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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일기 - 어느 독립운동가 부부의 육아일기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 우리나비 / 2019년 2월
평점 :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즐겨 보는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인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배우 한고은님이 언급하면서 이다. 크게 보면 부모가 아이를 낳아, 아이를 기르며 쓴 육아일기지만, 이 육아일기를 쓴 부모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양우조, 최선화님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당시 중국에서 생활한 임시정부의 상황이, 당시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에 한국판 「안네의 일기」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
이 두분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양우조님은 상하이로 망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며 흥사단에 들어갔다. 이후 중국으로 다시 건너와 임시정부 요원이 되었다. 최선화님 역시 상하이로 망명한 뒤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였고, 한국애국부윈회 재건을 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은 상하이에서 열렸으며, 주례는 김구선생이 보았다. 이들의 삶은 중국에서 임시정부 가족들의 삶과 그 궤를 같이하였으며, 해방 이후 1946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책을 편찬한 건 이 책의 주인공 ‘제시’의 딸 김현주 씨다. 양우조&최선화님에게는 손녀인 셈이다. 그녀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당시 살아계셨던 할머니(독립운동가 최선화님)가 빛 바랜 일기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 일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신들의 첫 아이, 그러니까 김현주씨의 엄마인 제시를 기르며 기록한 육아일기 였다. 아니, 육아일기이자 임시정부 요인들의 일기였다.
일기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임시정부 요인분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참 많이 바꿔 놓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본인들의 삶을 희생했던 그분들의 삶이 참 가슴에 와닿앗다.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비전에 감탄했다. 나는 일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가족 식솔처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때 그곳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아 나간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출판하기로 했다. P 011
그동안 살면서 몰랐던, 국사책에서만 보았던 내용들이 할머니 일기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김현주님은 그렇게 할머니의 일기와, 중간중간에 할머니와 대화를 하며 이야기를 보충하여, 1999년에 출판을 했더랬다. 시간은 흘러 책은 절판되었고, 그렇게 잊혀졌다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맞춰 이 책이 다시 한번 세상에 나왔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의 존재를 몰랐고,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책의 존재를 알았다는 사실에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랬다.
우리는 김구, 윤봉길, 이봉창 등 국사책에 실린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수십, 수백의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한 일부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라며, 스스로 만족한다. 그러는 새에 더 많이 빛을 봐야할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은 점점 더 잊혀지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이, 「제시의 일기」에도 그대로 반영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거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백범일지」 를 아냐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 안다고 하겠지만, 「제시의 일기」를 아냐고 하면 열 중 한명이라도 안다고 하는 사람이...과연 나올까싶은, 이런 상황이 그저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육아일기는 1938년 7월 4일, 호남성 장사(창사)에서 맏딸 제시를 얻으면서 시작한다. 이후 광둥성 광주(광저우), 광서성 유주(류저우), 사천성 기강(치장), 사천성 중경(충칭)을 거쳐, 1946년 부산항으로 통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 오며 일기는 끝이 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경로만 보아도 알 것이다. 양우조, 최선화 부부가 다닌 이 경로는 임시정부의 피난길이자 고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그 경로라는 것을.
1938년 7월 4일, 중국 호남성 장사.
