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의 넥타이
이정남 지음 / 북 야부사메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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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하면서 TV와 멀어진 나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 까지만해도 TV를 넘나리 사랑했었다. 특히 교양/역사/시사/다큐 프로그램을 참 좋아해서, 채널 돌려가며 보곤했었다. 공중파야 프로그램 방영시간이 정해져있으니 언제든 보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케이블은 좀 타이밍이(?) 맞아야만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타이밍 재가면서 봤던 방송 중 하나가 바로 《사무라이 로망스》 라는 프로그램이다. 뭐,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는 사실 유튜브 채널이었다며....ㅋㅋ

각설하고! 꽤나 즐겨 보았던 《사무라이 로망스》가 책으로 발간된다고 해서 당시에 바로 구입을 했었다. 책 제목은 『사무라이의 넥타이』. 어째서 제목이 ‘넥타이?’ 인가 싶었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를 생각해보면 왠지 사무라이의 ‘넥타이’라는 제목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뭔가 이해되는 느낌적인 느낌?! ...............그 후 출산과 육아라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 책을 구입한지 1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읽은건 안 비밀^^!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일본 역사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 그럼 일본 어느 시대, 또는 어떤 구분에 의한 역사책인가!

일본 역사책 및 역사공부를 할라치면, 고대사는 겁나 길디 긴 신들 이름이 나오고, 막부시대는 또 통치하는 장군의 가문에 따라 계속 나뉘고, 심지어 전국시대까지 오면 이른바 ‘군웅할거’라 할 만한 온갖 장수들이 떼지어 나오니, 어떤 시대든 익숙하지 않은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인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고 수많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무시하기엔, 유력가문(?)의 이름들은 알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데(정확히는 정치사) 매우 수월해진다. 결국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역사는 한국 역사와 겹쳐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정유재란)’, ‘메이지유신 이후(일제강점기)’ 정도랄까?

하지만!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정말 1도 어렵지 않다. 진짜로 이 책 안에는 어려운 일본 역사는 1도 없다. 어려운 전국시대 장수들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간혹 내용에 따라 샘플로 몇몇 가문들이나 장수의 이름이 나오긴 함), 그렇다고 일본의 정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이 있는 역사책이냐!!!! 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거고, 대체 어떤 역사를 알려주려고 하는 거냐!!!!

자자자. 결론부터 말하면 역사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에도시대’의 사회상(생활상)을 이야기한다고 보면 된다. 당시의 사회상(?)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여튼 에도시대를 살던 일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정치권력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은 일본 역사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들의 삶과, 당시 사회의 풍속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게 진짜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다.



예컨데,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 일부를 보면 이렇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 까지 육식을 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의 사실은 원래 이거다! 라던가, 지금도 유명한 일본의 ‘노포‘ 의 비하인드 같은! 주제만 봐도 궁금하기 그지 없는 내용들이지 않은까?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데, 이 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데 ‘에도시대는 신분에 따라 똥값(?)이 차등으로 매겼다’라던가, 에도에 첫 발을 디진 촌놈 사무라이는 어떤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라던가,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나오던 ‘도장깨기’의 본 모습은 이렇다! 같은! 정말로 이 책은 재미와 흥미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잡은 일본 역사책이다.

물론 역사 하면 제일 중요하다고 치부되는건 정치사이긴 하다. 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 건 잔잔하게 살아온 피지배계급의 삶이니까. 그렇기에 난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를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유튜브도 추...천...하고 ㅋㅋㅋㅋ

에도시대 분뇨 가치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매겨졌다?

10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한 에도. 인구가 많은 만큼 분뇨의 양 역시 분명 많았을 것이다. 에도시대보다 이삼백년의 시간이 흐른 개화기 시절, 조선의 경성만 해도 길가에 오물이 넘쳐났고, 가는 길마다 오물의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보다도 과거인 에도였으니, 상황이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었는데 왠걸? 에도의 분뇨처리 방법은 생각보다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근세 일본의 수도인 거대 도시 에도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100만에 달하는 거대 인구가 먹고 배출하는 분뇨량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1인 당 연간 분뇨 배출량을  500kg정도로 가정하면 에도 전체에서 배출되는 분뇨량을 대략 연간 50만 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p 074

100만 명의 대도시 에도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 수급을 위해 에도 외곽지역은 농경지가 발달하게 됩니다. 에도에서 연간 50만 톤 정도씩 쏟아져 나오는 분뇨는 에도 외곽 지역 농경지에서 퇴비로 활용되었고 농경지에서 생산된 각종 곡물과 채소는 다시 에도로 공급되는 자원의 리사이클링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p 075

요즘 전 세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친환경!!! 에도의 분뇨처리 과정이 바로 이 친환경에 걸맞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에도에서 나온 분뇨들을 모아서 외곽의 농경지로 보내고, 거기서 퇴비로 사용하고, 농경지에서 나온 생산물은 다시 에도로 들어와서 에도에 사는 일본인 입으로 냠냠냠. 

여기서 밑줄 쫙! 해야할 포인트가 있으니, 분뇨의 처리 가격이다. 현대인들은 분뇨, 그러니까 정화조를 깨끗히 해주는 대신 그에 대한 비용을 업체에 지불한다. 하지만 에도는 그 반대! 자신의 분뇨를 농민에게 파는(?) 개념이었다. 아무리 똥,오줌이라도 내가 만든거니(..) 내꺼니까, 내꺼 주는 대신 돈을 받는다고나 할까. 크흡.

다이묘 또는 사무라이들의 저택에서 일반 서민들의 공동주택에 이르기까지 분뇨통이 설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장소는 에도 외곽 지역 농가와 직간접적으로 분뇨 처리권에 대한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 에도에서는 정화조를 청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필수적인 퇴비를 구입해가는 개념으로 분뇨 처리 과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뇨 구입 비용을 돈으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분뇨 구매 당사자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밭에서 생산되는 무 또는 가지 등의 농산물을 물물교환 형태로 지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p 076

근데 또 그 분뇨 가격이 신분마다 차등으로 결정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부자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비싸고, 가난한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저렴하고. 똥까지 등급을 매겨야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이게 은근 과학적인 분류란다. 부자집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기에, 분뇨가 퇴비로써도 제격인 반면, 가난한 집은 먹는게 거기서 거기니까. 슬프면서도 웃긴 이야기^_T.

다이묘 저택, 막부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 저택 또는 거상 집에서 나온 분뇨가 상급에 속해 있었고 일반 사무라이 저택 또는 서민 집에서 나온 분뇨가 중급, 빈민들이 많이 사는 공통주택 「나가야」에서 나온 분뇨가 하급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 신분과 경제력이 높을수록 분뇨 등급을 높게 쳐 준 품질 분류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이라기보다는 농민들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확한 해석이었습니다. 곡물과 채소 외에도 닭고기 어패류 등 높은 영양가를 가진 음식을 먹은 후 배출한 분변에는 질소가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퇴비로써 효율이 높았던 반면 곡물과 채식 위주의 음식 밖에 먹지 못했던 서민들의 분변은 영양소가 낮았기 때문에 퇴비로써의 가치 또한 낮게 책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p 077

일본은 1,200년간 육식 금지? 육식을 대하는 이중 태도

일본이 오랜기간 육식을 금지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던 내용이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서양’을 표방하며 서양인 따라잡기를 위해 육식 섭취를 적극 권장했다나 뭐라나.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육고기를 못먹어서 그렇게 왜소한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왠걸? 이것도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야기였다. 음 아니지, 전부 틀린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모몬지야]는 에도시대 당시 에도 근교 농촌에서 농민들이 수렵 활동을 통해 사냥한 멧돼지 또는 사슴 등의 고기를 받아 에도 시내에서 고기를 판매하던 정육점을 지칭합니다. 육식을 기피하던 사회 풍조 때문에 고기 섭취를 「보약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 역시 에도시대 일본 사회의 「타테마에」와 「혼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p 122

일단 기본적으로 에도시대에는 정육점이 있었다.

