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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 답사 일지 - 배움을 찾아 떠난 국문학자의 여행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평점 :
아는 사람은 다 알듯,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한다. 조금 더 세분화한다면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보다는, 어떠한 ‘장소’에서 의미를 찾은 여행을 좋아한다. 이른바 답사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그런가, 언제나 내 여행 속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장소들이 많았다. 아니, 대부분이 그런 여행지였다.
답사를 위한 여행은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여행을 가기 전에 그 장소에 대한 배경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비로소 그 장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런 배경지식을 위해 여러 책들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 리뷰하는 『나의 문학 답사 일지』라는 책 역시 답사 여행에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서울대 교수이자 국문학자인 정병설 교수다보니, 이 책의 메인은 기본적으로 문학을 기반으로 한 국내 답사 여행책이다. 하지만 그 문학이라는 것이 쓰일 당시의 정세나 사회적 배경이 녹아들어가있고, 당시에 있었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도 버무려있으니, 이보다 더한 인문학책이 또 어디있을까? 국내 여행책으로도, 인문학책으로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답사 여행책은 총 9곳의 국내 답사지를 소개한다(물론 중간중간에 해외 답사지도 있긴 하다).
1. 남원, 소설의 고향
2. 군산, 강과 바다의 만남
3. 옛 서울 나들이
4. 궁궐산책
5. 천주교 순교자를 찾아서, 전주에서 나가사키까지
6. 노근리 평화공원의 장미
7. 동학 기행, 인간이 하늘인 세상
8. 안동 답답이들의 고을
9.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하동과 광양
의도하진 않았는데, 내가 답사를 다녔던 지역과 겹치는 곳이 꽤 있었다. 첫 번째 지역인 남원부터 말이다. 남원, 군산, 서울 (궁궐 포함), 전주 등등. 안 가본 곳을 꼽는게 더 빠를듯한?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이 몇 년 만 더 빨리 출간되었다면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건, 역사유적지 등에 기반한 답사를 해왔던 터라, 문학을 기반으로한 답사여행이 정말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분명 내가 답사를 갔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소로 느껴졌다. 그것도 첫 챕터인 남원 편에서부터.
남원은 한국소설의 고향 같은 곳이다. 소설사에서 한국 최초의 소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린 가장 흥미로운 단편이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이고, 한국고전문학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춘향전』 역시 그렇다. 최초와 최고의 소설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한다. 이 밖에 최근 고등학교에서 많이 읽히는 「최척전」의 주 배경 역시 남원이다. 대표적인 고전소설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p 027
황산대첩비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동편제 판소리의 길을 연 송흥록은 귀곡성으로 유명한데 그가 비전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수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영혼이 떠도는 산 아래 시냇가 마을에서 음혼과 함께 살아왔으니 그에겐 귀신 울음소리가 낯설지 않았으리라. p 033
내가 남원을 갔을 땐 임진-정유재란에 초점을 맞췄고, 문학적인 부분에서는 『춘향전』의 배경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남원은 문학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지역이었다니! 그저 설화로만 알고 있었던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남원이라는 것도, 「만복사저포기」가 쓰인 배경이 고려말 무인 이성계와 이지란이 앞장 섰던 황산대첩이었다는 것도, 황산대첩에서 만복사저포기를 지나 그 연속 선상에 귀곡성으로 유명한 명창이 태어난 비전마을이 남원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가 남원에 갔을 땐 오롯이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만 하나에만 초점을 맞췄었는데, 시야를 문학적으로 넓히니 새로운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것이다. 이제와 말하지만 황산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지역이 현재 남원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이제서야 인지했다. 그니까 난..남원을 오롯이 임진-정유재란 딱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봤던 것이다.
