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힘들다고, 혹은 오늘은 이런이런 일이 있어서 매우 화가 난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얼마나 잘 들어줬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들어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게되면 꼭 답을 내려줘야 할 것 같고, 그 상황을 분석해야할 것 같고, 잘잘못을 따져줘야 될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인간관계가 좁은 건가 싶기도 하고. 하 뭔가 급 내 삶을 반성하게 된다. 지금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야겠다 싶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 잘 될 거다.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그럴 듯한 문장과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읽어보시겠다면, 그저, 무심결에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 수록 상실하는 것돠 상실되는 것이 하나씩 늘어가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어떤 감정의 알 수 없는 형태일 수도 있겠고 (…)

어짜피 끝내는, 다 잘될 거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고.

그리고 나도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그저,

"…"의 침묵과

"그랬구나. 가끔은 그럴 수 있어."의 동의가 필요한 순간인데 말이다.

"당신은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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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는 바람을 깎아내며 그 반동으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나도 중증외상센터도 헬리콥터가 바람을 깎아 나아가듯, 내 동료들을 깎아가며 여기까지 밀어붙여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고, 힘이 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간신히 구축해온 선진국 표준의 중증외상센터를 유지하기 위해 말없이 버티다 쓰러져나갔다. 결국 이 중증외상센터 바닥은 내 동료들의 피로 물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강하하지 않습니까!

-상황실과 관제탑에서 계속 경고가 들어오고 있어요!

사고 해역 상공은 해양경찰이 관할하고 있었고, 다른 헬리콥터들의 진입은 충돌 사고 위험을 높인다며 밖으로 물러나라는 지시였다. 하늘 위에는 우리뿐이었으므로 나는 그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불안정한 무선에서는 영공에서 나가라는 지시만 계속 튀어나왔다. P 067

가라앉는 배 주위를 해매다 항공유가 바닥을 보였다. 인근의 진도나 목포의 해양경찰 기지 또는 공항에서 급유를 받으려고 했지만 모두 ‘공식적 절차’가 미리 통보되지 않아서 불가하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중략)

-아니, 목포에 공항도 있지 않습니까? 바다를 수색해야 할 우리가 왜 산악지대까지 갑니까?

서신철이 씁쓸하게 말했다.

-행정 절차가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P 070

우리가 다시 바다로 날아들었을 때 여객선은 함수 부분의 푸른 바닥만 힘겹게 물 위로 내놓고 있었다.

-교수님, 여전히 사고 해역에서 빨리 나가라는 명령만 합니다. 더는 비행이 힘들 것 같아요. P 072

대답은 한결같았다. ‘윗선으로부터 단지 이곳에 가라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통일된 지휘 체계 안에 있지 않았고, 누가 자신들을 지휘하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각자 소속된 조직 상부에서 내려오는 파편적인 집합 명령에 따라 모인 것 뿐이었다. 모두들 위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휴대전화를 귀에 달고 있었다. P 077

-정교수, 이게 말이야.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체 내에 있었다면, 내가 바로 그 위를 비행하고 있었는데 배로 들어가든 부수든 간에 뭔가 사람들을 끄집어내려고 했을거 아냐? 한/미해군이 모두 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 선박 주위는 정말 조용했다고. 어느 정도 구조가 된 거 아니었어? P 082

세월호 침몰 당시, 쌍용훈련을 마치고 미7함대로 복귀하던 USS 본험리처드함은 최정예 해상 구조대원과 구명보트까지 장착한 특수 헬리콥터 MH-60 시호크 몇 대를 사고 해역으로 신속하게 출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사고 해역 영공 진입 불허 방침으로 회항했다고 들었다. 나는 우리와 같은 시간에 사고 해역을 비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미 해군의 시호크가 왜 보이지 않았는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한국 정부는 사고 다음 날 그들에게 사고 해역으로부터 17마일(약27킬로미터) 떨어진 해역을 배정했고, 생존자 구조 임무가 아닌 사체 수거 임무를 맡겼다고 했다. P 094

-교수님, 외상센터가 바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시간 외 근무를 많이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 기관이 노동부에게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진퇴양난이었다. 외상센터의 일은 줄지 않았고 줄일 수도 없었다. 나는 병원으로 오는 중증외상 환자의 수를 조절할 수 없고 병원 문턱을 넘어와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를 전원시킬 수도 없었다. (중략) 병원의 많은 부서들이 인력 부족에 시달렸고 부서 인원을 늘려달라는 요청은 동시다발적으로 올라가므로 외상센터에만 더 많은 인원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P 117

