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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 - 의정부시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여행학적인 보고서
박종인 외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박종인 기자님 신간이 나왔다. 인터넷 서점에서 기자님 신간 알람이 떴길래, 냉큼 봤더니 왠걸? 상상출판에서 출간 중인 시리즈물 역사 순한맛 『땅의 역사』 시리즈도 아니고, 와이즈맵 출판사에서 종종 나오는 매운맛 역사책도 아니었다. 뭐랄까, 책 제목만 봤을 때는 지자체에서 기념도서로 출간되거나, 해당 지자체에 있는 관공서 책장에 꽂혀있을 법한 제목이었다. 그게 그말인것같기는 한데. 하하하. 거기다 저자도 박종인 기자님 단독이 아닌 공동집필이었다. 뭐랄까, 약간 동공지진.....이 왔지만! 기자님 신간이니까 바로바로 겟겟!!
책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
제목만 봤을 땐, 단순히 ‘의정부’라는 도시를 기념하기 위한 책인것 같기는 한데. 대체 왜 ‘의정부’? 다른 도시도 많은데? 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면서 책을 딱 피고! 서문을 딱 읽었는데! 어머 세상에. 올해가 의정부 도시 승격 60년이 된 해란다. 그를 기념하여 책이 출간된거긴 한데, 이게 약간 다른 지자체들 기념 도서와 느낌이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이 책은 의정부를 인문학적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행책이자, 인문학책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
‘의정부 60년 시사’ 같은 기록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시사 편찬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대게 시사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필요한 몇 권자리 대작인데다 의정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만 보면 어떡하나 싶은 알량한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 모두에게 줄 책을 만들기로 했다. 이 책은 의정부 60년 생일잔치에 독자 여러분을 부를 초대장이다. p 007
현직 의정부 시장은 의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정부는 옛것을 부여잡고 있는 쇠락한 종같집 같다”고. 의정부를 떠올리면 함흥차사나 군사도시, 또는 주말산행의 핫플레이스, 그리고 부대찌개 정도밖에 없다는 거다. 근데 내가 생각한 의정부도 이와 동일하다. 거기에 조금 더하면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 정도? 그나마 족두리묘는 내가 실제 답사를 갔던 곳이기에 알고 있는거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조차도 모른다는게 함정이다.
그런데....놀랍게도 과거 의정부는 경기 북부에서 으뜸가는 형님도시였단다. 경기 북부 지역 사람들은 의정부에 갈때마다, ‘의정부에 올라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말이다. 그랬던 의정부였다. 하지만 지금 의정부 위세는 바로 옆, 일산신도시가 있는 고양시에도 못미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다.
아래는 박종인 기자님이 쓴 첫번째 챕터 「의정부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여행학적인 보고서」 내용 일부다.
함흥차사: 이성계와 이방원
‘의정부’ 하면 제일 유명한 이야기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부자간 갈등을 담은 ‘함흥차사’ 이야기다. 의정부와 함흥차사를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대체로 함흥차사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함흥차사는 완전한 사실도, 그렇다고 완전한 거짓도 아니다.
실제로 ‘함흥차사 전설’이 처음 등장한 건 1615년에 죽은 ‘차천로’가 쓴 저서 《오산설림초고》’다. 조선이 건국되고도 160년이나 지났고, 심지어 임진왜란까지 겪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허구의 산물이다. 이후 1806년 이긍익이 쓴 저서 《연려실기술》에서 차천로의 글이 재인용된다. 이후 ‘의정부’라는 지명에 대한 상상과, 실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갈등을 해소하는 흔적들로 인해 함흥차사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조사의의 난이 평정되고, 이성계는 수도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성계는 한성을 도읍지로 정했지만 1402년 당시 수도는 아들 정동에 의해 개경으로 재천도된 상태였다. ‘조운이 통하고 백성도 편리할 땅’이라며 이성계가 고심 끝에 선택한 땅이었지만 아들은 개경 복귀를 선택했다. (…) 정종을 내쫓고 왕이 된 이방원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한성 재천도만이 아버지에게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새 왕조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었다. p 057
1406년 11월 5일 마침대 황해도에서 마음을 다스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왔다. 아들 태종이 옛 앙주 남교에 미리 가서 대기하는 사이 이성계는 양주 객사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양주 객사는 지금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에 있었다. 아들과 아비는 양주 한가운데 너른 녹양들판을 바라보며 위대한 화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윽고 태종이 무리를 이끌고 녹양들판을 북상해 객사에 당도했다. 아들이 올린 술을 아비가 즐겁게 받아 마셨다. 아들은 해가 저문 다음에야 들판에 설치한 장막으로 돌아왔다. p 058
여기가 역사 현실 속에서 벌어진 길고 긴 함흥차가 서사시의 종점이다. 건국 과정에 벌어졌던 피비린내나는 갈등이 녹양벌에서 해소됐다. 그 해소된 갈등을 딛고 태종 이방원이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전 과정을 놓여 놓은 이야기가 의정부에 전해오는 함흥차사 전설이 가진 의미다. p 061
족두리 묘: 의순공주
