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악센트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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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겨울, 나는 2020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2019년 한 해가 점점 바빠지더니 막바지 되니까, 진짜 당장 새해가 되면 더욱 바빠질 것이 예견되서, 정말 진짜로 새해가 오지 않기만을 미친듯이 바랐다. 아니나 다를까, 2020년 시작하자마자 바쁨의 연속. 내 멘탈을 챙기는 것 조차 잊을 정도로 바빴다. 바쁨이 조금 소강된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저 잠시 5분이든 10분이든 쉬어갔으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바쁘든 아니든 언제나 이어지는 내 일상이고, 변하지 않을 일상이니, 잠시동안의 쉼표(,)를 찍었으면 되었는데 말이다. 참 생각이 짧았다. 왜 난 일상에서 잠깐동안의 휴식조차도 생각치 못했나 생각하던 찰나에, 흐름출판에서 「일상의 악센트」를 받았다.


「일상의 악센트」 총 6챕터로 나뉘어 있는 에세이집이었다. 각 챕터별로 주제가 있었지만, 이 모든 챕터를 아우르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었다. 바로 언제나 반복되는 그런 일상이다. 헌데 저자는 이런 평상시와 다름 없는 일상에서 소소한 부분에 대한 감동하고 감사한다. 간혹 무언가 변화가 있다면, 그 변화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발견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감동하는 만큼 발견할 수 있다. P 28

사람이든 물건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너그러운 마음의 눈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기 않았던 근사한 부분이나 자랑할 만한 모습, 숨어있던 다양한 면모가 보인다. 모두 얼핏 봐서는 보이지 안는 것들이다. P 33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반복했다. P 56

일이나 일상에서 상대방의 편리를 위해 애써 작은 수고를 들이거나 마음을 기울여도 실제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배려가 상대방을 알게 모르게 기분 좋게 만들고 이것이 요리에서는 맛있음으로 연결된다. 일상에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쾌적함,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P 83

주택 한 채와 만난 나는 오늘의 일상, 오늘의 일, 오늘의 모든 것에 깃든 ‘보이지 않은 곳의 몸가짐’을 정비하고 싶어졌다. P 121

종이컵에 “Thanks!”라고 적어준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 수고를 들여 감사의 말을 써주다니, 서서히 감동이 스며들었다. 한마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배웠다. 늘 감사하다. P 142

저자의 모든 글이 모두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런 글들이었지만, 유독 내 마음을 울렸던 건 위의 문장들이었다.

어린 날, ‘나는 하루하루를 감사히 보내야지, 고마운 것에 고마울 줄 알아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사회에 나와 스스로의 삶을 살다보니, 어린날 내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넌 왜 감사할 줄 모르고, 그렇게 밖에 못 사니?’라고 나에게 물어보면, 그저 ‘이런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살면 호구가 되버려’ 라는 궁색한 변명만 이야기 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달랐다. 분명 내가 생각하는 ‘현대 사회’를 사는 건 같은데, 저자는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삶이 그에게는 너무 당연했다. 그의 삶에는, 분명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언제나 감사함과 감동이 있었다.

나에게 일상이란, 그저 반복되는 하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운 거 하나 없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일상이었다. 저자의 일상도 나처럼 시간이 흘러가는, 반복되는 일상인건 분명 다를 바가 없 는데, 그는 달랐다. 매 하루마다 감동을 받았고, 고마워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싶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고, 찾고 싶었다. 단순히 문장 속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게 아닌, 내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한 질병이 전 세계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지금, 이제서야 그 이유를 찾았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해도 나에게 일상이란 그야말로 정말 평범한 하루였다. ‘평범’이란 단어는 ‘언제나 당연한 그 무언가’를 뜻하기에, 정말 당연하게도 이를 특별히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평범한 하루는, 나에게 언제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그 당연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바람결이 좋으면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장을 보러 마트를 가는 이러한 일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곁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고마움을 깨닫는다는게 바로 이런 걸까?

언제나 마음 편하게 문 밖을 나서서 산책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마트를 가는 것,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일상을 위해, 뒤에서 땀 흘리고 수고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오늘 나의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준, 이름 모를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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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만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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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왓슨이 추천한 도서 「파워(POWER)」. 내 기억속의 엠마 왓슨은 그저 어리고, 똘똘한 헤르미온느였다. 그 헤르미온느가 지금은 여성을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이상하게 비틀어진 페미니즘이 아니라, 곳곳에 깔려 있는 여성혐오를 없애는 것이다. 엠마 왓슨 역시 후자 쪽에 속한다. 그런 그녀가 추천한 도서라고 하기에, 조금은 솔깃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기존에 내가 읽었던 페미니즘 도서라고는 작가정신에서 출판한 「붕대감기」가 고작이다. 그래서 과연 이 책을 잘 흡수 할 수 있을런지 걱정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읽고 보니 그런 걱정은 저 멀리! 이 책은 광고 문구인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페미니스트 SF의 탄생!” 그 자체였다.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그런 상황들이 주가 아니라, 정말 정 반대인 허구의 상황이 이 책의 주된 줄거리다. 아, 물론 책 초반부에는 세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여성혐오에 대한 부분이 보이긴 한다.



