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제국 멸망 후 르네상스가 도래하기까지의 천 년. 그 기간을 우리는 중세시대라고 배웠다. 그리고 대표적인 폭력과 억압의 시대, 모든 문명이 죽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아마 중세를 관통하는 두 가지의 키워드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때문일 것이다. 오롯이 이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우리는 중세 천년에 ‘암흑기’라는 굴레를 씌워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만을 놓고 보았을 땐, 중세는 분명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죽음만 있는 어두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중세의 천 년을 고작 저 두 가지의 키워드만으로 재단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중세를 폄하하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시작과 끝은 제멋대로이다. 시작과 끝은 화자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틀이다. 그동안 중세 세계는 그림자에 가려진 채 어렴풋하게만 이해되었고,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결국에는 우리가 바라는 현대 세계의 대립항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 우리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수 세기에 걸친 신화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 410년에 일어난 로마 약탈, 476년에 벌어진 서쪽의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 사건 같은, 고대와 중세 사이의 전통적인 전환점들은 일단 잊자. 만약 중세가 존재했고 그 시작과 끝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굳이 쇠락이나 암흑, 사멸을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 빛나고 거룩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p 011



분명한 사실은 당대의 추악한 정치적 혼돈과 전쟁에 낙담한 14-15세기의 이탈리아인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 닿는 향수 어린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1,000년에 이르는 지난 역사와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서 로마와 그리스라는 먼 과거를 활용했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 내내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지식인들은 백인성이라는 관념이 유럽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역사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중세와 그리스 로마의 연관성, 그리고 중세 정치체들의 독립성과 독특한 전통에 주목하면서 중세의 원형 국가들이 유럽 열강의 근대적 기원에 해당하는 유용한 과거라는 점을 발견했다. p 015



우리가 알고있는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는, 근대 유럽 열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근대를 살던 유럽 제국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빛나는 현재를 “서양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양문명 우월주의로 인해 유럽 열강들은 자신과는 다른 나머지 세력들을 ‘야만인’으로 보았고, 중세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화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세는 더더욱 야만적인 시대, 어둠의 시대, 문명이 없는 시대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라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 되었다. 오죽하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매체들마저도, 중세를 암흑기로 그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이미 세계에 만연하게 뿌리내린,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를 탈피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왠만큼 해서는 암흑기 중세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뒤집긴 어렵다. 그래서 저자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였다.



‘갈라 플라키디아’.


진짜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름인지라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왜 수많은 유명인물들을 놔두고, 하필 역사적으로 이름의 가치(?)가 조금 뒤떨어진 사람이 중세의 시작으로 선택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벗뜨, 이 책을 읽고 나니 이해가 갔다.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중세 천 년간의 사회상을 짧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녀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암흑기가 아닌 “빛의 시대” 중세를 말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라벤나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의 예배당으로 되돌아가자. 기원후 5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은 황후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는데도 오늘냘 영묘로 알려져있다. 최근들어 학계의 동향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는 아들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을 때와 관련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관한 역사서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남자, 피, 전투이다. 그러나 이 여성과 이 공간을 중심으로 관점을 재구성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의 매우 색다른 “출발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p 023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이탈리아에서 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에 머물던 그녀는 423년에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남녀를 불문하고 지난 500년간 누구 못지않은 로마 통치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45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제국은 위기와 과도기를 겪고 있었지만, 그 위기가 종류와 정도의 측면에서 이전에 로마를 엄습했던 위기와 꼭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로마에는 예전부터 늘 파벌싸움이 있었고 외부의 위협도 언제나 존재했다. p 024



갈라의 인생에는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 숨쉬지만 확실히 과도기를 겪던 로마 제국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와 민족들이 기존의 관념, 풍습과 통합될 시대의 무대를 마련하는 복잡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형태의 황제권을 배경으로 온갖 부류의 통치자들이 다양한 기독교인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통해서 정통성을 주장했고, 그런 식의 황제권은 지중해 세계 전역과 갈리아 지방의 대부분에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출현한 이민족들은 로마의 통치 세력인 최상류층 가문들과 동맹을 맺는 데에 열중했고, 로마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p 038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변했지만, 로마는 예전부터 늘 변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변화는 처음부터 로마 이야기의 일부분이었다. 권력의 중심지는 바뀌었다.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분열했고 연합했고 다시 분열했다. 반면에 로마가 “멸망했다”는 관념은 동질성 개념, 즉 역사적인 평형 상태 개념에 기댄다. 아주 오래된 이 관념은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민국가의 원형을 가정하는데, 그 이상적인 국민국가는 고대의 실제 현실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살던 18세기 대영제국과 훨씬 더 비슷하다. p 039



암흑기라고 배웠던 중세 천 년은, 그 이후 우월하다 자부하던 근대 서구 열강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인종이 교류하고 있었고, 수많은 종교 문화가 발달했으며, 그에 따른 멋드러진 종교 건축물들이 곳곳에서 지어졌고, 어느 왕조든 근대 서구열강과 견주었을 때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은 권력투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중세의 시계바늘은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 그 누구도 중세가 암흑기였다고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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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중세의 교회는 오직 유일신인 하느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율법으로 인간들(서민)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함으로써 핍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에 인본주의 입장에서는 그 때를 암흑기라고 평가한 것 같아요.
 
베트남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5
정승원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다. 막혀있던 하늘길이 열렸고, 전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폭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로 떠나고, 들어오는 비행기들이 이/착륙 하고 있다. 심지어 곧 있으면 여름휴가 시즌! 이미 진즉에 여름휴가 시즌에 맞춰서 항공권을 발매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이번 여름휴가로 베트남 여행을 계획했다면! 베트남 여행책 『셀프트래블 베트남』을 추천한다. 진짜, 정말, 베트남 여행에 꼭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다 있다. 베트남 전 지역에 대한 지도는 기본이고, 관광지(휴양지), 맛집, 호텔, 쇼핑몰 기타 등등등. 정말 없는 정보가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베트남의 최신 정보를 닮은 정말 따끈따끈한 베트남 여행책이라는 것.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해외 주요 관광지 및 맛집들 중 폐업(?)하거나 혹은 서비스 질이 똑 떨어지는 등 많은 게 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역시 다를 바가 없기에, 부디 여름휴가로 베트남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최신 개정판인 『셀프트래블 베트남』을 읽어보시길!



