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이 필요할까 - 장재인 시선 집
장재인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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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이자 싱어송 라이터 장재인. 그녀의 이름은 들어봤으나, 그녀의 노래는 나에겐 좀 생소하다. 아니 애초에 노래를 안듣고 산지가 너무 오랜세월인지라. 진짜 어쩌다 드라마 한번 꽂히면, 드라마 OST 정도나 들을 뿐, 그 외의 노래들은 나에겐 매우 어려운 분야다. 그래도..... 내가 읽은 에세이의 저자인만큼, 노래 한곡 정도는 들어본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필모를 열씸히 검색 검색 또 검색. 그러다 아는 노래 한 곡을 발견했다. 내가 정말 애정하는 드라마 『킬미힐미』의 OST ‘환청’. 이 드라마를 보면서, OST가 드라마와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에 엄지척!을 했었는데,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들어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이 책에 깔려있던 그녀의 오랜 사유와 아픔이 저 노래 한곡에 담겨있는건 아닐런지, 하고 말이다.




나쁜 와중에도 찾아보면 하나쯤 좋은 게 있다며. 나에게 시작이 되어준 그 기회의 빛은 어디서 온 걸까. 그건 이 잠들기 중의 하루 훔쳐보기에 있었다. 하루를 훑다 보면 내가 좋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내 생각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해주는 촉매제들이 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들을 마주한 일. 그것이 시너지가 되어 내 눈을 뜨게 해줬다. 하루하루를 훑어보며 나 역시 그들처럼 좋아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많은 나의 하루들, 그 안을 이뤄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 역시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p 031



시간이 꽤 흐른 요즘에 이십 대의 내 모습을 돌아보니, 그 날의 나에겐 매일 운동한 만큼 보기 좋은 건강함이 있었다. 이제는 보이건만, 왜 이전에는 온갖 부정적인 말이 앞선 모자란 ‘나’였을까? 왜 그런 ‘나’로 두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던 걸까? 그런 못난 형용사들은 단어 모양 그대로(이 단어들은 생긴 모양부터가 모나지 않았나!) 인간관계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아주 오래 나를 아픔 속에 내버려 두었다. p 038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십대란 상처와 아픔만 떠오르는 시간이다. 물론 그 상처와 아픔의 깊이는 각자 다르겠지만 말이다. 저자에게도 이십대는 상처와 아픔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상처와 아픔뿐인 이십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른인 지금과는 또 다른 긍정적인 ‘내’가 있었다. 그저 이십대였던 내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서른이 된 수 많은 사람들이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당장 나역시도 그러하니 말이다. 이십대를 살았던 과거의 ‘나’는 매일이 힘들었고, 왜 나는 또래처럼 놀지도 못하고 회사에 치여 사는건지, 이놈의 회사는 왜이렇게 꼰대조직문화가 심한건지 매일매일을 힘들어했다. 헌데 서른이 넘어간 지금의 내가, 이십대의 나를 돌아보니 내가 생각한것 만큼 그렇게 힘든 삶도 아니었던거다. 오히려 취업이 잘 안되는 시기에 운 좋게, 어린나이에 대기업에 입사했고, 그저 또래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저 남들보다 어린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일종의 직장생활 첫경험으로 힘들었을 뿐이지, 오히려 취업이 된 것을 감사해야했던 부분이었다. 뿐만인가? 어느 조직이든 꼰대문화는 살아있다. 내가 그걸 몰랐을 뿐이다. 심지어 힘들어하는 내 옆에는 언제나 항상 내 편인 (구)남친(현 신랑)이 나에게 응원과 용기를 복돋아주었다. 그저 보는 시각만 조금 달리했으면 되었던것 뿐인데, 이십대였던 나는 어린 맘에 그러지 못했던 것 뿐이다.



그래도 이십대 후반에 진입하면서 조금은 달라졌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서 보는 ‘시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나를 힘들게 하던 모든 일들이 꽤나 하찮게 보였다. 이런 하찮은 일로 왜 전전긍긍하며 살았는지. 덕분에 나의 삼십대는 이십대였던 나와는 달리 여유가 생겼다. 





 


엄마와 나는 대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잘못한 이로 만들고, 나쁜 아이로 만드는 엄마의 화법에 고등학교 1학년이 됐을 무렵엔 엄마를 향한 모든 기대와 애정을 놔버렸었다.(‘어머니’라고 부르며 완벽하게 감정을 절단시킨 채, 마치 타인인것처럼 예를 갖춰 대했다. 그 어떤 마음과 기대도 없는 채로.) 나는 정말로 스물 세 살 이전까지 단 한번도 화를 내본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엄마의 화법에서 부당한 것에 대해 나의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다. p 058



엄마는 미래에 다가올 우리를 향한 편견(그 시절엔 더욱 심했던)과 한부모 가정이란 타이틀을 자식들에게 주고 싶지 않아 아픔 속 인내를 택했다. 우리는 괜찮았는데. 지금도 말이지. 그런 타이틀은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렇기에 나는 반드시 둘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둘이어야 올바르게 자라고, 감정이 잘 채워진다 생각하지 않는다. p 097



내가 뭘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정말 그것만을 알기 위해 하루를 보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고 자꾸만 돌아가려는 관성도 심리 상담이나 치료를 통해 완화되는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방금 감은 머리를 역시나 말리지 않은 채 타자를 두드리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보단 내가 뭘 싫어하는지 아는 게 더 명확하지 않을까?’ p 112



아무래도 예비맘이 된 이후로 육아와 관련된 매체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은 문제행동이 많은 아이들의 원인은 부모라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성장과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물론 아이들의 기질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제일 중요한건 부모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부모는 그닥 좋은 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런 부모밑에서 잘 커준 저자가 대단하다고 칭찬받아야 할 정도랄까? 내 아이가 고학년 선배들에게 괴롭힘을 받았는데, 내 엄마가 내편이 아닌 ‘니가 잘못한거 아니야?’라고 말했다면 나 역시도 저자처럼 부모의 애정을 포기했을 것이다. 오히려 저자처럼 성장하기보다는, 엇나갔을지도. 물론 저자의 엄마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는 점은 참작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 아이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은............ 저자의 결핍은 아마 여기서 시작된게 아닐까?



어린날의 슬픔과 아픔, 결핍은 성인이 되어서도, 한 사람을 잠식하고 힘들게 하는데, 그 시작이 부모라는 점은 더더욱 본인을 옭아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저자는 부모를 사랑한다.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선,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반드시 치유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서 그래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치유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정말 존경스럽고 멋지다. 



그래도 저자는....한번 오은영 박사님과 대화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T_T;




 


당시 스물셋, 만 스물하나의 나는 산부인과를 가본 적이 없었다. 굳이 가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고 분명 나도 꺼리는 마음이 있었을 거다. 나는 산부인과 검사를 하기로 마음 먹고 병원에서 검사를 신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내가 임신 중단을 했다는 루머가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짧고 간단하고 누구나 하는 기본 검사가 왜 그런 형태로 발전한거지? 대응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소문이 이런 식으로 나는 거구나 하고. p 218



여성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병원이 있으니, 바로 산부인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들어가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의 경우는 대중에게 노출된 가수였기에, 그 시선이 아주 황당한 루머로 이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산부인과 가는 것을 너무나 꺼려했다. 생리통이 그렇게 심하고, 심지어 기절까지 했던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산부인과라는 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의문점이 생겼다. ‘산부인과는 여성이 태어나면서 죽을때까지, 일생을 찾아야하는 병원인데 왜 어린 여성이, 미혼여성이 가면 안되는 듯한 시선으로 보는걸까?’ 하고 말이다. 물론 난 그 이후부터는 문제만 생기면 산부인과에 들락날락 하곤했다. 내가 아프다는데 뭐 어쩔꺼야?



