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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나라 역사를 따라서 한국을 찾아 걷다 - 일본 아스카.나라에 남아 있는 한민족 문화유산 탐방기
김홍수 지음 / 북랩 / 2019년 7월
평점 :
한일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지라 관련 책을 더러 읽었다. 올 봄에는 『규슈 역사를 따라서 한국을 찾아 걷다』라는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저자 김홍수님은 앞으로도 일본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도래인의 흔적을 찾아다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얼마전에 2권 격인 『아스카,나라 역사를 따라서 한국을 찾아 걷다』가 나왔다. 1권을 샀으니, 2권도 사는 건 인지상정이기에 바로 구입했다. 그리고 ..... 책장에 묵혀놓다가 (ㅋㅋㅋ) 얼마전에야 읽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1114/pimg_7440571782357555.jpg)
앞선 1권에서 다뤘던 규슈에도 도래인의 흔적은 많지만, 그럼에도 도래인의 흔적을 찾기에는 긴키지방(교토, 오사카, 나라, 와카야먀 등)만큼 많은 곳이 없다. 긴키지방이란 ‘옛 기나이(흔히 말하는 수도권)에 가까운 지역’라는 뜻인데, 일본 고대사에서 기나이 즉, 수도권은 일본 천황이 살던 곳이다. 헌데, 왜, 도래인의 흔적을 찾는데 일본의 수도권이 나오는건가? 싶을 수 있다. 이게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일본 고대사에서 도래인의 위치는 언제나 권력자 측근이었다. 정치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교육 등 각종 기술에서도 넘나 뛰어나다보니, 일본 고대 건축,유물에서 도래인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게 바로 한국을 대할 때, 일본이 가지고 있는 고대사 콤플렉스다. 하하..하하하..하하..
자 그럼 일본의 수도(?)의 역사를 보자. 각 시대별로 ‘아스카 → 오사카(나니와쿄, 645년~) → 나라(헤이죠쿄, 710년~) → 교토(나카오카쿄→ 헤이안쿄, 784년→794년~) → 도쿄(1869년~)’ 로 이루어진다(쿄는 대충 수도를 말한다). 도쿄를 제외하면 지금은 칸사이 지방이라고 불리는 지역들이자,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제일 많이 찾는 핫했던 일본 관광지이기도 하다. 덧붙여 말하면 이들 지역에서 수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사찰들은 99.9%가 도래인 내지는 도래인 후손들이 만들었다. 다만 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게 함정.
이 책은 아스카, 나라에 한정한 답사기다. 교토까지 넣기에는 그 양이 정말 어마어마할 테니, 아마 교토는 3편으로 나오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1192년 최초의 막부, 가마쿠라 정권이 시작되면서 권력은 천황이 아닌 막부로 넘어간다. 그 즈음부터 일본 정치에서 내노라 하던 도래씨족들의 이야기도 많이 사라졌다는게 함정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천황/일왕 표현에 대해서 메이지일왕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는 천황, 메이지 부터는 일왕으로 표현)
목차를 보고 기대감 뿜뿜. 참 이상한게, 나름 도래문화 관련 서적을 많이 봤다고 봤는데, 아스카/나라 쪽 역사는 금새 까먹는다. 반면 교토쪽 역사는 머리속에 계속 남아있다. 아무래도 직접 보고 안보고의 차이인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ㅠㅠ. 애초에 내 일본 여행은 ‘한일고대사&한일근대사’를 주제로만 다녔는데, 지역이 너무 한정적이었다. 교토 내지는 도쿄. 몇번을 가도가도 자꾸 가봐야 할 답사지가 너무 많아서 아스카, 나라 지역은 발도 못디뎠다. 덕분에 아무리 책을 읽어도 머리속에 남지 않는 사태가 발생. 그래서 더 의도적으로 아스나, 나라지역 한일 고대사를 더 열씸히 읽고 있는데..왜 기억에 남지를 않는건가 !!!!!!!!!!!!!!!!!
