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은 조선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조선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참으로 불합리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특히 게일은 사랑한 조선의 모습은 다름아닌, 조선에서 찬하다고 칭해지는 ‘상놈’의 일상이었다.


게일에게 조선의 상놈은 신비한 존재였다. 그리고 놀라운 존재였다. 그저 평온해보이다가도,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상놈을 보면 한 사람이 화가 저렇게 크게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싸움이 끝나자 다시 평온하게 돌아오는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무엇보다 상놈은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른 양반과는 달리 땀방울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하루하루를 열씸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양반에 비하면 배운게 없는 상놈이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안에서 움직였으며,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 대해 신의를 지켰다.


게일에겐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가진 상놈이 신기하면서도 놀라웠고, 존경스러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게으름 피우는 양반과는 달리 그들이 없으면 조선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야말로 상놈은 제일 대단한 존재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조선 사람들의 삶과 성격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글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독특하고 예스러운 민족과 약 9년간의 친밀한 교제 후에 나는 이들에 대한 단상을 여기에 모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를, 그리고 우리 앵글로색슨족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랜기간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우리를 조선이라는 왕국에 사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인도할 수 있기를!

조선에 사는 외국인에게 상놈들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들만이 오랜 기간 유교 문화가 지워버린 한민족 고유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우기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유의 특성을 잃고 매우 인위적으로 변해갔다. 이들은 그러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도, 또 새롭게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고대의 유령같았다. 하지만 상놈들은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웠고, 어떤 면에서는 이 땅,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가진 가장 흥미로운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 P66

조선에는 짐수레같이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가축조차 짐을 지고 갈 수 없는 길이 많아서 결국 나라의 모든 힘쓰는 일은 상놈의 두 어깨가 담당했다. - P76

조선에서 오랜 시간 고생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내심을 기를 수 있는데, 이왕이면 빨리 인내심을 기르는 편이 확실히 자신에게 좋다. 조선에서 여행을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선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 방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내버려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재촉하고 닦달해봤자 아무런 변화 없이 느린 그대로일 것이며, 그들이 당신을 덜 사랑하게 할 뿐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까지 느려터진 나라가 빨리 하라는 의미의 말은 엄청많다는 것이다. Ossa, quippe, ullin, soki, balli, patpi, chiksi, chankam, soupki, nalli, nankum(원문표현; 어서, 급해, 얼른, 속히, 빨리, 바삐, 즉시, 잠깐, 쉽게, 날래, 냉큼)등은 우리가 매일 듣고 말하는 수 많은 말들 중 일부일 뿐이었다. - P102

조선의 옷가지들 중 가장 황당한 것은 바로 바지였는데, 입고 있을 때는 뭐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빨아 넣어놓은 그 바지의 라인을 보고 있노라면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입는 이 평범한 바지의 폭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극동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불상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속옷으로 입혀도 될 정도였다. - P171

연날리기는 조선사람들이 특히 뛰어나게 잘하는 놀이인데, 새해 무렵 서울의 위쪽 하늘에서 떼를 이뤄 경쾌하게 춤을 추거나, 신기할 정도로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연들로 생기가 넘쳤다. 이들의 연은 날개나 꼬리 없이 네모난 조그마한 것이었는데, 날아가는 모양을 보면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다. - P210

