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별맘의 쉬운 요리 -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집밥 레시피
최상희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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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요리책이다. 정확히는 어른용 요리책?! 뿡뿡이를 낳고 나서 몇 개월간 이유식 만드는 요리책만 보다보니, 이렇게 내가 먹을 수 있는 요리책을 보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진짜 이유식 요리책을 보면서 따라할 땐, 하. 그저 재료 본연의 맛(?)을 위한 손질과 찌고 익히고 삶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내가 먹고 싶은 마음이 아주 1도 없었다. 짭쪼름하고 달달한 어른 요리만 먹던 사람이, 갑자기 재료 본연의 맛을 위한 이유식을 만들고 있으니 그게 먹고싶을 턱이 있나T_T.


그래서 그런가 정말 진짜 이렇게 제대로 된 요리책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무엇보다..우리 뿡뿡이...지난한 이유식 기간을 지나,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있으니까! 요즘말로는 유아식이라고 해야하나. 다만 간은 좀 덜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이 음식이라도 무염, 무당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ㅋㅋㅋ 아이들도 맛있어야 밥을 먹을테니까. 맛없는데 누가 먹겠어!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있는 뿡뿡이를 위해서라도, 매 끼니마다 식단 걱정을 안할 수가 없다. 매일 같은 것만 먹이자니, 매너리즘 올 것 같은. 지금이 딱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요리책이 눈 앞에 강림하다니 흑흑흑. 매일 하나 씩은 솔직히 힘들고, 주말에 한, 두개 정도는 이 요리책에 있는 메뉴를 만들어어서 뿡뿡이에게 줘봐야겠다. 뭐, 간은 ... 어른보다 적게 하면 되는거니까!

이 요리책 『금별맘의 쉬운 요리』는 집밥 레시피를 표방한 요리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요즘 말하는 ‘집밥’은 예전 ‘집밥’과는 다르다. 예전에 말하던 집밥은 소위 국과 밥, 반찬 몇가지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 말하는 집밥은 예전 집밥에 더해서 카페에서 먹는 브런치, 특별한 날에 먹는 일품요리, 아이에게 해주는 간식 등! 이 모든 요리가 다 집밥에 포함된다. 왜? 이제는 모든 요리들을 집에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 요리책에 키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책이 말하는 집밥 레시피는 요즘 말하는 집밥 레시피다. 그러니까, 일반 국, 밥 요리를 포함해서 브런치나 간식 등 레시피가 포함되어있다는 것! 우리 뿡뿡이 간식까지 쌉 가능이라는 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일 마음에 듦)

요거 말고도 이 요리책의 장점이 더 있다.


일단 식재료! 고가의 식재료나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냉장고(또는 펜트리)에 있을 법한 아주 친근한 식재료를 사용한다. 간혹 집에 없는 식재료가 나올 때가 있는데(예컨데 장기간 보관이 어려운 제철 채소), 이런건 그냥 집 앞 마트가서 사면 된다.

그리고, 이 요리책은 레시피다 쉽다. 정말 쉽다. 요리과정이 복잡하면, 따라하기도 어렵지않은가. 하지만 이 요리책은 ‘간단한’ 집밥을 표방하는 지라, 레시피 사진 최소 4컷 ~ 최대 8컷이다. 사진 밑에는 요리방법 몇 줄 포함. 세상 간편한 방식으로 일품요리가 완성된다.

요리책에서 제일 중요한 계량법도 쉽다. 스푼은 밥숟가락 및 티스푼 기준으로 하되, 정량(!)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 중량까지 표시했다. 사진포함은 당연한 일. 물이나 간장같은 액체류 계량은 종이컵 및 쌀 컵 기준이다. 역시 중량 표시도 철저하다. 이 외에도 주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후라이팬(냄비) 등 길들이는 방법은 덤!

개인적으로 스테인리스 제품을 많이 사용하다보니(특히 아기 식기류), 이런 건 정말 꿀팁인듯!

본격적인 레시피에 들어가기 전에, 집밥만들기에서 중요한 ‘육수’ 만들기나, 재료손질법, 냄비로 찜요리 하는 법도 있으니 확인은 필수!



이 요리책의 레시피 구성방식은 아래와 같다. 브런치 달걀토스트 레시피(p.44) 다. 레시피 사진 6컷, 요리법 5줄 ㅋㅋㅋㅋㅋ 세상 간단하다.


  1. 빵 한면에 버터를 각각 바른다.

  2. 버터 바른 면에 슈가 파우더(또는 설탕)을 골고루 뿌린다.

  3. 빵 가장자리에 마요네즈를 2겹으로 올린다(마요네즈를 꼼꼼히 발라야 달걀이 옆으로 새지 않아요!).

  4. 모차렐라 치즈를 올리고 달걀 1개를 올린 뒤 노른자를 터트린다(노른자를 터트리지 않으면 노른자 윗부분만 익어 딱딱해질 수 있습니다).

  5.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180℃에서 11~12분간 돌린다.

*포인트: 버터는 미리 실온게 꺼내 말랑한 상태에서 바릅니다. 만약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딱딱한 상태라면 전자레인지에 10~20초 정도 돌려요. 반숙 상태로 익히고 싶을 땐 180℃로 8~9분 정도가 적당해요.