남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정유재란 때의 남원성 함락이다. 1597년 8월 16일 오만 육천 명의 일본 주력군을 상대한 사천 명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총공세에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성민 육천 명과 함께 몰살되고 말았다. 지금 남아있는 ‘만인의총’은 칠천 명 조선인과 삼천 명 중국인의 합묘다. (…) 후대인은 전몰한 사람들을 기려 충렬사라는 사당을 지었고 그들의 무덤을 의총으로 높였지만 그런 방식이 피해자들을 진정 영광스럽게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진정 인간적으로 대접하려는 뜻이 읽히지 않고 처참한 죽음을 국가주의의 충성관 아래에 두려는 뜻이 보이기 때문이다. p 036
「최척전」은 전쟁의 참상을 다루지만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충성이나 애국심을 말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최척은 의병으로 나서나 이는 자의가 아니었고 모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최척은 또한 정유재란 때 남원의 군민들과 함꼐 남원성에 들어가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고 피란을 갔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옥영을 끌고 간 일본인 돈우는 조선인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상하게 돌봐주었고, 여유문과 주우는 낯선 나라의 이방인 최척을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잘 도와주었다. (…) 이처럼 「최척전」은 전쟁을 유발한 권력자의 명분을 따라 적대하고 공격하기보다 인간적 우호에 따라 서로 돕고 연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p 042
요즘 한국전쟁 관련 책을 읽고, 국가에서 강요아닌 강요로 세뇌시킨 ’호국전쟁’ 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비단 한국전쟁에 국한된 것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남원 답사 당시 보고 왔던 ‘만인의총’. 남원에서는 호국과 애국의 대명사인 만인의총이 진정, 당시에 죽어간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이 맞는지도 다시끔 생각해보게되었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헌 까지만해도 ‘만인의총’이라는 단어가 확인되지 았는다고 하니, 더더욱.
우리나라는 전쟁이라는 단어에 유독 충성, 호국, 애국의 개념을 세뇌시킨 편이다. 그러다보니 전쟁이라는 단어 안에는 숨어있는 또 다른 개념인 민간인들의 피해나 학살, 국가의 잘못 등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은 편이랄까? 그래서 어떤 피해자들의 죽음은 충성과 애국으로 포장되어 대내외적 선전용으로 전락하고, 또 어떤 피해자들의 죽음은 비난을 받는다. 만인의총은 대체적으로 전자에 해당되는 느낌이랄까.
흥미롭게도 판소리 중 『춘향전』만 배경이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다. 『흥부전』이나 『심청전』 등 여타 판소리 작품들은 이본에 따라 공간 배경이 여러곳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춘향전』만큼은 작품 배경이 남원 외 다른 지역인 이본이 없다. 실제 어떤 모델이 되는 특정한 사건이 남원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남원이 아니고서는 작품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살리기 어려워서 그런것 아닐까 싶다. p 048
남원에서는 춘향 사당을 만들고 춘향 영정을 그리며 춘향제라는 축제를 열었따. 또 춘향의 성을 성씨라고 밝힌 이본에 따라 성씨 성을 가진 부사를 아버지로 찾아주기도 했다. 춘향의 성이 보이지 않는 이본도 있고 안씨나 김씨로 나오는 이본도 있는데 굳이 성씨를 고집하여 남원부사 성안의를 춘향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선정비를 찾아 광한루 경내에 세운 것이다. 심지어 광한루 구역을 벗어나 지리산 구룡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춘향의 무덤까지 조성해두었다. 1962년 남원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 ‘성옥녀지묘’라는 지석을 발견하자, 이를 춘향의 묏자리로 간주하고 ‘성춘향지묘’라는 이름을 붙이고 봉분을 씌웠다. p 049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 광한루는 『춘향전』을 빼면 섭하다. 나 역시 『춘향전』을 생각하고 광한루에 갔던거기도 하고. 가서 느낀건 남원이 관광자원으로써 춘향이를 잘 살렸구나 싶었다. 다만, 남원이 춘향이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왜곡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예컨데 문학작품 속 주인공을 실존인물로 되살린 점이라던가, 뚜렷한 증거 없이 실존인물을 춘향이의 부모로 둔갑시키고, 역시나 뚜렷한 연구도 없이 춘향이의 묏자리를 만든것도.
이는 비단 남원만의 일은 아니다. 어떤 지자체든 역사적 인물에 대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건 최대한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왜곡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러 지역에서 역사 왜곡을 마주한 적도 있고. 과연 관광자원 개발에 따른 역사왜곡 허용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번엔 노근리 평화공원에 대한 이야기다. ‘노근리’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라 알고는 있었는데, 그곳이 충청북도 영동에 이위치한 곳이라고는 이번에 이 문학답사 여행책을 읽으며 처음알았다. 수없이 국내여행을 다니면서 충청도 지역도 거의 다 보고 왔음에도, 영동 만큼은 볼게 없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도시이기에 스스로에게 무안했달까.
잘 생각해보면 노근리 학살사건은 내가 학교다닐 당시에는 배우지 못했던 이야기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일어났던 ‘미군범죄’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민간인 학살사건이지만, 적어도 내 학창시절에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럼 어떻게 알게되었느냐? 훗날 성인이 되어서 관객이 몇 없던 영화 『작은연못』을 보면서 알게된 내용이었다. 당시 받은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내가 배웠던 한국전쟁은 ‘호국전쟁’이었고 미군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쳐 싸워준 동맹국이었으니까.