저녁이 되면 조선 사람들은 Angwangi(원문표현; 야광귀)라고 부르는 산타클로스를 막기 위해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양광이는 저 하늘 위에 살면서 새해 선물을 가져간다는 늙은이다. 동방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들은 신발을 문 밖에 벗어두는데, 새해로 넘어가는 그믐날 밤 양광이가 내려와 자기가 다녀간다는 기념으로 신발을 신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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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한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국신민으로 태어났던 그는, 그렇게 일본으로 넘어가 살던 그는, 왜 한국 정부가 관동대지진/관동대학살에 무관심한 지 알고자 이 사건에 대해 연구했고, 수 많은 자료를 모았으며, 이렇게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 사건을 연구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작금의 한국사회를 보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일본인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 사할린 징용 등이 수면 위에 올라 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군사정권, 독재정권, 친일정권이 일본의 만행을 숨겼고 감췄고 침묵했다. 역대 정권 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이러한 일본의 만행을 언급할라치면 참 이상하게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짓밟혔다. 정권이 바뀐 지금에서야 이러한 문제 중 일부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문제 중에 ‘조선인 관동대학살’은 없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이 문제에 무관심했다. 피해국인 우리가 무관심하니, 가해국 일본은 어떻겠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옆나라, 우리를 향한 공격심으로 바꾸었다. 애초에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였다. 큰 재난이 없을 경우에는 꼭 북조선, 즉 북한을 헤드라인으로 다루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없든 그랬다. 일본 국민들은 그런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게 정말 당연한 거였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도 일본 당국이 지닌 식민지전쟁 의식을 빼놓고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실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권력의 중추에 있었던 관료와 군인은 1918 ~ 1920년 사이의 식민지 전쟁을 수행할 때, 제일 선에 있었던 자가 의외로 많다. 그 현장에서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었을 때에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본에 적대 의식을 가진 조선인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권력의 와해를 틈타 혹시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않을까 하는 예단으로 선제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엄령 발동이었다. 최강의 권력으로 변한 계엄권력 아래에서 관민 일체의 대학살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이런 추론을 보증해준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 P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심니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 P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 P126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 P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 P278

장작불 위로 4,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의 손과 발을 큰 대(大)자로 움직이지못하도록 잡고서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버린 것이지요. 불에 타자 피부가 다갈색이 되었습니다. 태워지고 있던 조선인은 비명을 질러댓지만 이미 힘없는 비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이 차례차례에 개울에 던져졌습니다. - P224

잡힌 조선인 24명을 13명 한 무리와 11명 한 무리로 하여 철사줄로 묶은 후 갈고리로 쳐죽여 바다에 던져넣어버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어서 다시 갈고리로 머리를 찍었는데, 너무 깊이 찍은 나머지 갈고리 몇 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 그 외 3명의 조선인은 3호지에 있는 석탄 코크스 하치장에서 활활 타고 있는 석탄 코크스 불 속에 산채로 한꺼번에 던져넣어 태워 죽였다. - P225

협객이라 자칭하는 쓰키지의 노름꾼 친구가 자경단의 대장이 되어 본격적인 자경단이 생겼다. 해안가나 강가에 조선인이 올라올 테니 살펴보라 해서 토모씨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쓰키시마 고토바시 주변까지 조선인을 수색하러 가서 돌을 던지고는 만세 만세하며 죽이고 다녔다. 외진곳에는 조선인의 머리 없는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 P226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차별과 전횡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일본 정신사의 한 흐름을 짚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엎는 다행이라 하겠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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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그러니까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 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 P18

‘여행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은 작가라면 한번쯤 받아보는 것이다.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억이 나는 거의 없다. 영감이라는 게 있다면 언제나 나의 모국어로, 주로 집에 누워 있을 때 찾아왔다. (중략) 지금까지 낸 스무 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 단 두권만이 모국어의 영토 밖에서 쓰였다. 심지어 여행기도 집으로 돌아와 썼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 P80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9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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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스스로 일부 꼰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괴감........까지는 아니어도,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휴. 이런 책은 나같은 일반직원들이 아닌 관리자급 아니, 임원 및 대표라인에서 읽어야 하지 않나? 말단들이 끊임없이 이 책을 읽는다 한들, 음 글쎄. 조직이 변화할런지 잘 모르겠다. 임원급 한마디에 변하는 조직인데 말이다. 휴.....



무엇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90년대생을 맞이하기엔, 너무나 많은 부분이 기성세대의 눈에 맞춰져 있다. 말로는 수평적인 소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놓고 수직적인 소통,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짬밥으로 자리를 지키는 관리자들, 말로는 전자결재 시스템인데 그 전에 꼭 필요한 사전보고, 회의를 줄인다면서 하루에도 수 시간씩 하는 회의, 하... 나열하면 끝도 없다. 결국 윗사람이 바뀌어야만 변하는 것이다. 아, 이런생각을 하는 것 조차도 꼰대화인가 싶기도 하고...휴.... 참 어려운 사회다.

