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왕조실록 살림지식총서 511
이희진 지음 / 살림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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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있어서 유사역사학자가 제일 많이 분포되어 있는 구간은 단언컨데 고조선 ~ 삼한시대가 아닐까 싶다. 제일 큰 이유는 관련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그나마 있는 기록이라고는 중국 역사서에 실려있는 몇 줄이 고작이다. 다만 중국 역사서에 실린 내용은 자국(중국) 우위 관점에서 쓰여져 있으며, 같은 단락에서도 앞뒤가 다른 모순적인 내용들도 왕왕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이를 교차검증할 또 다른 역사서가 없다는 점이다. 국내 역사서에도 고조선 ~ 삼한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최소 1천년 이후에 쓰인 기록이다보니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단, ‘단군신화’ 같은 신화의 관점으로 쓰여진 기록이 고작이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 역사책 『고조선왕조실록』은 앞서 말한 수많은 문제점을 인지한다. 그래서 고조선 시대구분과 자손들 등 현재 여러 학설이 제기된 주장을 소개하고, 왜 이런 이런 시비들이 생겨났는지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준다. 또한 고조선을 비롯하여, 고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존재가 확인된 부여, 동예, 옥저 등 고대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도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다.



▶ 고조선

고조선을 세운 시조가 단군이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이른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릉비까지 많은 기록이 확인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신화’로 기술되었으므로, 여기서 역사적 사실을 유출하는 건 후대 사람들의 몫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신화로써 등장한다.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이 없으며, 환웅 세력이 내려왔다는 점을 미루어볼때 고조선을 세운 집단은 외지에서 이동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웅녀와 호랑이 이야기로 미루어볼때, 이 땅의 원래 주인은 ‘곰 토템’을 믿는 집단과 ‘호랑이 토템’을 믿는 집단이 공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외지에서 온 ‘하늘’을 믿는 환웅 집단과 ‘곰 토템’ 집단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라 할 수 있다. ‘호랑이 토템’ 집단은 단군신화에 근거하여, 권력에서 배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과 곰을 믿는 두 집단이 융합하여 세운 고조선. 고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 우리는 국사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단군’은 신을 모시는 사람, ‘왕검’은 통치자, 고로 고조선은 제정일치 된 나라.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단군 왕검’은 건국 시조의 이름이 아닌, 지배자를 뜻하는 명칭이다. 예컨대 1대 단군, 2대 단군 … 이런 식이다. 


주변 세력과 엮여 국가의 위상을 갖추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첫 기록은 『전국책』에 나온다. 기원전 4세기 중반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나라와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는 틈을 타 “고조선도 이웃 나라 연과 비슷한 시기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다. 또 얼마 후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중국 쪽 기록에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당시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였음을 암시한다. p 035


기원전 222년 진이 연을 멸망시켰을 때, 고조선의 부왕은 진에 복속할 것을 청했다. 부왕의 뒤를 이어 준왕이 즉위할 즈음, 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피신해왔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중원을 통일한 전한은 연과 진이 사용했던 장성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과 요새를 수리하여 고조선과 경계를 패수로 재조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p 036






▶ 기자조선

기자조선은 고조선을 세운 단군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상나라)에서 건너온 유민이(기자 세력) 고조선을 찬탈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현재 우리 학계에선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없기 때문에, 존재자체를 부정한다(연장선상에서 ‘기자동래설’도 부정). 무엇보다 진나라 이전 사료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지배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다 한나라 이후 갑자기 기자가 조선으로 갔고, 조선사람들을 교화시켰다는 내용들이 살을 더해가며 구전되었다. 이후 한반도에 여러 나라가 들어섰지만, 기자조선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주자학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조선 건국 후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신봉함에 따라 기자조선에 대한 비중이 급격하게 커졌다. 조선 양반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구분하며, 기자조선에 정통성을 실어주었다. 



▶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 연나라 유민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은 고조선 준왕의 신임을 얻어 ‘박사’ 관직을 받았는다. 1년 뒤 위만은 준왕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위만조선’의 시작이다. 하지만 위만이 정말 연나라 출신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위만이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만은 연나라가 아닌, 조선출신이라는 학설도 제시되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은 남쪽의 진국(辰)으로 피신해서 한왕(韓)이라 칭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준왕 및 그 후손들이 끊어진 뒤에도 한왕(韓)에게 제사를 지내고, 한(韓)을 이어가고자 했다.


위만은 전한 혜제가 즉위했을 무렵 정치적 타협을 이루었다. 외신이 되어 변방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아주는 동시에 오랑캐 수장들이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위만 정권의 실제 행보는 달랐다. 한과 타협을 통해 키운 힘을 바탕으로 주변 세력을 흡수해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번, 임둔, 옥저, 동예 같은 곳이 위만 정권에 복속되었다. p 040



이후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128년 예맥이 우거왕을 배신하고 요동군에 투항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고조선이 전한에 침공에 맞서다가, 결국엔 위만조선 멸망까지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왕검성을 함락시킨 한나라는 고조선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때 설치된 이른바 한사군은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 고대국가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많은 고조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했다. p 050


고조선 사회상은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8조법금’이 있었다고 한다. 『한서』에 8조 중 3조 내용이 전해진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며, 남의 신체를 상한자는 곡물로 보상하고, 도둑질 한 자는 그 집의 노예살이를 하거나, 50만전을 배상하라는 내용이다. ‘화폐’와 ‘노비’가 있음으로 모아, 고조선은 사유재산 및 최소 귀족과 노예 계급이 있는 사회였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와 전쟁 시 한나라가 고전했던 것으로 보다 고조선의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 삼한

고대 국가인 마한, 진한, 변한으로 알려진 ‘삼한(三韓)’, 하지만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여 삼국통일을 ‘삼한일통’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한(韓)’은 고려와 조선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으며, 훗날 대한제국, 대한민국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의 한도 이 ‘한(韓)’이다. 이토록 중요한 한(韓). 그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1. 한(韓)씨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에서 시작되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후 남쪽으로 가 ‘한왕’을 자칭했다는 위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2. ‘크다, 높다’라는 뜻을 가진 알타이어 ‘한(khan, han)’: 신라의 ‘거서간’과 비슷한 맥락이다

3. 간(馯)이라는 종족 이름

4. 그 외 


저자는 1번, 고조선 준왕에게서 ‘한(韓)’의 기원을 찾았다. 준왕이 남쪽 진국으로 향한 뒤 한왕을 자칭한 점, 준왕의 자손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한(韓) 지역’ 사람들이 준왕에게 계속 제사를 지낸 점, 고조선 멸망 후 삼한이 그 유산을 잇고자 한 점 등이 그 근거다. 그런데 한(韓)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기원은 조금 다르다. 진한(辰韓)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중국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에서 망명온 유민들의 후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한을 辰韓이 아닌, 秦漢으로 쓰기도 했다. 


약간 삼천포긴 한데,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기원전 207년에 진나라(秦) 유민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진나라(秦) 유민들 후손이 기원후 3세기 즈음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도래인 ‘하타 씨’로 살아간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도래인 ‘하타 씨’ 기록을 이 책에서 보게 될 줄이야!



