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옆집 - 말하면 다 현실이 되는
조윤민.김경민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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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나는 당연히 에세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르테에서 나온 책이고, 표지나 제목만 보면 누가 봐도 에세이였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고나니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창업을 위한 지침서, 혹은 경영도서가 아닐까 하는. 과거에 식당 창업에 관련한 경영도서를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책과 이 책은 서술방식만 조금 다를 뿐 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에세이라는 가면을 쓴 창업지침서, 혹은 부업지침서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오해는 금물이다. 이 책은 그저 그런 창업지침서나 부업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주인장 1,2는 모두 직장인이다. 나처럼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그런 직장인 말이다. 그런 주인장 1,2 자주 만나서 삽질을 하다가 시작하게 된게 바로, 맥주슈퍼 ‘세탁소옆집’이다. 주인장 1,2는 지금도 회사를 다니면서 세탁소옆집을 운영한다. 그것도 금호동 본점과, 한남동 2호점 두 군데를!



월급을 맏고 회사를 다니는 것과 순수하게 나의 사업을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저알 수 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의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가 택한 삽질은 바로 ‘사이드 허슬’ 이다. 사이드 허슬은 미국 스타트업의 성지인 실리콘밸리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회사를 다니면서 자기 개발을 하거나 혹은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의 일을 과외로 해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회사를 그만두고 퇴사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의 시간을 활용해서 해보는 일을 말한다. p242







그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한 대사일 뿐이지만, 삽질하는 걸 좋아하는 주인장 1,2는 이 대사를 참 좋아한다. 삽질은 남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의미없는 일이지만, 그런 의미없는 일을 함으로써 인생이 즐거워진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장 1,2는 이 대사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없는 삽질을 꾸준히 해왔다. 맥주슈퍼, 세탁소옆집의 탄생도 그런 삽질에서 태어났기도 했고.



‘집에서 마시는 것보다 돈도 벌고 좋은데? 그래. 이왕마시는 술, 생산적으로 마셔보면 어떨까?’ p. 020



세탁소옆집의 시작에는 사워 맥주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워 맥주를 열심히 마시면서부터 맥주의 종류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고, 새로운 정보에 즐거워하는 우리를 발견했기 대문이다. p.063



그저 덕질의 일부였던 맥주 라이프였는데, 지금처럼 마시고 사라지는 게 아닌 조금은 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하고자 생각한게 바로 사이트 허슬을 이용하는 것. 그렇게 주인장 1,2는 퇴근 후 매일 맥주와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금호동 주민들은 주로 동네에서 소비하고 문화를 즐기기보다 근처의 압구정 혹은 이태원으로 이동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분명 동네 상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리라 생각했고, 여기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 예감했다. 그래, 금호동으로 가자! p. 035



우리는 우리의 맥주 슈퍼가 맥주를 매개체로 하지만 단순히 맥주를 사는 공간만이 아닌, 콘텐츠가 살아 숨쉬는 문화 공간이 되기를 원했고 합의점을 도출했다. 첫째, 맥줏집이라고 해서 꼭 ‘맥주’ 라는 말이 상호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둘째, 트렌디하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방향을 바탕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하기 시작했다. p.038



인테리어에서도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이다. 원하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오해를 줄이고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시간 낭비를 줄이는 최선의 길이라는 걸 크게 배웠다. p.045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일방적이고 객관적인 정보의 제공이 아닌 주인장이 직접 하나하나 마셔보고 열심히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는 세탁소옆집만의 언어! 맥주 진열에도 저마다 개성이 담긴 맥주 설명 태그를 만들어 그 맛을 전달한다. p 073



맥주슈퍼 창업을 결정한 뒤로는 어디까지나, 창업자로써, 경영자로써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했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퇴사하고, 제 2 인생을 산답시고 창업을 했다가 망하는 상황을 참 많이도 봤다. 그런 사람들이 실패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전조사 부족과 현장경험 부족에 있다. 주인장 1,2는 적어도 준비부족으로 인한 실패만큼은 없게끔 철저하게 사전조사를 했다. 철저한 상권분석과 미래가치 분석, 거기에다 단순히 맥주 슈퍼가 아닌 여러 콘텐츠를 융합시킬 수 있는 방법 등. 정말 회사 퇴근 후 제한된 시간만으로 이 모든 것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초보 창업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씸히 조사하고 두 발로 뛰었다. 그렇게 탄생한 곳이 금호동의 ‘세탁소옆집’ 이다.




