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 (리커버 특별판)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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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한 해를 휩쓴 도서라 말할 수 있는 임홍택의 저서 90년 생이 온다. 나 역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본인이 재직하고 있는 회사의 독서통신 교육으로 이 책을 받았을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이 책을 받았고 읽었다(그리고 과제물 제출^^ㅋㅋㅋㅋ).

 

수 많은 기업에서 이 책을 읽으라고 권유한다. 앞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모든 현상은 90년대생들이 주도할 것이며, 이들은 여러 회사 신입사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현재 소비의 주체로 우뚝 선 세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 회사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하루 빨리 90년대생들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90년대생들이 회사에서 만날 상사이자, 90년대생들이 소비할 제품의 생산자이며 유통자니까. 그래서 알아야만 한다, 그들을.

 

지금까지 정말 많은 책을 읽었지만 초판 147쇄 발행이라는 숫자는 처음 봤다. 이건 수 많은 기업에서 이 책을 대량으로 구매한 덕분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 근데 그렇다고 해도 147쇄라니 우와. 이 책의 저자는 인세를 얼마나 받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라니. 요즘 90년대생은 회사를 다니고 있어도, 그 꿈이 베스트셀러작가라고 하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책에서 말하는 90년대생. 나도 그 속에 포함된다. 그것도 딱 90년대생의 시작, 정확히 1990년에 태어났으니까. 다만 이 책에서 말하는 90년대생들과 내가 조금 다른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그들보다 빠른 사회생활이리라. 1990년에 태어났지만 생일이 빠르다는 이유로 1989년생들과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뿐만이랴, 심지어 90년대생들의 평균 취업시기를 보았을 때, 그 평균보다 훨씬 취업을 빨리했다. 벌써 한 직장을 다닌지 10년차니, 말 다했다. 회사를 다니는 10년간 내 주변 동료들은? 당연히 60 ~70년대생들이 주를 이뤘다. 나는 그렇게 기성세대라고 부르는 그들 사이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덧붙여 말하면, 내가 입사할 당시 신입사원 라인은 대체적으로 80년대생들 이었다. 입사 후 꽤 오랜시간 동안 나보다 나이 많은 신입사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최근 2년 간, 그때서야 90년대생들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연 내 또래인 그들은 어떤 회사생활을 할 것인지, 나와 같은 마인드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또래인 신입사원인 그들과, 회사생활 10년차인 나는 확실히 달랐다. 신입사원인 그들을 보면서 꽤 많이 놀라는 나를 보며, 분명 그들과 나는 90년대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꼰대들 사이에 있어서 꼰대화 된건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정말 많이 달랐다.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90년대생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힘들게 취업을 했는데, 상사가 힘들게 한다는 이유로 퇴사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우리 회사는 나름 이름있는 대기업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 직장생활 7~8년차 였던 나는, 내 또래인 그들을 보며 이런생각을 했다.

 

쟤네들이 고생을 안해봤네”, “저렇게 세상을 쉽게 봐서 어떻게 살라고 하나”, “취업이 어려운 거 맞아? 왜 저렇게 금방 그만둬?”

 

정말 소름돋게도 내가 한 이런 생각들은, 이 책에서 규정한 꼰대였다. 나는 또래인 그들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하며 돈을 한 댓가로 꼰대화되고 있었던 거다. ...다시 생각해도 슬프다. 내가 꼰대였네.....

 

 

그룹 입문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회사가 좋아 보였는데 현업 부서에 배치를 받자마자 바로 지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위에 사수라는 사람은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인 830분까지 출근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이 830분에 오기 때문에 본인보다 늦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냉소적 비난과 무시만 가했고요. 그런데 윗사람의 한마디에 죽는 시늉이라도 하더군요. 이 사람만 꼰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온통 꼰대 천지였습니다. 이런 꼰대 기업에서 함께하면 저도 언젠가 꼰대가 되어버리겠다는 생각에 입사 1년만에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_P 147 ‘꼰대 조직에서 탈출하는 90년대생들

 

 

 

60년대생들은 한국 사회 발전을 일군 세대다. 또한 그들은 어느 한 회사에 입사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안정적으로 고위직으로 올라간 세대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렇게 일을 하고 모든 돈으로 충분히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90년대생과 제일 큰 차이!!). 은행에 예/적금을 예치하는 것 만으로도 꽤 많은 이자 수익을 벌었던 그런 세대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부를 축적했고, 남아도는 잉여자산을 부동산 투자를 하며 지금의 부동산투기, 과열향상을 만든 세대이기도 하다.

 

70년대생들은 발전하는 한국 사회를 향유하는 세대였다. 하지만 그들이 취업전선에 나서는 1997년에 IMF를 맞이했다. 한국사회가 급격히 꼬꾸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대게 관리자 이상 고연봉 대상자들이었지만). 대체적으로 90년대생들은 어린 나이에 수 많은 어른들이 꼬꾸라지는 상황을 목격하였다.

 

80년대생은 청년기에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접한 세대다. 당시 신세대, X세대라고 불리기도 했던 세대다. 인터넷으로 여러 외국문화를 접하며, 당시에 기성세대와 세대차이가 심한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취업전선에 나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다. 역시 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IMF와 차이점이 있다면, 97년에는 고연봉대상자들이 짤려나간 반면, 2008년 금융위기에는 경력/신입 상관 없이 일자리를 잃었다. 90년대생은 청소년기에 이 상황을 목격했다.

 

90년대생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이 활성화된 세대이다. 이들이 청소년기에 들어섰을 때는 인터넷을 접하는 기계가 PC가 아닌 모바일로 옮겨갔다. 크기가 작고, 언제든 휴대가 가능한 모바일 기기로 인해 90년대생들은 언제 어느때는 인터넷을 할 수 있게되었다. 모바일 기기 하나로 모든 것을 하는 그들은 앞선 세대들과 달리 빠르게 변화는 사회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아니, 오히려 변화를 유도하는 편이다. 90년대생에게 변화는 아주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기성세대의 안주하는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다. 어려서부터 노동시장에서 부모세대, 언니/형 세대들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계속 보아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안정된 노동시장을 찾기 시작했고, 그게 바로 공무원이었다.