새 정부는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상센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들의 업무 공백을 메워주는 전담간호사들의 근무시간도 주 52시간으로 묶여버렸다. 김지영은 담당간호사의 근무일정표를 더 이상 짤 수 없다고 비명을 질렀다. (중략) 김지영이 극도로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전담간호사 한 명이 또다시 유산해 2주간 병가처리를 해야한다며 승인을 요청해왔다. P 295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 1,800억 원을 들여 대규모의 안전체험 테마파크를 지어놨다. 하루 평균 입장객은 350여 명, 연간 적자 규모는 15여억 원이라고 했다. 1,800억원이면 중증외상센터 전체 건립비용을 상회한다. 소방항공대 두 세곳을 창설할 수 있는 금액일 것이다. 세월호와 중증외상에 대한 이슈가 불거진 이래로 안전과 외상을 테마로 수 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있으나, 나는 그 핵심가치를 알 수 없었다. P 259

나는 단 한번이라도 중증외상센터의 세계적인 표준을 한국에 심어보고 싶었다. 아주대학교병원 중증외상센터가 문을 닫고 한국의 중증외상센터 사업이 종료되고 나서도, 다음 세대 의사들 중 누군가 다시 중증외상센터를 만들어보려 할 수도 있다. 그때를 위해 우리가 남겨놓은 진료 기록들이 화석같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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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2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13-2018 골든아워 2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아워』 두 번째 권. 읽기 까지 너무 망설였다. 『골든아워』 첫 번째 권을 읽고 난 뒤 내 마음 속에 남은 건, 이국종 교수님을 비롯한 중증외상센터 의료진에 대한 안타까움, 병원 정치에 대한 역겨움, 더 살릴 수 있었으나 살리지 못한 목숨들에 대한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을 환경에 대한 절망 등 부정적인 감정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골든아워』 두 번째 권을 읽기 시작한 건, 이국종 교수님이 얼마나 힘들게 중증외상센터를 지키려 했는지, 희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 책을 집필했는지, 조금이나마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무슨 일입니까? 왜 강하하지 않습니까!

-상황실과 관제탑에서 계속 경고가 들어오고 있어요!

사고 해역 상공은 해양경찰이 관할하고 있었고, 다른 헬리콥터들의 진입은 충돌 사고 위험을 높인다며 밖으로 물러나라는 지시였다. 하늘 위에는 우리뿐이었으므로 나는 그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불안정한 무선에서는 영공에서 나가라는 지시만 계속 튀어나왔다. P 067


가라앉는 배 주위를 해매다 항공유가 바닥을 보였다. 인근의 진도나 목포의 해양경찰 기지 또는 공항에서 급유를 받으려고 했지만 모두 ‘공식적 절차’가 미리 통보되지 않아서 불가하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중략)

-아니, 목포에 공항도 있지 않습니까? 바다를 수색해야 할 우리가 왜 산악지대까지 갑니까?

서신철이 씁쓸하게 말했다.

-행정 절차가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P 070


우리가 다시 바다로 날아들었을 때 여객선은 함수 부분의 푸른 바닥만 힘겹게 물 위로 내놓고 있었다.

-교수님, 여전히 사고 해역에서 빨리 나가라는 명령만 합니다. 더는 비행이 힘들 것 같아요. P 072

대답은 한결같았다. ‘윗선으로부터 단지 이곳에 가라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통일된 지휘 체계 안에 있지 않았고, 누가 자신들을 지휘하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각자 소속된 조직 상부에서 내려오는 파편적인 집합 명령에 따라 모인 것 뿐이었다. 모두들 위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휴대전화를 귀에 달고 있었다. P 077


-정교수, 이게 말이야.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체 내에 있었다면, 내가 바로 그 위를 비행하고 있었는데 배로 들어가든 부수든 간에 뭔가 사람들을 끄집어내려고 했을거 아냐? 한/미해군이 모두 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 선박 주위는 정말 조용했다고. 어느 정도 구조가 된 거 아니었어? P 082