책은 네 명의 인간을 앞세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갑자기 집에 든 강도에 의해 엄마가 살해된 소녀 록시, 그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던 청년 툰데, 갑자기 파워(POWER)가 생긴 딸을 지켜야 하는 엄마 마고, 겉으로는 위탁가정에서 보호받는 것 같으나 실은 학대와 성폭력을 당하던 소녀 앨리. 이 네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며,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이야기가 진행된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제발. 이게 뭐죠? 아직 어린애일 뿐이에요. 어린애일뿐이라고요.” 한 남자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린다. “내 눈엔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던데.” 엄마가 새된 소리를 낸다. 고장 난 엔진의 금속음 같다. (중략) 엄마의 눈이 커진다. “도망쳐, 록시” P 19, 록시



처음에 툰데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저리 가세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예사로운 상황이 아님을 깨닫는다. 남자는 그래도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선다. “너처럼 예쁜 여자는 칭찬을 들어야 마땅해.” (중략) 툰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으려 한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여기에서 벌어질 것 같다. 그 사건을 소유하고 싶다 (중략) 남자가 말한다. “야, 피하지 말고, 좀 웃어줘봐” (중략) 툰데가 촬영하고 있을 때 소녀가 홱 돌아선다. 그녀가 팔을 내리치는 순간 휴대폰 화면이 잠깐 흔들린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깔끔하게 찍혔다. 그녀가 화난 척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 실실거리는 남자의 팔로 손을 가져가는 장면. (중략) 뒤쪽에서는 소녀가 남자에게 독을 먹였다면서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소녀가 때리면서 독을 주입했다고. P 30, 툰데



조스가 아무런 말도 없자 마고는 계속 이야기한다. “다른 여자애들이…… 세 명이었지? 걔네들이 시작했다는 거 엄마도 알아. 그 남학생은 네 근처에 있었으면 안됐고. 존 뮤어 병원에서 검사받았어. 건 그냥 남자애를 놀라게 한 것 뿐이야.” P 38, 마고



술 냄새가 풍긴다. 그가 분노에 차서 중얼거린다. “봤다. 공동묘지에서 남자애들과 있는 걸 다 봤어. 더러운 창녀 나쁜 계집”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후려갈기고 발로 찬다. 앨리는 몸을 웅크리지 않는다. 그만하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그래봤자 더 오래가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앨리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 한 손은 벨트로 가져간다. 앨리가 정말로 창녀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미 전에도 여러번 그랬으면서 P 48, 앨리



일단 파워가 발현된 딸을 둔 마고의 이야기는 잠시 제쳐두고, 나머지 세 사람인 ‘록시, 툰데, 앨리’의 이야기는 너무 사실적이라 충격이었다. 뉴스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사건들이었다. 여성이 있는 집에 들어가서 강간하고 살해, 길거리 한 복판에서 여성을 성희롱하는 남자들과 그걸 무심히 지켜보는 대중, 여성을 성 상품화하여 몰래 동영상을 찍는 남자들,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세계 곳곳에서도 일어나는 구역질 나는 그런 사건들 말이다. 



이 소설은 분명 허구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던 저런 사건들은 분명 사실이다. 이 소설에는 미국, 영국, 사우디 아라비아 등 몇 몇 나라들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영국에서는 여성혐오가 심하지는 않으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남자에게 종속된 노예이며 물건이다. 분명 허구인 소설인데, 허구같지 않다.



이 소설 속에서는 소녀들에게 갑자기 묘한 파워(POWER)가 생겨난다. 이런 파워가 신기한 소녀들은 비밀리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내곤 했는데, 위와 같은 여성을 상대로 한 여러 극악한 사건들이 점차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여성들은 들고 일어났다. ‘소녀들의 날’이다. 이 파워란 것이 처음엔 소녀들에게서 먼저 발현되었는데, 소녀들이 성인 여성에게 파워를 각성케 하여 점차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여자라면 전부 파워를 갖게 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 파워가 발현되었다. 



책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돌아와보면, 그 어떤 나라든 아무리 여성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도 분명한 여성혐오가 있다. 물론 지금 세상에는 여성혐오만 있는게 아니라, 남성혐오도 있고, 노인혐오도 있고. 그냥 ‘XX혐오’ 라는 게 사회 고질병 마냥 전반적으로 확대된 상황이지만 말이다. 



다시 여성혐오로 돌아가보면, 적어도 우리나라는 그 바탕에 분명 과거,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남존여비 사상이 한몫한 건 확실하다. 조선시대에 작성 된 묘비명이든 족보든 책이든 뭔가를 펼쳐보자. 그 글에는 남성의 이름 세자가 정확하게 적혀있지만, 여성의 이름은 없다. 간혹 누구누구의 처 강씨, 최씨, 이씨 등이라거나 누구누구의 딸 이씨, 김씨, 박씨 이런 식으로만 쓰여있을 뿐이다. 여성은 본인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물론 지금은 다르다. 대신 다른 쪽에서 차별이 생긱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직장에서 여성에게만 있는 유리천장이 그것이다(일부 고귀하다고 하는 태생 제외^^..). 실제로 많은 회사에는 동 직급으로 입사해도 남/녀 사원의 직급체계가 조금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바로 옆 남직원이 곧 자녀가 생긴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축하를 한다. 여직원이 자녀가 생긴다고 하면 다들 축하는 하면서도 업무에 지장이 생길까, 나에게 일이 넘어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심지어는 그 여직원이 육아휴직을 쓸까봐 걱정하고, 차라리 새로운 사람을 뽑을 수 있도록 퇴사를 하기를 은근히 강요하기도 한다. 정말 씁쓸한 말이지만, 이는 실제로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 두 눈으로 목도한 상황이다.



