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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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으로써 읽은 책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이 책은 지금까지 읽어온 책과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보통 책을 받으면 제목과, 띠지나 표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며 대충 어떤 장르인지 추측을 한다. 헌데 이 책은 일반적인 에세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며, 자기계발서는 더더욱 아니다. 대체 이 책의 장르는 무엇인가 갸웃 거리다가, 책을 쓴 작가를 보았다. 이 책의 작가는 제목에 쓰여있듯, 우리나라 문학의 거목이라 일컬어지는 박완서님이다. 저자는 문학의 대가 박완서 님인데, 장르는 추즉하기가 애매한 그 무언가라고 해야할까. 물론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생각이 달라진다.


내 개인적으로, 이 책의 장르는 ‘박완서’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를 짧은 글에 담은 ‘수필’이라고 감히 말하려 한다.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저자인 ‘박완서’님에 대한 정보를 옮기려 한다. 보통은 작가에 대한 정보를 쓰지 않는 편이지만 말이다. 이번 만큼은 예외다. 박완서 작가님은 한국문학의 대가로 불렸던 분이었다. 그녀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부터 일반 문학까지 정말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마 문학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살면서 그녀의 작품을 하나 정도는 읽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박완서 (1931 ~ 2011)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미망』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고,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기나긴 하루』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길 사람 속』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12월 타계한 후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박완서님의 따님인 호원숙 님은 어머니의 작품들을 보며, 정확히는 그 작품들에 실린 어머니의 서문과 후기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책의 서문을 모아 이런 책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김윤식 선생님의 서문집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중략) 놀랍게도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기도 하고 불끈 용기가 솟기도 하고 눈물이 어리기도 합니다. 타인을 생각하고 전체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가식이 아닌 겸양, 진실과 책임과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반성이 밑받침이 된 오만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P 4~6, 들어가는 글 中



그렇기에 이 책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박완서, 그녀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박완서 작가의 타계 9주기을 맞이하여, 한국문학의 대가인 그녀가, 그녀 식으로 독자들과 특별한 끝인사를 할 수 있도록 이 책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목차도 조금 특별하다. 박완서 작가가 발표한 수 많은 작품의 제목들이 들어있다. 한 작품에 여러 판본이 있을 경우에는, 각 판본의 서문과 후기를 별도의 페이지에 실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데뷔작인 『나목』은 3개의 판본이 나왔기에, 3개의 서문이 실려있는 식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지만, 서문집이라니 별거 있겠어?’라는 생각이었다. 왠걸, 별거가 많았다. 정말 많았다. 보통 한 작품의 ‘서문’이라 하면 그 작품을 소개하거나, 작품을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전달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박완서님의 서문은 그렇지 않았다. 음... 뭐라고 말해야할까? 물론 작품의 이해를 돕기위한 정보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서문에는 ‘박완서’라는 사람이 있었다. 


책을 다시 꾸밀 때마다 좀 손을 보려고 다시 읽어보게 된다. 지금의 안목으로 눈에 거슬리는 표현의 과장이나 치졸이 자주 눈에 띄어서 고치려면 어쩐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못 고치고 만다. 유치함조차 그것을 썼을 당시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의 나타남 같아서 소중한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처녀작을 느즈막이 사십 세에 썼지만 이십 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섰다고 기억된다. 그래 그런지 그것을 썼을 당시가 암만해도 사십 세 같이 않고 아득하고 풋풋한 젊은 날 같다. P 22 『나목』 재출간


혼자 사는 여자는 다만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아내가 남편 외의 외간 남자에게 한눈 판 건 두말할 여지도 없이 부도덕하고, 이구동성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반면, 남편이 아내 외의 여자를 장난삼아 범한 것에는 그도록 관대하고 떳떳하다고까지 부추기는게 과연 미풍양속일까? P 67 『서 있는 여자』


이 이야기를 꾸민 나의 첫 번째 소망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마음이 되어 아이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복동이 또래의 막내 손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중략) 이 이야기를 꾸민 내 욕심도 재미 말고 또 하나 있는데 그건 아이들이 자기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남의 생명의 가치도 존중할 줄 아는 편견 없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감사하며 신나게 사는 것입니다. P 162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나는 이 서문에서 인간 ‘박완서’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훔쳐보았다. 자기의 첫 작품을 너무나 소중히 생각하여, 그 작품을 썼던 과거의 자신까지도 소중히 하는 한 사람, 미풍양속이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눈감는 사회를 고발하고자 했던 한 사람, 이 땅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편견없이 살아가길 바라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인간 ‘박완서’였다.