백제가 여러 나라 중 하나라는 구절 또한 마찬가지다. 『후한서』와 『삼국지』가 묘사한 3세기 중반까지도 백제가 주변 세력을 통합한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근거로 활용된다. 또 이러한 문제는 고조선과 삼한의 연결 문제와 관련된다. 뿐만 아니라 삼한의 발전 단계에 대한 시비로도 이어진다. 준왕의 설화에 사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인정하면 ‘삼한’ 내지 ‘진국’의 시작을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진국’이 존재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수준의 체제를 갖추었느냐는 문제까지 걸린다. p 067


이 시비는 단순히 삼한의 시작과 발전 단계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백제, 신라 같은 고대국가의 시작과 발전 단계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일부의 주장대로 『후한서』와 『삼국지』의 내용을 믿는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나 신라라는 고대국가가 들어설 틈이 없다. 즉 백제와 신라의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 내용을 믿는다면 『삼국지』에 기록된 삼한의 역사는 대부분 기원전의 상황이고, 예수가 탄생했을 즈음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나라들이 세워졌다고 봐야 한다. 즉 중국 정사를 믿느냐 『삼국사기』를 믿느냐에 따라 삼한과 그 뒤를 이은 한국계 고대국가의 발전 단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다. p 069


일반적으로 삼한이 기원전 2세기 정도에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그보다 훨씬 늦추어 보는 학설도 있다. 이렇게 학설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하나다. 삼한 역사 기록 역시 많지 않으며, 남아있는 기록도 대부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존하며 발생한 현상이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도 존재하나, 이 세 역사서는 전부 자국우월주의(중국)에서 편찬된 사서이기에, 한반도에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발전하지 못한, 미개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삼한에서는 매년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10월 추수를 끝내고 나서도 같은 행사를 치렀다. 그래서 한(韓) 사람들의 풍속이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 뜯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변한, 진한에 비파와 비슷한 현악기가 있었고, 이것이 훗날 가야금으로 발전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 국읍마다 하늘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을 ‘천군’이라고 불렀따. 천군이 지배하는 곳으로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을 섬기는” ‘소도’가 있었다.p 072



중국 역사서에서 삼한의 정치 발전 상황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것 처럼 묘사되지만, 농사와 양잠, 길쌈 등의 산업은 일찍부터 발달했다고 나온다.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랐다고 한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어진 듯하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이 이때의 저수지이다. 목축은 물론이고, 해안 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행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났고 널리 쓰였다. 그래서 철이 돈처럼 사용되었으며 예, 마한, 낙랑, 왜 등에서 사갔다고 한다. p 076



 이 외에 ‘부여, 옥저, 동예, 읍루, 두막루’에 대한 내용은, 이 역사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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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왕조실록 살림지식총서 520
구난희 지음 / 살림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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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퇴 후 잠들기 전 짧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으며 책장을 둘러보다 눈에 띈 책, 『발해왕조실록』. 살림출판에서 출간된 지식총서 중 한 권이다. 살림지식총서는 권당 200페이지 내외로, 짧은 시간 후루룩 읽을 수 있다. 우리집에 있는 지식총서는 내 편협한(?) 관심사로 인해 역사 관련 총서만 모아뒀는데, 그게 딱 눈에 띄었다. 살림지식총서는 모으긴 많이 모았는데, 실제로 읽은 책은 10권 미만이라는게 함정이랄까. 당분간 이른 육퇴가 가능하면 한 권 씩 읽을 예정!


그리하여 오늘 리뷰는 지식총서 중 한 권인  『발해왕조실록』이다. 발해 관련 역사책을 읽은 적이라고는 정조 연간 집필된 유득공의 『발해고』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뭐 딱히 발해를 주제로한 역사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또 『발해고』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딱히 기억도 안나고 그래서 아주 새로운 마음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발해’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국사책에 실린 내용들만 알고 있는, 정말 백지장 같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 TMI 하나. 라떼 시절 보았던 드라마 《대조영》를 기억하는 사람은, 책을 읽으며 잠깐이지만 머리속에서 최수종 아저씨를 만날지어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부흥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 왕족 및 유민들을 당으로 끌고 갔다. 왕족은 대게 수도 장안에, 나머지 유민들은 고구려 영토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분산배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당나라는 이를 무마시키고자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책봉하고, 고구려 유민 재이주 정책을 취하는 등 여러 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도 연합하여 부흥운동을 시도했다. 심지어 당나라 곳곳에서 여러 이민족들의 반당운동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영주지역에서 봉기한 이진충의 난 역시 대표적인 반당운동 중 하나다. 



당나라에 반당운동이 거세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다(대중상/걸사비우or 대걸중상/걸사비우). 걸걸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부친이며, 걸걸사비우는 이들의 측근이었다. 



초반 승세에 기세가 오른 당군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도망하는 대조영 집단을 추격하여 천문령에 이르렀고 당군은 매복해 있던 대조영 군사들에 의해 포위되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당군은 수천 명에 달했고 이해고는 달아나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천문령 전토의 승리는 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의작 이룬 승리였고, 그것을 이끈 결정적 원동력은 대조영의 탁월한 정세 판단과 추진력이었다. p 015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고구려 옛 영토인 동모산에 터를 잡고, 698년 나라를 건국했다. 동모산은 고구려 고씨들의 부족인 계루부의 영토였기에, 이는고구려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건국 당시 나라 이름은 ‘진국’이었으나, 어느 시점에서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뀐다. 『신당서』에 언급된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조영 재위 후반부에는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발해’라는 국명이 발해 스스로 바꾼 것인지, 당이 내린 이름인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대조영 사후 아들 대무예가 왕이 되었으니, 2대 무왕이다. ‘무(武)왕’이라는 호칭에서 보이듯, 대무예는 당과 전쟁을 치르며 발해가 군사적으로도 ‘강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며 위상을 높혔다. 특히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명시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며, 그 영토를 회복했다고 천명했다. 『신당서』 무왕의 평가는 이렇다. “넓은 땅을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



무왕 사후 그의 아들 대흠무가 왕이 되었은, 3대 문왕이다. ‘문(文)왕’이라는 호칭에서 보이듯, 대흠무는 대내정책을 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발해의 독자적인 3성 6부제가 이때 정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제도인 10위 제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5경 제도 등 문왕은 넓은 영토를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한 내치에 많은 힘을 다했다. 내치에만 치중하면 대외관계에서 어려울 수 있는데, 문왕은 외치에도 탁월했다. 부친때와는 달리 당과 우호관계를 조성하였다. 특히 이 때 당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를 포함하여 주변국이 위태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문왕은 이를 기회삼아 천도를 단행하여 나라의 안위를 지켰다. 당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수시로 왕래하며 외교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때 당은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한다. 발해는 명실상부 황제국이 되었다. 



문왕 사후 왕권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왕의 장자는 재위 당시에 사망하고, 어린 손자 대화여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장자에 한해서만 이렇고, 문왕의 차남이하도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위는 적장자(손자) 대화여가 아닌, 문왕의 친척동생인 대원의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얼마 못가 ‘국인’에게 살해당했다. 



4대왕 대원의왕(시호 없음) 사후 왕위는 문왕의 손자였던 대화여에게 돌아갔다. 5대왕 성왕이다. 추정이지만 대원의왕을 죽인 세력은 문왕 지지층, 정확히는 대조영에서 이어지는 적장자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들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왕 역시 1년도 못되어 사망한다. 사유는 알려진바 없다. 



성왕 이후 왕위는 문왕의 막내아들인 대승린에게 돌아갔다. 6대왕 강왕이다. 강왕은 15년 정도 재위하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주변국 기록을 당, 일본과 교류에서 탁월한 외교술을 보였다. 내치 기록은 없으나 15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아, 강왕은 앞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웠고, 내치에도 탁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왕 사후 그의 아들 대원유가 왕위에 오르니, 7대왕 정왕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 사신파견 정도이며, 재위 4년만에 사망한다. 정왕 사망 후 그의 동생인 대언의가 왕위에 오르니, 8대왕 희왕이다. 희왕 역시 주변국에 남아있는 기록, 즉 대외적인 기록들만 확인된다. 재위 6년만에 사망한다. 희왕 사망 후 그의 동생인 대명충이 왕이되니, 9대왕 간왕이다. 하지만 재위한지 1년이 못되어 사망한다.



6대왕 강왕 이후 9대까지 적자계승이 아닌, 형제계승이 지속되었으며 이 역시도 재위기간이 짧았던 것을 보아, 강왕 이전에 있었던 왕위 계승 다툼이, 강왕 사후에 다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9대 간왕이 죽으며 대조영 직계 왕위 계승은 끊겼다. 이후 왕권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에게로 넘어간다. 대야발의 4대손인 대인수, 그가 발해 10대왕 선왕이다. 선왕의 등극은 ‘해동성국 발해’의 시작이었다.