 

 

처음부터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월급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중소기업을 택하는 취준생은 없습니다. 단순히 중소기업의 월급만을 대기업 수준으로 올려주면 중소기업에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왜 중소기업을 지원하지 않는지 아세요? 바로 중소기업 사장들의 마인드가 쓰레기 인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은 죽도록 시키고 쓰다 버리죠. 우리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쓰레기 사장과 꼰대 선배들이 널려 있는데, 3년간 초봉 좀 올려준다고 누가 눈을 낮춰서 중소기업을 지원하나요? 이런 정책 또한 꼰대질 중 하나입니다.”

 

저는 돈을 많이 줘서 9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초봉을 조금 지원해준다고 고용 안정성이 높아지나요? 그리고 3년 근속하면 월급을 지원해준다는 정부의 정책도 믿을 수 없고, 2+1 취업제도는 뭔가요? 세상에 어느 중소기업이 일할 자리도 없는데 임금의 3분의 1을 지원받으려고 3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낼까요? 솔직히 거지도 아니고 그런 취급을 받아가면서까지 공무원을 포기하고 중소기업으로 진로를 틀고 싶지 않아요

_P 144~145 ‘청년내일채움공제‘2+1 고용촉진제도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

 

 

90년대생의 또다른 특징은 복잡한 것을 배척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했듯 90년대생은 모바일로 연결된 세대이다. 이 모바일, 즉 스마트기기로 소통한다는 것 자체는 대화의 방식조차 바꾸어 놓았다. 스마트기기가 나오기 전에는 전화, 문자 등 일대일 방식이었다. 하지만 스마트기기아 나온 이후 소통은 일대다 방식으로 진화했다. 여러명의 사람들과 한번에 소통을 하다보니, 복잡한 것을 배척하고 짤방 이나 줄임말 등 한번에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따르면 90년대생은 모바일기기를 이용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 연결되는 것을 당연시하며 이것이 끊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예를 들어 배터리 잔량이 얼마 없거나, 휴대폰을 꺼두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을 말이다. 일단 무늬만이라도 90년대생인 나는 과연 어떨까?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역시 난 정말 무늬만 90년대생인가보다. 항시 휴대폰을 끄고 싶고, (특히 !! 회사)단톡방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정말 주말 단 하루만이라도 휴대폰을 끄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우리 회사에는 참 소통을 중시한다. 90년대생들이 좋아할 만한 소통이 아닌, 기성세대가 좋아하는 소통을. 유독 기성세대 직원들은 사내 메신져나 메일로 확인해도 되는 것을 굳이 전화로 이야기 하거나, 그 반대로 메일로 공지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메일을 읽지 않고(!!) 나중에 와서 왜 이렇게 되었냐는 등 전화를 하시는 분들이 정말 아주 많다. 심지어 퇴근 이후, 휴일 상관없이 참 연락들을 잘하신다. 실질적으로 온 연락 중 정말 중요한 일은 10%도 못 미친다는게 함정이다. 자 그럼 여기서, ‘퇴근 이후 오는 연락은 안받으면 되지 않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연락을 안받으면 된다. 다만 연락을 받지 않았을 때 후폭풍은 오로지 내 몫이다. 특히 우리 회사처럼 보수적인 조직이라면 더더욱..

 

이 책에는 직장인 꼰대 체크리스트가 있다. 유독 나에게 해당되는 항목이 있으니 바로 ‘7번 휴가를 다 쓰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이거 한개. 와 근대 1개부터 꼰대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내가 만약 10년차 직장인이 아니라, 지금 갓 입사하는 90년 대상이라면 전부 해당없음 일건데 말이다. 10년간 근무하며, 꼰대들 사이에 있으면서, 기성세대들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다보니 지금의 90년대생 처럼 합리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너무 당연하게 기성세대의 마인드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정말 슬프다. 실제로 올해도 연차를 다 못썼고 ^^.... 심지어 여름휴가도 출근했고 ^^......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법칙은 쉽게 말해서 어느 조직이든 일정량의 얌체, 진상, 무능력자, 아첨꾼 등의 일명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1. 또라이를 피해 조직(팀 또는 회사)를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가 여럿이 있음.

3. 팀 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 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또라이임

_P 152 ‘꼰대 제로 조직

 

정말 이 또라이 질량 보존 법칙은 최고의 법칙이다. 단 한번도 이 조직에 또라이가 없던 적이 없었고, 이 또라이가 가면 저 또라이가 오고, 상 또라이가 가니 덜 또라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또라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또라이가 되기엔, 조직 내에 있는 상 또라이가 너무 대단해서 불가능하다. ... 진짜 저 법칙을 눈치 채고 문자로 남긴 그 사람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하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는 한동안 매주 수요일 칼퇴라는 제도를 시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긴 한데, 매주 수요일은 가족과 보내는 날이니 칼퇴하라는 것이다. 그 때는 눈치 않보고 칼퇴할 수 있는게 참 좋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나도 바보같은 생각을 한거였다. 그건 칼퇴가 아닌, 엄연히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정시퇴근이었으니까. 근로자라면 당연히 정시퇴근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는데, 우린 그걸 칼퇴라 생각했다. 상사들이 늦게까지 남아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부하직원도 남아 있어야하고, 그러다보니 업무 능률도 겁나 떨어지고!!!! 결국 나라에서 정시퇴근을 강제하지 않는 한, 근로자가 정시퇴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없었던 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건, ‘법정근로시간 주 52시간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라에서 강제한 52시간덕분에, 솔직히 우리 회사도 많이 나아졌다. 제일 눈에 띄는 건 ‘PC OFF’. 물론 편법이 없진 않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퇴근시간 + 10분에 컴퓨터가 꺼진다. 역시 대한민국에 있는 기업은 나라에서 강제를 해야만 바뀐다.

