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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그 유명한 류성룡의 「징비록」. 이렇게 얇은 책인데, 이 책을 읽기까지 참으로 오래도 걸렸다. 누가 썼는지도 알고 그 내용도 잘 알고, 동명의 드라마도 본방사수 할 정도로 봤던 나였다. 하지만 책 만큼은 못읽겠다 싶었다. 아니, 동명의 드라마를 보기 전 까지는 읽어볼까 싶기도 했는데, 동명의 드라마를 보고 나서 더욱 읽을 자신이 없었다. 화면으로 봐도 그렇게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는데, 문자로, 책으로 읽으면 정말 더욱 답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는 내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왜 이럴 수 밖에 없었는지 참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읽는 내내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저 밑 말단 병사부터 시작해서 중간 장수들, 하다 못해 왕까지 도망간다. 전쟁 시작 전부터 정세파악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전쟁 시작 후에도 그랬고, 끝날 때 까지도 그랬다. 정말 진짜로... 이순신 장군님 아니었으면 분노해서 책을 집어던질 뻔. 오죽하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참고 넘어 가다가 도저히 이런 이런건 안되겠다 싶어서 포스트잇을 붙인게 저 정도.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자기 나라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본래 중국인이라고 한다. 일본까지 흘러 들어간 그는 나무장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중략) 큰 공을 세워 대관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권력을 잡은 그가 결국 겐지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중략) 겐지 왕국이 망한 지 10년, 그동안 여러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드나들었지만 통제를 워낙 엄격히 한 까닭에 그들 사정은 전해지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야스히로를 죽인 히데요시는 다시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보내고 우리에게도 사신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1590년 3월, 드디어 우리 사신 일행이 요시토시와 함께 일본을 향해 떠났다. 요시토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임금께 바쳤다. 임금께서는 공작새는 날려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관토록 하셨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임진왜란을 이야기 하면 보통 사람들은 당시 일본의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성일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허위보고 한게 문제다”라고. 조금 공부를 한 사람들이라면 김성일이 아닌 선조를 탓한다. “김성일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황윤길은 ‘전쟁은 일어날거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냐고. 선택은 선조가 한것이 아니냐고.” 솔직히 말하면 난 후자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더 있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부터, 이미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이야기가 조선의 조정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꼈던 율곡 이이는 1583년에 대량의 군사를 키워야 한다(십만양병설)고 했고, 이 책의 저자 서애 류성룡은 환란을 대비해 능력있는 장수를 선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대마도 조차도, 전쟁이 일어거라며 미리 알려주었으며,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류큐에서도 1591년에 사신을 보내서 일본이 침략할 것 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자, 그리고 1590년, 징비록에서 언급한 대로 대마도에서 온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조총 두 자루를 건네주고 간다.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무기고에 처박고 끝냈다. 서애가 말하기로는 조총이 들어온게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징비록을 덮고, 잠시 조선왕조실록을 들쳐보자.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1일 갑인 1번째기사 /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 화약이 뛰어나니 관직 제수를 비변사가 아뢰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2일 을묘 3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버려진 종을 사용할 것을 간원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3일 병진 2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큰 종을 사용할 것을 비변사가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5일 무오 1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큰 종을 사용할 것을 상차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2일 을축 1번째기사 / 총통을 주조하기 위해 큰 종을 사용할 것을 정원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4일 정축 1번째기사 / 선전관 박세현이 전라도에서의 왜변의 상황을 아뢰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7일 경진 1번째기사 /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이 본도 사찰의 종으로 총통을 만들자고 청하다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6월 17일 경진 2번째기사 / 오래 된 종은 신령스러우므로 총통 주조에 사용할 수 없다고 정원에 전교하다
선조 바로 위의 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왕실의 왕자군들을 불러 모았고 그 유명한 ‘익선관’ 스토리의 주인공인 하성군이 왕이되니 그게 바로 선조다. 명종 10년 즉 1555년에 왜인 평창진이 총통을 들고왔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40년 전에 왜인 평창진이 매우 뛰어난 총통을 들고 조선에 온 것이다. 그가 들어곤 총통이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조총’이었다. 서애는 1590년에 소 요시토시가 들고온 조총이 조선에 들어온 처음이라고 하였지만, 이미 임진왜란 발발 약 40년 전에 조총은 조선에 있었다.