선왕 대인수는 13년간 통치하면서 발해를 크게 발전시켰다. 연호는 ‘건흥’이다. 연호로 보아 앞 시대의 혼란을 일소하고 새로운 중흥을 시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왕 때 발해는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어며, 이러한 발해를 두고 당은 ‘해동성국’이라 표현했다. p 064


선왕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연해주 일대를 넘어서 헤이룽강까지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압록강 박작성 일대,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경하고, 북쪽으로는 헤이룽강에 이르렀따. 당시 영토는 고구려 최대 영토의 1.5~2배에 달했다고 한다. 동시대를 함께한 신라 영역의 4배 이상이었다. 이렇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선왕은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제도를 완비했다. p 065


선왕은 대외 정책도 활발했다. 내적으로는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방어에도 만전을 기했고, 외적으로는 당, 일본, 신라에 사신을 수시로 보내며 외교에 힘썼다. 특히 외교에 있어서 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주변국인 당과 일본, 신라을 넘어서, 바닷길을 이용해 서역과도 교류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둔황문서에 ‘고려(당시 발해를 뜻함)’가 등장하고, 연해주 발해 유적지에서는 이슬람 아비스 왕조의 은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선왕 사후 손자인 대이진왕이 11대 왕으로 즉위했다. 현재까지 전해진 시호는 없다. 그는 조부인 선왕처럼 발해의 발전과 융성을 이어나갔고, 주변국과 교류도 활발했다. 눈여겨 볼만한 건 당대 이야기가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 『발해국기』를 편찬했다. 현재는 소실된 사서지만, 『발해국기』는 『구당서』, 『신당서』, 『송사』 등 중국 당대 사서 집필 시 기본자료로 활용되었다. 



대이진왕 사후 동생인 대건황왕이 12대 왕으로 즉위했다. 역시 주변국 기록으로 확인된 대외교류 일부분만 전해지고 있다. 대외교류 기록과 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아, 조부 선왕과 형인 대이진왕의 뒤를 이어 안정적으로 발해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대건황왕 사후 아들로 추정되는 대현석왕이 13대 왕에 즉위했다. 대현석왕 역시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대현석왕 재위기간은 24년으로 역시 선왕들의 뒤를 이어 안정적으로 발해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14대 대위해왕은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선대왕까지 부자계승 및 형제계승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아, 대건황왕의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이 즈음에 당에 파견간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아랫자리를 받고, 당 빈공과에 발해 유학생이 신라 유학생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것으로 보아, 발해의 영향력이 위치가 이전에 비해 다소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15대 대인선왕은 발해 마지막왕으로 대위해왕처럼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앞선 사례들을 미루어보아, 부자상속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인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가 906년으로, 당시 주변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발해 남쪽에 있던 통일신라는, 다시 삼국으로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싸우고 있었다. 발해 북서쪽으로는 거란족이 통합하여 나라를 세워 당과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발해는 거란을 상대하기 위해 신라와 잡고자 하였다(비밀결원). 또한 고려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에 발해는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항복 이후에도 발해인은 자국의 멸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거란은 17일에 조칙을 내려 발해인들을 회유했고 19일에는 강말단 등을 파견하여 병기를 수색했는데 발해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20일에는 대인선왕이 거란에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었고 야율아보기는 다시 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대인선왕은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하는데 이후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7월에 왕후와 함께 거란군에 의해 거란 본토로 끌려가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으며, 자신은 오로고, 왕후는 아리지라는 거란식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p 103



거란에 의해 발해는 망했지만, 발해인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발해유민이 고려로 귀화했다. 그 중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 고려 왕족에 추가하고, 백주 땅을 주어 발해 왕가를 잇게 했다. 그렇게 고려로 귀화한 발해 유민은 3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자, 자신들과 뿌리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 유민들의 고려 귀화 외에도, 발해 부흥운동은 약 200년 간 지속되었다. 『요사』, 『송사』에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나라 모두 발해 유민들이 발해 부흥운동 과정에서 세운 나라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발해인은 멸망 후에도 자신들의 고유 습속과 생활 방식을 잃지 않았고 스스로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1009년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송나라 왕증이 남긴 여행기는 이와 관련된 여러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발해가 망한 지 80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을 거란인이 아닌 발해인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각별하다. p 117



발해는 가깝게는 주변국, 멀게는 서역까지 활발하게 교류했던 외교 천재의 나라였다. 특히 정확한 정세 판단으로 국운이 흔들릴만한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발해인의 유연한 외교술과 대처능력은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이민족과 이문화에 개방적이었고, 이를 적절하게 받아들여 ‘발해’의 정체성에 맞게 융합하였다. 발해의 이런 모습은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찾아볼 수 없는, 꼭 필요한 모습이다.



잊혀진 제국 ‘발해’, 광활한 북방 영토를 다스렸던 해동성국 ‘발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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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하타 씨와 일본의 겐지 무사
최경진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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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책 『가야의 하타 씨와 일본의 겐지 무사』는 오랜만에 필기하며 공부하는 자세로 읽은 역사책이다. 책을 읽으며 느낀 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하타 씨에 대한 내용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짜 근래에 읽었던 한일 고대사 역사책 중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은 책! 진짜 한일 고대사, 도래인 역사를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매우 추천하는 역사책이다.

본 책의 리뷰는 책 요약정리에 기반한 내용이므로 스크롤이 엄청 길 예정. 




『신찬성씨록』, 『일본삼대실록』, 『일본서기』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도래인 하타 씨(秦 氏/진 씨)의 시작을 찾아보자.


1. 기원전 207년 진나라 멸망 후 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

2. 기원후 195년(쥬아이덴노), 한반도에서 살던 공만왕(진시황11대손)이 일본 규슈 시모노 세키에 상륙, 귀화 → 시모노세키 ‘이미노미야 신사 누에씨 도래 기념비’

3. 기원후 286년(오진덴노), 한반도에서 살던 궁월군(진시황 12대손, 공만왕 子) 120현 백성들과 일본으로 이주. 최초 상륙지는 알려지지 않음. 나라현 가츠라기 고세 지역에 정착


역사학자 이노우에 미츠로는 “진나라가 망한 때가 기원전 207년이고, 일본에 오기까지 약 700년 가까이 가야에 살았으므로, 하타씨가 진씨 왕조의 자손으로 중국인이라는 설은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하타 씨의 선조인 공만왕이 한반도로부터 규슈 부근인 시모노세키에 이주해 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p 047



9세기에 집필된 족보 『신찬성씨록』은 유명 가문들의 조상 유래가 적혀있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조상에 대한 근거자료를 해당 씨족이 스스로 제출해야 했기에, 자기 가문을 돋보이기 위하여 일부를 조작하거나 부풀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타씨가 말한 ‘선조는 진시황’이라는 주장은이 그 중 하나가 아닐런지.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진나라 유민들이니 진시황의 후손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로 건너온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때까지 약 700년 가량을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았기에, 그들 말처럼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타 씨 (秦 氏/진 씨)가계도 : 진시황 → 공만왕(AC 2) → 궁월군(AC 3) → 하타 사케키미(AC 5) → 하타 카와카츠(진하승 AC 5/교토 교류지 목상) →하타 와카 → 하타 하루카제



그렇다면 하타 씨가 일본으로 귀화하기 전 약 700년간 살았던 곳은 한반도 어느 지역인은 어딘지를 추정해보자. 


1. 하타 씨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백제인이다.

2. 하타 씨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가야인이다.

3. 하타 씨는 신라에 흡수된 도시국가 파단국(현재 울진) 출신이다.

4. 하타 씨는 신라 노예 계층이 살던 부곡, 고지도(현재 부산 영도) 출신이다. (『하리마국풍토기』 하타씨 일족인 고치 씨 출신지)




한반도 도래인 하타 씨의 출신지에 대해선 이렇게 총 네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도래인에 대해선 우리나라 역사서에선 내용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일본 역사서에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하타 씨 촐신지도 『일본서기』에 기록된 기사를 기본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궁월군에 대한 기사에 백제, 일본, 가야가 모두 나오다보니, 어느 한 곳이 강하게 치고나오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제일 크게 지지를 받는 설이 있으니 단연 ‘가야인’ 설이다. 아래에 후술하겠지만, 『일본서기』에서 ‘신라가 방해하여 가야에서 머물고 있다’는 기사와, 가야에서 규슈 지방으로 들어가는 바닷길인 현해탄을 수호하는 세 여신(아마테라스 딸), 현해탄 3신 중 한 여신을 교토 마츠오 타이샤에서 모시고 있는 점 등이 근거다.



반면에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던 파단국 및 고지도 출신에 대해선 꽤 오랫동안 무시받던 가설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위상이 바뀌었다. 특히 ‘하타 씨는 파단국 출신’이라는 가설에 많은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1988년 국내에서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 ‘파단국’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덕분에 하타 씨가 파단국 출신이라는 가설에 많은 힘이 실렸다. 뿐만아니라 결과적으로 파단국 역시 신라영토이기에, 신라 출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래들어 많은 힘을 받고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참고로 파단국의 ‘파단’은 일본어로 ‘하타’로 읽힌다. 