오히려 어린 여자아이가, 미혼 여성이 산부인과를 가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런 시선을 만든 이 사회가 비정상일뿐이다. 



저런 비정상적인 시선들은 사회 곳곳에 깔려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건지, 아니면 쓰잘데없는 오지랖이 넓은건지.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그런 관심과 오지랖이 들이 한데모여, 부정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나아진 편이라고는 하지만, 도찐개찐이라고 해야할까.



이 책을 다 읽고보니 저자가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앞으로 ‘환청’이라는 노래를 듣게되면, 그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OST가 아니라, 가수 장재인의 노래라는 사실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아마 장재인이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 노래를 저렇게까지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다만, 앞으로 장재인의 음악이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잠긴게 아니라, 조금씩이나마 흩어져, 그녀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음악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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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아방(신혜원)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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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의 임산부가 되고 보니,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조차 힘들어서 이제 독서는 언감생심이다T_T. 그럼에도 1주일에 한 권은 읽어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저 노력일 뿐. 하. 앉아있는것도 힘들고, 누워있는 것도 힘들다보니 이런 에세이조차도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렸다는게 함정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꿋꿋하게 다 읽었다는 나에게 박수를!!




오늘 리뷰를 올리는 이 에세이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는 표지 삽화부터 톡톡튀는 것이, 꼭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저자 필명이 ‘아방’인데. 혹시 아방가르드의 그 아방일까? 뭔가 책 곳곳에 실려있는 톡톡튀는 삽화들도 그렇고 말이다. 이런게 바로 아방가드르하다는 뭐 그런 너낌적인 너낌인가! 물론 난 아방가르드의 정확한 정의는 모르지만, 하하하.하하하ㅏ...하하.



확실한건, 저자는 청춘을 그림에 바친, 10여년 째 그림을 그리고, 그림 수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림은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명화(?) 라던가, 그런쪽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흔하디 흔한 일러스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뭐랄까, 독창적인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물론....난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권이 말을 들으니 알 것 같다. 왜 스친 미술학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그럴 거면 안 가는게 낫겠다고 생각한 건지. 하고 싶은 대로 못 해서였다.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건데 이래라저래라 잔말이 많았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못 그려도 즐겁게 그리던 마음이 꼬맹이 시절 동네 미술학원과 학교를 거치면서 쪼그라들었다. 노란색 돌멩이를 보고 멋지다고 말해주는 이는 왜 없었을까? 태어났을 때는 모두가 예술가라 했것만 이런 확경 덕에 예술성을 더 발휘하지 못하고 무난하게 자란 것이다. p 024



누군가 전화로 “수업은 작업실 같은 데서 하나요?”라고 물으면 “홍대 술집이요”라고 말할 때 너무 재밌었다. “술집이요?” 하고 한 번 더 되물으면 자신 있게 “네, 술집이요!” 하고 다시 대답할 때 나는 굉장히 도도하고 자신감 넘쳤다. 가끔 대관이 어려울 때는 멤버 아버지 회사에 딸린 직원 휴게 공간, 멤버가 다니던 피자 회사의 가맹점, 멤버 집에서 경영하던 디자인 카페에서 수업을 한 적도 있다. 덕분에 아주 다양한 곳에서 수업을 진행해보았고 장소마다의 장단점과 특징을 살려 멤버들과 소통하는 경험도 늘었다. p 058



확실히 이 에세이에 실려있는 저자의 그림들을 보면 ‘다르다!’ 라는 느낌이 든다. 기존에 보던 일러스트와는 다른 느낌이랄까? 



간혹 인★ 돋보기를 보다보면 수많은 일러스트와 일상툰들이 많이 뜨는데, 분명 그리는 사람이 다르므로, 일러스트도 다른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적이 많았다. 다들 같은 학원(?)에서 배웠던건가 싶은 생각도 들기도 했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리거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다 똑같은건지(?) 그림을 그리는 저자의 눈에도 다 똑같아보였나보다. 



생각해보면, 어렸을적 내가 다니던 미술학원도 획일적인 미술수업을 했었다. 선생님이 보여준, 혹은 당신이 그린 풍경화를 보며 따라 그리라고 한다. 그 풍경화를 보며 그린 내 그림과 당시 학원에 있던 다른 애들이 그린 풍경화는, 분명 서로 다른 사람이 그린 다른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같은 느낌이 들었더랬다. 같은 풍경화를 보며 그려서 그런건지, 아니면 당시 미술수업을 하던 선생님의 지도방식이 획일적이었던건지. 어릴때부터 나름 오래다니던 미술학원이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학원을 다니면서 그림 그리기에 대한 내 마음은 점점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그림그리기에서 멀어지며, 그렇게 오래다니던 미술학원을 때려쳤고, 반대로 내 마음가는대로 할 수 있는 공예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각종 공예를 섭렵한건 더 나중의 일.



반면에 획일적인 미술수업(?)을 거부하던 저자는 그림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만의 그림 철학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오롯이 자신만의 그림, 누군가의 그림과 비교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갈 수 있도록 오픈형(?) 미술수업까지 시작! 만약 내가 저자에게 미술수업을 받았다면, 그림그리기라는 취미를 그렇게 단칼에 버리지는 않았을텐데^_T...



모든 그림은 장점이 있다. 못 그리는 게 아니고 장점을 발견하지 못한 거다. 자기 그림의 장점을. 하도 사람들 그림을 많이 봐서 그런지 남의 그림의 무수한 장점과 특징은 잘도 알아낸다. 문제는 내 그림의 장점을 찾는게 어렵다. 아니 왠만큼 뭔지 알고는 있으나 수시로 잊어버린다. 다 그런가 보다. 내 건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p 073



근래 내가 들은 수백 마디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해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다. 최근에 만난 친구들은 사진작가, 대기업 디자이너, 도시공학 박사, 영상 디자이너, 출판사 직원의 신분으로 다양하게 살아가는 30대다. 요즘 우리의 대화는 “뭐 먹고 살지?”로 시작해서 “그러니까 뭐 먹고 살지?”를 거쳐 “그래서 뭐 먹고 살지?”로 똑같이 끝난다. 뭐 하면서 먹고 살지? p 106



- 다음은 2020년 2월의 메모.


걸핏하면 길을 잃는다.


아니면 길을 자주 찾기 때문에 그만큼 자주 잃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은 갈래의 길을 가졌나.


아니면 이 길에 대한 확신이 두텁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사실 길이 아니고 왜 가야하는지 이유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애초에 길이 없었던 걸까. p 107



내 그림의 장점 찾기. 다시말하면 ‘나의’ 장점 찾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나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 요즘 2030 청춘들은 더더욱. 계속 포기하는 일이 늘어나다보니, 장점은 커녕 자기의 단점만 더 크게 보이고, 단점만 보다보니 자존감이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 슬프지만 이게바로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현실에 계속 빠져있다보면, 삶은 더더욱 우울해지고 피폐해지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나만의 장점을 찾아야한다.