곧 6.25가 났다. 오빠와 숙부님이 비명에 죽고, 고향 땅은 북쪽 땅이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죽었으되 전사도 폭사도 아닌, 사상의 대립이 초래한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특구성에 희생된 고통스럽고 값 없는 그들의 죽음은 그 후 오랫동안 나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P 38 『창밖은 봄』


6.25 때의 체험은 하도 여러 번 욹궈먹어서 6.25 때 내가 어떻게 지냈나는 많이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1.4 후퇴 후 텅 빈 서울에 남아서 겪은 일은 유일하게 이 작품에서만 울궈먹었다. 실은 이 경우 울궈먹었단 말도 합당치가 않다. 내가 울궈먹었다는 말을 쓸 때는 체험에다 적당히 소설적인 허구를 가미한 경우인데 이 소설 중에서도 그 시기(이 소설은 1950년 6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의 얘기를 월별로 엮어놓았다)는 의식적으로 허구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실 묘사만 했다.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내가 과연 그 일을 꿈이 아닌 생시로 겪은 걸까 문득문득 의심스러워질 적이 있다. 이 거대한 도시가 하룻밤 새 텅 비고 인기척의 완전한 진공상태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대는 상상할 수 있는가. P 46 『목마른 계절』 재출간


여기 모인 글들은 내 개인의 흔적인 동시에 내가 작가로서 통과해온 70년대, 80년대, 90년대가 짙게 묻어나 있는 글들이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우리가 살아낸 시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득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무의미한 현실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의미 있는 것이 되고, 나쁜 기억도 무력한 현재를 고양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P 142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이 서문들은 인간 ‘박완서’가, 작가 ‘박완서’가 되기 전에 겪었던 그 사건들이, 훗날 작가 ‘박완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 분명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겠지만, 이 역시 작가 박완서가 직접 겪었던 이야기이기에 생각보다 강하게 와닿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이 서문집이, ‘박완서’라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기 내지는 수필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 뒷편에 실린 작품 화보는 작가 박완서의 역사 뿐만 아니라, 각 출판사의 역사도 담겨있다. 물론 이 책을 출간한 〈작가정신〉도 포함해서! 


내가 읽은 박완서님의 작품은 몇 권 안되지만, 이 서문집을 읽으면서 느꼈다. 박완서님 작품은 하나 하나가 버릴게 없고 허투루 읽을 게 없다는 것을. 고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박완서님 전집을 구매하여 완독에 도전하는 것을 내 독서 목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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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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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출판 서포터즈로써 받은 두번째 책은, 예상외로 만화 에세이였다. 책을 보내주신 박대리님은 ‘만화’라서 조금 걱정하신 것 같지만, 내 독서 스킬은 코흘리개 꼬꼬마 시절 만화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완전 노 프라블럼! 오히려 완전 땡큐였다. 이래뵈도 학창시절에 코 묻은 돈을 모으고 모아서, 만화책만 2천여권 이상을 사 모았던 나였으니까(물론 지금은 아주 극히 일부만 가지고 있..)!.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책 표지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라는 제목만 보고 ‘으음, 역시 일본스럽군!’ 했다. 보통 이런 식의 제목을 가진 일본 만화는, 오해를 많이 받기도 한다. 일본만화가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목을 1차원적으로 해석해서, 그 내용을 추측하고 거부감을 갖은 체로 멀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겉만 보고 생각한 것이기에, 절대 그래서는 안될 일이다. 오히려 이런 제목을 가진 책들은 대체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어마무시한 대작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읽고, 정확히 10페이지에 들어서면서 부터 눈이 시큼시큼 해졌고, 14페이지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울면서 봤다. 눈물에 책이 젖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고,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내 눈물샘은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추지 않는다. 분명 슬플거라고 생각했기에, 최대한 무감각하게 봐야지! 싶었는데 결국 무너졌고 펑펑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부모와 이별하는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내 경우엔 서른세 살때였습니다.