고지도 출신이라는 가설은 일본의 『하리마국 풍토기』, 우리나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추측한 내용이다. 『하리마국 풍토기』에 의하면 하타씨 일족인 고치 씨 출신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토대로 일본이 학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부산 고지도를 발견했다. 



확실한건 울진 파단국, 부산 고지도 모두 지배계층에게 억압받던 계층들이 살던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파단국은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사라졌고, 고지도는 노예계층이 사는 부곡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억악받던 계층은 살던 곳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가는 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일본서기』 궁월군 기사에 보면 ‘가츠라기 소츠히코’라는 인물이 나온다. 궁월군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자, 일본 왕실은 궁월군 귀화를 돕기 위해 ‘가츠라기 소츠히코’라는 인물을 파견한다. 명에 따라 한반도로 넘어온 ‘가츠라기 소츠히코’는 낙동강 유역에 살던 하타 씨와 경남 양산 백성들 일부를 데리고 일본으로 넘어온다. 이후 가츠라기는 다시 한번 한반도로 넘어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 왕실에서 보낸(?) 여성과 가정을 꾸리며 한반도에 정착하고 만다(『백제기』 원전은 소실됨). 



이때 가츠라기 소츠히코가 데려왔던 낙동강 유역에 살던 하타 씨와 경남 양산 백성들이 정착한 곳이 위에서도 언급했던 ‘나라현 가츠라기 고세’ 지역이다. 그들은 제철기술을 보유한 대장장이, 즉 제철 기술자이기도 했다. 경남 양산 백성들은 가모 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고사기』에 따르면 가모 씨는 오사카 스에무라 출신인 ‘오타타네코’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스에무라는 스에키, 즉 가야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가야토기를 만들던 마을이었다. 즉 가모 씨는 제철 기술을 가지고 있던 가야 출신이었다.



나라현 고세에는 가모 씨가 세운 세 개의 신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다 다카카모 신사다. 다카카모 신사는 교토의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의 총 본산이기도 하다(교토 시모가모, 카미가모 역시 도래인 가모 씨 계열 신사다). 다카카모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일본에선 스사노오와 함께 최고위 신 중 하나이자 태양의 아들신이다(스사노오 역시 한반도 출신). 그런 신 이름에 들어간 한자중 ‘스키(또는 사히)’를 뜻하는 한자는 우리말로 호미 또는 작은 농기구를 뜻하는데, 보통 한반도와 연관된 명칭에서만 사용되는 한자다.


『고사기』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가모 씨와 함께, 미와 씨도 ‘오타타네코’의 후손이라 전한다.



(광개토대왕비 및)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400년에 백제, 금관가야, 일본이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돕기 위해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종발성이 무너졌고, 많은 가야인들이 규슈 지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 이주민들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미와산으로 옮겨와 미와 씨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미와 씨의 선조는 5세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6세기경에는 오사카의 스에무라에 정착했으며, 이후 미와산으로 옮겨 미와 신사의 제사를 지냈다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오타타네코가 가야인들의 도자기 마을인 스에무라에서 발견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오타타네코가 가야 출신 미와 씨와 가모 씨의 선조라는 『고사기』의 기록을 합치면 오타타네코가 가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p 117



다시 가츠라기 소츠히코의 도움으로 나라현 고세 지역에 터를 잡았던 가모 씨, 하타 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456년 8월에 가모 씨와 하타 씨가 나라현 고세 지역을 떠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얀코 천황 때 발생한 ‘마요와 왕의 변란’이라는 사건 때문이다. 이때 가츠라기 소츠히코의 손자가 사건에 연루되며, 가츠라기 가문이 망한다. 가츠라기 가문에 후원을 받던 가모 씨와 하타 씨는 나라현을 떠나, 교토에 터를 잡았다. 가모 씨는 가모강 근처에, 하타 씨는 가츠라강 왼편에.



가모강에 자리잡은 가모 씨는 두 개의 신사를 창건했으니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다. 가츠라강 왼편에 자리를 잡은 하타씨는 그 일대를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번성시켰다. 지금의 교토 서쪽 아라시야마, 우즈마사 일대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가모씨는 크게 야마시로 가모씨와 야마토 가모씨로 나뉜다. 야마토 가모씨는 위에서 언급한 가츠라기 고세에서 터를 잡은 씨족이다. 야마시로 가모씨는 지금의 와카야마현에서 시작된 씨족이라 한다. 크게 보면 고세나 와카야마현 모두 관서지방으로, 두 가모씨의 뿌리가 같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신찬성씨록 야마시로국 신별』

(진무 천황이) 야마토로 향할 떄, 산중이 험준하여 산야를 해매다 길을 잃었다. 이때 간무스비노 미코토의 손자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가 큰 새로 변하여 날아올라 길을 안내, 드디어 야마토에 도착했다. 천황은 그 공로를 어여삐 여겨 특별히 포상하여 아메노 야타가라스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그 이름의 시작이다. p 123



『야마시로국 풍토기』 가모 신사

히무카 소의 산정에 강림하신 신,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는 진무천황의 동정에 앞장서고, 야마토의 가츠라기산의 꼭대기에 머무셨다. 여기서 야마시로국의 오카다의 가모(지금의 교토후 기즈가와시 가모쵸키타)에 이르렀다. 야마시로강(지금의 기즈강)을 따라 내려가 가츠라강과 가모강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러 강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좁지만 맑고 깨끗한 이시가와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시가와의 세미노 오가와라고 이름지었다. 여기에서 거슬러 올라가 구가노쿠니의 북쪽의 산록에 진좌하셨다. 이후 이름하여 가모라 불렀다. p 124



교토로 옮겨간 가모씨와 하타씨는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타씨와 가모씨 가문이 같은 전승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방증이다. 


「하타 씨 본계장」은 하타 씨의 큰집인 고래무네 키미가타가 만든 『본조월령』이란 책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게 90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당시 연중행사의 유래와 내용, 진행 방법 등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하타 씨는 883년 고래무네​라는 성씨를 천황으로부터 내려 받아, 하타 씨의 큰집이 되었다.

하타 씨 딸이 가도노강(지금의 가츠라강)에서 흘러온 화살을 주워 침실에 꽂아 두었는데,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이상하게 여겨 아기의 아버지를 찾아보니 그 아버지가 바로 하타 씨가 창건한 마츠오 대사의 신인 마츠오 대명신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가모 씨가 하타 씨의 사위가 되고, 하타 씨는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마츠오 대사의 제사를 가모 씨에게 맡기게 된다. 한편 가모 씨 가문에서도 하타 씨 가문과 비슷한 내용의 전승을 가지고 있다. p 128



『연기식』 규정은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마츠오 대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축제(가모축제/아오이축제)에 관한 것으로 각 신사에서는 제사관인 네기와 신사 관리인인 하후리르 한 명씩 참가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모 씨 행사에 마츠오 대사를 창건한 하타 씨 가문도 같은 수의 인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규칙이 옛날부터 문서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원래 이 가모 축제가 두 가문의 공동 축제임을 나타낸다. p 132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는 ‘양자 입양설’이 있다. 대대로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제사를 담당하는 ‘오니시 가문’의 계보에 따르면, 교토의 마츠오 대사를 창건한 하타 씨 가문의 ‘하타 토리’와 전국 3만 개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인 후시미 이나리 대사를 지은 ‘하타 이로구’는 본래 가모 씨 태생이었으나 이후 하타 씨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나리 대사의 홈페이지에 있는 「오니시 가계도」를 보면 “하타 이로구는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의 24세손인 가모 아가타누시노 쿠지라의 막내아들로~” 하므로, 원래는 하타 이로구가 가모 가문의 자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p 133



읽던 중 놀라운 TMI 하나. 도쿠가와 가문과 가모 가문 문장이 비슷한데, 이 이유가 도쿠가와 본래 성씨인 ‘마츠다이라 씨’에 있었다. 미가와국 가모군 마츠다이라 마을(현재 아이치현)에 있는 가모 신사에 종사했단 가문이 바로 마츠다이라 가문이었다.



이번엔 하타씨 이야기로 넘어와서, 하타씨는 규슈 지역에 터를 잡은 부젠 하타씨와 간사이 지역(오사카, 나라, 교토 등)에 터를 잡은 기나이 하타씨로 구분된다.



