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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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딱 2년만이다.




우리 집에는 책이 워낙 많다. 읽은 책도 많고, 아직 못 읽은 책도 많다. 이쯤되면 나는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사는게 아니라, 책을 ‘모으는’ 행위를 좋아해서 책을 사는 느낌이랄까? 아니 뭐, 어느쪽이든 결과적으로 난 사놓은 책을 읽게 되니, 좋은게 좋은거겠지만. 여튼! 책을 자주 사서 읽어야 할 새 책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뭐랄까?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안읽고, 새로운 책을 계속 읽게 되는 독서루틴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으로 정말 좋은 책은 다시 읽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다.




이 책은 사실 기자님이 조선일보에서 연재중인 기사 「땅의 역사」이기도 하고, TV조선에서 방영하는 「땅의 역사」이기도 하다. 




2년 전 나는 tv조선에서 방영하는 「땅의 역사」를 통해 박종인 기자님을 알게되었고, 본방/재방/삼방까지 보는 열렬한 시청자가 되었다. 방송이 종영된 뒤에는 출간된 이 책 『땅의 역사』를 읽으며 기자님의 팬이 되었고, 기자님이 쓴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에서 매주 한 편씩 올라오는 연재되는 기사 「땅의 역사」도 읽기 시작했다(연재기사는 지금도 ing). 



물론 나는 이 책을  처음 읽기 전까지 기자님이 「땅의 역사」를 기사로 연재하고 있는지 1도 몰랐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생각을 한다. 기자님이 연재하는 기사 「땅의 역사」를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껄’ 하는(「땅의역사」 연재기사를 안본 사람 없게 해쥬세욥).



조선일보라는 신문사 자체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나역시도 그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인 기자님의 기사만큼은 많은 이들이 혐오하는 그런 기사들과는 백프로 다르다.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하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얼마전 회사 동료에게 이 책을 빌려준 적이 있다. 그 동료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꽤나 관심이 있으신 분이었기에, 이 책도 흥미롭게 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왠걸? 사분의 일도 읽지 못한채 나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열불이 터져서 읽을 수가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땅의 역사』 1권의 주제는 “소인배와 대인배”였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그럼에도 잘먹고 잘 산 소인배. 반면에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희생했지만,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었던 대인배. 읽으면 읽을 수록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어찌 열불이 안날 수 있겠는가. 나라 판 놈은 죽을때까지 잘살고, 나라를 지킨 사람은 나라 판놈같은 나쁜놈들에게 죽고. 나 역시도 읽을 때마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고, 때론 눈물이 찔끔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아무리 화가나는 역사라도 우리의 역사이며, 잊지말아야 할 역사이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서문이다. 우리가 빛나는 역사가 아닌, 이토록 분통이 터지고 아픈 역사를 왜 기억해야하고, 알아야만 하는지 바로 그 이유다.




임진왜란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빛나는 역사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전투는 거의 모두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배워야하고, 잊지말아야하는 빛나는 역사가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역사일 뿐이다. 임진왜란을 통틀어보면, 열불이 나도 이렇게 열불나는 역사가 없다. 일본에 다녀온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선조에게 서로 다른 보고를 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 이미 그전부터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이야기가 조선에 파다했다. 하다못해 당시 바다건너 또다른 섬나라 류큐에서조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나라를 버렸다. 그 뿐인가? 자신이 버린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이 버린 나라를 지키려는 이순신 장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든게 분명히 기록된 역사임에도, 우리는 이런 내용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 혹시나 열성적인 국사선생님을 만나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내용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한반도를 유린한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빛나는 이순신 장군의 역사, 왕이 버린 나라를 지킨 의병장들의 역사였다.