그런 한국전쟁 안에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수없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뭐, 조선사도 다름없긴 하지만). 뭐,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학교에서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가르치고, 여러 TV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이런 부분에 대해 방송하기도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물론 사람들이 자주 안보는 교양/다큐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그해 초 부모님 댁에 갔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6.25전쟁 경험담이었다. (…) 외할머니는 그날 산청에서 진주로 피란 짐을 싣고 트럭을 타고 오시다가 진주 부근에서 길이 막혀 짐을 트럭기사에게 맡기고 차에서 내려 걸어오셨다. 그때 멀리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더니 산에 흰 빛이 가득 찼다. 흰옷 입은 민간인들이 사살당해 시신이 널린 모습이 멀리서 그리 보였단다. 외할머니는 집으로 오자마자 외할아버지의 소재를 물었고 집에 계신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구한 이야기의 전후를 조합해 추리해보니 외할아버지가 진주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될 뻔했구나 싶었다. p 184
전쟁 직전에 좌우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좌익 혐의점이 있는 요주의 인물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가입시켜놓고 관리했는데, 전쟁이 발발해 전황이 불리해지자 위험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듯 이들을 ‘멸절’시키려고 했다. ‘사상검사’ 오제도가 국민보도 연맹 조직의 실무를 맡았는데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농부들에게 비료 등을 나누어주며 가입을 권유해 회원 수를 늘렸다고 한다. 이렇게 가입한 인원이 수십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초 의도한 좌익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학살한 것이다. p 184
6.25전쟁 시기 우리 고향에서 일어난 학살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국군이 후퇴할 때 대전 등지에서 교도소 수감자 천 명 이상을 대규모로 학살한 일이 있고, 1951년 1.4후퇴 때 전쟁에 동원한 보충대 천여명을 굶겨 죽이고 얼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도 있었다. 1950년 당시 16세로 고향 함양에 계셨던 아버지는 간간이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올라간 작은할아버지 뒷수발을 드셨다고 하니, 함양, 산청, 거창의 학살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자세히 말씀하시기보다는 학살로 인해 제삿날이 한날인 동네가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하셨다. p 185
그래도 즉시 거창 출신의 용감한 국회의원 신중목의 폭로로 외부에 알려저 국회에서 직접 조사까지 했다. 그런데 그 깊은 골짜기로 들어오는 조사단을 국군이 빨치산으로 위장해 총질을 했다. 국회의 조사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할 정도로 학살 집단의 소행은 대담했다. 이런 사실까지 밝혀지며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하자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는데 결국 처벌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조직적으로 전국에서 살인 범죄를 진행한 이승만 정권의 만행 중 일부였으니 그들이 스스로를 처벌할 리 없었다. p 188
저자는 노근리 평화공원 답사를 이야기하면서, 본인의 부모님이 겪으셨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것이 저자의 부친은 함양, 모친은 산청이 고향. 즉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이른바 거창·함양·산청 양민학살이라고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은 정부가 일부 국민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시키면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미국이 점령한 남한과 소련이 점령한 북한으로 나뉘어 극심한 사상대립이 있었고, 그 결과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후 남한에서는 좌익사상을 가진 국민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가입시켰는데, 흔히 말하는 나랏님들의 실적을 부풀리기 위하여 좌익사상이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까지도 대거 가입시켰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민들의 ‘자발’적인 가입이긴 했다. 나랏님들이 이 단체에 가입하고 이름만 올리면 쌀도 주고 비료도 준다고 하는데, 가입안 할 농민들이 어디있겠나? 그 결과 어떤 마을은 마을 구성원 통채로 국민보도연맹원이 되기도 하고 뭐 그런 상황이었다.
이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승만 정부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는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을 지시한다. 혹시나 그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진짜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사상은 1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정말로 아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정말 좌익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면, 당대에 책을 꽤나 읽은 엘리트라는 것인데 그들이 바보천치가 아닌이상에야 스스로를 옭아맬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까? 스스로 북으로 올라갔거나(당시만해도 교류가 쉬웠으니), 아니면 스스로를 숨기고 살았겠지. 이 말은 즉, 대다수의 국민보도연맹원은 사상은 1도 모르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함정 하나. 한반도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온리 농업국가였으니, 당시의 농민이란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시작으로, 이제는 보도연맹을 떠나서 마을 단위, 읍 단위, 면 단위로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한다. 혹시나 북한군이 들어왔을때,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하면서 말이다. 심지어는 국군들이 북한군 또는 빨치산으로 위장까지하면서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정작 이 나라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자신이 자택에서 사용하던 집기류까지 싸그리 들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면서 말이다.