세탁소옆집의 맥주 셀렉션은 두 주인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고객과 함께 만든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빅데이터 분석이다. 세탁소옆집의 맥주 셀렉션에서 고객이 중요한 까닭은 근본적으로 빅데이터 분석의 목적과 같다. ‘데이터를 통해서 고객을 이해해야 성공적인 비지니스가 이루어진다.’ 바로 그것이다. p.069



주인장들에게는 이런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우리가 만든 브랜드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엄청난 자산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주변에 브랜드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까지 도맡는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소문을 내준 많은 손님들과 단골들이 세탁소옆집의 성장에 정말이지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p.114



브랜딩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사실을 세옆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 속에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태그라인으로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까. p.091



주인장1,2는 세탁소옆집은 창업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 하고 문 닫을 가게도 아니니까. 본업은 회사는 회사대로 다니면서, 사이드허슬인 세탁소옆집도 즐겁게 운영하는 것. 하지만 두 가지 일을 한번에 하는 건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닐진데, 주인장 1,2는 어떻게 이 모든 걸 해내는 걸까? 그 저변에는 단연 세탁소옆집을 찾는 단골들이 아닐까 싶다. 



주인장 1,2가 바라던 건 세탁소옆집이 본인들만의 아지트가 아닌, 세탁소옆집을 찾는 모든 이들의 아지트가 되는 것. 그 바람은 이루어졌고, 실제로 뭐라고 해야할까? 지금의 세탁소옆집은 세탁소옆집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꾸려가는 공간이 되었다.




삽질은 절대 다 성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삽질 한 번에 배움 한 번은 가능하다. 삽집의 중독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삽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함부로 열지 마시라. 계속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또 다시 삽질을 계속 할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생기니까. p.099



“어떻게 회사 일과 가게 운영을 같이 하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볼 때 마다 하는 대답이 있다.


“충분히 가능해요. 부모들은 회사 일 하면서 육아도 하잖아요. 실제로 아기는 스물네 시간 챙겨야 하지만, 저희아기(세탁소옆집)은 주 오 일, 하루 딱 다섯 시간만 봐주면 알아서 자거든요.” p247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굳이 퇴사를 하지 않아도, 의지만 있다면 창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이런건 미국에서 ‘사이드 허슬’이라는 개념으로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것까지도. 물론 모든 직장인이 이렇게 사이드 허슬러를 꿈 꿀수 있는 건 아니다. 직장인이라는 건 같지만, 어느 직장을 다니는지에 따라 사이드 허슬 개발이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주인장 1,2는 우리가 꿈의 직장이라고 일컫는 그런 외국계 기업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렇게 성공한 사이드 허슬러가 될수있었다. 조금은 슬픈 사실이지만 직원을 소모품 취급하는 일부 국내 기업을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사이드 허슬은 꿈도 꾸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재미없는 집-회사-집-회사 루틴으로 고단한 일주일을 보내느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잠을 줄이고 주인장 1,2처럼 ‘나를 위해서’ 사이드 허슬을 개발해보는 건 어떨까? 



이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지금 우리가 다니는 회사는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책임져야하니, 한번쯤 사이드 허슬 개발을 해보는 것도 나를 위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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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양념통을 받아왔을 때는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득템’한 기분이었다. 서랍장 형태의 통에 설탕과 소금, 고춧가루를 넣으면 되곘다고 구체적인 계획도 짜놓았지만, 슬프게도 플라스틱 양념통 역시 상부 장에 넣어둔 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 P31

이제서야 물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확실해 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물건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 P206

처음에는 쓰레기가 우리 집, 내 공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만으로 할 일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내나 버린 물건들의 행선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다시 쓰이기를 바랐지만, 대부분은 재활용되지 못하고 쓰레기로 전락해서 매립된다는 것을 알았다. 잘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 P95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검색해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알게 됐다. 제로 웨이스트는 쓰레기의 사용과 배출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실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특히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용기 같이 썩지 않는 소재의 사용을 줄이려는 실천을 말한다. - P96