의정부 천보산에 금림군 가족 묘소가 있다. 그 안에 비석 없는 묘소가 1기 있는데, 옛부터 ‘족두리 묘’라고 불렸다. 족두리 묘 주인은 다름아닌 의순공주다. 이 곳은 2021년 내가 의정부를 찾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의순공주가 누구인가? 병자호란 이후 제 딸들 지키기기 급급했던 효종이나, 권세가들은 힘없는 집안의 여자를 골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그 희생양이 바로 의순공주였다. 그녀는 조금 한미한 전주 이씨 가문에 태어났을 뿐인데, 나랏님의 결정으로 갑자기 공주가 되고,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런데 못난 조선 남자들, 막상 의순공주를 오랑캐인 청나라에 보내려니, 조선의 여인을 오랑캐와 결혼시킨다는게 끝내 용납이 안됐나보다. 그들은 의순공주가 청나라 가는 길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어’ 바다에 몸을 던저 자결하고, 족두리만 물 위에 떠올랐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족두리로 묘소를 만드니, 그게 바로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다.
의순공주의 삶은 정묘/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조선의 여성들과 맞닿아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지켜주지 못했고, 힘 없는 나라로 인해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던 그녀들 말이다. 조선에 돌아온 그녀들이 마주했던건 ‘환향녀’라는 삿대질과 돌팔매질, 왜 그자리에서 죽지 않았냐는 폭언과 가족들에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순공주처럼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실제로 가족의 손에 죽어나간 여자들도 있었다.
의정부 천보산에 있는 족두리묘는, 못난 조선 남자들로 인해 희생된 조선의 여성들의 한이 담겨있다.
떠나기 전 공주를 호종할 사신들에게 왕이 일렀다. “명심하라. 금림군은 내 5촌이고 의순공주는 내 6촌이며 양녀다. 금림의 자식이 아니다.” 효종과 10촌 형제인 금림군은 5촌 아저씨로 둔갑헀다. 11촌 조카딸은 6촌 누이며 동시에 양녀가 됐다. (…) 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이미 모든 게 결정됐는데 이런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그 자리에서 8~12세에 해당하는 사대부 자녀의 혼인금지령을 내렸다.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살 된 공주를 혼인시키겠으니 적령기 남녀 혼인을 금지하라는 것이었다. ‘두 살 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p 071
숱한 여자가 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매우 적은 수가 돌아왔다. 이들을 환향녀라고 한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1638년 신풍부원군 장유의 며느리가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 하고 요청했다. 장유는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 장인이다. 그러자 좌의정 최명길이 “몸을 더렵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이혼 불가를 주장했다. 그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사관은 이혼 불가를 주장한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평했다. p 072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 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이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건져 모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의정부 사람들은 의순공주 넋을 위로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무덤은 최근까지 초라하게 방치됐다가 정비됐다. p 073
그 외 의정부에 흔적을 남기다: 흥선대원군, 박태보, 김구, 위안스카이
숙종은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용된 도구가 장희빈과 인현왕후라는 두 여자다. 장희빈을 이용해 남인을 움직였고, 인현왕후를 이용해 서인을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박태보다. 하룻밤에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고, 불에 달군 인두에 짖어지고, 사금파리더미 위에 꿇어않힌 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고문을 받았다. 장희빈과 그녀가 낳은 아들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 고문을 하룻밤에 다 받고 죽었다. 서인은 물론 장희빈를 지지하던 남인까지도 박태보의 기개와 죽음을 기렸다. 그의 무덤이 의정부에 있다.
고종 즉위 후 정권을 잡고 개혁을 해나가던 흥선대원군이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것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진행하던 개혁들을 전부 뒤엎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격노하여 경기도 양주에 있는 산장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산장이 현 의정부시 가능동 곧은골에 있었던 ‘직곡산장’이다. 아마 흥선대원군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과정을 생각했으리라. 이방원은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고종은 이방원이 아니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바라는 유생들을 참수하라며 강경대응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산장에서 나와 아들 고종에게 머리를 숙였다. 직곡산장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의정부는 흥선대원군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럿 생겼다.
백범 김구 선생도 의정부를 스쳐갔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성립된 후 제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주장하던 김구는 당연히 배제되었다. 이후 김구는 사패산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에는 김구 친필 암각이 남아 있다.
