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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 - 하루 한 봉지씩 뜯어 보는 독서 라면 ㅣ 세상을 묻는 십대
고진숙 지음, 이시누 그림 / 서해문집 / 2022년 3월
평점 :
곧 4월 3일이다. 누군가에겐 언제나와 같은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학살된 날이며, 평화롭던 마을이 통채로 불타던 날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되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지속된 제주도 민간인 학살. 이 긴 기간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제주도민 학살은 지금까지도 그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단순히 ‘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 그나마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범죄라는 것이 공인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군가는 제주 4.3이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폭동을 일으킨 빨갱이를 물리친 것 뿐이라며 말한다. 대게 이런 사람들의 논리는 자기들만의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명확한 증거를 들이민다 하여도, 그들은 조작된 증거라고 우기며, 오로지 본인들이 주장하는 ‘빨갱이 타도’라는 주장만 할 뿐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연장선상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빨갱이가 주도한 폭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를 가진 사람들은 대게 친일파에서 파생되어, 군부독재를 찬양하던, 군부독재에 기생하던 사람들이 태반이다.
(코로나19가 휩쓸었던 3년은 없는 시간으로 치고)최근 몇년 간 제주도에 갈 때마다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또 어떤 곳은 조용한 마을, 또 어떤 것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 모든 곳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제주 4.3은 자국의 역사이고, 우리 윗세대가 겪은 아픔이었음에도, 제주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4.3은 커녕, 관광하느라 바빴다. 그 사실이 얼마나 서글펐던지.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이 정도로 열악한건가? 아니면 아픈역사라서 알고 싶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앞으로의 희망이 될 청소년들만이라도 제주 4.3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책 「제주4.3을 묻는 십대에게」를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1년 전에 소개했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와 같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주 4.3에 대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더 자세하게 말이다. 또한 동 시간대에 제주, 한반도 본토, 세계 정세가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미군정, 이승만 정부, 역대 군사정부에게 제주도는 같은 남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 걸을 수 있는 자, 모두 모이다
- 제주4.3의 배경
제주 4.3의 배경에는 조선시대부터 본토와 배제되어, 차별받은 제주의 고통이 있었다. 오랜세월동안 제주라는 섬 밖을 나가지 못한 제주도민들은 결혼도 섬 안에서, 섬 사람들과 해야했고, 어느새인가 섬 전체가 한 다리만 건너면 전부 친인척 또는 지인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삼춘’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를 궨당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민 한 사람의 일이라도, 그들은 제주도민 전체의 일이라 생각했다.
제주에는 빈부 격차가 거의 없었어. 다들 자기 밭을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있었고, 큰 회사나 공장도 없었지. 소작농도 없고 노동자도 없는데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강했어.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였고,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이 사회주의였기 때문이지. 그들은 외세를 몰아내고 제주사람끼리 평등하게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이해했어. p 026
징용, 징병으로 제주를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조금씩 해방이 실감되기 시작했어. 제주는 다른지역보다 귀환자 수가 엄청나서 무려 6만 명이나 되었어. 제주 사람 수가 고작 22만명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신기하게 거리를 나도는 부랑자 하나 없었어. 당시 제주에 취재하러 왔떤 신문기자들도 놀랄 정도였지. 남한만해도 해외에서 돌아온 100만 명 가까운 귀환 인구로 거리에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었거든. p 037
당시 미군정 요원이었던 그랜트 미드는 이렇게 말했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제주 사람들은 미군이 제주로 들어왔을 때 성조기를 들고 환영해. 그러다 점점 보이지 않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보리공출 때문이야. p 038
제주의 토지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쌀은 거의 생산이 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대부분 보리나 조, 콩 농사에 의존했어. 그것마저 해방 이후 흉년이 들어 수확량이 반에도 못미쳤지. 곡물이 없어서 보릿겨를 톳에 섞은 톳밥이 유행하기도 해. 돼지사료를 먹기도 했어. 미군정청은 이런 것들로부터 한국인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어. 유일한 주권자라고 선언했으니까. 하지만 기대와 다른일이 벌어져. 보리를 공출한다고 한거야. 해방된 나라에서 다시 공출이라니! 일제에 맞서서 싸우며 다시는 식민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 중 하나가 공출이었거든. 제주 사람들은 인민위원회와 힘을 합쳐 보리 공출을 반대하기 시작했어. p 039
죽지 못해 살았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 오랜시간 억압받던 제주도민들은 기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를 몰아낸 미군정을 환영했다. 미군정 역시 제주도에 처음 입도했을 때는 제주도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보리공출이 시작되며, 제주도민과 미군정의 사이는 급격하게 틀어지게 된다.
