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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그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이다. 앞서 발매되었던 일본편 1,2권이 규슈, 아스카, 나라 지역의 이야기라면 오늘 리뷰할 3권은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도시, 교토에 얽힌 한일고대사 이야기다. 아 일부 근대사까지도 포함하고 있기는 하다. 뭐 여튼! 교토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문화유산이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유홍준 교수는 교토에 대해 3,4권으로 나누었다. 3권에서는 교토의 역사에 대해 주로 다룬다면, 4권은 교토의 명소에 대해 다룬달까? 하지만 나는 아직 4권을 읽지 못하였기에 (...) 일단 3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려 한다.
난 이상하게 TV속에서 강의하는 유홍준 교수는 너무 좋은데, 책으로 만나는 유홍준 교수는 좀.. 나랑 안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tv속에서 강의를 하는 모습은 보다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책 속에 있는 유홍준 교수는 조금은 더 딱딱하고 권위적이게 느껴진달까. 뭐 그렇다.
이렇든 저렇든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는 실존하는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폭 넓고, 깊이 있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 거기다 답사를 같이 했던, 다른 전공자들이 해당 문화유산을 보는 시선이나 이야기도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화유산에 대해 여러 관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교토는 워낙 문화 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지만, 각 유산마다 지어진 시대가 다르고 유래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려나 궁금했는데, 부제인 ‘교토의 역사’ 답게, 시대 순으로 답사를 진행하였다. 일부 장소는 내가 갔던 곳도 있었고, 일부 장소는 가고 싶었지만 못 간 장소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 나보고 다시 교토에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ㅠㅠㅠ
교토의 서쪽, 우즈마사 지역에 있는 고류지(광륭사). 세 번째 교토여행을 했던 당시에 가보려고 했던 절이었는데, 사정상 못 갔다. 그래서 정말 정말 엄청나게 미련이 남는 절이다. 고류지는 교토 도래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집단인 ‘하타씨(秦:진)’가 씨사(氏寺)로 세웠던 절이었고, 교토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이다. 심지어 이 안에는 우리나라 국보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똑 닮은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또한 이 절을 지은 하타씨, 즉 진하승 부부의 목상도 남아 있다.
고류지 주변으로는 하타씨 지도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 정확히는 석실도 남아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근방에서는 진하승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여튼! 지금의 교토 땅에서 관광지로도 유명한 후시미이나리타이샤(여우신사), 마츠오신사, 아라시야마 제방 등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하타씨’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하타씨가 묻혀 있는 장소가 바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가지 못했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ㅠㅠㅠ
그럼에도 한국인으로서 진하승을 모른다는 것은 아일랜드 사람이 미국의 케네디가 아일랜드 사람임을 모르는 것과 같고, 스코틀랜드 사람이 미국의 카네기가 스코틀랜드 사람임을 모르는 것과 같은 셈이다. 그리고 이미 이민간 지 150년도 더 지난 하타씨의 진하승을 여전히 한반도 도래인이었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일랜드 사람이 케네디를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말하고, 스코틀랜드 사람이 카네기를 스코틀랜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결국 하타씨와 진하승은 한민족 이민사에서 첫번째 보이는 위대한 성공사례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P 091
정말 중요한 사실을 콕 집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교토를 가서, 하타씨가 만든 수많은 유명 신사와 사찰을 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당연하게 일본의 관광지라고만 생각하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물론 일본의 유명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면 조금이나마 느끼는 바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내 첫 교토 여행 당시 여우신사를 갔을 때 ‘아, 여기가 그 유명한 여우신사구나!’ 하고 사진만 열나게 찍고 나왔다. 그 이후 한일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우신사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 안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다 알고 난 다음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소감이라고나 할까? 조금 남달랐다.
뿐만 아니다. 교토에서 그 유명한 기요미즈데라(청수사)를 처음 갔을 때도 기념사진만 열나게 찍고 왔다. 하지만 이후에 기요미즈데라를 세운 사람이 백제인 후손인 사카노우에 다무라 마로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청수사에서 다무라 장군을 지금까지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다시 찾았을 때는 역시 그 느낌이 남달랐다.
이렇듯 교토의 유명 관광지 대부분은 한반도 도래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자세히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이 곳을 만든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 온 후손들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게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생각인 면도 있긴 하다. 한반도에서 살다가 바로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 1,2세대가 만들었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여러 세대가 지난 뒤의 후손들이니 도래인의 핏줄을 잇고 있을 지 언정, 그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고 생각하는 방식 역시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그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한반도의 문화를 유지했을 뿐일테니. 그러니 그냥.. 교토의 수많은 명소를 만든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한반도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그들이 만들었다는 것, 그 정도만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교토 북부에 있는 히에이잔(히에이산). 일본의 영산으로도 불리는 이 곳에는 엔랴쿠지라는 엄청나게 큰 사찰이 있다. 나에게 엔라쿠지는 엔닌스님과 신라대명신, 장보고 정도의 키워드로 만 떠오르는 이 곳에는 내가 몰랐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본의 역사도 있었다.