어떤 사람이든 자녀가 태어나는 건 그저 똑같이 축하받아야 할 상황인데, 그 성별에 따라 대우가 바뀐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다들 엄마가 있고, 아내가 있고, 누나가 있고, 여동생이 있는 사람들일텐데 말이다. 내 딸이, 내 누나가 회사에서 저런 대우를 받았다고 고백하면 다들 눈에 불을 키고 ‘요즘 세상에 뭐 그딴 회사가 다 있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는, 그딴 회사의 사람들이 되는거다.



뿐만 아니다. 사내 성희롱도 엄청난 문제다. 지금 세상은 바뀌었다고, 어떤 사람이 그러냐고들 하지만 아직 곪아 터진 곳이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버젓이 같은 사무실에 있던 것도 보았다. 가해자를 더 권력이 있는 부서로 배치하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상황들은 여성혐오를 떠나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하는 남존여비 사상에 대한 폐해인 것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사실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세상이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랄까?



예전에도 「붕대감기」 리뷰를 하며 이야기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휴머니즘이다. 그저 내가 싫으면 남도 싫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배려하는 것 말이다.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 정말 만약에 현실에서 여성들이 이런 POWER를 가진다면? 이 책 속에서 나온 혼돈이 정말 눈 앞에서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나온 여러 나라에서는 여성이 억압된 정도에 따라 그 나라가 변했다. 아니, 권력 주도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만 변했을 뿐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변함없이 여성이 주도하는 군사강국이었다. 군사들도 POWER를 쓰는 여성이며, 클럽이든 어디든 약한 남성을 희롱하는 것도 여성이다. 사우디는 여성이 다스리는 신생 여성민주주의국가가 되었다. 과거 사우디가 여성을 노예로, 물건으로 대했듯 신생 사우디에서는 남성을 노예로, 물건으로 대했다.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이 달라졌을 뿐 성범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저 권력 주도층 단 하나였다. 



굳이 책 속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꽤 가까운 과거만 봐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선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끝내 국민 손에 끌어내려졌다. 무엇보다 그녀가 싼 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남성이 권력자가 되든, 여성이 권력자가 되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 쯤되면 드는 생각은 여성혐오든 남성혐오든 노인혐오든 권력을 쥔 자들이, 권력이 없는 자들을 선동하기 위해 불씨를 지피는 게 아닐까 싶다. 항상 보면 이런 ‘XX혐오’는 권력을 지닌 계층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그저 우리 같은 일개 힘 없는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니까. 그냥 서로 서로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도, 저런 식으로 ‘XX혐오’아래 선동당하는 일도 없고, 서로 온라인에서 미친듯이 싸울 일도 없을텐데 말이다.



어라,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거 보면, 이 책.... 어쩌면 페미니즘 도서가 아닐지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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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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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에세이를 읽어왔지만, 이번 만큼 기대되는 에세이집이 있었을까? 물론 이런 기대감은 ‘나’ 한정이겠지만 말이다.


이 에세이 저자인 ‘권남희’님은 번역가다. 그것도 일본 문학 번역가. 나 역시 나름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언젠가는 ‘일본어 번역가(내지는 통역사)가 되야지!’라는 생각도 잠깐이나마 있었기에, 유명한 일본어 번역가는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했고, 어떻게 일본어 번역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특히 ‘권남희’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번역가라, 더욱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나 역시 권남희님이 번역한 소설도 꽤 여러 권 읽어보기도 했고).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대신 저자의 일상이 많이 드러난다. 에세이집이니 당연히 그럴테지만. 그리고 문득 놀랐던 사실은 읽으면서도, 저자의 연령대를 계속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 에세이를 읽고 있다보면, 분명 내가 하루하루 보내는 평범한 일상과 다를게 없는 데, 뭔가 톡톡튀는 감성이 자꾸 느껴진다. 거기다 글빨(?)이 너무 젊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젊은 단어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분이 번역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내가 태어났던 바로 그 해. 와, 정말 유명한 번역가는 달라도 뭐가 달랐던 건가?! 싶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인맥이나 팔로맥(follow脈)이나 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ㄴ다. 그러나 인맥의 수나 팔로어 수가 그 사람의 완성도는 아니니 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제일 구려 보이는 사람은 인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맥이 넓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다. P 065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조오억 명이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오조오억 명에 들어가기 싫은 게 사람의 마음. P 085



그렇게 콘서트에 가기 시작한 지 4년째 봄에는 헬로콘, 여름에는 스콜콘, 겨울에는 헤프닝콘을 꼬박꼬박 가고 있다. 딸이 아이돌 그룹 덕질 할 때 “걔네는 무슨 콘서트를 일 년에 한번 씩해!”그랬는데, 막상 덕질을 해 보니 일년에 서너 번도 적더라고요. P 196




톡톡튄다. 그니까, 이 에세이집을 번역가가 쓴 거라는 배경지식 없이 읽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와, 이 사람은 SNS에서 글빨로 꽤 날리는 사람인가보다’ 라고. 그니까 뭐랄까, 인플루언서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내 부모님 연배. 이야, 정말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는, 이 정도 톡톡튀는 글 감성이 있어야 하나보다.



톡톡튀는 감성만 있는 건 아니다. 뭐라고 해야하지? 가슴 따뜻한? 포근한? 음... 뭔가 마음이 따뜻하게 적셔지는 그런 기분이랄까. 분명 나에게도 익숙한 일상이고, 그 누군가에게도 익숙한 그런 일상인데 말이다. 권남희 번역가님이 써내려 간, 그녀의 일상은 분명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는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래도 이 에세이의 저자가 번역가인 만큼, ‘번역’에 대해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특히나 내가 유일하게 읽고, 말할 줄 아는 언어인 ‘일본어’인 만큼 더더욱 그렇다.