사건 발생 10년 후 4.19혁명으로 비로소 유족회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에 나섰으나 5.16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 회장을 형장에 보내버렸다. 학살 가담자들이 경찰에 군대에 권력 요로에 있는 상황이었다. 학살 피해자와 유족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닌 빨갱이가 되어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도 하지 못했으니 피해 사실을 가슴 깊숙한 곳에 박아놓고 다시는 꺼내지 못했다. p 190
1950년 7월 남쪽으로 가던 피란민들을 후퇴하던 미군들이 기관총으로 사격해 이삼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란민 가운데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병력이 있다는 그릇된 정보를 믿고 그랬다지만, 아이들을 포함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학살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묻는 일이 적지 않다. 그 출발은 대게 제주 4.3사건에서 찾는다. 미국이 지휘하고 한국이 실행한 이 사건은 뒤에 이어질 수많은 학살의 전조였다. 다만 노근리 사건을 공부하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가해 미군 중에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백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단 한명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p 194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국전쟁이 끝나고, 학살의 생존자와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빨갱이로 몰리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왜? 학살의 가해자들은 권력자들이었으니까. 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일본 경찰 요직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패망했으나, 미국이 그들을 다시 요직에 앉치고 권력을 주었다. 무엇보다 학살의 가해자이자 최고 책임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었다.
4.19혁명으로 인해 이승만이 쫓겨나다시피 국내를 떠나며, 다시 진상규명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들은 또 다시 빨갱이로 몰리고, 또 다시 침묵을 강요당했다. 5.16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필두로 남한에선 꽤나 오랫동안 군부독재가 이어졌고, 그들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렇게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던 가해자들은 호국선열이 되어 현충원에 묻히거나, 그들의 무덤이 성지가 되는 등 이 땅, 대한민국에서 충성과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에 학살된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국민을 지켜야할 나라의 수장이 지시하고, 국민을 지켜야할 국군과 경찰들이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졌던 민간인 학살사건이 ‘문학’을 방패삼아, 사람들의 기억속에 하나, 둘 자리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은 함양, 산청, 거창 사건의 참혹함을 되새기며 ‘차라리 개를 배우자’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팔순이 넘은 노인들을 비롯해서 주로 부녀자, 어린애, 젖먹이들까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서 한꺼번에 사오백 명 내지 칠팔백 명씩 피란이다 시국강연이다 해서 몰고 나와 총화와 휘발유로써 쏘아 죽이고 태워 죽였던 것이다. 동족이라 믿었기에 ‘설마’ 하고 끌려나왔으나 어느 이민족도 일찍이 그렇게는 안했던 무차별 사살을 했을 때 그들은 조국을 무어라 부르며 쓰려졌을까?” 라고 말하면서 당시 참혹한 현장의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 p 192
지금까지 학살 만행과 참상을 알리는 데 문학이 큰 역할을 했다. 제주 4.3사건은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이나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와 같은 소설로 알려졌다. 194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상북도 문경의 한 골짜기 마을에 국군이 들이닥쳐 어린이 9명, 여성 44명을 포함해 온 마을 사람 86명을 학살한 문경 사건은 남상순의 『흰 뱀을 찾아서』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거창 학살은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에 그려져 있으며, 피카소가 그림으로 남겼던 황해도 신천의 크고 작은 학살은 황석영의 『손님』으로 되살아났다. p 197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그 중에서 문학작품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으면 정말 손 꼽을 정도로 내가 읽은 문학잠품은 적다. 왜 그렇게 문학은 잘 안 읽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 취향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문학작품은 나에겐 꽤나 ‘모호하게’ 다가오는 글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문학이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문학의 힘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다 건너 섬에 갇혀있던 제주4.3 사건을 육지로 끌어올려 대중이 알 수 있게 한 것도 문학이었고, 한국전쟁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알린 것도 문학이었다. 문학은 침묵의 바다에 가라앉았던 비극을 물 위로 끌어올렸고, 그 비극이 비단 피해자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문학 덕분에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게 되었고, 생존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침묵하지 않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토록 큰 힘을 가진 것이 문학인데, 나는 왜 문학을 등한시 했을까. 지금까지 수없이 문학작품을 읽을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 후회가 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룬 문학작품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