"그룹 입문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회사가 좋아 보였는데 현업 부서에 배치를 받자마자 바로 지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위에 사수라는 사람은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인 8시 30분까지 출근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본인이 8시 30분에 오기 때문에 본인보다 늦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냉소적 비난과 무시만 가했고요. 그런데 윗사람의 한마디에 죽는 시늉이라도 하더군요. 이 사람만 꼰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온통 꼰대 천지였습니다. 이런 꼰대 기업에서 함께하면 저도 언젠가 꼰대가 되어버리겠다는 생각에 입사 1년만에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 P147

"처음부터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월급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중소기업을 택하는 취준생은 없습니다. 단순히 중소기업의 월급만을 대기업 수준으로 올려주면 중소기업에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왜 중소기업을 지원하지 않는지 아세요? 바로 중소기업 사장들의 마인드가 쓰레기 인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은 죽도록 시키고 쓰다 버리죠. 우리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쓰레기 사장과 꼰대 선배들이 널려 있는데, 3년간 초봉 좀 올려준다고 누가 눈을 낮춰서 중소기업을 지원하나요? 이런 정책 또한 꼰대질 중 하나입니다." - P144

"저는 돈을 많이 줘서 9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초봉을 조금 지원해준다고 고용 안정성이 높아지나요? 그리고 3년 근속하면 월급을 지원해준다는 정부의 정책도 믿을 수 없고, 2+1 취업제도는 뭔가요? 세상에 어느 중소기업이 일할 자리도 없는데 임금의 3분의 1을 지원받으려고 3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낼까요? 솔직히 거지도 아니고 그런 취급을 받아가면서까지 공무원을 포기하고 중소기업으로 진로를 틀고 싶지 않아요" - P145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법칙은 쉽게 말해서 어느 조직이든 일정량의 얌체, 진상, 무능력자, 아첨꾼 등의 일명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1. 또라이를 피해 조직(팀 또는 회사)를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음.

2. 상또라이가 없으면 덜또라이가 여럿이 있음.

3. 팀 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옴.

4.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음.

5. 팀 내에 또라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또라이임 - P152

먼저 ‘야근 문화’에 익숙한 70년대생 이전 세대는 이러한 정시 퇴근 캠페인을 회사가 주는 하나의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회사가 1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 정시퇴근을 시켜주는 것을 직원들이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원, 대리급의 80년대생과 90년대생들은 생각이 다르다. 그들에게 정시퇴근이란 것은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엄연한 권리 인 것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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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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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 시대를 휩쓴 역병이 있었다. 전 중세 유럽을 휩쓸어 인구를 반토막 낸 페스트가 그랬고, 1차 세계대전이 또다른 복병이었던 스페인독감이 그랬고, 아즈텍과 잉카문명을 박살낸 천연두가 그랬다. 그리고 21세기, 바로 지금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과거의 질병들은 백신, 치료제가 만들어졌다. 코로나19도 아마, 언젠가는 치료제가 나올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이 후의 시간을 어떻게 마주해야하나?




아주 놀랍게도 이런 역병들이 창궐할 때마다, 역사의 흐름이 조금씩 요동쳤다. 어떤 때는 크게 꺾였고, 또 어떤 때는 조금씩 조금씩 휘어졌다. 역대 전염병 중 역사 교과서에 실린, 아주 유명한 병 ‘페스트(흑사병)’을 보자. 



