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빠져 있는 것. 이 책에 담긴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지극히 사적인 기호보다 균형 잡힌 일상을 가꾸기 위해 내 마음이 나아가는 방향을 기록한 것에 가깝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오래전 나는 사는 게 허무해서 작은 물건이라도 쇼핑하며 하루를 견디듯 살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미니멀리스트로 나의 태도를 변화시킨 뒤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생활과 건강에서 최소 취향이 확고해진 뒤 내가 집중하는 건 배움. 머릿속에 든 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고 평생 가져가는 거라 하지 않던가. 물건보다 경험을, 경험보다 배움과 깨달음을 얻으며 충만함을 느낀다. - P5

가지고 싶은 물건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느끼는 성취감. 돈을 버는 건 언제나 어렵지만, 물건을 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견디며 돈을 벌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나와 다른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게 맞는 방향 같았다. 가장 손쉬운 기분전환, 수집인지 호딩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돈과 시간을 많이 썼고… P 041 - P41

내가 오랫동안 고생했던 문제, 물질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고 부러움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노력한 끝에 소비중독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감정적 소비가 드물뿐더러 물질 자체에 큰 비중을 두고 살지 않는다. 물질이 채우지 못한 공허와는 다른 감각으로 여백은 여유로웠으나 삶의 재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욕구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내게 찾아온 부러움의 대상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P 193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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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 신드롬을 분석하는 것은 단순히 인기 캐릭터기 때문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펭수는 지금 한국 사회의 트렌들르 세심하게 반영해서 만든 입체적 캐릭터다. 펭수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진화할 수 있었던 데는 연출자, 작가 그리고 연기자의 유연한 팀플레이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초기의 펭수가 2019년 9월을 기점으로 어떻게 달라지고, 2020년에는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통해 2020년의 펭수를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펭수가 한국 사회의 트렌드, 그중에서도 라이프 트렌드와 사회문화 트렌드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서 가능하다. 다시말해, 펭수는 트렌드의 산물이자 우리 시대의 욕망을 담은 아이콘이다 - P5

펭수를 2030 밀레니얼 세대가 적극 지지하는 것은 펭수의 외모 때문이 아니고 펭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거침없이 사회와 기성세대에 바른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P 028 - P28

2020년 1월 초, 펭수는 ‘펭수의 고향 남극으로’라는 에피소드에서 "새해를 맞아 고향에 감. 카톡 안받아요" 라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진다. 펭수를 찾아간 제작진이 다음 날 촬영인데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내일이 촬영이잖아요? 저 오늘 월차 냈습니다."하며 당당히 휴일에는 카톡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휴일에 연락하면 지옥 갑니다.", "일도 쉬어 가면서 해야죠." 라며 사이다 발언을 이어간다. 이런 발언을 속 시원하게 여기는 2030세대가 많다는 것은 아직도 현실 직장에서는 이런 말을 당당히 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P 150 - P150

펭수가 글로벌 스타가 되려면 환경이나 젠더, 윤리 이슈에 좀더 투자해야 한다. 한국에서 펭수가 사랑받은 결정적 계기가 안티꼰대였다. 갑질과 꼰대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를 재미있게 풀어내며 공감을 샀던 것이 2030세대에게 사랑받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환경, 젠저, 윤리, 불평등 문제다. 오래전부터 있던 문제였지만, 기성세대가 상대적으로 외면헀던 이슈였고 그 결과 양극화는 더 심각해져갔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환경문제는 시대의 상식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면서 과거와 같은 시각으로 환경문제를 보지 않는다. 글로벌 10~30대, 즉 MZ 세대의 공감과 함께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라도 펭수는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동안의 펭수는 빨리 배우고, 적응하고, 변화를 받아들여 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펭수에게 기대하는 점도 이것이다. 펭수의 진화가 결국 글로벌 스타로서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 줄 무기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P 241 - P241