1979년 차 밭을 개간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묘실 안의 유골 및 진주와 함께 동판으로 만든 묘지가 발견되었다. 그 묘지에 오오노 야스마로(고사기 편찬자)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데 그가 지금의 JR나라역의 서쪽에 살았다는 것과 723년에 사망하였음이 기록돼 있어서 실재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일본 내에서 큰 충격을 준 발견이었다. _P 022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 고사기는 일본서기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서다. 물론 그 진위여부는 둘째치고 말이다. 다만 고사기 편찬자로 알려진 오오노 야스마로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편은 아니었는데, 나라현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일본에서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왔다. 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의 무덤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무덤 속에서 발견된 묘지명 덕분에. 굳이 일본 역사서 편찬자 무덤에 대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수 도 있지만, 이 편찬차를 비롯하여 그의 가족은 백제계 도래인이다. 오오노 야스마로를 포함한 오오씨는 백제 멸망시 백제 왕자 풍장을 호위하던 사람들로, 당시 호위하던 사람들 중에는 오오노 야스마로의 조부가 있었다. 적어도 백제 멸망 시 일본으로 넘어온 백제계 도래인 1세대라고 보면 될 듯하다(백제가 한창 일본과 교류하던 도래인은 제외하고). 그래서 그런걸까? 고사기에서는 백제를 빼면 이야기가 훅 줄어들 정도로,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더 자세한 백제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건 사실이다.
아스카 지역은 소가 씨의 본거지와도 가깝고 일찍부터 이 세력권하에 있었다. 588년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데라가 소가씨의 씨사로서 조영되고 592년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인 스이코 천황이 도유라노미야에서 즉위한 후 아스카와 그 인접 지역에는 천황의 궁전이 위차하게 되는 등 소가씨의 영향이 크게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간고지 가람 연기』에 의하면 588년 아스카데라의 조영에 있어서는 백제로부터 불사리를 가져온 승려와 함께 사원 건축의 공인, 와박사, 화공 등의 기술자가 백제로부터 왔다고 한다. _P 076
소가씨는 야마토 정권 당시 대표적인 실권자였다. 모노노베씨가 소가씨를 몰아낼 때까지 소가씨는 아스카 일대를 호령했다. 무엇보다 소가씨는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소가씨를 몰아낸 모노노베씨 역시 도래인이었다는 건 함정이랄까. 뭐 이 시대의 역사는 누가 뭐라해도 도래인들이 정치 전면에 나섰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도 부정 못할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조금 갸우뚱하는 지점이 나왔다.
덴무 천황 사우 그의 황후인 우노노사라라가 지토 천황이 된다. 그 이후 그녀의 아들인 쿠사카베 황자가 천황을 승계하지 못하고 일찍 사망함으로써 그의 손자로 알려진 가루 황자가 성장한 후에 지토 천황의 뒤를 이어 몬무(文武)천황이 된다. 몬무천황도 지토천황의 손자로 알려지고 있으나 출자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는 인물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으나 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태종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는 같은 이름의 몬무 천황이 즉위하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인물의 연관성을 추적하는 연구도 많이 있으므로 그의 출자에 대한 사실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_P 113
음... 신라의 문무왕과 일본의 몬무천황의 연관성이라.... 음....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편입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일본학전공이었는데, 음....
지금까지 읽어본 한일 고대사 관련 책에선 본 적이 없는 내용이라 으음...음. 내가 이런 내용들 때문에 정말 일본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있는지, 일본에서는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해져서 일본사학자가 쓴 한일고대사를 읽기 시작한거다(하지만 고대사 원서는 너무 어렵 ㅠㅠㅠ).
그 어떤 역사든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이 담길 수 밖에 없는데, 고대사는 더욱 그렇다. 특히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얽힌 역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한국인이 쓴 고대사는 당연히 한반도가 주가 되기 때문에, 내 시각이 자꾸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것 같아서 일본역사가가 쓴 고대사책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지금껏 일본 원서는 꽤 많이 읽었는데 와, 고대사...는..전문적인 용어나 고어가 너무 많아서 읽는게 버겁긴 하지만, 확실히 한국인이 쓴 것과는 다른 시각이 느껴졌다.