세월호 침몰 당시, 쌍용훈련을 마치고 미7함대로 복귀하던 USS 본험리처드함은 최정예 해상 구조대원과 구명보트까지 장착한 특수 헬리콥터 MH-60 시호크 몇 대를 사고 해역으로 신속하게 출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사고 해역 영공 진입 불허 방침으로 회항했다고 들었다. 나는 우리와 같은 시간에 사고 해역을 비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미 해군의 시호크가 왜 보이지 않았는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한국 정부는 사고 다음 날 그들에게 사고 해역으로부터 17마일(약27킬로미터) 떨어진 해역을 배정했고, 생존자 구조 임무가 아닌 사체 수거 임무를 맡겼다고 했다. P 094


2020년 4월 16일, 6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 자연재해도 아닌 인재로 일어난 대참사였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며, 정말 뼈를 씹어도 분에 풀리지 않을 정치인의 탈을 쓴 짐승들이, 그리고 기레기들이 지금까지도 유린하고 있는 사건이다.


엄청 큰 파도가 몰아쳤거나 태풍에 휘말리는 등 정말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였다면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인재였다. 그것도 경색된 정치,행정권 수반과 자극적인 기자를 쓰는 기레기들이 빚어낸 인재였다. 선내에 있던 희생자들이 들었던 말은 “기다리라”, 그리고 속보로 접한 국민들이 들은 말은 “전원 구출” 이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약 3백여명이 희생되었다.


이국종 교수님을 비롯하여 수 많은 의료진이, 한/미해군들이 세월호에 있던 탑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사고해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공식절차’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윗선’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구조를 하려고 도착했던 사람들은 전부 사고해역 밖으로 밀려났다. 꽤 오랜시간 세월호는 바다에 떠있었고, 나를 포함하여 많은 국민들이 생중계로 그 상황을 보고 있었다. 누가봐도 구조가 가능해보였고, 실제로  “전원 구출”이라는 속보가 급작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실시간으로 보고있던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들을 구하지 못한 이유가 강력한 태풍 같은 피치못할 사정이 아니라, 그저 ‘윗선’의 지시가 없어서, ‘윗선’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드느라, ‘절차’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얼마나 경색되었던 나라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쓰디쓴 사례인 것이다. 한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가야 하는 정치/행정력이 이렇게 경색이 되어 있는데, 일반 사조직들이야 당연지사.


-교수님, 외상센터가 바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시간 외 근무를 많이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 기관이 노동부에게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진퇴양난이었다. 외상센터의 일은 줄지 않았고 줄일 수도 없었다. 나는 병원으로 오는 중증외상 환자의 수를 조절할 수 없고 병원 문턱을 넘어와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를 전원시킬 수도 없었다. (중략) 병원의 많은 부서들이 인력 부족에 시달렸고 부서 인원을 늘려달라는 요청은 동시다발적으로 올라가므로 외상센터에만 더 많은 인원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P 117


새 정부는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상센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들의 업무 공백을 메워주는 전담간호사들의 근무시간도 주 52시간으로 묶여버렸다. 김지영은 담당간호사의 근무일정표를 더 이상 짤 수 없다고 비명을 질렀다. (중략) 김지영이 극도로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전담간호사 한 명이 또다시 유산해 2주간 병가처리를 해야한다며 승인을 요청해왔다. P 295



정부에서 하는 여러 정책들, 누군가에는 좋은 정책일수도 있지만, 누군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정책도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대표적이다. 많은 기업/근로자들이 반발했다. 저녁이 있는 삶, 그 누가 싫어하겠냐만은 현실이 그렇지를 못했으니까(물론 공무원/공기관은 제외). 인력부족은 당연지사였다. 그렇다고 인력을 충원한다? 대부분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비용에 민감하기에, 인력충원은 정말 ‘개나 줘버리’는 이야기다. 