일본 불교와 신도의 영향으로 인해 육고기 섭취를 기피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육고기를 섭취했다. 심지어 ‘보양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서기 675년 「테누 텐노」에 의해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육식 금지령이 발령됩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소와 말을 죽여 식용으로 사용하거나 판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시 엄벌에 처한다.’라는 표고령을 내렸고, 에도시대가 시작된 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시 ‘소와 말을 죽이면 안되며 자연사한 소와 말이라고 할지라도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살생 금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바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책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츠나요시는 1682년경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라는 규정을 포고하는데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가엽게 여겨야 한다는 「살생 금지령」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에 의해서 개, 고양이, 새, 어패류, 곤충 등이 「살생 금지령」 범위 안에 포함되다보니 채소와 과일을 제외하고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p 125

1709년 1월 10일 5대 쇼군 츠나요시가 세상을 떠났고 츠나요시 사망 후 불과 열흘이 지난 1월 20일 약 30년 가까지 지속되어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 넣었던 살생금지령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는 결국 해지됩니다. p 127

실제로는 다양한 야생 동물 고기가 에도 시내에 유통되고 있었으며,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소, 말 등의 가축보다는 사냥을 통해 획득한 야생 동물 고기 위주로 버젓이 고기가 팔리고 있었습니다. (…) 사슴고기는 「모미지(단풍)」이라고 불렀습니다. 화투를 보면 단풍나무에 사슴이 그려져 있는 패가 있는데, 사슴 고기를 「단풍」으로 부르게 된 것은 화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닭고기는 「카시와(떡갈나무)」라고 불렀는데, 떡갈나무 잎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홍색 또는 갈색으로 변색되면서 닭고기 색과 비슷해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고기는 「사쿠라(벚꽃)」이라는 은어를 사용했는데, 신선한 말고기 색깔이 벚꽃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탄(모란)」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되었던 멧돼지 고기는 모란 색깔과 비슷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p 129 ~ 130

물론 일본의 역사 속에서 몇 번의 육식 금지령이 있긴 했으나, 최초의 육식 금지령은 당시에도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그 이후의 육식 금지령 때도 육식을 하면서 쉬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에도 막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의 육식 금지령은 아주 살벌했기에, 한 번만 걸려도 거의 사형!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츠나요시 때만 아주 강력하게 육식금지령이 시행되다가, 츠나요시 사후 아주 스피드하게 사라진 법이 되었다.

물론 그 때도 불교와 신도의 영향 아래 육식기피 분위기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대놓고 먹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고. 뒤로는 왕왕 먹었다며. 하지만 대놓고 육고기 이름을 부르긴 뭐하니까, 은어로 부르면서 말이다. 진짜 사슴고기를 단풍이라고 부르는 것에 빵 터졌네.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육식 금지문화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근거를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육식 금지가 최초로 발령된 서기 675년부터 공식적으로 육식 금지가 폐지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년의 기간동안 일본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가 육식을 한 경우 당사자들을 엄벌에 처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두 내용에 대한 명확한 시대적, 문화적 구분이 없다보니 『1,200여 년의 육식 금지 기간 동안 육식을 하다가 적발될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라는 형태의 사실 관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p 127

확실히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배울 때는 저자의 말 처럼 ‘일본에 대한 당위성과 명분’을 기본적인 틀로 잡고 배우다보니, 그 속에 어떤 삶이 있는지, 정말 우리가 배운 일본이 제대로 배운게 맞는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위 ‘일본인은 오랫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처럼. 거기다 일본 역사를 알거나 공부함에 있어서, 위와 같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틀로 인해 제대로 된 공부가 어려운 것도 있고.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잠시 뒤로하고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근세 일본을 살았던 소시민들 삶이나,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일본인의 이미지는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일어난 ‘왜곡’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건 우리 같은 소시민의 소소한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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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유럽예술문화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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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책 『TAKEOUT 유럽예술문화』는 조금 독특한 책이다. 물론 내 기준에서, 좋은 의미로다가 하는 말이다. 


왜? 이런 류의 인문역사예술이 복합적인 책은 처음 읽어보거든!! 새롭고 짜릿해!!!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가 가미된 여러 종류의 책들을 많이 읽어봤다. 예전엔 ‘거시사’를 주로 읽었다면, 한 5년 전 부터는 ‘미시사’도 즐겨 읽게 되었다. ‘미시사’ 를 자주 읽다보니, 의도치않게 미술의 역사라던가 의학의 역사, 여성 인권의 역사 등 예술과 문화같은 세부적인 분야에 대한 내용도 꽤나 많이 알게 되었다. 다만 이런 내용들을 어떠한 한 책에서 읽은 게 아니라, 이 책에서 읽고, 저 책에서 읽고, 요 책에서 읽는 등 정말 수 많은 책을 읽으며 알게된 예술문화 지식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책 『TAKEOUT 유럽예술문화』는 내가 수 많은 책들에서 조금씩 알게된 내용들을 한 권에 아주 가득가득 담아내었다. 음악, 미술, 문학, 건축 등 ‘예술’이라고 칭하는 모든 분야들을 갈고리로 아주 작은 것 까지 긁어모은 것마냥 전부! 이렇게 보면 모든 예술작품을 총 망라한 문화 인문학책 같다. 헌데 이 책이 정말 신기한 게, 어려운 기존의 인문학책과는 달리 쉽다. 정말 매우 쉽다. 읽는 대로 쏙쏙 뇌에 박히는 기분? 그래서 그런가? 저자는 이 책을 ‘인문교양에세이’라고 칭했다. 



예술에 대해선 1도 몰라서 예술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싶은데, 기존의 예술문화 책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왜? 라파엘전파?


주류 회화 사조를 이끈 대륙의 프랑스에서 19세기 중반 사실주의가 성행할 시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라파엘전파라는 일단의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라파엘로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르네상스의 대가들 중 라파엘로를 호출하여 전면에 내세웠을까요? p 103



그런데 같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인이라도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 비해 라파엘로는 좀 처지는 감이 있습니다. 3인방에서 더 좁게 들어가 르네상스의 쌍벽이라 하면 그를 제외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를 가리키기도 하니 말입니다. (…) 라파엘로의 경우는 후대의 평가도 그렇지만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공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걸출한 역량을 보였기에 그렇게 평가되는 것도 있으리라 보여집니다. 그런데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피렌체를 중심으로 공유했던 이들 3인의 생전엔 라파엘로의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말입니다. p 107



사실 그들은 라파엘로 한 사람만을 호출해 예술의 시계를 그 이전으로 돌리자는 형제회를 조직했지만 실상은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물론 위에서 열거한 모든 르네상스 화가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새로운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중세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 구현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는 중세의 예술이 그 대상이 인간이든 자연이든 그것들을 가장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p 108



생각해보면 그렇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2인을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아주 자연스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라파엘로도 분명하게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인건 맞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르네상스 ‘대표주자’ 라는 키워드로 당대의 화가들을 떠올리자면, 유독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만 떠오른달까? 아마도..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않을까 싶다.



