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씻으라는 것으로 시작된 명령은 점차 내용이 구체화되면서 17절에 이르러 억압하는 자를 바로잡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재판하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16-17절이 말하는 손을 씻고 선행을 배우라는 것은 새로운 제의를 배우라는 요구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는 것, 곧 그들을 변호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1장은 이스라엘에게 예배나 제사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더 정성스러운 예배, 더 간절한 예물이 아니라 성전 바깥에서 고통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이야말로 성전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예배답게 한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공의야말로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의미 있게, 하나님이 받을 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삶을 수반하지 않는 제사는 가증하고 헛되다는 평가를 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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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부류의 사람들 모두는 그 능력에 따라서 법률을 어기는 파괴자들이거나 그럴 경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고 다양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다양한 분야에서 더좋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사상을 위해 시체와 피를 건너뛰어야 한다면, 자기 양심에 따라서 피를 뛰어넘는 걸 스스로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상과 그것의 중요도에 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379p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괴로워하라고 하지요. 혹여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그것이 그에게 강제 노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벌이 될 겁니다.
3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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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천국 - 세상을 뒤집은 골로새서 다시 읽기
브라이언 왈쉬 & 실비아 키이즈마트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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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과 천국'은 골로새서 '리믹스'다. 저자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가 당시 로마제국에서 폭발성과 전복성을 담은 편지였으며, 그 편지가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현실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11p) 이 점에서 출발하여 저자는 골로새서가 쓰였던 로마제국의 상황을 깊게 포착하고 오늘날과 비교함으로써, 제국의 논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오늘날의 상황-세계화와 포스트모더니티 -에 맞게 골로새서를 각색시키고 접목시킨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낸 1세기 로마 제국에서 예수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논리를 뒤집는 정치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예수가 '주인'이라는 고백은 가이사(카이사르, caesar)가 '주인'이라는 고백을 뒤엎는 것이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평화를 이루었다는 주장은 가이사가 이뤄낸 평화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둘 이야기 모두 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이사가 이룩한 위대한 승리를 통해 죄사함, 풍성한 삶, 평화를 가져다주었든지, 아니면 예수가 로마의 십자가에서 이룩한 역설적인 승리를 통해 죄사함, 풍성한 삶, 평화를 가져다주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91p)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의도적으로 제국을 공격한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 안에 살아 있습니다...그는 근원이시며...그것은 그가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상기시킴으로써 제국의 통치를 거부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바울은 예수를 통해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를 상기시킴으로써 제국의 윤리-가부장적 구조, 경제적 착취, 군사적 평화-와는 다른 대안적 윤리-탈퇴의 윤리(9장), 공동체의 윤리(10장), 해방의 윤리(11장), 고난의 윤리(12장)-를 따르라고 말한다. 


  저자는 골로새서를  현대에 '리믹스'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포스트모터디티 사회에서 성경이라는 '절대 명제'가 불러일으키는 당혹스러움과 문제점을 걷어낸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실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 '진리'가 종종 폭력과 억압을 동반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164p)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성경이 반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골로새서를 포함하여 성경전체는 하나의 이야기 즉 진리체제이지만 동시에 진리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주변부를 소환하고 약자와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열방과 온 천하 그리고 만민에 관심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진리를 형성하고 완성시키는 방식은 배제가 아닌 십자가의 희생으로 일궈낸 포용성이라는 데에 있다.


  책을 보며 두가지 점이 감명 깊었다. 첫째, 골로새서라는 짧은 편지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저자는 기독교의 전폭적 메시지를 되살렸고,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날의 소비문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둘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기독교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오래 전부터 다원화된 종교 지평, 절대 명제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탁월하게 대답해 준다. 제국의 논리를 거부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고, '저 너머'를 붙잡으려는 향수를 버리고 지금 여기에서 관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증은 복음의 진리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예수 이야기로 형성된 역동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삶-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고, 타인을 포용하고, 용서하고, 샬롬에 충만한 삶-만이 복음의 진리됨을 증명해 주고 우상숭배적 대안들을 철저히 거부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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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0-01-24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죠. 골로새서의 현대식 탈굼도 인상적이구요.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벨라르.엘로이즈 지음, 정봉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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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800여 년 전 중세 수도사와 수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온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이후 루소의 누벨 엘로이즈라는 소설의 원천이 되는데, 이 소설은 19세기 이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힌 연애소설이다.