조선 말 외교고문으로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청나라 군인 위안 스카이도 의정부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흔적은 도봉산 망월사에 남아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도 패악질을 하고, 본국인 청나라로 돌아가서도 황제노릇해보려 했던 권력만 쫓던 탐욕가였다.
근대도시 의정부
근대 의정부는 두 가지 큰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번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원선 의정부역 개통이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 이후 미군 주둔이다.
경원선 개통으로 외지 사람과 각종 문물이 의정부로 몰려들었다. 경원선 부설은 일제가 조선 물자 침탈을 위해 진행한 것이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로 인해 의정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외지인과 온갖 문물이 의정부로 몰려들었고, 결과적으로 의정부에 인구가 들면서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영화산업까지 들어서며 실질적인 경기 북부 으뜸 도시로 거듭났다.
6.25 전쟁 이후 의정부는 쑥대밭이 되었다. 남한에 있던 다른 도시들고 그러했겠지만, 북한과 가까운 의정부는 전쟁기간 내 점령군이 여섯 차례나 바뀔 정도로 혼란의 정점에 있던 도시였다. 그랬던 도시이기에, 전쟁이 끝날 무렵 미8군사령부는 제1군단사령부를 의정부에 설치했다. 이어 미군과 작전을 함께하는 유엔군 소속 각국 부대도 의정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주한 미군이 의정부에 자리를 잡으면서, 쑥대밭이 되었던 의정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미군을 상대하며 의정부 경제가 살아났다. 경제가 살아나자 인구도 들어났다. 의정부가 시로 승격한 근본적인 원인은 주한미군이 가져온 나비효과였다.
산, 예술문화 그리고 음식: 여행지로서 의정부는 매력만점 도시다
‘왜 의정부에 가는가?’ 토박이 의정부 시장 김동근이 던진 질문에 대략 답이 나왔다. 의정부 시민에게 찰나에서 영원으로 전승돼온 함흥차사, 실제로는 그 유장하고 격정적인 역사를 즐기기 위해 우리는 의정부로 가야한다. 녹양벌 너른 들판을 에워싼 명산 품에 안기기 위해 우리는 의정부로 가야한다. 그 벌판과 산에 발자국을 찍어놓은 근대 거인들 흔적을 찾기 위해 의정부로 가야한다. p 104
‘놀러가기 위해’ 찾아가는 도서관 봤나? 그게 의정부에 두 군데나 있다. 2장에서 소개한 미술도서관과 함께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음악도서관이다. 음악도서관은 미술도서관과 함께 어쩌면 의정부가 미래로 나아갈 비상구이면서 맏형으로서 누렸던 영화를 회복할 수 있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의정부를 찾는 바깥사람에게는 자칫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벗어나 상큼하고 맑은 의정부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p 107
도봉산, 천보산, 용암산, 부용산, 수락산, 사패산., 흥복산. 전부 의정부를 둘러 싸고 있는 명산들이다. 지금까지도 의정부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산들이다. 특히 의정부 자존심인 도봉산에는, 산악인 대장 엄홍길이 살았더랬다. 지금은 생가터만 표지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수락산, 의순공주가 잠들어 있는 천보산, 임도가 잘 돼 있어서 산악 자전거를 즐기는 이가 많이 찾는 흥복산, 이성계와 무학대사 그리고 김구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패산, 바위가 꿈틀대는 용처럼 늘어서 있어서 용암산까지. 의정부는 산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 산 뿐이던가? 의정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이 있다. 문화 볼모지 의정부로 전근한, 한 공무원이 끈질기게 매달려 만들어낸 성과다. 삶의 질을 높이는 건 다름아닌 문화생활이다.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 덕택에 현재 의정부시민들은 다양한 예술,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 도서관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이 도서관이 있는 의정부에 살고 싶다”라고 말하고, “시민 세금을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한 사례”라고 말하겠는가. 새삼 부럽다. 내가 사는 시흥 공무원들은 대체 어디서 뭐하나 몰라. 청렴도도 매년 전국 하위권에 머무르는 그들이 좀 본받았으면 싶다. 에휴.