예전엔 에어프라이어 있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 요즘은 집집마다 에어프라이어는 물론 오픈까지 보유한 집이 많으니 뭐. 이제 집에서 손쉽게 브런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시대라는게 새삼 놀랍다. 우리집만 해도 광파오븐(에어프라이어/찜기 겸용) 사용중이고..하하하.

어떤 음식을 만들어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다가, 브런치 카테고리에서 예전에 한 예능에서 보았던 ‘클라우드 에그’ 레시피가 있어서 조금 반가웠다. 뢰스티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구름모양(?)같은 흰자 먹어보고 싶었기도 했고 ㅋㅋㅋ 물론 만드는데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레시피를 보니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요리도 아니었다.

클라우드 에그, 주말에..한번 시도해봐야지 ㅋㅋㅋㅋ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요리는 손질이 귀찮아서 섣불리 손이 안가긴 하지만, 요즘은 뿡뿡이 때문에 이것저것 많은 식자재를 사고 손질하고 있다(신랑이ㅋㅋㅋ). 이왕 요리하는 우리 신랑이니, 스키야키 해달라고 졸라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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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예능에서 우리나라 4대 종교 지도자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놀라웠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스님, 신부, 목사… 그들이 믿는 신은 다르지만, 그들이 향하는 길은 그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길일 것이라고. 근데 이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오늘 읽은 #시집 『빛섬에 꽃비 내리거든』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시집은 원경 스님과 김인중 신부님의 합작품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두 종교인이다. 부처를 믿는 스님이 시를 쓰고, 예수를 믿는 신부님이 그림을 그렸다. 이 둘의 시와 그림은 원래부터 한 세트인것 마냥 조화롭다.




시와 그림 무지렁이인 나인데도, 원경 스님의 시편과 김인중 신부님의 회화(스테인드 클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한 구석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스님이 쓰신 시에서 ‘감사함’이, 신부님이 그린 회화에서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는 이분들이 단순히 종교인이라서가 아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인이 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울림을 주는 종교인들은 생각보다 드문편이기도 하고.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원경스님과 김인중 신부님이야말로 요즘같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이 아닐까? 비록 지금 세상은 정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타인은 커녕 지인마저도 조심해야할 정도로 무서운 세상이 되었지만. 이런 분들이 계시는 한,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빛섬과 달빛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빛섬이 되었다

어둠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도시도시마다의 빛섬


가없이 빛사래 치는 하늘별들을 닮아

스스로 빛을 지녀야 한다며

어둠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빛섬


모정처럼,

늘 마음 놓지 않고 빛섬 위를 맴도는 달빛

어둠 바다의 등대인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절집의 꽃문살이 달빛에 어리듯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햇살의 신비를 안는다


섬김이 미덕의 옷이기에

절집 공양의 정성처럼

봉헌 속에 빛난다


동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처소 없이 해와 달과 함께 꽃이 피거늘

서로 비추고 거울처럼 마주하노라면

저마다의 빛으로 향기 오간다


화장세계이기에




달과 모닥불


무지의 빛 검은 어둠이 있기에

달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냉정한 차가움이 있기에

모닥불 같은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의 길을 나섰기에

빛이고 불꽃이고 싶습니다




혼빛

그대는

빛의 혼을 그리는데


그리움 그리움 그리다 그리다

화룡점정에 이르러

쓰러져 잠드시리


잠 못 드는 한밤의 꿈을 꾸다가

새벽에 드는 비울음처럼

그리 쓰러져 울다 잠들면


바람도 쓰다듬듯 달래며

새날을 맞으리



시와 그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집이다. 마음 속 여유가 사라져, 각박해진 요즘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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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화는 밤새도록 끝이 없지 - 두 젊은 창작가의 삶과 예술적 영감에 관하여
허휘수.서솔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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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21세기. 내 우편함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봉투 형식의 우편들이 다수 꽂혀있다. 하지만 그 우편 속에 오롯이 나를 향한 사적인 글, 예컨데 ‘편지’는 이미 사라졌다. 대체로 ㅇㅇ은행, ㅇㅇ카드, ㅇㅇ공단 등에서 보낸, 아주 대놓고 공적인 서류들이 우편봉투에 고이 담겨있을 뿐이다. 나를 향한 ‘편지’를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잘 생각해보면, 난 편지를 자주 쓰던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멀리 이사 간 친한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내면 시차는 있었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편지’가 왔다. 그 편지들은 지금도 친정 서랍 한켠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지금은? 편지는 무슨! 흔한 깨톡 한 줄도 보내기 귀찮다. 지금 내 모토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어제까지만해도 그랬던 나다. 

에세이 『우리 대화는 밤새도록 끝이 없지』를 읽었다. 문득 그때가 그리워졌다. 편지를 주고 받던 순수해던 그 시절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며, 편지 받을 그들을 생각하던 내 모습이. 편지쓰기를 즐겨하던 과거의 나는 어디가고, 왜 감성따윈 쌈싸먹은 세상 무감각한 어른여자가 되어있는지! 