▶ 부젠 하타 씨

713년에 겐메이 천황은 각 지역의 지형, 지명의 유래, 특산물 등을 기록한 풍토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중 『부젠국 풍토기』에는 “부젠국 다가와군 가와라산에 신라의 신이 스스로 건너와 살았으며, 철과 석탄이 풍부했다”라는 내용이 남겨있다. 부젠국은 지금의 북규슈 지역에 위치했으며, 다가와군 가와라산은 지금의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가와라 마을에 있는 산으로, 광산 지역으로 유명하다. 8세기 이전부터 철과 석탄을 캐내었으며, 지금도 시멘트 생산이 계속되고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가와라 마을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마을 이름인 ‘가와라’는 고대 한국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8세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철과 석탄을 캐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053




‘신라의 신’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은 사실상 ‘가야의 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당 책이 만들어진 713년 이미 가야가 멸망하고, 그 땅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신라의 신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도래인이 이동했을 바닷길을 따지자면, 신라인가 아닌 가야에서 출발했을 확율이 높다. 



신라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바닷길은 대체로 동해 남부해안이나 동해안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이 바닷길을 이용할 경우 도착지점은 이즈모나 츠루가 지역이다. 반대로 가야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바닷길은 남해 바닷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보통 현해탄을 가로질러 규슈 지역에 도착한다. 



이 마을에 정착한 하타 씨의 친척인 가라시마 씨는 가야의 신인 ‘가라쿠니 여신’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약칸강의 오른쪽에는 우사 지방의 터줏대감인 우사 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모토산 꼭대기에 있는 세 개의 큰 바위를 지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가라시마 마을의 하타씨는 자신들의 신인 ‘가라쿠니 여신’과 우사 씨의 세 바위 신을 합쳐서 ‘야와타 신’이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신이나 문화가 합쳐지는 ‘습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습합을 통해 하타씨와 우사 씨는 서로 협력하며 두 씨족의 안정을 택했다. p 063



야와타신으로 합쳐진 하타씨의 가야 여신과 우사씨의 지모 3신. 여기서 주목할 점이 우사씨의 지모 3신이다. 이들은 야마테라스의 세 딸로, 현해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현해탄은 가야인이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이다. 거기다 세 딸 중 하나인 이치키시마노히메는 현재 오키섬에서 모시고 있으며, 오키섬은 ‘신이 머무는 섬’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또한 이 여신을 교토 마츠오 타이샤에서도 모시고 있는데, 마츠오 타이샤는 하타씨가 설립한 신사이기도 하다. 



참고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넘어온 신이며, 스사노오와 관련된 수 많은 이야기들은 전부 신라와 관련되어있다. 특히 스사노오가 지니며, 오로치를 헤치웠던 칼은 ‘카라쿠니마루’라 하며 현재 일본의 삼종신기 중 하나다. 따라서 스사노오의 누나인 아마테라스 역시 한반도와 연관을 추정해볼 수 있다. 



하타씨의 신과 우사 씨의 신이 습합하여 탄생한 ‘야와타 신’은 6~7세기가 되어 또 한번 그 모습이 바뀐다. 진구 덴노, 오진 덴노(진구子)가 야와타 신에 추가되어, ‘야와타 3신’이 된 것이다. 여기서 알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바로 ‘진구 덴노’ 부분이다. 한국사에서는 보통 신공 왕후로 부르며, ‘임나일본부설’의 근원으로 부정적인 인물로 보는 편이다(물론 왜곡한 당사자들은 현대 일본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사기』에 진구 덴노가 신라 왕족인 ‘천일창(아메노히보코)’의 후손으로 적혀있다. 이 인물은 신라 출신 대표격 도래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연오랑으로 추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야와타 3신’은 기존 하타씨가 모시던 가야 여신과 신라계 도래인 후손인 진구, 진구의 아들 즉 한반도 출신 신이라 할 수 있다.




▶ 기나이 하타 씨

궁월군과 함께 일본으로 귀화한 가야인들 나라현에 정착하여, 오사카, 교토 등 일대로 퍼져나갔다. 특히 교토는 하타 씨와 관련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타 씨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마츠오 타이샤, 코노시마 신사, 고류지 등 교토에서 유명한 신사와 절 대부분은 하타 씨가 창건하였다. 심지어 신사마다 성격이 다른데, 그만큼 하타 씨가 많은 산업에 종사하며 부를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농업, 코노시마 신사/ 양잠, 마츠오 타이샤/양조 등)



하타 씨가 보유한 주 기술이 토목기술(제방공사)이었다. 일본은 대부분 도시에 큰 강줄기가 있었기에, 도시개발을 위해서는 제방공사가 필수였다. 그러다보니 도시마다 제방공사를 위해 강 주변에 대규모로 거주하며, 제방을 쌓았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 있는 큰 강줄기 주변에는 하타씨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있다. 교토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맞은 편에 있는 대언천 제방도 하타 씨 작품이다(연장선상에서 아라시야마 일대를 개발한 것 역시 하타 씨다). 결론적으로 고대 일본 도시 건설에는 하타 씨가 중심에 있었고, 그로 인해 하타 씨는 부와 명성을 동시에 쌓았다.



이렇게 토목기술로 쌓은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하타 씨는 농업, 양잠, 양조 등 여러 생산 산업 기술을 확장하며, 부와 명성을 쌓았다. 고대 일본의 생산업은 하타 씨가 없으면 멈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와 명성을 쌓은 하타 씨 중 일부는 고위직에 종사하고, 천황에게 성씨도 하사받는 등 전방위적으로 위세를 펼쳐나간다.



나라현 시키군에 다와라모토쵸가 있는데, 이 지역은 고대부터 한반도 이주민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이다. 이 마을 부근에 가라히토노이케가 있는데, 『일본서기』 276년 9월 오진 천황 때에 고려인, 백제인, 가야인, 신라인을 동원하여 이 저수지 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456년 8월에 ‘마요와 왕의 변란’이 일어나 하타 씨와 가모 씨는 가츠라기 고세를 떠났다. 교토로 향하던 하타씨 일부는 이곳에 정착하여 하타 마을을 세웠다. p 077



471년 유라쿠 천황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하타 씨를 하타노 사케기미에게 관리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들을 잘 관리하여 산더미 같은 비단을 조정에 바쳐 우즈모리마사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우즈모리마사’는 이후 우즈마사로 바뀌어 지금까지 교토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산더미 같은 비단을 조정에 바쳤다는 이 이야기는 하타 씨가 매우 부유한 집단이었음을 알려준다. p 084



스이코 천황 시대인 603년 11월, 하타 카와카츠는 신라 불상을 쇼토쿠 태자로부터 물려받아 교토의 고류지를 창건했다. 쇼토쿠 태자는 고모 스이코 천황으로부터 황태자로 지명받았으나 사망하여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권력의 정상에 있었으며, 그의 측근 중 한 명이 바로 하타 카와카츠였다. p 085



『속일본기』 746년 3월에 하타노이미키 아사토모라는 사람이 가즈에노 츠카사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즈에노 츠카사는 세금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로, 이 자리는 지금도 이어져 일본의 국가 예산을 관리, 감독하는 재무성 주계국이 되었다. p 085



한반도에서 건너온 하타 씨는 어느 한 가족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같은 한반도 출신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여, 거대한 공동체를 조직하여 ‘하타 씨’라는 성씨로 묶인 거대한 집단이다. 이들이 한반도에서 가지고 온 기술은 도시 건설에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은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 등 사람의 의식주에 중요한, 그 어떤 기술보다도 절대적 우위를 지닌 기술들이었다. 그렇기에 하타씨는 이 기술들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쌓았고, 권력의 최측근까지 올라간 것이다. 540년에 이미 거대 집단이 하타 씨는 700년 경에는 전국 어디에나 살었다.





하타 씨만 이야기했지만, 이 책 제목은 ‘하타 씨’와 ‘겐지’가 같이 들어가있다. 겐지 씨는 신적강하된 황자가 받은 성씨 중 하나이자, ‘미나모토 씨’라 부르는 유력한 무사가문 중 하나다. 천황가 핏줄을 잇는, 권세 막강한 미나모토 씨. 



