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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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들었던 고등학생 때, 한창 세계사에 빠져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를 가르치던 세계사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교과 진도에 맞춰서 본인이 답사여행을 다녀왔던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을 공부할 때는 로마 답사 사진을, 중세 유럽을 공부할 때는 유럽에 있는 중세 건축물 앞에서 찍은 사진등을 말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사 더쿠였던 나에게, 중세 유럽 건축물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중세 한국 건축물에서 보기 힘든 뾰쪽뾰쪽한 첨탑이라니! 성당 안을 오색 빛으로 물들이는 스테인글라스라니! 정말 신세계였다. 



하늘 드높이 위로 솟은 높은 첨탑과 그 위에 있는 십자가. 누가봐도 수평보다는 수직성을 강조한 건축물. 그런 건축 양식을 ‘고딕 양식’이라고 배운 그때부터 나는 고딕 성당에 대한 로망이 생겼더랬다. 하지만 그저 로망일뿐! 난 지금도 고딕 성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저 그런 머글이었다. 하지만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덕분에 적어도 고딕 성당 머글 신분은 벗어난 듯?!


이 책에 따르면 20세기 미술사학자인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역사를 물리적 시간의 불가분한 연속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고 단절된 시대들의 진행단계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게 역사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게 바로 시대의 통일성이다. 시대의 통일성은 역사에 포함된 예술, 문화, 철학, 종교, 정치 등 다양한 현상 등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당 시대의 건축 양식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양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바로 떠오른 건 10세기 ~ 11세기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부활과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 12세기 왕가의 지지를 받아 외곽에 있던 교회건물들이 도시안에 들어서며 덩달아 부유층에 지지를 받으며 교회 권한이 커지면서 유행한 고딕 양식, 14세기 교회권한이 줄어들고 흑사병 유행을 거치면서 유행한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역사는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 진행과정이며, 각 시대마다 어떠한 분야든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게 맞구나 싶다.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고딕이 고트족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고딕’과 ‘고트족’은 아무련 관련이 없습니다.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이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명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고딕 양식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 008


초기 고딕 성당을 대표하는 상리스, 누와용 대성당을 거치며 고딕 성당은 본격적으로 수직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성당이 바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이르러 성당 규모도 웅장해지고, 앞서 지어진 초기 고딕 성당의 한계를 극복하며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 위용은 워낙 대단해서 당대 유명 작가였던 빅토르 위고도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주제로한 여행기와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뉴스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딕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12세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대중화되고, 그에 따라 신학의 영역에서 마리아론이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관련된 마리아의 협력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건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많은 주교좌성당이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정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당, 곧 노트르담 대 성당이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입니다. 그래서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보통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말하는데, 앞에서 언급된 상리스 대성당과 누와용 대성당, 그리고 랑 대성당 모두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p 067


『레 미제라블』(1861년)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는 그보다 20년 전인 1831년에 『파리의 노트르담』을 출간했습니다. 위고는 스물 세살이 되던 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여자의 자격으로 샤를 10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대관식은 여느 왕처럼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평소 고딕건축에 관심이 많아떤 위고는 랭스 대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 후 건축여행을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기를 집필하였는데, 그중 ‘프랑스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의 파괴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문화유산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특히 고딕 성당의 훼손에 대한 그의 우려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잘 나타납니다. p 075


위고는 대성당의 양식을 평가하기를 순수 로마네스크 양식도 아니고 순수 고딕 양식도 아니며, 과도기적 양식의 성당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기둥은 로마네스크로 세워졌지만, 반원 아치 대신 포이티드 아치가 얹히면서 그 양식이 전체를 지배했는데 그 뾰족하기로 치면 후대의 포인티드 아치만 못하였다고 비평합니다. 이를 육중한 로마네스크식 원기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합니다. 위고의 관찰은 매우 예리한데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전성기 고딕 성당에 속하지 못하고 초기 고딕의 완성 단계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p 078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장엄하고 숭고한 건축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답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손 쳐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카룰로스 대제)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 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린 채 인간들이 존경할 만한 기념물에 가한 무수한 훼손의 흔적 앞에서 한숨을 참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 유명한 성당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명하지만, 실상 성당의 권위(?)가 있는건 랭스 대성당이다. 프랑스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성당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랭스 대성당은 초기 고딕의 수직성과 수평적 비례를 중시한 고전 고딕을 융합시킨 건물로 전성기 고딩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5세기 초에 세워진 랭스 대성당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에페소 공의회(431년)의 영향을 받아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가 496년에 이곳에서 아리우스파에서 개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세례는 유럽의 나라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도를 국가 체계의 기틀로 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왔습니다. p 124


성당의 수직화는 구조적 경량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플라잉 버트레스의 밴딩 모멘트를 해결하지 못해 육중한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졌는데, 랭스는 부르즈 대성당의 보강 방식을 받아들여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벼우면서도 강하게 만들었고, 버트레스의 단면도 줄였습니다. 플라잉 버트레스 기능이 강해졌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트리포리움의 높이가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당의 벽체도 얇아졌고 창문의 크기도 넓어지면서 경량화를 배가시켰습니다. p 128


