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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금표 - 우리는 무엇을 금지당했나?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3년 10월
평점 :
블로그 이웃이신 희태님이 오랜기간 답사 및 연구에 매진하셨던 한국의 금표. 드디어 그 결실이 나왔다. 금표라는 것이 본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인정은 커녕 전문가들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잊혀졌다. 자칭 역사더쿠라고 하는 나조차도 금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을 뿐더러, 유적지 답사를 가다가 분명히 마주쳤을 금표였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답사 당시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세상에나. 금표 사진이 있었다. 내 손으로 사진까지 찍었음에도 머리속에서 지워진 것 보면, 그만큼 금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단 이야기겠지?
금표란 금할 금(禁), 표할 표(標)에서 보듯 행위의 금지를 표식한 것이다. 주로 표셕의 형태나 바위 등에 글자를 새겼는데, 출입과 이요의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기에 금표의 분류 기준은 어떤 행위의 금지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까지 확인된 금표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산림 관련 금표로, 이 중 나무와 관련된 금표의 비중이 다수를 차지한다. p 014
금표는 특성상 소재지가 산이나 비공개 지역, 험지 및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잊혀진 것 같고. 잊혀지지니 자연히 사람들도 문화재라 인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 순간 유실되어도 유실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거고. 이래저래 참 아픈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아픈손가락에 더 관심을 갖고 챙겨준다는 말이 있다. 금표가 딱 아픈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픈손가락에 관심을 갖고 보듬은 이가 이 책 「한국의 금표」 저자인 희태님이 될거고. 추측이긴 한데 희태님 전작인 태실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은?
희태님은 이 책을 쓰면서 금표에 대한 역사성을 살리고자 남아있는 사료들 교차 검증 및 금표가 세워진 배경이나 사건도 같이 조명했다. 역사책이다보니 왜곡, 축소 및 과장을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희태님은 ‘아는건 아는대로 쓰고 모르는건 모르는대로 남겨둔다’는 모토 아래 책을 집필하는 분이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제일 큰 장점은 사진자료라는 것! 모든 금표 사진 자료는 물론 역사적 배경 및 사건 설명에 대한 사진자료까지 전부 실려있다. 접근하기 쉬운 장소부터 시작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험지까지 모든 사진자료가 다 있다. 이를 보다보면 현장을 답사한 희태님이 금표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역사더쿠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이도학 교수가 추천사에 이런 말을 썼을까?
한국인 가운데 ‘금표’를 들어 보기라도 한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김희태가 고산준령을 넘고 들판을 누비고, 관련 문헌을 뒤적일 때
문화재 전문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한국의 금표」 이도학 교수 추천사
책 말머리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국의 금표를 조사, 연구를 진행한 이는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물론 개별 금표에 대한 논문등이 나온 적은 있으나, 이는 연산군 시절 금표라던가 산림청에서 발표한 산림금표 같은 특정한 금표에 한해서다. 한마디로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전문가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어쩌면 방대한 양에 눌려 하지못했던 일에 대한 결실이다.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한국 금표 연구에 대한 기초자료로써도 손색이 없다.
왕실금표: 왕릉 금표, 태실 금표 및 화소, 왕실 관련 장소 금표
왕실금표는 말 그대로 왕실과 관련된 능원이나 태실, 왕의 거주지 등 왕실과 관련된 장소에 세워진 금표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왕릉 금표는 이 책의 저자인 김희태님이 발견한 화성 외금양계비가 유일하다. 태실 금표도 많이 유실되긴 했지만 보은 순조 태실, 영월 철종 원자 용준 태실, 홍성 순종 태실 등에서 일부가 확인되었다.