(+)
한국인들의 자주적 독립운동 역사는 부정되었다.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별적으로 귀국해야 했다. 주한 미군은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했다. 모든 식민지 통치 기구들은 그대로 두고, 식민지 관료도 그대로 등용했으며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역 요구는 묵살했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신간회 결성, 임시정부 구성, 광복군 결성 등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우선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본에서는 좌익들을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인정했지만 한국에서는 불법화했다. 이로 인해 좌우갈등이 폭발했고,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등 수많은 현대사의 미극이 이 시기에 일어났고,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전범국가 일본 대신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이 벌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p 041
반탁운동에는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익과 충칭 임시정부 세력이 앞장섰다. 반탁운동 결과 친일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둔갑하는 마술이 벌어졌다. 충칭 임시정부 세력은 국내에 세력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반탁운동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전통성을 인정받아 주권을 넘겨받을 계획이었다. 김구는 ‘반탁’의 상징이 되었고, ‘반탁’하면 김구를 떠올리게 되었다. 반탁운동은 국민을 두 동강 내버렸다. p 047
미군정은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 제도를 남한에 도입한다며 쌀값을 자유화했다. 그러자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이 사재기에 나섰다. 1945년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지만 두 달 만에 쌀값은 8배가 뛰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내려 쌀을 공출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배급량은 일제 치하 전쟁 때의 절반에 불과했다. p 060
(소련은 북한에)미군정은 남한에 들어온 뒤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권리를 행사했다. 국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단체는 배제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여운형을 필두로한 좌우합작 건준위세력이 있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건준위를 지지했다. 이에 국외에 있던 김구를 비롯한 충칭 임시정부 요원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반탁운동’을 선택했다. 한마디로 미군정과 함께 좌익세력을 몰아내는 운동이다.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는 좌/우익이 한데모여 일제에 맞서싸웠는데, 막상 해방이 되고보니 서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칼을 들이미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지했던 여운형의 건준위는 좌익과 우익이 함께 만들어졌음에도, 충칭 임정에겐 좌익이라 욕먹었고,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겐 우익이라 매도되었다. 그렇게 국론은 분열되어, 한반도는 분단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승: 어긋남의 연속으로 과열되는 섬
- 제주 4.3의 시작
그렇게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본토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집회마저도 따로따로 준비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지금까지 제주 역사가 그랬듯, 그들은 집회 주제인 ‘3.1정신 계승하여 자주독립 이룩하자’라는 구호 아래 좌/우익 구분없이 모두가 모였다.