하지만 19세기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21세기를 사는 나와 달랐나보다. 그들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켈란젤로나 다빈치가 아닌, ‘라파엘로’를 선택했으니까. 왜? 놀랍게도 르네상스 당대에는 라파엘로가 대중적으로 제일 인기가 많았다며...!



당대에 제일 인기많고 유명했던 ‘라파엘로’의 이름을 빌려서, 주목을 받으려고 했다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인건가 싶음!




 



그런데 왜 그들의 사조를 라파엘전파라 불렀을까요? 정확한 저의 의문은 미켈란젤로도 있고 다빈치도 있는데 왜 하필 그중에서 라파엘로만을 콕 집어서 그렇게 희생양의 간판으로 내세웠냐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전파, 다빈치전파 등 이런식으로 그들을 호출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의문의 1패입니다. 더구나 라파엘로 그는 그들 중 막내로 태어났고 그들과는 달리 37세에 죽음으로써 가장 먼저 죽은 애처로운 천재였는데 말입니다. (…) 지금부터는 저의 추측입니다. 일단 저는 라파엘로의 외모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초상화입니다. 그의 외모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와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서구 역사상의 예술가라면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근엄한 얼굴에 긴 수염등으로 아우라가 및나는 그런 얼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얼굴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얼굴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혼으로 살다 노총각인 37세이 죽었으니 그 전 모습일텐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너무나도 매끄럽고 핸섬한 외모입니다. 마치 요즘 시대 우리나라 아이돌 뺨치는 외모입니다. p 118~119



1520년 37세의 라파엘로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바티칸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는 신께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를 지상에 잠깐 내려보냈다가 데려가셨다고 할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라파엘로였습니다. p 121





저자의 주관적인 추측이기도 하지만, 왠지 내가 봐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초상화를 나열해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라파엘로를 선택할 것 같다. 라파엘로의 아이돌 버금가는 외모만으로도 확실히 대중적인 인기를 확 끌것같은 느낌? 그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빈치랑 미켈란젤로의 초상은 뭐랄까 너무 근엄해서, 섣불리 다가가기가 어려운 포스가 있으니까. 더군다나 그 두 사람의 초상화는 사실주의 보다는 왠지 거룩하고, 성스러운 종교화에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지만 라파엘로 초상화는 거룩하거나 성스러운건 일단 둘째치고, 잘생겼........ㅋㅋㅋㅋ 흠흠. 무엇보다 다른 미사여구 없이 오롯이 얼굴만 보이는게 그나마 사실주의와 어울리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뭐, 예술은 주관적인거니까?!



니체와 19세기 유럽의 여성


“남자의 행복은 Ich will, 여자의 행복은 Er will”

“남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페르시아의 현자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남녀의 행복에 대해 독일어로 한 말입니다. (…) 이 때 남자의 행복은 별 이견이 없지만 여자의 행복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의 경우 배우자인 그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는 것만이 행복이라면, 그 안에 여자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그녀의 그가 행복해야 나인 그녀도 행ㅂ고하고, 그가 불행하면 그녀인 나도 불행하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마치 유교가 지배하던 우리 이조시대 여인의 삼종지도를 연상하게 하는 니체의 글입니다. 그럼 결혼하지 않았거나 남친이 없는 여자의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니체의 말대로라면 무조건 불행해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p 173~175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엔 여성이라면 읽기 힘든 심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여자는 남자의 장난감이며, 마음의 깊이가 얕고, 잘 변하며, 여자에 있어서 남자의 목적은 임신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자는 여자를 찾아갈 때 채찍이나 회초리를 잊지 말라며 이것은 진리라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19세기 만의 진리겠지요. p 175



니체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그 제목은 알고 있었으나, 솔직히 읽어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내용도 몰랐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니체의 가치관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게 함정이다.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요약이 아닌, 책을 쓴 19세기의 지성인 니체의 가치관 말이다.




저는 지금 이 책의 뒤편에 있는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를 쓰면서 구상한 내용을 이렇게 연동해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그렇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저항하며 힘들게 살았는데 정작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반대편 남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지성남이기에 충분히 대표성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말이 굳어진 글을 통해 보면 그의 여성관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결과는 위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시다시피 거기에 답이 원히 나와 있습니다. p 176



물론 니체는 뛰어난 천재이고 난해한 철학자이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그의 여성에 대한 서술 중 범부인 제가 이해 못하는 많은 비유와 상징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평생의 연인인 루 살로메에게 차이자마자 채 한 달도 안 걸려 쓰인 책으로 알려졌듯이 여성에 대한 그의 적대적인 반감이 배가 되어 표출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녀에게 절절맸음에도 괜히 센 척하려고 그의 작품에선 여성을 그렇게 비하하며 표현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p 177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니체의 가치고나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심각하게 찌질하고, 편협적이라는게 참으로 경악스럽다. 더 슬픈건 당대 최고의 지성인의 가치관이 이정도이니, 그 시절의 평범한 남성들은 어땠을지라는 것. 중세유럽의 여성은 인권은 바닥이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일컫는 사람의 눈으로 보니 더욱 와 닿는다.



이렇게 여성이 차별받았던 19세기 였음에도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여성들은 그 자체로 매우 위대하다 할 것입니다. 사고와 연구를 통해 결과물을 산출하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영역은 여성들에게 막혀있던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낸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녀들의 온전한 이름으로 표현된 예술과 문학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21세기인 오늘날까지 니체가 살아있다면 그는 여자의 행복을 무엇이라고 정의할까요? 또 짜라투스트라에게 떠밀려나요? p 179



그럼에도 당대의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려고 발버둥을 쳤으니, 그 내용이 바로 아래의 내용이다!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


이름 없는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그렇습니다. 물질과 인간을 혁명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끝난 19세기에 들어서도 그 안에 여자는 없었습니다. 정확히 여성은 그녀의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일련의 여성들이 그간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금단의 영역인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p 381



중세 유럽은 여성들의 인권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동양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뭐.. 여튼지간에!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자유와 평등, 박애를 주장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지난 뒤에도 여성의 인권은 역시나 바닥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여성들이 작곡을 했다는게 넘나 놀라운 이야기! 그동안 내가 읽었던 역사책에는 음악 관련 이야기는 많지 않았던터라, 정말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었다.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 그들은 한 형제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설을 쓴 유명 작가들입니다. 그 3형제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1847년 같은 해에 그 작품들을 출간하였습니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어 …. 그 작품들의 작가가 남자?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초판 출간 시 그 작가들은 남자였습니다. 남자 필명을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앤 브론테 이 세 자매는 왜 남자 이름으로 책을 내었을까요? p 382



맏언니 샬롯 브론테는 자매들이 쓴 시를 모아 당대의 유명 작가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돌아온 응답은 “문학은 여자의 일이 아니며, 여자는 작가가 되고파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황당한 평가였습니다. 작품의 질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성을 평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고육지책으로 필명을 남자로 바꾸는 도발을 감행하며 이후 각자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p 383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등이 구체제라 불린 기존의 사회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면 변화시켜 19세기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혼란은 당연하였습니다. 남녀 문제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남성은 기득권을 상징하며, 여성은 남성에 맞서는 도전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해도, 근대화가 되어도 그 안에 여성들은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이 말은 해리엇 마티노라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이자 사회학자가 당시 유럽 지식인 여성의 현주소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여왕이었는데 말입니다. p 385