우리 엄마만큼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그날이 올 때 까지도 굳게 믿었지만…

엄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P 012




“아직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지는데도

꽤 오래전에 해지한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아직도 지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면 참 자주 전화하셨었는데 ….

이제는 압니다.

한밤중에 계속 전화벨이 울리는 것도

늦게까지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그런 엄마의 번호이기에

나는 평생 지우지 못할 것 같습니다. P 017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엄마와 내가 이 병실에서 계속 기다려온 것,

그것은 …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경험이었습니다. P 082




“지뢰 같은 추억”

내가 자란 이 동네에는

여기저기에 지뢰처럼 추억이 묻혀있는데,

그건 가까운 마트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 지뢰는 가차 없이 나를 덮쳐왔습니다.

앞으로 다시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요. P 109




“1주기”

엄마의 1주기는 남겨진 사람들이

제각기 1년이라는 ‘세월의 약’의 효과를

확인하는 자리 같았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1주기는

엄마가 추억이 되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P 136



만화책을 보면 으레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고, ‘나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정말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되도록이면 늦게, 정말 아주 더디게 오기를’ 이라고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나에게 이런 상황은, 아직 온전히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나는 정말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나는 그저 큰 사고 없이 잘 살아가는게 효도라고 생각하는 못난 딸이다. 그저 내 할 몫을 다하고, 엄마 아빠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20대 중후반 언저리에 급 결혼한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했었다. 거의 통보나 다름 없었다. 거기다 내 결혼에 대해 일체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내 돈으로만 진행할 거라고 통보했다. 난 내일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당연히 효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애교넘치는 성격도 못되었고, 낯간지러운 말도 잘 못하는 성격이라 엄마에게,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아직까지도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내 모습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냥...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곳을 갈 때 엄마, 아빠와 같이 가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고, 이런 일상을 조금 더 많이, 그리고 같이 보내야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부모와 이별하는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내 경우엔 서른세 살때였습니다.

우리 엄마만큼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그날이 올 때 까지도 굳게 믿었지만…

엄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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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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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제대로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내는 요즘, 나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어주는 건 점심시간에 주어진 30분 남짓한 독서다. 물론 그 짧은 시간도 방해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긴 하지만 말이다(제발 내 이름 좀 그만 불러요....점심시간은 법적으로 보장된 시간이잖아요....좀 쉬게 내버려두세요......). 거기다 요새 잦은 야근에, 집에 들어가면 바로 잠드는게 일상이라 블로그는 저 멀리 벗어던진지 오래. 그나마 설 연휴가 아니었으면 블로그를 조금 더 오래 쉬어갔을지도 모르겠다. 2월은 조금 덜 바빴으면 좋겠는데 하하하하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뭐라 말도 못하겠고, 그저 이렇게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간접적으로 쉼을 느낄 수 밖에.


오늘의 책은 상상출판에서 출판한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라는 여행에세이다. ‘낯선 일상’이라, 언제나 이런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낯선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나였기에, 제목부터 내 마음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 제목만 봤을 뿐인데 떠나고 싶다. 아! 이 책을 쓴 저자는 역시나 유명한 여행유튜버다. 물론 나는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책 속에 있는 그녀는, 수 많은 여행을 한 그녀는 그저 나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나를 힘들게 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좋아하던 여행이 업이 되버린 그런 사람이다.


이 책은 그녀가 여행한 수 많은 국가/도시가 나온다. 런던, 브리튼, 코펜하겐, 파리, 니스, 로마, 레이캬비크, 교토, 발리 등등. 정말 많기도 엄청 많았다.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럽권 국가다. 요 근래 유럽권 여행 에세이를 자주 읽어서, 자연스레 앞선 책들과 비교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앞선 책들에 비교해서도 이 책은 단연 상위권이라 이야기 하고 싶다. 그 이유는 심히 주관적이다. 여행하는 법이나, 감성깊은 사진? 그런 이유가 아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코웃음 칠지도 모르는 이유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하지만 생각보다 이루기 어려운 ‘친구’와 함께한 여행이 이 책의 주가 되었다는게 그 이유다.