베트남, 어디까지 가봤니?


베트남은 북부에 위치한 수도 하노이에서 경제, 문화의 수도 호찌민 시티까지 비행기로 2시간, 기차나 버스로 2일이 걸릴 만큼 큰 나라다. 하지만 ‘베트남’ 하면 생각나는 곳은 ‘하노이, 하롱베이, 호찌민 시티, 다낭’ 정도. 최근 나트랑도 가족 휴양지로 입소문이 나고 모 항공사의 적극적인 광고 공세가 시작되면서 베트남 전역의 숨은 진주 같은 관광지들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이 주목해야 할 베트남 관광지는 어디가 있을까? p 024




01. 하노이: 베트남의 수도.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있는 관광지와 베트남 최고의 박물관이 모두 모여 있다.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디자인의 제품들로 쇼핑마저 즐거운 곳.

02. 사파: 베트남 북단에 위치한 고산지대 소수민족 거주지. 복잡한 도심을 떠나 푸른 자연으로 떠나는 하이킹족들에게 각광을 받는 곳.

03. 하이퐁: 베트남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하롱베이와 깟바섬을 오갈 때 방문한다.

04. 하롱베이: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바다 위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

05. 깟바섬: 하롱베이의 상위호환! 호핑투어를 통해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다는 것은 물론이오, 깟바국립공원에서 트레킹까지 가능하다.

06. 닌빈: 육지의 하롱베이. 강 위를 배를 타고 다니며 기암괴석을 구경할 수 있다.

07. 퐁냐케방: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퐁냐케방 국립공원은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카르스트 지형이다. 스릴만점인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는 곳!

08. 후에: 한국의 ‘경주’와 같은 세계문화유산 도시이자, ‘파주/철원’처럼 DMZ 투어를 할 수 있는 곳.

09. 다낭: 요즘 핫하게 떠오르는 동남아의 휴양지. 장장 30km의 해변을 따라 고급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다.

10. 호이안: 19세기 가옥들이 보존되어있는 구 시가지. 역사/문화/예술/먹거리/쇼핑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

11. 나트랑: 동양의 나폴리! 해안가를 따라 수많은 레스토랑과 클럽들이 들어서 있다.

12. 달랏: 베트남 국내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는 곳.

13. 무이네: 사막과 리틀 크랜드 캐니언을 갖춘 곳.

14. 호찌민 시티: 베트남 문화와 쇼핑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곳. 한켠은 프랑스식 건물이 즐비하지만, 메콩강 유역에서는 원주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15. 푸꾸옥: 요즘 떠오르는 베트남 휴양지의 신흥 강자! 베트남의 ‘진주섬’이라고 불리고 있다.




곧 있으면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되다보니, 베트남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에 처음(!!) 가는 여행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처음 베트남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베트남 여행을 계획 할 때 주로 궁금해하는 내용이 있다.


Q: 베트남은 언제 가야 좋아요?

Q: 여행 비용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Q: 환전은 어떻게 하나요?

Q: 비자를 받아야 하나요?

Q: 치안이나 위생 등에서 주의할 점이 있나요?



답변은? 『셀프트래블 베트남』 QnA를 확인해보시라! 첫 베트남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베트남에서 꼭 해봐야 할 모든 것


베트남여행을 시작했다면 꼭 해봐야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CNN이 주목한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 중 일부라도 보고 오는 것!


두 번째는 당연히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먹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의 유명 음식들 말고도, 베트남 지역별로 유명한 먹거리가 각각 다르니, 어떤 지역을 방문하게 될지는 몰라도 그 지역의 먹거리를 꼭 먹어볼 것! 물론 베트남 음식의 스테디셀러인 쌀국수와 커피는 기본이고^^!


세 번째는 바로 쇼핑이다. 베트남의 슈퍼마켓, 약국, 쇼핑몰 등! 각각의 장소마다 잇아이템이 다르니, 가능하면 전부 다 돌면서 가성비 쇼핑하면 개이득! 『셀프트래블 베트남』에서 알려준 꿀팁 하나가 바로 약국 쇼핑이다. 베트남은 의약분업이 철저하지 않아서 처방전 없이도 항생제같은 전문의약품 구매가 가능하다고?! 뭐 일반적인 건강식품인 발포 비타민이나 의약외품인 샤론파스등은 기본이고! 확실한건 한국에서 구매하는 것 보다 훠얼씬 저렴하다는 것! 아, 그리고 베트남에서만 판매한다는 농모자 쓴 테디베어도 꼭꼭 사올 것!!!!


네 번째는 동남아 여행 필수코스라는 마사지! 어떤 나라든, 어떤 숍이든 마사지는 가격과 시설이 천차만별이다보니, 그 퀄리티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기안84가 인도여행에서 마사지 호갱된 것을 보셨다면, 정말 마사지숍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을 것이다. 자, 호갱되고싶지 않은 사람! 정말 퀄리티 좋은 마사지를 받고 싶은 사람!! 『셀프트래블 베트남』에서 그 꿀팁을 찾아보시라!


다섯 번째는 다름아닌 숙소다. 베트남 여행 경비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바로 항공권과 숙소인 만큼, 숙소 선택은 정말로 중요하다. 비용은 저렴한데,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숙소. 어떤 여행이든 숙소만 잘 골라도 반은 성공한거니까!