매일 나의 장점을 한가지씩 적어보거나, 매일 내가 잘한 행동을 하나씩 칭찬하거나, 뭐 이런식으로. 그렇게 매일을 반복하다보면 적어도 힘든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 스스로를 인정하다보면, 그토록 찾아해메던 길이 내 앞에 나타나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한 가지를 착실하게 해온 이유는 그만두고 다른 걸 할 용기가 없다는 것 외에 하나 더 있었다. 열정이 남아있어서다. 그림에 10년간 정성을 쏟고 기꺼이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무언가를 아끼지 않았던 건 열정 때문이었다. 열정이란게 있기 때문에 시간과 돈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열정은 청춘을 대표하는,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빨간색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하는 작은 불씨, 최소한의 연료랄까? p 143



한 가지를 10년간 해왔다는 것은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다. 나는 한 회사를 무려 12년간을 다녔다. 아니, 아직도 다니는 중이다. 내 적성에 맞는 일도 아니었고, 이렇게 오래할 생각도 없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년을 근무할 수 있었던건 무엇이었을까. 아마 나 역시도 이 일을 너무 오래해서 다른 걸 할 용기가 안났던게 첫번째고, 나름의 대기업이라 남들보다도 더 빠르게 돈을 모을 수 있다는게 두번째일 것이다. 일에대한 열정은 없었지만, 그 일에 대한 보상으로 들어오는 월급을 모으는 열정이 있었고, 빠르게 돈을 모아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열정 때문이다.



조금 슬픈 사실은..... 이렇게 12년간 착실히 회사생활을 하다보니 내 20대는 회사생활을 제외하면 남는게 없다는 것. 또래들이 놀러다닐 때 조차도 나는 회사에 있었으니까! 물론 그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또래보다도 빠르게 집도, 차도, 결혼도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30대가 된 지금은 아이를 잘 키워야한다는 새로운 열정의 씨앗이 움텄기 때문에, 아마 난...... 이 회사를 또 10여년은 계속 다닐 것 만같은 불안한 예감이 드는건 왜일까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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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쓰는 날들 - 어느 에세이스트의 기록: 애정, 글, 시간, 힘을 쓰다
유수진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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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은 에세이들은 대부분 여행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여행에세이에 질려가는 와중에, 간만에 잔잔하게 흘러가는 에세이를 읽었다. 얼마전에 출간된 에세이 『나답게 쓰는 날들』 이다. 저자 스스로도 본인을 ‘에세이스트’라 칭하는, 이 책에 실려있는 글들은 그야말로 ‘에세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글이었다. 





살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이 저자에겐 글을 쓰는데 있어서 특별한 주제나 다름 없었다. 나역시도 문득, 내 일상을 글로 써내려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진 않았지만, 나 따위가 무슨 글을 쓰겠냐는 생각이 들어 얼른 접었더랬다. 헌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굳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나를 위해 나만의 글을 쓰는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한 편씩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의 ‘이미지’라는 건, 사실 연예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자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조금 더 두드러졌으면 하는 모습과 덜 두드러졌으면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이 이미지라는 게 주로 우리 스스로에 의해 씌워진다는 것이다. p 036



사람마다 가질 수 있는 캐릭터가 여러 개임을 인정하면, 우리의 일상은 조금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강한 사람을 지향하지만, 원래 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약하디 약한 사람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p 038



가끔 주변에서 ‘너 답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들으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나 다운게 대체 뭐지?’ 나는 3n년을 살면서도 지금까지 나 다운게 무엇인지, 나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 정의를 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도 나를 모르는데, 왜 주변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보고 ‘나 답지 않다’고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생판 남인 그들은 나를 그렇게 잘 안단말인가? 하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나를 잘 모른다. 그저 그들은 나를 보면서, 본인들이 보고 싶은 ‘이미지’에 나를 끼워맞추고 있을 뿐이다. 본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람에겐 단 한가지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로봇이 아닌이상에야, 이런 모습도 있는가 하면, 저런 모습도 있다. 하지만 꼭 사람들은 어떠한 성향에 자신을, 또는 타인을 맞추려고 한다. 그에 부응하기 위해 mbti같은 각종 성향테스트가 유행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성향테스트가 정말 정확했다면, 우리가 인간관계를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저 한 사람에 대해, 본인이 정한 틀에 맞추지 말고, 이 사람에겐 이런 면모가 있구나, 저 사람에겐 저런 면모가 있구나- 하고 인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정도까지만 해도 세상사는데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최근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이 긴 글을 읽지 못하고, 어휘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가 비단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주로 짧게 편집된 영상들을 자주 보다 보니, 계속 해서 짧은 콘텐츠만 소비하고 있음을 느낀다. 문해력은 단순히 긴 글을 잘 읽고 못 읽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하는 역량과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역량 등 무수히 많은 문제를 포함한다. 문해력은 곧 나의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다. 나는 그래서 청소년들이 꼭 글을 쓰면 좋겠다. p 090



내가 이 에세이를 읽기 전에 읽고 있던 책이 있었다. 조만간 리뷰 예정인, EBS에서 출간한 『당신의 문해력』 이란 책이다. 그 책을 읽으며, 요즘 학생들이, 아니 학생을 포함하여 2030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지.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까지 심각한 수준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뭐, 잘 생각해보면 내 블로그에도 간혹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니 문해력이 없는 사람들의 덧글이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내 포스팅에 아주 분명하고 자세하게 내용을 적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는 댓글을 다는 핑프들이 종종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 핑프들은 긴 글은 읽기 싫으니, 덧글로 한줄 요약해달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블로그 포스팅 글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그것조차 읽기 싫어하는 것을 보면 참- 심지어 이런 핑프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요즘 세대들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해력에 대해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추후 관련 포스팅을 할 예정이므로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취업 준비생 시절에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로 찾은 게 독서였다.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책은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고, 직장인이 된 후로 돈이 드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서도 독서를 멈출 수 없었다. 독서의 진짜 매력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 126



취미는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무엇인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푹 빠질 수 있다는 건, 작가 사사기 쓰네오의 말처럼 ‘어떠한 일의 무게를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취미를 갖는다는 건, 점점 더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p 128



저자의 말처럼 ‘독서’는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이다. 더 나아가서, 독서는 위에서 언급한 ‘문해력’을 기르는데 최적의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고, 또다시 문해력 이야기!..........는 여기서 패스하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취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에서 ‘ㅇㅇ키트’ 같이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을 구매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아졌다. 뭐, 그런 키트조차도 스스로 구입한거니, 직접 찾아낸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보통 저렇게 손쉽게 취미생활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고싶다는 이유로 여러 장르의 취미생활을 구입하곤 한다. 그게 과연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걸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취미생활’이라는 정의가 바뀌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까. 