놀랄 ‘노’짜는 책을 읽는 내 지속되었다. 고전문학 중의 고전문학이라 일컫는 고전문학 탑티어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초판 발간 당시에는 오우!! 남자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었다니!!!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야 이해할 수 없을 노릇이지만, 당시의 여성 인권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직업을 금지당한 여성들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절대 이룰 수 없는 직업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를 비웃 듯, 남자의 이름을 써서 책을 출간한 브론테 자매를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브론테 자매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지만, 그러지 못한 여성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녀들이 쓴 명작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지구에 인류가 살기 시작할 당시에는 분명 모계사회였다. 이건 역사적으로도 명확한 사실. 그러다 잉여재산이 생겨나고, 계급이 생겨나면서 모계사회에서 점차 부계사회로 이동하였다. 문제는 이 이후다. 부계사회로 변화된 건 이해하겠는데, 어찌하여 여성의 인권이 나락으로 떨어져야했던걸까? 마음에 안들면 여성을 언제든지 마녀사냥으로 죽일 만큼, 여성의 인권이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했던 이유가 있던걸까? 참으로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혁명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그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참여한 여성 중 올랭프 드 구주가 가장 크게 분개하여 여성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녀가 싸워야 할 적이 베르사유 왕궁의 왕족와 귀족에서 혁명 정부의 남자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했던 권리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가능한 참정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1793년 단두대에 올라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p 385



그런데 이런 19세기 였음에도 음악은 좀 달랐나봅니다. 남성의 전유물인 정치와 지적 요소가 투입되는 문학과는 다르게 여성의 영역으로 본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남성들의 눈에 긴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여식의 모습과 피아노의자에 앉아 연주를 하는 모습은 동일하게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업 연주까지는 여전히 힘든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누나도 성인이 되어서는 음악교사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여성은 거기까지였습니다. p 389



하지만 남성들이 아무리 견고하게 방해해도 이렇게 음악적인 재능과 흥미로 분출되는 창작 욕구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들은 문학계의 여성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녀들이 작곡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초기에 동생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그녀의 곡들을 발표했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남편인 로버트 슈만과 공동 명의로 작품을 발표해 어느 작품이 그녀의 작품인지 알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녀들의 별난 노력까지 더해졌기에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여성 작곡가들의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여성들이 작곡한 악보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버려졌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지금도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p 391



그럼에도 다행인건 여성의 인권이 억압되는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그 부조리함을 이겨내고자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왔다. 누군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세상 밖에 내놓기 위해 남성 가족의 명의를 빌리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여성의 인권을 위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21세기를 사는 나를 비롯한 여성들은, 그녀들이 살던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유럽의 예술문화의 뒷 이야기가 내 머리속으로 콕콕콕 들어박히는 것이, 이 책.... 확실히 물건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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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 답사 일지 - 배움을 찾아 떠난 국문학자의 여행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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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다 알듯,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한다. 조금 더 세분화한다면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보다는, 어떠한 ‘장소’에서 의미를 찾은 여행을 좋아한다. 이른바 답사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그런가, 언제나 내 여행 속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장소들이 많았다. 아니, 대부분이 그런 여행지였다. 




답사를 위한 여행은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여행을 가기 전에 그 장소에 대한 배경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비로소 그 장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런 배경지식을 위해 여러 책들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 리뷰하는 『나의 문학 답사 일지』라는 책 역시 답사 여행에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서울대 교수이자 국문학자인 정병설 교수다보니, 이 책의 메인은 기본적으로 문학을 기반으로 한 국내 답사 여행책이다. 하지만 그 문학이라는 것이 쓰일 당시의 정세나 사회적 배경이 녹아들어가있고, 당시에 있었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도 버무려있으니, 이보다 더한 인문학책이 또 어디있을까? 국내 여행책으로도, 인문학책으로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답사 여행책은 총 9곳의 국내 답사지를 소개한다(물론 중간중간에 해외 답사지도 있긴 하다). 


1. 남원, 소설의 고향

2. 군산, 강과 바다의 만남

3. 옛 서울 나들이

4. 궁궐산책

5. 천주교 순교자를 찾아서, 전주에서 나가사키까지

6. 노근리 평화공원의 장미

7. 동학 기행, 인간이 하늘인 세상

8. 안동 답답이들의 고을

9.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하동과 광양




의도하진 않았는데, 내가 답사를 다녔던 지역과 겹치는 곳이 꽤 있었다. 첫 번째 지역인 남원부터 말이다. 남원, 군산, 서울 (궁궐 포함), 전주 등등. 안 가본 곳을 꼽는게 더 빠를듯한?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이 몇 년 만 더 빨리 출간되었다면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건, 역사유적지 등에 기반한 답사를 해왔던 터라, 문학을 기반으로한 답사여행이 정말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분명 내가 답사를 갔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소로 느껴졌다. 그것도 첫 챕터인 남원 편에서부터.



남원은 한국소설의 고향 같은 곳이다. 소설사에서 한국 최초의 소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린 가장 흥미로운 단편이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이고, 한국고전문학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춘향전』 역시 그렇다. 최초와 최고의 소설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한다. 이 밖에 최근 고등학교에서 많이 읽히는 「최척전」의 주 배경 역시 남원이다. 대표적인 고전소설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p 027



황산대첩비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동편제 판소리의 길을 연 송흥록은 귀곡성으로 유명한데 그가 비전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수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영혼이 떠도는 산 아래 시냇가 마을에서 음혼과 함께 살아왔으니 그에겐 귀신 울음소리가 낯설지 않았으리라. p 033



내가 남원을 갔을 땐 임진-정유재란에 초점을 맞췄고, 문학적인 부분에서는 『춘향전』의 배경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남원은 문학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지역이었다니! 그저 설화로만 알고 있었던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이라는 것도, 「만복사저포기」가 쓰인 배경이 고려말 무인 이성계와 이지란이 앞장 섰던 황산대첩이었다는 것도, 황산대첩에서 만복사저포기를 지나 그 연속 선상에 귀곡성으로 유명한 명창이 태어난 비전마을이 남원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가 남원에 갔을 땐 오롯이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만 하나에만 초점을 맞췄었는데, 시야를 문학적으로 넓히니 새로운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것이다. 이제와 말하지만 황산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지역이 현재 남원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이제서야 인지했다. 그니까 난..남원을 오롯이 임진-정유재란 딱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봤던 것이다.




남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정유재란 때의 남원성 함락이다. 1597년 8월 16일 오만 육천 명의 일본 주력군을 상대한 사천 명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총공세에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성민 육천 명과 함께 몰살되고 말았다. 지금 남아있는 ‘만인의총’은 칠천 명 조선인과 삼천 명 중국인의 합묘다. (…) 후대인은 전몰한 사람들을 기려 충렬사라는 사당을 지었고 그들의 무덤을 의총으로 높였지만 그런 방식이 피해자들을 진정 영광스럽게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진정 인간적으로 대접하려는 뜻이 읽히지 않고 처참한 죽음을 국가주의의 충성관 아래에 두려는 뜻이 보이기 때문이다. p 036



「최척전」은 전쟁의 참상을 다루지만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충성이나 애국심을 말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최척은 의병으로 나서나 이는 자의가 아니었고 모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최척은 또한 정유재란 때 남원의 군민들과 함꼐 남원성에 들어가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고 피란을 갔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옥영을 끌고 간 일본인 돈우는 조선인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상하게 돌봐주었고, 여유문과 주우는 낯선 나라의 이방인 최척을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잘 도와주었다. (…) 이처럼 「최척전」은 전쟁을 유발한 권력자의 명분을 따라 적대하고 공격하기보다 인간적 우호에 따라 서로 돕고 연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p 042



요즘 한국전쟁 관련 책을 읽고, 국가에서 강요아닌 강요로 세뇌시킨 ’호국전쟁’ 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비단 한국전쟁에 국한된 것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남원 답사 당시 보고 왔던 ‘만인의총’. 남원에서는 호국과 애국의 대명사인 만인의총이 진정, 당시에 죽어간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이 맞는지도 다시끔 생각해보게되었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헌 까지만해도 ‘만인의총’이라는 단어가 확인되지 았는다고 하니, 더더욱.