역사와 문화의 관광 1번지, 하노이


하노이는 2천 년에 이르는 도시 역사 중 약 1천 년간 베트남의 수도 역할을 담당해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베트남 제1의 도시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하노이 관광의 핵심은 호찌민 단지다.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북베트남의 대통령을 지낸 호찌민의 묘와 그가 거주했던 저택들, 호찌민 박물관 등 단순한 볼거리 이상으로 베트남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하노이에는 300여 개의 호수가 있어 일명 ‘호수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호수 서호와 관광객들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호안끼엠 호수는 밤낮 가릴 것 없이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하노이의 서민 생활이 궁금하다면 구시가를 방문해보도록 한다. 저렴한 숙소와 식당, 바, 기념품숍, 환전소 등은 물론 현지인들의 생활용품 가게들이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다. (…) 카페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시원한 쌀국수 퍼와 분짜에 베트남식 커피를 맛보고 저녁에는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멋진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미식탐험 또한 하노이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즐거움이다. p 045


내가 베트남 여행을 가게 된다면 꼭 일정에 넣을 곳이 바로 ‘하노이’다. 내 여행에서 ‘역사’를 빼면 섭섭하니까. 베트남 근/현대 역사의 주인공인 '호찌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노이에 있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중세 베트남 통치 왕조였던 리왕조의 유적이 하노이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호찌민이야 베트남의 영웅으로 대/외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니 이해한다고 쳐도, 뜬금없이 베트남 중세 통치 왕조인 ‘리 왕조’는 대체 왜?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흐흐. 알아도 쓸데없는 지식이긴 한데, 베트남의 ‘리 왕조’는 우리나라와도 자그마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174년, 베트남 리 왕조의 수도 탕롱성. 리 왕조 6대왕 영종의 아들 이용상은 피난길에 나선다. 나라에 쿠테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용상이 도착한 곳은 바다 건너 어느 해안 마을. 그 곳은 바로 ‘고려’였다. 이용상은 고려에 정착했고, 당시 왕이었던 고종(고려 23대왕)에게 ‘화산군’이라는 작위를 받고, 그렇게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간 ‘화산 이씨’ 후손들. 시간은 흘러흘러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했었는데, 베트남 정부는 화산 이씨 종친들을 환대함은 물론이고, 자국에 있었던 리 왕조의 후손이자 왕손으로 인정했다. 심지어 베트남 정부는 매년 리 왕조의 태조 탄신일마다, 화산 이씨 종친들을 초대하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에선 화산 이씨 후손들을 하루 빨리 본국으로 귀환시키고자 한다며. 뭐 이건 정치적인 면도 어느정도 깔려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아주 당연하게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



우리나라의 한 ‘성 씨’의 시조가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였고, 시간이 흘러 왕자의 후손들이 베트남과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로 나는 정말 진짜로 완전 !! 하노이에 가서 리 왕조의 유적을 보고 싶다는 것!! 심지어 리 왕조의 탕롱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다만 『셀프트래블 베트남』 저자 기준으로는 탕롱성은 완전 추천은 아니고, 어느 정도 추천(ㅋㅋ)인 관광지인 듯. 뭐 근데 그건 인정. 역사 더쿠들이나 볼게 많지 뭐, 일반 관광객들에겐 크게 관심 없는 장소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베트남에서 하노이 여행을 계획했다면 알아야 할 게 바로, 근교(?) 투어!! 바로 ‘하롱베이’나 ‘사파’, ‘땀꼭’ 같은 지역도 하노이에서 투어상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파는.....《신서유기》에서 촬영지로 나왔던 곳이라,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데. 그...판시판? 아 가고싶다, 베트남!!!!! 물론 아기가 조금 더 커야 가능하겠지만^_T. 이렇게 오늘도 난...  책으로 세계여행을 한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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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잔혹동화 『환상소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소설책이다. 근데 이 소설책이 완전 초면은 아니다. 왜? 난 이미 2021년에 오디오 드라마 형태로 발간된 『환상서점』의 오디오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꽤 오랜기간 성우덕질을 하던 이력을 지닌 피로ㅋㅋㅋ). 이쯤에서 당시 텀블벅 펀딩에 참가했던 날 매우 칭찬한다♡ 잘했다, 장하다 내 자신♥♥




자자, 그렇다면 오디오북 『환상서점』과 일반적인 소설책 『환상서점』의 내용이 같은가? 아니, 절대로. 네버! 



『환상서점』 오디오북은 서점주인 서주가 독자(그러니가 듣는 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서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트랙당 1편의 이야기며, 그 이야기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먼저 들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반면에 『환상서점』 소설책은 오디오북에 담겨 있던 일부 에피소드와, 오디오북 대본집(!!!)에 있는 서점주인 서주의 배경을 그대로 가져와서, 바로 그 ‘서주’의 이야기가 하나의 장편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근데 난 소설책 쪽이 훨씬 더 좋네....?!


오디오북 대본집에서만 보았던 서주의 배경이 이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된 것도 좋은데, 심지어 오디오북 『환상서점』 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서주의 뒷 이야기까지 그려진다는게! 거기다 저승차사님 까망의 뒷이야기도 읽을 수 있게되어서 얼마나 좋은지(구색록편). 옥토도 그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책의 등장인물로 나온 것도 너무 좋고. 이건 정말로 작가님께 절하고 싶음. 흑흑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개인적으로...소설책 『환상서점』 2편으로 옥토의 현재 이야기도 출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가님? 네 흐흐흐흐. 옥토와 귀신남자의 만남도 그려줘요T_T. 



기본적으로 『환상서점』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신비하고 기묘한 판타지 소설이다. 거기에 기괴하면서도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도 한 스푼 들어가있다. 신비로운 판타지 소설책 『환상서점』의 이야기를 한 줄 요약하면 이렇다.