 

먼저 야근 문화에 익숙한 70년대생 이전 세대는 이러한 정시 퇴근 캠페인을 회사가 주는 하나의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회사가 1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 정시퇴근을 시켜주는 것을 직원들이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원, 대리급의 80년대생과 90년대생들은 생각이 다르다. 그들에게 정시퇴근이란 것은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 인 것이다.

_P 163 ‘칼퇴라는 말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스스로 일부 꼰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괴감........까지는 아니어도,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 이런 책은 나같은 일반직원들이 아닌 관리자급 아니, 임원 및 대표라인에서 읽어야 하지 않나? 말단들이 끊임없이 이 책을 읽는다 한들, 음 글쎄. 조직이 변화할런지 잘 모르겠다. 임원급 한마디에 변하는 조직인데 말이다. .....

 

무엇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90년대생을 맞이하기엔, 너무나 많은 부분이 기성세대의 눈에 맞춰져 있다. 말로는 수평적인 소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놓고 수직적인 소통,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짬밥으로 자리를 지키는 관리자들, 말로는 전자결재 시스템인데 그 전에 꼭 필요한 사전보고, 회의를 줄인다면서 하루에도 수 시간씩 하는 회의, ... 나열하면 끝도 없다. 결국 윗사람이 바뀌어야만 변하는 것이다. , 이런생각을 하는 것 조차도 꼰대화인가 싶기도 하고....... 참 어려운 사회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법칙은 쉽게 말해서 어느 조직이든 일정량의 얌체, 진상, 무능력자, 아첨꾼 등의 일명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1. 또라이를 피해 조직(팀 또는 회사)를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가 여럿이 있음.

3. 팀 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 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또라이임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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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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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본 호러소설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호러소설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두부 모서리에~였는데, 이번에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호러소설이다. 제목은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제목만 보았을 땐 어떤 느낌의 호러소설일지 감이 안왔는데, 표지를 보니 몽환적인 느낌이 나는 물씬 풍겼다.

 

내 개인적으로는 일본 호러, 미스테리, 추리소설을 자주 읽는다. 물론 올해는 몇 권 못 읽었지만, 나름 좋아하는 작가도 있고 그렇다. 그 중에서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가 쓴 소설을 꽤나 좋아했는데, 이 책이 딱 시마다 소지가 쓴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몽환적이라고 해야할지, 환상적이라고 해야할지, 거기다 심령현상 속에 숨어있는 슬픈 진실이라고나 할까?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포함한 이런 호러소설의 특징은 무작정 호러라고 단정짓기 어렵다는 것에 있다. 호러라고 하기엔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한다. 그 안에는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으며, 사람이 있다. 그렇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그저 호러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복잡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앞 표지에는 한 여인과 능소화로 추정되는 꽃이 그려져 있는데, 속 표지에는 능소화만 있다(능소화 맞겠지..?). 해당 책 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표지인데, 개인적으론 작가정신에서 발매한 한국판 표지가 훨씬 책 제목과 부합해보인다.

 

이 책은 8개의 단편을 엮은 소설이다. 각 단편마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잃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능소화를 표지로 쓴 건 이 때문일까? 능소화 꽃말은 기다림이다.

 

8개의 단편 중 내 마음을 유독 건드렸던 이야기는 다섯번째 아이의 얼굴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가오루와 요리코, 그리고 가오루 친구들은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도 수 없이 많이 있으니까. 수도없이 TV에서 나오는 문제, 학교폭력.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결말. 이 짧은 소설은 학교폭력 결말의 뒷 이야기를 그렸다.

 

 

- 아이의 얼굴.

요시나가 가오루에게.

오랜만이야, 나 기억나? 고등학교 때 자주 같이 놀았던 유키에야 (중략) 하지만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기로 했어. 꼭 알리고 싶은 게 있거든. 한편으로 너는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해. 만약 그렇다면 모르는 편이 낫겠지. 우리는 이쿠타메 요리코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하지만 넌 조금 거리를 두었잖아.(중략) 내 아이를 죽인 후에야 두 사람도 그랬다는 걸 알았어. 요리코가 우리에게 복수하는 거겠지. 너희는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을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우리랑 똑같은 일을 당할지도 몰라. 그럴까봐 걱정돼서 편지를 보낸다. - 후지야마 유키에

 

유키에는 내게 이렇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기를 낳지마. 우리처럼 될지도 모르니까.”

 

주인공인 가오루의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이 연이어 자기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그 중 한 친구가 가오루에게 저렇게 무서운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를 낳는다면 너도 우리처럼 네 아이를 살해할꺼야라고 말하듯이. 하지만 이 편지를 받은 가오루의 몸에는 이미 새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내 손으로 내 아이를 죽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일어나는 것이다. 이미 앞선 친구들이 다 그렇게 자기의 아이를 죽였고, 다음 차례는 바로 가오루였다. 무엇보다 이 사건들은 우연이 아닌, 다름아닌 가오루를 포함한 그녀들의 업보였다. 치기 어린 시절, 그저 약한 한 아이, 요리코를 괴롭히며 죽음으로 몰았던 그 죄 말이다. 그리고 요리코가 죽었음에도 그 누구도 반성하지 않고, 죽은 요리코에게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던 그 죄. 그 죄는 그대로 본인에게 돌아왔고, 훗날 자기가 사랑할 자기의 아이에게 돌아왔다. 내가 괴롭혀서 죽은 요리코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내 아이로 태어나는 것. 이건 그녀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리라. 그랬기에 편지를 쓴 유키에는 자기와 다른 친구들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요리코의 복수라고 칭했다. 하지만 정말 복수인걸까? 정말 억울하게 죽은 요리코의 복수였을까?

