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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해자입니다 - 일본이 찾아낸 침략과 식민 지배의 기록 ㅣ 건국대 중국연구원 번역학술총서 1
아카하타신문 편집국 지음, 홍상현 옮김 / 정한책방 / 2017년 8월
평점 :
이 책은 일본 기자들이 두 발로 뛰고, 찾고, 보고, 듣고 목숨 걸고 취재해 온 기록이다. 그냥 기록도 아닌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모든 증거, 증언을 모아 기록한 자료이다.
예전에는 이런 일본인들을 일부 양심있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이 들은 양심있는 일본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본인이다. 정상적인 일본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이런 기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을 탄압하고, 과거를 부정하는 현재 일본 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에도 남아있는 잔당들이 비정상인이었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보였던 거다. 정말 정상적인 일본인이라면 아카하타 신문 기자들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인터넷 뉴스 생활문화 챕터를 매일 챙겨보는 편인데, 그 중 책 카테고리에 '전쟁의 진실'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무심코 클릭한 그 기사에는 '전쟁의 진실'이라는 책을 일본 신문기자들이 작성한 내용이라는 것과, 앞서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라는 책을 먼저 발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토록 소원했었던 정상적인 일본인이 말하는 자국의 잘못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였고, 책을 받자마자 1권이었던 '우리는 가해자입니다'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나의 서평은 서평이라기 보다는, 아카하타 신문 기자들이 기록한 기사들을 그대로 본 포스팅에 옮겨놓는 것이 반 이상 될 것이다.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얼만큼 잘못을 했는지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기도 하며, 부디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전후 70년 아베 담화에 대한 전문가간담회 보고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많은 비서양 식민지 사람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식민지화에 제동걸 걸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며, 러일전쟁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썬 러·일 두 나라 간의 침략전쟁이었을 뿐입니다 - P 24
지금까지도 일본 아베정부가 하는 말 중 하나다. 그나마 우리는 러일전쟁의 의도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이 얍삽하게 러시아를 선제 공격했다고 배운다. 물론 일본 아이들은 배우지 못하는 사실이다.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넘어 중국까지 먹으려는 시동을 건다. 그렇게 동아시아는 일본의 야욕을 위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51년에 걸친 일본의 침략전쟁 연보>
1894년 7월 청일전쟁, 일본이 타이완을 탈취
1904년 2월 러일전쟁
1910년 8월 한국병탄
1919년 3월 한국에서 3.1 독립운동
1919년 5월 중국에서 5.4 운동
1931년 9월 류타오후사건, 만주사변 개시
1933년 3월 일본이 국제연맹 탈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사건, 중일전쟁 시작
1937년 12월 난징대학살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입, 제2차 세계대전 시작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 군사동맹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시작, 일본군이 말레이반도 상륙, 진주만 공습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군 참패
1943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의 카이로 선언
1945년 3월 도쿄대공습, 오키나와 전투
1945년 5월 독일항복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 발표
1945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포츠담선언 수락, 패전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의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의 모든 통치권을 빼앗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성립시킵니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제국 100년의 장계'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결과였습니다.
*제국 100년의 장계 : 한국을 병합하고 이를 제국 영토의 일부로 함은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외의 형세를 지켜보다 적당한 시기에 병합을 실행해, 반도를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통치하에 두고 다른 나라들과 조약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 100년의 장계가 된다. (메이지시대 각의 결정 1909년 7월 6일) - P 32~33
도쿄 야스쿠니 신사. 신사에는 유슈칸 이라는 전쟁 박물관이 있다. 역사 왜곡의 중심지이기도 한 유슈칸. 매번 도쿄에 갈 때마다 꼭 이 곳을 들러봐야지, 일본 놈들이 어떤 개소리를 짖어대는지 내 눈으로 봐야지 라고 결심을 하는데, 매번 못 갔다. 이유인 즉 유독 야스쿠니 신사 주변으로는 우익세력이 모여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실제로 메이지 신궁에 갔을 때, 우익세력들이 대거 몰려와서 반한, 혐한을 강조하며 시위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했던지라 더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 도쿄행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들러 봐야겠다. 얼마나 신박한 개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 두 눈으로 봐야하니까.