‘망령을 보고 들으며,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남자. 그 남자는 오랜시간을 한 여자만을 기다리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모으고 또 모았다. 오로지 그 여자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그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비하면서도 기묘하고, 때로는 가슴이 아려오며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과거 이야기기도 하며, 혹은 누군가의 전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과거이면서 현재이야기이기도 하다. 


너무......요약했나 ㅋㅋㅋ 뭐, 아무래도 소설책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스포할 수 도 있으니까. 뭐, 그럼. 조금 더 길게! 소설책 『환상서점』의 서장을 일부 발췌볼까? 



먼 옛날, 산과 강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호기심 많은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귀한 신분이었지만, 예절교육을 받기보다 들판을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천방지축이었지요. 하루는 소녀가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던 중에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주인 잃은 책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신선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은 한 사내가 보이지 않겠어요? 소녀는 이 책이 저 사내의 물건이라는 걸 집착했습니다. (…) 


그때, 소녀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 전기가 튀듯 어떤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이 하얀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것 같아. 내가 셀 수 있는 숫자보다 더 오래, 쌀 한가마니에서 쏟아지는 곡식의 낱알보다 더 오래. 한참을 지나 깨달은 것이지만 소녀는 사내를 본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말았던 거죠. (…)


헌데 이상한 건 분명 죽었어야 할 사내가 그 이후로도 자꾸 모습을 보이더란 겁니다. 둘이 뛰어내린 절벽 근처에서, 사람이 많은 시가지에서, 속세와 동떨어진 어느 한적한 사찰에서. 그를 보았다는 장소도 다양했어요. 진짜 해괴한 대목은 지금부터 입니다. 그에 관한 목격담은 몇백 년이 지나도록 이어졌습니다.         - 소설책 『환상서점, 서장- 절벽 아래 남은 이야기』 中



소설책 『환상서점』의 서장은 오디오북 『환상서점』의 대본집에 있는 서주에 대한 이야기 중, 그 어느 시간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정한, 기약이 있는듯 없는듯 한 ‘서주’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해야하나? 



둘의 과거를 이야기 한 건 마지막 욕심이었다. 한번쯤은 그녀에게 지난 일을 오롯이 고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용서받는다면,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여태 몰랐지만 그런 희미한 기대도 섞여있었다. 지금 연서의 눈에 차오른 원망을 보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다음 생에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땐 우리 가까워지지 마요.”


“지금의 나는요?”


“미안하다고 해두죠. 어차피 전부 잊겠지만.”


그는 마지막 무대를 앞둔 마술사처럼 꽃을 고쳐쥐었다. 푸른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광채가 일렁였다. 홉사 저승의 기운 같았다. 서주는 그 빛을 뒤집어쓴 채로 말했다. 예의 그림같은 미소와 함께.


“이전엔 너무 가까워져서 당신이 죽었거든”      - 소설책 『환상서점, 영원의 매듭』 中



와! 근데 정말로 오디오북만 따로 들어도 좋고, 소설책만 읽어도 좋지만. 그냥 둘다 듣고 읽었으면 좋겠는게 내 바람!



무엇보다 오디오북을 먼저 듣고, 소설책을 읽으면 더욱 최고랄까? 흐흐. 오디오북으로 등장인물들의 멋진 목소리를 듣고(이게 중요!), 서점주인 서주가 들려주는 ‘잠 못 이루는 신비한 이야기’도 좀 듣고(진짜 최고bb), 그다음 소설책을 읽으면 와. 진짜 이건 진짜 분명 나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귓가에 서주의 목소리가 들린달까. 흐흐흐. 진짜로 이거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_T. 



근데 .. .종이책버전 『환상서점』도 오디오북으로 내어주시면 안될까요? 작가님, 엉엉. 영원의매듭 편... 구자형님 목소리로 듣고싶어요 엉엉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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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넥타이
이정남 지음 / 북 야부사메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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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하면서 TV와 멀어진 나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 까지만해도 TV를 넘나리 사랑했었다. 특히 교양/역사/시사/다큐 프로그램을 참 좋아해서, 채널 돌려가며 보곤했었다. 공중파야 프로그램 방영시간이 정해져있으니 언제든 보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케이블은 좀 타이밍이(?) 맞아야만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타이밍 재가면서 봤던 방송 중 하나가 바로 《사무라이 로망스》 라는 프로그램이다. 뭐,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는 사실 유튜브 채널이었다며....ㅋㅋ

각설하고! 꽤나 즐겨 보았던 《사무라이 로망스》가 책으로 발간된다고 해서 당시에 바로 구입을 했었다. 책 제목은 『사무라이의 넥타이』. 어째서 제목이 ‘넥타이?’ 인가 싶었지만, 《사무라이 로망스》를 생각해보면 왠지 사무라이의 ‘넥타이’라는 제목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뭔가 이해되는 느낌적인 느낌?! ...............그 후 출산과 육아라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 책을 구입한지 1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읽은건 안 비밀^^!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일본 역사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 그럼 일본 어느 시대, 또는 어떤 구분에 의한 역사책인가!

일본 역사책 및 역사공부를 할라치면, 고대사는 겁나 길디 긴 신들 이름이 나오고, 막부시대는 또 통치하는 장군의 가문에 따라 계속 나뉘고, 심지어 전국시대까지 오면 이른바 ‘군웅할거’라 할 만한 온갖 장수들이 떼지어 나오니, 어떤 시대든 익숙하지 않은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인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고 수많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무시하기엔, 유력가문(?)의 이름들은 알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일본 역사를 이해하는데(정확히는 정치사) 매우 수월해진다. 결국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역사는 한국 역사와 겹쳐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정유재란)’, ‘메이지유신 이후(일제강점기)’ 정도랄까?

하지만!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정말 1도 어렵지 않다. 진짜로 이 책 안에는 어려운 일본 역사는 1도 없다. 어려운 전국시대 장수들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간혹 내용에 따라 샘플로 몇몇 가문들이나 장수의 이름이 나오긴 함), 그렇다고 일본의 정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무슨 내용이 있는 역사책이냐!!!! 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거고, 대체 어떤 역사를 알려주려고 하는 거냐!!!!