(1947년 3.1절 기념 집회 직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갈 무렵, 관덕정 앞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어.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여 도랑에 빠진거야.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어. 안 그래도 경찰에 대해 반감이 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가 기마 경관은 난쳐해졌고, 꽁무니에 군중을 달고 관덕정 쪽으로 향해. 관덕정은 제주의 중심지로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곳이야. 망루 위에서 내려보단 응원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총을 쏘았어. 결국 6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말아. 그 중에서는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세 여인도 있었어.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한명을 빼놓고는 모두 등 뒤에서 총을 맞았어. 도망치는 비무장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한 것이지. 이것이 제주 4.3의 시작인 3.1절 발포 사건이야. p 066~067
그날 초저녁 7시부터 미군정은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응원경찰을 더 내려보내. 그리고 3.1절 행사 위원회 간부들을 불법 집회 혐의로 잡아들이기 시작해. 집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을 집까지 들이닥쳐 잡아가서 구타해. p 068
미군정과 경무부는 폭도들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발포했으므로 경찰의 정당방위라고 발표해.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 종조자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 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제주는 붉은 섬이며 그것은 제주도가 적의 주둔지란 뜻이었어. 미군정과 경찰에게 제주 사람들은 적이었고, 이렇게 제주 4.3의 비극이 시작되었어. p 070
미군정청은 전라북도 출신인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해. 유해진은 서북청년단 출신 개인비서 7명을 데리고 제주에 도착해. 유해진은 제주총파업에 참여했던 관공서 직원과 학교 교원들을 차례대로 잘라버려. 쫓겨난 제주 사람들의 자리에 이북출신들을 앉혔어. 제주도에서 제주사람의 권리와 이익이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해. p 074
일제강점기 당시 101명의 경찰로도 유지되던 제주의 치안이, 경찰이 1000명이 넘어가는데도 불안하다고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경찰을 돕도록 해.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모든 걸 뺏긴 채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던 만큼 좌익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어. 엉뚱한 복수가 시작된 것이지. 그들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가두고 금품을 요구해. 월급이 없는 무늬만 경찰이다보니 약탈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어. p 076
3.1절 발포사건 이후 제주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어 이미 2500명 가까이 갇혀있었어. 잡히면 일단 고문이 일상적이었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운동이 시작된 이후 체포와 고문은 더 심해져가. 그러다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p 084
(학생들의 고문치사 사건이 수차례 발생 후) 젊은 사람들은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어. 앉아서 맞아 죽을 것인가, 일어나 싸울 것인가.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봉기가 결정되었어. p 085
미군정은 제주 3.1절 기념집회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대형사고 수습을 위해 바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제주 4.3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날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제주도민에게 총살을 하였고,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명높은 우익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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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항쟁은 미군정이 한국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익 테러 단체와 응원경찰의 힘에 의존해 돌파했다. 경찰의 고문도 부활시켰다. 경찰은 고문이 너무나 정당한 권리라고 믿게 되었다. 경찰관 수는 일제강점기보다 6배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친일 경찰들이 돌아왔고, 대구 10월 항쟁 직후에는 경찰 간부 중 82%가 최연,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이들 중 이북에서 월남한 친일경찰들은 28.6%나 되었다. p 062
1947년 3월 12일에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의회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는 그리스와 터키 지역을 돕기위해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직후 유지되던 미,소의 협력관계가 무너지고 세계는 냉전체제에 휩싸였다. 이 영향으로 2차 미소공위는 결국 파국을 맞고 한국의 운명은 분단으로 치닫게 된다. p 070
1946년 창당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당시 미군정에 등록된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정당의 목표인 강령은 민주주의 자주 독립 국가 건설,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제 실시, 주요 산업의 국유화,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신앙의 자유/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 부여, 남녀 동등권, 초등 의믜 교육제 실시, 진보적 세금제 실시, 민족 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등으로 현재의 헌법과 비교해도 충돌할 만한 내용이 없다. 유엔위원단은 남북한 선거에 대한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 북한 3명의 정치지도자를 지명했는데, 남한에는 이승민, 김구, 김성수, 김규식과 함께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과 허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대중 지도자들이 투옥, 살해된 데다 간무들의 월북으로 한국전쟁과 함께 소멸했다. p086
제주4.3은 남로당 제주도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날인 1948년 4월 3일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런 작명은 마치 4.3이 무장대 봉기로부터 시작되었고 무장봉기가 원인인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에게 4.3은 평화, 통일, 항쟁의 의미였고, 어느 하루의 일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p088
전: 좀처럼 모아지지 않는 평화를 향한 마음
- 제주 4.3, 민간인 학살의 잔혹함
이후로 미군정은 성공적인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위하여, 친일경찰 출신들을 불러모아 제주도 탄압에 돌입한다. 거짓뉴스 살포는 기본이었다. 미군정에게 제주도는 일명 “레드 아일랜드”, 빨갱이섬이었다.