우리나라는 전쟁이라는 단어에 유독 충성, 호국, 애국의 개념을 세뇌시킨 편이다. 그러다보니 전쟁이라는 단어 안에는 숨어있는 또 다른 개념인 민간인들의 피해나 학살, 국가의 잘못 등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은 편이랄까? 그래서 어떤 피해자들의 죽음은 충성과 애국으로 포장되어 대내외적 선전용으로 전락하고, 또 어떤 피해자들의 죽음은 비난을 받는다. 만인의총은 대체적으로 전자에 해당되는 느낌이랄까.



흥미롭게도 판소리 중 『춘향전』만 배경이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다. 『흥부전』이나 『심청전』 등 여타 판소리 작품들은 이본에 따라 공간 배경이 여러곳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춘향전』만큼은 작품 배경이 남원 외 다른 지역인 이본이 없다. 실제 어떤 모델이 되는 특정한 사건이 남원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남원이 아니고서는 작품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살리기 어려워서 그런것 아닐까 싶다. p 048



남원에서는 춘향 사당을 만들고 춘향 영정을 그리며 춘향제라는 축제를 열었따. 또 춘향의 성을 성씨라고 밝힌 이본에 따라 성씨 성을 가진 부사를 아버지로 찾아주기도 했다. 춘향의 성이 보이지 않는 이본도 있고 안씨나 김씨로 나오는 이본도 있는데 굳이 성씨를 고집하여 남원부사 성안의를 춘향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선정비를 찾아 광한루 경내에 세운 것이다. 심지어 광한루 구역을 벗어나 지리산 구룡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춘향의 무덤까지 조성해두었다. 1962년 남원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 ‘성옥녀지묘’라는 지석을 발견하자, 이를 춘향의 묏자리로 간주하고 ‘성춘향지묘’라는 이름을 붙이고 봉분을 씌웠다. p 049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 광한루는 『춘향전』을 빼면 섭하다. 나 역시 『춘향전』을 생각하고 광한루에 갔던거기도 하고. 가서 느낀건 남원이 관광자원으로써 춘향이를 잘 살렸구나 싶었다. 다만, 남원이 춘향이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왜곡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예컨데 문학작품 속 주인공을 실존인물로 되살린 점이라던가, 뚜렷한 증거 없이 실존인물을 춘향이의 부모로 둔갑시키고, 역시나 뚜렷한 연구도 없이 춘향이의 묏자리를 만든것도.



이는 비단 남원만의 일은 아니다. 어떤 지자체든 역사적 인물에 대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건 최대한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왜곡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러 지역에서 역사 왜곡을 마주한 적도 있고. 과연 관광자원 개발에 따른 역사왜곡 허용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번엔 노근리 평화공원에 대한 이야기다. ‘노근리’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라 알고는 있었는데, 그곳이 충청북도 영동에 이위치한 곳이라고는 이번에 이 문학답사 여행책을 읽으며 처음알았다. 수없이 국내여행을 다니면서 충청도 지역도 거의 다 보고 왔음에도, 영동 만큼은 볼게 없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도시이기에 스스로에게 무안했달까.



잘 생각해보면 노근리 학살사건은 내가 학교다닐 당시에는 배우지 못했던 이야기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일어났던 ‘미군범죄’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민간인 학살사건이지만, 적어도 내 학창시절에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럼 어떻게 알게되었느냐? 훗날 성인이 되어서 관객이 몇 없던 영화 『작은연못』을 보면서 알게된 내용이었다. 당시 받은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내가 배웠던 한국전쟁은 ‘호국전쟁’이었고 미군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쳐 싸워준 동맹국이었으니까.



그런 한국전쟁 안에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수없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뭐, 조선사도 다름없긴 하지만). 뭐,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학교에서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가르치고, 여러 TV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이런 부분에 대해 방송하기도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물론 사람들이 자주 안보는 교양/다큐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그해 초 부모님 댁에 갔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6.25전쟁 경험담이었다. (…) 외할머니는 그날 산청에서 진주로 피란 짐을 싣고 트럭을 타고 오시다가 진주 부근에서 길이 막혀 짐을 트럭기사에게 맡기고 차에서 내려 걸어오셨다. 그때 멀리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더니 산에 흰 빛이 가득 찼다. 흰옷 입은 민간인들이 사살당해 시신이 널린 모습이 멀리서 그리 보였단다. 외할머니는 집으로 오자마자 외할아버지의 소재를 물었고 집에 계신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구한 이야기의 전후를 조합해 추리해보니 외할아버지가 진주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될 뻔했구나 싶었다. p 184



전쟁 직전에 좌우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좌익 혐의점이 있는 요주의 인물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가입시켜놓고 관리했는데, 전쟁이 발발해 전황이 불리해지자 위험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듯 이들을 ‘멸절’시키려고 했다. ‘사상검사’ 오제도가 국민보도 연맹 조직의 실무를 맡았는데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농부들에게 비료 등을 나누어주며 가입을 권유해 회원 수를 늘렸다고 한다. 이렇게 가입한 인원이 수십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초 의도한 좌익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학살한 것이다. p 184



6.25전쟁 시기 우리 고향에서 일어난 학살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국군이 후퇴할 때 대전 등지에서 교도소 수감자 천 명 이상을 대규모로 학살한 일이 있고, 1951년 1.4후퇴 때 전쟁에 동원한 보충대 천여명을 굶겨 죽이고 얼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도 있었다. 1950년 당시 16세로 고향 함양에 계셨던 아버지는 간간이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올라간 작은할아버지 뒷수발을 드셨다고 하니, 함양, 산청, 거창의 학살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자세히 말씀하시기보다는 학살로 인해 제삿날이 한날인 동네가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하셨다. p 185



그래도 즉시 거창 출신의 용감한 국회의원 신중목의 폭로로 외부에 알려저 국회에서 직접 조사까지 했다. 그런데 그 깊은 골짜기로 들어오는 조사단을 국군이 빨치산으로 위장해 총질을 했다. 국회의 조사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할 정도로 학살 집단의 소행은 대담했다. 이런 사실까지 밝혀지며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하자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는데 결국 처벌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조직적으로 전국에서 살인 범죄를 진행한 이승만 정권의 만행 중 일부였으니 그들이 스스로를 처벌할 리 없었다. p 188



저자는 노근리 평화공원 답사를 이야기하면서, 본인의 부모님이 겪으셨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것이 저자의 부친은 함양, 모친은 산청이 고향. 즉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이른바 거창·함양·산청 양민학살이라고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은 정부가 일부 국민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시키면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미국이 점령한 남한과 소련이 점령한 북한으로 나뉘어 극심한 사상대립이 있었고, 그 결과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후 남한에서는 좌익사상을 가진 국민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가입시켰는데, 흔히 말하는 나랏님들의 실적을 부풀리기 위하여 좌익사상이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까지도 대거 가입시켰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민들의 ‘자발’적인 가입이긴 했다. 나랏님들이 이 단체에 가입하고 이름만 올리면 쌀도 주고 비료도 준다고 하는데, 가입안 할 농민들이 어디있겠나? 그 결과 어떤 마을은 마을 구성원 통채로 국민보도연맹원이 되기도 하고 뭐 그런 상황이었다.