고딕 성당은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샤르트르 대성당을 거치면서 고딕주의의 절정인 랭스 대성당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는 누와용 대성당, 랑 대성당 그리고 부르주 대성당의 고전주의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함께 걸음’ 덕분에 웅장하고 찬란한 고딕 성당이 지금도 우리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p 130


동방박사 유골함이 봉헌되어있는 쾰른 대성당은 독일에 있다. 그 자리에 처음 성당이 세워졌던 시기는 비교적 오래전인 4세기 였지만, 여러 개중축을 거치다가 13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된 그 자리에 새로 성당을 지으니, 그게 바로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그저 멋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라고 하기엔, 쾰른 대성당에 지금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지는 과정이 꽤나 흥미롭다.


당대 독일 도시 쾰른은 로마네스크 전통이 깊었던 지역주의가 눈에 띄는 도시였다. 반면 인근에 있는 프랑스는 고딕 양식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은 쾰른처럼 지역주의도 있었지만 프랑스처럼 보편주의도 있어서, 이 두개가 적절히 공존했지만 쾰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쾰른 성당은 순례성당으로 이름났고, 해마다 순례객이 늘어나자 성당 확장을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의 권력을 나눠가졌던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세 곳의 눈치를 쾰른 대성당은 어떤 방식으로 성당을 확장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쾰른에 만연한 지역주의를 따라가자면 신성로마제국 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야했지만,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은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게 될 경우, 독일에 있는 다른 성당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미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고딕 성당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쾰른은 고딕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냥 고딕 양식이 아닌, 기존의 고딕 양식을 뛰어넘은 새로운 고딕양식을. 그렇게 탄생한게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쾰른 대성당에는 116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서 봉헌된 동방 박사의 유골함이 있습니다. 이 성 유물은 황제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것으로 밀라노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후 대성당은 유골함을 금으로 다시 제작하여 1225년에 완성하고 그로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유골함을 보기 위해서 쾰른 대성당을 순례했습니다. 그렇게 쾰른 대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부터 성당은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p 208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으로 건축 양식이 변화하던 시기의 당대 신학과 철학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건축사적 세계사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고딕 성당, 전성기 고딕 성당, 후기 고딕 성당을 비롯하여 유럽 국가별 유명한 고딕 성당들을 사진자료와 함께 건축학적으로, 세계사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여기서 시야를 조금 더 넓히고 싶다면, 저자의 전작인 ‘로마네스크 양식’에 관한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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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까지만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식량난이 사회적 문제였다. 따라서 생산성이 높은 품종을 개량하고, 대체 음식을 만드는 게 화두였다. 그런 과정에서 장기 보관이 쉽고, 이동이 쉽고, 그 자리에서 먹기 쉬운 가공식품들이 무수히 개발되었다. 문제는 가공식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수많은 합성첨가물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보존제, 발색제, 방부제, 합성 조미료등은 기본이고 설탕 및 소금이 과하게 들어간다. 이런 가공 과정에서 식품 원형의 맛이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다량 섭취했을 때 몸 속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가공식품이 일상화되기 전,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1970년대까지만해도 사회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질병은 코로나19처럼 결핵, 천연두, 콜레라 같은 감염성 질병이었다. 하지만 가공식품이 일상화된 지금, 사회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질병은 당뇨, 류머티즘, 치매, 각종 염증성 질병이다. 너무 흔하게 발병하는 위염, 장염, 치주염, 피부염 기타 등이 모두 염증성 질환이다. 이렇게 염증성 질환이 일상화가 된 이유는 위에서도 말한 합성 가공식품의 대중화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서구적인 식습관이 있다.


다시 가공식품이 일상화되기 전으로 돌아가보면, 한국인의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은 찌고 삶고 데치는 요리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식재료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먹는 음식도 한정적이었고, 먹는 시간도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가공식품의 일상화되는 그 시점에 발맞춰 전 세계적으로 보다 빠르고 편리한 삶을 지향하고, 식량난이 사라지며 잉여 농산물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먹는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노동을 하기 위해 먹었다면, 지금은 즐기기 위해 먹는다. ‘먹는 행위’가 노동이 아닌 여흥을 위한 행위로 바뀐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먹방’, ‘미식’, ‘맛집찾기’ 등이다. 