 

적어도 내 생각엔 요리코가, 자기를 괴롭힌 그녀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괴롭혀 죽음으로 몬 그녀들의 아이로 태어나, 그녀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녀들이 자기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 죄를 반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길 바랬던 기회. 하지만 다들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한번 요리코를 죽인것이다. 주인공인 가오루를 제외하고.

 

고개를 돌리자 고령자 운전 마크가 붙은 경승용차가 심상치 않은 속도로 후진하여 다가왔다. 타이어가 연석을 풀쩍 넘었다. 경승용차 뒤범퍼가 딸과 충돌하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며 딸을 밀쳐냈다. 병원에서 눈을 떳을 때 여기가 어디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고가 난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간호사를 불러 딸이 무사한지 물었다. 딸에게는 긁힌 상처 하나 없다는 설명을 듣고 안도했다. 그리고 안도감이 솟았다는 사실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었다.

 

엄마, 괜찮아……?”

괜찮아. 네가 안 다쳐서 다행이야, 정말로.”

요리코

그렇게 부르자 딸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생 네게 애정을 쏟을게. 가엽게도 다른 세 사람은 그러지 못했지만 내가 걔들 몫까지 널 사랑할게

딸은 놀란듯한 표정을 지엇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오루는 요리코를 닮은 자신의 아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정말 부단히도 노력했다. 앞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세 명의 여인들과 달리, 그녀는 요리코를 닮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 노력은 요리코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으로 인한 것 보다는, 내 속으로 낳은 내 아이를 위한 노력이었다.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려 노력하였고, 해치지 않기위해 자신의 건강을 놓았다. 가오루의 이런 노력과 함께, 가오루의 마음도 점차 변해갔나보다. 이 아이는 자신의 아이이기 이전에, 요리코라는 사실을. 내 아이로써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그 마음이, 내 아이이자 요리코를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변해간 것이다. 그 덕분인걸까? 가오루는 본능적으로 위험에 처한 자기의 아이를 살리고, 자기 몸을 내던질 수 있었다. 가오루는 그제서야, 요리코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었고, 요리코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가오루는 자신의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되었다.

 

학교폭력, 있어서는 안 되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아직도 많은 곳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피해학생은 끝까지 약자였고 그 아픔을 홀로 삼킨다. 가해자들은?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조그마한 징계라도 받으면, 피해학생 때문에 본인들이 고생을 한다며 난리를친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가해자는 아무일 없고, 피해자만 더욱 피해를 받는 결과만 보아왔다. 그래서 더욱 이 이야기가 마음을 건드렸나보다. 이렇게 책 속에서나마 가해자들이 벌을 받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보다.

 

이 책은 호러소설이지만, 호러소설이 아니다. 이 책의 장르나, 표지만 보고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분명 무서움을 조성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 책에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담담히 감내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내가 있었다.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 그 무언가를 마음 속에 남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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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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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류성룡의 징비록. 이렇게 얇은 책인데, 이 책을 읽기까지 참으로 오래도 걸렸다. 누가 썼는지도 알고 그 내용도 잘 알고, 동명의 드라마도 본방사수 할 정도로 봤던 나였다. 하지만 책 만큼은 못읽겠다 싶었다. 아니, 동명의 드라마를 보기 전 까지는 읽어볼까 싶기도 했는데, 동명의 드라마를 보고 나서 더욱 읽을 자신이 없었다. 화면으로 봐도 그렇게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는데, 문자로, 책으로 읽으면 정말 더욱 답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는 내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왜 이럴 수 밖에 없었는지 참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읽는 내내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저 밑 말단 병사부터 시작해서 중간 장수들, 하다 못해 왕까지 도망간다. 전쟁 시작 전부터 정세파악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전쟁 시작 후에도 그랬고, 끝날 때 까지도 그랬다. 정말 진짜로... 이순신 장군님 아니었으면 분노해서 책을 집어던질 뻔. 오죽하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참고 넘어 가다가 도저히 이런 이런건 안되겠다 싶어서 포스트잇을 붙인게 저 정도.

 

-1586,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자기 나라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본래 중국인이라고 한다. 일본까지 흘러 들어간 그는 나무장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중략) 큰 공을 세워 대관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권력을 잡은 그가 결국 겐지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중략) 겐지 왕국이 망한 지 10, 그동안 여러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드나들었지만 통제를 워낙 엄격히 한 까닭에 그들 사정은 전해지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야스히로를 죽인 히데요시는 다시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보내고 우리에게도 사신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15903, 드디어 우리 사신 일행이 요시토시와 함께 일본을 향해 떠났다. 요시토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 칼 등을 임금께 바쳤다. 임금께서는 공작새는 날려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관토록 하셨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임진왜란을 이야기 하면 보통 사람들은 당시 일본의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성일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허위보고 한게 문제다라고. 조금 공부를 한 사람들이라면 김성일이 아닌 선조를 탓한다. “김성일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황윤길은 전쟁은 일어날거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냐고. 선택은 선조가 한것이 아니냐고.” 솔직히 말하면 난 후자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더 있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부터, 이미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이야기가 조선의 조정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꼈던 율곡 이이는 1583년에 대량의 군사를 키워야 한다(십만양병설)고 했고, 이 책의 저자 서애 류성룡은 환란을 대비해 능력있는 장수를 선발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대마도 조차도, 전쟁이 일어거라며 미리 알려주었으며,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류큐에서도 1591년에 사신을 보내서 일본이 침략할 것 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 그리고 1590, 징비록에서 언급한 대로 대마도에서 온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조총 두 자루를 건네주고 간다.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무기고에 처박고 끝냈다. 서애가 말하기로는 조총이 들어온게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징비록을 덮고, 잠시 조선왕조실록을 들쳐보자.