쥐, 벼룩, 페스트균으로 이루어진 ‘3종 세트’는 화물을 실은 배와 동일한 속도로 로마, 마르세유, 스페인 해안, 유럽 문명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단 며칠 만에 진출했다. 그 이후부터는 육지를 통해 확산된 덕분에 확산 속도가 조금은 느려졌다. p 043



역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억 명에 달했고, 하루에 1만명씩 죽어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에도 페스트는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7~8세기에도 유럽 내 어딘가에서는 종종 역병이 발병했고, 영국 역시 664년에서 666년 사이 페스트의 습격을 받았다. 이후 페스트는 한동안 잠잠했다. p 046



페스트는 중세유럽 때 처음 생겨난 질병이 아닌 이미 6세기에 나타난 질병이었다. 그렇다면 6세기에 발발했던 페스트는 오래전에 발생했던 페스트는, 14세기 중세 유럽을 휩쓸 때처럼 대규모로 확산되지 않고 오래안가서 잠잠해졌을까? 그 대표적인 이유는 전염병 확산 요건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확산되기에 최적화된 요건 2가지가 있으니, (1) 고도로 밀집된 도시화 (2) 교통의 발달이 있다. 14세기와 달리, 6세기는 그정도로 밀집화된 도시화라던가, 교통의 발달이 더뎠기 때문에 페스트가 점차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14세기, 페스트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중국 대륙을 통해서(수많은 역병의 시작이 대륙이라는 건 정말 싸이언쓰..).



당시 기록된 보고서에 따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하는 길에 타타르인들은 절망과 분노를 참지못하고 일종의 생물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역병에 걸려 사망한 시신을 투석기에 매달아 카파 성벽 안쪽으로 던져넣은 것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으레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양념’이 많이 가미되었을 것이고, 성벽 안으로 던져진 시신만으로 전 유럽을 휩쓴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타르군 진영에 서식하던 쥐들이 카파시로 들어왔을 수도 있고, 쥐들과 함께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벼룩도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p 039



한 때, 기마민족인 몽고인들이 유럽땅을 짓밟았었는데, 바로 그때 페스트가 다시 유럽으로 들어왔다. 위생관념이라곤 없던 14세기 중세 유럽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불과 3~4년만에 유럽 전역에서 인구의 반 이상이 사망하였다. 왜 중세 유럽에 위생관념이 없다고 하는지는, 아래 내용만 보아도 알 수있다.



로마인들의 문화는 청결과 위생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입증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대도시 로마가 성정함에 따라(전성기 때에는 인구가 120만명에 달했다) 각종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티베르강은 오물과 세균으로 뒤덮였고, 도시 외곽에서는 풍토병 말라리아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서는 위생이나 건강관리, 경험과 관찰을 통해 지식을 쌓은 전문가들의(중세 시절과는 달리, 종교적 도그마에 좌우되지 않는) 치료 행위들이 활발히 이뤄졌고, 그 수준은 당시 유럽 내 그 어떤 국가들보다 높았다. 몇몇 유럽 국가들은 19~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고대 로마제국 정도의 위생과 의료 수준에 도달했다. p 036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만 봐도. 휴. 고대 로마제국의 반의 반도 못따라가던게 중세 유럽의 위생상태였다. 뭐, 이유야 어찌되었든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난 뒤, 유럽은 어떻게 되었을까? 보통이라면 경제가 붕괴되어, 유럽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간 뒤, 유럽사람들에게 “메멘토모리”, 즉 죽음은 늘 곁에 있다는 사상이 보편화 되어, 이를 바탕으로한 예술작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아픔을 예술로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게 바로 흑사병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이다. 



두번째로는 유럽의 ‘산업혁명’이다. 뜬금없이 왠 산업혁명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반 이상이 줄어들면서 노동력이 급감했다. 노동력 자체가 희소해지면서, 그 가치가 올라갔고 그에 따라 신분이 해방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발전이 생겨났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업혁명이다.



물론 이것들은 전부 긍정적인 측면일 뿐이다. 부정적은 측면도 분명히 있었도. 페스트가 ‘신의 분노’라고 하여,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마녀사냥이나 유대인학살도 많았다. 



이처럼 페스트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는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중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것 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질병은 근/현대에도 있었다. 



콜레라는 유럽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등장한 질병이다. 당시 유럽의 생활환경은 유례없는 속도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1815년 이후 유럽대륙은 18세기에 이미 근대화를 이룬 영국을 모델삼아 산업화를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p 149



현대식 생활환경이 시작된 19세기, 듣도보도 못한 병이 창궐했다. 그 이름하야 콜레라.