자자자. 결론부터 말하면 역사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는 ‘에도시대’의 사회상(생활상)을 이야기한다고 보면 된다. 당시의 사회상(?)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여튼 에도시대를 살던 일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정치권력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은 일본 역사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들의 삶과, 당시 사회의 풍속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게 진짜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다.



예컨데,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중 일부를 보면 이렇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 까지 육식을 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의 사실은 원래 이거다! 라던가, 지금도 유명한 일본의 ‘노포‘ 의 비하인드 같은! 주제만 봐도 궁금하기 그지 없는 내용들이지 않은까? 이렇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데, 이 책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데 ‘에도시대는 신분에 따라 똥값(?)이 차등으로 매겼다’라던가, 에도에 첫 발을 디진 촌놈 사무라이는 어떤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라던가,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나오던 ‘도장깨기’의 본 모습은 이렇다! 같은! 정말로 이 책은 재미와 흥미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잡은 일본 역사책이다.

물론 역사 하면 제일 중요하다고 치부되는건 정치사이긴 하다. 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 건 잔잔하게 살아온 피지배계급의 삶이니까. 그렇기에 난 이 책 『사무라이의 넥타이』를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유튜브도 추...천...하고 ㅋㅋㅋㅋ

에도시대 분뇨 가치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매겨졌다?

10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한 에도. 인구가 많은 만큼 분뇨의 양 역시 분명 많았을 것이다. 에도시대보다 이삼백년의 시간이 흐른 개화기 시절, 조선의 경성만 해도 길가에 오물이 넘쳐났고, 가는 길마다 오물의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보다도 과거인 에도였으니, 상황이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었는데 왠걸? 에도의 분뇨처리 방법은 생각보다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근세 일본의 수도인 거대 도시 에도는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100만에 달하는 거대 인구가 먹고 배출하는 분뇨량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1인 당 연간 분뇨 배출량을  500kg정도로 가정하면 에도 전체에서 배출되는 분뇨량을 대략 연간 50만 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p 074

100만 명의 대도시 에도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 수급을 위해 에도 외곽지역은 농경지가 발달하게 됩니다. 에도에서 연간 50만 톤 정도씩 쏟아져 나오는 분뇨는 에도 외곽 지역 농경지에서 퇴비로 활용되었고 농경지에서 생산된 각종 곡물과 채소는 다시 에도로 공급되는 자원의 리사이클링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p 075

요즘 전 세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친환경!!! 에도의 분뇨처리 과정이 바로 이 친환경에 걸맞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에도에서 나온 분뇨들을 모아서 외곽의 농경지로 보내고, 거기서 퇴비로 사용하고, 농경지에서 나온 생산물은 다시 에도로 들어와서 에도에 사는 일본인 입으로 냠냠냠. 

여기서 밑줄 쫙! 해야할 포인트가 있으니, 분뇨의 처리 가격이다. 현대인들은 분뇨, 그러니까 정화조를 깨끗히 해주는 대신 그에 대한 비용을 업체에 지불한다. 하지만 에도는 그 반대! 자신의 분뇨를 농민에게 파는(?) 개념이었다. 아무리 똥,오줌이라도 내가 만든거니(..) 내꺼니까, 내꺼 주는 대신 돈을 받는다고나 할까. 크흡.

다이묘 또는 사무라이들의 저택에서 일반 서민들의 공동주택에 이르기까지 분뇨통이 설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장소는 에도 외곽 지역 농가와 직간접적으로 분뇨 처리권에 대한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 에도에서는 정화조를 청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필수적인 퇴비를 구입해가는 개념으로 분뇨 처리 과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뇨 구입 비용을 돈으로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분뇨 구매 당사자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밭에서 생산되는 무 또는 가지 등의 농산물을 물물교환 형태로 지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p 076

근데 또 그 분뇨 가격이 신분마다 차등으로 결정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부자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비싸고, 가난한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저렴하고. 똥까지 등급을 매겨야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이게 은근 과학적인 분류란다. 부자집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기에, 분뇨가 퇴비로써도 제격인 반면, 가난한 집은 먹는게 거기서 거기니까. 슬프면서도 웃긴 이야기^_T.

다이묘 저택, 막부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 저택 또는 거상 집에서 나온 분뇨가 상급에 속해 있었고 일반 사무라이 저택 또는 서민 집에서 나온 분뇨가 중급, 빈민들이 많이 사는 공통주택 「나가야」에서 나온 분뇨가 하급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 신분과 경제력이 높을수록 분뇨 등급을 높게 쳐 준 품질 분류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이라기보다는 농민들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확한 해석이었습니다. 곡물과 채소 외에도 닭고기 어패류 등 높은 영양가를 가진 음식을 먹은 후 배출한 분변에는 질소가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퇴비로써 효율이 높았던 반면 곡물과 채식 위주의 음식 밖에 먹지 못했던 서민들의 분변은 영양소가 낮았기 때문에 퇴비로써의 가치 또한 낮게 책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p 077

일본은 1,200년간 육식 금지? 육식을 대하는 이중 태도

일본이 오랜기간 육식을 금지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던 내용이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서양’을 표방하며 서양인 따라잡기를 위해 육식 섭취를 적극 권장했다나 뭐라나.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육고기를 못먹어서 그렇게 왜소한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왠걸? 이것도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야기였다. 음 아니지, 전부 틀린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모몬지야]는 에도시대 당시 에도 근교 농촌에서 농민들이 수렵 활동을 통해 사냥한 멧돼지 또는 사슴 등의 고기를 받아 에도 시내에서 고기를 판매하던 정육점을 지칭합니다. 육식을 기피하던 사회 풍조 때문에 고기 섭취를 「보약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 역시 에도시대 일본 사회의 「타테마에」와 「혼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p 122

일단 기본적으로 에도시대에는 정육점이 있었다.