 

명종실록 18, 명종 10521일 갑인 1번째기사 /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 화약이 뛰어나니 관직 제수를 비변사가 아뢰다

명종실록 18, 명종 10522일 을묘 3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버려진 종을 사용할 것을 간원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 명종 10523일 병진 2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큰 종을 사용할 것을 비변사가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 명종 10525일 무오 1번째기사 / 총통 주조에 큰 종을 사용할 것을 상차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 명종 1062일 을축 1번째기사 / 총통을 주조하기 위해 큰 종을 사용할 것을 정원이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명종실록 18, 명종 10614일 정축 1번째기사 / 선전관 박세현이 전라도에서의 왜변의 상황을 아뢰다

명종실록 18, 명종 10617일 경진 1번째기사 /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이 본도 사찰의 종으로 총통을 만들자고 청하다

명종실록 18, 명종 10617일 경진 2번째기사 / 오래 된 종은 신령스러우므로 총통 주조에 사용할 수 없다고 정원에 전교하다

 

선조 바로 위의 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왕실의 왕자군들을 불러 모았고 그 유명한 익선관스토리의 주인공인 하성군이 왕이되니 그게 바로 선조다. 명종 10년 즉 1555년에 왜인 평창진이 총통을 들고왔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40년 전에 왜인 평창진이 매우 뛰어난 총통을 들고 조선에 온 것이다. 그가 들어곤 총통이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조총이었다. 서애는 1590년에 소 요시토시가 들고온 조총이 조선에 들어온 처음이라고 하였지만, 이미 임진왜란 발발 약 40년 전에 조총은 조선에 있었다.

 

당시 비변사에서는 왜인 평창진이 들고 온 총통, 즉 조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려진 큰 종이 있으니 그것을 녹여 총으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왕 명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남도지방은 잦은 왜변, 왜인들의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조총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지만,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절에 있었던 큰 종을 녹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나라였다. 조선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이런 함몰된 조선에서, 딱 이 시기에 정세파악에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인재들이 이 책의 저자 서애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인거다.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서애를 비롯한 사람들은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 여기저기 방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1591년 봄,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일행이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 등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부 지방 삼도와 방어를 맡도록 했는데 (중략)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그 가운데서도 경상도에는 특히 많은 성을 쌓고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 등지에는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하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전 전적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이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유래없는 200년 평화는 조선의 윗대가리만 좀먹은게 아니라 저 밑바닥까지 좀 먹고 있었던거다. 그래도 생각있는 관리들이 만약을 대비해 성도 쌓고, 해자도 만드려고 했더니, 전부 보이콧이었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한 거라고는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한 정도였다.

 

1592413, 왜놈들이 부산으로 처들어왔다. 적에 대한 방비도 안되어 있었던,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은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여기까지다. 그 뒤는 이렇다. 좌수사 박홍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좌병사 이각은 자기 첩과 함께 도망갔다. 밀양부사 박진도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김해부사 서예원도 도망갔고 초계군수도 도망갔다. 순찰사 김수도 도망갔다. 용궁현감 우복룡이라는 사람은 방어사에 귀속되어 북쪽으로 올라가던 군사들을 붙잡고, 반란군이라고 칭하며 몰살시켰다. 도망간 순찰사 김수는 이 우복룡이야 말로 공을 세웠다며 조정에 보고하여, 우복룡은 정3품 자리에 올랐다. 왜놈들이 처들어왔는데 나라꼴이 이랬다. 도망가거나, 팀킬하거나.

 

-상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순변사 이일은 충주로 도망갔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의 곡식을 꺼내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으로 불어났따. 순식간에 대오를 갖춘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모두 전투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 불과했다. 그때 적군은 이미 선산에 이르렀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코 앞에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못한 이일이 그를 목 베려 했다.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둬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에도 적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십시오.”

 

당시 적들은 장천에 머무르고 있엇는데, 그곳은 상주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일이 개령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 목을 베고 말았다.

 

(중략) 잠시 후 몇 사람이 숲속에서 나와 서성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은 적이 엿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아침 일이 머리에 떠올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중략) 곧이어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따. 10여자루 조총에서 탄환이 불을 뿜는데 맞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미 늦었다고 깨달은 이일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곧 적이 온다고 보고 한 백성을 민심을 동요 시킨다고 공개처형했다. 같은 날 오후에 왜놈이 엿보는 것을 본 병사들이 있었지만, 본인들도 처형당할까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안되어 왜놈들이 처들어왔다. 적이 온다고 보고한 백성을 처형한 순변사 이일, 그는 꽁지를 내빼고 도망갔다. 심지어는 말도 버리고 의복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심으로.. 징비록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계속 이런 이야기의 향연이었다. 계속 읽다가는 속병나서 미칠 것 같았다.

 

왜놈이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길목에는 산새가 험한 조령(문경새재)이 있다. 이 곳에서 진을 쳤더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의 명장 신립 장군은 조령을 포기하고 너른 벌판인 탄금대에서 진을 쳤다. 그리고 앞서 도망간 순변사 이일 처럼 적의 동태를 보고한 병사를 공개처형 시킨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에서 전멸.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다.

 

신립장군에 대해서 내 마음속 평가는 아직도 갈팡질팡이다. 몇 달 전 신립장군에 묘소도 갔다왔고, 몇 년 전에는 탄금대도 둘러보고 왔다. 근데 매번 마음이 변한다. 징비록을 읽은 현재는 이런 마음이다. 신립은 본인의 능력에 자만하다가 괴멸했다는 것.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신립이 매복을 포기한 문경새재를 왜놈들은 걱정하며 들어왔다는 점이다. 혹시나 매복이 있을까 정찰병도 보내고 여러번 확인 했는데, 매복한 조선군이 1도 없으니 왜놈들 입장에선 개꿀. 그 덕에 왜놈들은 춤을 추며 문경새재를 통과하고, 충추까지 와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 부대를 몰살시킨 것이다.

 

후후...여기까지 읽어도 답답히 미칠지경인데 다음 이야기는 더 답답하다.