내 개인적으로 어려서부터 일본 문화를 접하여, 어떤 매체든 가리지 않고 보았다. 특히 활자, 예컨데 잡지/만화책/소설 등을 더욱 많이 읽었다. 처음엔 일본어 까막눈이던 시절이라, 누군가가 번역한 게 아니면 읽을 수 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 한국어판이 나왔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저 번역가님들이 한국어 번역본을 내주는게 고마웠고, 나에게 구세주였다. 내 나라 언어인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며, 나름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수준이 되었다. 정말 좋아하는 일본 작가가 있는데, 이 작가의 책은 한국에서 번역이 되다가 중단되었다. 한국어판이 안나오니 당연히 원서를 사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만화책도 곧잘 원서로 사서 읽었던 터라, 소설 쯤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본소설을 원서로 읽기 시작했다. 간혹 막힘이 있기도 했는데, 나름 수월하게 읽혔더랬다.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집에 있던 몇몇 권의 원서와 국내 번역본을 같이 두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땐 근거없는 자부심에 차올랐었다. 원서와 국내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서 ‘왜 이런식으로 번역을 했을까? 이 번역가는 이 만화, 소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기는 한거야?‘ 라는 문제제기도 하고, ‘하, 이런 번역본은 읽을 필요가 없겠어, 그냥 원서나 사서 읽어야지’라고 볼멘소리도 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너무 어렸고, 철도 없었고, 번역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몰랐던 나였다.



그렇게 어렸던 내가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어 번역업무가 나에게 떨어졌다(타부서에서 해야할 업무인데, 일본어 할 줄 알던 사람이 나 밖에 없었을 뿐더러, 회사 입장에서는 번역을 위탁하면 돈이 많이드니, 내부 직원 쓰는 게 돈 안들고 좋지 않겠냐 라며^^).



소름 돋는 사실은, 이 번역 업무라는 게 그냥 일상적인 메일이나 이런 번역도 아니었다. 무려 약학기술 전문지(내지는 논문 같은..) 번역이었다. 그리고 이 번역 업무를 하면서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번역이란 건 정말 일본어만 할 줄 안다고 되는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어린 날 번역을 왜 이따구로 하는지 볼멘소리를 했던 그 번역가들에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꼈다(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정말 어릴 때 내가 생각했던 번역가는 외국어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겪은 바 그게 전혀 아니었다. 외국어 만큼 우리 말도 정말 잘해야 하며, 우리말로 옮겼을 때, 원래 우리말인 것 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혀야 한다. 뿐만인가? 우리 말에서 같은 단어가 없을 땐 최대한 같은 의미를 지닌 말로 의역해야 한다. 무엇보다 번역가들은 의뢰받은 건에 대해 ‘일’을 하는 거다. 의뢰받은 번역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100%다 잘 알고 있는 분야라고 확신할 수 없다. 어렸던 나는 이러한 번역가들의 고충을 1도 생각치 않았던 거다.



아 ! 왠지 삼천포로 미친듯이 빠져버렸다. 「귀찮지만 행복해볼까」가 일반적인 에세이였다면 그저 책에 대해 생각하고 말았을거다. 하필 이 에세이를 쓴 사람이 유명한 일본 문학 번역가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책과 다른 이런저런 사심이.... 하하하.



확실한 건, 권남희님이 번역하신 모든 책을 다 읽어 본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에세이에서 그녀가 소환한 번역본은 꼭 읽어보리라 생각하게 된 점이다. 특히 그녀를 가마쿠라로 이끈 「츠바키 문구점」은 꼭 빠른 시일내에 읽어보리라. 나도 딱 한 번 가본 게 다인 가마쿠라지만, 소설 속의 가마쿠라와 내가 보고 온 가마쿠라가 얼마나 다를지 궁금하기도 하고, 권남희님이 어떤 아름다운 단어로 번역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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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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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님이신 효꾸루님께 선물받은 책 「혼자보는 미술관」. 읽은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이번 1~2월이 정말 유례없이 바쁜 달이었기에 포스팅을 제대로 못하다가 이제야 포스팅을 한다(회사에서 두 달동안 미친듯이 바쁘다가, 갑자기 여유가 생겨 오히려 마음이 붕 뜨는 신기한 상황! 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다시 바쁨 시동 부릉부릉). 


내가 무엇을 보거나, 읽거나, 듣거나, 또는 어느 장소를 갈 때, 제일 큰 기준이 되는 건 바로 ‘역사’다. 이유는 없다. 그저 이상하게도 고대부터 비교적 가까운 근대까지, 이런 과거에 일어난 일에 묘하게 호기심이 생겨났고, 이상하게 다른 분야에 비해 집중력이 높았다. 무엇보다 ‘역사’라고 해서, 과거에 있었던 인물의 행적, 혹은 국사시간에 배우는 FM적인 내용만 관심이 있는게 아니다. 과거에 편찬된 도서, 그림, 공예품 등에도 무한한 호기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번에 효꾸루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책  「혼자보는 미술관」은 그야말로 내 취향 저격이다. 이 책은 고전 미술작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어떤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 알려주는 아주 쉬운 입문서이기 때문이다. 아!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 책은 ‘이 그림은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봐야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이 그림을 해석하는 의견으로 이러한 내용도 있고, 저러한 내용도 있으며, 때로는 감상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기분에 따라 작품에서 느끼는 의미가 다르다고 이야기 한다. 미술 작품 해석을 MUST가 아닌, IF로 알려준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미술작품을 보는 내 눈이 조금은 더 가벼워진 느낌적인 느낌!