그녀의 첫 여행, 그것도 ‘장기’여행은 친구와 함께였다. 나는 그녀가 첫 여행한 곳이 유럽이고, 한 달간 장기여행을 했다는 것 자체는 부럽지 않았다. 다만 여행의 모든 순간을 친구와 함께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러웠다. 첫 여행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첫 장기여행인 유럽 뿐만 아니라, 발리, 아이슬란드 이 모든 곳을 친구와 함께했다. 물론 이 책 곳곳에는 그녀가 홀로 다닌 여행도 있었지만, 친구와 같이 다는 여행이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 할 정도로 그녀의 여행메이트는 친구였다. 그것도 마음맞는 ‘친구’.


나의 첫 해외여행은 저자처럼 ‘친구’와 함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3박 4일간 다녀온 일본 고베/교토/오사카 여행이다. 짧다면 짧은 여행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퇴근하고 혹은 휴일에 만나서 여행일정을 짜는 게 정말 즐거웠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꽤 오랜시간 여행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하며 행복했다. 회사에 있으면서도 “조간만 또 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조만간’은 없었다. 서로의 일상이 있었기에. 확실히 한국이라는 나라는, 서로 다른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휴가를 맞춰서 여행을 가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어려운 점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지금 그 친구와 나는 회사도 다르지만 서로 근무하는 시간대 자체가 다르니, 서로 만날 시간조차도 정하기 어렵다. 아- 어쩌면 이건 변명일지도 모른다. 그 친구와 나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사는 같은 동네 주민이기도 하니까. 그저, 서로 일하고 돌아오면 너무 피곤하고 그러니까,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피로를 동반하기 때문에, 사회에 썩을 대로 썩은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집 밖으로 안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주 친한 친구 사이를 들여다보면, 각자 성격이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사고영역을 조금 더 넓어지게 만들어주기도 하며, 같은 성격이면 분명 싸웠을 법한 일에도 서로 져주기도, 참아주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비슷한 성격의 사람과 친구인 게 이렇게나 좋구나, 하고 새삼 놀랐다.

P 143


그리고 나는 꺠달았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했다. 온통 하얀 세상, 아늑한 숙소, 좋아하는 친구들, 맛있는 음식 ….

P 257


나는 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행동은 잘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읽으라고 빌려주는 행위 조차도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책인데, 이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거나 혹은 선물로 주었을 때 나 만큼 소중하게 생각할거라는 믿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왠지 이 책만큼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떠올린 그 친구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 친구도 이 책을 읽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나처럼 그 때 그 여행을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아니, 그저 이 책을 핑계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다시 한번, 그 때의 추억을 곱씹으며 웃는 하루를 보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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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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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 ‘피라미드’, ‘공룡’, ‘미이라’, ‘미스테리’. 나에게 고고학이란 이런 개념들이다. 아마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인욱 교수님의 강연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쭉 저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연을 본 뒤, 고고학의 주 연구대상은 내가 생각한 저런 것들이 아니라, 아 물론 부수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고고학의 주 연구대상은 ‘인류’였다.  고대부터 가까운 역사까지 ‘인류’와 관계된 유물을 연구하고 발굴하는게 바로 고고학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은 상상력의 산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상상하는 그런게 아니다. 고고학자들이 하는 상상력은 인문학적 요소가 필수불가결이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해 추론한 내용이라고 해도, 근거가 있고, 당연히 그럴 것 이라 생각이 드는 그런 학문인 것이다.


차클 강연만으로는 고고학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련 책을 읽자니 너무 대놓고(!!) 전문서적들이 많아서 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흐름출판에서 고고학 초보자를 위한 교양서가 나왔다. 그것도 강인욱 교수님이 직접 쓰신! 꼭 읽어야지 싶었는데, 세상에나. 운 좋게도 흐름출판 서포터즈가 되었다. 그렇게 첫 번째 미션으로 받은 책이 바로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차클 강연으로는 미쳐 다 채우지 못했던, 고고학에 대한 내 호기심을 드디어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유물들이 원래의 기능을 잃고 땅속에 묻혀야 합니다. 즉,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그들을 꺼내어 부활시킵니다.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셈입니다. (중략)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죽음으로 수렴이 되어 망각이 되고 망각되어버린 기억은 다시 유물이라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고학자에게 유물이란 다시 살아난 기억의 편린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고학입니다. P 009~010 


이 책은 강인욱 교수님이 나같은 고고학 무식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고고학이 무엇인지, 어떤 매력이 있는 학문인지 아주 쉽게 알려 준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 같기도 하다. 에세이에서 고고학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느냐고 말할 수 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에세이가 아니다. 강인욱 교수님은 지금까지 발굴한 모든 유적지에서 수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 책은 바로 그 기록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고고학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진짜 강인욱 교수님께서 영혼을 갈아넣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써준 고고학 에세이다.