거기다 요즘 사람들에게 핫한 음식들은 위에서도 말한 서구적인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들이다. 기름으로 볶거나 튀기고, 직화로 한 요리들. 혹은 정말 맵거나, 달거나, 짠 요리들. 먹방 프로그램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요리들이 주로 나온다. 요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불맛이 중요하다며 직화를 하거나, 튀기거나 볶는다. 거기다 설탕을 과하게 넣기도 한다. 직화든 튀기든 직접 조리한 요리는 가공식품보단 몸에 좋겠지, 하고 안심하고 먹기엔 이런 요리들도 건강에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이라고 기름에 볶고, 직화한 요리를 안먹었을까? 옛날 사람들도 분명 먹었다. 다만 그때는 식량 자체가 귀했을뿐더러, 넘쳐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요즘처럼 무분별하게 먹지 않았을 뿐이다. 귀한날, 잔칫날이나 되야 먹던 음식이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이런 류의 요리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


그렇게 가공식품과 서구식 음식에 길들여진 우리 몸에 남은 건.... 독소다. 당독소. 이름부터 ‘독’이 들어간다. 이름값을 하려는건지 모르겠지만, 당독소는 몸에서 각종 염증질환을 일으키는 대표주자였다. 


 

당독소가 혈액이나 조직에 축적되면 우리 몸에 교란이 일어나 과도한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심혈관 질환, 당뇨, 암 등과 같은 만성질환을 유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백내장, 황반변성, 녹내장, 제3신경통, 치주질환, 역류성 식도염, 위무력증, 수전증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독소의 해로움이 신체적 영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울증을 심화시키고 불안을 높이며 학습능력을 떨어뜨리는 등 심리적 정신적 인지적 문제와도 연관이 깊다. 당독소라는 단어에 독소, ‘독성물질’이라는 의미의 ‘toxin’이 포함된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직한 용어인 셈이다. p 035


당독소는 조리 방법의 문제와 서구화된 식습관과 연결되어 있다.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습관적으로 먹어 과잉 에너지가 누적되면 당독소, 활성산소, 염증이 많아진다. 정제된 탄수화물 같은 당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섭취할 때 남은 당과 찌꺼기들이 혈관과 체내의 곳곳에 쌓여 당독소가 된다. 그런데 당독소는 자연적으로 소모되지 않고 체외로 잘 배출되지도 않는다. 분해가 잘 되지 않는데다 체내에 머물면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내기 바쁘다. p 054



당독소는 도파민 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에 중독이 되기 쉽고 탐닉을 일으킨다. 끝없는 자극 추구와 즉각적인 보상 체계는 뇌의 도파민을 과도하게 활성화시켜 자제력을 약화시킨다. 당독소가 높은 음식들은 쉽게 중독되는 특성이 있다. ‘아는 맛이라 더 맛있는 맛’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당독소 자체가 마약처럼 중독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당독소가 중추신경계를 자극하여 탐닉하게 만들고 대사질환과 퇴행성질환 발병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연구가 유명 저널에 발표되었다. p 065


과일을 몸에 좋은 것으로만 인식하고 건강을 위해, 체중조절을 위해 섭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일은 초콜릿과 다를 바 없는 당 덩어리다. 달달한 음식이 없었던 100년 전 사람들에게 과일은 귀하고 좋은 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칼로리가 풍요롭게 남아도는 잉여 시대에 살고 있다. 끼니마다 몸에서 필요로 하는 에너지 이상을 섭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일이 몸에 좋다는 옛말만 믿고 따르는 것은 몸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다. p 083


과당은 우리 몸에 물과 영양이 부족할 때 저장모드로 바뀌는 데 필요한 일종의 메신저다. 그런데 우리가 밖에서 필요 이상으로 이 신호를 많이 보내면 일련의 작용이 계혹 쌓여 탈수가 가속화되고 당독소가 누적되어 피로해질 뿐만 아니라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뱃살이 는다. 세포 바깥에 있는 물이 자꾸 줄어들어 피부와 점막이 건조해지고 갈증과 식욕이 촉진된다. 몸에서 발생하는 대사열을 식힐 물이 사라져 열증과 메마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탈수, 열압 상승, 염증이 반복되면 신장 또한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맘 놓고 즐길 수 있는 단맛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p 084



요근래 스트레스를 푼다고, 입이 심심하다고, 별별 이유로 단걸 너무 많이 먹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에, 이 책 『당독소 쇼크』는 말 그대로 정말 쇼크였다. 정제 탄수화물이 몸에 안좋다는 사실도 알고, 가공식품을 많이 먹으면 안좋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몸은 왜 자꾸 몸에 안좋은 음식만 탐닉하는지, 하.


당독소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삶고 찌고 데치는 요리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러한 요리 방법으로도 맛있는 식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쉬운 예로 흔한 음식 재료인 달걀부터 바꿔보자. 달걀은 어떻게 해 먹어도 맛있지만 내 몸을 생각한다면 프라이보다 삶아서 먹는 것이 좋다. 스크램블을 볶을때보다 쪄먹을 때 당독소 함량을 최소화 할 수 있다. 프라이와 스크램블은 물론 튀기고 볶은 음식을 아예 먹지말라는 게 아니다. 기존의 방식을 조금만 더 줄이는 대신 삶아먹고 쪄먹고 데쳐먹는 방식을 늘려보자. 내 몸이 먼저 좋은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p 071


날 닮아서 뿡뿡이가 계속 단걸 찾는건가 싶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식습관을 조금씩 바꿔나가야하는데, 이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건강한 돼지가 되려면..... 단것 2개 먹을 때 1개 먹는거로 줄여나가는 것 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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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산책시키기 - 당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10가지 방법
벤 알드리지 지음, 김지연 옮김 / 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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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손 꼽을 만큼 적게 읽는 책이 있다. 근데 매 년 꼭 한 권씩은 읽는다. 바로 철학책이다(근데 리뷰는 잘 안올림^_T ). 