당시 비변사에서는 왜인 평창진이 들고 온 총통, 즉 조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려진 큰 종이 있으니 그것을 녹여 총으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왕 명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남도지방은 잦은 왜변, 왜인들의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조총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지만,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절에 있었던 큰 종을 녹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나라였다. 조선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이런 함몰된 조선에서, 딱 이 시기에 정세파악에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인재들이 이 책의 저자 서애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인거다.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서애를 비롯한 사람들은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 여기저기 방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1591년 봄,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일행이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 등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부 지방 삼도와 방어를 맡도록 했는데 (중략)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그 가운데서도 경상도에는 특히 많은 성을 쌓고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 등지에는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하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전 전적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이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유래없는 200년 평화는 조선의 윗대가리만 좀먹은게 아니라 저 밑바닥까지 좀 먹고 있었던거다. 그래도 생각있는 관리들이 만약을 대비해 성도 쌓고, 해자도 만드려고 했더니, 전부 보이콧이었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한 거라고는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한 정도였다.
1592년 4월 13일, 왜놈들이 부산으로 처들어왔다. 적에 대한 방비도 안되어 있었던,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은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여기까지다. 그 뒤는 이렇다. 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좌병사 이각은 자기 첩과 함께 도망갔다. 밀양부사 박진도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김해부사 서예원도 도망갔고 초계군수도 도망갔다. 순찰사 김수도 도망갔다. 용궁현감 우복룡이라는 사람은 방어사에 귀속되어 북쪽으로 올라가던 군사들을 붙잡고, 반란군이라고 칭하며 몰살시켰다. 도망간 순찰사 김수는 이 우복룡이야 말로 공을 세웠다며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정3품 자리에 올랐다. 왜놈들이 처들어왔는데 나라꼴이 이랬다. 도망가거나, 팀킬하거나.
-상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순변사 이일은 충주로 도망갔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의 곡식을 꺼내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으로 불어났따. 순식간에 대오를 갖춘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모두 전투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 불과했다. 그때 적군은 이미 선산에 이르렀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코 앞에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못한 이일이 그를 목 베려 했다.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둬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에도 적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십시오.”
당시 적들은 장천에 머무르고 있엇는데, 그곳은 상주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일이 개령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 목을 베고 말았다.
(중략) 잠시 후 몇 사람이 숲속에서 나와 서성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은 적이 엿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아침 일이 머리에 떠올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중략) 곧이어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따. 10여자루 조총에서 탄환이 불을 뿜는데 맞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미 늦었다고 깨달은 이일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곧 적이 온다고 보고 한 백성을 민심을 동요 시킨다고 공개처형했다. 같은 날 오후에 왜놈이 엿보는 것을 본 병사들이 있었지만, 본인들도 처형당할까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안되어 왜놈들이 처들어왔다. 적이 온다고 보고한 백성을 처형한 순변사 이일, 그는 꽁지를 내빼고 도망갔다. 심지어는 말도 버리고 의복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심으로.. 징비록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계속 이런 이야기의 향연이었다. 계속 읽다가는 속병나서 미칠 것 같았다.
왜놈이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길목에는 산새가 험한 조령(문경새재)이 있다. 이 곳에서 진을 쳤더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의 명장 신립 장군은 조령을 포기하고 너른 벌판인 탄금대에서 진을 쳤다. 그리고 앞서 도망간 순변사 이일 처럼 적의 동태를 보고한 병사를 공개처형 시킨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에서 전멸.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다.
신립장군에 대해서 내 마음속 평가는 아직도 갈팡질팡이다. 몇 달 전 신립장군에 묘소도 갔다왔고, 몇 년 전에는 탄금대도 둘러보고 왔다. 근데 매번 마음이 변한다. 징비록을 읽은 현재는 이런 마음이다. 신립은 본인의 능력에 자만하다가 괴멸했다는 것.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신립이 매복을 포기한 문경새재를 왜놈들은 걱정하며 들어왔다는 점이다. 혹시나 매복이 있을까 정찰병도 보내고 여러번 확인 했는데, 매복한 조선군이 1도 없으니 왜놈들 입장에선 개꿀. 그 덕에 왜놈들은 춤을 추며 문경새재를 통과하고, 충추까지 와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 부대를 몰살시킨 것이다.
후후...여기까지 읽어도 답답히 미칠지경인데 다음 이야기는 더 답답하다.
4월 30일 새벽,
임금께서 서쪽을 향해 출발하셨다.
그 유명한 선조의 ‘몽진’이다. 그렇게 한양을 지킨다고 뻥카를 날리고서는 짐싸고, 종묘에 있는 지네 선조들 위패 모시고 위로 떠났다. 선조 떠나는 길에 백성들이 나와서 울며 간청했지만, 조선의 왕이라는 자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왜놈들 입장에서 선조의 도망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을 거다. 당시 왜놈들의 전투 방법은 대빵을 사로잡으면 끝이었다. 근데 왠걸? 자기들 딴에는 쉬지도 않고 미친듯이 올라왔는데 조선의 대빵이 없다. 도망갔댄다. 얼마나 황당할지. 물론 도망간 왕을 지켜본 조선의 백성들만큼이었겠냐마는.