이 에세이는 책이기 이전에, 저자 허휘수X서솔의 ‘대화’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다. 물론 난 이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유명한 유튜버이자, 예술가라지만, 난 유튜브도 안보고 예술과도 거리가 엄청 먼- 사람이기에. 그럼에도 이들의 대화는 나에게 자그마한 울림을 주었다. 왜? 누군가와 끊임없는 ‘대화’라는게 보통 그렇지않나.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친근감이 느껴지고, 동질감이 느껴지고 막 그런거. 이들이 쓴 에세이가 나한테 딱 그랬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내 생각이 어디서부터 생겨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지, 궁금함에 고통스럽던 밤이 있었다. ‘어린이’에서 ‘학생’으로 넘어갈 무렵, 호기심은 내 생각의 근원이었다. 그 시절 나는 생각의 꼬리를 찾기 위해 한쪽으로 빙글빙글 몸을 돌려 일부러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어지러움을 못 이기고 이불에 풀썩 주저앉으면 이내 생각은 멈추고 몽롱한 상태만이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생각의 방황, 이것이 나의 사춘기였다. p 047, 서솔

처음은 한 번뿐이기에 고귀하고, 다시없을 순간이라서 기념한다. 처음의 기준이 뭔데? 기준을 세우는 것은 만족스러운 처음을 만들려는 시도다. 처음은 그냥 처음이다. 정의와 기준은 개인적이다. 과도한 의미부여는 사이비를 낳는다. 그럴듯한 처음이란 건 없다. 처음은 처음이다. p 048, 허휘수

어렸을 적 ‘처음’이라는 단어에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아마 저자 휘수처럼 딱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시기였으리라. 무엇보다 당시에는 ‘편지’쓰기를즐겨하던 감성많은 소녀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 사춘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감성’많은 시절도 짧았다. ‘처음’에 의미부여를 하던 시절은 짧게 지나갔고, 그저 처음이고 나발이고. 복잡한 생각들을 놔버렸다. 그저 단순히 살자!

보통 갑작스런 변화는 어떠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사건이 잘 떠오르진 않는다. 확실한건 그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확신이 들면, 빠르게 머리속에서 지워나갔다. 사람도 포함해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처음’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할 만큼 감성이 있지는 않은듯! 

뭐 요즘은 육아를 하면서 감성이 조금 필요하지 않나 싶긴 하다. 누군가는 아기가 처음 하는 모든 행동을 저장하고 기록하는데, 나는 뭐. “했네? 대단해!” 이 정도니까. 아기의 ‘처음’은 의미를 부여하고, 기록해줘야하나 싶기도 하고. 요즘은 그렇다.


이름이 두 개인 사람

나는 예술가인가 아닌가? 나는 창작가인가 아닌가?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양새에 따라 무엇으로 반드시 분류된다. 태어난 날에 따라 신생아에서 어린이로 바뀌며 교복을 입는 순간 학생이 된 뒤 직업에 따라 적당히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바뀐다. 마땅이 취업해야 하는 나이대가 될 때 사람은 세 가지의 이름으로 다시 분류된다. 취업 준비생, ㅇㅇ사원, 그리고 백수. 그것도 아니면 구직 포기자 등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나를 설명하고 집어넣는 단어가 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반드시 무엇인가로 분류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서솔이라는 표본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무엇일까? p 080, 서솔

내 이름은 뭘까? 좋은 세상 덕에 엔잡러.

그게 아니었으면 그냥 이곳저곳 떠도는 보부상.

돈 되는건 일단 떼어다 파는 도매상.

나도 팔고 춤도 팔고 영상도 팔고 글도 파는 잡상인.

예술가이고 싶었는데, 열심히 살 수록 예술과 멀어지는 듯 하다.

어쩐지 떠나온 육지도 안 보이고,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의 선장. p 080, 허휘수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양새에 따라 무엇으로 반드시 분류된다.’ 저자 서솔의 말이다. 정말 십분 공감한다. 지난 3n년 간을 살아오면서, 내 이름은 두 개 이상이었다. 지금 날 부르는 이름은? 등본에 씌여진 내 이름과 뿡뿡이엄마, 피로님, 그리고 회사를 다니는 ㅇㅇ매니저. 이름이 몇개야? 여기서 진정한 나를 부르는 이름은 뭐지? 조금 슬픈 사실은, 앞으로도 난 사는 동안 내 진정한 이름을 찾지 못할 것 같달까. 정확하게 말하면 앞으로도 등본에 씌여진 내 이름은 계속 불릴 일이 없을 것 같달까. 애기 엄마의 비애인가....



가끔은 나도 이 에세이를 쓴 허휘수x서솔 님처럼 하루종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는데! 친구와 대화를 할 여유? 아니 그전에 속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과거에는 이런 친구가 바로 내 옆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고. 수다삼매경을 하고 싶은 또 다른 친구22는 바다 건너 저편에 살아서, 일 년에 한 번 만나기가 어렵고. 나보다 날 더 생각해준 또 다른 친구333는 서로 일하는 환경이 달라서 만나는 시간 잡기가 어렵고. 하, 인생 3n년을 살았는데 역시 삶은 녹록치 않구나. 