책에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6페이지에 걸쳐 이 책에 어떤 유적지 및 유물 및 발굴 시기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알수 있는 사실, 위에서도 언급한 내가 생각했던 고고학의 개념은 틀렸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한 건, 고고학자에 대해 이상한 환상(?)을 심어준 영화 및 TV의 영향이 크다. 매번 『몬타나존스』나, 『미이라』같은 것만 보여줬으니 ㅠㅠㅠㅠ 지금 돌아보면 이런 영화들에서 나온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적지를 파괴하고, 유물을 훔쳐가는 대역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진데 말이다. 어휴.. 지금이라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땅 속의 흙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마치 케이크처럼 쌓여 있다. 한 층 한 층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쌓인 것이다. 발굴장에서 곡학자들이 솔이나 꽃삽으로 조심스럽게 작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따. 순간의 부주의한 발굴로 지나치는 층위는 두고두고 고고학자의 실수로 남게 된다. P 022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창원 다호리에서 발견된 목관이 전시되어 있다. 나도 분명 어러번 갔던 박물관인데 왜이리 생소한지. 지금까지 내가 본 오래된 관은 대게가 옹관이었다. 항아리 두개를 이어 만드는 관 말이다. 그 어떤 박물관을 가도 꼭 보았던게 바로 옹관이었기에, 당연히 선사/청동기 시대의 관의 시작은 옹관이었다. 그런데 목관이라니! 너무 신기하기도 했고, 왜 내 기억속에는 없는지 이상하기도 했다.


목관이 발견된 창원은 경상남도에 있다. 과거에는 삼국 시대에는 신라, 그 전에는 가야(어쩌면 신라에 근접할수도), 또 그 전에는 변한이 있던 자리다. 근데 잘 생각해보니, 내가 여태 다녔던 박물관들은 백제 내지는 마한이 위치했던 서해안 및 중부지역 이었던거다. 그러니 변한 지역에서 사용되었을 목관이 생소할 수 밖에. 근데 놀라운 사실 하나. 책에 의하면 창원에서 발견된 목관과 비슷한 관이 시베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있다는 것이다. 고대에도, 지금까지도 말이다. 역시나 강인욱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이러한 목관을 쓰는 이유는 하늘로 자라는 나무처럼 죽은 사람 역시 저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라고 하셨다.


이러한 목관이 시베리아 일대에 퍼져있다는 이야기를 보고 문득 생각난 게, 바로 신라였다. 당연히 우리 조상이라 생각하는 신라지만, 신라인들의 유물들을 보면 너무 자연스럽게 대륙너머에 있는 시베리아, 기마민족들이 떠오른다(실제로 그 지역에서는 신라에서 발굴된 유물과 비슷한 유물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까). 창원이 변한 지역이긴 하지만, 진한과 밀접한 지역이다. 진한 지역에 있었을 기마민족들이 영향이 여기까지 미친건 아닐까?


시베리아와 우리와 연관된 문화는 또 있다. 바로 하프다. 누가봐도 서양,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악기인 하프가 우리 문화와 연관되어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뭐 정확히 말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손으로 현을 뜯는 하프가 아닌, 입으로 부는 하프라는 점이지만. 입으로 부는 하프는 옛 기록에는 ‘구금’이라고 하고, 유목민들은 바르간이라고 부른다. 근데 이 바르간이라는 악기가 시베리아를 비롯한 유목민들에게 널리 유행한 악기라 한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말이다. 물론 나는 이렇게 책에 나오기 전 까지는, 그 생김새 조차 몰랐던, 완전 초면인 악기였으니 말 다했다. 그런데 이 구금 유물이 발해유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발해의 음악은 당시 일본과 중국에도 널리 퍼졌다. 발해의 사신이 전한 음악은 일본 도다이지에서 공연할 정도이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송나라에서는 발해의 음악이 너무 유행해 이를 강제로 금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대체 발해의 음악에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이렇게 주변 나라의 사람들을 매혹시켰을까 궁금했다. 구금이 등장한 것을 보니 발해는 초원, 중국, 그리고 고구려의 여러 음악을 조화시켰던 건 아니었을가. 비록 과거의 음악은 복원하여 듣기 어렵지만, 그들이 이뤘던 문화의 힘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P105