가방은 무거워졌고, 텀블러는 매일매일 세척해줘야 했다. 우리의 새로운 식수 생활은 생수를 사 먹는 일보다 훨씬 불편했다. 마시고 버리면 끝이 아니라, 손이 많이 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므로 확실히 귀찮다. 하지만 생수보다 보리차가 더 맛 좋다. - P111

이제는 물건을 집으로 들일 때, 내가 물건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까지 생각해본다. 방법은 간단하다. 충동적으로 가지고 싶은 물건이든, 첫눈에 마음이 뺏겨버린 물건이든 간에 우선 이성을 앞세워 이 물건과의 마지막 순간이 어떨지 예상해보는 것이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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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분신이자, 최선의 친구이자, 생의 선후배 사이인 엄마와 딸. 엄마를 온전히 끌어안고 싶은 ㅁ아므을 가득 담아 써내려간 버킷리스트. 엄마와 안경점에 가기, 스마트폰 이모티콘 선물하기, 건강 검진 같이 받기, 노래 플레이리스트 공유하기 …….

거창하지 않지만 마냥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다 ‘엄마를 업고 걸어가는 봄밤’을 거닐 수 있기를. 세상의 모든 설렘을 모아 엄마에게 스무 살 시절을 선물하고 싶은 딸만 있다면, 엄마에게 마음에 꽃이 피는 계절은 바로 지금이니까.

이모티콘을 이모콘티라고 말해서 딸의 짜증을 촉발시킨다. 그 엄마는 요즘은 컴퓨터의 컨트롤 브이와 컨트롤씨도 모른다고 또 딸에게 혼났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딸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쳐주려고 수백 번 설명해주고, 더하기 빼기를 알려주려고 수백 번 가르쳐주었다. 걸음마를 가르쳐주려고 수천 번 알려주고 한 걸음만 떼도 물개박수를 쳐주셨다. 세상 이치를 알려주려고 수천 번이나 얘기해주시는데 딸은 이모티콘이나 컴퓨터 설명 몇 번에 짜증을 낸다. - P88

시간이 엄마의 얼굴에서 젊음을 가져갔다. 김진호의 <가족사진> 속 노랫말처럼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엄마의 모습에 딸의 가슴이 무너진다. - P66

여행지는 어디든 좋다. 발 닿는 데로 가서 팔짱 끼고 걸으며 끝없이 수다를 떨면 된다. 무뚝뚝한 딸이라 미안하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엄마가 내 엄마여서 행복하다는 고백도 해본다. 엄마는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내가 엄마를 예쁘게 찍어주고, 이 골목 저 골목, 알려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엄마인데, 딸인데 ……. - P61

딸은 사실, 엄마의 아기 캥거루이고 싶다. 딸 옆에 엄마가 없으면 행복이라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엄마가 딸에게 그러하듯 딸도 엄마에게 바라는 건 금은보화가 아니다. 엄마가 돈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옆에서 잔소리도 하고 도닥여주고 못난 딸 예쁘게 봐주면, 그러면 된다. 그러니 세상의 엄마들은, 딸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한다. - P48

저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까요?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사실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신께 감사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고통스러울 때마다 다시 힘을 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눈물이 날 때마다 차라리 웃어봅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주먹 쥐고 일어납니다.

엄마가 계시기에 땅을 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봅니다.

내 삶의 이유, 내 삶의 힘, 내 삶의 배경인 우리 엄마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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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하게 국권을 침탈당한 대한민국 심장부의 아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정동,

주선중화로 흩어진 선비들을 결집시키고 진경시대를 열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한껕 드높인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서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 마을에서 사느니 차라리 등지고 살면서 힘든 시절을 견디어 낸 동촌,

한 많은 삶을 흥으로 이겨낸 자주적 개항장 목포,

피난민과 권주민이 윗동네와 아랫동네에 더불어 사는 개항장 부산,

사랑으로 용서팜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살림의 지혜로 이겨내개 한 증도,

이 땅에 서려 있는 우리 역사를 걸으며 나를 되찾는다.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공사관에서 가장 좋은 방에 기거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모처럼 안색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개인은 평안했으되, 나라는 거널났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본이 잠시 후퇴한 사이 황실 인사와 외교, 경제 이권은 러시아가 쓸어갔다. 비등한 여론에 밀려 만 1년 뒤 경복궁이 아닌 경운공, 즉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10년 뒤 160미터 옆에 있는 중명전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꼴을 봐야 했다. - P33