 

430일 새벽,

임금께서 서쪽을 향해 출발하셨다.

 

그 유명한 선조의 몽진이다. 그렇게 한양을 지킨다고 뻥카를 날리고서는 짐싸고, 종묘에 있는 지네 선조들 위패 모시고 위로 떠났다. 선조 떠나는 길에 백성들이 나와서 울며 간청했지만, 조선의 왕이라는 자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왜놈들 입장에서 선조의 도망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을 거다. 당시 왜놈들의 전투 방법은 대빵을 사로잡으면 끝이었다. 근데 왠걸? 자기들 딴에는 쉬지도 않고 미친듯이 올라왔는데 조선의 대빵이 없다. 도망갔댄다. 얼마나 황당할지. 물론 도망간 왕을 지켜본 조선의 백성들만큼이었겠냐마는.

 

선조는 한양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개성에서 위로 쭉쭉 평양까지 당도했다. 이 즈음에 임진왜란 전투 사상 첫 조선의 승리가 있었으니, 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왜놈들을 물리친 것이다. 하지만 신각의 상사 김명원이, 신각이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보고하였고, 선조는 신각을 죽이라 했다. 그렇게 첫 승리를 따낸 장수를 죽였다. 자신보다 유능한 부하장수를 시기한 김명원이나,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유능한 장수를 죽인 선조나 휴. 아오 빡이친다.

 

진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터질 때 쯤, 그 분노를 가라 앚혀줄 무언가 하나씩 나온다. 이순신과 의병이다.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견내량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 의병들은 나라를 지키기 전쟁터로 나섰다. 천한 취급을 받던 일개 천민부터 시작하서 글만 읽던 선비, 부처님을 모시던 승려들까지 의병의 계층도 다양했다.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 영해부사 최경회, 김덕령 등이 나섰다.

경상도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 전 좌랑 김면, 전 장령 정인홍, 전 한림 김해, 교서정자 유종개, 이대조, 장사진 등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승려 영규, 전 도독관 조헌, 전 청주 목사 김홍민, 이산겸, 박춘무, 조덕공, 조웅, 이봉 등이 있다.

경기도에서는 전 사간 우성전, 전정 정숙하, 최흘, 이노, 이산휘, 남언경, 김탁, 유대진, 이질, 홍계남, 왕옥 등이 있다.

북쪽에서는 금강산의 유정 대사, 묘향산의 서산대사, 평양의 임중량, 길주에 정문부 등이 있다.

 

여기서 함정이 있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났던 의병들은 자기들이 지키려 했던 나라의 왕, 선조의 손에 모함받아 대체로 이괄의 난 때 일파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숨어 살았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시기질투와 원균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해야했다. 미친듯이 고구마만 먹다가 겨우 사이다 한잔 삼켰는데, 다시 고구마다.

 

ㅋㅋㅋㅋㅋㅋ 진짜 ㅠㅠㅠㅠㅠㅠ 분노가 가라앉다가도 다시 차오른다. .. 어떡해야하지? 이 책을 정말 덮어야 할까? 굳이 읽으며 계속 분노해야할까? 읽으면서도 고민했다. 분명히 이 뒤에 이어질 내용도 다 알고,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 지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는게 망설여졌다. 정말 당대의 살아있는 기록을 읽는 건 너무나 생생해서, 그동안 공부하기 위해 읽은 역사서나 드라마로 접한 그 어떤 것도 징비록만큼 생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목사 김시민에게 대패했던 왜놈들은 정유재란 때 칼을 갈고 왔다. 왜놈들은 애초에 전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 진주성을 학살하기 쳐들어왔다. 진주성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다 죽이기 위해 왔고, 실제로 다 죽여버렸다. 그들은 남원성에서도 학살을 이어갔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죽었다. 남도 땅도 왜군에 먹혔는데, 이순신 장군이 목숨걸고 지켰던 남도 앞 바다까지 왜군에 손에 뺏긴 것이다. 조선은 리더들을 잘 못만나 육군, 해군을 그냥 말아 먹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조선은 그때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이순신 장군이 진도에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배는 10여척이었다. 앞서 말했듯 원균이 미친듯이 말아먹었기 때문에, 여기서 조선의 해군을 부활시킨 다는 건 거의 기적과 다름 없었다. 근데 그 기적을 행했으니 확실히 이순신 장군은 큽... 아 징비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정말 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노량에서 대파했다. 그리고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으며 임진/정유년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조선의 백성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장수 진린, 명나라 병사들까지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통곡했다. 해서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해달라 하였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시기질투했던 조선의 왕은 나라를 지키다 죽은 충신의 사당 건립을 거부했다. 그리고 약 1백년이 되어서야 숙종의 명으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가 건립된다.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끝으로 그 내용이 끝난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조선에서 책이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징비를 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었으나, 징비를 해야할 사람들은 이 책을 서가에 꽁꽁 숨겨두었던 거다.

 

개인적으로 임진왜란에 관련된 장소를 많이 찾아다녔다. 이순신 장군의 묘소나 사당, 원균의 묘, 신립장군의 묘, 탄금대, 문경새재, 진주성, 행주산성, 남원성, 의병장 김덕령 장군 묘소 등등 정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도 찾아다녔다. 그 때마다 느낀거라곤 이 두 가지다. 못난 리더 한 명이 나라를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복되는 아픈 역 사속에서 우리는 징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는지.