오디션 영상에서 펭수는 남극에서 저가 항공을 타고 스위스에 불시착해 요들송을 배웠고, 스위스에서 헤엄쳐서 인천 앞바다까지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스위스에서 인천공항까지 비행기로 직선거리가 9,000킬로미터 정도다. 하지만 물길을 따라오면 지중해와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지나고 홍해 ,아덴만, 아라비아해, 남중국해를 거치는 동선이 최적일 것이다. 이렇게 해도 1만 4,000~1만5,000킬로미터는 된다. 이 정도의 장거리를 헤엄치는 것이 가능한 펭귄은 황제펭귄이 아니라 아델리펭귄이다. 아델리펭귄은 이동기가 되면 약 1만3,000~1만 7,000킬로미터의 바닷길을 헤엄치기도 하고, 귀소본능이 탁월해 비행기를 태워서 4,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떨어뜨려도 10개월 후 원래 살던 곳으로 찾아간다. - P56

하지만 일부 펭귄은 야생 상태에서도 50년까지 살았다는 기록도 있고, 동물원이나 사육 시설에 있는 펭귄의 경우 야생 펭귄보다 수명이 길다. 펭수는 인간 세계에서 살고 있는 설정이기에 야생 상태에서보다 수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한국의 미세먼지를 비롯해 환경오염 문제, 연예인으로서 펭수가 겪는 스트레스, 펭귄 무리와 떨어져서 홀로 살면서 겪을 외로움 등을 변수로 계산할 수는 있겠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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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감기 때문에 제조 약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본 적이 있을 거다. ‘내 약에 항생제가 들어있으면 어떡하지?’라는 그러한 생각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두눈 부릅뜨고 약봉지를 보면서 항생제가 있으면, 빼낸 적도 여러번 있었다. 회사에서도 병원 제조약에서 항생제를 빼고 먹는 동료들도 여럿 보았다. 뿐만 아니다. 항생제 내성이 두려운 엄마들이 ‘안아키’라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항생제는 인간에게만 사용된 게 아니다. 동물들에게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 어떠한 동물은 가축으로 길러져, 인간들의 식탁에 올랐다. 또 다른 동물들은 인간의 반려동물로 키워졌다. 가축이든, 반려동물이든 그들이 먹는 사료 속에도 항생물질이 들어 있었고, 인간의 식탁도 항생물질에 찌들어졌다. 그렇게 항생물질이 우리의 생활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항생제에 계속 노출된 박테리아들은 진화했다.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거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항생제의 무분별한 사용이, 정작 인간을 죽이는 박테리아를 진화시켜버린 것이다. 진화한 박테리아를 죽이기 위해서는, 더 강한 항생제가 필요하게 되었고, 더 강한 항생제는 또 더 진화한 박테리아를 만들어냈다. 이 악순환 속에서 정작 우리 인간들은 매우 강한 항생제 치료로 인해 죽어가거나, 혹은 죽이지 못한 박테리아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다.

그때가 바로 내가 약물 내성을 지켜보기만 하던 수동적 관찰자에서 증가하는 슈퍼버그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경주에 뛰어든 능동적인 참여자로 바뀐 순간이었다. 그러나 임상시험의 멀고도 험한 여정을 시작하기전에 나는 톰 스타이츠, 톰 월시와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이면에 숨겨진 놀라운 과학 발전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들의 실패한 연구들과 끔찍한 윤리적 과실로부터 얻은 고통스러운 교훈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 P10

슈퍼버그는 196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1990년대까지도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의사들의 잘못된 항생제 처방 관행과 함께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상업적 농업이 박테리아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약품들을 노출시켰고, 그 결과 박테리아들은 그 약효를 무력화시키는 법을 알아냈다. 다시말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감염의 주요인인 슈퍼버그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P 012 - P12

동물에게 항생제를 무분멸하게 쓰는 관행은 슈퍼버그의 출현은 주요인 중 하나였다. 동물 안에 사는 박테리아들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약물들에 노출되면서 그것들을 피할 방법을 학습하는 까닭이다. 최근 18개월 주에서 100명 이상에게 발병한 감염의 최종 원인은 예기치 않게도 강아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감염된 개들 거의 전부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팔린 것들이었고, 최소 한 차례 항생제를 투여 받은 이 개들 속에 살던 치명적인 슈퍼버그가 새 주인에 옮겨간 것이었다. P 172 - P172