고대사는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가 않아서 상상력을 많이 가미해야한다고 하지만, 이게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그냥 판타지가 되어버린다. 특히 한일 고대사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그 순간부터 역사 왜곡이 되니 참. 예를 들어 일본이 줄창 외치는 ‘임나일본부’가 그 중 하나다. 근데 또 ‘임나’라는 지명이 한반도에 아예 없었느냐? 그건 또 아니다. 한/중/일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임나’라는 지명이 나온다. 대략 정리해보면 일본이 줄창 외치는 그런 ‘임나일본부’는 없으나, 가야연맹에 ‘임나’를 사용하는 가야가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정도? 이래저래 한국과 일본의 시각 양쪽에서 다 보아야만, 그나마 균형잡힌 시각, 상상과 사실을 골라내는 시각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임나’에 대한 기록: 한국 (광개토대왕비문, 삼국사기 열전 제6 강수조, 진경대사 비문), 중국(송서 왜국전), 일본(일본서기))
앞서 1권을 읽을 땐 잘 몰랐는데, 이번 2권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답사기에는 응당 관련 사진이 많이 실려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사진이 적다. 특히 저자가 이야기하는 답사지, 유물들에 대한 사진들이 적다 못해 없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면 도록 사진이라도 실었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없어서, 솔직히 저자가 말하는 수 많은 보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쇼소인의 헤이라덴하이노하쯔가쿠교와 삼성리움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는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 국보 140호인 나전단화금수문경이 같은 문양으로 남아 있어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쇼소인의 헤이라덴하이노하쯔가쿠교는 야광 조개를 잘라 만든 하얀 나전과 동남아시아산의 붉은 호박 등으로 꽃이랑 새의 문양을 만들고 그 주변을 흰색과 파란새그이 작은 터키석으로 메웠다. P 043
소쇼인의 보물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물론 관련 사진은 없다. 오로지 문자만 있다. 하다못해 내가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나전단화금수문경을 보기라도 했으면 상상의 여지라도 있는데, 이마저도 기억속에 없다. 정말 책 속에 나오는 수 많은 건축물,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이런식으로 서술이 되어있다.
해당 보물에 대해 한 번 쯤 보았거나, 혹은 미술에 대해 상당히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저자가 말하는 보물이 무엇인지 당최 머릿속에 그릴 수 없다.
도래인 문화 유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나지만, 아무래도 나라·아스카 쪽은 직접 가본적이 없다보니 몇 몇 책으로 습득한 이미지가 전부다. 과거에 접했던, 기억에 남는 도래인 유물이라면 위 텍스트를 보면 바로 머리속에서 형상화를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형상화 하기가 어려운거다. 그나마 한국 보물과 비교 서술한 경우, 대부분 직접 보거나 한국사 책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다행이었다. 결과적으로 저렇게 자세히 설명해준다 한들 사진이 없으면 머리 속에 그릴 수가 없다. 본인이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도록 사진을 이용해도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쉬울 따름이다.
난 분명 이 책에 1권 격인 『규슈 역사를 따라서 한국을 찾아 걷다』를 읽었다. 그 때는 왜 이런 점을 못느꼈나 생각해보니, 규슈 관련 도래인 유적 및 유물 사진을 워낙 많이 봐왔기에 머리속에서 자연스레 그려진 덕분이었나보다. 결국 이 책은 사전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읽어야만, 흥미가 있을 법한 책이었던 거다. 책vs책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면에서 보면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가』가 초심자에게 얼마나 친절한 책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저자가 3권을 계획한다면, 사진의 중요성을 인지했으면 한다.......하하..ㅠㅠㅠ..
아스카 지역은 소가 씨의 본거지와도 가깝고 일찍부터 이 세력권하에 있었다. 588년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데라가 소가씨의 씨사로서 조영되고 592년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인 스이코 천황이 도유라노미야에서 즉위한 후 아스카와 그 인접 지역에는 천황의 궁전이 위차하게 되는 등 소가씨의 영향이 크게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간고지 가람 연기』에 의하면 588년 아스카데라의 조영에 있어서는 백제로부터 불사리를 가져온 승려와 함께 사원 건축의 공인, 와박사, 화공 등의 기술자가 백제로부터 왔다고 한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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