그때 조약에 찬성한 자들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렇게 5인이다. 이들을 똑똑하게 기억하자. 이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 P31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사용됐다. 전후월남대사관으로 쓰이던 경교장은 1963년 경교장 뒤편에 들어선 고려병원의 원무실로 사용됐다. 안타까운가? 누구 하나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보존하기에는 아직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 P25

평리원과 경성 재판소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 건물을 대법원 청사로 사용했다. 의미 깊은 판결들이 이곳에서 나왔다.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법원은 "이 건물만은 꼭 보존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런데 그 재판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문화적인 무식함이었는지, 아니면 타협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되, 현재 남아있는 옛 건물은 건물 전면부 외벽과 현관밖에 없다. - P41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타난 수성동계곡을 보면 중간쯤에 다리가 하나 있다. 기린교다.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다가 이 다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파트를 철거할 당시 생태공원을 조성하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수성동계곡을 복원했다. 현재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보존된 다리라고 한다. - P57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포목시장이 형성되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채소시장이 형성되는 등 흥인지문과 동대문 시장은 우리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변해왔다. 동대문시장과 흥인지문에 또 한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일제강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5만 5,000원을 들여서 2만 5,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성운동장을 만든다.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허문 성곽 석재는 남촌 일본인 주거지역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1925년 10월 15일 경성운동장 개장식과 함께 조선신궁에 신상일 안치하는 ‘조선신궁 진좌제’도 거행한다.군사적 지배에 이어서 종교적 지배를 단행한 현장 역시 동대문이다. - P90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서울운동장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차지하려고 하는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었고 (중략) 1985년 잠실운동장은 올림픽주경기장이 되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이 된다. - P91

동대문운동장이 떠난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돌아왔다. 포목시장이었던 역사성을 살리면서도 21세기를 선도할 수 있는 멋진 곳으로 거듭났다 - P9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한 나라가 저급한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은 꼭 독립한다.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 문호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 간송이 해야 할 일은 문화보국이다." - P79

"천학매병 속의 69마리 학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날아올랐다. 불감 속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가 고맙다고 손을 잡았다.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일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 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 P82

1897년 10월 1일 고종 황제는 목포를 개항한다. 부산, 원산, 인천, 경흥 등에 이은 다섯번째 개항이었지만, 외국과 별도로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개항한 첫 번째 칙령개항장이다 - P113

다순구미는 목포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고, 우리네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개항장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백열등을 밝혔고, 보란 듯 한껏 뽐을 내는 고관대작의 집은 아니지만 고단한 하루를 마치면서 지친 몸 편안하게 누이던 보금자리다. 이곳이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 없어지는 것 같고 목포의 뿌리가 뽑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이곳에까지 기어이 아파트를 지어야 하겠는가! - P121

그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장기려 박사는 대안을 모색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다. 대공황기 미국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모델로 해서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조합원으로 첫 출범했다. 담뱃값이 100원이던 시절에 한 달 의료보험료 60원을 받고 조합원 진료비 40퍼센트 할인, 30퍼센트 보험료, 나머지 30퍼센트 본인 부담 방식으로 사실상의 무료진료를 이어갔다. 1975년 8월 4일에는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직영병원 청십자병원을 설립했고, 1976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로 개편했다.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하루 전날인 1989년 6월 30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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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확실함과 두려움은 그날 아침 한국인의 얼굴에서 읽었던 그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추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불에 타 검게 그을린 택시와 버스, 그리고 깨진 보도블록 등이 도로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도로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군인들이 나를 ‘동그란 눈’의 외국인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중략)

"우리는 여기를 알릴 방법이 없어. 자네는 봤지? 자네가 본 것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꼭 알려주게"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 P232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33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 P56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P57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 P63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 P70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 P85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 P97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 P105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 P113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 P124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 P134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ㅇ르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 P136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 P146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P178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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