일본 불교와 신도의 영향으로 인해 육고기 섭취를 기피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육고기를 섭취했다. 심지어 ‘보양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서기 675년 「테누 텐노」에 의해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육식 금지령이 발령됩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소와 말을 죽여 식용으로 사용하거나 판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시 엄벌에 처한다.’라는 표고령을 내렸고, 에도시대가 시작된 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시 ‘소와 말을 죽이면 안되며 자연사한 소와 말이라고 할지라도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살생 금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바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정책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츠나요시는 1682년경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라는 규정을 포고하는데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가엽게 여겨야 한다는 「살생 금지령」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에 의해서 개, 고양이, 새, 어패류, 곤충 등이 「살생 금지령」 범위 안에 포함되다보니 채소와 과일을 제외하고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p 125

1709년 1월 10일 5대 쇼군 츠나요시가 세상을 떠났고 츠나요시 사망 후 불과 열흘이 지난 1월 20일 약 30년 가까지 지속되어오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 넣었던 살생금지령 「쇼오루이 아와레미노 레이」는 결국 해지됩니다. p 127

실제로는 다양한 야생 동물 고기가 에도 시내에 유통되고 있었으며,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소, 말 등의 가축보다는 사냥을 통해 획득한 야생 동물 고기 위주로 버젓이 고기가 팔리고 있었습니다. (…) 사슴고기는 「모미지(단풍)」이라고 불렀습니다. 화투를 보면 단풍나무에 사슴이 그려져 있는 패가 있는데, 사슴 고기를 「단풍」으로 부르게 된 것은 화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닭고기는 「카시와(떡갈나무)」라고 불렀는데, 떡갈나무 잎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홍색 또는 갈색으로 변색되면서 닭고기 색과 비슷해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고기는 「사쿠라(벚꽃)」이라는 은어를 사용했는데, 신선한 말고기 색깔이 벚꽃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탄(모란)」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되었던 멧돼지 고기는 모란 색깔과 비슷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p 129 ~ 130

물론 일본의 역사 속에서 몇 번의 육식 금지령이 있긴 했으나, 최초의 육식 금지령은 당시에도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그 이후의 육식 금지령 때도 육식을 하면서 쉬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에도 막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의 육식 금지령은 아주 살벌했기에, 한 번만 걸려도 거의 사형!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츠나요시 때만 아주 강력하게 육식금지령이 시행되다가, 츠나요시 사후 아주 스피드하게 사라진 법이 되었다.

물론 그 때도 불교와 신도의 영향 아래 육식기피 분위기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대놓고 먹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고. 뒤로는 왕왕 먹었다며. 하지만 대놓고 육고기 이름을 부르긴 뭐하니까, 은어로 부르면서 말이다. 진짜 사슴고기를 단풍이라고 부르는 것에 빵 터졌네.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육식 금지문화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근거를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육식 금지가 최초로 발령된 서기 675년부터 공식적으로 육식 금지가 폐지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약 1,200여년의 기간동안 일본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가 육식을 한 경우 당사자들을 엄벌에 처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두 내용에 대한 명확한 시대적, 문화적 구분이 없다보니 『1,200여 년의 육식 금지 기간 동안 육식을 하다가 적발될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라는 형태의 사실 관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p 127

확실히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배울 때는 저자의 말 처럼 ‘일본에 대한 당위성과 명분’을 기본적인 틀로 잡고 배우다보니, 그 속에 어떤 삶이 있는지, 정말 우리가 배운 일본이 제대로 배운게 맞는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위 ‘일본인은 오랫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처럼. 거기다 일본 역사를 알거나 공부함에 있어서, 위와 같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틀로 인해 제대로 된 공부가 어려운 것도 있고.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잠시 뒤로하고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근세 일본을 살았던 소시민들 삶이나,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일본인의 이미지는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일어난 ‘왜곡’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일본 역사책으로 강력 추천. 다시금 말하지만 역사를 뒷받침하는건 우리 같은 소시민의 소소한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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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유럽예술문화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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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책 『TAKEOUT 유럽예술문화』는 조금 독특한 책이다. 물론 내 기준에서, 좋은 의미로다가 하는 말이다. 


왜? 이런 류의 인문역사예술이 복합적인 책은 처음 읽어보거든!! 새롭고 짜릿해!!!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가 가미된 여러 종류의 책들을 많이 읽어봤다. 예전엔 ‘거시사’를 주로 읽었다면, 한 5년 전 부터는 ‘미시사’도 즐겨 읽게 되었다. ‘미시사’ 를 자주 읽다보니, 의도치않게 미술의 역사라던가 의학의 역사, 여성 인권의 역사 등 예술과 문화같은 세부적인 분야에 대한 내용도 꽤나 많이 알게 되었다. 다만 이런 내용들을 어떠한 한 책에서 읽은 게 아니라, 이 책에서 읽고, 저 책에서 읽고, 요 책에서 읽는 등 정말 수 많은 책을 읽으며 알게된 예술문화 지식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책 『TAKEOUT 유럽예술문화』는 내가 수 많은 책들에서 조금씩 알게된 내용들을 한 권에 아주 가득가득 담아내었다. 음악, 미술, 문학, 건축 등 ‘예술’이라고 칭하는 모든 분야들을 갈고리로 아주 작은 것 까지 긁어모은 것마냥 전부! 이렇게 보면 모든 예술작품을 총 망라한 문화 인문학책 같다. 헌데 이 책이 정말 신기한 게, 어려운 기존의 인문학책과는 달리 쉽다. 정말 매우 쉽다. 읽는 대로 쏙쏙 뇌에 박히는 기분? 그래서 그런가? 저자는 이 책을 ‘인문교양에세이’라고 칭했다. 



예술에 대해선 1도 몰라서 예술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싶은데, 기존의 예술문화 책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왜? 라파엘전파?