나도 분명 나이대로 보면 요즘 젊은세대라 할 수 있는데, 참 이상하게도...... 내가 아닌 또래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코로나가 하루빨리 끝나 다시 가까워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우리가 다시 가까워지기 전에 우려되는 것들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굳이 남의 몸을 세게 밀치며 접촉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몸이 밀려나 분해도 ‘사람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니에요?’ 라고 한다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몸을 밀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저 사람의 몸과 닿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전에도 부딪히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p 137



난 개인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꽤 반겼던 사람이다. 워낙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다보니, 더더욱 그랬다. 실제로 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정말 필요 이상으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본인이 가까워지고 싶다면, 가까워지고픈 그 사람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하거나, 양해를 구해야하는데 그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그들이 굳이 가까워지려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다. ‘그러고 싶으니까’. 이런 모습들을 보면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이들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라진 지금, 저런 몰상식한 어른들이 다시 나올까 두렵다. 



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중에는 사람간의 적당한 거리(경계선)에 대한 동화책도 많다고 한다. 이런 경계선 동화책은 아이들이 아니라, 머리만 커버린 요즘 어른들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이 넘어가고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알고 지낸 사람들이 꽤 많이 쌓였다. 그러면서 때로는 내가 가진 명함이나 전화번호의 수가 열심히 살았다는 징표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언젠가 친구 목록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량이 가득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41



이 구절을 읽고, 내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살펴보았다. 우와, 사람 참 많다. 근데 태반이 회사 또는 거래처 사람이다. 정말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지만, 회사생활을 하는 한 지울수 없기 때문에 계속 가지고 가는 친구목록인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좁은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친구라고 칭하는 사람도 진짜 소수의 인원밖에 없다. 이름만 아는 사람은 친구라 생각하지 않기에, 주기적으로 연락처에서 지우곤 한다. 가족에 대해서도 예외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난 내 엄마아빠에게도 그런데, 다른 친척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심지어 누군가가 내 연락처를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는게 싫다.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즉,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량은 정말 좁다. 많이 쳐줘봐야 서른명 내외? 



1n년간  회사생활을 해왔지만, 퇴사를 한다면 1순위로 해야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서른명 내외의 사람들에게만 내 번호를 알려주는 것! 다만 언제쯤 이뤄질지는....잘........^_T.....



내가 항상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것은 취업 준비생 시절부터였다. 1일 1이력서를 제출해야 내일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잠들 수 있기 때문에 1일 1이력서는 내 나름의 규칙이었다. 채용공고를 찾지 못한 날이면 심한  우울감을 느꼈고,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 게으름이라는 벌레에 물릴까 봐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 덕분에, 결국 취직도 하고 많은 프로젝트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조차 내려놓고 공활한 가을 하늘을 즐길 줄 아는 여유도 필요하다. p 207



항상 움직여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저자랑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저 학교 졸업후 운 좋게 나름 대기업인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여 쉼없이 1n년간 달려오면서, 그 1n년간 학습된 강박관념이었다. 남들은 청춘이라는 20대 초반부터 난 이 회사에 얽매였고,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얽매여있다. 물론 이 사실이 싫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 또래보다 내집마련도 월등히 빨랐고, 내가 원하는 삶을 더 빠르게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 쉼없이 달려오다보니,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잊었다. 뭐.. 잊은건지, 처음부터 몰랐던 건지는 알수 없지만.



회사에서 휴직을 한 후, 난생 처음으로 길고 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휴직 전까지만해도 빨리 휴직 당일이 되길 바랐것만, 막상 쉬기 시작하니- 집에서 난 무엇을 해야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 생체리듬은 오랜기간 회사생활로 인해 새벽같이 눈을 뜨는데, 그때부터 잠잘때까지 난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약간의 우울감(?)까지 왔고, 그렇게 한달을 버티고 나서야, 그때서야 온전히 ‘쉼’과 ‘여유’를 받아들였다. 



굳이 아무것도 안해도, 내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저 가만히 있고, 주위 환경을 둘러보고, 창 밖 하늘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한달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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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잘 있습니다 - 엄지사진관이 기록한 일상의 순간들
엄지사진관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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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제주살이 에세이 「제주는 잘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제주에 터를 잡은 저자가, 제주에서 살면서 써내려간 에세이다. 처음에는 제주여행 에세이인가? 싶었다. 제주 여행 에세이도 여러권 읽어봤기에, ‘제주’라는 단어만 보고 지레짐작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책은 ‘제주’보다는 ‘있습니다’에 방점을 찍은 책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제주도민이 제주에 살면서,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혹은 여행자로서 제주에 왔을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한줄 한줄 써내려간 에세이다.



가끔 내가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되면, 자연스레 이방인의 입장으로써 그 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가끔은 이방인이 아닌, 그 곳에 살던 원주민의 삶을 느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해준다. 읽다보면 제주 한달살기도 고려해보고 싶을정도로!


 



나는 줄곧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제주에 처음 입도해서 지내는 동안 내 기분은 자주 태도가 되었다. 전보다 더욱 예민해져 때로는 나조차 나의 예민함이 어려웠다. 제주와 서울의 시간은 상이하게 흘러간다. 천성이 부지런하다 못해 일하다 죽을 팔자인지 나는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나태함을 견디지 못했다. 고요함에 적응하며 이제는 오후 7시 10분이면 집에 들어오는 일상을 보낸다. p 054



누군가는 나의 표면만 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이미 나는 충분히 혼자만의 새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걸 타인에게 하나하나 노출하지 않을 뿐이라는 말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는다. 어설픈 조언이라면 가슴에 새기고 상처받지 말고 적당히 흘러 듣는 편이 좋다. 이제 ‘그냥 너나 잘하세요’ 하고 넘길 수 있는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p 199



여행지로써의 제주는, 하루하루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가야할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시간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지가 아닌, 내가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제주는 전혀 달랐다. 간혹 TV에서 제주에 사는 연예인들이 하는 말,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제주. 그 여유를 저자가 느끼고 있었다. 물론 서울살이 하다가 제주로 건너갔을 때, 그 여유에 적응을 못했다고 한다.



문득 (산전)육아휴직을 하고 반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돌아봤다. 나 역시 저자처럼 부지런하다못해 일할 팔자로 태어나서,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해서 1n년간을 쉼없이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다. 회사를 오래 쉬어본 적이라고는 결혼할 당시 신혼여행갔을 때? 물론 어디까지나 회사를 오래 쉬었던거지, 당시엔 신혼여행을 즐기느라 역시나 여유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길다면 긴 (기간한정;;)여유가 생긴 것이다.



휴직을 시작하고 첫 한달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 오랜기간 회사생활에 맞춰진 내 몸뚱아리는 아침 6시만 되면 눈을 떴고, 눈을 뜬 그 시간부터가 고난이었다. 1n년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회사 출근을 하며, 바쁘게 살아오면서 짬나는 시간이라곤 커피마시는 시간밖에 없던 나였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니 시간은 더디게 가고, 더디게 가는 시간동안 나는 뭘 해야할지 모르겠고. 그때서야 깨달은 사실은, 나는 제대로 쉬는 법을 몰랐고, 나에게 찾아온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몰랐던 거다. 그걸 깨닫는 순간 우울증 비스무리한게 오기도 했다.