저자가 말하는 고전미술 감상 방법, 10단계. 바로 ‘타불라 라사(TABULA RASA)’.

고전작품을 보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평가하는 초기 6단계 “Time (시간), Association (관계), Background (배경), Understand (이해하기), Look Again (다시보기), Assess (평가)”, 그리고 심화된 4단계 “Rhythm (리듬), Allegory (비유), Structure (구도), Atmosphere (분위기)” 

이렇게 총 10단계다.


내가 경험으로 찾아낸 가장 간단항 방법은 작품 앞에서 세 번 심호흡하기다. 작품 앞에서 몇 번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보라. 뭔가 명상을 하는 과정 같아 보이지만 사실 예술작품 감상에 가장 적합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가능한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라고 권하지만, 때로는 가차 없이 판단하면서 재빠르게 보는 훈련도 필요하다. 

P 19, Time(오래, 자주, 계속의 힘)


고전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물이나 형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현대 미술보다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얼굴이나 느긋하게 움직이는 인물을 보면서 그 그림에 공감할 수도 있따. 반대로 못생기고 지저분하고, 갈등하고 고통받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인물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작품과 관계를 맺기까지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P 23, Association(말을 걸고 마음을 나누고)


하지만 작가 이름을 무턱대고 맹신해도 괜찮을까? 위대한 화가가 그렸다고 알려졌떤 작품이 기술이나 연구 방법의 발달로 수 백년이 지난 뒤에 사실은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작가가 잘못 알려진 작품은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제 까지 빋어 의심치 않았떤 작품이 명성이나 진품 여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이다.

P 26, Background(아름다움의 출처를 묻는 일)


감상은 ‘유레카’의 순간처럼 갑자기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훑어보고, 샅샅이 살펴보고, 골똘히 바라보아야 이해된다. 하지만 몇 단계를 거쳐 이해하고 나면 그 작품의 의미나 다른 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P 31, Understand(얼마나 마음을 열 수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일처럼 작품을 다시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처음 볼 때 놓친 게 무엇일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처음 추측하니 옳은가? 우리 모두는 사물 또는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하기 쉽다. 다시 보기는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P 35, Look Again(작품도 내 마음도 매번 다를 때)


이제 작품을 잘 살펴보고 내 마음에 저장할지 말지 결정해야 할 때다. 예술작품을 보는 눈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으니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P 42, Assessment(정답이 없다는 말은 정답이다)


‘리듬’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음악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배치, 화음(조화), 음조(색조), 음의 높낮이 등 음악 작품의 특징은 그림을 감상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음악 작품마다 어떻게 연주할 지 알려주는 기호가 있다. 회하에서는 이런 기호가 그림을 반짝이게 하고, 물결치게 하고, 살아 움직이게끔 만든다. 

P 47, Rhythm(간격과 박자와 배치의 유쾌함)


비유 단계는 여러 나라 문화, 고전 문학이나 민담 등 그림 속에 담긴 풍부한 내용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 그림 밑에 숨어 있는 상징, 의미, 징후를 읽어내는 것이다. 사람, 물건이나 사상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서 은유한느 작가들의 전형적인 기법을 ‘알레고리’라고 부른다. 

P 50, Allegory(그럴듯한 생각과 있음직한 사람들)


리듬이 그림의 음색, 흥얼거림이나 전체적인 흐름이라면 구도는 그림의 짜임새, 뼈대, 토대, 구성 요소다. 기하학적인 선, 형태와 구획 혹은 지평선, 수평선, 소실점이 구도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요소가 우리의 시선을 좌지우지한다. 그저 오래 바라보는 건 감상이 아니다. 화가의 구성 의도를 파악하는 일도 굉장히 중요하다. 

P 55, Structure(그림 속 풍경, 액자 밖 프레임)


분위기는 작품을 바로 앞에서 실제로 보았을 때 가장 잘 알수 있는 전체적인 느낌, 여운을 뜻한다. 광택이 나는 책에 실린 사진 혹은 고화질 사진이나 화면으로 작품을 보는 게 맨눈으로 직접보기보다 더 또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전 미술을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볼 때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다. 

P 58, Atmosphere(느낌은 아우라가 된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나PD가 연출한 tvN 「금요일 금요일 밤에」 코너 중 ‘신기한 미술나라’라는 코너가 있다. 개인적으로 ‘신기한 과학나라’와 함께 쌍벽으로 좋아하는 코너인데, ‘신기한 미술나라’에서 나오는 미술 박사 양정무 교수님께서 고전 명화를 보여주면서, 알려주던 그 내용들이 바로 이 10단계였다. 소오름. 


‘신기한 미술나라’를 보면서 너무 쉽게 이해하는 내가 이상했다. 헌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난 그 방송을 보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읽었덨다. 알게 모르게 이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 넣고, 느꼈던 그 영향이 그대로 남아있던거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락스 형멱이 일어난 지 몇년 후, ‘민중의 친구’ 장 폴 마라의 초상을 그렸다. 그림 속의 장 폴 마라는 흡사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같기도 하고,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가 떠오르기도 한다. 즉, 장 폴 마라의 죽음을 순교처럼 표현한 것이다. 정작 장 폴 마라는 죽기 전 피부병에 시달렸고, 피부병 증세를 가라앉히기 위해 목욜을 하다가 젊은 여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규칙적인 느낌을 받는다. 가운데 있는 예수에게 시선이 쏠리면서도, 예수 양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고루 시선이 간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가는 시선은 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그림이 지루한가? 그것도 아니다. 각 인물별로 서로 다른 몸짓을 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난 매번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예수 왼쪽에 있는 여성의 모습을 한 사람이 궁금했다. 분명 이 그림은 예수와 열두제자일텐데, 분명 예수 왼쪽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봐도 여성이니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저 여성의 모습을 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다. 어째서 일까?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 가지치기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저 사람은 사도 요한이다’라고 못 받아버리는 이야기를 볼 때면,참 종교란 답답하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다빈치가 정말 사도 요한을 그린건지, 아니면 다른 인물을 그린건지는 오롯이 다빈치만 아는 사실일텐데. 하하.