그래도 나에겐 평생지기가 있으니까! 오늘은 빠른 육퇴(!)를 하고 내 평생을 함께할 신랑이랑 신나게 수다를 떨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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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9-06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3n살이시니까 신랑이랑 수다 좋지요~~~

전 5n이라 그런가 남편이랑 수다가 안돼요. 신랑이 아니라서 그럴지도요..
신랑님이랑 정다운 수다 넘치는 좋은 밤 되시길~~~
 
발밑의 세계사 - 페르시아전쟁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지리의 순간들
이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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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진 않았는데, 요즘 세계사책을 자주 읽는다. 그것도 통사 위주로! 내가 주로 읽는 책이 역사책이긴 하지만, 대체로 한국사 위주였는데. 이거참. 이러다 세계사책 편식하게 되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하하하..하하하. TMI 각설하고!



요근래 읽은 세계사책마다 주제(또는 지향점)가 달라서 그런지, 같은 장르여도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 『발밑의 세계사』도 그렇다. 통사이긴 하지만 서술하는 관점이 ‘지리(또는 지정학)’ 기준이다. 아직까지 세계사는 ‘정치사’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서 그런가, 진부한 표현이지만 역시나 나와 다른 관점은 새롭다. 역사는 어떠한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그 재미가 배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이 역사책 『발밑의 세계사』는 초보자용 입문서는 아니다. 그렇기에 세계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다. 세계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일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사를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컨데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수업을 받았고, 어느정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사 초급교육(?)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 책만큼 세계 역사를 정리하는데 수월한 역사책은 또 없다.




『발밑의 세계사』는 시대순으로 동양과 서양이 골고루 배치하여 서술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동양과 서양이 따로 국밥이 아니라는 점. 한마디로 동, 서양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알고보면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지리(또는 지정학)적인 맥락으로 보면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서 유독 마음에 들었던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



1n년 전 학교 정규 교과시간에도 배웠던 내용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고는 ‘훈족의 남하로 인해 어쩌고저쩌고~’ 정도가 끝이다. 동, 서 로마가 왜 분열했는지는 아예 기억도 안나고. 아무래도 학교 교과과정 목적 자체가 ‘시험 고득점’ 이기에, 방대한 세계사 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여력도 안될 뿐더러, 굳이 시험에 안나오는 내용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내 머리속에는 동, 서로마의 분열과 ‘훈족이 왜 이동했는지’ 가 연결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으니 머리속에서 그려지지 않아서, 아무리 세계사책을 봐도 머리속에 남지가 않았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공백으로 남았던 동, 서로마 분열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 덕분에 제대로! 정립되었다. 심지어 이 챕터는 두 세번 정독했다. 이제서야 한 켠에 남아있던 역사공백이 채워진 느낌이랄까?




그래서..ㅋㅋㅋㅋㅋ 내 역사공백을 채워준 그 챕터 내용을 아래에 옮겨왔다.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의 숨겨진 이유? 기후변화! (그리고 훈족의 탄생)


3세기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로마. 영토가 넓다는 것은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넓은 영토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로마는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동로마, 서로마로 분할 통치를 시작했다. 시작은 동방은 황제, 서방은 부황제였다. 무엇이든 새로운 제도는 부침이 따르는 법. 어찌저찌 동, 서로마 분할 통치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3세기 들어 로마는 곳곳에서 발생한 피지배 민족의 반란과 국경을 혼란하게 한 이민족의 침입, 군대의 황제 폐립 등으로 휘청거렸다. 아예 이 시기를 정의하는 ‘3세기의 위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58년 제국의 동방은 황제가, 서방은 부황제가 다스리는 체제가 도입되었다. 너무 거대해진 제국을 황제 일인이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제국 서방의 부황제가 황제로 승격되며 황제 두 명이 다스리는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 293년부터는 두 명의 황제를 두 명의 부황제가 보좌하는 4제 통치가 시작되며 3세기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p 108



때마침 중앙아시아에 살던 훈족이 선진하고, 이에 밀린 게르만족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로마의 지배하에 안정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유럽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남하로 군사력을 대거 소진한 로마는 결국 395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쪼개졌다. 특히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을 정규군으로 흡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100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476년 멸망했다. p 109 



동, 서로마 분할통치가 자리잡힌 게 무색하게, 1세기 만에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게르만족 침입에 의해서. 이후로 유럽 일대는 우리가 사는 21세기, 현재까지 통일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게르만족은 갑자기 왜! 서로마를 침입한걸까? 그 이유는 예상외로 우리가 다 알고 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던 훈족이 게르만족이 살던 지역까지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영토를 빼앗긴 게르만족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로마 제국 밖에 없었다.





질문을 바꿔보자.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훈족은 왜! 게르만족 영토를 침범했을까?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훈족의 전신인 흉노족과, 몽골 일대까지 휩쓸었던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를 알아야만 한다. 



우선 훈족의 전신인 흉노족은 누구인가. 고대부터 중국 왕조를 수시로 침략했던 유목/기마민족이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 진나라는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심지어 한나라는 흉노족과 2백여년간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한 무제가 흉노정벌에 성공하면서, 흉노족은 터전을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몽골 일대가 척박해져 목축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한나라 무제마저 대규모로 공격해오니, 이를 버티지 못하고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기후변화는 고대에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흉노족이 고향을 떠나고 수 세기가 흐른 뒤에는 로마가 기후변화로 고난을 겪었다. 고향을 떠나 유라시아를 유량하며 독기를 품을 대로 품은 훈족과 거대하지만 이미 무력해진 로마가 만나 큰 파도를 일르켰다. 유럽의 분열은 바로 이 동서양 충돌의 결과였다. p 109