오늘 읽은 철학책은 『바나나 산책시키기』. 제목부터 남다른 이 책 탄생과정은 이렇다. 저자는 오랜기간 신경발작과 불안증세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다 ‘스토아 철학(스토아주의)’을 만나면서, 일상이 달라진다. 저자는 일상속에서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였고, 그로 인해 저자를 괴롭히던 신경발작과 불안증세는 사라졌다. 


스토아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걸 목표로 한다. 스토아 철학에는 여러 가지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지만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주어진 삶을 최대한 잘 살아 내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인생의 파고를 헤려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다. p 035


일반적으로 ‘철학’이라고 하면 일단 ‘어려운 학문’, ‘졸린 학문’ 같은 편견과 함께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런 편견을 바꾸기 위해 저자가 철학 입문서를 썼으니, 그게 바로 이 책 『바나나 산책시키기』다. ‘스토아 철학’에 보다 쉽게 다가가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철학책 입문서인 것이다.


나 역시 철학책이라곤 입문서 몇 권 읽어본게 다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철학책 중에선 이 책이 제일 쉽고 다가가기 쉬웠다(그래서 리뷰도 쓰고!). 학창시절 세계사 및 윤리 공부할 때 미친듯이 외웠던 시험 암기용 ‘스토아 철학’이 아니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행복’이란 개인의 내면과 책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교의 그것과도 비슷해서 그런지, 스토아 철학이 더 쉽게 다가왔다.


스토아 철학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래 4가지 기본 덕목이 필요하다.



※스토아 학파 4가지 기본 덕목※

1. 지혜: 분별력이라고도 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 또한 살면서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이다.

2. 정의: 타인을 친절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능력이다. 나에게 목소리를 높힌다 하더라도,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다.

3. 용기: 집념과 인내, 정신력으로 대표되는 능력이다. 고난과 역경을 마주할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도 신념을 지킨다. 

4. 절제: 자기 통제력이다. 본인의 감정을 다스릴줄 안다.



어찌보면 스토아 철학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이런 기본 덕목들을 모두 갖춘 사람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도 기본 덕목 4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스토아 철학을 이해하고 실천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주할 때 어떤 행동을 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실제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 지는 분명 내가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다음 단계에 집중해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제쳐두고 어떻게 대응할지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을 때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 p 047


스토아주의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만으로 본질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똑같이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선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되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다. 스토아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이다. p 050


사람들은 실제보다 인생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면 막상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 좌절하고 실망하게 된다. 스토아 철학은 이에 대해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생에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계획은 언제든지 어그러질 수 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p 052


스토아 주의가 알려주는 좌절과 실망을 피하는 법은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거나 미리 어떤 결과가 나와야 마땅하다고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되 언제나 결과는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어떻게 대응할 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다. p 053



스토아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불편함’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발적 불편함’. 일부러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는거다. 예컨데 침대가 편한 사람이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잔다거나, 숨쉬기 운동이 다인 사람이 고강도의 운동을 한다거나 뭐 그런 것. 이미 편리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문물을 발달시켜, 겨우 편리한 삶을 영유했는데 다시 불편하게 살라고? 잘 생각해보자. 불편하게 살았을 땐, 사람들은 불편함을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게 편리해지면서, 사람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이를 참아내지 못한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요즘 사람들은 힘든일, 고난이나 역경에 대처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자발적 불편함’ 실천은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실패와 거절, 고난과 역경에 대한 예방접종이다. 



요즘 두돌 아가를 키우고 있어서, 육아 관련 정보를 많이 보는데 유독 뇌에 내리 꽂힌 문장이 있었다. 하정훈 쌤이 한 말인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나지만, 요점은 이랬다. 아이는 불편하게 키워야 한다고. 근데 정말 맞는 말이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게 되면 나중에 커서 불편한 상황에 마주했을 때, 이를 이겨낼 힘이 없다. 간혹 신입사원 부모가 회사로 전화해서 “우리 애가 어쩌고저쩌고”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게, 바로 아이를 너무 편하게만 키웠기 때문은 아닐런지.