 

우리는 정말 징비를 하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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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행복했으면 좋겠어 - 행복을 찾아가는 펭귄 요요의 포근한 응원
똥그리 지음 / 부크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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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게 참 녹록치가 않다. 회사생활이라는 게 쉬운 일 하나 없고, 힘든 일도 많다. 하지만 그 만큼 즐거운 일도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올 한해를 돌아보면 힘든 일만 많았다. 매일 매일 쳇바퀴 같은 일상에 적어도 작년까지는, ‘회사라는 곳이 크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런 범주에 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최악이라는 범주에 들어간 뒤, 즐거운 일이라곤 정말 1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내 에너지를 바닥으로 밀어넣었다. 언제나 생명존중을 외치는 회사인데, 그 생명존중 안에는 직원존중은 없다보니 참 ... 그래서 그런가, 회사에서 치이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녹초. 나는 무엇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참으로 녹록치가 않다. 그래서 더욱 나를 위로해 줄 그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그 무언가는 때로는 책일 때도 있고, 때로는 펭귄(^^)일 때도 있다. 물론 나를 위로해 주는 그 펭귄 펭수는 오늘 포스팅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또 다른 펭귄 요요가 나온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오늘을 살고 있을까?

 

언뜻 보면 동화책 같기도 하고, 그림책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이야기책 같기도 한 이 책은 표지부터 내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파스텔 톤의 분홍색 눈 밭에서 회색빛 털을 지닌 펭귄 요요. 이 책의 부제가 행복을 찾아가는 펭귄 요요였는데, 표지에서 만난 요요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가 났던 마음을 한결 둥글게 해주었다.

 

동화책 같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책을 딱 펴니 눈 앞에 보이는 캐릭터 소개’. 분명 주인공은 펭귄 요요일 텐데, 그게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건 요요도 요요지만, 요요의 친구들과 그 가족, 요요의 가족 모두 동글동글 했다. 동글동글한 캐릭터를 보니 내 마음도 계속 동글동글해 지고 있었다.

 

요요. 그럴 때는 케찹찹!이라고 외쳐.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주문이야!”

 

마음이 불안할 때는 내가 들을 수 있도록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안정을 주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의 위로도 좋지만

내가 나에게 해주는 따뜻한 말이

진짜 용기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P 023

 

언제부터였을까? 내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던 나는 항상 뭐든 자신 있었고, 못하면 그럴수도 있지! 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그랬다. 언제나 여유가 넘쳤다. 그래서 항상 나를 먼저 생각했다. 그게 너무 당연했다. 지금은? 여유가 왠말인가. 하루가 언제나 조급하고 힘들고 지친다. 그나마도 쉬라고 있는 주말은 과거의 바보같은 내가 벌여놓은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역시나 쉬는게 쉬는게 아닌 주말이 되었다. 평일이고 휴일이고 제대로 된 쉼표가 없다. 옛날 같으면 짜증이라도 내겠는데, 지금은 그럴 힘조차 없어서 그냥 한숨만 푹푹 쉴 뿐이다.

 

근데 생각보다 해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저 요요처럼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땐 한 박자 쉬어가면 그 뿐이었다. 어차피 오늘도 힘들고 내일도 힘들꺼면, 그냥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없이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난 그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냥 휴가 좀 쓰겠습니다한마디면 될 것을. 나는 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마음 조려했는지.

 

행복하게 살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나는 내 시간을 너무나 낭비하고 있었다. 그저 만 생각하고 결정하면 될 것을, 왜이리 바보 같이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요요 말대로 나만 생각하고 행복하자”. 더 이상 시간낭비는 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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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일사 - 부산 선비, 근대 일본을 목격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1
박상식 지음, 부산박물관 옮김 / 서해문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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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조들이 남긴 글을 읽으려고 서해문집 오래된 책방시리즈를 꽤 많이 구입했다. 원래 시리즈를 계속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앞서 읽었던 발해고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권, 두 권, 기존에 읽고 싶었던 고전을 몇개 골라내다보니 어느새 9권이나 구매. 이럴 바엔 그냥 시리즈 1권부터 하나씩 살껄 그랬나 후회가 들긴하지만... 이게 또 몇 몇 고전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가지고 있거나, 읽어 본 것도 있는지라 참 애매하다.

 

이 책, 동도일사는 서세강점의 시기. 조선이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에 쓰여진 글이다. 정확히는 당시 부산에 살던 선비 박상식이 제2차 수신사 사행원으로써, 근대 일본을 방문 한 뒤 남긴 일종의 일기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적인 일기라고 말하기에는 또 어렵다. 어찌보면 이 책은 일기이기 이전에, 수신사행에 대한 업무 보고서 같기도 하다. 이 책 동도일사의 구성을 보면 이렇다. 1부는 박상식 본인의 사행일기, 2부는 정사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와 주고 받은 문답, 3부는 수신사 관련 공문이다. 1부는 본인 일기, 2-3부는 사행원이자 일종의 속기사로써 받아적은 공적인 업무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으로 수신사를 보냄)

 

이 책을 한글로 국역한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제2차 수신사 관련 연구는 수신사행등록, 수신사기록, 동문휘고, 왜사일기, 김홍집유고등을 기본 사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 동도일사에는 앞서 언급한 기본사료에는 없는 기록들이 상당부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큰 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계의 주목은 커녕 존재 자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뭐 그것과 별개로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지점이 여럿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닸다. 강화도 조약이 어떤 조약인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던 조선의 위정자들은 세계사적으로 조선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알지 못했고, 본인들이 얼마나 함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중화사상에 찌들어있었다. 조선보다 먼저 개항하여 변화와 개혁을 한 근대 일본을 눈 앞에 두고도 그들을 업신여겼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들을 동포 만나듯 했고, 그럼에도 청나라 사람들이 대 명나라의 사람에 비해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명나라를 이어가는 소중화였기에, 실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빈껍데기였다. ‘소중화그 안에 함몰되어 있으며 빗장을 꽁꽁 걸어닫고 있었기에, 외세가 침범해도 그 속뜻을 이해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중화라고 정신승리에 취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기울어져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게 당시 조선의 위정자였다.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비롯하여 사행원들이 만난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 몇몇 나오는데, 적어도 좋은 의미로 아는 인물은 아니다. 일단 전부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당시에 다들 한 끝발 하던, 혹은 관련 업무를 하던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인물이 두명 있으니 이토 히로부미오쿠라 기하치로. 경술국치 이후 초대 조선통감 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우리나라 문화재란 문화재는 일본으로 무단반출한 오구라 콜렉션을 알린 오쿠라 기하치로. 이런 사람들은 2차 수신사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쩌면 강화도 조약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이때 우리 선조들은 세상물정을 몰랐고, 너무나 순진했다.