이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 정부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는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을 지시한다. 혹시나 그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진짜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사상은 1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정말로 아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정말 좌익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면, 당대에 책을 꽤나 읽은 엘리트라는 것인데 그들이 바보천치가 아닌이상에야 스스로를 옭아맬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까? 스스로 북으로 올라갔거나(당시만해도 교류가 쉬웠으니), 아니면 스스로를 숨기고 살았겠지. 이 말은 즉,  대다수의 국민보도연맹원은 사상은 1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함정 하나. 한반도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온리 농업국가였으니, 당시의 농민이란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시작으로, 이제는 보도연맹을 떠나서 마을 단위, 읍 단위, 면 단위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혹시나 북한군이 들어왔을때,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하면서 말이다. 심지어는 국군들이 북한군 또는 빨치산으로 위장까지하면서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정작 이 나라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자신이 자택에서 사용하던 집기류까지 싸그리 들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면서 말이다.



사건 발생 10년 후 4.19혁명으로 비로소 유족회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에 나섰으나 5.16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 회장을 형장에 보내버렸다. 학살 가담자들이 경찰에 군대에 권력 요로에 있는 상황이었다. 학살 피해자와 유족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닌 빨갱이가 되어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도 하지 못했으니 피해 사실을 가슴 깊숙한 곳에 박아놓고 다시는 꺼내지 못했다. p 190



1950년 7월 남쪽으로 가던 피란민들을 후퇴하던 미군들이 기관총으로 사격해 이삼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란민 가운데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병력이 있다는 그릇된 정보를 믿고 그랬다지만, 아이들을 포함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학살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묻는 일이 적지 않다. 그 출발은 대게 제주 4.3사건에서 찾는다. 미국이 지휘하고 한국이 실행한 이 사건은 뒤에 이어질 수많은 학살의 전조였다. 다만 노근리 사건을 공부하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가해 미군 중에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백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단 한명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p 194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국전쟁이 끝나고, 학살의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빨갱이로 몰리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왜? 학살의 가해자들은 권력자들이었으니까. 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일본 경찰 요직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패망했으나, 미국이 그들을 다시 요직에 앉치고 권력을 주었다. 무엇보다 학살의 가해자이자 최고 책임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었다. 



4.19혁명으로 인해 이승만이 쫓겨나다시피 국내를 떠나며, 다시 진상규명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들은 또 다시 빨갱이로 몰리고, 또 다시 침묵을 강요당했다. 5.16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필두로 남한에선 꽤나 오랫동안 군부독재가 이어졌고, 그들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렇게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던 가해자들은 호국선열이 되어 현충원에 묻히거나, 그들의 무덤이 성지가 되는 등 이 땅, 대한민국에서 충성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에 학살된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국민을 지켜야할 나라의 수장이 지시하고, 국민을 지켜야할 국군과 경찰들이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졌던 민간인 학살사건이 ‘문학’을 방패삼아, 사람들의 기억속에 하나, 둘 자리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은 함양, 산청, 거창 사건의 참혹함을 되새기며 ‘차라리 개를 배우자’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팔순이 넘은 노인들을 비롯해서 주로 부녀자, 어린애, 젖먹이들까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서 한꺼번에 사오백 명 내지 칠팔백 명씩 피란이다 시국강연이다 해서 몰고 나와 총화와 휘발유로써 쏘아 죽이고 태워 죽였던 것이다. 동족이라 믿었기에 ‘설마’ 하고 끌려나왔으나 어느 이민족도 일찍이 그렇게는 안했던 무차별 사살을 했을 때 그들은 조국을 무어라 부르며 쓰려졌을까?” 라고 말하면서 당시 참혹한 현장의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 p 192



지금까지 학살 만행과 참상을 알리는 데 문학이 큰 역할을 했다. 제주 4.3사건은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이나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와 같은 소설로 알려졌다. 194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상북도 문경의 한 골짜기 마을에 국군이 들이닥쳐 어린이 9명, 여성 44명을 포함해 온 마을 사람 86명을 학살한 문경 사건은 남상순의 『흰 뱀을 찾아서』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거창 학살은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에 그려져 있으며, 피카소가 그림으로 남겼던 황해도 신천의 크고 작은 학살은 황석영의 『손님』으로 되살아났다. p 197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그 중에서 문학작품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으면 정말 손 꼽을 정도로 내가 읽은 문학잠품은 적다. 왜 그렇게 문학은 잘 안 읽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 취향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문학작품은 나에겐 꽤나 ‘모호하게’ 다가오는 글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문학이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문학의 힘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다 건너 섬에 갇혀있던 제주4.3 사건을 육지로 끌어올려 대중이 알 수 있게 한 것도 문학이었고, 한국전쟁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알린 것도 문학이었다. 문학은 침묵의 바다에 가라앉았던 비극을 물 위로 끌어올렸고, 그 비극이 비단 피해자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문학 덕분에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게 되었고, 생존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침묵하지 않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토록 큰 힘을 가진 것이 문학인데, 나는 왜 문학을 등한시 했을까. 지금까지 수없이 문학작품을 읽을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 후회가 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룬 문학작품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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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 큐레이션 - 나를 위한 맞춤 제주 여행지 320
이솔.선장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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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 끝나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휴가 시즌이 온다. 

아직까지도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여행책 『제주 여행 큐레이션』을 소개한다. 



물론 시중에 제주 여행책은 지겹도록 많이 나와있고, 나 역시도 꽤 많은 제주 여행책을 읽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이 책  『제주 여행 큐레이션』은 여행책이라는 한계를 뚫고, 내 여행 지론인 “아는 만큼 보인다” 를 정말 그대로 실행해주는 여행책인 것이다.



제주여행, 아는 만큼 보인다!



제주도를 아무리 많이 놀라갔다 한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본다면 진정한 여행을 즐기지 못한다. 하다못해 제주도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제주의 돌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왜 조성되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 돌담은 그저 흔한 돌담이 아니게 될 것이다. 왜? 옆에 있는 동행자에게 제주 돌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제주의 돌담은 흔한 돌담이 아닌, 또 하나의 여행 추억이 되어있을 테니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돌담을 보고 그저 돌로 쌓은 담으로만 본다면, 제주의 돌담은 추억이고 자시고 그저 돌담일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내가 생각치 못한 여행 추억을 많이 안겨주는 것. 단조로울수 있었던 여행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여주는 것! 그렇기에 아는 것은 중요하다.





▶ 제주 키워드 10선


​1. 화산섬: 제주는 하나의 거대한 화산섬?

2. 오름: 제주에만 있는 ‘오름’. 수십 만년의 세월을 품은 크고 작은 오름이 무려 368개나 된다고?

3. 곶자왈: 곶자왈이란 대체 무엇인가! 

4. 돌담(밭담): 흔히 만날 수 있는 제주의 돌담, 그 시작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5. 돌하르방: 제주 대표 상징물 돌하르방. 알고보니 남태평양 석상문화의 흔적?

6. 제주마: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게 아니야~

7. 잣성: 잣성이라고 들어는 봤는가? 넓디 넒은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졌다는데?

8. 불턱: 불턱은 제주 해녀들이 애환이 스며든 장소라는 거!

9. 용천수: 제주도는 언제나 물이 부족했다!