미나모토씨 자제들은 성인식을 도래인 신사에서 지냈다. 가마쿠라 막부를 제창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도 그러했다. 과거에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대한 역사책을 읽었었는데, 해당 책에서 미나모토 씨 후손들은 대대로 도래인 신사에서 성인식을 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성인식을 치룬 신사는 야와타신, 가모명신, 신라명신을 모시는 신사였다. 심지어 그들은 ‘신라겐지’ 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물론 자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그때 대체 미나모토 씨가 신라 도래인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데 있었고, 생각보다 싱거웠다. 겐지 가문(정확히는 가와치 겐지 가문) 후손이 도래인 신사에서 진행한 성인식은, 그저 ‘보은’으로 인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뭐 책을 보시라. 이하 생략!



대신 겐지가문이 섬겼던, ‘신라명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야와타 신과 가모명신은 위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니). 신라명신은 도래인 역사에서 왕왕 나오기에, 익숙하다면 익숙한 신이다. 특히 교토 엔랴쿠지에 가봤던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신이기도 하다(아래 5번 관련). 신라명신에 대해선 보통 아래 가설들이 유명하다.




고대 시가현에 살았던 신라인이 모시던 신: 시가현은 고대부터 동해안 출신의 도래인들이 집단 거주한 지역이다. 특히 정창원 문서, 동대사 문서, 속일본기, 신찬성씨록 등에 따르면 고대 시가현 한반도 출신 343명 중 60%가 하타 씨 라고 한다. 시가현은 하타 씨의 왕국이었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망명한 백제 유민들도 시가현에 자리를 잡았다.


1. 이 지역(시가현) 세력가 오토모 스구리 집안이 모시던 신: 오토모 스구리 집안 역시 한반도에서 넘어온 집단이다.

2. 당나라 유학파 스님 엔친이 귀국할 때 배 위에 나타났던 신: 일본에 널리 알려진 학설이다.

3. 천태총 사문파와 산문파가 서로 싸울 때, 산문파가 모시는 적산명신에 맞서기 위해 사문파가 만든 신: 위 엔친 스님과, 아래 엔진 스님 파벌싸움에서 나온 학설이다.

4. 장보고의 화신: 당나라 유학중이던 엔닌 스님이 장보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교토 엔랴쿠지에 신라명신을 모셨다.

5. 그 외 기타: 각 지역 도래인들이 고향에서 모셔온 신




일본에서는 1번과 3번이 가장 대중적인 반면에 우리나라에선 5번이 가장 대중적인 학설이다. 우리나라에서 5번이 가장 대중적인 이유는 관련 드라마로도 방영된 소설 『해신』과 《역사스페셜》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나 역시 ‘신라명신’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꽤 오래전 보았던 《역사스페셜》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뿐이다. 고대 일본에서 믿던 ‘신라명신’은 위의 가설 속 성격과 조금 다르다.



(후쿠이현 이마죠) 이마죠 마을의 신라명신사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1615~1624년 사이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에 신라명신이 모셔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을 부근에는 지금도 후쿠이 광산, 난죠 광산, 이마죠 광산이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이모노시, 가네가스 등의 쇠와 관련 있는 마을 이름이 남아있다. 이는 이 지역에 광부나 주물공,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p 151



(시마네현 이즈모) 스사노오 미코토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신으로, 일본 최고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이다. 이 신이 일본에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히이강 상류에 있는 나카유노무라 마을의 도리가미센츠산이다. (생략) 신화시대의 스사노오의 전승이 남아있는 마을인 나카유노무라에 신라명신이 있었던 사실은 이 마을이 옛날부터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신라명신이 모셔진 곳은 오래전부터 철광산 지역이었다. p 153



(효고현 히메지) 아케다 신라명신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신라명신을 모시고 있는 시라쿠니 신사와 히로미네 신사가 있다. 전국의 우두 천황을 모시는 신사의 총본산인 히로미네 신사는 옛날에는 이 신을 신라명신이라 부르고 모셨다고 한다. 우두 천황은 신라에서 돌아온 스사노오를 가리킨다. 히메지시는 지금도 열쇠를 뜻하는 가기마치, 대장장이 마을인 가지마치, 칼을 만드는 카타나데 마치 등 철과 관련 있는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p 154



(시가현 오츠)교토 야마시나부터 신라명신이 있는 나가라산 원성사까지 양질의 화강암 지대인 오사카 제철 유적이 있으며, 다카시마군에는 약 30여 개의 고대 제철 유적이 흩어져 있다. 또한 아사이군과 츠루가에 걸쳐서 10여 개의 유적이 남아있다. 고대 제철 유적이 많은 시가현에서는 광부들이 신라명신을 철강신으로 모셨을 가능성이 크다. p 157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과 남아있는 신라명신 신사들은 전부 고대 일본 제철 유적과 맞닿아 있었다. 거기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야와타 신’과 ‘가모 명신’도 제철기술을 지닌 도래인 하타 씨와 가모 씨가 모시는 신이었다. 



즉 겐지가문, 미나모토 가문 성인식을 주관한 신사의 신들(신라명신, 야와타신, 가모명신)은 제철기술을 지닌 도래인들이 모시던 일종의 대장장이신이었으며, 단지 신을 모시는 집단과 지역이 달라짐에 따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성격은 같았다. 



석기 생활만 하던 고대 일본에 신도시 건설을 할 수 있도록 우수한 제철기술과 토목 기술을 가져온 도래인들. 그들은 그로 인해 일본 권력 가까이에 있었고, 스스로 권력가가 되기도 했다. 도래인 성씨에서 파생된 무수히 많은 성씨들 중 일부는 전국시대에 내노라했던 유력한 무사가문이 되기도 했다(‘시미즈’ 가문이 하타 씨에서 파생된 가문이다).




고대 일본을 건설하고, 일본 권력과 가까이 있었던 그들(천황가가 도래인 후손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도래인의 족적을 우리나라에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관련된 모든 흔적이 일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혹시나 도래인에 대해 알게되어도, 잠깐 뿐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에선 도래인의 흔적을 축소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수많은 도래계 신사가 이름이 바뀐게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일본의 역사왜곡 범주에, 도래인의 역사도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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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마을 이장인디요
김유솔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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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에세이는 무려 MZ세대 ‘이장’ 이야기다. 요즘 MZ세대는 회사원 보다는 평생가는 기술직, 전문직을 선호한다던데! 이 에세이 주인공은 영화 《파묘》처럼 묘지 이장사를 하려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집어들었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표지를 보니, 그 이장이 아니다. 놀랍게도 시골마을 ‘이장’ 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대표! 그 이장이었다. 심지어 그냥 시골도 아니고, 쩌어기 남쪽마을. 남쪽마을에서도 땅끝마을보다 더 멀리 있는, 바다 건너에 있는 완도군이다. 지금이야 완도대교가 있어서 자동차를 타고 오갈 수 있다지만, 60년대 초반 까지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섬이다. 그런 섬 마을 이장이 나보다도 어린, 20대라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20대가 이장을 할 수 있지? 아니 그전에 완도에 살고 있다고? 내륙에 있는 시골에도 청년 보기가 어려운데, 땅끝마을보다 더 멀리 있는 완도에 살고있다고? 온갖 호기심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이 호기심은 에세이를 빠르게 읽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데 이런 호기심이 나만 있는 건 아니었나 싶은게, 이 에세이 저자이자 현재 ‘이장’인 김유솔은 TV 에도 얼굴을 여러번 비췄던 것이다. 어르신들이 주로 보는 아침방송과, MZ세대가 주로 보는 물어보살 같은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따라서 예쁜 바다에 놀러가도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풍경에 큰 감흥을 못느껴 왔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평생 이 바다가 예쁜 줄도 모르고 살아서 다른 바다도 그렇게 예쁜 줄 몰랐던 것이었다고. 막연히 완도에 내려와 사는 상상을 해봤다. p 061


나의 가장 큰 재능은 바로 오지랖이다. 처음부터 내 재능을 알고 있던 건 아니고, 사진관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부터도 그랬지만 증명사진이라고 하면 본인 기준 예쁜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멋있게 하고, 화장도 하고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가? p 081



어려서부터 완도에서 나고 자란 김유솔. 한창 학교 다닐 땐 또래 애들이 다 그렇듯, 집을 떠나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던 그녀였다. 거기에 실천력까지 남다른 그녀는 고3이 되자마자, 완도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꿈인 ‘디자이너’를 위해서! 부모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가니 조심해야돼~’ 라고 많은 걱정을 했지만, 웬걸? 서울 사람들은 코 베기는 커녕, 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항상 바쁜 사람들 투성이었다. 완도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서울 사람들. 완도 소녀 유솔은 그렇게 서울살이에 적응해갔다. 