자발적 불편함은 스토아 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이자 내가 스토아주의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개념은 단순하다. 일부러 자기 자신을 힘든 상황에 노출시켜 미래의 고난과 역경에 대비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인생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p 087


나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 개념을 각자의 삶에 적용할 때 발휘한 창의성이 마음에 든다. 정신력을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온갖 기상천외환 일들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고, 일부러 추위나 더위를 견디며, 물과 음식을 섭취하지 않거나, 고강도의 운동을 하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행위들이 그렇다. p 088


하지만 결코 가학적인 형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발적 불편함은 우리가 강인해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며, 미래를 준비하고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p 090



‘자아 성찰’도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다. 어찌보면 거창해보이지만, 알고보면 제일 쉬운 일이 바로 ‘자아 성찰’이다. 아침에 눈떠서, 혹은 저녁에 자기전에. 나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낼건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냈는가, 후회된 일은 없었는가, 이 일에서 내가 얻은 바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명상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글을 쓸 수도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모닝 루틴’, ‘미라클 모닝’. 이 역시 ‘자아 성찰’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다. 아침에 눈 떠서 아침 밥을 먹기 전에, 운동을 가기 전에, 출근 전에 등 무언가를 계획하고 꾸준히 그 일을 하는 것. 이런 모닝 루틴 하나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성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와 개인의 행동을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선하고 덕 있는 인격을 기르는 것은 스토아 철학의 필수 요소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다. p 158


본질적으로 자기 성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지혜, 즉 인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상과 가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사상과 가치에 부합하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p 159


나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자기 성찰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스토아학파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했기에 자기 성찰은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동시에 지혜도 키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독서다. p 161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살아있다는 것이,

숨쉬고, 생각하고, 즐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특권인지 생각하라.

아우렐리우스


이 외에도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격렬해진 감정 다스리는 법이다. 격렬한 감정이라고 하면 분노, 우울, 슬픔 여러 감정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역시 ‘분노’가 아닐까? 최근 몇년간 사회면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분노’ 조절을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정말 비일비재했으니까.


스토아 철학에서는 격렬한 감정이 일어났을 때, 이를 억누르지 말라고 한다. 어떤 감정이든 억압하게 되면, 반작용으로 인해 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런 해결책을 내놓았다.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그 기미를 빠르게 포착하라는 것이다. 포착했다면, 그 감정에 집중하지 않고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면 된다. 아래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사례처럼.


물론 이렇게 주의를 분산하는게 근본적인 대처 방법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감정 조절이 가능해졌다면, 그 후에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내면의 감정에 집중해야, 격렬한 감정을 일으킨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아테노도루스는 황제에게 분노를 다스리는 비법을 전수했는데, 화가 나면 일단 알파벳을 거꾸로 외운 다음에 반응하라고 했다. 그야말로 사건과 반응 사이에 쉼표를 찍는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다. p 228


어려울거라 생각했던 철학은, 생각보다 쉬웠다. 아니 오히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일부는 이미 내 삶에 녹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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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2 : 반동의 시대 - 진실을 밝혀내는 박종인의 역사 전쟁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2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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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에 이어 2권 리뷰 시작!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역사책은 수험생들에겐 권장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시험을 합격하고 난 후에는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왜? 시험공부 중에 이 책을 읽으면 교과서와 모순된 사실에 혼란스러운게 첫번째. 두번째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우리 근대사가 전부가 아닌게 두번째. 분명 교과서에 실린 근대사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실은 만들어진 사실이라는 점을 수험자들은 모르기에 이 역사책은 절대적으로 모든 시험이 끝나고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컨데 ‘A가 B해서 C를 했다’라는 사실이 있다고 하자. ‘A가 C를 했다’는 말은 듣기가 좋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보기에 좋지 않은 ‘B를 해서’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우리 국사 교과서 특징이 나타난다. 보기 좋지 않은 ‘B를 해서’를 삭제하고, 바로 ‘A가 C했다’라는 문장으로 수정하는 것. B를 삭제하긴 했지만, 여튼 ‘A가 C했다’는 말도 맞는 말이니까.


자, 이제 본격적으로 교과서가 은폐한 우리 근대사를 살펴보자. 2권은 동학농민전쟁부터 해방이 된 1945년까지다. 




만국박람회가 공식 개막하던 바로 그날, 조선에서는 복잡한 이력을 가진 공무원 하나가 전라도 고부군수로 임명됩니다. 이 하찮은 지방 관리는 이후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신임 군수 이름은 ‘조병갑’ 입니다. 5년 뒤 조선팔도를 뒤흔든 동학 농민 전쟁의 불씨가 된 사람입니다. 조병갑은 훗날 영의정이 된 조두순의 서조카입니다. p 027


부정부패 탐관오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 바로 조두순이 아닐까? 물론 그 시대 양반네들 대다수가 부정부패로 찌들어있었기에, 조두순보다 더한 인간도 분명 많았다. 조두순 이전에 세도정치하던 양반네들이 그랬고, 조병갑 이후에는 여흥민씨들이 그랬으니까. 그렇게나 탐관오리가 많았음에도, 유독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우는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조병갑의 학정이 동학 농민 전쟁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국사책에는 없으나, 사실인 이야기 하나 더. 못살겠다 들고 일어난 백성들과 달리 고종은 끊임없이 조병갑을 감싸며, 조병갑을 최고중의 최고 수령이라 극찬했다. 왜? 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조대비의 양자로 들어갔기에 가능한거였으며, 따라서 풍양조씨 일가는 고종의 (새로운) 외가였다. 세도정치를 끊어낼줄 알았던 고종시대는 놀랍게도 앞서 세도정치의 세력이었던 풍양 조씨와, 고종의 처가댁인 여흥 민씨 세력이 부정부패라는 말 조차도 그들에겐 먼지가 될 정도로 탐학과 비리, 가렴주구에 점철된 시대였다. 