유슈칸에서는 "일본군 점령하에서 한번 타오른 불꽃은 일본이 패배한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라며, 본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앞당겼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일본이 조선 식민지배를 했기 때문에 조선이 근대화에 성공했다 라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욕도 아깝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일본에만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내에도 있다. 꽤 많이 있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술이 아닙니다. 일본에 의한 옜 종주국의 타도와 점령통치가 이 나라들의 독립에 있어 필수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독립의 움직임은 시작되었으니까요"
- 게이오대학 구라사와 아이코 명예교수
중국에서 인체실험과 세균전을 실행한 일본군 731부대. 일본은 731부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 가해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어요 같은 신박한 개소리다. 일본 패전 후 전범재판 때 전부 처리 되었어야 할 731부대의 주요 인사들은 미국의 묵인하에 전부 방면되었다. 그 어떤 나라도 이런식으로 잔혹하게 인간을 상대로 실험을 하지 않았을테니, 미국은 일본이 실험한 내용이 얼마나 탐이 났을까. 아니, 탐이 났다고 범죄자들을 죄다 풀어주고, 심지어 다시 의학계 복귀까지. 결국 미국이 외치던 독립, 민주주의도 그들의 기준에서 였을 뿐이다.
731부대는 페스트균 등의 세균 병기를 극비리에 연구·개발했고 데이터를 얻기 위해 '마루타'로 불리던 중국인 포로들에게 인체실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소각로에서 불태웠습니다 - P77
731부대는 인체 실험으로 효과를 확인한 세균을 실전에 사용했습니다. 실전에서 처음 장티푸스 균을 살포한 것은 1939년 노몬한 사건 이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731부대 등을 중국 각지로 보내 1940~1942년에 중국 내 십 수개 도시에 세균을 살포했습니다. 기록된 사망자수는 2차감염에 의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2만명에 이릅니다 - P 82
이시이 시로 부대장을 비롯해서 731부대에서 인체 실험을 진행한 의사와 의학자들은 전후 미국에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도쿄 재판에서 전범으로서의 혐의 추궁을 면책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의학계로 복귀했습니다. - P83
침략·학살·점령의 상흔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으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떤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고바야시 다로 상등병의 일지
-정의감 강하던 아버지도 결국 가해자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 요시코가 <아카하타신문>에 아버지, 고바야시 다로 당시 상등병의 일지를 제공했습니다. "가족으로서는 가해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침묵하고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잖아요. 괴롭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난징점령 (1937년 12월) 까지의 행군과 일본 육군 최대 규모 작전인 '쉬저우 작전'의 경로를 기록한 일지입니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민간인)은 총살"등의 기술이 남아있습니다. 일지의 기술만 봐도 살해당한 민간인이 15명 입니다. (중략)
포로 살해 관련 일지에는 제16사단의 나카지마 게사고 사단장이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고 명령한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중략)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는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일지를 읽었을 때, 기록되어있는 가해의 참상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늘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아버지였기에 더욱 무서웠고, 전쟁의 끔찍함 또한 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다고 바뀔 것은 없겠지만, 스스로 가해를 저질렀다는 진실과 마주할 수는 있겠지요.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포스팅으로 옮겨 쓴 책의 내용, 이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읽으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느라 혼날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되려 이런 기록을 한 일본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 스스로는 감추고 싶었을 역사인데, 오히려 더 찾아내어 만천하에 공개했으니. 피해국가 정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을 가해국가에서, 그것도 기자들이 이렇게 나서서 알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진데. 아마 협박이나 테러도 많이 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으로 귀화하신 호사카 교수님도 일본 우익세력에게 많은 협박을 받으셨다고 하니까. 아 물론 국내 우익세력도 있었다고 하니 말 다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2권을 읽어야 하나 순간 고민을 했다. 하지만 우리 역사니까. 누군가는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역사다.
순간 순간 차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2권을 빨리 읽어야지.
731부대는 페스트균 등의 세균 병기를 극비리에 연구·개발했고 데이터를 얻기 위해 ‘마루타‘로 불리던 중국인 포로들에게 인체실험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소각로에서 불태웠습니다 - P77
731부대는 인체 실험으로 효과를 확인한 세균을 실전에 사용했습니다. 실전에서 처음 장티푸스 균을 살포한 것은 1939년 노몬한 사건 이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731부대 등을 중국 각지로 보내 1940~1942년에 중국 내 십 수개 도시에 세균을 살포했습니다. 기록된 사망자수는 2차감염에 의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2만명에 이릅니다 - P82
이시이 시로 부대장을 비롯해서 731부대에서 인체 실험을 진행한 의사와 의학자들은 전후 미국에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도쿄 재판에서 전범으로서의 혐의 추궁을 면책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의학계로 복귀했습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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