누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내지도 못한 채 경찰과 미군정은 제주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은 외지인이라고 해. 그 외지인은 불량배였다가 백정이었다가 중국 팔로군이었다가 북한군이었다가 나중에 소련까지 들먹여. 근거없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 사람들의 잔학성에 치를 떨게 하는데 성공해. p 096
1948년 4월 28일에 구억리라는 마을에서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임자인 김달삼 간의 역사적인 평화협상이 열려. 긴 시간 동안의 회담 끝에 합의안이 나왔어. 하지만 평화는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어. 평화 협상 합의안에 따라 차근차근 무장해제와 귀순이 이뤄지는 동안 오라리에서 우익청년단들에 의한 방화사건이 발생해. 놀랍게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을 미군이 비행기로 촬영했어. 미 방화 사건은 마치 무장대에 의해서 벌어진 것으로 편집돼서 무성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만들어져. p 099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도에 들어오자마자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해-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국방경비대는 무장대가 숨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산간 마을 두 곳을 수색해 218명을 체포하면서 무차별 체포 작전(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어. 물론 그들 중에 무장대는 단 한명도 없었어. p 104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정의 지시하에 우익청년들이 조작한 사건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빌미로 무장대가 평화협정을 깼다고 말하며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간다. 미군정이 방화사건까지 조작하며 평화협정을 깨고, 바로 토벌에 들어간 이유는 단 하나, 5.10 총선거(남한 단독선거)였다. 당시 소련엔 유엔에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말하며 미군정의 폭정을 폭로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유엔이 5.10 총선거에 대한 공정성을 문제삼을수도 있다는 우려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최대한 빠르게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진행한 김익렬 연대장도 강제해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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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 작전에 대해 미국 국무부 한국 문제 전문가인 존 메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한국군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게 일본군 출신으로서 그들은 만주에서의 소탕전을 그대로 제주도에 적용했던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인 연대장들인 박진경, 송요찬, 함병선은 모두 불과 3년 전까지도 일본군과 만주군의 장교로 활약했었다. 일본군에 의해 벌어진 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인 난징대학살은 10년 전의 일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군사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번도 반성의 과정을 거치거나 잘못을 돌아볼 새도 없이 미군정에 의해 채용되었고, 제주에 파견되었다. p 110
5.10 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100만 명에 이르는 경찰보조대인 향토보위단(향보단)은 선거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다. 언론과 유엔위원단도 이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미국에서도 비밀투표가 유지될지 염려했다. 그런 가운데 임기 2년의 국회의원을 뽑는 남한 단독 총선거가 이루어졌다. (……)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제주도 국회의원 2명이 없는 가운데 열렸다. 이승만은 국회의원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의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법(반민법)이 통과되어 공포되었고, 이에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대부분 친일파 출신이었다. p112
북한은 자신들이 세울 정부는 통일정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남과 북에서 각각 대의원(국회의원)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에 따라 남측 대의원을 선발할 1080명의 대표자를 뽑기 위한 선거가 남한에서 치러졌다. 미군정 아래의 남한에서 버젓이 선거를 치를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선거를 ‘지하선거’ 라고 한다. 제주에서 지하선거는 4.3의 여파로 백지에 손도장만 찍어주는 백지투표 형식으로 치러졌다. 아무나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p 113
남한 측 대표자들은 38선이 가까운 황해도 해주에 모여서 대의원 360명을 뽑았다. 이들이 북한에서 선출된 대의원 212명과 함께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초대 수상으로 선출했다. 월북했던 제주도 대표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4.3을 일으킨 주역들이 남한정부가 아니라 북한정부를 선택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은 제주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제주도 무장대가 북한과 연결된 조직처럼 되어버린것이니까 말이다. 제주 민란의 전통에서 장두가 민중을 버린 경우는 없었다. 김달삼의 월북은 제주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고, 그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 총책이 된 이덕구는 끝까지 제주 사람들과 함께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p 114