흉노족은 도망치듯 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앙아시아 북부와 캅카스 일대에서 살아가던 여러 민족 집단과 통혼했다. 그 결과 흉노족의 외모는 금발벽안, 적발녹안 등으로 묘사될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그렇게 여러 세대가 지나자 흉노족의 후예, 또는 흉노족과 관계를 맺은 중앙아시아의 민족 집단들을 통틀어 훈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p 113



기백년간 중국 왕조를 유린했던 흉노족이 갑자기 한나라에 정벌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기후변화다. 흉노가 살던 몽골 일대는 유목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 무렵부터 급격하게 한랭기후가 시작되며, 생계가 어려워졌는데 타이밍 좋게 한무제가 흉노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특히나 당시 한나라는 몽골일대와 달리, 온난한 기후로 국력까지 높아진 상태였다.



중앙아시아 일대로 터전을 옮긴 흉노. 흉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있던 여러 종족들과 혈연을 맺었다. 이들이 우리가 말하는 ‘훈족’이다. 훈족은 그렇게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는 또다시 찾아왔다. 훈족이 살던 4세기 중앙아시아로. 



4세기다 되어 중앙아시아의 기후는 또다시 급변했다. 강력한 엘니뇨-남방진동으로 338년부터 377년까지 중앙아시아는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었다. 남동태평양과 서태평양 사이의 기압은 서로 역상관관계로, 마치 시소처럼 한쪽이 높아지면 다른 한쪽은 낮아진다. 이를 남방진동이라고 한다. 엘니뇨는 남아메리카의 페루와 에콰도르에 면한 열대 해상 수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엘니뇨가 발생하면 남동태평양의 기압이 낮아지므로, 남방진동에 따라 서태평양의 기압은 높아진다. 경우에 따라 서태평양 너머 인도양까지 영향받기도 한다. 그러면 중앙아시아에 가뭄이 들 수 있다. p p114



훈족은 살기 좋은 땅을 찾기위해 계속 서진했고, 그렇게 그들은 게르만족이 살던 영토를 차지했다. 당시 게르만족은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에, 국가적 대처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영역을 잃은 게르만족도 역시나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곳이 바로 서로마 제국이었다. 그것도 전성기가 끝나고, 대내외적으로도 혼란했던 서로마 제국. 그렇게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일대의 기후변화가 로마의 운명, 아니 유럽 일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특히 3세기 급격한 한랭화는 유럽 일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유럽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수차례 화산폭발까지 발생하였다. 기본값인 한랭기후에 화산재까지 덮여서 로마 국력은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했다. 내부 권력다툼은 덤이다. 그런 상황에서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으니, 서로마제국이 이를 방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서로마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서로마 제국이라는 주인이 사라진 빈 땅에 여러 게르만계 국가가 생겨났으니, 이는 사실상 오늘날 유럽 지도의 근간이 된다.




놀랍지아니한가. 그저 학교에서 배웠던 동, 서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을 줄은. 정말 이런 맛에 내가 역사책을 읽는다. 물음표로 남겨뒀던 역사 공백이 이 책 덕분에 하나, 둘 채울 수 있었다.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이 역사책은 지리, 지정학적 관점으로 서술된 세계사책이다. 따라서 ‘정치사’에 대한 설명은 빈약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기본교육을 받았다면, 이 책만큼 세계사를 정리하는 데 효과적인 책은 또 없다고 자부한다. 정말 세계사 역사책으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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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5
정토웅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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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전쟁사 책이다. 세계 전쟁사는 이전에도 책을 수차례 읽어본 적이 있고, 무엇보다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열혈 시청자(!!) 였던 나인지라 전쟁사는 내게 익숙한 분야다. 다만, 여기에 함정이 있으니! 언제봐도 동양 전쟁사는 이해가 잘되고, ‘아?’ 하면 ‘맞아맞아!’ 하고 바로 넘어가는 반면 서양 전쟁사는 매번 처음 보는 기분이랄까T_T. 하. 이건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건가? 그냥 영어로 이루어진 전쟁 이름이 싫은건가. 후....




정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동, 서양 전쟁사를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한건 서양 전쟁사라는 점이다. 예컨데 고대 전쟁사를 보자. ‘트로이 전쟁’, ‘마라톤 전쟁’, ‘살라미스 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 우리에게도 꽤나 유명한 전쟁들이고, 지금도 많은 정보가 아주 디테일하게 남아있는 전쟁이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은 ‘서양’에서 일어난 전쟁들이다. 



반면 우리 고대사 속 전쟁은 어떤가? 이 땅에서 여러 나라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쟁 또는 전투가 빈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국가(연맹국가)시절의 기록은 없다고 봐야하고, 그나마 나오는 기록이라고는 삼국시대 기록인데, 이 기록들마저도 ‘A국가가 B국가로 쳐들어갔다’, 내지는 ‘~점령했다’ 혹은 아예 기록 없을 무. 



우리는 세계전쟁사가 대부분 서양 위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동양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양 자료는 전쟁기록은 많지만 ‘싸움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는가에 대하여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계다. 더구나 동양문화는 서양문화와 달리 각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각국의 전쟁사는 자국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의 관심까지 크게 끌지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실증과 토론을 거치지 못한 동양 전쟁사는 별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p 038



기원전 4세기 인물인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에서 몇 명의 군인을 동원했고, 어떤 전법을 이용했고, 어떤 루트로 진격을 했는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어라? 그래서 그런가? 내가 서양전쟁사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동양 전쟁사와는 달리 전쟁사적으로 너무 디테일한 정보가 많아서?! 아 왠지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하ㅏ하ㅏ...