 

2차 수신사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나 오쿠라 기하치로 등은 그저 조선에서 온 사행원을 위해 찾아온, 정성을 보여준 일본인 손님에 불과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순조 때 까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행은 꾸준히 있었다.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낼 당시 조선의 위치는 일본보다 위, 그러니까 우리가 너네 나라의 격을 높여주기 위해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주겠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적어도 조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은 자국 내에서 조선이 일본 막부에 조공을 하는 사절이라고 했으며,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한 서양 네덜란드에도 조선을 일본의 종속국이라 했다. 조선만 몰랐을 뿐이다. , 뒤가 달랐던 일본을 봐왔고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전쟁의 참상까지 겪었는데도, 또 당한거다. 조선은 그저 우리의 높은 문물을 일본에 전달해준다고 생각했을 그 뿐이었다.

 

통신사 교류 중단도 일본에서 먼저 요청했다. 일본은 조선 통신사를 통하여 빼먹을 기술은 다 빼먹었고, 어느 시점부터 조선보다 일본의 기술이 낫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그 때가 조선 순조 때다.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가 판을 쳤던, 조선의 발전시계를 200년 정도 후퇴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때다. 바로 이때 조선은 퇴보했고, 일본은 발전했다. 이후 얼마 안가서 일본은 조선을 찾아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니,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답방 겸 재개된 게 수신사인데, 앞선 통신사와는 차별점을 둬야 하기에 부르는 명칭도 수신사로 바뀐 것이며 그 이동경로도 달라진것이다. 달라지지 않은 거라고는 일본은 조선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통신사의 마음과, 수신사의 마음이랄까.

 

이 책의 저자 박상식이 참가한 제2차 수신사 사행원 명단을 보면 낯 익은 이름있었다. 조선책략을 가지고 왔으며 당시 쓰러져 가는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김홍집, 얼마전 광주공원에서 만난 친일파 윤웅렬, 그리고 종두법의 지석영. 특히 지석영은...진짜 그 종두법의 지석영이 맞나 잠깐 고민했는데, 아주 친절하게도 책 말미에 그 지석영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답답했던 점이 정말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당시 수신사 정사였던 김홍집이 늦게나마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는 점이다. 문호 개방, 부국강병, 근대화에 필요성을 깨달았기에 이 때 그 유명한 조선책략을 조선에 가지고 온 것이다. 물론 이 책을 가져와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동조를 했느냐?를 이야기 한다면, 거기서 끝이라는게 아쉽긴 하다. 당시 조선의 왕과 고위관리들은 그저 자기들의 재산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급급했고, 그를 위한 정치를 했으니까. 말이 근대화 개혁이지 정말 백성을 위한 근대화 개혁이었나? 라고 들춰보면, 어디까지나 황제를 위한 개혁이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유독 욱했던 부분들이 <2, 정사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의 문답>에 참 많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외교능력이 얼마나 덜떨어졌는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불통에 유연함이 없었는지. 일부만 발췌 해본다.

 

-요시카와: 병사의 기숙사와 기국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

-김홍집: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과 기계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우에노: 신문을 보니 귀국 신사가 글씨를 잘 쓴다는 데 본 받을 글씨를 주시기 바란다.

-김홍집: 본 신사는 글씨 쓸 줄 몰라 귀국에 들어왔을 때도 붓을 잡은 적이 없다. 혹 사행원 중에 글씨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게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우에노: 아니다. 신문에서 전한 것은 부산에서 온 사람이다. 들으니 귀국신사는 문망이 있다고 했다.

-김홍집: 이것은 혹 잘못 전해진 것이다. 대단히 부끄럽다.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으로 군무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김홍집: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조정과 민간)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이노우에: 이 자리의 대서기는 어제 독일에서 돌아왔는데 이탈리아 지방에서 러시아 해군경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중국 상해 땅에 와서 길이 갈렸는데 앞으로 연료를 싣고 다시 나가사키 섬으로 온다고 한다. 배 안에서 그의 동정을 살피니 걱정이 되어 대단히 조급했는데 중국 일이 다행이 잘 끝나 빨리 떠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중략) 이 때 귀국 병력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러시아 사람이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걱정이 다시 절박해질 터이니 이를 어쩌겠는가?

-김홍집: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은 상접해 있을지라도 서로 통상하지 않고 오직 귀국에게만 친목하므로 유사시에는 서로 보호해주기 바란다.

 

-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외교력도 꽝이었고, 정보력도 꽝이었으며, 보고 듣고 배울 마음 조차 없었다. 오죽 답답하면 일본 외무공사가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라는 이야기 까지 할까 싶었다. 일본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수신사 일행은 때 되면, 조선에 있는 왕을 향하여 망궐례, 진하례를 챙겼다는게 함정이다.

 

만약 근대일본을 보고 온 이들이, 근대일본을 보고 온 이들의 보고서를 본 조선의 위정자들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난 이 책을 읽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수신사를 보냄으로써 근대 일본을 본 조선이, 우물 안에서 벗어나 우리 식으로 근대화를 수용하는 등 개혁을 하여 그들과 동등하게 혹은 그들보다 더 우위로 갔다면. 적어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이 책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일제강점기라는 역사가 어떻게 해도 변경되지 않을 고정적인 시점이라면, 적어도 조선이 당시 세계 각국에 대한 정세를 알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자기들 안위 때문이 아닌, 어떻게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조선이라는 땅에서 살고 있는 수 많은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하려고 했다면 역시나 나는 이 책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었을 거고, 당시 우리 조상들을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눈으로 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수록 씁쓸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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