조병갑을 끊임없이 감싸던 고종. 동학을 역당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처단하고자 청나라 군사를 스스로 불러들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청나라군이 조선땅에 들어온 이유다. 청군이 조선땅에 들어오니,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도 조선 땅에 들어왔다. 동학은 당연하게도 섬멸되었고, 남은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조선을 니가갖니 내가갖니 하는 이유였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게된다. 


동학농민전쟁을 시작으로 조선의 식민지화까지. 조병갑이 바로 그 시작점에 위치한, 그래서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거기다! 국사책에서 배운 동학 농민 전쟁의 발단은 분명 조병갑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2020년에 제정된 동학 특별법에선 그를 가해자 신분에서 제외시켰다. 근대사 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다. 따라서 특별법에 따르면, 조병갑 학정에 분노하여 처음 들고 일어난 고부봉기 참여자는 동학군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2020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조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참여자를 말한다.”


1894년 2월 고부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이 만든 만석보를 부순 첫번째 거병은 ‘동학농민전쟁(혹은 혁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조병갑 또한 동학 농민 전쟁 가해자 명단에서 제외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와 관계가 있으니, 입을 다물겠습니다. p 036




고종은 전제군주권을 제한하려는 일본의 개혁안(갑오개혁안)을 끊임없이 반대하다가, 일본군이 철수한다고 하니 돌연 개혁안을 받아들이며 일본군 철수를 반대한다. 국사책에서 배우던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군이 거부하고 되려 경복궁을 점거하여 고종을 협박하며 친일정권을 세웠다’ 등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왜? 국사책에 실린 내용도 분명 사실이지만, 중간 중간에 지워진 사실들 때문이다. 고종이 부도덕하고 능력없는 지도자로 보이는 사실들을 생략하고, 남은 사실들로만 끼워맞추다보니 발생한 현상이다. 이 얼마나 기이한 역사인지.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청나라와 일본은 이른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1조의 내용은 이렇다. ‘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를 확인한다’. 공식적으로 청나라는 조선에서 손을 뗐으며,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다.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궤멸되고 청일전쟁 전선도 대륙으로 넘어가고 일본 승리가 확실시되던 그 겨울,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일본 공사에게 “남아서 민란을 진압해 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있는 어느 유력인사의 육성입니다. 공사 이노우에는 며칠 줄다리기 끝에 이 요청을 수용합니다. 그 어느 교과서에서도 이 발언과 발언 주인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일본군은 철수하지 말라’고 요청한 이 사람은 ‘조선국 국왕 고종’ 입니다. p 088



일본이 어디 조선이 예뻐서 자기네 병사를 희생했겠습니까. 더 이상 1876년 수신사 김기수에게 함께 근대화를 하자고 권했던 일본이 아닙니다. 여관방에 앉아 있으려는 김기수를 끌고 나가 견학을 시키며 “함께 나아가는 게 소망”이라고 역정 내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없습니다. 1894년 12월 4일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고종을 ‘협박’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협박이 성공한 뒤 본국에 ‘임무 완수’ 보고서를 보냅니다. p 097



청이 조선에 손을 떼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 식민지화 첫삽을 뜨게 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던 그 해변가. 그 해변에는 기념비 하나가 세워져있다. 기념비 이름은 ‘조선통신사 상륙엄지지’. 선진국인 조선 사절단이 세련된 학문과 예술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고대에는 도래인이, 중세에는 통신사가 일본 땅에 수많은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는데, 그 관계가 이렇게 역전될 수가 있다니. 이게 오로지 침략한 일본 탓이라고 하기엔, 조선의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서양의 문물을 습득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지만 이를 스스로 날렸고, 날릴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명나라에 사대하며, 끊임없이 쇄국으로 치달았던 조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를 할 수 있었음에도 이 역시 날리고 쇄국에 박차를 가했던 조선. 쇄국을 했으면 자국민을 위한 정치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백성들은 굶어죽어도 본체만체 지식탐구조차 못하게 했던 조선. 동시대 바다건너 유럽에선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과 너무 대조되지 않은가.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


갑오개혁정부가 내놓은 200여 가지 개혁안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신분제가 부활하고 문무 차별이 부활하고 연좌제가 부활하고 과부가 다시 평생을 수절해야하고 노비가 주인집으로 돌아와야하고 과거가 부활하는 끔찍한 세상이 돌아온 겁니다. 물론 이 같은 선언이 이 모든 구악의 실질적 부활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동력을 잃은 갑오개혁정부로부터 고종에게 역류하기 시작합니다. p 102