사담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이 세계사책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100」을 소개해보자면, 이 책은 동/서양을 아울러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또는 전투)를 100개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목차도 어디까지나 동,서양을 합친 시대순! 







목차에서 서양 전쟁(또는 전투가)이 많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정보의 불균형 때문이랄까?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듯. 참고로 이 책에는 부록형식(?)으로 세계 전쟁사 연표가 실려있으니, 전쟁사를 한 눈에 보기에도 좋을 듯. 





아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알게 된 사실이라던가, 디테일한 전쟁정보가 신기하다던가, 동/서양 전쟁 기록이 눈에 띄게 비교가 되어 체크해둔 부분을 옮긴 내용이다.


서양


아마존 전설(BC16~12세기)


그리스 신화와 전설 가운데는 아마조노마키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리스어는 여전사들로 구성된 아마존 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남자들로 구성된 전사들과 침략한 아마존 족 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싸움 잘하는 아마존 족의 침략을 남자전사들이 나서서 격퇴시킴으로써 그리스를 지켰다는 내용을 주레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성 대결적인 전투에서 남자들이 승리하고 남자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그 후 그리스 역사는 남자들이 주역을 담당하여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마존 족의 존재와, 아마조노마키는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p 011



1950년대에 우크라이나 남부지방에서는 사르마트 족 전사들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그 무덤들의 약 20%가 여전사들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젊은 여자 두개골과 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과 화살, 화살통, 단검, 갑옷 등이 나오고, 두개골이 크게 상처받은 형태나 뼛속에 박혀 있는 청동제 화살촉 등이 발견된 것은 사르마트 족 가운데 여자전사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마존 전설에서 여전사들이 활동한 지역 중 하나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사르마트 족은 그리스의 젊은 청년들과 아마존 족의 일시적 결혼에 의해 생긴 후손들이었다. p 012



아마존 전설은 문자기록이 없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은 모계중심 사회를 구성하고 여존남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또 그 당시 전쟁에서는 여자들이 두드러진 확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p 014


아마존 전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딱 ‘전설’일 뿐이었다. 헌데 아마존 여전사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 심지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까지 있다니!!!!!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 내용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다름아닌 전 세계 고대 역사에서 발견되는 여성숭배, 이른바 여성숭배에 대한 ‘문화의 보편성’.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역사(문명)에서 발견되는게 바로 나체 여신상이다. 수렵, 채집을 하는 석기시대는 모계사회 및 여성숭배가 일반적이었다. 여성은 수렵과 채집을 위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문화가 발달하고 잉여재산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노동력이 남아돌았고, 이른바 부족들 간의 땅따먹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무기를 휘두르는 강한 힘을 가진 남자들이 권력을 쥘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게 딱 아마존 여전사들 이야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한마디로 ’아마존 전설(아마존 여자전사)’ 이야기는 당대 그리스 사회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거기에 더해서 부계사회에 대한 정당성도 한 스푼 추가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 페르시아 정복(BC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하나의 전설과 같다. 특히 전쟁사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업적은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군들도 약점을 보이게 마련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오나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의 단순한 계승자 차원을 넘어서 전략 전술에서 페르시아/그리스/마케도니아 세계의 어떤 선구자보다 앞서는 개념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p 050



왕으로 취암한 2년 후인 기원전 33년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최고의 군대인 보병 32,000명과 기병 5,100명을 거느리고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180척의 군함밖에 없는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4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차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4년이 소요되었다. p 051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싸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싸움, 기원전 332년 티로스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지만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병과 보병 간 협조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필리포스가 개발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을 기초로 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 군은 먼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함으로써 적을 조직적으로 격파했다. p 052


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BC 3세기)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완전한 역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걸출한 명창 한니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니발은 도저히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카르타고 군의 이질적 요소들을 오히려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비범한 통솔력을 가졌으며, 적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혜안을 소유한 군사적 천재였다. p 061



이후 로마는 전장에서 한니발을 피하고, 그 대신 로마 지도자 파비우스의 주장에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한니발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용되는 지연전 위주의 전략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불렀다. p 062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로마에서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 두 통령이 선출됨으로써 파비우스 전략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공격적이고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이 그런 소극적인 전략에 만족할 리 없었다. (…)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한니발로서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p 063



칸나에의 섬멸전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한니발의 창의력과 주도면밀한 양익포위전술, 그리고 탁월한 통솔력 및 추진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한니발과 같은 명장이 나온 것은 바로와 같은 우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사에서 승리는 패배한 측의 과오와 우둔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p 066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은 워낙 유명하지만, 굳이 내용을 옮긴 이유는 이들이 활약한 시기와 그들이 남긴 기록때문이다. 이들이 할약한 시기는 기원 전 3~4세.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 등 초기 연맹 국가가 있었던 시기다. 기록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까마득한 옛날인데, 놀랍게도 이들의 전쟁(전투)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다. 몇 명의 군사가 참전했고 어떤 전법을 사용했고, 어떻게 적을 격파했는지 등 빠짐없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면 당대 한반도에 있었던 연맹국가 기록들은...음. 국사를 배웠다면 알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전투기록은 1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비교되는거 아닌가..ㅜㅜ