현 융릉과 건릉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소(火巢)’와 ‘외금양(外禁養)’에 대해 알아야 한다. 화소란 능이나 태실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 지점에 불에 타기 쉬운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정조실록』과 『일성록』을 보면 현륭원 바깥으로 외금양을 두었는데, 금양 지역으로 설정되면 나무의 벌채와 농지의 개간, 무덤 조성 등이 금지되었다. p 064
단종의 복권은 유배지였던 영월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비다. (…)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는 단종이 왕으로 추복되면서, 청령포는 더 이상 유배지가 아닌 왕이 거처했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p 107
전주성의 남문 이름이 풍남문이며, 객사의 명칭은 풍패지관이다. 풍남문의 풍(豊)과 풍패지관의 풍패(豊沛)는 한 고조 유방의 패현 풍읍 출신인 것과 관련있다. 즉 제왕의 출신지에 붙여진 요엉로, 이는 전주가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것과 관련이 있다. 전주 자만동 금표가 세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만동 금표는 자만동 벽화마을 내 골목길에 있는데 (…)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으로, 언제 세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경단이 정비되던 고종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p 121
왕의 거주지 금표로는 단종이 노산군 시절 거주했던 영월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와, 조선 왕실의 시조인 전주 이씨 조상 묘역을 보호하기 위한 전주 자만동 금표가 있다.
이 두 금표는 여러 의미로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포함한다. 단종은 모두가 알듯,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죽은 비운의 왕이다. 즉 죽었을 당시만해도 왕이 아닌 ‘노산군’이었다. 따라서 단종이 죽기전까지 살던 영월 청령포도 그저 죄인이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숙종 때 그 지위가 복권되면서, 청령포도 덩달아 왕이 살던 곳으로 지위가 급상승했다.
전주 자만동 금표는 또 어떠한가. 조선 후기 족보찾기 열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인조 때 부터 찾기 시작한 전주 이씨 시조묘 찾기 열풍은 후대 왕들을 거쳐 고종 때 까지 간다. 하지만 당연히 시조묘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고종은 시조묘(가묘)를 조성하고, 시조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전주에 있는 조경단이다. 뿐만 아니다. 전주 이목대는 고종이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의 출생지라고 명한 곳이다. 저자의 말처럼 자만동 금표는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일대가 고종 때 정비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금표 역시 고종 때 세워진 것이 아닐까.
조선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어떻게든 시조묘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고종이니 만큼, 조선 왕실을 이끄는 전주 이씨의 탄생지와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흔적이 있는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우지 않았을까.
산림금표: 황장금표, 향탄금표, 삼산봉표, 기타
산림금표는 크게 구분할 때 금강송(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금표, 향/참나무(향탄목)을 보호하기 위한 향탄금표,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 산삼을 보호하기 위한 산삼봉표 등이 있다. 나무를 보호하는 금표라고 하면, 지금 기준에서는 ‘자연보호’는 당연한 일이라지만 금표까지는 너무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선 소나무들의 잔혹사를 모른다면 말이다.
‘금산’은 조선 초기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위해 특별히 사인의 출입과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지정된 산을 뜻한다. 금산의 목적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송금(松禁) 정책인데, 송금은 나라에서 정한 삼금 중 첫번째였다. 그랬기에 소나무를 보호하고, 무단으로 벌채하는 행위를 엄금했으며 이러한 조치들은 금산의 증가로 이어졌다. p 036
산림의 사적 소유가 늘어나면서 그나마 남은 공유지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때문에 공유 자원이 고갈되고 황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산림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정책적으로 산림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 결과 송금정책을 시작으로 금산, 봉산 등의 제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산림의 훼손과 황폐화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국가차원에서 나무를 심고 무단으로 베어낼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대첵을 세웠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산림은 백성들에게 생존수단이었기 때문이다. p 046
조선 백성들에게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집을 지을 재료가 되고, 난방을 위한 뗄깜이 되며, 어부들이 타는 어선을 만드는 재료였다. 흉작일 때는 껍질을 달여먹기도 했고, 송화가루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백성 뿐만인가? 조선 정부에서도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궁 및 사찰 건설 재료였고, 해군이 타는 병선 재료였으며, 제사에서 쓰는 향과 숯의 재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소나무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고 중요한 생활자산이었다. 더군다나 나무가 있는 조선의 산은 공유지였으니, 너도나도 들어가서 벌목을 하기 바빴다. 조선 산림 황폐화는 예견된 수순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문인들 기록속에서도 ‘민둥산’이라는 표현이 확인될까.