대다수 항생제와 달리 메로페넴은 항생제 분해 효소에 강한 저항력이 있어서 심한 감염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항생제 중 하나다. (중략) 그러나 그의 소변에서 추출된 박테리아는 의사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메로페넴을 파괴할 수 있는 효소를 가진 박테리아였다. 참담한 사태였다. 그건 박테리아가 환자와의 줄다리기에서 또다시 이기고 있다는 신호였다. 만약 박테리아가 메로페넴에 완전히 내성이 생긴다면 매년 수 만 명이 죽을 것이다. P181 - P181

궁극적인 문제는 많은 항생제의 수익성이 낮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수준에서 신약의 생산과 시판 단계까지는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며 거기에는 10억 달러 이상이 소요된다. 비아그라 같은 약을 만들어낸다면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일 것이므로 그 비용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항생제의 경우 몇 가지 특성 때문에 이윤이 적다. 항생제는 대체로 환자가 아플 때만 단기로 처방되며, 훌륭한 새로운 항생제라도 머잖아 그에 대한 내성이 발생하게 된다. 항생제 내성은 시기의 문제일 뿐 반드시 생긴다. P 039 - P39

페니실린이 처음으로 시판된 뒤로 2세대가 지나면서 수억명의 생명을 구했는데 지금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재고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는다. (중략) 페니실린의 유효 성분을 생산하는 회사는 오직 4개 뿐인데, 중국과 호주에 본사를 둔 제조사들이 이윤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생산 수준을 낮게 유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P 103 - P103

환자들에게는 이런 약들이 필요했지만, 시장은 그것들을 감당하게 설계되지 않았다. 누가 한 알에 1,000달러 또는 그 이상을 지불할 것인가? (중략) 일반적으로 신약 제조사들은 특허권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전하지 않는 한 복제약 제조사들과 경쟁하기 전에 12년에서 15년간 판매 독점권을 갖는다. 하지만 복제약 제조사들이 생산에 나서지 않는다면 특허가 만료된 후에도 가격이 오를 수 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항생제 10종 중 1종이 경쟁 부재로 인해 가격이 90%인상됐다. P 211 - P211

임상시험 등록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한 많은 조치가 있었지만 내 연구처럼 환자들이 어떤 실험적 약을 투여 받는지 알고 있는 공개 임상시험에도 장애물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되는 회의에서 동료 의사들은 임상시험 대상제 배제 기준이 너무 엄격해졌고, 효중성 백혈구 감소증과 장기부전, 패혈증 같은 배제조건이 임상시험이 필요한 환자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매번 불평했다. 임상 연구의 개정적 고려사항을 읽으면서 따분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항생제 연구가 너무 복잡해지고 비용도 너무 많이 든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P 280 - P280

우리의 슈퍼버그 연구는 대부분 항생제 개발과 임상시험에 초점을 두지만, 진단도 그만큼 주요한 역할을 한다. 더 나은 검사는 더 정확한 진단을 의미하며 결국에는 더 정확한 항생제 처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약에 노출되며, 이는 진단이 불확실할 때 주로 발생한다. 우리는 훌륭한 진단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의문을 제거하고 의사들이 항생제가 필요하지 않을 때 항생제를 중단시킬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비용을 대야 한다. P 316 - P316

우리는 슈퍼버그나 새로운 변종 박테리아로 인한 피부 또는 연조직 감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달바가 기존 치료제보다 효과적인이 알아보고자 했다. P 080 - P80

임상시험 계획서를 검토하는 위원들을 바라보는 동안 속에서 조용한 분노가 차오르는 걸 느겼다. 결국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쓸 수 있는 약이 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환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P 192 - P192