주류 회화 사조를 이끈 대륙의 프랑스에서 19세기 중반 사실주의가 성행할 시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라파엘전파라는 일단의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라파엘로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르네상스의 대가들 중 라파엘로를 호출하여 전면에 내세웠을까요? p 103



그런데 같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인이라도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 비해 라파엘로는 좀 처지는 감이 있습니다. 3인방에서 더 좁게 들어가 르네상스의 쌍벽이라 하면 그를 제외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를 가리키기도 하니 말입니다. (…) 라파엘로의 경우는 후대의 평가도 그렇지만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공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걸출한 역량을 보였기에 그렇게 평가되는 것도 있으리라 보여집니다. 그런데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피렌체를 중심으로 공유했던 이들 3인의 생전엔 라파엘로의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말입니다. p 107



사실 그들은 라파엘로 한 사람만을 호출해 예술의 시계를 그 이전으로 돌리자는 형제회를 조직했지만 실상은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물론 위에서 열거한 모든 르네상스 화가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새로운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중세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 구현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는 중세의 예술이 그 대상이 인간이든 자연이든 그것들을 가장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p 108



생각해보면 그렇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2인을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아주 자연스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라파엘로도 분명하게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인건 맞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르네상스 ‘대표주자’ 라는 키워드로 당대의 화가들을 떠올리자면, 유독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만 떠오른달까? 아마도..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않을까 싶다.



하지만 19세기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21세기를 사는 나와 달랐나보다. 그들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켈란젤로나 다빈치가 아닌, ‘라파엘로’를 선택했으니까. 왜? 놀랍게도 르네상스 당대에는 라파엘로가 대중적으로 제일 인기가 많았다며...!



당대에 제일 인기많고 유명했던 ‘라파엘로’의 이름을 빌려서, 주목을 받으려고 했다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인건가 싶음!




 



그런데 왜 그들의 사조를 라파엘전파라 불렀을까요? 정확한 저의 의문은 미켈란젤로도 있고 다빈치도 있는데 왜 하필 그중에서 라파엘로만을 콕 집어서 그렇게 희생양의 간판으로 내세웠냐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전파, 다빈치전파 등 이런식으로 그들을 호출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의문의 1패입니다. 더구나 라파엘로 그는 그들 중 막내로 태어났고 그들과는 달리 37세에 죽음으로써 가장 먼저 죽은 애처로운 천재였는데 말입니다. (…) 지금부터는 저의 추측입니다. 일단 저는 라파엘로의 외모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초상화입니다. 그의 외모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와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서구 역사상의 예술가라면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근엄한 얼굴에 긴 수염등으로 아우라가 및나는 그런 얼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얼굴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얼굴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혼으로 살다 노총각인 37세이 죽었으니 그 전 모습일텐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너무나도 매끄럽고 핸섬한 외모입니다. 마치 요즘 시대 우리나라 아이돌 뺨치는 외모입니다. p 118~119



1520년 37세의 라파엘로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바티칸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는 신께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를 지상에 잠깐 내려보냈다가 데려가셨다고 할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라파엘로였습니다. p 121





저자의 주관적인 추측이기도 하지만, 왠지 내가 봐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초상화를 나열해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라파엘로를 선택할 것 같다. 라파엘로의 아이돌 버금가는 외모만으로도 확실히 대중적인 인기를 확 끌것같은 느낌? 그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빈치랑 미켈란젤로의 초상은 뭐랄까 너무 근엄해서, 섣불리 다가가기가 어려운 포스가 있으니까. 더군다나 그 두 사람의 초상화는 사실주의 보다는 왠지 거룩하고, 성스러운 종교화에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지만 라파엘로 초상화는 거룩하거나 성스러운건 일단 둘째치고, 잘생겼........ㅋㅋㅋㅋ 흠흠. 무엇보다 다른 미사여구 없이 오롯이 얼굴만 보이는게 그나마 사실주의와 어울리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뭐, 예술은 주관적인거니까?!



니체와 19세기 유럽의 여성


“남자의 행복은 Ich will, 여자의 행복은 Er will”

“남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페르시아의 현자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남녀의 행복에 대해 독일어로 한 말입니다. (…) 이 때 남자의 행복은 별 이견이 없지만 여자의 행복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의 경우 배우자인 그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는 것만이 행복이라면, 그 안에 여자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그녀의 그가 행복해야 나인 그녀도 행ㅂ고하고, 그가 불행하면 그녀인 나도 불행하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마치 유교가 지배하던 우리 이조시대 여인의 삼종지도를 연상하게 하는 니체의 글입니다. 그럼 결혼하지 않았거나 남친이 없는 여자의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니체의 말대로라면 무조건 불행해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p 173~175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엔 여성이라면 읽기 힘든 심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여자는 남자의 장난감이며, 마음의 깊이가 얕고, 잘 변하며, 여자에 있어서 남자의 목적은 임신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자는 여자를 찾아갈 때 채찍이나 회초리를 잊지 말라며 이것은 진리라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19세기 만의 진리겠지요. p 175



니체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워낙 유명한 책이라 그 제목은 알고 있었으나, 솔직히 읽어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내용도 몰랐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니체의 가치관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게 함정이다.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요약이 아닌, 책을 쓴 19세기의 지성인 니체의 가치관 말이다.




