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괜찮아
니나 라쿠르 지음, 이진 옮김 / 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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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아, 이건 일상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주는 책이구나’ 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책이 이야기 하는 건 물론 ‘위로’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 이별을 하는 순간, 우리는 ‘상실’이라는 크나큰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마린도 할아버지와 이별하고, 상실이라는 감정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마린에게 상실이란, 극복하기엔 너무 큰 감정이었다.




마린이 겪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친구들, 마린의 친구 메이블까지. 마린의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불우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다....고 당시의 마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행복에 어딘가 모순이 있었다는 걸 깨닫기에는, 마린은 너무 어렸으니까. 그 모순을 깨닫기도 전에 마린은 할아버지를 바다에 빼앗겼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마주한 이별. 이별에서 오는 상실감. 마린은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을 마주할 수 없었고, 그렇게 마린은 주변 사람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메이블에게도 아무 말 없이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서 40시간이나 떨어져있는 뉴욕으로. 마린은 그렇게 도망쳤다.




“나하고 같이가자” p. 054



“난 내가 얘기할 때 억지로라도 네가 얘기하게 하려고 이 먼 길을 왔어” p. 061



“마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알아. 내가 친할아버지처럼 사랑했던 할아버지 손에 자란 애란 것도, 내가 대학으로 떠난 지 며칠 뒤에 할아버지가 물에 빠져 돌아가셨고, 그날 밤 이후 내 친구 마린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고향 사람 중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심지어 나조차도” p. 067



그런 마린을, 40시간이나 떨어진 뉴욕에 있는 마린을 찾아온 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메이블이었다. 마린이 할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으로 고향을 떠난 그 순간, 메이블은 가장 친한친구 마린을 잃은 상실감을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실감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도망을 선택한 마린과는 달리, 메이블은 마주했다. 자기에게 상실감을 안겨준 마린을 만나기 위해, 40시간을 달려왔다. 메이블이 그렇게 용기를 마린을 만나러 온 덕분에, 마린도 할아버지를잃은 상실감과 마주할 용기가 조금씩이나마 움트기 시작했나보다.



난 식성이 까다롭지 않았다. 단지 어느 날 불시에 무언가가 나를 덮칠까 봐 두려운 것 뿐이었다. 식은 커피, 네모난 미국 치즈들. 너무 덜 익어서 가운데가 허옇고 딱딱한 토마토. 가장 사소한 것들이 가장 끔찍한 것들을 불러올 수 있다. p. 084



“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곧 폐허 속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p. 117



“내가 예전에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과 지금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는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리고 책을 덮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에 울림이 있고 가시처럼, 종기처럼 도무지 떠날 줄 모른다.” p. 161



고향에서 도망친 마린은 일상적인 것 조차도 두려워했다. 일상적인 것에서 찾아오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그 추억과 함께 찾아오는 할아버지와의 이별. 그 아픔과, 상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향을 도망친 자신. 고향을 도망치고 나서도 마린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살았다. 최대한 기억하지 않으려고, 추억하지 않으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랬던 마린을 향해, 메이블은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고. 메이블 부모님조차도 마린을 기다리고 있다고. 마린을 위한 방을 만들어놨다고 말이다. 



“카를로스 오빠 방을 왜 치우는데?”​


“너 주려고. 방을 새로 꾸몄다고 얘기했잖아.”


“난 손님방 말하는 건 줄 알았는대.”​


“그 방은 너무 좁아, 그리고 거긴 손님이 묵는 방이야.” p. 177



할아버지와 이별한 아픔으로, 온 마음이 상실감으로 가득 찼던 마린. 모든 것을 끊어내면서 스스로 외로움의 길로 들어섰던 마린. 하지만 그 조차도 인식못했던, 아픔과 고통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마린에게 메이블은 상실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외로웠어” 163




사람은 살면서 숱한 이별을 한다. 물론 너무 오래되 기억이 안나거나, 그리 깊은 마음이 아니었던 이별도 있다. 반면 마린처럼 상실감을 느끼는 이별도 있을것이다. 이 책은 이별을 마주할 때, 상실감을 마주 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지 마린과 메이블, 두 사람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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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에게 일본은 용서할 수 없는 구적이었다. 일본의 침탈에 맞서 감연히 의병을 모아 선두에 나섰다가 결국 대마도로 압송되어서는 일본인이 제공하는 일본 양곡이 든 끼니를 취하는 것 조차 부끄러워했다. 꼿꼿한 선비의 기개는 비극의 시대에 어울리는 선열한 죽음을 택했다. 그는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우니지마(대마도 북단의 섬)에는 조선혼령이 나타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든 조선 남자와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조선 여인이 나타난다.…(중략)…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은 이지하라의 산사에 모여 진무제를 올렸다. 혼령을 내쫓는 행사도 열었다. …(중략)… 말하자면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저지른 악행, 조선 양민을 살육하고 코와 귀를 베어 가던 악행을 일본인 자신들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직(이매계)는 두 번 절하고 조선 사절에게 아뢰옵니다. 제 아버지 (이)진영은 경상도 영산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쇄환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귀국의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죽을 때 까지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중략)…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제 선조의 내력이나 그 언행을 아시는 것이 있다면 저의 이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자 써주시되 …(중략)… 자는 무엇이고 호는 무엇인지를 적어주시면 선조의 흔적으로 알고 보존하겠습니다.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하는 격투기 붐은 바로 한국 핏줄의 싸움꾼들이 발휘한 투혼의 연장선에 있다.…(중략)…