「금금밤 - 신기한 미술나라」에서 배운 ‘바니타스’! 다른 건 다 까먹었는데, 바니타스 정물화 만큼은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바티나스’란 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한다. 즉 바니타스 정물화는 유독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허무함이나 재물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위 그림 처럼 난데없이 그림에 해골이 나타거나, 난데없이 꽃이 시들어있거나 혹은 꽃이 화병 밖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이런 정물들이 바로 ‘바니타스’ 정물화다.


그림은 참으로 어렵다고 느꼈었다. 그냥 막연하게 그랬다. 그림은 돈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이 향유하는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가, 박물관은 자주 가도, 미술관에 가본 적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런 고전 미술에 대한 입문서가 나오고, 관련 방송들도 나왔다. 덕분에 난 옛날의 나와 달리, 고전 미술과 나름대로 친숙해졌고, 지금은 몇몇 그림은 어떤 화가가 그렸는지까지 맞추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게 바로 대중매체의 힘인가 싶기도 하고(그럼에도 현대 미술은 아직 친해지기 어려운, 정말 범접하기 어렵다). 나처럼 막연하게 고전 미술이 어렵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이 엄청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거기다 tvN 「금금밤-신기한 미술나라」를 보면 더할나위 없고!(나PD예능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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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 1888~1897
제임스 S. 게일 지음, 최재형 옮김 / 책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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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제임스 S. 게일, 그는 언더우드, 헐버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들었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문학을 우리말 번역하여 출간했고, 그 반대로 우리 문학을 서양에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을 사랑했고, 아꼈다. 그리고 조선의 방방곡곡을 유람했다. 조선의 일상을, 문화를, 몸소 느끼기 위해 오랜시간, 그것도 아주 자주 조선의 끝과 끝을 유람했다. 그 기록이 바로 이 한 권의 책이다.


이 책은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그저 찬란한 역사 위 조선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불편할 지도 모른다. 반대로 조선의 그림자를 알고 있다면, 이 게일이 바라본 조선의 모습에 놀랄 것이다. 조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너무 정확하게 짚어내는 그의 눈이 말이다. 그리고 조선은 왜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 대체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의 양반네들은 왜 미래를 내다보려 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모락모락 피어날 것이다.




1. 게일이 바라 본 조선과 상놈

 조선에 사는 외국인에게 상놈들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들만이 오랜 기간 유교 문화가 지워버린 한민족 고유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우기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유의 특성을 잃고 매우 인위적으로 변해갔다. 이들은 그러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도, 또 새롭게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고대의 유령같았다. 하지만 상놈들은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웠고, 어떤 면에서는 이 땅,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P 066


조선에는 짐수레같이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가축조차 짐을 지고 갈 수 없는 길이 많아서 결국 나라의 모든 힘쓰는 일은 상놈의 두 어깨가 담당했다. P 076


조선에서 오랜 시간 고생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내심을 기를 수 있는데, 이왕이면 빨리 인내심을 기르는 편이 확실히 자신에게 좋다. 조선에서 여행을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선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 방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내버려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재촉하고 닦달해봤자 아무런 변화 없이 느린 그대로일 것이며, 그들이 당신을 덜 사랑하게 할 뿐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까지 느려터진 나라가 빨리 하라는 의미의 말은 엄청많다는 것이다. Ossa, quippe, ullin, soki, balli, patpi, chiksi, chankam, soupki, nalli, nankum(원문표현; 어서, 급해, 얼른, 속히, 빨리, 바삐, 즉시, 잠깐, 쉽게, 날래, 냉큼)등은 우리가 매일 듣고 말하는 수 많은 말들 중 일부일 뿐이었다. P 102


조선의 옷가지들 중 가장 황당한 것은 바로 바지였는데, 입고 있을 때는 뭐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빨아 넣어놓은 그 바지의 라인을 보고 있노라면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입는 이 평범한 바지의 폭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극동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불상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속옷으로 입혀도 될 정도였다. P 171


연날리기는 조선사람들이 특히 뛰어나게 잘하는 놀이인데, 새해 무렵 서울의 위쪽 하늘에서 떼를 이뤄 경쾌하게 춤을 추거나, 신기할 정도로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연들로 생기가 넘쳤다. 이들의 연은 날개나 꼬리 없이 네모난 조그마한 것이었는데, 날아가는 모양을 보면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다. P 210


저녁이 되면 조선 사람들은 Angwangi(원문표현; 야광귀)라고 부르는 산타클로스를 막기 위해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양광이는 저 하늘 위에 살면서 새해 선물을 가져간다는 늙은이다. 동방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들은 신발을 문 밖에 벗어두는데, 새해로 넘어가는 그믐날 밤 양광이가 내려와 자기가 다녀간다는 기념으로 신발을 신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P 212


게일은 조선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조선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참으로 불합리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특히 게일은 사랑한 조선의 모습은 다름아닌, 조선에서 찬하다고 칭해지는 ‘상놈’의 일상이었다. 


