '한국어'와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본업인 동시에 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글감이다. 사적인 형식으로 보편적인 지성을 건드리고 있으므로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과 같은 불편함보다는 메타픽션이 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와 함께 인지적 쾌감을 유도한다.

문지혁의 한국어 시리즈는 오토픽션 형식을 취하며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소설적 재미와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 전작 <초급 한국어>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에피소드들을 압축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그 에피소드를 화자 자신의 일상이나 과거의 기억과 자연스럽게 병치시키는 기법이 능수능란하다. 항상 사용하는 한국어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한 언어적 특징을 새삼 깨우치고 그 맥락 속에서 우리 삶을 들춰보는 방식이 흥미롭다.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강의' 에피소드는 미숙한 학습자들이 점점 성장해가고 심화되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와 함께 병치되는 에피소드들도 심화되는 강의처럼 의미를 획득하게 되므로, 완벽한 성장소설의 구조가 완성된다.

<초급 한국어>가 언어가 가진 속성에서 삶의 함의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중급 한국어>는 언어가 실어나르는 메시지 자체를 다룬다.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다루고 있다보니 자연히 언어 사용의 정수인 문학이 전면에 드러난다. '글쓰기 강의'라는 명목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문학적 레퍼런스를 친절한 해제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인 것 같다. 그래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다룬 <초급 한국어>와 달리 실용 교양서에서와 같은 은근한 지적 충족도 기대해볼 수 있다.

<중급 한국어>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인 아이의 탄생이다. 소설은 아이의 언어를 해독하며 자식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삶의 미스테리한 변화들을 '낫텔 벗쇼' 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는 또 하나의 '외국어'로 은유되며, 이 소설 <중급 한국어>의 또 다른 의미를 차지한다. 물결표시(~)를 지양하다 못해 자판에서 없애야 한다는 글쓰기 지론을 가진 화자에게 어린 딸의 한페이지 가득 채운 ~~ 부호의 향연은 해독해야 할 외국어에 다름아니다.

펜데믹 시대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도 시대적 가치를 가진다. 그 시대 상황들과 공포와 불안감에 휩쓸린 사람들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십수 년 후에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현실 가공'이라는 품을 들이는 대신 오토픽션이라는 장르를 활용하여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며 새로운 소설 쓰기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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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15주년 기념판)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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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은 상식적이고 논리적이며 정당한 비판을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머리가 숏컷이라고 하여 페미니즘이라는 '오명'를 씌워 도를 넘는 비난을 거침없이 하는 데에는 어떤 상식과 논리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맹목적인 혐오만 가득하다.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소심한 빈정거림이 "꼴페미"라는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내는 용어로 요약되기까지, 여성운동은 수년 사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둬온 만큼이나 만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왔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성주의라는 개념에 굳이 몰두하지 않더라도 많은 성역할 규범들에 정체 모를 불쾌함과 부당함을 느껴본 경험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당함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그 언어가 없거나 적절하지 못하게 사용된 탓에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너만 힘드나, 나도 힘들다" 식의 성별 싸움으로 인식된 측면이 있다.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남성의 역차별을 들어 굳이 비아냥대는 사람은 페미니즘을 이분법적이고 반체제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성별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언하여 싸우자고 덤비는 것을 페미니즘의 본질로 알고 있는지 모른다. 페미니즘은 반대 급부를 상정하고 그 반대편에서 약자 혹은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정상적인(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주 밖으로 내몰린 모든 타자들을 옹호하고 긍정하려는 학문이다. 타자성을 가르는 폭력적인 기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문이다. 이런 불합리는 구조적으로 굳어버려 이미 모든 체계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는 이들은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혐의로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

구조는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이 왜 문제인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날카로운 언어를 가진 정희진의 이런 글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학문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및 이주민 등 타자화된 정체성을 갖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에 한정된 문제 의식이 아니라 인권 전반에 관한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그러니까 잠재적인 인권 운동가라는 말이다. 페미니스트를 욕하기에 앞서 왜 당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라. 그 전에 이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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