심지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조선의 산지는 완전 초토화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푸릇푸릇한 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다름아닌 박정희 정부 때 산림법이 제정 및 산림청이 신설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개량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린벨트가 지정했다. 우리가 아는 식목일 지정 및 식목일에 나무심기 행사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조선도 정부에서 금표를 지정하고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산림살리기는 성공했다. 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아닌 생활 자원의 변화였다. 석탄 대중화로 나무 뗄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시멘트 대중화로 주택 건설 재료가 변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울창한 산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함정이라면 내 눈 앞에 있는 산은 울창하지만, 내 눈에서 벗어난 산들은 지금도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에서 불을 사용하는 무개념들로 인해 산불이 나거나, 도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산이 깎여나가는 형태로.
양양문화원에 따르면 사진으로 남은 장리 금표의 명문은 ‘연자산 북계칠십리’로 확인된다. 하지만 지난 2002년 태풍 루사의 내습 당시 유실되었다. 원일전리 금표 역시 2008~2009년 사이 새 농촌건설 하천 정비사업 당시 훼손되었다. 마찬가지로 탁본으로 남은 어성전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십리’로, 해당 금표도 1984년 군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매몰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사진으로 남은 법수치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로 학인되고 있으며, 지난 1997~1998년 사이 법수치리 용화사 입구 다리 공사과정에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p 132
원주 비로봉 황장금표는 지난 2016년에 발견되었는데, 바위에 ‘황장금표’가 새겨져 있다. 한 장소에서 3곳의 금표가 발견된 사례는 치악산이 유일하며, 과거 치악산 일대가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p 136
그렇게 현대에 들어 야금야금 산림이 훼손되면서, 덩달아 남아있던 산림금표들도 유실되었다. 아주 간혹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산림 금표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찰금표: 장묘 금지 금표, 왕실 관련 사찰, 사찰 내 행위 금지
유교의 나라 조선,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에서 어떻게 사찰을 보호하는 금표를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 왕실 사람들은 사찰을 좋아했다. 왕 또는 왕비에 따라 불교를 진흥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왕릉 및 태실을 만들 때, 왕릉을 수호하는 원당사찰이나 태실을 수호하는 태실수호사찰을 꼭 지정했다. 사찰금표는 그러한 왕실 관련 사찰이나, 해당 사찰 내에서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안동 봉정사 금혈비는 일주문의 좌측 숲속에 있는데, 기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디지털안동문화대전』 등에 봉정사 금혈비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에 금혈비로 추정되는 현장을 찾았을 때 비신이 뒤집힌 채 방치되고 있었다. (…) 이번에 금표 고나련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는데,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석의 명문을 확인하기 위해 뒤집혀 있는 비석을 들자 전면에 새겨진 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의 명문을 한자씩 확인하다 ‘금혈’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봉정사 금혈비인 것이 명확해진 순간이었다. p 201
보은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걷다 보면 속리산사실기비 옆에 두 기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벽암대사비’와 ‘봉교비’다. 이 중 봉교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시대 법주사 지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 ‘봉교’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는다는 의미로, ‘금유객제잡역’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10
왕이 거주했던 곳도 금표를 세우는 나라였으니, 왕실사찰 역시 금표를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사찰 내 행위를 제한하는 금표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시나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조선 선비들은(그러니까 유학자들^^) 유람을 자주 떠났다. 가끔 명승지에서 조선 문신들이 글을 세긴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놀러온 김에 왔다간 흔적을 남긴 경우다. 뭐 여튼, 이렇게 유람하는 선비들은 근처에 사찰이 있으면 찾아가서 행패를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오죽하면 사찰을 부시고 그 자리에 서원을 만들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운동 서원이다. 최초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된 그 서원이다. 원래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사례가 많다보니 왕실 사찰의 안전도 보장하기가 힘들어졌을테고, 사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이 아닐까.
종교/신앙금표
종교/신앙금표는 사찰금표를 제외한 종교나 민간신앙관련 지역에 세워진 금표다. 단군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이라던가, 무속에서 제일로 취는 최영장군 사당이라던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수입된 관왕묘(관우사당)에 세워졌다.