히에이산 연력사는 난폭한 승병으로 악명 높았다. 연력사는 창건 이래 왕족과 귀족의 기진으로 많은 장원을 소유하여 든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불교세력으로 성장했다. 돈이 생기니 이를 지키기 위해 승병까지 조직했던 것이다. 나라 흥복사와 세력다툼이 일어나면서 급기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됐다. 이를 남도북령이라고 했다. 남도는 흥복사, 북령은 연력사를 말한다. 남도북령의 승병들이 싸우면서 불태운 절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들은 무사들도 압도하는 무력을 갖고 있었다. (중략) 이렇게 전투와 합전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신불을 앞세우고 나오는 승병들을 조정에서도 감당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조정과 귀족은 경호와 진압을 위해 무사를 키웠다. P195, 198
일본 왕실에서 여러 방면으로 불교를 지원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결국 일본 불교의 폐단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무력을 앞세우는 승병을 조직하는 것. 오죽하면 당시 원정정치를 했던 시라카와 법황도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가모가와의 물, 쌍륙의 주사위, 그리고 산법사(히에이잔 승병)이다.” 라고 했을까. 결과적으로 폭력적인 승병에 맞서기 위해 ‘무사’라는 집단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무사들은 변해가는 시대에 올라타 서로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고, 전국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마왕, 오다 노부나가 등장. 이 때 이야기를 하려 치면 할 말이 정말 많지만(ㅋㅋㅋ) 각설하고, 히에이잔 승병들이 오다와 반대편에 있던 아자이 나가마사(알고보면 오다 노부나가의 매제)의 편을 들게 되었다. 이게 빡친 오다는 승병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히에이잔 통채로 불태우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히에이잔은 사흘 밤낮으로 불탔다. 산이 불탔다는 건 당연히 산 속에 있던 엔랴쿠지도 불탔고,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승병들이 죽었다는 말이 된다. 기록이 따르면 약 2천명이 죽었다고...
이 후 엔랴쿠지를 포함하여 그 어떤 절에서도 승병은 조직되지 않았다고...... 오다가 괜히 마왕으로 불리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ㄷㄷ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히에이잔 엔략쿠지는 위에서 내가 언급했듯 신라명신, 장보고 와도 연관이 깊다. 838년 견당사로 당나라에 갔던 일본의 엔닌스님은 당시 장보고가 창건한 적산법화원에서 묵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엔닌스님이 장보고 에게 쓴 편지도 남아있다. 엔닌 스님에 이 곳에 돌아온 뒤 장보고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적산법화원에서 모시던 신라명신을 그대로 이 곳에 모셔왔다. 또한 장보고 기념탑도 엔랴쿠지에 남아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사카노 우에 다무라 장군의 조각상이다. 기요미즈데라 전촌당 전각에 모셔져 있다. 실물을 한번 보고 싶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그저 전촌당 건물 뿐. 이 조각상은 정말 어쩌다 한번 씩만 공개된다고 하니 이거 뭐. 내 생에 볼 수나 있으려나 싶다.
일본에선 오래된 전문 상점을 노포라 쓰고 ‘시니세’라 읽는데, 그냥 오래된 것이 아니라 한자리에서 4대, 5대를 이어가며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는 전문 상점을 말한다. 단팥죽 장사를 해도 남에게 꿀릴 것 없이 당당히 살아가는 일본인의 생활 자세는 부럽고 배울 만 하다.
모두가 그 전문성을 높이 사고 장하게 생각해준다. 이거 해서 돈 벌면 때려치우고 딴 것 하겠다는 자세나 내 자식은 큰돈 되지 않는 이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다. 전문인의 자부심,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자세가 낳은 전통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정신적인 하나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된다. P252
내가 일본을 높게 생각하는 점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유학자들이 입맛대로 바꾼 이상한 유교사상 아래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망해갔는지를 보아서 그런 것일까? 우리나라는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 보인다. 심지어 지금은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에 제일 큰 가치를 두고 ‘이 일은 돈이 안돼’ 라고 생각하면 애초에 시작 하지를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고. 지금 까지 시대가 많이 변화해 왔지만 지킬 건 지켜가며 나라가 변화했다면, 우리가 일본을 아무리 욕해도 배울건 배워야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텐데..
나는 분명 한일관계사에 관련된 역사 기행을 본 건데, 왜 ... 뒷 맛이 이리 씁쓸한지 모르겠다 ㅠㅠ
유학자들이 입맛대로 바꾼 이상한 유교사상 아래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망해갔는지를 보아서 그런 것일까? 우리나라는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 보인다. 심지어 지금은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에 제일 큰 가치를 두고 ‘이 일은 돈이 안돼’ 라고 생각하면 애초에 시작 하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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