일본군을 붙잡기 위해 승낙했던 군주권을 제한하는 갑오개혁안. 일본군 잔류가 결정되었으니, 고종은 다시 군주권을 찾고자 한다. 왜? 고종은 언제나 왕인 본인만을 생각했던 사람이기에. 그리고는 대사면령을 내린다. 겨우 겨우 잡아들였던 민영휘, 민영주 등 여흥민씨 척족과, 동학농민전쟁의 근원인 조병갑을 포함한 풍양 조씨들.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그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측근으로 앉혔다. 예컨데 그 조병갑! 조병갑은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고종은 끊임없이 본인 안위만을 위한 정치를 한다. 그 중 고종의 이기심이 똘똘 담겨있는 아주 적은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이것만 읽어도 속에 분노가 들끓지만, 슬프게도 이는 발톱의 때만한 분량일 뿐이다. 이 이후의 내용은 부디 이 책을 읽어보시길. 



아관파천을 포함해 고종은 1907년 황제 퇴위까지 모두 일곱 차례 외국 공관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미관파런과 영관파천 미수 각 1회, 1896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직후 성공한 아관파천 1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미관파천 미수 1회, 1904년 러일전쟁 직전 미관파천 미수 1회화 1905년 러일전쟁 도중 미관파천과 불관파런 미수 각 1회, 도합 4개국 7회. 국가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마다 고종은 외국에 피난처를 의뢰합니다. 아관파천은 그 ‘7관 파천’ 가운데 유일한 성공 케이스입니다. 이를 ‘훗날을 도모한 망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관 1년 동안 팔려나각 수많은 국가 이권사업과, 도주 생활 청산 후 고종이 한 일들을 보면 ‘훗날 도모’ 같은 비전은 보이지 ㅇ낳습니다. 그저 그가 즐겨 쓰는 ‘이권 판매 조건부 권력 유지’ 거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p 115



1885년 묄렌도르프를 시켜서 러시아 보호국을 요청했던 그 짓을 또 합니다. 그리고 민영환은 ‘최대한 빨리 귀국해 보고해야 한다’며 즉답을 요구합니다. 개인 민영환이 아니라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민영환이 내놓은 조선정부 공식 요청입니다. 500년 대중 사대에 찌든 나라가 근대라는 격랑을 맞아 러시아로 사대 본국을 바꾸려고 합니다. 관모를 고집하며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고 사요의 장인 식사 자리를 거부한 전권공사가, 곧바로 황제와 대신에게 보호령 본국이 돼달라고 거듭 요청합니다. p 123



민영환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던 4월 22일 고종은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뤈을 허용합니다. 민영환이 귀국길에 들른 연해주에서 조선 동포들을 만나고 있던 9월 9일 고종은 연해주 상인 보리스 브리네르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가합니다. 숱하게 판매된 이권 가운데 일부입니다. 아, 보리스 브리네르는 러시아계 미국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아버지입니다.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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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생활백서, 어두운 숲을 지나는 방법 폐교생활백서
로서하 지음 / 드루이드아일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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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폐교생활백서 출간! 예약 주문하고, 책을 받고 읽는 과정에서 여러번의 이슈가 있었다. 예컨데 폐교생활백서는 프로개님, 지박령님 각각의 시선으로 쓴 두 권이 세트인데, 서점 실수로 지박령님 책만 2권 받았다던가 하는 첫 번째 이슈. 이스터 에그 찾는답시고 하루동안 에세이를 1n차례 여러방법으로 무한 정독했다는 두번째 이슈. 하지만 결국 스스로 이스터 에그를 못찾고, 프로개님 힌트를 보고나서야 찾고나서 몰려드는 허무감이 세번째 이슈. 


첫번째야 어쩔수 없지만, 두번째는 내 스스로 이토록 추리력이 없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고, 세번째는 정말 프로개님을 원망...ㅎㅏ..ㄴ. 아니 진짜!! 이건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보는 사람은 절대 찾을 수 없는 이스터에그인데?! 내 책은 늘 새책이었는데, 이스터에그 때문에 헌책이 되버렸다. 보고있어요 프로개님^_T? 

이스터 에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에세이 자체를 곱씹고 또 곱씹을 정도로 마음이 몰캉몰캉해졌던 지박령님 글이었는데! 정말 순수하게 공감하며, 나를 이입해가며 읽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이스터에그 존재를 잊고, 짧은 시간동안 있었던 이슈들도 잊고, 폐교생활백서를 처음 만났다고 나 자신을 속이고(....) 다시 읽기로 했다. 

내 마음을 몰캉몰캉하게 만든 지박령님의 힐링 에세이를..!





안식년이 주어진 프로개, 프리랜서였던 지박령. 식물들 사랑하면서도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프로개와, 프로개가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주던 지박령. 그런 그들의 행보는 결국 폐교 생활로 이어졌다. 누가 봐도 불편함이 예견된 폐교생활. 