지금은 안 사고, 안 가는 나라가 된 일본이다. 덕분에 내 여행 및 답사 계획도 많이 일그러졌더랬다. 그럼에도 난 일본이라는 나라를 좋아하면서 미워한다. 좋아하는 이유도 역사 때문이고, 싫어하는 이유도 역사 때문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 라면 아이러니랄까(일본을 가고 싶은 이유도 오로지 역사때문이니). 이렇든 저렇든 일본에는 아직도 우리 고대 문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강인욱 교수님이 말한 도다이지(나라현 동대사)에서 공연하는 발해음악이 그렇고(도다이지 자체도 도래인과 깊은 연관이 있고), 고대부터 내려온 도래계 신사나 도래인 마을 등에서 내려오는 음악이나 마츠리 등이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고대 음악에 대한 흔적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다. 정말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 국민모두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만 하면 더할나위 없을건데, 후 참 할말하않이다.


일본을 이야기 하고 보니,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일제강점기 당시 무분별한 발굴과 문화재 약탈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고대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일본 일왕의 혈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인이 나온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간무덴노의 모친인 백제인 고야신립(다카노노 니가사)이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 4국이 있던 시대, 통일신라와 발해로 나뉘어진 남북국시대 이 때까지 한반도에 있던 사람들은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고, 일본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학문을 전해줬고, 건출기술을 전해줬고, 예술을 전해줬고 뭐 기타등등 다 전해주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의 정사인, 그것도 왕실 주도로 작성한 역사서인 『일본서기』, 『고사기』에도 대놓고 기록되어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해 고대사 컴플렉스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거다.



그러다 고려, 조선을 지나 시대는 바뀌었고 우리에겐 최악이라 일컫는 일제강점기가 왔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본인들의 기원을 찾으려 했다. 기원을 찾음으로써 고대사 컴플렉스를 회복하고, 조선을 식민지배하는 정당성을 세우려 했다. 그래서 오래된 고분이 발견되면,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참으로 졸속이었다. 당시 일제에게 유물보존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재를 약탈한 이유는 단순한 유물의 수집이 아니라, 일본 민족의 기원이 북방 어딘가에 있었다는 설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근동지역을 약탈한 서구 열강이 유럽 문명이 근원인 성서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선 거라고 주장하는 의도와 일맥상통한다. (중략) 기마민족설은 역설적으로 일본이 패망한 후에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일본인들은 아시아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는 정부의 허황된 선전 아래 전쟁에 내몰렸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다시 섬으로 쫓겨났다.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일본인들을 위로해준 것은 일제의 전장을 따라다니며 발굴하고 문화재를 약탈해 조사했던 고고학자들이었다. P 219~220


일제는 당시 조선에서 찾으려 했던 자기네 민족의 기원을 결국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승리했다. 자기네 민족은 고작 작은 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대륙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드넓은 대륙에서 조차도 자기들이 원하는 민족의 기원은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는 패망했다. 패망 후 일본이 택한 건, 그들이 도굴해 간 유물로 끼워맞추는 역사왜곡이었다.