휴직하고 두달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여유를 즐기는 방법은 아직 찾지를 못했다. 다만, 긴긴 시간에 무엇을 해야할지 시간대별로 계획표를 짠 덕분에, 내 하루를 체감하는 시간이 꽤나 짧아졌다. 다만 여유도 즐길 줄 알아야한다는 생각에, 각 계획 사이사이에 쉬는시간 20~30분씩 조금 길게 넣었다. 난 천성이 무언가를 하고, 움직여야만 하는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계획표를  짜서 루틴을 만들고 나니, 휴직 후 한달이 지나서부터는 우울증이 무엇인가? 아주 루틴대로 하루하루 잘 돌아가는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던데, 놀랍게도 머문 자리가 아름답지 않은 경우도 많이 목격된다. 쓰레기통이 드문 것도 단점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21년 여름에 이호테우 해변이 쓰레기 무단 투기로 인해 쑥대밭이 된 모습을 소셜 미디어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돌아봤을 때 뿌듯함을 느낄 이들이 늘기를. 혹은 누군가가 더럽힌 자리에 들어설 때 느낀 불쾌함을 상상해보기를. 배려라는 생각보다 당연한 것이라는 태도가 필요하다. p 063


제주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다. 그만큼 사람들도 많이 찾아간다. 나 역시도 제주를 수차례 방문했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좋지 않은 광경이 목격되기도 한다. 나같은 여행자 눈에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그런 광경이, 제주에 사는 저자에게는 자주 보였으리라.



본디 제주는 자연경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인데, 그런 곳에 쓰레기를 그냥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나 어릴때는 쓰레기 불법투기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 보면 거의 대다수가 그렇다. 비단 제주 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 여기저기를 봐도 그렇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자기 편한 생각밖에 못하는지. 자기가 만든 쓰레기는, 자기가 챙겨오는게 당연한거라 생각하는 내가 우스워질 정도로 말이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인성교육의 부재인가 싶기도 하다. 더 슬픈건.... 앞으로 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다. 쓰레기를 아무대나 버리는 어른들을 보며, 아이들은 그게 당연한 것이라 배울테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마음 맞는 사람보다 맞지 않는 사람이 더 선명히 보이고, 나를 지키기 위해 사소한 부분에서도 까탈을 부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혼자가 좋을지라도, 대체로 홀로 시간을 보내더라도 우리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친구나 사람의 소중함을 오롯이 혼자가 된 이후 제대로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사람으로 버텨가는 것이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마다의 위로를 건네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p 161


정말 인간관계는 어렵다. 난 그런 인간관계에 넌덜머리가 났던 사람인지라, 내가 마음을 준,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몇 안된다. 같은 학교 나왔다고 전부다 친구는 아니지 않나? 그저 동창, 지인일 뿐이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몇몇의 친구를 제외하곤, 허울뿐인 동창이나 지인은 싹 정리했다. 그러니까 얼마나 편하던지!



개인적으로는 가족이라 일컫는 친인척 관계에도 굳이 얽매여야하나?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다. 우리 할머니 세대까지만해도 사촌에 육촌, 부둥부둥했겠지만, 아니 부모세대까지도 그랬겠지만 내 세대는 아니다. 일년에 한번도 볼까말까한 사이인데, 그저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좋게봐줘야 한다는 사실을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행실이 별로인데도 말이다. 


다만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니, 그저 내 옆에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만 있으면 무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않을까? 




“왜 제주에 오셨어요?”, “요즘 즐거운 일은 뭐에요?”, “제주를 왜 좋아하세요?”

숱한 여행을 다녔지만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게. 나 왜왔더라. 사실 그냥 이유가 없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이유가 없어요.”

“어쩌면 모든 일은 이유는 없어도 연관은 있을 거에요.” p 171


“취미가 있으세요?”

“저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합니다.”

“얼마나요? 얼마나 오래 찍었어요? 정말 좋아해요?”

“네?”

그 길을 걸으며 연달아 받게 된 질문들은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것들 뿐이었다. 모호하고 감성적인 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고, 하루에 백장 정도 사진을 찍을 정도로 사진을 좋아한다는 정량적인 수치를 몯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사진’에 관한 나의 진심이 궁금해 던지는 질문이었다. 개인적인 호불호가 지극히 약한 나의 유일한 취미이자 좋아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에 관한 진심을 묻는 듯 하여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p 129


저자의 일화를 보고, 누군가 나에게 ‘진심’을 물어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와, 놀랍게도 없는 듯?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왜 여행을 좋아하는지, 내가 왜 역사를 좋아하는지, 내가 왜 책을 좋아하는지 등을. 아- 근데 막상 생각해보니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나는 왜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걸까? 뭔가 계기가 있었을법한데 말이다.



심지어 나는 한번 좋아하면 꽤 오랜시간을 붙들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들까지 좋아하고 심지어 공부도 한다.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십수년간을 좋아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에서 파생된게 내 취미가 되고, 그 취미도 또 십수년간 이어진다. 요즘같이 클릭 한번으로 다양한 취미를 살 수 있는, 취미부자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흔치 않는 모습이긴 하다. 



뭐, 그래도 어쩌겠나. 좋아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좋아하는걸?





그나저나! 한동안 가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언제나 가고 싶은 여행지 제주는.............언제나처럼 잘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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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 - 하루 한 봉지씩 뜯어 보는 독서 라면 세상을 묻는 십대
고진숙 지음, 이시누 그림 / 서해문집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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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4월 3일이다. 누군가에겐 언제나와 같은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학살된 날이며, 평화롭던 마을이 통채로 불타던 날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되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지속된 제주도 민간인 학살. 이 긴 기간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제주도민 학살은 지금까지도 그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단순히 ‘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 그나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범죄라는 것이 공인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군가는 제주 4.3이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폭동을 일으킨 빨갱이를 물리친 것 뿐이라며 말한다. 대게 이런 사람들의 논리는 자기들만의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명확한 증거를 들이민다 하여도, 그들은 조작된 증거라고 우기며, 오로지 본인들이 주장하는 ‘빨갱이 타도’라는 주장만 할 뿐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연장선상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빨갱이가 주도한 폭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를 가진 사람들은 대게 친일파에서 파생되어, 군부독재를 찬양하던, 군부독재에 기생하던 사람들이 태반이다. 



(코로나19가 휩쓸었던 3년은 없는 시간으로 치고)최근 몇년 간 제주도에 갈 때마다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또 어떤 곳은 조용한 마을, 또 어떤 것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 모든 곳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제주 4.3은 자국의 역사이고, 우리 윗세대가 겪은 아픔이었음에도, 제주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4.3은 커녕, 관광하느라 바빴다. 그 사실이 얼마나 서글펐던지.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이 정도로 열악한건가? 아니면 아픈역사라서 알고 싶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앞으로의 희망이 될 청소년들만이라도 제주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책 「제주4.3을 묻는 십대에게」를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1년 전에 소개했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와 같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주 4.3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더 자세하게 말이다. 또한 동 시간대에 제주, 한반도 본토, 세계 정세가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미군정, 이승만 정부, 역대 군사정부에게 제주도는 같은 남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 걸을 수 있는 자, 모두 모이다

- 제주4.3의 배경


제주 4.3의 배경에는 조선시대부터 본토와 배제되어, 차별받은 제주의 고통이 있었다. 오랜세월동안 제주라는 섬 밖을 나가지 못한 제주도민들은 결혼도 섬 안에서, 섬 사람들과 해야했고, 어느새인가 섬 전체가 한 다리만 건너면 전부 친인척 또는 지인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삼춘’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궨당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민 한 사람의 일이라도, 그들은 제주도민 전체의 일이라 생각했다.