(통닭)다들 가난했던 시절, 예전처럼 닭 한 마리를 백숙처럼 통째로 내던 서울에 반해, 의정부를 위시한 미군 주둔 도시에서는 미국식으로 부위별로 토막을 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은 전국 어디서건 의정부에서처럼 먹기 좋게 토막치킨을 내니, 의정부는 신문화를 좀 더 일찍 수용한 셈이다. 그 신식 음식 가운데 한국적인 요리 문화와 미국적인 식재료가 융합해 탄생한 메뉴가 바로 부대찌게다. 다시 말해서 ‘가난’과 ‘미군 식재료’와 ‘한국 특유의 찌개 문화’가 버무려져서 우리의 의정부 부대찌개가 탄생했다. p 111
1998년에 조성된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는 ‘오뎅식당’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부대찌개 원조 식당이다. 오뎅식당 또한 시작은 볶음이었고 지금은 찌개가 주 메뉴다. 시작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재료다보니 상호에는 그 서럽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부대찌개’의 ‘부’자도 보이지 않는다. (…) PX가 됐든 부대 식당이 됐든 불법 유통된 식재료를 썼노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던 아픔, 그리고 연유야 어찌 됐건 남의 나라 군인들이 먹는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고 하기 거북했던 가난한 자존심이 ‘오뎅식당’이라는 상호에 담겨있다. p 113
용광로 같은 의정부 이주민 문화는 뜻밖에도 의정부를 평양냉면의 성지로 만들었다. 전국 맛집이 몰려 있는 서울에서 가장 활황인 평양냉면집이 있는데,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이다. 이 두 음식점의 친정이 의정부 평양냉면이다. (…) 원조 가운데 원조인 평양은 통일이 된 다음에나 맛볼 수 있겠고, 휴전선 남쪽 대한민국 평양냉면 4대 문파 가운데 셋은 서울에, 하나는 의정부에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다른 3대 문파와 치열하게 쟁패중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 주인은 의정부 평양면옥집 딸들이니 과연 의정부는 대한민국 평양냉면계를 주름잡고 있는 성지다. 서울 잠원동에 있는 ‘본가평양면옥’도 셋째 딸이 분가해 낸 집이다. p 114
역시 이북 음식인 초계탕은 북경기와 강원도 전역에 퍼져 있다. 초계탕은 식초와 겨자를 넣은 차가운 닭 육수에 메밀면과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넣어 먹는 음식이다.초계탕의 ‘초’는 식초요, ‘계’는 함경도 사투리로 ‘겨자’의 ‘계’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이 차가운 초계탕을 추운 겨울에 별미로 먹었다. 의정부 식당 ‘평양초계탕막국수’도 전국 초계탕 원조 가운데 하나다. p 116
의정부는 먹방여행으로도 제격인 도시다. 첫번째 음식은 부대찌개다. 모두가 다 알고 있듯, 의정부는 부대찌개가 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당연히 의정부가면 부대찌개를 먹으면 되겠지! 싶었다. 근데 아니었다. 놀랍게도 의정부는 평양냉면 성지였다. 평양냉면 더쿠들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서도, 나같은 머글들은 처음듣는 이야기니까.
6.25 전쟁 이후 이북 출신들이 의정부에 많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의정부 평양면옥집 사장이란다. 평양출신으로 의정부에 냉면집을 차렸는데, 의정부에 살던 피란민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더니 어느새 평양냉면 성지가 되었다. 그 평양면옥집 딸들이 서울에 분가를 냈는데, 부모의 손 맛을 그대로 이었는지 서울 분가도 줄줄이 평양냉면 성지가 되었다고.
쇠락한 도시라 생각한 의정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과거와 달리 많은 게 변했다. 지금 의정부는 산의 도시, 군사도시 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등산이나 역사는 당연하고, 트랜드를 선두할 예술문화와 음식이 매력적인 여행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내가 혹했던 점은 의정부 경전철과 역사다. 의정부 경전철이 땅이 아닌 고가 선로를 달린다는 점에서 혹했고, 경전철만 타면 의정부의 역사적 장소를 대부분 들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 혹했다. 그것도 모르고 난 의순공주 묘소 하나만 보고 집으로 컴백했고.. 하..
거기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미술도서관과 음악도서관이 의정부에 있다. 흔히들 떠올리는 고리타분한 미술관이 아니다. 일단 그 속은 둘째 치고 건물 사진만 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장소다. 거기에 만인이 향유할 수 있는 전시장까지. 음악도서관은 또 어떠한가. 미군의 음악문화 덕택에 의정부 시민들은 노인들까지도 재즈와 록 음악에 익숙했다고 한다. 이에 착안하여 생겨난게 음악도서관이다. 음악도서관은 매년 의정부음악극축제와 블랙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여기서 말하는 블랙뮤직은 과거 미군 음악문화로 인해 의정부 시민들이 듣고 자랐던 재즈, 블루스, 가스펠, 솔, R&B, 힙합 등을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이 아닌가.
산과 역사 하나만 봐도 나에게 의정부는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오는데, 여기에 예술문화와 음식까지 더해지다니! 이쯤되면 다시한번 의정부를 찾아가봐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