일본이 도굴해 간 우리 문화재, 정말 극히 일부겠지만 그래도 보고 왔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말이다. 정말 하나하나 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돌려받아야 할 우리의 문화재인데, 왜 우리는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건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듯, 당시 서양 열강에 의해 약소국들이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했다. 하지만 각각의 독립국이 된, 당시 약소국들도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2010년에 파리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 반환(말이 반환이지, 소유자는 프랑스인 영구대여 형식) 관련하여 프랑스에서는 잡음이 정말 많았다.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내세우는 주요 논리는 제3세계 국가는 후진국이어서 문화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9년 4월에 프랑스의 자랑 노트르담 성당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프랑스가 다른 나라보다 문화재를 더 잘 관리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없음이 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속내는 외규장각의 의궤가 반환되면 그들이 수백 년 간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문화재를 다시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P 205


결국 그렇다. 당시 열강이었던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박물관에는 그들 나라가 침략했던 수 많은 나라의 문화재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 나라들은 선진국의 가면을 쓰면서, 정막 본인들이 약탈한 문화재는 본국에 돌려주려 하지 않는다. 프랑스처럼 저런 궤변을 늘어 뜨리면서 말이다. 정작 그 속내는 한 번 돌려주면, 그동안 모아온 수 많은 약탈문화재를 다 돌려 줘야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자랑하던 박물관은 텅텅 비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뿐이다.


역사 유적지 답사를 좋아하는 내가,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는 게 그저 후회스럽다. 하루도 더 빨리 읽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렇다면 그동안 다닌 여러 유적지를 보며, 이 책을 읽기 전과는 조금 다른, 한층 깊이 있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이제라도 이 책을 읽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하나? 오늘 이후로 다닐 내 역사 여행이, 얼마나 더 풍부해질지 기대된다.


고고학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유물들이 원래의 기능을 잃고 땅속에 묻혀야 합니다. 즉,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그들을 꺼내어 부활시킵니다.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셈입니다. (중략)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죽음으로 수렴이 되어 망각이 되고 망각되어버린 기억은 다시 유물이라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고학자에게 유물이란 다시 살아난 기억의 편린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고학입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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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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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유명한 82년생 김지영을 읽어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본적도 없다. 리뷰를 쓰는 책 이름은 붕대감기인데, 왜 갑자기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 하는가? 내 머리속에 있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도서가 82년생 김지영이라서 그렇다. 한 번은 읽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아직 한국 사회에 펼쳐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자신이 없었기에 읽지 않았다. 따라서 비슷한 책들도 읽어볼 생각을 1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왠걸, 작정단으로 읽게 된 책 붕대감기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다른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하지만 서로 다른 페미니즘을 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중요한 건 10대부터 50대까지, 그녀들이 살아온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는 점이다.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가 살아온 사회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하는게 당연한 사회였다. 반면 지금의 10대부터 20대 초반이 사는 사회는 여성이 왜 그렇게 희생을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세대는 어린시절 무언가를 희생하는게 당연하다고 교육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 반대의 가치관을 교육받게 되었다. 지금은 모두 2020년이라는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성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여성이라는 범주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게 당연한 일일진데, 오늘날 여성사회는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대표적인 문제를 꼽자면 진짜 페미’vs‘가짜 페미’, ‘탈코르셋vs 탈코르셋 반대논란이랄까? 대체 이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 책 붕대감기가 나에게 그 답변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진경과 세연이라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그녀들의 주변 인물(정확히는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가 가지치듯 엮여간다. 어찌보면 옴니버스형 단편소설집 같으면서도, 서로 서로가 관계가 있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볼 법한 소소한 이야기 일 수도 있고, 혹은 뉴스에서 볼 법한 그런 이야기 일 수도있다.

 

진경과 세연은 학창시절, 반에서 한 두명쯤은 있었을 법한 그런 아이들이다. 언제나 밝고 주변 인물들이 모두가 사랑하며, 빛이 나는 학생이 진경이다. 반면 언제나 어둡고, 주변 인물들이 피하며 , 콤플렉스 덩어리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세연이다. 하지만 이 둘은 신기하게도 친구가 되었다. 성인이 되고 그들의 관계는 달라진다. 진경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다. 세연은 그런 진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틀어졌다. 내 눈에는 그 이유가 오롯이 세연에게 있다고 보였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진경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이가 자고 있어서 친구인 자기를 만나러 올 수 없는 진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는데, 세연은 진경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그 마음은 질투 또는 미움으로 바뀌었으며, 학창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진경을 자기 입맛에 맞는 잣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세연은 진경을 보며, 정말 남자라는 족속은 왜 이렇게 내 친구를 피곤하게 할까, 생각했다. 너희들 때문에 진경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잖아.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왜 저렇게 남자가 없으면 못사는거야, 창피하게. 언젠가부터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중략) 하지만 세연은 진경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섭섭하고 무시당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진경을 좋아했고, 경외심을 품고 진경이 읽는 책들과 쓰는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중략) 세연은 진경을 동경하면서 남몰래 미워했다. P 134~137