제주에는 빈부 격차가 거의 없었어. 다들 자기 밭을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있었고, 큰 회사나 공장도 없었지. 소작농도 없고 노동자도 없는데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강했어.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였고,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이 사회주의였기 때문이지. 그들은 외세를 몰아내고 제주사람끼리 평등하게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이해했어. p 026



징용, 징병으로 제주를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조금씩 해방이 실감되기 시작했어. 제주는 다른지역보다 귀환자 수가 엄청나서 무려 6만 명이나 되었어. 제주 사람 수가 고작 22만명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신기하게 거리를 나도는 부랑자 하나 없었어. 당시 제주에 취재하러 왔떤 신문기자들도 놀랄 정도였지. 남한만해도 해외에서 돌아온 100만 명 가까운 귀환 인구로 거리에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거든. p 037



당시 미군정 요원이었던 그랜트 미드는 이렇게 말했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제주 사람들은 미군이 제주로 들어왔을 때 성조기를 들고 환영해. 그러다 점점 보이지 않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보리공출 때문이야. p 038



제주의 토지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쌀은 거의 생산이 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대부분 보리나 조, 콩 농사에 의존했어. 그것마저 해방 이후 흉년이 들어 수확량이 반에도 못미쳤지. 곡물이 없어서 보릿겨를 톳에 섞은 톳밥이 유행하기도 해. 돼지사료를 먹기도 했어. 미군정청은 이런 것들로부터 한국인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어. 유일한 주권자라고 선언했으니까. 하지만 기대와 다른일이 벌어져. 보리를 공출한다고 한거야. 해방된 나라에서 다시 공출이라니! 일제에 맞서서 싸우며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 중 하나가 공출이었거든. 제주 사람들은 인민위원회와 힘을 합쳐 보리 공출을 반대하기 시작했어. p 039


죽지 못해 살았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 오랜시간 억압받던 제주도민들은 기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를 몰아낸 미군정을 환영했다. 미군정 역시 제주도에 처음 입도했을 때는 제주도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보리공출이 시작되며, 제주도민과 미군정의 사이는 급격하게 틀어지게 된다.


(+)


한국인들의 자주적 독립운동 역사는 부정되었다.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별적으로 귀국해야 했다. 주한 미군은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했다. 모든 식민지 통치 기구들은 그대로 두고, 식민지 관료도 그대로 등용했으며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역 요구는 묵살했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신간회 결성, 임시정부 구성, 광복군 결성 등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우선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본에서는 좌익들을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인정했지만 한국에서는 불법화했다. 이로 인해 좌우갈등이 폭발했고,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등 수많은 현대사의 미극이 이 시기에 일어났고,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전범국가 일본 대신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이 벌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p 041



반탁운동에는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익과 충칭 임시정부 세력이 앞장섰다. 반탁운동 결과 친일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둔갑하는 마술이 벌어졌다. 충칭 임시정부 세력은 국내에 세력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반탁운동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전통성을 인정받아 주권을 넘겨받을 계획이었다. 김구는 ‘반탁’의 상징이 되었고, ‘반탁’하면 김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반탁운동은 국민을 두 동강 내버렸다. p 047



미군정은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 제도를 남한에 도입한다며 쌀값을 자유화했다. 그러자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이 사재기에 나섰다. 1945년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지만 두 달 만에 쌀값은 8배가 뛰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내려 쌀을 공출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배급량은 일제 치하 전쟁 때의 절반에 불과했다. p 060



(소련은 북한에)미군정은 남한에 들어온 뒤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권리를 행사했다. 국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단체는 배제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여운형을 필두로한 좌우합작 건준위세력이 있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건준위를 지지했다. 이에 국외에 있던 김구를 비롯한 충칭 임시정부 요원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반탁운동’을 선택했다. 한마디로 미군정과 함께 좌익세력을 몰아내는 운동이다.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는 좌/우익이 한데모여 일제에 맞서싸웠는데, 막상 해방이 되고보니 서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칼을 들이미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했던 여운형의 건준위는 좌익과 우익이 함께 만들어졌음에도, 충칭 임정에겐 좌익이라 욕먹었고,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겐 우익이라 매도되었다. 그렇게 국론은 분열되어, 한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승​: 어긋남의 연속으로 과열되는 섬

- 제주 4.3의 시작


그렇게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본토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집회마저도 따로따로 준비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지금까지 제주 역사가 그랬듯, 그들은 집회 주제인 ‘3.1정신 계승하여 자주독립 이룩하자’라는 구호 아래 좌/우익 구분없이 모두가 모였다. 


(1947년 3.1절 기념 집회 직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갈 무렵, 관덕정 앞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어.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여 도랑에 빠진거야.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어. 안 그래도 경찰에 대해 반감이 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가 기마 경관은 난쳐해졌고, 꽁무니에 군중을 달고 관덕정 쪽으로 향해. 관덕정은 제주의 중심지로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곳이야. 망루 위에서 내려보단 응원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총을 쏘았어. 결국 6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말아. 그 중에서는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세 여인도 있었어.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한명을 빼놓고는 모두 등 뒤에서 총을 맞았어. 도망치는 비무장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한 것이지. 이것이 제주 4.3의 시작인 3.1절 발포 사건이야. p 066~067



그날 초저녁 7시부터 미군정은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응원경찰을 더 내려보내. 그리고 3.1절 행사 위원회 간부들을 불법 집회 혐의로 잡아들이기 시작해. 집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을 집까지 들이닥쳐 잡아가서 구타해. p 068



미군정과 경무부는 폭도들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발포했으므로 경찰의 정당방위라고 발표해.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 종조자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 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제주는 붉은 섬이며 그것은 제주도가 적의 주둔지란 뜻이었어. 미군정과 경찰에게 제주 사람들은 적이었고, 이렇게 제주 4.3의 비극이 시작되었어. p 070



미군정청은 전라북도 출신인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해. 유해진은 서북청년단 출신 개인비서 7명을 데리고 제주에 도착해. 유해진은 제주총파업에 참여했던 관공서 직원과 학교 교원들을 차례대로 잘라버려. 쫓겨난 제주 사람들의 자리에 이북출신들을 앉혔어. 제주도에서 제주사람의 권리와 이익이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해. p 074



일제강점기 당시 101명의 경찰로도 유지되던 제주의 치안이, 경찰이 1000명이 넘어가는데도 불안하다고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경찰을 돕도록 해.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모든 걸 뺏긴 채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던 만큼 좌익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어. 엉뚱한 복수가 시작된 것이지. 그들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가두고 금품을 요구해. 월급이 없는 무늬만 경찰이다보니 약탈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어. p 076



3.1절 발포사건 이후 제주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어 이미 2500명 가까이 갇혀있었어. 잡히면 일단 고문이 일상적이었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운동이 시작된 이후 체포와 고문은 더 심해져가. 그러다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p 084



(학생들의 고문치사 사건이 수차례 발생 후) 젊은 사람들은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어. 앉아서 맞아 죽을 것인가, 일어나 싸울 것인가.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봉기가 결정되었어. p 085