저는 지금 이 책의 뒤편에 있는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를 쓰면서 구상한 내용을 이렇게 연동해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그렇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저항하며 힘들게 살았는데 정작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반대편 남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지성남이기에 충분히 대표성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말이 굳어진 글을 통해 보면 그의 여성관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결과는 위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시다시피 거기에 답이 원히 나와 있습니다. p 176



물론 니체는 뛰어난 천재이고 난해한 철학자이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그의 여성에 대한 서술 중 범부인 제가 이해 못하는 많은 비유와 상징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평생의 연인인 루 살로메에게 차이자마자 채 한 달도 안 걸려 쓰인 책으로 알려졌듯이 여성에 대한 그의 적대적인 반감이 배가 되어 표출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녀에게 절절맸음에도 괜히 센 척하려고 그의 작품에선 여성을 그렇게 비하하며 표현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p 177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니체의 가치고나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심각하게 찌질하고, 편협적이라는게 참으로 경악스럽다. 더 슬픈건 당대 최고의 지성인의 가치관이 이정도이니, 그 시절의 평범한 남성들은 어땠을지라는 것. 중세유럽의 여성은 인권은 바닥이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일컫는 사람의 눈으로 보니 더욱 와 닿는다.



이렇게 여성이 차별받았던 19세기 였음에도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여성들은 그 자체로 매우 위대하다 할 것입니다. 사고와 연구를 통해 결과물을 산출하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영역은 여성들에게 막혀있던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낸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녀들의 온전한 이름으로 표현된 예술과 문학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21세기인 오늘날까지 니체가 살아있다면 그는 여자의 행복을 무엇이라고 정의할까요? 또 짜라투스트라에게 떠밀려나요? p 179



그럼에도 당대의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려고 발버둥을 쳤으니, 그 내용이 바로 아래의 내용이다!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


이름 없는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그렇습니다. 물질과 인간을 혁명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끝난 19세기에 들어서도 그 안에 여자는 없었습니다. 정확히 여성은 그녀의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일련의 여성들이 그간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금단의 영역인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p 381



중세 유럽은 여성들의 인권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동양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뭐.. 여튼지간에!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자유와 평등, 박애를 주장한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지난 뒤에도 여성의 인권은 역시나 바닥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여성들이 작곡을 했다는게 넘나 놀라운 이야기! 그동안 내가 읽었던 역사책에는 음악 관련 이야기는 많지 않았던터라, 정말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었다.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 그들은 한 형제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설을 쓴 유명 작가들입니다. 그 3형제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1847년 같은 해에 그 작품들을 출간하였습니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어 …. 그 작품들의 작가가 남자?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초판 출간 시 그 작가들은 남자였습니다. 남자 필명을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앤 브론테 이 세 자매는 왜 남자 이름으로 책을 내었을까요? p 382



맏언니 샬롯 브론테는 자매들이 쓴 시를 모아 당대의 유명 작가에게 보내 평가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돌아온 응답은 “문학은 여자의 일이 아니며, 여자는 작가가 되고파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황당한 평가였습니다. 작품의 질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성을 평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고육지책으로 필명을 남자로 바꾸는 도발을 감행하며 이후 각자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p 383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등이 구체제라 불린 기존의 사회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면 변화시켜 19세기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혼란은 당연하였습니다. 남녀 문제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남성은 기득권을 상징하며, 여성은 남성에 맞서는 도전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해도, 근대화가 되어도 그 안에 여성들은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이 말은 해리엇 마티노라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이자 사회학자가 당시 유럽 지식인 여성의 현주소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여왕이었는데 말입니다. p 385



놀랄 ‘노’짜는 책을 읽는 내 지속되었다. 고전문학 중의 고전문학이라 일컫는 고전문학 탑티어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가 초판 발간 당시에는 오우!! 남자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었다니!!!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야 이해할 수 없을 노릇이지만, 당시의 여성 인권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직업을 금지당한 여성들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절대 이룰 수 없는 직업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를 비웃 듯, 남자의 이름을 써서 책을 출간한 브론테 자매를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브론테 자매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지만, 그러지 못한 여성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녀들이 쓴 명작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손님이 찾아오면 여성들은 지식인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바느질을 해야 했다.”



지구에 인류가 살기 시작할 당시에는 분명 모계사회였다. 이건 역사적으로도 명확한 사실. 그러다 잉여재산이 생겨나고, 계급이 생겨나면서 모계사회에서 점차 부계사회로 이동하였다. 문제는 이 이후다. 부계사회로 변화된 건 이해하겠는데, 어찌하여 여성의 인권이 나락으로 떨어져야했던걸까? 마음에 안들면 여성을 언제든지 마녀사냥으로 죽일 만큼, 여성의 인권이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했던 이유가 있던걸까? 참으로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혁명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그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참여한 여성 중 올랭프 드 구주가 가장 크게 분개하여 여성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녀가 싸워야 할 적이 베르사유 왕궁의 왕족와 귀족에서 혁명 정부의 남자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했던 권리는 여성의 정치 참여가 가능한 참정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1793년 단두대에 올라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p 385



그런데 이런 19세기 였음에도 음악은 좀 달랐나봅니다. 남성의 전유물인 정치와 지적 요소가 투입되는 문학과는 다르게 여성의 영역으로 본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남성들의 눈에 긴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여식의 모습과 피아노의자에 앉아 연주를 하는 모습은 동일하게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업 연주까지는 여전히 힘든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누나도 성인이 되어서는 음악교사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여성은 거기까지였습니다. p 389



하지만 남성들이 아무리 견고하게 방해해도 이렇게 음악적인 재능과 흥미로 분출되는 창작 욕구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들은 문학계의 여성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녀들이 작곡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초기에 동생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그녀의 곡들을 발표했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남편인 로버트 슈만과 공동 명의로 작품을 발표해 어느 작품이 그녀의 작품인지 알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녀들의 별난 노력까지 더해졌기에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여성 작곡가들의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여성들이 작곡한 악보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버려졌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지금도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 p 391



그럼에도 다행인건 여성의 인권이 억압되는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그 부조리함을 이겨내고자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왔다. 누군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세상 밖에 내놓기 위해 남성 가족의 명의를 빌리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여성의 인권을 위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21세기를 사는 나를 비롯한 여성들은, 그녀들이 살던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유럽의 예술문화의 뒷 이야기가 내 머리속으로 콕콕콕 들어박히는 것이, 이 책.... 확실히 물건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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