 

세연은 그랬다. 어쩌면 어둡게 살아온 청소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유독 여성에게 씌어진 굴레에 대해 반발감이 있었다. 그녀는 어릴적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 외모가꾸기에 열중한 적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세연은 화장은 꾸밈노동이라 이야기한다. 맨얼굴을 예의 없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강요하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 있는게 요즘 말하는 탈코르셋 운동이며, 세연은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지지한다. 그러면서 본인들을 지지하지 않는 진경을 보며, 본인이 만든 그 잣대로 진경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경은 어떨까? 어린시절 진경은 엄마가 규정한 여성상에 맞춰 살았다. 여자는 언제나 단정해야하며, 쓸데없이 눈웃음 치지말아야 하며, 징징거리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귀게 못 막히듯 듣고 살았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그렇게 숨 막히는 삶을 살았으며 결혼하고 나서야 그 삶에서 벗어났다. 족쇄같은 삶을 벗어난 다음에야 진경은 조금씩이나마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만 그 삶이 제 친구인 세연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것뿐. 진경은 세연이 말하던 그런 여성운동에 대해, 여성들의 갈등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진경이 그런 여성운동에 대해 생각하거나 평가할 의무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네가 전에 말했었잖아. 여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너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너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게 있었다는 걸 알고 정말 많이 놀랐어. 그날 집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결혼한 여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들을 찾아보았어. 그 말들에 대해 내가 반발심이나 슬픔이나 분노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것 처럼 보여서 너는 놀았을지도 모르겠어. 그것에 대해 무엇을 느낄 만한 자리 자체가 내 삶에 없다는 걸 네가 이애하게 되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도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P065

 

그저 서로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고 가치관이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세연은 그걸 알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진경처럼 세연이 말하는 여성들의 갈등을 보지 않았으며,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괜히 정신이 더 피폐해지고, 마음만 안좋아지니까. 그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되는건데, 왜 그렇게들 서로 헐뜯지 못해서 안달들인지, 참 그랬다. 화장을 하고 싶으면 하는거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데 왜, 굳이, 무엇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주장하며 싸우려 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세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세연이 상상속의 진경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난 세연을 계속 공감할 수 없는, 최악의 캐릭터로 남겼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내가 아주 융통성 없는 사람처럼, 단지 수천 수만개의 비뚤어진 잣대들을 뭉쳐놓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져. 그래서 말을 잘 못하곘어, 진경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삶을 사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겁이나서,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면서 그립고, 기분지 좋으면서 두려워. 내가 너한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는데. P 164

 

세연이 진경이를 미워하던, 표면적인 이유는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세연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기가 그토록 진경을 좋아하고, 또 미워했는지. 세연과 진경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그 자체에 생각을 하는 것 보다는 그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한다. 비단 진경과 세연이 이야기 뿐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애를 키우는 엄마들과는 달리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워킹맘 은정의 이야기, 동료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제자 채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채이를 어떻게든 돕고자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선생님 경혜, 친구사이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채이와 형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분명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이야기 하는 페미니즘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작가는 그렇게 나이 든 페미니스트와 젊은 페미니스트를 각각 영악한 여자 꼰대/분노하는 천방지축 어린애로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문제삼는다. 그 프레임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중략) 그리고 이러한 늙은 여성/젊은 여성으로 대변되는 페미니즘 이분법의 프레임은 선악의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전화하면서 페미니즘을 좋은 페미니즘/나쁜 페미니즘’. ‘진짜 페미니즘/가짜 페미니즘으로 나누는 진풍명품쇼로 전락시킨다. 그런데 도대체 좋은, 진짜 페미니즘은 어디에 있나. P 189~190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내 머릿 속에 떠오른 페미니즘은 적어도 이 책에서 나온 여성들이 외치는 그런 부분은 아닌 듯하다. 서로 간에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그러면서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진짜 페미니즘인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라고 생겨난 단어는 아닐진데 말이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 머리속에서 정리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었다.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휴머니즘으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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