주먹의 세계에는 민족의 우열도, 배타 감정도, 배우고 못 배운 차이도, 인격 자산과 배경 같은것도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에게서 일제 36년 지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여러차례 그 질문을 받았다. 지당한 얘기이고 과연 질문대로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 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맞는 말도 지나치면 후퇴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가는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덧붙였다.

"여러분이 36년을 말하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 14대 심수관

김달수는 고대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 결과 일본 책의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도래인‘으로 바꾸는 성과를 거두었다. 귀화란 일본을 문화/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고 한반도 사람이 머리 숙이고 들어갔다는 어조를 품고 있다. 도래인은 그것을 객관화하고 가치중립화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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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년 아스카데라 조영을 시작할 당시

백제에서 스님과 절을 짓는데 필요한 기술자가 파견되어 왔다.

이 가운데 기와 박사도 있었다.

아스카데라를 조영하기 전엔 일본에 기와가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 일본 여기저기에서 기와집이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

백제의 와당문화가 전래한 덕분이다. - P19

신레이 호덴에는 한일간의 깊은 관계를 알려주는

도래인 하타노 가와카스 부부의 조각상이 안치되어있다.

하타씨는 농사, 제방 외에도 양조, 양잠, 베짜기 등 신기술을 일본에 전했으며

일본 고대사회가 발달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 P97

엔닌은 신라와 깊은 인연이 있는 스님이다.

그는 838년에 당나라에 갔는데 체류기간을 연장하려 했으나 못했다.

그 때 장보고가 창건한 산동성 적산법화원에 묵었던 엔닌의 소원을 이룬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다. - P219

엔랴쿠지 요카와추도 옆에 적산궁엔 신라명신이 모셔져있다.

도도지역에 있는 몬주로 옆에는 장보고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념비가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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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는 에릭이 밀수를 저질렀을지언정, 그의 행동 결과가 나쁘지많은 았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위에서 화석사냥꾼들이 이야기하던 ‘화석사냥꾼이 발견한 화석 덕분에 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는 자본주의의 논리처럼, 공룡 화석 역시 학자들이나 박물관, 심지어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까지 이러한 화석들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면 에릭같은 화석사냥꾼도 탄생하지 못했다. 어쩌면 화석사냥꾼인 에릭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일종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는 했다(물론 밀수를 옹호하는 건 절대 아님, 오히려 밀수 극혐!).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 나오는 수 많은 사람 중에서 문화유산으로써의 ‘공룡 화석’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본격적으로 화석사냥꾼 활동을 시작했던 젊었을 적 에릭이나, 1세대 화석사냥꾼인 메리-애닝 정도랄까. 그 외의 사람들, 내지 정부기관은 오로지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때로는 자본주의적으로, 때로는 학술적인 이유로 움직였다. 그래서 뒷맛이 조금은 씁쓸했다. ‘공룡화석’이라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둘러싸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2009년 여름, 나는 공룡을 훔친 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한 남성에 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터무니없어 보였다. 처음에 이 사건은 단지 기괴한 범죄 사건쯤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눈에는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유물을 품고 있는 자연의 역사와 우리의 지속적인 관계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보였다.

2012년 봄, 수집가, 밀수, 결혼, 민주주의, 빈곤, 예술성, 박물관, 광업, 할리우드, 러시아, 중국, 형사재판, 대통령의 정책, 탐험가, 몽골 문화, 경매산업, 과학사를 모두 건드리는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 P3

에릭은 그가 파낸 프룩스빌 화석 일부를 박물관에 대여했고, 1년 후에 그가 대여품을 찾으러 갔을 때, 그 물품에는 등록 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가 발견한 표본 하나는 다른 직업 사냥꾼 앞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에릭은 FMNH 과학자들이 그를 심각하게 위법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브룩스빌 현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에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에릭은 분노했다. P 102 - P102

맥도날드사와 월트디즈니가 시카고의 필드 자연박물관에 티라노사우루스 수를 구매해주기 위해 팀을 구성했다. 어느 신문은 시카고가 "‘다 베어스’와 ‘다 불스’에 ‘다 본즈’"를 추가하기 위해 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급하게 될지 궁금해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 대답을 알고 있다. 구매 희망자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가격은 전례없는 엄청난 금액인 836만 달러에 이르렀다. 윌리엄스는 세금을 대답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760만달러에 팔기로 했다. 나중에 스미스소니언의 커크존슨은 "그들이 수(티라노사우루스 수;공룡 뼈 화석)를 판매한 그날부터 화석은 돈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P 099 - P99