이 약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 것이며, 제약사에서 무료로 제공할 거라고 목청껏 외쳐왔지만, 이 약을 시도해볼 용의가 있는 적합한 환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후보 환자 중 일부는 내가 만나러 갔을 때는 평온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아프고 겁에 질려 동의서를 작성해줄 수 없었다. 동의서를 작성해줄 수 있는 환자들 가운데서도 일시적 혈압강하나 비정상적인 혈액 검사 결과 같은 세부 조건으로 인해 배제되는 이들이 종종 생겼다. 임상시험이 가장 필요한 환자들이 종종 참여 자격이 안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괴로웠다. P276 - P276

"우리는 방어력이 없는 이들을 방어해준다" P 088 - P88

나는 환자들이 자신의 삶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방식에 놀라워하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날뿐 아니라 많은 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럴 자격이 없는데’ 의사 가운은 환자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만든다. 사람들은 가장 친한 친구와 가족에게도 절대 털어놓지 않을 사연을 내게 들려준다. 나는 플로리다 근교의 가톨릭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하며 자랐는데, 지금 나는 고해소의 반대쪽, 신부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P 265 - P265

의사라는 위치는 남다르다. 나는 의료진의 극심한 피로에 대한 글을 써왔고,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젊은 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있다. (중략) 의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시 정상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잠을 자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저녁에 친구와 어울리며 술도 한잔 할 시간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들은 병원이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을 필요로 한다. P270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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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일상이란, 그저 반복되는 하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운 거 하나 없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일상이었다. 저자의 일상도 나처럼 시간이 흘러가는, 반복되는 일상인건 분명 다를 바가 없 는데, 그는 달랐다. 매 하루마다 감동을 받았고, 고마워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싶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고, 찾고 싶었다. 단순히 문장 속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게 아닌, 내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내 일과를 들려주면, 대단하다든가 너무 금욕적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과 일을 소중히 생각한 결과이자, 더 큰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라는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며 솔직하게 감동하기 위한 컨디션 만들기라고 할까. - P3

발견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감동하는 만큼 발견할 수 있다. P 28 - P28

사람이든 물건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너그러운 마음의 눈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기 않았던 근사한 부분이나 자랑할 만한 모습, 숨어있던 다양한 면모가 보인다. 모두 얼핏 봐서는 보이지 안는 것들이다. P 33 - P33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반복했다. P 56 - P56

일이나 일상에서 상대방의 편리를 위해 애써 작은 수고를 들이거나 마음을 기울여도 실제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배려가 상대방을 알게 모르게 기분 좋게 만들고 이것이 요리에서는 맛있음으로 연결된다. 일상에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쾌적함,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P 83 - P83

주택 한 채와 만난 나는 오늘의 일상, 오늘의 일, 오늘의 모든 것에 깃든 ‘보이지 않은 곳의 몸가짐’을 정비하고 싶어졌다. P 121 - P121

종이컵에 "Thanks!"라고 적어준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 수고를 들여 감사의 말을 써주다니, 서서히 감동이 스며들었다. 한마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배웠다. 늘 감사하다. P 142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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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음, 최용주 옮김, 로빈 모이어 사진 / 한림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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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그 날, 광주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하여 선교사들, 그리고 평화봉사단 의사들. 이들 중 한 사람,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의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폴 코트라이트. 그는 뒤늦게나마 광주에서 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을 출간한 최용주님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P 232



작년 겨울, 난 광주에서 5.18의 흔적을 따라 돌아다녔더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당시 들렀던 장소들, 당시 보았던 사진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얼마전 광주법정에 참석한 전두환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을 계속 부인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비롯하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건지. 시민학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왜 아직도 떵떵거리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는건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때로는 환자들의 수술을 위하여. 환자들과 함께 순천의 병원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일그러진 외모로 인해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나, 순천에 있는 병원을 가려면 밖에 나가는 건 당연하고 버스도 수차례 타야했다.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 033



아, 폴 코트라이트, 그러니까 저자는 정말 환자을 생각하는 참된 의사였다. 이런 사람이 40년 전 그날, 광주에 방문하게 된 건, 순전히 나병 환자들 수술을 위해 순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나주에서 순천까지 가는 버스는 광주 터미널을 경유했다. 5월 19일, 그는 환자들과 순천까지 가는 길에 광주 터미널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참상을 마주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P 056 (5월 19일)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 057 (5월 19일)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P 063 (5월 19일)



저자가 광주를 들렀던건 5월 19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행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시 광주의 상황은 이러했다.