선조는 한양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개성에서 위로 쭉쭉 평양까지 당도했다. 이 즈음에 임진왜란 전투 사상 첫 조선의 승리가 있었으니,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왜놈들을 물리친 것이다. 하지만 신각의 상사 김명원이, 신각이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보고하였고, 선조는 신각을 죽이라 했다. 그렇게 첫 승리를 따낸 장수를 죽였다. 자신보다 유능한 부하장수를 시기한 김명원이나,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유능한 장수를 죽인 선조나 휴. 아오 빡이친다.
진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터질 때 쯤, 그 분노를 가라 앚혀줄 무언가 하나씩 나온다. 이순신과 의병이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견내량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 의병들은 나라를 지키기 전쟁터로 나섰다. 천한 취급을 받던 일개 천민부터 시작하서 글만 읽던 선비, 부처님을 모시던 승려들까지 의병의 계층도 다양했다.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 영해부사 최경회, 김덕령 등이 나섰다.
경상도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 전 좌랑 김면, 전 장령 정인홍, 전 한림 김해, 교서정자 유종개, 이대조, 장사진 등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승려 영규, 전 도독관 조헌, 전 청주 목사 김홍민, 이산겸, 박춘무, 조덕공, 조웅, 이봉 등이 있다.
경기도에서는 전 사간 우성전, 전정 정숙하, 최흘, 이노, 이산휘, 남언경, 김탁, 유대진, 이질, 홍계남, 왕옥 등이 있다.
북쪽에서는 금강산의 유정 대사, 묘향산의 서산대사, 평양의 임중량, 길주에 정문부 등이 있다.
여기서 함정이 있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났던 의병들은 자기들이 지키려 했던 나라의 왕, 선조의 손에 모함받아 대체로 이괄의 난 때 일파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숨어 살았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시기질투와 원균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해야했다. 미친듯이 고구마만 먹다가 겨우 사이다 한잔 삼켰는데, 다시 고구마다.
하 ㅋㅋㅋㅋㅋㅋ 진짜 ㅠㅠㅠㅠㅠㅠ 분노가 가라앉다가도 다시 차오른다. 아.. 어떡해야하지? 이 책을 정말 덮어야 할까? 굳이 읽으며 계속 분노해야할까? 읽으면서도 고민했다. 분명히 이 뒤에 이어질 내용도 다 알고,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 지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는게 망설여졌다. 정말 당대의 살아있는 기록을 읽는 건 너무나 생생해서, 그동안 공부하기 위해 읽은 역사서나 드라마로 접한 그 어떤 것도 「징비록」 만큼 생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목사 김시민에게 대패했던 왜놈들은 정유재란 때 칼을 갈고 왔다. 왜놈들은 애초에 전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 진주성을 학살하기 쳐들어왔다. 진주성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다 죽이기 위해 왔고, 실제로 다 죽여버렸다. 그들은 남원성에서도 학살을 이어갔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죽었다. 남도 땅도 왜군에 먹혔는데, 이순신 장군이 목숨걸고 지켰던 남도 앞 바다까지 왜군에 손에 뺏긴 것이다. 조선은 리더들을 잘 못만나 육군, 해군을 그냥 말아 먹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조선은 그때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이순신 장군이 진도에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배는 10여척이었다. 앞서 말했듯 원균이 미친듯이 말아먹었기 때문에, 여기서 조선의 해군을 부활시킨 다는 건 거의 기적과 다름 없었다. 근데 그 기적을 행했으니 확실히 이순신 장군은 큽... 아 징비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정말 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노량에서 대파했다. 그리고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으며 임진/정유년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조선의 백성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장수 진린, 명나라 병사들까지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통곡했다. 해서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해달라 하였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시기질투했던 조선의 왕은 나라를 지키다 죽은 충신의 사당 건립을 거부했다. 그리고 약 1백년이 되어서야 숙종의 명으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가 건립된다.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끝으로 그 내용이 끝난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조선에서 책이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징비를 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었으나, 징비를 해야할 사람들은 이 책을 서가에 꽁꽁 숨겨두었던 거다.
개인적으로 임진왜란에 관련된 장소를 많이 찾아다녔다. 이순신 장군의 묘소나 사당, 원균의 묘, 신립장군의 묘, 탄금대, 문경새재, 진주성, 행주산성, 남원성, 의병장 김덕령 장군 묘소 등등 정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도 찾아다녔다. 그 때마다 느낀거라곤 이 두 가지다. 못난 리더 한 명이 나라를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복되는 아픈 역 사속에서 우리는 징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는지.
우리는 정말 징비를 하고 있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