제주 추자도 신묘금지비는 최영 장군 사당에서 봉골레산으로 이어진 제주 올레 18-1코스 구간에 있다. 이곳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는 이유는 1323년(공민왕 23년) 제주에서 원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p 247
최영이 반란으로 토벌하러 가는 길에 풍우를 만나 잠시 추자도에 정박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최영은 이곳 주민들에게 어망편법과 고기잡는 방법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에 주민들은 최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당의 동쪽에는 신묘금지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최영 장군의 사당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의 일종이다. p 248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장군이 제주도로 내려간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야. 제주도로 내려가서 목호들을 토벌하기 전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관왕묘를 보호하는 금표보다는, 이렇게 최영사당을 보호하는 금표가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숙종시기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숙종은 관왕묘로 친히 시를 지어 보내고, 심지어 직접 찾아 친제를 행했다. 또한 지방에 있는 안동 관왕묘 정계를 넓히고, 성주 관왕묘를 이건했다. 이후 영조와 정조, 순조, 철종 등을 거치는 동안 관왕묘는 왕이 친제를 행했던 중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관왕묘 위상이 변화했던 건 당대 명분인 대명의리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인식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 관왕묘에도 금표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되는데, 바로 금잡인 표석이다.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58
현재까지 확인된 금잡인 표석은 ▶서울 공관왕묘 ▶강화 동관제묘 ▶강화 남관제묘 총 3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p 260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관왕묘는 서울, 강화도, 안동, 남원, 완도에 있다. 우리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관우를 신격시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헌데 왜 관왕묘가 이 땅 곳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선조가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고, 명나라는 원군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한 원군들은 자신들이 믿는 관우사당을 한반도 곳곳에 만들었다. 심지어 명나라 군은 선조에게 관왕묘 참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조금 놀라운건 임진왜란의 승리가 명나라 덕분이라고 명을 떠받치던 선조조차도 관왕묘 참배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도 하지 않은 걸 숙종이 했다. 심지어 관왕묘 지위를 한껏 높여주었다. 이 배경에는 중원의 패자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드높이는 이상한 생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질 뿐더러 분노가 치솟을 것 같으니 각설!!
장소/행위 금지 금표: 사산금표, 사패지금표, 행위금지 금표, 기타
장소 관련 금표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보호를 위해 세운 경우로, 대표적으로 한양도성을 둘러싼 4개의 산(백악산, 목멱산, 낙산, 인왕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산금표’가 있다. 행위 금지 금표로는 연산군 시대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세운 금표가 대표적이다.
은언군의 묘는 철종의 즉위와 함께 그 위상이 달라졌다. 이유는 은언군의 가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세자-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철종이 즉위한 뒤 은언군과 전계대원군 추숭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은언군 묘에 제각이 만들어지고 석물이 세워졌으며, 철종이 직접 은언군 묘소를 전배했다. p 273
조금 놀랐던 점은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다. 은언군은 모반죄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천주교 박해당시 사사된 정조의 이복형제다. 죄인으로 죽었던 은언군 묘를 지키는 금표. 이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죽었다가 복권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은언군의 손자는 강화도령 이원범. 안동 김씨에 의해 왕이 된 자, 철종이다. 왕이 된 손자는 아비와 조부를 추숭했고, 그 과정에서 은원군 묘에 금표가 세워진 것이다.
기타 금표: 한글 금표, 목적을 알 수 없는 금표
지금까지 금표는 금표라는 문구가 한자로 세겨진 금표였다. 보통 조선시대 세워진 비석은 한자를 세기니 당연한 일이다. 헌데! 한글로 세겨진 금표도 남아있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위치는 이윤탁과 고령 신씨의 묘 옆 비각 안에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글이 새겨진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한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해당 비석에서 중요한 부분은 옆면으로, 영비 아래 한글로 30자가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 기록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비다. 쓰러트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p 303
포천 인흥군 묘계비는 인흥군 묘로 들어가는 길에 있었다. 인흥군은 선조와 정빈 민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영(瑛)이다. 인흥군 묘계비에서 주목해볼 점은 앞선 이윤탁 한글 영비의 사례처럼 한글로 새겨진 경고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기 극히 영험하니 생심도 사람이 건드리지 말라.” p 304
영남 남송리 금표는 인곡마을에서 쌍계사지로 가는 길에 있는 감나무밭에 세워져 있다. 길쭉한 형태의 자연석 전면에 ‘금표’ 두 글자만 새겨져 있다. 추가 명문이나 기록들이 확인되지 않기에 해당 금표가 어떤 목적으로 세운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위치상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쌍계사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p 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