  아벨라르는 중세 시대에 뛰어난 신학자이자 논리학자였다. 아벨라르는 20여 세에 스승들을 능가하는 이론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벨라르는 12세기에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은 우리는 의심함으로써 탐구하고, 탐구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완전히 새로운 진리 탐구방식이었으며, 아벨라르는 이와 같은 논리학의 대가였다. 그러나 바로 이 탁월한 재능이 많은 논적들을 만들어냈고, 아벨라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엘로이즈도 아벨라르만큼이나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장 피에르 성인의 증언을 따르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두루 통하는 여성이었다. 아벨라르를 처음 만났을 때, 엘로이즈는 17세였으며, 아벨라르는 39세였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학문의 조예와 외모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숙부 퓔베르의 집에 가정 교사로 들어간다. 둘은 공부를 위해 제공된 별실에서 공부보다 사랑에 몰두했으며, 결국 엘로이즈는 임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퓔베르는 분노하였고,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퓔베르는 자고 있는 아벨라르를 덮쳐 거세해 버렸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수녀가 되기를 권하고, 본인도 파리의 생드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는 끊임없이 질투의 대상이 되고, 이단으로 몰리는 등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겪는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는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우연히 엘로이즈에게 입수되며 시작된다. 아벨라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실례(實例)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념을 자극시키기도 하고 또는 그것을 가라앉히기도 하는 데에 말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일세. 그러므로 나는 자네의 불행에 대하여 열띤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멀리에서나마 나 자신의 불행 이야기를 자네에게 써 보내는 일로 다시 또 자네를 위로하고자 하는 것일세. 자네의 시련과 나의 고난을 비교함으로써, 자네는 자네가 겪은 시련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 고난들을 견뎌 나가는 일에 보다 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일세.”  -17p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는 종교적 규범이 낳은 위선과 비극이기도 하다. 엘로이즈가 사랑 때문에 성의를 입었다는 고백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엘로이즈에게 가르침을 주는 아벨라르의 태도는 종교적 위선이자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편지가 위선적이고 비극적인 편지로 읽히지만은 않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이 편지가 사랑만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수도사와 수녀의 관계로 만난 이 둘의 편지에는 수도사와 수녀의 삶, 신앙, 죄의식, 내적 갈등과 고뇌가 오롯이 새겨 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휘둘리는 한편 종교적 규범혹은 도덕성이라는 자신들에게 더 귀한 것을 위해서 사랑을 절제하고 감내하며 갈등한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 혹은 ‘도덕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간의 숭고함에 감동을 느꼈던 것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은 바라노니 차라리 연구, 재능, 애정, 불행한 결혼 그리고 개전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이제는 한결같은 축복 속에서 영원히 맺어지기를"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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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김민제 지음 / 역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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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나에게 ‘도끼‘같은 책이다. 이전까지 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신념과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지만 인간의 ‘전적 타락‘과 ‘연약함‘을 말하고 ‘인본주의‘를 비판하는 기독교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역사의 진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이념 같은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은 1998년도에 출간된 《서양 근대 혁명사 삼부작》 시리즈 중 제 2부로서, “서양의 3대 혁명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혁명에 관하여 요즈음 서양에서 논의되고 있는 역사적인 해석들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저자는 세 혁명에 관한 해석을 혁명의 ‘꿈’과 ‘현실’로 대비시켜서 ‘혁명에 대한 긍정적 해석’과 ‘혁명에 대한 부정적 해석’을 각각 소개한다. 프랑스혁명의 경우에는 ‘정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을 소개하였다. 

  정통주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프랑스혁명을 설명한다. 계몽 사상에 입각하여 부르주아와 민중이 함께 귀족을 타도한 아래로부터의 계급혁명이라는것이다. 위대한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낳았고, 그 이념은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혁명의 모델이 된다. 수정주의 해석은 마르크시즘의 퇴조와 함께 제기되었다. 수정주의 해석은 정통주의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부르주아와 귀족은 이해관계가 일치된 하나의 엘리트계급이었고, 부르주아는 구체제의 특권장치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서 민중을 동원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동안에 이뤄진 학살과 공포정치는 혁명이 스스로의 이념을 짓밟는 것이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이후 나폴레옹의 독재로 이어졌고, 오히려 근대화에 역행한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이었다.

  저자는 “균형적이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독자로 하여금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논리를 비교해보는 ‘지적인 연습’을 돕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저자는 정통주의와 수정주의가 각자의 논리로 대립하는 격전지에서 객관적인 해설을 해냈을까?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 저자도 사료 선택의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해석의 인용이 대부분 영미 사가들인데, 이들은 정통주의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랑케는 “사실 그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말로써 역사 해석의 객관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는 더 이상 객관적인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포스트모던론자들은 역사를 ‘문학’이라고 간주하며, 역사 의 ‘무제한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비록 저자가 “객관적이고 초연한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가변적이며 잠정적인 역사학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저자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역사적 배경과 역사학 방법의 변천을 함께 소개하여 역사학 전반의 이해를 돕는다.

  한편 저자는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었다. 정통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을 통하여서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드높인다. ‘인권선언’은 보편적 인간을 위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천명하였다. 혁명 이래로 부르주아가 제시한 국민주권의 원리는 민중 동원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지만, 19세기 내내 계속 표방되는 중에 민주적인 원리가 축적되었다. 반면에 수정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의 이상과 달리 프랑스혁명은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혁명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또한 프랑스혁명 중에 일어난 인권유린과 끔찍한 학살을 고발하며 오히려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리를 비교하며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꾸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혁명을 희망하는 이들은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으로 저질러진 비극을 보아야 할 것이며, 혁명을 외면하는 이들은 혁명으로 일궈낸 성과를 다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숭고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프랑스 혁명의 높은 이상은 상당 부분이 현실 세계를 초월한 고차원적인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념의 세계조차도 넘어서는 신화의 경지에 있기도 하였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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