여유 조차 없던 서울 살이 중 모처럼 만의 휴가를 고향인 완도에서 보내고자 내려왔다. 그렇게나 떠나고 싶은 완도였는데, 막상 다시 찾아오니 그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완도를 떠났을 때처럼, 다시 서울을 떠나 완도로 돌아왔다. 완도를 떠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완도에서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바로 전공을 살린 사진관이다. 그녀는 완도에 남아있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그들의 언니와 누나가 되어주기로 결정했다. 10대때 그토록 원했지만, 완도에는 없었던 그들을 공감해주던 언니와 누나가 되기로.



 


"용암리 이장 해 보지 않겠어요?"

내가 잘못 들은 걸까? 당시 내 나이는 24살. 내가 아는 ‘이장’이라는 말에 다른 뜻이 더 있나? p 089



사진관을 하며, 그녀의 재능인 오지랖을 펼치기 시작한 유솔. 그녀의 오지랖은 어린 학생들을 시작하여 동네 어르신들에게까지 뻗어나갔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 본 한 사람! 당시 용암리 이장님이셨다. 자네, 이장 한 번 해보지 않을텐가? 




영문 모르고 힘을 실어 준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나중에 이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할아버지 이름을 팔아 이장이 되었다며 몹시 자랑스러워하셨다(?). 이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나는 진짜 이장이 되었다. 엄마 나 이장 됐어! p 099


사실은 이럤다. 그간 매일 가겠다고 약속을 잡는 건 왠지 어색하니까, 약속하지 않은 날에는 괜히 용건이 있는 것처럼 경로당에 들러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그게 어르신들에게는 용건이 없으면 경로당을 찾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어르신들은 계속 서운해하고 있었다. 한층 밝아진 어르신들은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찾아와서 함께 점심을 먹자며 이번 점심도 약속 없으면 먹고 가라고 했다. p 115




본투비 완도 태생인 김유솔. 그녀는 그렇게 용암리 이장이 되었다. 그것도 최연소 이장! 나이드신 분도 이장을 처음 맡으면 힘들진데, 마을 주민들이 전부 어르신인 상황에서 20대가 여성이 이장이 되었으니,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각양각색이었다. 당사자도 그랬다. 이장은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해야 마을 대표를 할 수 있는가! 


이장을 맡으며 어려운일도 분명 있었다. 20대 이장과 마을주민이 대부분 어르신인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벽은 서로를 잘 몰랐기에 생겨난 생각의 차이였다. 어르신도 20대 이장이 처음이고, 20대 이장도 어르신들과 부대끼는게 처음일테니까. 그 벽을 허무는 순간 20대 이장과 동네 어르신은 서로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무리 우리끼리라도 이장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이장이 나이는 어려도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큰 어른이나 다름 없어.

우리가 높이 세워 줘야 다른 마을 사람들도 우리 이장 무시 못 해.

다들 밖에서 이장 함부로 부르지 말어!

든든한 마을 어르신들을 등에 업고, 오늘도 나는 어깨를 활짝 펴고 이장 일을 시작한다. p 142



별 것 아닌 나의 모습도 대단하다고 장하다며 추켜세우 주는 마을 분위기 덕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 없으면 안 되는 기특한 이장이 되어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완도에 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나를 완도에 정착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사람들’인 것 같다. p 143


소문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많은 어르신들이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김치는 아직 있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정을 서울에서는 잊고 살았는데 용암리에서, 우리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큰 행복인 것 같다. 아, 이 마을,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어머니들이 담그신 파김치를 먹기 위해 짜장라면에 물을 올리러 간다. p 149


기성세대라고 해서 어르신들이 이런 (코 피어싱을 한)내 모습을 절대 이해 못 하실거라는 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어른들은 젊은 사람을 그들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이해 못 하실거라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의 고정 관념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p 164


이장 일을 하다 보면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어르신들과 지내다 보면 불편하지 않냐, 힘들지 않냐고 많이들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디서 비싼 돈 주고 맛없는 밥 사먹을 까봐, 돈 많이 써서 저축도 못하고 시집 못 갈까 봐, 야위어서 몸 아플까 봐 걱정하면서 맛있는 게 생기면 잊지 않고 불러준다. 그렇게 어르신 들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기름지게 살이 오르고 있는 나는, 바로 밥 잘먹는 기특한 용암리 이장이다. p 170




나는 불과 최근까지 ‘시골텃세는 도시민도 못이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전에 읽은 안동 폐교살이 에세이를 읽으며 깨달았다. 시골에 대한 내 생각은, 정말 편협하고 오만하기 그지 없는 도시민의 불손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지 얼마 안된 오늘 『제가 이 마을 이장인디요』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더 확실해졌다. 시골 텃세는 도시민들이 만들어낸, 불손한 환상이었다. 오히려 시골 어르신들은 도시민보다 더 깨여있는 진정한 어른이었다. 단지 도시민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장가를 와야 해. 이장을 델고 가블믄 안 되고 장가를 와야 돼, 알겠지?

어르신들은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바쁘면 가 봐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p 178




더 많은 사람이 ‘완며들게(완도에 스며들게)’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들으며 일했더니 2023년에는 ‘전남형 청년 마을 만들기’ 사업도 진행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청년 마을을 구성하고 외부에서 청년들을 모집해 한달 살기를 제공하며 참여자들과 함께 전시와 플리 마켓 행사를 열었다. p 207


완도로 내려오면서 일이 없어지고 내 꿈이 작아질까 봐 걱정을 해 왔지만,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완도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종종 일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놀기도 많이 놀고 있다. 서울에서 했던 ‘잘 먹고 잘 살기’의 균형에 대한 고민을 완도에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가끔 밤을 새며 일할 때, 터무니없지만 ‘완도에서도 밤샐 일이 있네’ 하면서 기쁘기도 하다.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니까. p 218



현직 완도 용암리 이장 청년 김유솔은 앞으로도 계속 용암리에 남을 생각이다. 중년이 될 김유솔도 계속해서 용암리에 있을 것이며, 노년의 김유솔 역시 용암리에 있을거라 한다. 


노령화로 인해 20년후면 시골 마을들이 사라질거란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유솔은 그렇게 사람들을 불러모아 20년 뒤에도 완도 용암리 마을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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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늘
고광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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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하기에 앞서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다. 난 한국전쟁으로 순국한 영령들을 폄훼하는게 절대 아님을 밝힌다. 단지 순국한 영령들을 볼모삼아, 자신들의 죄악을 숨기기 급급한 한국과 미국의 못난 위정자들을 비판하고자 함이다.


불과 십년 전만해도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국군과 미군이었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쳐들어온 전쟁. 이 빨갱이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터로 나간 국군과, 그런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파견된 미군들. 이들이 전쟁에서 빨갱이가 아닌 민간인을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한국전쟁’이 가진 정체성은 흔들린다. 그 뿐인가? ‘한국전쟁’ 하나로 수많은 이득을 보았던 그들의 권력도 흔들린다. 그렇기에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그와함께 임진왜란 후 조선이 명나라에 그랬던 것 처럼, 대한민국은 미국을 재조지은의 나라로 섬겼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정부와 지지하는 세력들이.