마트나 병원, 카페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려면 차타고 기본 30km는 나가야 하는 불편함. 행여나 생필품이 떨어지면, 남들처럼 쿠ㅍ 로켓배송을 시키지 못하고, 차를 타고 30km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곳. 심지어 생활 폐기물 같은 일반적인 쓰레기 처리도 어려울 뿐더러, 치안도 좋지 않은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과거로 돌아가도 망설임없이 폐교 생활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아파트에 살 때도 하늘은 있었어요. 작가가 되기 전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할 때도 내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었죠. 어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에도 큰 심상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하늘을 마주 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폐교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가 불편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에요. 굉장히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불편한 5년은 내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주었어요. 그리고 나는 오후 2시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지금의 내가 좋습니다. p 032


보통 불편함을 대하는 자세는 두 가지로 나뉜다.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편리한 생활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불편함을 겪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생활 속 편리함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불편함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 프로개와 지박령은 후자에 속했다. 그렇게 불편함을 감수하고, 소소한 행복을 주는 현실에 감사하며 그들만의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폐교생활을 수호하고(?) 챙김받고(??) 응원하던 존재들(!). 사방신과 수많은 식물들, 그리고 뒤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알았을까? 자신들의 삶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프로개 블로그에서 보던 사방신들! 책 속에서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평균 수명이 짧은 가재는 이미 용궁으로 가버렸다지만, 남은 사방신 친구들은 아직도 폐교를 수호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식물들. 이들이 폐교생활을 하려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한게, 바로 이 식물들이다. 음, 정확히는 수많은 식물을 가지고 오만가지 실험을 해보고자 한 프로개의 도전정신이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그러고 보니 폐교에서 식물이 가장 많았을 때가 화분이 5천 개 가까이 되었던 때라고 한다. 와, 지박령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등짝 스매싱이 뭐야! 내 가족이었으면 날 쫓아냈을지도 모르는 스케일이다. 화분 하나 키우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닌데, 그 화분이 5천개 가까이. 심지어 같은 식물이어도 A는 이렇게 키우고, B는 저렇게 키우며 실험까지 하고 있었으니. 이쯤되니 식물 장인, 드루이드 프로개보다 그런 프로개를 옆에서 지켜보고 돌본(?) 지박령이야 말로 진짜 드루이드가 아닐까 싶다. 



하늘을 강조했지만, 이곳에는 초록 또한 가득합니다. 자연적으로 자라는 초록과 남편이 키우는 초록이죠. p 083

바람이 불어 포르르 흔들리며 햇살에 반짝이는 폴리안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p 088

막 수확한 깻잎의 향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아세요? 한 말만 먹어도 입안에 가득 퍼지는 딸기 맛은 어떻고요. p 172

이곳에는 내가 심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다람쥐와 바람이 씨앗을 부지런히 다르거든요. 옮겨진 씨앗들이 피워낸 꽃은 예상치 못한 순간 기쁨을 주는 것 같아요. p 130




종종 “네가 그렇게 사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살지 않으니까요. 또 모든 사람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 역시 압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고, 모두가 내가 쓴 글을 재미있게 읽지 않는 것처럼이요. p 140




폐교로 이사 오기 이전에는 날 전혀 돌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단지 자연 속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변할 수 있냐고요? 자연보다는 거리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모든 것들이 멀어졌잖아요. 다른 가족도, 친구들도, 도시도. 한 발 떨어져서 가만히 바라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요. p 150


나를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택은 굳이 거창할 게 없어요. 더 나은 걸 고르면 되니까요. 당장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그렇게 조금씩 더 좋은 걸 골라 나가면 되는거더라고요. 나와 친해지는 건 그래서 중요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기쁘고, 어떻게 하면 슬프고, 어떤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나를 잘 돌볼 수 있으니까요. p 178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어두운 숲을 지나게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숲의 깊이와 어두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숲을 피해갈 수는 없어요. 그런데 내 숲은 유독 크고 울창해 보였어요. 어둡고 울창한 숲.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숲. 빛조차 들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런 숲이었죠. 하지만 불혹을 넘어선 지금은 알고 있어요. 어두운 숲 자체가 내 인생이라는 것을요. p 177



누구나 어두운 숲을 지나게 된다. 숲의 끝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언제고 또 다시 마주하게 될 어두운 숲. 그 숲 자체가 내 인생이라는 말에 지극히 공감했다. 나 역시 3n년을 살아오면서 어두운 숲을 수차례 헤쳐나왔기에. 더이상 숲에서 헤매지 않으리라!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다시 숲 한 가운데 들어가있곤 했다. 


과거에는 수많은 이유로 어두운 숲에 빠져 헤매는게 너무 고단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더이상 숲에서 헤매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숲에서 헤매는 과정이 썩 나쁘지많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연하게 날 힘들게 한 어두웠던 숲이, 사실은 내가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내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해주는 숲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두렵지 않다. 언제 어느순간에 힘에 부쳐 쓰러지도라도, 나만의 숲은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기다려줄테니까.



그리고 프로개의 연애 편지는...... 아아.... 보면 안될 혈육의 연애사를 본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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