게일에게 조선의 상놈은 신비한 존재였다. 그리고 놀라운 존재였다. 그저 평온해보이다가도,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상놈을 보면 한 사람이 화가 저렇게 크게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싸움이 끝나자 다시 평온하게 돌아오는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무엇보다 상놈은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른 양반과는 달리 땀방울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하루하루를 열씸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양반에 비하면 배운게 없는 상놈이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안에서 움직였으며,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 대해 신의를 지켰다.  


가령 상놈에게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사람에게 100달러를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심부름을 완수하면 그 댓가로 1달러를 준다고 한다. 게일의 눈으로 보면, 이런 경우 100달러를 먹고 도망가도 잡지를 못하는데, 이 상놈이라는 사람들은 끝까지 심부름을 완수하고 그보다 훨씬 적은 대가 1달러를 감사하게 받아간다.


게일에겐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가진 상놈이 신기하면서도 놀라웠고, 존경스러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게으름 피우는 양반과는 달리 그들이 없으면 조선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야말로 상놈은 제일 대단한 존재라 생각했다.



2. 양반과 유교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자께서는 Anja(원문표현; 안자)에게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 것을 명하셨는데, 청빈한 삶 속에 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많이 한 조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어떠한 동요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어떤 한자를 쓸 때 점을 두 개 찍는 게 맞는지, 네 개 찍는 게 맞는지 하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해서 모든 이들의 관심을 단번에 집중시켰는데, 이놈의 글자 모양이 뭔지 원래 논의하던 주제나 글자가 지닌 뜻은 완전히 잊히기 십상이었다. P 031


갑자기 모퉁이에서 멋을 부린 퉁퉁한 두 양반과 마주친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나를 뒤덮고 있던 때였다. 그들은 나를 아주 얕잡아 보면서 ‘너 같은 짐승이 사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또 ‘내가 어디로 기어가고 있는 중인지’를 물었다. 순간 혈압이 올랐고, 나를 이렇게 불러 세운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신나는지 새로운 놀림감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P 148 


우리가 대답하자 그는 놀란 눈빛을 보내며 “여기에서 보면 어느 쪽에 나리들의 나라가 있나요?”하고 되물었다. 우리가 지구 중심을 가리키자 원님은 아주 큰 충격에 빠졌고 혹시 우리가 땅속에 사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곳은 지구 반대편 쪽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그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급히 주제를 바꿔 안전하게 배웅해줄 테니 얼른 마을을 떠나라고 했다. P 180


서양에서는 한 사람 앞에 펼쳐질 삶을 대비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지만 조선사람들에겐 이러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현재에 눈 감고 과거만 바라보고 살도록, 한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거나 압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우리는 발전을 생각하지만, 그들은 통제를 생각한다. 서양의 학생은 다양한 학업 성취화 새로 알게된 갖가지 것에 기쁨을 느끼지만,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배워 안다는 것보다 단지 한자를 읽고 쓰는 것에서만 성취를 느꼈다. P 230


관찰사 양편으로는 부하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관찰사는 질문을 한두 개 던졌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애꾸눈 부족이 살고 있느냐?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눈이 두 개씩 달려있느냐? 서양 사람들은 이빨을 아무 때나 뽑았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할 수 있다는데 과연 사실이냐? 이 외에도 인종학적, 과학적 질문이 이어진 후 면담은 끝이 났다. P220


어떠한 것이든 예를 공고히 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해야 했고, 이러한 이유로 양반은 그 누구도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어떤 종류의 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양반의 삶은 상놈의 일을 지휘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상놈들은 모든 명령에 복종했다. P 237


이렇게 부르는 게 정당한지 부당한지는 몰라도 ‘나라의 병폐’라고 일컬어지는 서울의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이미 이런 외국 바람에 깊이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대고 있었고, 세금을 내는 상민들은  입 쓴 비판을 쏟아냈다. (중략) 나라의 제조, 유통산업의 몰락과 더불어 발생한 최근의 이런 사치행각들은 조선 사람들을 역사에 길이 남을 절망적인 지점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P 282


유교, 조선에 뿌리박힌 사상이다. 유교를 학문으로 공부하는 유학, 모든 양반이라면 태어나, 글자를 깨우치는 시기에 유교경전을 하나 둘 읽으며 그에 세뇌된다. 공자와 맹자가 말했던 유교라는 게, 주자학으로 변질되고, 그 마저도 조선에서 또 변질되었다. 유교를 수 많은 차별과 멸시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 중 제일가는 차별은 바로 신분제 차별, 남녀 차별 그리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차별이다.


글자깨나 읽고, 유학을 공부한다는 자들은 정작 중요한 사실에는 눈 감았다. 그들은 조상의 묫자리가 중요했고, 죽은 자의 시를 외우는데 급급했으며, 한자에 점이 몇개 찍혀있는지에 대한 토론에 열을 올렸고, 자신들이 만든 신분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을렀다. 양반들에게 노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행위였으며, 본인들은 오로지 공맹을 외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이게 바로 조선 말, 유학자의 모습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말한지 오백여 년이 지났것만, 조선은 오백년 전이나 후나 다를게 없었다. 오백년이 지났지만 조선의 양반네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았고, 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천시하며 역모죄로 몰아넣었다. 그들이 계속 유학을 고집하며 나라의 문을 꽁꽁닫은 댓가는 참으로 참혹했다. 그들이 끈임없이 유지하려 했던 신분제, 본인들만 향유하려 했던 문자, 중국에만 사대하는 유교,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조선은 지식적으로도, 자본적으로도 하향평준화가 된 것이다.