한국전쟁 이후 미군은 ‘한국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자리를 잡았다. 주한미군이다. 대한민국 정권은 이들을 환영했다. 재조지은의 나라가 아닌가! 국민들과 군인들이 죽던말던 한강다리 폭파하고 그렇게 꽁무니를 내뺐던, 싸울생각은 고사하고 전시작전권은 미군에게 바로 내주었던 그들은 그렇게 주한미군을 환영했다. 주한미군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범죄도 눈감아주었다. 주한미군판 위안부 기지촌을 운영했다. 주한미군이 일으킨 각종 범죄는 쉬쉬하며 눈감아주었다. 훗날 이로인해 일어날 각종 사회적 문제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발굴 유해 봉안식 장면이 전파와 지면을 통해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방송 기자는 이번 봉안식은 전반기이고, 후반기에 더욱 크고 성대한 봉안식이 또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는, 창군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온 국민의 자유 수호 의지와 염원을 담아 더욱 거국적으로 성대히 치뤄질 예정이라고 거듭해서 덧붙였다. 레거시 언론사가 정권에 들러붙은 국정홍보처를 자처하는 것 같았다. p 028


그렇게 쉬쉬하며 침묵하는 동안 대한민국에는 많은 독버섯이 자랐다. 한국전쟁 당시 멍청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의 합작품이던 민간인 학살사건을 비롯하여, 참전미군의 문화재약탈 및 민간인 강간, 국군에 의한 민간인 강간도 당연히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독버섯은 계속 자랐다. 주한미군 위안부인 기지촌 운영으로 생겨난, 부모 없는 혼혈아들과 주한미군에 의한 성범죄 및 살인사건.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대한민국은 쉬쉬했다.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7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미군범죄는 쉬쉬한다. 미군이 버리고 간 기지촌 여성들, 혼혈아들은 대체로 가난을 되물림했다. 혹여나 누군가가 미군을 처벌하자고 말하는 순간 “니가 감히? 빨갱이야?!” 라는 삿대질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이 소설책 저자가 펜을 들었다. 한국전쟁과 멍청한 대한민국 정부, 주한미군이 심어둔 독버섯을 지금이라도 뽑기위하여. 칼보다 붓이 강하기에, 저자는 소설을 썼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주도하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인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을 큰 틀로 하여, 그 속에서 참전미군의 각종 범죄와 기지촌(양공주), 혼혈아 등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생된 각종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그러니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픽션이 아니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29일 미군이 충북 영동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영동읍 주곡리, 임계리 주민 500여 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모아놓고 무스탕 전투기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1999년 9월 AP통신 보도로 실체가 드러났으며, 이후 한미 양국 합동조사가 이뤄지고 2011년에는 사건 현장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기도 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中




이 소설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그 중 눈여겨 볼 주요 인물은 넷이다. 


하지스: 한국전쟁에 파견된 미군이다. 그가 마주한 한국전쟁은 중공군을 무찌르는게 아니었다. 빨갱이가 민간인으로 위장할 수 있으니, 민간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그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료가 서슴치않게 민간인 강간하는 것까지 보며 경악하며 회의감을 느낀다. 이에 반발하여 여자 하나만은 살리고자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미군 범죄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에서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있다.


하봉자: 부자집 여종이다. 종년 팔짜 그러하듯, 봉자 팔짜도 그러했다. 부자집 둘째자식 도완구에게 팔려와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에 도완구는 봉자를 겁탈하려했는데, 미군과 맞딱드린다. 하지만, 팔짜 더러운 년은 어쩔 수 없다던가. 봉자를 겁탈하려는 대상이 도완구에서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 뿐인가? 봉자의 가족들은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봉자의 삶은 고단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그녀를 미군들은 ‘맘’이라 불렀다. 그녀는 미군들에게 음식을 팔고 있다.


도완구: 부자집 둘째아들이다. 친일매국노였다. 독립운동을 한 형제를 일본에 팔아넘겼다. 모처럼 내려온 본가에서 봉자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봉자를 내달라고 행패를 부린다. 그렇게 봉자를 얻어와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미군과 마주하여 죽을 위험에 처할뻔 했지만, 도완구는 어떻게든 미군에게 살아남는다. 미군은 그를 피난민을 모아둔 노근리 쌍굴다리에 던졌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친일매국노 출신인 그는 여전히 돈이 많다. 하지만 쓰레기에게 쓰레기 난다고 했던가.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다. 아들이 회사를 차지한 뒤로는, 뒷방 늙은이 신세다.


남득: 어려서 기지촌에 살았다. 엄마는 양공주였다. 남득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튀기’라 놀림받고 늘 소외된 삶이었다. 그래도 기지촌에 있으면서 미8군 음악, 당대 핫했던 대중음악을 듣고 자라며 독보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재능마저 도둑맞으며 그는 체념했다. 현재는 기술을 배워 하루벌고 하루먹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의 운명을 되물림이라도 하듯 남득의 아들 영수도 척박한 삶을 산다.




잊은 사람, 끝나서 정리된 연으로 알았는데,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법처럼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전쟁이, 아니 학살이 앗아간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그 학살이 남겨준 상처이자 유산인 남동생과 아들……. 58년동안 서리서리 쌓이고 곪아 터져서 짓무르고 굳어져 옹이가 된 기억들이 칼이 되고, 창이 되고, 바늘이 되고, 망치가 되어 그녀의 몸과 마음을 베고, 자르고, 찌르고, 쑤시고, 두들겨댔다. p 037


단군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지켜주지 못해 탄생한 자신들의 자식들을 책임지지 않고 유기했다. 자신들의 무능으로 오랑캐와 왜놈들에게 잡혀가 능욕을 치르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환향녀를 화냥년으로 만들어 스스로 책임을 회피코자 했던 치졸하고 비겁한 역사를 기꺼이 받아들여 재탕했다. 혼혈이 순혈들에게 빌붙어 먹겠다거나 해코지하는 것도 아닌데,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멸시하고 천대하고 구박했다. p 156


어머니는 이장에게 다시 물었다. 좌익 빨갱이 짓을 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죽였다고 하던데, 보도연맹과 아무 상관이 없는 봉수 아버지는 대체 왜 잡아가 죽인 것이냐고. 이장이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p 176


부모 품을 벗어나 멋모르고 하천 변 자갈밭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다가 미군의 총격에 즉사한 어린아이의 시신이 피 웅덩이 속에 그대로 너부러져 있었다. 미군은 무리를 벗어나려던 -이탈이나 도주 목적이 아니라, 용변을 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청장년만 죽인 것이 아니라, 멋모르고 움직이는 어린아이까지 죽였다. 움직이는 대상은 애어른을 가리지 않았다. p 278


이웃마을로 마실이라도 온 친지인 양 쌍굴다리로 어기적대며 다가와 기웃거리는 미군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통역이 없으니 대화를 하려고 찾아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점사격을 하고 표적지를 확인하러 오는 사격수 같은 태도였다. 미군은 피난민 몇몇이 토막 영어로 울부짖는 애원을 개 짖는 소리인 양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는 돌아가서 다시 사격을 가하는 짓을 일과처럼 반복했다. p 286


얼마나 지났을까. 폭격과 총격이 잦아든 뒤 미군이 산속으로 달아난 피난민들을 향해 내려오라고 했다. 미군에게 붙잡힌 피난민이 미군의 명령을 받아 방송헀다. 이 말을 듣고 산을 내려간 피난민들은 사살됐다. 미군들이 쌍굴다리 앞뒤를 포위하고는 기관총과 박격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p 310


그날 엄마와 두 동생을 잃었는데, 엄마와 봉순이는 아직껏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죽었을 터인데, 시신조차 찾이 못했다. 시신을 찾지도, 그날 그때 그곳에서 엄마와 봉순이를 봤다는 증언을 해줄 목격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철둑 위와 쌍굴다리에서 학살된 대다수가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이었으나, 타지인인 엄마와 두 동생은 아는 사람이 없어 증언할 목격자를 찾을 수 없었는데, 경우가 비슷한 다른 희생자들도 마찬가지였다-에 봉자는 58년이 지났어도 엄마와 동생들을 그 자리에서 잃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길이 없었다. p 311



이 소설이 엔딩으로 치닫는 과정은 씁쓸하다. 이 과정이야말로, 이 내용이 소설이면서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진 글이라는 방증일테지만.




미군이 주도한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시 일어난 다른 민간인 학살사건에 비하면, 그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무수한 어려움이 있었다. 국군이 주도한 학살사건이 아닌, 재조지은의 나라에서 온 미군이 주도한 학살사건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유감표명’으로, 겨우 기정사실화 되었을 뿐이다. 이 전까지만해도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언급을 한 사람은 ‘빨갱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2004년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피해자 유족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대게 노근리에 연고가 있는 주민들이었다. 소설 속 봉자와 같은 케이스는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비단 노근리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제주 4.3사건, 광주 5.18 민주화운동 등 정부 주도하에 진행된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다. 목격자가 없다는 이유로, 연고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희생자들은 피해자가 아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책을 쓴 저자가 존경스럽다. 보통 역사소설이라고 치면, 우리에게 먼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그래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사소설 「붉은 그늘」 처럼 가까운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면 달라진다. 권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비난(더 나아가면 협박까지)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저자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권력을 지닌 소수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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