혹자는 <주5일제>를 예를 들며, 이렇게라도 시행을 하면 언젠가는 주 52시간도 정착될거라고 이야기 한다. 실제로 나 학교 다닐때 해도 주 5일제가 왠말? 주 6일제였다. 토요일은 4교시라는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고등학교 다니던 중간에 주5일제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주6일을 하는 회사들도 있다. 생각보다 많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 정책을 뒷받쳐주는 환경이 되어야만 제대로 굴러간다. 아쉽게도 이 나라는, 위 이국종 교수님의 외상센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부가 좋은 정책을 내놓으면, 그에 따른 부차적인 해결방안등이 따라줘야 한다. 그리고 이를 잘 지킬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은 당파싸움을 위해 서로의 지지층을 끌어모아, 좋은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게 아니라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나라다. 그래서 주 5일제가 아직까지도 자리 못 잡는 회사가 많다. 아니 정확히는 공식적으로는 주 5일을 지키고 있으나, 그 속을 들어가면 편법으로 주 6일이 밥먹듯이 일어난다. 분명 우리나라는 주 52시간만 근무할 수 있다고 법적으로 못 박았으나, 아직까지 온갖 편법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 1,800억 원을 들여 대규모의 안전체험 테마파크를 지어놨다. 하루 평균 입장객은 350여 명, 연간 적자 규모는 15여억 원이라고 했다. 1,800억원이면 중증외상센터 전체 건립비용을 상회한다. 소방항공대 두 세곳을 창설할 수 있는 금액일 것이다. 세월호와 중증외상에 대한 이슈가 불거진 이래로 안전과 외상을 테마로 수 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있으나, 나는 그 핵심가치를 알 수 없었다. P 259


이국종 교수님이 설립하려 한 중증외상센터, 이 센터는 이 나라에 꼭 있어야 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지자체, 정부기관 세곳이 합하여 예산이 많이 든다고 비난을 가한다. 그런데 비난을 가하면서도, 어떻게든 유지하라고 압박을 한다. 유지를 하려면 그만큼 예산이 들어가는데, 예산은 주지않고 유지를 하라고만 하니 이국종 교수님을 비롯하여 외상센터에서 일하는 의사/간호사들만 죽어난다.


참 웃긴게, 어떻게든 예산을 짜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그들은 연간 적자 15여억원을 부르는 안전 체험 테마파크를 설립했다. 누가봐도 전시행정이다. 자기를 뽑아준 지자체 시민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만든 테마파크다. 시민들이 고혈이 담긴 1,800억원의 세금을 써서 만든, 연간 15여억원 적자를 내는 테마파크. 이런 곳은 지자체별로 참으로 많으니,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렵다.


정말 필요한 시설은,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은 중증외상센터는 돈을 많이 쓴다고 공격하고, 정작 전시행정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우리나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단 한번이라도 중증외상센터의 세계적인 표준을 한국에 심어보고 싶었다. 아주대학교병원 중증외상센터가 문을 닫고 한국의 중증외상센터 사업이 종료되고 나서도, 다음 세대 의사들 중 누군가 다시 중증외상센터를 만들어보려 할 수도 있다. 그때를 위해 우리가 남겨놓은 진료 기록들이 화석같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P 303



이 나라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국종교수의 말처럼, 다음 세대 의사 중 누군가가 중증외상센터를 만들려고 해도 아마 성공하지 못하리라. 정말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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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임진왜란 관련 역사서가 아닌, ‘역사기행’책이다. 즉,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기행문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책은 기행문이 아니라 역사서로 보인다. 중간중간에 대마도 반쇼인, 하치만구신사, 세이잔지 등 분명 대마도에 있는 중요 유적지도 나오긴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나오는 느낌이랄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차라리 책의 제목을 장르를 임진왜란 관련 역사서 쪽으로 바꿨으면 어땠을까?

이 책은 조선 중기 한일 관계와 임진왜란을 비롯한 조선의 상황, 그 영향이 미친 근대사 등을 공부하기에는 정말 딱 좋은 책이라는 건 확실하다.

만약 역사가 발전한다면, 어떻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혹한 전란을 겪고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며, 4.3제주의 그 가슴 아픈 사건을 겪고도 5.18광주의 비극이 발생하고, 당파싸움으로 망헀던 나라에서 아직도 양 극단의 진영논리가 판을 치며, 400년간 신분제로 고통받았던 나라에서 어떻게 인종차별이 일어나고, 숭명으로 자주권을 상실했던 나라에서 숭미하는 세력들이 생겨나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발전을 믿기로 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한 우리 내부에 사랑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오랫동안 일본과 왕래를 끊어 외교사절이 없으므로, 히데요시가 분하고 부끄러움을 품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이 이 뜻을 명나라에 알려 일본으로 하여금 사절의 길을 통하게 하면 무사할 것이요, 일본 백성 또한 전쟁의 노역을 면할 겁니다"