3. 파란만장한 조선 말

청나라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무지에서 오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평양으로 진군해 들어온 후, 의미 없이 시간을 지체하면서 자신들의 힘과 시간을 허비했다. 반면, 왜군은 평양의 모든 진출입로를 장악했고, 각 요충지에 병력이 증원되자 이미 승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늑대가 양을 덮치듯 그렇게 왜군은 청군을 공격했는데, 오만 명의 청나라 병력은 청나라로 도망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인 북대문으로 미친 듯이 쫓겨갔고, 그 절망과 혼돈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짓밟았다.(중략) 그건 전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근세 전쟁에서 볼 수 있는 작전 수준에 훨씬 미달한, 도망치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한 생명체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P 112 - 청일전쟁


대체 누가 이 공명정대한 시대에 이러한 비열한 행위가 행해졌단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문명을 바로 세우겠다는 거짓 명분을 앞세워 별 장식과 금술, 견장으로 치장한 서양식 제복을 입은 사백 명의 남자가 어느 밤 궁궐 담을 넘었다. 이들은 동방에서 가장 우아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의지할 데 없는 한 여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바로 조선의 왕후를. (중략) 그들은 저 ‘용맹스러운’ 사무라이 칼로 왕후가 죽을 때 까지 난도질한 후에 시신에 석유를 붓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태워버렸다. 그들은 왕후를 틀림없이 제대로 처리했다고 확신하기 위해 궁녀를 서넛 더 죽인 후에야 행진으로 빠져나왔다. P 256 - 을미사변


이 같은 행위에서 표출된 악의로 가득한 잔인성이 과연 일본의 실체인지 믿을 수가 없었지만, 최근 벌어진 일을 보면 그것이 바로 진짜 일본의 모습이었다! 가오슝호 격침, 뤼순 대학살에 조선 왕후 시해까지! P 259


온 사방에 일본인이 깔렸다. 나의 벗 이씨는 밖으로 나가서 왜군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는데, 왜군은 중국뿐 아니라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영국하고도 싸울 준비가 다 되어 있따고 털어놨단다. (중략) 일본인들은 계집다움과 소인다움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일본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소인배 족속이다. P261



조선이 하향평준화 되는 동안 외세가 우리 땅에 들어왔다. 우리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그리고 을미사변. 전부 외세에 우리가 당한 일이었다. 


청일전쟁의 시작은 동학농민운동부터 시작한다. 조선 말 양반들은 백골에도 세금을 때리고, 개에도 세금을 때리고, 길에도 세금을 때렸다. 일명 삼정의 문란이다. 하루하루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그렇게 들고 일어났으니 그게 바로 동학군이다. 양반들이 비리를 저질러도 신경조차 쓰지 않던 고종은, 살기 힘들다던 동학군을 그저 역적으로 보았다. 고종은 역적 토벌을 위해 청나라에 군대지원을 요청했고, 그렇게 청나라 군대가 조선땅에 들어온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 땅에 들어오니, 일본군이 조선에 있는 자국민을 지킨다고 지들도 군대를 보낸다. 그렇게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은.... 서로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겠다고 전쟁을 했다. 조선땅에서, 전쟁을 했다.


을미사변은 조선의 왕비, 민비를 일본군이 한 밤중에 살해한 사건이다. 민비 일쪽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는 너도 나도 다 아는 사실이라,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지는 않다. 다만,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는 다르다. 민비는 조선 백성들에게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는데, 일본군이 들어와서 죽인거다. 민씨 일족이 조선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과, 일본놈이 조선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그 무게가 달랐다. 아무리 둘다 밉더라도, 모름지기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일본놈들이 자국의 왕비를 잔혹하게 죽이는 행위는 그 누가 보아도,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게일은 이 모든 것을 보았고, 기록했다. 



4. 그리고…

난 게일이 사랑한 상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꽤 분노에 휩싸였다. 게일은 상놈의 순수한 면을 좋아했지만, 상놈의 순수한 면은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조선이라는 나라가 잘못된 유교를 퍼트렸고, 양반들이 신분제를 더욱 더 공고히 만들었다. 배움(물론 그 배움조차도 폐쇄적이었지만)의 기회조차도 양반네들이 독점했다. 그렇게 상놈이라 불리운 그들은, 배움의 기회조차 없었고 양반을 위해 일해야 했으며, 양반을 먹여 살리는 세금내기에 급급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했으니까, 그들에게는 이런 삶이 순리였다. 게일이 바라 본 상놈의 순수함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들어 낸 어리석음이었던 거다.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양반은 호의호식하려 했고, 상놈은 더욱더 순수해져갔다. 이미 조선은 변화할 타이밍 조차도 놓쳐버렸고, 그렇게 늑대 아가리에 고이 놓인 양이 될 수 밖에 었었던거다. 그 와중에 조선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소수였을 뿐.  이후의 상황은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일제강점기다. 


이제와서 백날 당시 조선을 비판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까. 대신 현재를,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조선 말 나라를 좀 먹게 한 종자들이, 복붙하듯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조선 말 백성들과, 대한민국의 국민은 다르다. 그러니, 나라를 좀 먹게 하는 그 종자들을 끌어내어, 조금은 우리가 사는 이 나라를 좋게 바꿔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부르는 게 정당한지 부당한지는 몰라도 ‘나라의 병폐’라고 일컬어지는 서울의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이미 이런 외국 바람에 깊이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대고 있었고, 세금을 내는 상민들은 입 쓴 비판을 쏟아냈다. (중략) 나라의 제조, 유통산업의 몰락과 더불어 발생한 최근의 이런 사치행각들은 조선 사람들을 역사에 길이 남을 절망적인 지점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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