내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내 딸을 가슴에 안았다. ‘상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정세가 중국에 불리해지자 중국 정부가 자리하던 남경 근처의 ‘진강’으로, 얼마 후 다시 지금의 ‘장사’로 자리를 옮겼다. (중략)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이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P 034
1938년 7월 22일, 광동성 광주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몰리고 있다 (중략) 제시가 태어났던 ‘장사’. 이른 새벽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장사’를 뒤로하고, 모든 임정 식구들은 중국 대륙 동남쪽에 위치한 광동성 광주행 월한철로 전차를 탔다. (중략) 그렇게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는 갑작스런 일본기의 공습도 만났다. 공습이 오자 기차가 멈추었고,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와 주변의 수풀 속에 숨어 적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P 037
1938년 10월 11일, 광동성 불산
철 없는 제시지만, 백일맞이라 해서 그런지 경쾌한 태도로 아주 기분 좋게 잘 놀고 있다. 그런 제시의 기분과 달리 바깥의 분위기는 스산하다. 매일 아침마다 포탄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있다. 적이 가까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오후엔 일본군이 광동, 담수 등의 지방에 상륙하여 물밀 듯 쳐들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산 거리에는 짐을 옮기는 황황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P 044
1938년 12월 5일, 유주
아침 열 시쯤 되어 공습경보가 났다. (중략) 후에 안 소식으로 우리가 피신했던 5호 동굴 좌우 쪽, 기타 여러 동굴이 폭탄 투하로 매몰되어 버렸단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 있지 않았던들 우리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1938년 12월 5일, 이날의 왜놈의 잔인한 행동은 인류 역사가 생긴 후, 세계 처음으로 꼽히는 참사였다고 한다. 동굴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산 주위 숲속, 나무 밑에 은신하고 있던 피난민들은 왜놈의 저공비행으로 기관총을 난사당하여 거의 다 죽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을 그렇게도 많이, 의도적으로 죽였던 일본의 잔혹한 행동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되리라. P 057
이 일기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내용들이 있다. 육아일기 인 만큼 ‘제시’에 대한 것은 당연히 나오는 것이니, 그것을 제외하고, 제시 만큼이나 많이 나오는 내용, 바로 ‘날씨’와 ‘일본의 공습’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열이면 열, 상공에 일본 전투기가 나타났고 무차별 공습을 했다고 한다. 양우조, 최선화님은 공습경보가 울리면 매번 제시를 안고 주변에 있는 숲이나, 들판, 동굴, 공동묘지 등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래서 그런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 두 분은 아침마다 날씨를 챙기는 게 습관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제시의 육아와, 날씨&공습, 그리고 임시정부가 들어있는 「제시의 일기」는 육아일기 이 전에, 한 권의 항일독립운동 사료였다.
1939년 2월 8일, 유주
제시의 부모로서의 역할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되는 것과 같다. 자식들의 모습을 미추는 거울, 부모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이 깨지면 그 속에 비춰진 모습도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에 대해 눈뜨게 된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를 그려본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거울이 되어 그 아이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또 깨닫게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P 065
1940년 1월 29일, 사천성 기강
갈수록 제시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따라하며 배워가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취하는 행동들이 제시에겐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두려워진다. 혹 내가 취하는 행동에 모자람이 있지는 않은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못난 모습이 눈에 뜨이는 건 아닌지. P 104
1941년 1월 4일, 사천성 중경
이제 이 아이가 세상에서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얼마나 많아질까? 생후 세 돌이 못 된 아이에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이 생겨난다. 내 것이란 이름으로 가지고 싶은 마음. 사물이나 사람이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함께 보고 나눌 수는 없는 것인가. 세상의 갈등과 괴로움을 단지 소유욕으로 단정 지을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오늘 우리가 갖는 많은 절망과 어둠이 욕심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P 148
1942년 6월 1일, 사천성 중경
마마는 제시의 교육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혼자 몸으로 살림을 하시느라 아직 제시의 공부에 적극적으로 착수를 못하셨다. 때로 창가나 가르치고 가정 교육에 그치고 있다. 둘째 제니는 아직 서서 걸어다닐 생각은 않는 양으로 앉아서 놀고 있지만, 눈치와 말귀는 장족의 진보를 하고 있다. 제니는 침착하며 퍽 능한 편이다. P 186
1942년 8월 4일, 사천성 중경
한 배속에서 난 아이들의 아래위가 서로 다른 성격과 모습을 보여주듯이, 한 아이는 여리고 상냥하고 잘 챙겨주는 모습을, 또 한 아니는 자기 고집이 세고 직선적이며 도전적인 모습을. 두 아이가 어울려 만나는 이 세상은 틀림없이 다른 모습일 것이다. 같은 강줄기에 우리가 만나는 일기가 다르듯이 부모가 지켜보게 될 두 아이의 세상살이 또한 다른 모습일 수 밖에. P190
1943년 3월 22일, 사천성 중경
저녁 식사 후, 저 멀리 산보를 몇 시간 하고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어린애들은 오래간만에 나가 다니매 좋다고 한다. 어떻게 가버렸는 지 모르게 가 버린 인생의 푸르른 시간들이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천진하게 자라고 있는 이 어린애들이 어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P 212
그 누구도 처음부터 부모였던 적이 없고, 부모교육을 받은적이 없기에, 좌충우돌 하고 매시간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독립운동가였던 그들도 역시 그랬다. 첫 아이 제시가 태어나 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또한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하게 되었고, 많은 생각을 했으며, 그 생각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건 그 누구도 반박못 할 사실일 것이다. 내 조국이기에 되찾으려 했던 대한민국은, 이제 내 아이가 자라나야 할 땅이기에 어떻게든 되찾아야만 했다. 조국을 되찾는 다는 건 쉬운일이 아닌걸 알고, 본인들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오로지 내 아이들을 위하여 그 희생을 감수하였다. 부부는 큰딸 제시와, 둘째 제니를 이야기하며 항상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했고, 걱정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통해 본인들이 위로를 받았다.