미국 답사 대원들은 곧 고비사막이 3년간 연장 가능한 답사 계약을 맺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유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굴한 화석은 몽골의 재산이지만 연구를 위해 뉴욕에 가져갈 수 있다는 조항에 모두가 동의했다. P 216 - P216

"몽골 대통령은 몽골의 재산일지도 모를 T-렉스 화석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P 308 - P308

이 모든일, 그러니까 엥흐바야르의 수치스러운 체포, 인권에 대한 미국의 훈계, 고착된 부패, 광산업과 관련된 논란, 치솟는 인플레이션, 엘베그도로지의 당이 6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2013년에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력, 일부 서방 외교관들 사이에서 몽골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 등이 T.바타르가 경매에 나가기 직전에 일어난 것이었다. 엘베그도로지에게는 승리가 필요했다. P 335 - P335

"(에릭)프로코피 씨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따르지 않는 지식 분야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가 그 분야를 따르고 그것을 위해 시장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화석 연구에서 중요합니다. 또한 화석 연구는 지구에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근원에 관해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 점에 있어서 그는 칭찬받아야 합니다. "

그러나 사회에서는 신뢰와 정직이 중요하다고 판사는 말을 이었다.

"그 점은 프로코피 씨가 평생 종사해온 분야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역사의 희소성으로 먹고살았고, 그 명성에 참여함으로써 실은 그 역사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제공하는 국가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도 자신을 헌신해왔습니다." P 393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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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은 모섬이 없어 각각의 독립적인 섬들이 모여 형성되었다. 그래서 여행자들도 신안에 왔지만 대체 어디가 신안인 지 알수 없다. 신안에 왔으나 신안니 아니라 압해도나 암태도 흑산도나 홍도, 증도 같은 개별 섬들과 마주하게 된다. 신안의 실체는 대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행자들은 신안을 다녀간 뒤에도 신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가거도, 임자, 하의도 같은 고유한 섬들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신안이 아니라 개별 섬에 다녀 온 것이다. 신안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신안 여행자는 물론이가 신안 주민들조차도 신안을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 P3

신안의 모태인 압해도는 그 이름처럼 바다를 재패한 섬이었다. 압해도 해상 세력의 수장은 후삼국시대에 고려 왕건과 끝까지 맞섰던 능창 장군이다. 후삼국시대 서남해 해상을 재패했던 능창은 수전에 능해 수달장군으로 불렸다. 신라시대 말 동아시아의 해상황 장보고의 암살 후 해상세력은 소멸된 듯 보였다. 하지만 50여 년 뒤 능창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장보고 암살 후에도 해상 세력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P 026 - P26

조선시대에는 동서남대 배부분의 섬에서 거주를 금하는 공도정책을 시행했다. 섬에 들어가 사는 이들은 반역의 죄로 다스렸으니, 섬에 사는 사람이 죄인인 시대였다. 이 무렵 신안의 섬들도 사람의 거주가 금지됐다. 신안 섬에 거주가 다시 허락된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중략) 공도정책이 섬의 역사마저 단절시켰다. P 030 - P30

특혜커녕 오히려 하의도 사람들 중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 재직 시절 하의도를 위해 해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의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새삼 김대중 대통령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난 고향이라고 특혜를 주지도 않고 또 고향이 아니라 해서 차별하지도 않은 공명정대함. 대통령은 결코 어느 특정 지역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모두의 대통령이기에 당연한 이야기다. P 104 - P104

유명세를 가장 크게 탄 곳은 드라마 ‘봄의 왈츠’촬영지였던 하누넘 해변이다. 하트 모양을 하고 있어 하트해변으로도 불리는데 연인이나 부부가 하누넘에 가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심장에 남는 사람이 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P 147 - P147

흑산도는 홍어의 섬으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삭힌 홍어는 흑산도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는 삭힌 홍어를 팔지만 흑산도 사람들은 정작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싱싱하고 찰진 생홍어를 주로 먹는다. 『자산어보』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나주 영산포가 삭힌홍어의 원류다. P 190 - P190

흑산도는 잠깐 들렀다 가기는 아까운 섬이다. 적어도 『자산어보』의 산실인 사리마을 사촌성당에서 하루쯤 소요하거나 걸어서 여행해야 흑산도의 깊은 맛을 알 수 있다. 사촌성당은 흑산도 유배살이 중이던 손암 정약전이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해 설립한 성당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어류 도감인 『자산어보』의 산실이다. P 192 - P192

나는 어보를 만들려는 생각으로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대라는 소년을 만났다. 차대는 즐 집안에 틀어박혀 손님들을 거절하면서 고서를 탐독했다. 나는 마침내 이 소년을 맞아들여 함꼐 묵으며 물고기 연구를 시작했다. - 정약전 『자산어보』 서문에서, P 245 - P245

신안 대둔도에는 창대의 묘지도 남아있고 그의 후손들도 살고 있다. P 247 - P247

두사춘으로도 불리는 두사충은 실존인물이다. 물론 자은도에 전해지는 이야기 속 두사충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점에서는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중략) 우연히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읽다가 그 실마리를 찾았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한음 이덕형의 묏자리를 두사충이 점지했다는 대목이었다. P 052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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