1817년, 인도에서 대규모 콜레라가 최초로 발발했으며, 그 전파 속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중략)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있어 인도나 중국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먼 나라에 불과했다. 당시는 이동수단이 그만큼 느렸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느린 이동수단과 콜레라의 짧은 잠복기, 즉 감연된 시점으로부터 겉으로 증상이 들어나기까지의 시간은 짧으면 몇 시간, 길면 사흘 정도에 불과하다. (중략) 따라서 유럽은 콜레라 발생 초기에는 안전지대로 남아있었지만, 방어선은 단 몇 년만에 무너졌다. p 154~155



병원균을 들여온 이들은 대륙 곳곳의 전장을 누비던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짐 속에 병균을 품은 채 귀환했고, 짐이 아닌 뱃속에 병균을 품은 채 돌아온 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p 155



뉘른베르크는 배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덕분에 콜레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1852년 뭔헨과 뉘른베르크를 잇는 직행 열차가 개통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중략) 뮌헨에서 열차를 타면 7시간 뒤에는 뉘른베르크에 도착할 수 있다. 즉 뮌헨에서 감염된 사람이 열차를 타고 뉘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에도 겉으로는 아마 멀쩡하게 보였을 것이고…. p 165



콜레라가 창궐한 19세기는 페스트가 발발했던 6세기, 14세기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때는 제국주의가 만연하여, 서로 식민지 설치를 위해 전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던 시기였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교통도 과거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한 뒤였다. 철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식민지 설치를 위해 세계 여러나라로 쏘다니던 군인들이 수 많은 병균을 가슴속에 품어왔고, 이 병균들은 발달한 교통수단에 힘입어 전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페스트가 유럽을 초토화 시켰다면, 콜레라는 유럽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아시아 전 세계를 초토화 시켰다.



인도에서 시작한 콜레라는 인근 아시아 도시에 퍼진건 물론이고, 인도를 밟았던 유럽의 여러 군인들이 품고온 병균은 러시아, 폴란드, 프로이센 등 곳곳으로 실어날랐다. 사망자의 단적인 예를 들자면, 독일에서만 50만명이 사망했다.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들 중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제일 지위가 높았던 사람은 미국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 이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들자면 차이코프스키가 있다. 이처럼 콜레라는 지위고하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수십,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바로 이 콜레라 덕분에, 지금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한 공중보건과 위생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한 의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던 중 영국에서 당대를 주름잡던 위대한 의사 하나가 콜레라의 전염 경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공중보건과 위생 관념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의학에 혁신적인 발견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그 혁신적 순간을 탄생시킨 의사는 존 스노우였다. p 168



영국의 의사 존 스노우는 유독 소호지구에 콜레라 환자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발병자가 나온 집을 전부 찾아다니며 ‘질병지도’를 만든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역학조사’ 다. 이 지도를 통해 사망자중 대부분이 브로드가에서 펌프로 길어올린 물을 마셨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 물이 콜레라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애초에 인도에서 콜레라가 시작된 이유가 바로 더러운 갠지스강을 식수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존 스노우의 발견은 그야말로 기적과 다름 없었다.



우리는 이 점을 콕 집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역학조사’와 ‘위생’이라는 개념이 바로 콜레라 덕분에 탄생했다는 것을.




팬데믹 현상이란 교통의 발전 및 세계화로 인해,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한 현상을 말한다. 6세기, 16세기, 19세기 세계적으로 창궐한 페스트와 콜레라 역시 일종의 펜데믹 상태였다. 그때보다 더욱 전 세계적으로 밀접해진 21세기,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또 한번의 팬데믹을 맞이했다.



앞서 일어난 펜데믹의 결과로 르네상스 부흥과 산업혁명, 질병관리에 대한 기초개념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지나간 다음, 즉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었다. 직장에서 근무하는 형태가 바뀌었다. 회의 형식도 바뀌었다. 장을 본다는 개념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그저 잠만 자는 공간이었던 집이, 내 ‘생활’공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평범한게 아니라 소중한 일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포스트코로나. 완성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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