요즘의 육아일기와 다른 점이라면 ‘~가 힘들다’ 라는 말이 유독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요즘 부모가 되는 젊은 사람들은 이해 불가능한 육아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세대는 항시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저 당시의 삶은 결핍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이 결핍에는 조국이 없다는 것 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조국이 있는 우리가 이 시대를 100% 이해하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결핍이 넘쳐나는 삶에서 육아를 하는 게 어떤 일인지, 겪어보기 전 까지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이의 사회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번 쯤은 요즘 잣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1939년 1월 25일, 유주
요즘의 임정은 ‘한국국민당’과 ‘재건한국독립당’, 그리고 ‘조선혁명당’등 임시 정부 주변의 민족진영이 뿔뿔이 갈라져 있고,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 등 임시정보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는 있지만, 진전이 뚜렷하지 않다.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움직임이 발전되면 좋으련만. P 063
1940년 3월 14일, 사천성 기강
이동녕 선생님께서 어제 오후에 작고하셨다. 임시 정부의 제일 웃어른이신 분이 가심으로 한교들은 충격이 컸다. 돌아가시면서도 한교들의 화합을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한다. 우리 생전에 독립을 볼 수 있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애써 오셨던 이동녕 선생님께서 독립의 서광이라도 보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으리란 안타까움이 남는다. P 110
1940년 11월 29일, 사천성 중경
이층방으로 곧 필제네집(조소앙 선생 가족)이 이사오고 대청마루를 지나 바깥방에는 최형록씨와 조계림이 살고 있다. 일층에는 이청천 선생(지청천 장군)댁과 그 사위 심광식 씨 가족이 우리 방 아랫방에 살고 있더 모두 다섯 세대가 옹기 종기 붙어 있기에 적적한 느낌이 없어서 좋다. P 144
1943년 3월 7일, 사천성 중경
‘중경한국애국부인회’가 재건이 된 후, 엄마는 총무로 피선이 되어 회의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 보게 됐다. 제일처로 시작한 것은 홍보 활동.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세계 만방에 헤어져 살고 있는 우리 여성들과, 더욱이 국내에 있는 부녀자들에게 오늘 저녁 광파 방송을 했다. P212
1945년 5월 1일, 사천성 중경
오늘을 계기로 해서 오랫동안 운동 중에 있던 우리 광복군이 오늘부터는 완전히 ‘한국 광복군’으로 되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령부 안에는 상하 직원이 거의 다 우리사람으로 개편되고, 필요한 기술자로 중국사람도 얼마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도 오늘부터 광복군에 취직이 되신 모양이다. P237
1945년 8월 9일, 사천성 중경
오후 한 시에 오랫동안 문제로 걸려 있던 일소전쟁에서 소련이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세상은 미칠 듯이 좋아한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명이 된 미국의 원자폭탄 한 개가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지자 땅 덩어리 3분의 1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P 240
1945년 8월 10일, 사천성 중경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 시간)에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중경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 쯤이었다. 세상은 밤을 새워가며 미칠 듯이 좋아라고 야단을 한다. 그러나 웬셈인지 우리나라 사람들(한국 교포들)은 나와 같은 맘인지 다들 멍하여 가지고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이다. P 245
시시각각 변하는 중국의 상황, 임시정부의 상황이 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임시정부의 3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분열로 인해 힘들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이동녕 선생이 저런 유언을 남기셨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이동녕 선생의 유언이 있은 뒤 3당 합당이 되었고, 이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임정 식구들은 중경, 그러니까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최선화님은 애국부인회를 재건했고, 임정요인인 양우조님은 한국광복군에 몸을 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책 곳곳에 언급되었던 임정 가족들인 이시영 선생, 김구 선생, 지청천 장군, 조소앙 선생, 차리석 선생 등 그 모두가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헌신했다.