가을이 되자 제주 경찰청장의 자리에 홍순봉이 임명돼.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경찰 간부자리에 올랐었어. 그가 재임한 1년여 동안 제주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극이 벌쳐졌지. 군인은 물론 경찰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군경 합동 토벌대가 만들어졌고 제주 출신들은 완전히 배제돼. 인정사정을 두지 않는 잔인한 토벌을 위해서였지. 미군은 이 작전을 ‘레드헌트’, 즉 ‘사냥’이라고 했어. p 118
토벌대가 오는 모습을 보고 젊은 사람들은 일단 산으로 도망쳤어. 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떠나지 못했다가 토벌대를 만났고, 총에맞아 죽었어. 이승만 정부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여수에 있는 군부대를 제주도에 보내려고 했어. 여수의 병사들은 ‘동족의 가슴에 총구를 겨눌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켜. 이것이 여순 사건이야. p 119
토벌대는 젊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처형을 시작했어. 운 좋게 체포되었다 해도 모진 고문이 기다렸지. 모진 고문을 이겨낸다고 해도 유죄판결을 받아서 수형인이 돼. 비무장 민간인인 그들은 군사 법정에 서야했고, 그들에게 법정은 계엄법 위반이 아닌 형법의 내란죄 위반을 저질렀다고 했어. p 121
수만 명이 죽고 체포되고 고향을 잃는 등 제주는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정부는 늘 폭도의 수가 500명 안팎이란 말만을 반복했어. 1948년 4월에도 그랬고, 12월에도 그랬고, 1949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지. 왜 수가 줄지 않는지는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왜 무시무시한 폭도들과 싸운다는 군인들이 거의 피해가 없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어. p 122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거짓으로라도 자백하면 그들을 해안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총살해. 총소리가 멎으면 여인들은 겹겹이 쌓인 시체 사이에서 남편과 아들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시체라도 찾으면 다행이라고 여겼어. 많은 집에서 시신 없는 묘를 만들어야 했고, 죽은 날을 몰라 생일날 제사상을 차리기도 했거든. p 125
그들은 임신한 젊은 여자를 발가벗긴 뒤 몹쓸 짓을 하고 휘발유를 뿌려 태웠고, 산 채로 매장했어. 남편이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인데 그런 경우를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 그들 부부는 부모 형제까지 몰살당했지. 그러나 남편은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산에서 내려와 대한민국 군인으로 참전했어. p 126
하루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들에서, 집에서, 해안가 모래밭에서 처형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무슨 법을 위반해 죄를 지었는지 듣지 못했어. ‘재판을 받을 권리, 무죄 추정의 원칙,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같은 것은 사치였어. 제주 사람들은 더 이상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끌려가는 그들의 마지막 소원은 칼이 아니라 총으로 한 번에 죽는 것이었지. p 130
미군정은 계속해서 친일경찰들을 제주에 내려보냈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시간대에 유엔에서는 <집단살해죄 방지>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유엔은 미군정이 제주도민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행위에는 눈을 감았다. 유엔과 미군정에게 제주도민은 지켜야 할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주 4.3으로 가족이 학살당한 집안에는 대게 1명 이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공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 폭도가족이라 매도된 그들은, 국가유공자 집안이기도 했다. 정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말대로 제주도민은 빨갱이였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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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집단 학살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8년 12월, 유엔총회가 시작되었다. 총회에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인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으로 <집단살해죄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과 <세계인권 선언>도 채택되었다.
집단 살해죄, 즉 제노사이드 범죄는 ‘국가권력이 특정 집단 구성원을 절멸할 의도를 갖고 체계적인 계획 속에서 실행한 집단 학살’로 1945년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전범 재판에서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함께 채택된 <세계 인권 선언>에는 생명, 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관한 권리, 즉 임의의 체포, 구금 또는 추방으로부터의 자유, 독립적이고 공평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 결사의 자유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으로부터도, 국제법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집단 살해와 인권침해가 자행되었다. 유엔은 이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은 적이 없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초토화 작전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에 의히 반성없이 사용되었다. p 133
결: 여전히 진행중인 치유와 회복
- 제주 4.3은 끝나지 않았다.