제정로마시대의 군대(BC 27년~)


기원전 27년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제1시민’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 그는 황제의 지위를 누리고 제정로마 시대의 테이프를 끊었다. (…) 그는 공화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약 60개의 로마 군단을 28개로 줄이는 개편작업을 벌였다. 과거 장군들이 제멋대로 임시 군대를 모집하는, 비경제적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위험했던 관행을 중단시켰다. 어떠한 군인도 자신이 아닌 다른 장군에게 충성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직업적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는 국가재정으로 군인들에게 보수를 지급했다. p 077



아우구스투스 후계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큰 전쟁 없이 국경지역을 성공적으로 방호했다. 제13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더 이상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기존의 경계선을 영구적으로 요새화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로마군은 대대적인 장성을 쌓고 완전히 요새수비에만 의존하는 군대로 변했다. 이제 군대는 전사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경찰처럼 변질되었으며, 활발한 이동보다는 주로 한 곳에 주둔하고, 군사적 업무보다는 엉뚱한 데 관심을 쏟아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p 078




심지어 기원전 1세기 인물인 옥타비아누스는 국방 및 군사제도를 개혁했는데, 이 모습이 현재 군인들 모습과도 흡사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 속 군사제도를 생각해보면 하하.하ㅏㅎ.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길을 잘 닦았다고 해서, 그게 대대손손 이어졌느냐! 그건 또 아니다. 후세들이 평화로운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균열이 시작되는 건 당연지사!



동양


춘추전국시대의 전쟁(BC 770~)


춘추시대 전쟁방법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양에서 유행하던 방법과 유사했다. 주로 제후나 장수들이 전투용 마차를 타고 들판에서 싸웠으며, 전차 1량에 30인의 보병이 붙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로서, 제한된 구리 생산량 때문에 장수들만 장검을 휴대하고 싸웠다. 이때 전투는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끝나고, 결과에 따라 제후국들 간의 합병이 잇따랐다. 전국시대에 7강국(진/초/연/제/한/위/조) 간 전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p 039



철이 생산되었을 때 초기에는 주로 농기구로 이용했으나 차츰 무기로 사용했다. 보병들은 철로 만든 장창과 방패를 휴대하고 철제 화살촉을 이용했다. (…) 동서양은 문화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만큼 전법에서도 차이가 컸다. 서양에서 주 공격무기는 창이었으나 동양에서는 활이었다. p 040



《손자》의 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태생의 손무였다. 오나라 제후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밑에서 유명한 장수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나라 사람이었던 손무가 오나라로 국적을 옮기게 된 데는 제나라 정치가 극도로 어지럽고 정변이 자주 발생하자 오나라에 망명을 간 것이라 한다. (…) 그 결과 약소국 오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국인 제/진/월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p 044



동양 전쟁사의 시작! 치열하게 땅따먹기가 진행되었던 춘추전국시대(중국). 정말 많은 전쟁과 전투들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위 알렉산드로스, 한니발과 비교했을 때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 뭐 어쩌겠는가. 전쟁 기록에 대한 중요도가 서양보다 낮았던 동양을 탓할 뿐. 씁쓸하구만.



진시황제와 만리장성(BC 214년)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 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p 067



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옜 장성을 보수,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이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 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p 068



이건 조금 놀랐다(아마존 전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만리장성이 진시황제 때 만리장성이 아닌, 명나라 때 축성된 장성이라니!! 뭐 중국 입장으로 볼 때, 관광명소 홍보에 있어서, 중세인 명나라보다는 고대인 진나라가 훨씬 홍보효과가 있을테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초 전쟁, 유방과 항우의 대결(BC 206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기원전 206년 부터 거의 4년에 걸쳐 전쟁을 했다. 전쟁터에서 유방은 자주 패했으나,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달아나오기만 하면 또다시 군대를 일으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전국시대 진나라가 본거지를 전략적 요충인 함양에 두고 부대를 잘 운용했던 것과 같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대의 대왕조가 모두 함양에 도읍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p 071



유방의 장수 한신은 북방 제국들을 차례로 공략하며 한나라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한신은 북방지역을 공략할 때 상식에 벗어나는 이른바 ‘배수진’의 방법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대승을 거둔 바 있는데, 이후 ‘배수진’의 아이디어는 전투상황에 따라 자주 사용되어왔다. p 071



항우에게도 한신 만한 장수로 범증이란 자가 있었지만, 항우가 그를 의심하는 바람에 초나라를 떠나버림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유방, 한신의 관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p 072


적벽대전(AD 208년)


유럽이 하나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절, 중국은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가 반복되는 가운데 잦은 왕조 교체를 보이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유럽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트깋 군대의 특성과 전술의 발달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우며, 다만 유명한 장군들의 무용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 081



동란시절 군웅들이 즐비하게 나타나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자들은 조조, 유비, 손권 등이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이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는 그가 삼고지례를 다하여 맞아들인 제갈공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며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게 되었다. (…) 적의 약점을 간파한 연합군은 화공작전을 쓰기로 했다. 화공을 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조조의 군대는 밀집부대를 이루고 있고 바람이 동남풍이 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p 082