미군정은 제주 3.1절 기념집회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대형사고 수습을 위해 바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제주 4.3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날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제주도민에게 총살을 하였고,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명높은 우익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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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항쟁은 미군정이 한국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익 테러 단체와 응원경찰의 힘에 의존해 돌파했다. 경찰의 고문도 부활시켰다. 경찰은 고문이 너무나 정당한 권리라고 믿게 되었다. 경찰관 수는 일제강점기보다 6배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친일 경찰들이 돌아왔고, 대구 10월 항쟁 직후에는 경찰 간부 중 82%가 최연,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이들 중 이북에서 월남한 친일경찰들은 28.6%나 되었다. p 062



1947년 3월 12일에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의회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는 그리스와 터키 지역을 돕기위해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직후 유지되던 미,소의 협력관계가 무너지고 세계는 냉전체제에 휩싸였다. 이 영향으로 2차 미소공위는 결국 파국을 맞고 한국의 운명은 분단으로 치닫게 된다. p 070



1946년 창당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당시 미군정에 등록된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정당의 목표인 강령은 민주주의 자주 독립 국가 건설,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제 실시, 주요 산업의 국유화,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신앙의 자유/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 부여, 남녀 동등권, 초등 의믜 교육제 실시, 진보적 세금제 실시, 민족 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등으로 현재의 헌법과 비교해도 충돌할 만한 내용이 없다. 유엔위원단은 남북한 선거에 대한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 북한 3명의 정치지도자를 지명했는데, 남한에는 이승민, 김구, 김성수, 김규식과 함께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과 허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대중 지도자들이 투옥, 살해된 데다 간무들의 월북으로 한국전쟁과 함께 소멸했다. p086



제주4.3은 남로당 제주도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날인 1948년 4월 3일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런 작명은 마치 4.3이 무장대 봉기로부터 시작되었고 무장봉기가 원인인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에게 4.3은 평화, 통일, 항쟁의 의미였고, 어느 하루의 일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p088




전​: 좀처럼 모아지지 않는 평화를 향한 마음

- 제주 4.3, 민간인 학살의 잔혹함


이후로 미군정은 성공적인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위하여, 친일경찰 출신들을 불러모아 제주도 탄압에 돌입한다. 거짓뉴스 살포는 기본이었다. 미군정에게 제주도는 일명 “레드 아일랜드”, 빨갱이섬이었다.


누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내지도 못한 채 경찰과 미군정은 제주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은 외지인이라고 해. 그 외지인은 불량배였다가 백정이었다가 중국 팔로군이었다가 북한군이었다가 나중에 소련까지 들먹여. 근거없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 사람들의 잔학성에 치를 떨게 하는데 성공해. p 096



1948년 4월 28일에 구억리라는 마을에서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임자인 김달삼 간의 역사적인 평화협상이 열려. 긴 시간 동안의 회담 끝에 합의안이 나왔어. 하지만 평화는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어. 평화 협상 합의안에 따라 차근차근 무장해제와 귀순이 이뤄지는 동안 오라리에서 우익청년단들에 의한 방화사건이 발생해. 놀랍게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을 미군이 비행기로 촬영했어. 미 방화 사건은 마치 무장대에 의해서 벌어진 것으로 편집돼서 무성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만들어져. p 099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도에 들어오자마자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해-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국방경비대는 무장대가 숨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산간 마을 두 곳을 수색해 218명을 체포하면서 무차별 체포 작전(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어. 물론 그들 중에 무장대는 단 한명도 없었어. p 104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정의 지시하에 우익청년들이 조작한 사건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빌미로 무장대가 평화협정을 깼다고 말하며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간다. 미군정이 방화사건까지 조작하며 평화협정을 깨고, 바로 토벌에 들어간 이유는 단 하나, 5.10 총선거(남한 단독선거)였다. 당시 소련엔 유엔에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말하며 미군정의 폭정을 폭로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유엔이 5.10 총선거에 대한 공정성을 문제삼을수도 있다는 우려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최대한 빠르게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진행한 김익렬 연대장도 강제해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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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 작전에 대해 미국 국무부 한국 문제 전문가인 존 메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한국군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게 일본군 출신으로서 그들은 만주에서의 소탕전을 그대로 제주도에 적용했던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인 연대장들인 박진경, 송요찬, 함병선은 모두 불과 3년 전까지도 일본군과 만주군의 장교로 활약했었다. 일본군에 의해 벌어진 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인 난징대학살은 10년 전의 일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군사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번도 반성의 과정을 거치거나 잘못을 돌아볼 새도 없이 미군정에 의해 채용되었고, 제주에 파견되었다. p 110



5.10 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100만 명에 이르는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향보단)은 선거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다. 언론과 유엔위원단도 이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미국에서도 비밀투표가 유지될지 염려했다. 그런 가운데 임기 2년의 국회의원을 뽑는 남한 단독 총선거가 이루어졌다. (……)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제주도 국회의원 2명이 없는 가운데 열렸다. 이승만은 국회의원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의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법(반민법)이 통과되어 공포되었고, 이에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대부분 친일파 출신이었다. p112



북한은 자신들이 세울 정부는 통일정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남과 북에서 각각 대의원(국회의원)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에 따라 남측 대의원을 선발할 1080명의 대표자를 뽑기 위한 선거가 남한에서 치러졌다. 미군정 아래의 남한에서 버젓이 선거를 치를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선거를 ‘지하선거’ 라고 한다. 제주에서 지하선거는 4.3의 여파로 백지에 손도장만 찍어주는 백지투표 형식으로 치러졌다. 아무나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p 113



남한 측 대표자들은 38선이 가까운 황해도 해주에 모여서 대의원 360명을 뽑았다. 이들이 북한에서 선출된 대의원 212명과 함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초대 수상으로 선출했다. 월북했던 제주도 대표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4.3을 일으킨 주역들이 남한정부가 아니라 북한정부를 선택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은 제주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제주도 무장대가 북한과 연결된 조직처럼 되어버린것이니까 말이다. 제주 민란의 전통에서 장두가 민중을 버린 경우는 없었다. 김달삼의 월북은 제주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고, 그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 총책이 된 이덕구는 끝까지 제주 사람들과 함께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p 114


가을이 되자 제주 경찰청장의 자리에 홍순봉이 임명돼.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경찰 간부자리에 올랐었어. 그가 재임한 1년여 동안 제주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극이 벌쳐졌지. 군인은 물론 경찰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군경 합동 토벌대가 만들어졌고 제주 출신들은 완전히 배제돼. 인정사정을 두지 않는 잔인한 토벌을 위해서였지. 미군은 이 작전을 ‘레드헌트’, 즉 ‘사냥’이라고 했어. p 118



토벌대가 오는 모습을 보고 젊은 사람들은 일단 산으로 도망쳤어. 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떠나지 못했다가 토벌대를 만났고, 총에맞아 죽었어. 이승만 정부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여수에 있는 군부대를 제주도에 보내려고 했어. 여수의 병사들은 ‘동족의 가슴에 총구를 겨눌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켜. 이것이 여순 사건이야. p 119