5월 18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금남로,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시위대 진압을 실시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눈 앞에 있는 시민들은 전부 짓밟혔고, 맞았고, 죽어나갔다. 폴이 광주에 들렀던 5월 19일에는 11 공수여단이 추가로 증파되어 더 많은 광주시민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P 070 (5월 20일)



폴을 향한 할머니의 슬픔어린 이 말은, 폴이 회고록을 쓰고자 한 이유였다. 그렇게 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폴에게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P 085 (5월 21일)



폴은 외국인이라는 무기를 방패삼아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물론 광주 밖을 나오는 교통편은 끊긴지 오래였고, 모든 길목마다 군인들이 검문중이었지만. 5월 21일, 이날은 신군부가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한 날이다. 요지는 단순했다.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불순분자들이 바로 빨갱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날 공수부대에게 발포명령을 내리며 실탄을 지급했다.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P 097 (5월 22일)



광주를 짓밟았던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외곽에서 광주 진출입로를 원천 봉쇄하며, 이 곳을 지나려하는 시민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폴이 이 도로를 지나 광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P 105 (5월 22일)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P 113 (5월 23일)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P 124 (5월 23일)



폴을 비롯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브, 팀, 주디. 그들은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심지어 자국,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에도 분노를 표했다. 아마 이때부터 이들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광주에 들어온 또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 기자들을 만나자고.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P 134 (5월 24일)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P 136 (5월 24일)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P 146 (5월 24일)



폴 일행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렸고, 광주시민들과의 통역도 맡았다. 최대한 사실 그대로 독일기자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폴 역시 상상하지 못할 참상을 계속해서 마주했으나, 그럴 수록 폴의 마음속에는 더욱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만 불타오를 뿐이었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어난, 이 참극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팀은 계속해서 독일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폴은 광주를 떠나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알리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푸른 눈의 외국인이어도 광주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졌기에, 폴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인적없는 산을 넘어, 광주를 벗어나 나주까지 왔다. 본인의 ‘원래’ 근무지였던 나주 호혜원으로.




물론 나주에서도 서울까지 나오는 길은 힘들었다. 군인들은 광주 뿐만 아니라 전남의 길목을 막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광주보다는 덜 했는지, ‘푸른 눈의 미국인’이라는 무기로 겨우 겨우 서울까지 올라왔다.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구나 싶었던 폴이었다.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P 178 (5월 26일)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P 182, 에필로그



폴을 비롯한 평화봉사단원이 ‘설마?’하고 의심했던 그 생각. 아니었길 바랬던 그 생각은 나중에야 사실로 밝혀졌다. 미국의 비밀해제 문건 중 미국이 신 군부의 무력진압을 용인한 내용이 남긴 문서들이 속속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폴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미국이 묵인했으리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릴 그 때를 기다렸고, 바로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을 했기에 이 회고록을 출간한 것이리라.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작년 겨울에 포스팅을 했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댓글들이 달린다. 포스팅을 했던 당시에는 그런 논란 댓글들은 바로 삭제했었는데, 이제는 삭제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앞서 제주 4.3항쟁에 관련된 포스팅에도 위와 비슷한 덧글들이 아주 자주 달리고 있다. 이런 덧글들의 공통점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과, 정부군에 학살된 피해자들을 ‘폭동, 폭도, 빨갱이’라고 지칭한다. 전두환이 발표했던 ‘광주사태 담화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독재 군사정권을 찬양하는 그런 사람들. 지금까지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미국을 찬양하고, 성조기를 흔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인이 쓴 이 회고록을 어떻게 바라볼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포스팅에도 위와 같은 논란을 일으키는 덧글들이 달리겠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말 좋아하는 미국인 조차도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의해 일어난 학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일이 빨갱이가 일으킨 폭동인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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