10. 해녀: 제주하면 해녀!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제주 이야기 


1.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씨: 9월에는 제주로 태풍이 많이 지나가요!

2. 제주의 독특한 창세신화: 자네 설문대할망 이야기 아는가?

3. 제주의 역사: 자네 삼신인이라고 들어봤는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세 명의 신인데 ^^

4. 제주의 전통 음식: 몸국, 각재기국이라고 알간?

5. 외국어 같은 제주어: 제주의 언어는 11세기 이후 고려에서 들어온 중세 한국어의 특징이 많이 남아있다는데?!

6. 제주 전통가옥: 바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의 가옥은 독특한 형태!

7. 제주인만의 ‘괸당’ 문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면 알고 있겠지?

8. ‘신구간’이라는 민간신앙: 제주에는 1만 8천의 신이 있다?!

9. 유네스코 3관왕, 제주 자연: 아유 이건 두 말하면 입아프지!

10. 제주4.3사건: 제주 전역에서 일어난 4.3사건. 절대 잊지 말아야 하고, 언젠가 ‘사건’이 아닌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우리의 역사!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여행책 『제주 여행 큐레이터』 를 읽어보자고요?!




여행책이니만큼 여행 지도는 기본으로 있다는 점!



이 책이 내 맘에 쏙 들었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제주에서 ‘역사’를 찾을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은 제주도 하면 자연경관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제주의 자연경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빼어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다. 정말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모든 역사를 담고있는, 아주 거대한 역사박물관인 것이다.


오죽하면 나도 제주여행을 할 때, 여행의 키워드를 ‘역사’로 잡고 다녔겠는가. 그만큼 제주도는 모든 시간대의 역사를 가득 품고 있다.




아참참. 제일 중요한 걸 놓쳤다. 이 책은 제주 여행을 총 4개의 파트로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4개의 파트도 세부적으로 구분하여 여행지를 정리하였다. 


PART 1 자연

PART 2 공간

PART 3 음식

PART 4 휴식 



​이 책에 실린 제주의 자연, 공간, 음식, 휴식 관련 정보는 어휴. 정말 널리 알리고 싶은데 이거 뭐 방법이 없네? 이 여행책 『제주 여행 큐레이터』를 읽어봐야 이런 내 맴을 알텐데...후후후.


난 그저 이 책을 들고 얼른 뿡뿡이와 제주도 여행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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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이주희 지음 / EBS 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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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아마 꽤 어렸을 때부터 역사책을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처음 역사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눈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역사책 속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했으니까.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있기 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전에는 고려가 있었고, 이 땅에 많은 나라가 세워졌다가 사라진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역사를 테마로 하는 책은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었고, 유적지 답사도 즐겨하게 되고, 역사속에 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누군가 물어보면 즉답할 정도가 된 시점부터 역사책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역사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땅에서 일어난 ‘빛나거나 찬란한’ 역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역사가 삶의 ‘나침반’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찬란한 역사보다는 ‘치욕적이거나, 발칙하거나, 실패한’ 역사를 돌아봐야한다.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빛나거나 찬란했던 역사가 생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 전에 있었던 ‘치욕적이거나 발칙하고, 실패한’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밑거름으로 인해 무언가가 변화되었고, 그 변화로 인해 우리가 아는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 역사는 보지못하고, 찬란한 역사만 보고 그 속에서 안주하게 되면 그 끝은 다시 치욕적이고 실패한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오늘 포스팅하는 이 책 『강제혁신』은 역사의 실패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찬란한 역사를 되찾았던 사례와 되찾은 찬란한 역사에 안주하여 다시 실패하고만 역사를 조명한다. ‘화약혁명’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우리는 국사시간에 19세기는 ‘서세동점’의 시기라고 배운다. ‘서세동점’ 서쪽의 세력이 점점 동쪽으로 밀려와 동쪽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서구세력이 동아시아로 넘어와서, 그 세력권을 넓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러 청나라는 영국에게 속된말로 쥐어터졌다. 일본은 미국에게,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에게 얻어맞았다. 어째서 19세기 동아시아는 서구세력에세 손 쓸 힘도 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바로 ‘화약혁명’에서 찾는다.



서세동점으로부터 불과 3백여년 전만해도 ‘화약’ 사용에 있어서 서양이나 동양이나 비슷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동양이 더 앞질러 있었다. 처음 화약을 발명한 곳은 다름아닌 중국이었고, 화약무기를 처음 만든 곳도 중국이었으니까. 조금 더 들어가면 1405년 명나라 환관 정화의 대원정에서는 정화가 탄 배에 이미 화약무기인 대포가 14개나 있었다. 전국시대로 인해 난세였던 16세기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승총을 보유한 국가였으며,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여러 해전에서 화약무기인 화포를 주력무기로 사용했다.



이토록 동아시아에서도 화약 혁명이 활발하게 일어났었는데, 왜 불과 2~3백 년만에 화약 혁명이 사그라들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물묻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왜 화약혁명이 정체되었는가?

동양의 권력자들은 왜 화약혁명을 지속하지 않았는가?

- 강제혁신 p 166




1. 동아시아, 위기의식을 느끼다 : 화약혁명의 시작


<일본>


1943년, 때는 다이묘들끼리 치고받던 중이던 전국시대. 다네가시마에 중국인들이 탄 배가 표류했다. 그 배안에는 조총이 있었고, 포르투갈인도 있었다. 그렇게 일본에 처음으로 조총이 들어왔다. 일본 대장장이들은 조총을 분해하여 부속품을 본 뜨며,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총 생산의 시작이었다. 이 조총에 눈독을 들이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3인의 천하인’ 중 첫 타자 ‘오다 노부나가’다. 



당시 다이묘들은 본인들의 토지 안에 사는 농민들을 군인으로 동원했다. 물론 무상으로. 무엇보다 ‘농민=군인’ 이다보니 전쟁은 언제나 농한기에만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지어야 한 해 동안 먹을 식량을 비축해야하니까. 이건 당시의 상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달랐다. 그는 일반적인 다이묘들과 다르게(!) 월급을 주는 군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농번기/농한기 가릴 것 없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월급을 받는 군인들은 당연히 농사에서 자유로웠다. 결과적으로 오다와 싸우는 다이묘들은 이기든 지든 한 해 농사를 망쳤고, 그로 인한 보릿고개를 비롯한 여러 부작용이 극심했다. 행여나 오다와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했던 것이다.



기존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오다는 매우 비겁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관점이다.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오다에게 기득권의 상식은 쓰레기일 뿐이다. 오다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혹은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스스럼없이 자기것으로 만들었다. 조총도 그 중 하나다. 자신의 군대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다는 대규모 조총부대를 꾸려나갔다.