토벌대는 젊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처형을 시작했어. 운 좋게 체포되었다 해도 모진 고문이 기다렸지. 모진 고문을 이겨낸다고 해도 유죄판결을 받아서 수형인이 돼. 비무장 민간인인 그들은 군사 법정에 서야했고, 그들에게 법정은 계엄법 위반이 아닌 형법의 내란죄 위반을 저질렀다고 했어. p 121



수만 명이 죽고 체포되고 고향을 잃는 등 제주는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정부는 늘 폭도의 수가 500명 안팎이란 말만을 반복했어. 1948년 4월에도 그랬고, 12월에도 그랬고, 1949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지. 왜 수가 줄지 않는지는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왜 무시무시한 폭도들과 싸운다는 군인들이 거의 피해가 없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어. p 122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거짓으로라도 자백하면 그들을 해안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총살해. 총소리가 멎으면 여인들은 겹겹이 쌓인 시체 사이에서 남편과 아들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시체라도 찾으면 다행이라고 여겼어. 많은 집에서 시신 없는 묘를 만들어야 했고, 죽은 날을 몰라 생일날 제사상을 차리기도 했거든. p 125



그들은 임신한 젊은 여자를 발가벗긴 뒤 몹쓸 짓을 하고 휘발유를 뿌려 태웠고, 산 채로 매장했어. 남편이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인데 그런 경우를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 그들 부부는 부모 형제까지 몰살당했지. 그러나 남편은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산에서 내려와 대한민국 군인으로 참전했어. p 126



하루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들에서, 집에서, 해안가 모래밭에서 처형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무슨 법을 위반해 죄를 지었는지 듣지 못했어. ‘재판을 받을 권리, 무죄 추정의 원칙,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같은 것은 사치였어. 제주 사람들은 더 이상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끌려가는 그들의 마지막 소원은 칼이 아니라 총으로 한 번에 죽는 것이었지. p 130


미군정은 계속해서 친일경찰들을 제주에 내려보냈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시간대에 유엔에서는 <집단살해죄 방지>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유엔은 미군정이 제주도민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행위에는 눈을 감았다. 유엔과 미군정에게 제주도민은 지켜야 할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주 4.3으로 가족이 학살당한 집안에는 대게 1명 이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공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 폭도가족이라 매도된 그들은, 국가유공자 집안이기도 했다. 정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말대로 제주도민은 빨갱이였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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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집단 학살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8년 12월, 유엔총회가 시작되었다. 총회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인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으로 <집단살해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과 <세계인권 선언>도 채택되었다.

집단 살해죄, 즉 제노사이드 범죄는 ‘국가권력이 특정 집단 구성원을 절멸할 의도를 갖고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실행한 집단 학살’로 1945년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전범 재판에서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함께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에는 생명, 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관한 권리, 즉 임의의 체포, 구금 또는 추방으로부터의 자유, 독립적이고 공평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 결사의 자유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으로부터도, 국제법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집단 살해와 인권침해가 자행되었다. 유엔은 이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은 적이 없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초토화 작전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에 의히 반성없이 사용되었다. p 133




결​: 여전히 진행중인 치유와 회복

- 제주 4.3은 끝나지 않았다.


미군정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제주도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한국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더 많은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이 예비검속은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자행되었다. 



본토 문경의 석달마을 학살,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 칠곡 민간인 학살, 양천 아작골 민간인 학살, 영덕 뫼골 민간인 학살등이 전부 이승만 정부가 시행한 예비검속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다.


1950년, 아직 제주 섬이 두려움 속에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장과는 먼 제주에서 또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내무부 치안국장(경찰청장)이 각 경찰서에 보낸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란 긴 이름의 지시문 때문이었어. 요시찰인이란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좌익 혐의자였어. 이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지. 예비검속이란 죄를 지을지도 모르니 미리 가둬놓는다는 것으로, 반인륜적인 법이야.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은 즉시 일제강점기의 예비검속법을 없앴고, 당연히 대한민국 제헌헌법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법이었지. 그러나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속속 잡혀갔어. 제주도에서는 4.3의 여파로 훨씬 더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갔지. p 151



체포자 수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돼. 체포기록이 없었으니까. 수천명이나 되는 제주 사람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된 군사보호 구역 내에서 총살된 뒤 버려졌어.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요청도 허사였지. 이승만 정부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거든. 이것이 바로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재판도 거치지 않고 미리 처형부터 한, 문명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죽음의 예비검속 사건’이야. 육지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고 해. p 152



제주도에서는 2만 7000명의 보도연맹원과 5만 명의 4.3관련자 가족들이명부에 올라서 관리됐어. 이들은 공무원이나 교사가 될 수 없었고, 취직도 승진도 어려웠어. 사관학교 입학도 불가능했고 해외여행도 할 수 없었어. 군대를 다녀오고 훈장을 받아도 마찬가지야. 이로 인해 많은 가족이 파괴되고 일부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어. p 161



연좌제는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으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제주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그 악몽의 그림자가 이어졌어. 제주 4.3은 그때까지도 철저한 금기의 영역이었거든. 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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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후 좌익 세력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의미로 만든것이 ‘국민보도연맹’이다. 이미 좌익 세력은 북으로 갔거나, 산으로 갔거나, 죽거나, 감옥에 간 뒤라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대부분 좌익과는 거리가 있었다. 군과 경찰, 공무원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사탕발림으로 인원을 모집하거나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집어넣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우리 군이 밀리자 좌익 세력이 북한군과 힘을 합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구금,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재판 없이 처형했다. 이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p 154


이승만 하야 이후 정권이 수차례 바뀌었지만,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에 세워진 정권들도 이승만과 다름없는 독재정권이었다. 심지어 군부에 의해 생겨난 정권이었다. 제주 4.3은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었으므로, 군사정권에서도 언급하는 것이 금기였다. 언급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였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제주 4.3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0년 1월에 <제주4.3사건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이 공포되었어. 제주 4.3평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제주 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지. 2003년에는 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됐어. 진상 조사 보고서에 근거해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을 공식사과하며 이렇게 말했어.

“국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국가 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168



제주 4.3이 벌어진 7년간 대략 3만 명이 희생되었어. 이들중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은 744명으로 이들은 모두 국가 유공자 예우를 받았어. 이들을 포함하여 무장대에 의한 사망자 수는 2000명을 넘지 못해. 그러므로 나머지 2만 8000여 명은 국가권력에 의한 의생이라고 볼 수 있어. 이들은 신고를 꺼리거나 일가족이 몰살당해 신고를 못한 경우도 많아서 정확한 수는 파악도 되지 않아. p 170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야 제주도민들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사죄를 한 것이다. 이후 제주 4.3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이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옭아매던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게 완벽하게 끝난게 아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4.3으로 학살된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며, 실종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제주도민 학살을 단행했던 경찰들은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그 후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제주 4.3을 왜곡한다.



무엇보다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그 성격을 규정하지 못하여,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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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4.3 에 대해 읽을때마다 분노하게 되는거 같아요. 그 사건의 주동자들이 잘 살고 있다는 것, 지금도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이 있다는 거 ㅠㅠ 제대로 진실된 역사교육이 너무나 필요한거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검색도 유투브로 한다는데 잘못된 내용들이 넘쳐나더라고요 ㅠㅠ 피로님 정성 가득한 글 넘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