미군정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제주도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한국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더 많은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이 예비검속은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자행되었다.
본토 문경의 석달마을 학살,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 칠곡 민간인 학살, 양천 아작골 민간인 학살, 영덕 뫼골 민간인 학살등이 전부 이승만 정부가 시행한 예비검속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다.
1950년, 아직 제주 섬이 두려움 속에 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장과는 먼 제주에서 또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내무부 치안국장(경찰청장)이 각 경찰서에 보낸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란 긴 이름의 지시문 때문이었어. 요시찰인이란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좌익 혐의자였어. 이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지. 예비검속이란 죄를 지을지도 모르니 미리 가둬놓는다는 것으로, 반인륜적인 법이야.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은 즉시 일제강점기의 예비검속법을 없앴고, 당연히 대한민국 제헌헌법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법이었지. 그러나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속속 잡혀갔어. 제주도에서는 4.3의 여파로 훨씬 더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갔지. p 151
체포자 수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돼. 체포기록이 없었으니까. 수천명이나 되는 제주 사람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된 군사보호 구역 내에서 총살된 뒤 버려졌어.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요청도 허사였지. 이승만 정부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거든. 이것이 바로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재판도 거치지 않고 미리 처형부터 한, 문명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죽음의 예비검속 사건’이야. 육지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고 해. p 152
제주도에서는 2만 7000명의 보도연맹원과 5만 명의 4.3관련자 가족들이명부에 올라서 관리됐어. 이들은 공무원이나 교사가 될 수 없었고, 취직도 승진도 어려웠어. 사관학교 입학도 불가능했고 해외여행도 할 수 없었어. 군대를 다녀오고 훈장을 받아도 마찬가지야. 이로 인해 많은 가족이 파괴되고 일부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어. p 161
연좌제는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으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제주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그 악몽의 그림자가 이어졌어. 제주 4.3은 그때까지도 철저한 금기의 영역이었거든. 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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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후 좌익 세력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의미로 만든것이 ‘국민보도연맹’이다. 이미 좌익 세력은 북으로 갔거나, 산으로 갔거나, 죽거나, 감옥에 간 뒤라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대부분 좌익과는 거리가 있었다. 군과 경찰, 공무원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사탕발림으로 인원을 모집하거나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집어넣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우리 군이 밀리자 좌익 세력이 북한군과 힘을 합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구금,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재판 없이 처형했다. 이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p 154
이승만 하야 이후 정권이 수차례 바뀌었지만,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에 세워진 정권들도 이승만과 다름없는 독재정권이었다. 심지어 군부에 의해 생겨난 정권이었다. 제주 4.3은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었으므로, 군사정권에서도 언급하는 것이 금기였다. 언급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였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제주 4.3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0년 1월에 <제주4.3사건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이 공포되었어. 제주 4.3평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제주 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지. 2003년에는 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됐어. 진상 조사 보고서에 근거해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을 공식사과하며 이렇게 말했어.
“국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국가 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168
제주 4.3이 벌어진 7년간 대략 3만 명이 희생되었어. 이들중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은 744명으로 이들은 모두 국가 유공자 예우를 받았어. 이들을 포함하여 무장대에 의한 사망자 수는 2000명을 넘지 못해. 그러므로 나머지 2만 8000여 명은 국가권력에 의한 의생이라고 볼 수 있어. 이들은 신고를 꺼리거나 일가족이 몰살당해 신고를 못한 경우도 많아서 정확한 수는 파악도 되지 않아. p 170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야 제주도민들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사죄를 한 것이다. 이후 제주 4.3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이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옭아매던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게 완벽하게 끝난게 아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4.3으로 학살된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며, 실종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제주도민 학살을 단행했던 경찰들은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그 후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제주 4.3을 왜곡한다.
무엇보다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그 성격을 규정하지 못하여,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