발사 속도가 느린 초창기 화승총에 약점을 보완하려면 대규모로 부대를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 그런 점에서 노부나가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본도 본격적인 화약혁며으이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대가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난세이니만큼 곧 찾아왔다. 일본 동부 지역의 최대 세력이었던 다케다 가문과의 결전, 나가시노 전투다. p 181



노부나가는 일본에서는 볼 수 없던 대규모 조총 부대를 전투에 동원했다.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최소한 3,000명 이상의 조총병이 집단으로 사격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투에서 패한 다케다 가문의 기록에도 이 부분은 분명히 언급되는데, 전투 이후 다케다 가문은 보병인 ‘아시가루’에게 장창이 아닌 조총을 훈련시키라는 지침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 일본의 다이묘들도 조총의 위력과 조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확인하자, 조총 토입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게 되었다. 일본 열도에 ‘조총이냐 파멸이냐’라는 위기의식이 번지기 시작했다. p 185




 




<조선>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놀랍게도 기병이 전투의 주력이었다. 하지만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조선 전기에 조선이 제일 많이 싸웠던 적은, 북방의 유목민(당시에는 여진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의 기병은 그 위력이 상당했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신립이 500여의 기병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해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의 기병은 가히 고구려 철기병이 후예라 할 만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신립은 같은 방식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상대가 여진족이든 왜적이든 그동안 조선군이 항상 승리해오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과 함께 방어군을 이끌고 남하한 신립은 잘 알려진 대로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군과 대결한다. 조령에서 유리한 지형을 기반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지 않고, 탄금대라는 평야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하지만 어쩌면 신립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가장 잘하는 전투방식을 택했을 뿐이니까. 문제는 이번 적군은 지금까지 상대하던 여진족 군대나 노략질이 목적인 왜구들이 아니었다. 오랜 전란에 단련된 정규군인데다 화약 무기인 조총까지 갖춘 군대였다. p 189



신립과 조선군은 마치 나가시노 전투의 다케다군처럼 총격 앞에 장렬하게 전멸하고 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군이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한 것은 탄금대 전투만이 아니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조선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또 혜정창 전투에서 기병 돌격을 거듭하다 결국 몰살당하고는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법이다. p 190





조선은 수차례 조총으로 인한 참혹한 패배를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때마침 조선으로 귀화한 항왜들이 조총 제작 및 사용법을 전수해주며 이를 도왔다. 대표적인 항왜가 바로 모하당 김충선. 뭐, 임란 이후에 조선정부가 항왜를 어떻게 내쳤는지를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화딱지가 나긴 하지만,  항왜들이 미래를 알리 없으니 뭐. 여튼 그들 덕분에 조선군은 명실공히 화약군대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시대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1600년대 충청도 병사 중 76.5퍼센트가 조총이 주특기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조총 무장비율이 높았다. 또 순조 초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지방군인 속오군을 제외하고 중앙군인 오군영의 조총만 따져도 4만 5,000자루에 탄환도 575만 개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심지어 조선군의 조총 실력은 곧 동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원래 발사 무기인 화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전통 덕분인지 도입 반세기만에 발사 속도나 정확도에서 주변국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명나라나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항상 조총병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조선군의 명중률이 명군이나 청군에 비해 몇 배나 높았기 때문이다. p 194




<중국>


전쟁의 위기 속에 화약을 받아들인 것은 중국도 동일했다. 때는 지는 해 명나라와 뜨는 해 후금의 40년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군을 보이는 족족 섬멸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전했던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명나라 장수 원승환이 방어하던 영원성 전투다. 원승환은 화약무기인 홍이포라는 대포를 사용하여 누르하치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3일동안 누르하치가 직접 출전하여 싸웠지만, 영원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 결국 후금은 후퇴했고, 이후 누르하치는 사망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칸이 된 홍타이지는 명나라가 사용한 화약무기의 가치를 알았다. 하여 박해하던 한족(명나라 백성)들을 우대하며 화약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약무기로 중무장하게 된 후금은, 훗날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2. 동아시아의 화약혁명, 길을 잃어버리다.


<일본>


오랜 전국시대가 끝나고, 최후의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했다. 이후 도쿠가와는 여러 제도를 반포했다. ‘무가제법도’와 ‘일국일령성’, ‘쇄국령’ 등. 목적은 다이묘에 대한 막부의 통제력을 높이고,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이묘들의 하극상을 금한 것이다. 쇄국령도 같은 맥락이다. 해외 교류가 빈번하게 되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사상은 기존 질서를 흔들고 이는 다시금 하극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화약무기도 금지되었다. 아무리 무서운 무사 계급이라도 농민이 총알 한 방만 쏘면 끝장나는, 이 역시 하극상이기 때문이다.


화약무기가 처음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센고쿠시대라는 무한 경쟁의 시기였기에 무사들도 혐오감을 접고 적극적으로 조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조총은 당연히 금지해야 할 혐오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일본에서 조총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p 213



<중국>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한 후, 강희-옹정-건륭 연간 오랜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그들은 평화에 안주했다. 임진왜란 발발전의 조선 전기처럼.


청나라 조정은 일본의 막부처럼 공식적으로 화약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번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이른바 강희, 옹정, 건륭 연간의 오랜 평화가 찾아오자 화약 무기의 필요성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간혹 청의 패권에 도전하는 유목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청제국에 이들을 토벌하는 일은 황제의 영광을 보여주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p 218



심지어 청나라는 앞선 명나라보다도 안보상의 위협이 적었다. 명나라는 그나마 북로남왜라고 해서 북방의 유목민족과 남방의 왜구가 항상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리장성 너머의 유목지대에서 출발한 청나라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지적한 대로 만리장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북방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마침 일본도 안정적인 에도 막부의 시대였던지라 왜구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한마디로 어떤 안보상의 위협도 없는 완벽한 평화가 10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청나라의 지배계급이 유목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화약 무기에 매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p 220




< 조선>


임진/정유재란 이후 연이어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큰 전쟁을 연이어 맞닥드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국방력은 더 후퇴한다. 그리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사대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다. 화약혁명? 화약은 커녕 오로지 ‘주자학’만 부르짖으며, 여러 방면으로 조선의 발전은 멈춰버렸다. 그야말로 흑역사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3. 멈춰버린 동아시아의 화약혁명, 그리고 서세동점의 시작


모든 전쟁이 멈추고, 오랜기간 평화가 찾아오면서 동아시아의 화약혁명은 그렇게 멈췄다. 반면에 서양의 화약혁명은 지속해서 발전되어갔다. 서양은 여러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다보니 세력 넓히기를 비롯하여 왕위 다툼 등 전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의 화약무기는 유례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화약 무기는 잊히거나 정체되어갔다. 당연히 홍이포나 조총의 뒤를 잇는 신무기 개발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신무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홍이포나 조총조차 창고에서 녹이 슬어갔다. 급기야 19세기 일본 근해에서의 침몰 사고로 일본 땅에 상륙한 미국 선원은 일본성에 실제 대포는 없고 대포를 그린 큰 걸개그림만이 걸려있는 것을 목격할 지경이었다. 생존경쟁이 사라지고, 위기의식이 사라지자 화약혁명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17세기 이후의 군사혁신이 동아시아에서 중단되고, 유럽에서 계속된 원인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다. 독약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녀야 할 정도로 절박한 위기 의식 속에 살아가는 자(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와 전쟁을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로 여겨도 되는 자(청나라 건륭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정도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럽과 같이 비슷한 규모와 실력을 갖춘 국가들이 경쟁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존재했다. 이웃나라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사적 혁신을 거부하는 것은 곧바로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이 위기의식을 낳고 위기의식이 혁신을 강제한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청나라의 패권은 압도적이었고, 조선이나 일본도 자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오랜 평화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권력의 이익에 반하는 혁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혁신이라는 수레바퀴는 생존경쟁과 위기의식이라는 강제력 없이는 앞으로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p 222



서양보다 시작이 앞섰던 동양의 화약혁명. 하지만 위기의식이 사라지면서 혁명의 불씨도 사라졌다. 그렇게 2~300년이 흐른 후 우리가 배운 서세동점이 시작되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은 다름아닌 ‘위기의식’ 이다. 이는 비단 역사의 흐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잊지 말아야한다. ‘위기의식’을 갖고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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