연합군은 조조의 남방 재패의 야심을 분쇄했으며,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결국 3자는 천하를 삼분하여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문자 그대로 솥발처럼 정립하는 삼국시대를 열었으며, 다시 그들끼리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다가 280년 위나라의 사마염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을 이루었다. p 083



전체적으로 중국(동양) 전쟁사는 전략, 전술보다는 덕장이냐, 용장이냐, 맹장이냐 등 ‘인물’에 중심을 두고 기록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초, 한나라 전쟁을 두고 소설 「초한지(초한연의)」가 탄생했고, 삼국시대를 두고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가 탄생했다.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유명 소설 탄생이다(오래도록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얼마나 인물에 중점을 두었는지는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소설 「삼국지」 주인공은 다름아닌 유비. 심지어 삼국지 속 전쟁 장면을 보면, 전쟁이 메인이 아니라 전쟁을 지휘하는 등장인물들이 메인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소설 「삼국지」에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매력적으로 만든 캐릭터들은 작중에서 대부분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 실제 역사 속 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갑툭튀(!) 사마염이다. 유비나 조조나 죽써서 개준거지, 뭐.



고구려/수나라 전쟁, 살수대첩 (AD 612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서부터 흥기하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북으로 오늘날 중국 땅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쳐나감으로써 자연히 중국과 국경을 이룬 요하 주위 지역에서 전투가 자주 발생했다.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는 한민족의 대를 이어 강국으로 등장하고, 북방지역의 유목민인 선비족을 몰아내면서 국경지역을 안정시켰다. (…) 그러나 58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한나라 이래 최대 제국을 건설하고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 땅을 넘보게 되었다. p 097



적이 압록강을 건어오기 직전에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항복을 가장하고 적진을 방문했다.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을지문덕을 보내고 난 후에야 우중문과 우문술은 고구려의 항복을 의심하게 되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며 지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을지문덕은 추격해오는 우문술의 군대를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패주, 살수 이남으로 깊숙이 유인했다. p 099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소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두기 바라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제의를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평양성 공략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총 퇴각을 결심했다. 우문술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을지문덕 국은 습격을 시작했다. 적 병력이 살수에서 약 절반쯤 도하했을 때 고구려군은 후위부대를 엄습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수나라 군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일부 도주병들은 일주일 동안에 압록강까지 약 180km를 내달렸다. 30만 명의 별동대 가운데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거점방어식 청야입보와 같은 훌륭한 전법을 일찍이 개발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동북아 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p 100



그래도 동양 전쟁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빠지면 섭하다. 책 읽으면서도 점점 섭섭해질 무렵(!) 우리나라 전쟁사가 첫 등장했으니, 바로 중국과 한판붙어서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심지어 병력 수와 전법까지 있다. 하 감개무량해T_T.



고구려/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AD 645년)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마찬가지로 평양성 점령을 최종 목표로,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과하고 수군은 바다를 건너는 수륙 양면작전 전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p 102



6월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는 고연수, 고혜진 두 장수가 후방에서부터 15만 구원부대를 이끌고 왔지만 야지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를 안시성 아래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성내 고구려군은 성주를 중심으로 굳게 단합하고 결사적 항전을 벌였다. (…) 당 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기 시작하고, 공성장비로 매일 6~7회씩 공격을 퍼부었다. 고구려군은 적의 토산 건설에 대해 성벽을 더 높이 쌓고, 파괴던 성벽을 보수하면서 적의 성내 진입을 막는 한편, 야간에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을 기습했다. p 103



당나라 군은 60여 일만에 연 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토산 일부가 무너지며 성벽을 엎친 사고가 발생하자 이 기회를 이용, 고구려군은 도리어 토산을 점령하고 그것을 수비진지로 만들어버렸다. (…) 당 태종이 훌륭한 전략가로서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헀지만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결과에 이르고 만 것은 고구려의 청야입보 전술과 고구려인의 결사적인 저항을 극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접한 성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는 판에 안시성을 끝까지 사수한 성주의 용기와 공로는 당나라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성주의 이름은 우리나라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야사를 통해 양만춘으로 전해지고 있다. p 104



중국을 상대로 두번째 대승을 거둔 안시성 전투. 우리나라에서는 조인성 주연인 영화도 개봉했더랬다. 여기서 함정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 전투에는 ‘허’와 ‘실’이 있다. 다름아닌 안시성 전투의 주역, 성주 ‘양만춘’에 대한 것.



실제로 안시성 전투가 기록된 중국 정사와 우리나라 정사 「삼국사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기록이 최초로 쓰여진 건, 안시성 전투 이후 약 1백년이 지난 명나라 때 쓰여진 「당서연의(1553년)」라는 소설이다. 이 영향으로 조선 중, 후기 문신들의 기록에서는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동양 전쟁사는 서양 전쟁사 대비 기록이 부실하다. 고대는 더더욱. 그래도 중세를 지나갈 쯤엔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디테일이 붙기 시작한다. 점점더 읽을만하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대다수의 전쟁사책이 서양 전쟁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면, 이 책은 사료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아있는 동양 전쟁사를 최대한 비중있게 다뤘다. 전쟁사 초기 입문서로도 더할나위 없는 세계사책이니만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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