하지만 독립은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왔다. 원자폭탄 두대 맞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 독립은 우리 힘으로 얻어낸 독립이 아니라, 남이 얻어준 독립이었기에, 독립 이후에 일어날 사태에 대해 임시정부 사람들은 우려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인정되지 않았기에, 개인자격으로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온 고국에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신탁통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1946년 4월 26일
아침에서야 배가 항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조국, 조선 땅으로 가는 배다. 며칠 후면, 그동안 그리던 산하와 가족들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P 266
1946년 4월 29일, 부산
삼천삼백여 명이나 되는 전체 선객들은 모두 고국 산천을 바라보며 반가워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중국 태생인 우리 애들은 별로 기뻐하는 표정이 없었으나, 엄마 아빠가 내 나라 땅에 왔다니 좋아하고 있다. P 267
개인자격으로 돌아온 조국이어도, 조국이었기에 돌아왔다는 기쁨이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 날이 불확실하긴 했지만, 중국 땅에서 임정을 꾸렸듯 그렇게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 했을거다. 양우조, 최선화님을 비롯한 임정 식구들 모두가 그랬을거다. 하지만 돌아오니, 친일파가 계속 권력을 잡았다. 이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를 좌파라 몰아세우며 잡아들였다. 나라는 두동강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 분들은 이 상황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1999년 4월 19일, 대한민국 경기도 분당
이제는 손주들에게 하는 옛날이야기의 한 가지 소재가 되어 버린 그 시절 우리나라의 독립을 바라던 시간들..
먼저 내 얘기를 소중하게 읽고 들어 준 내 손주, 현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 또한 그 시간들을 다시 이야기하며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지치고 힘겨웠던 기억이라기보다 소중하고 흥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린 그 시절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면서 마음은 어느새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사람마저도 찾을 수 없다.
나도 어느새 기억이 가물거리고 눈앞이 침침하고, 다리, 허리가 아파 오는 것이 그 옛날 내가 봤던 노인들처럼 되어 가고 있다. 남은 건 그나마 내 머릿속에 남은 자꾸 흐려져 가는 기억들이고, 전해 줄 건 그 시절 이야기 뿐이 되어버렸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을 열심히 해결하려고 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그 시절을 남겨 둘 수 있어 기쁘다. P 271
담담하게 읽었다. 그렇게 책을 다 읽어가는 와중, 마지막 챕터에 최선화님의 회고를 보았다. 담담하게 읽고 있었는데, 짧은 회고를 보고 눈물을 흘려버렸다. 이분은 어떻게 이토록 헌신적일수 있는 것일까. 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동지들을 먼저 보냈을거고, 광복을 맞이한 뒤에는 친일파에게 동지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보았을거고, 스려저간 일부 동지들이 결국 북한으로 떠난 것도 보았을 거고, 한국전쟁도 보았을 것이며, 한국전쟁 중 대통령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자국의 국민들이 학살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이후 군사 독재 정치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후손들에게 독립된 조국을 넘겨준 것 만으로 기쁘다고 할 수 있다니.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눈물이 났고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고 그랬다.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이 분들에게, 정말 떳떳하게 보여드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길 원하고 또 원한다.
일기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임시정부 요인분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참 많이 바꿔 놓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본인들의 삶을 희생했던 그분들의 삶이 참 가슴에 와닿앗다.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비전에 감탄했다. 나는 일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가족 식솔처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때 그곳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아 나간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출판하기로 했다. - P11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사람마저도 찾을 수 없다.
나도 어느새 기억이 가물거리고 눈앞이 침침하고, 다리, 허리가 아파 오는 것이 그 옛날 내가 봤던 노인들처럼 되어 가고 있다. 남은 건 그나마 내 머릿속에 남은 자꾸 흐려져 가는 기억들이고, 전해 줄 건 그 시절 이야기 뿐이 되어버렸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을 열심히 해결하려고 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그 시절을 남겨 둘 수 있어 기쁘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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