"일본은 다음 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하는 것이 좋다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조선은 비로소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중략… 병비시설을 점검게 했다. … 중략 … 그러나 조선이 개곡된 지 200년 간 너무 오랜 기간 평화에 길들여져 있어, 노역에 동원된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태평시대에 당치도 않게 성을 쌓느냐는 상소가 빗발쳤고, 홍문관고 공사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사이요, 은혜로는 부자사이다. 임진년의 재조지은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선조께서 42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겨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그런대 광해는 명의 은덕을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출전했던 모리 테루모토의 조슈번 세력은 …중략… 정한론을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이나 소위 ‘유신 3걸’ 중 한명인 기도 다카요시,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불린 노기 마레스케,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자 초대 통감으로 조선 병탄의 기초공작을 다진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주도한 가쓰라 다로,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태평양 전쟁 전범 도조 히데키등을 배출하였으며, 이들 세력은 제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도 일본 정계에 주류 세력으로 남아, 자민당 체제를 확립시키고 1960년대 일본 총리를 지낸 현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그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 외무장관과 자민당 간사장을 지낸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현 아베 신조 총리로 이어지게 된다.

1974년 ‘오키나와 반환’협상을 조인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는 방문 당시 자신이 임진왜란 이후에 야마구치 현에 종착한 조선인의 후예란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둘째 형이 기시 노부스케이고, 기시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이니, 아베 역시 조선과 무관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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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능하고도 무능한 조선 정부와 사대부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조선 왕실은 이애숙이라는 여인을 내세워 본인의 안위를 지켜놓고, 나중에는 본인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내쳤다. 비단 이애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당시에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은 수십에서 수만명. 정말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물론 남자들도 많이 끌려갔다. 돈이 많은 양반가에서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서 빼내오는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차별적이었다. 간혹 자기의 여식을 빼내기 위해 몸값을 지불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 스스로가 목숨을 걸고 도망쳐 고국으로 돌아오면, 조선사람들은 그녀들을 ‘환향녀‘ 라고 부르며 배척했다. 조선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환향녀‘는 오랑캐에게 정조를 빼앗긴 수치스러운 여자였다.



청나라에 잡혀 갔다면 응당 자결을 했어야 했는데, 자결하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니 너희야 말로 짐슴이고 오랑캐다. 당대 환향녀를 향한 인식이다. 조선 유학자들이, 유학을 본인들에게 이로운 부분만 받아들이고 지멋대로 해석하여 널리 퍼트린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끝자락에는 초라한 묘가 하나 있다. 일명 ‘족두리 묘‘라고 불리는 의순공주의 무덤이다. 그 왼쪽 위편 저만큼에는 마치 ‘족두리 묘‘를 지키고 있는 듯한 또 하나의 산소가 자리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의순공주의 친부 금림군 이개윤의 무덤이다. 어느 날 목격하게 된 초라한 ‘족두리 묘‘와, 딸 자식의 무덤을 수백년 동안 묵묵히 지키는 아비 산소의 아픈 잔영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350여 년 전 왕가 종친의 여식으로 태어나, 임금의 진짜 딸을 대신해 청나라 장수의 첩으로 끌려간 의순공주의 한 맺힌 일기장이다. 아니, 청나라 군대에 무참히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만 여인들에게 환향녀 딱지를 붙여 비정하게 내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대부‘ 라는 이름의 냉혈한들에게 내미는 아주 오래된 고발장이다.

<작가의 말 中>

먼길에 고생이 많겠구나.

나의 양녀가 되었으니, 너도 분명 나의 자식이다.

의순은 청국에 가서도 조선국 왕손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말라.

애숙은 차마, 한양에서 들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도망쳐서 돌아간 포로 중 적지 않은 여인네들이 도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홍제천변에서 움막을 치고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랑캐에게 몸을 버렸으니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이혼 청원에 나랏님마저 골머리를 앓는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P158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P174 ~ 175

"춘옥은 한양 본가로 들어가긴 했는데, 가족들이 별당에다 가둬 놓고 가축 취급을 하는 바람에 그만

정신병증을 일으켜서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내침을 당했사옵니다.

그 후 우리와 함께 지내왔는데, 평소에 멀쩡하다가도 간간이 정신이 헝클어져서

홍제천에 나가 도래를 부르며 온종일 몸에다가 물을 끼엊는 발작 증세를 보이곤 하옵니다."

가슴이 아팠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여인네들의 피맺히 삶들이

송두리째 자신의 것인 양 다가와 애숙은 가슴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 P224

정축하성(삼전도의굴욕)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P227

"제게…나라는…조선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나라였기에 차마 버릴 수 없었을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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