다음 날 광해군이 공식 왕세자로 지명됐다. 그리고 선조가 선언했다. “마땅히 도망가지 않고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음 날 새벽 어영대장 윤두수가 끄는 가마를 타고 선조는 대궐을 떠났다. 다음날 선조 일행은 널문리(판문리)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으로 향했다. p 046



쇄환사를 통해 귀국한 피로인은 1607년 1400여 명, 1617년 321명, 1624년 146명이다. 합쳐서 사명당이 데려온 3000명에 못미친다. 돌아가면 천민으로 천대받거나, 북쪽 국경으로 가서 군역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0만 피로인 대부분이 귀국을 거부했다. 비겁한 군주가, 명분에 집착해, 하늘이어야 할 민(民)을 짚신짝 취급한 탓이다. p 051



그래서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이 중요하다. 이 책은 당대에 임진/정유재란을 겪은 사람이, 그 시대를 직접 기록한 책이다.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이기에 생동감마저 있는 책이다. 하지만 너무 생동감있어서, 그만큼 징비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고구마를 오백만개 먹은 기분이 들 정도로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정치를 하는 작자들이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대적하기는 커녕 계속 도망가고, 도망가고, 심지어 왕까지 도망가는 난리통이 그려진다. 일본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두었던 장군을, 참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조선이 일본을 상대로 얼마나 빌빌거렸는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을 쓴 류성룡 조차도, 당시 조선 정부에서 정치를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을 집필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 책은 류성룡 본인을 비롯하여, 당대 집권자들의 치부를 들추는 것인데 말이다. 『징비록(懲毖錄)』이 제 치부를 들추는 일이라는 것을 류성룡이 몰랐을리가 없다. 



류성룡은 본인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잘못을 알았기에, 미래의 후손들이 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다. 잘못된 역사일 수록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제 치부를 들추는 이 징비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여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을 유린했던 일본에서 징비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결국 잘못된 역사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시간동안 고통을 겪었던 건 지금 우리와 같은 서민들, 백성이었다.



청은 조선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청 태종이 소역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내가 큰길로 곧장 한양으로 향해도 산성에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들의 붓대로 우리 군대를 물리칠 것인가?” 군사력 열세를 빤히 알고 있는 군부는 화전을 주장했고 대명의라는 명분을 내세운 문신들은 전쟁을 주장했다. 목소리 큰 문신 세력이 승리했다. p  064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렸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p 073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누런우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p 075



1592년~1598년까지 지독하디 지독한 임진/정유년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1627년에 정묘호란이 터졌고 뒤이어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일본과 전쟁이 끝난 지 고작 30년만에 청나라와 전쟁이 시작했다. 정말 슬프게도 이 전쟁 역시 징비하지 못한 조선의 위정자들의 잘못이 컸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지 고작 30년 흘렀을 뿐인데, 다를게 하나 없었다. 전이나, 후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머리속에는 자신들의 안위만 있었다. 물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보통 이런 사람들은 힘(권력)이 없었다.



진령군과 이유인은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쌀 한섬과 돈 10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계시를 내렸다. 왕(고종)은 그리 시행하였다. p 093



민영휘는 당장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를 찾아가 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원세개가 허락했으니 청나라 군사를 부르시라”고 청했다. 고종은 “여러 대신들 논의 역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p 100



그로부터 이백여년이 지났다. 역시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때보다도 더욱 썩어들어갔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번에는 7년이 아닌 35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동안 일본에게 유린당했다.



이렇게 아픈 역사를 반복한 대한민국이, 어째서 무엇때문에 아직까지도 빛나는 역사만 고집하는 걸까? 



징비하지 못하여 한반도는 오랜시간 고통받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정과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도 똑같았다. 징비하지 않았기에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 징비하지 않았기에 친일경찰들이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빨갱이 딱지를 붙여가며 고문을 하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눈에 비치는 상황만 조금 달라졌을 뿐,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징비하지 못했던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 왕정에서 공화정이 된 것 말고는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징비는 커녕 제 뱃속 챙기기에 급급하고, 매번 알맹이 없는 정책만 꺼내놓기 바쁘다. 여야할꺼없이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렇다. ‘이 사람만큼은 조금 다를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내 한 표 행사하게 한 정치인들 조차도 똑같았다. 조선이 징비하지 못하여 백성에게 그 아픔을 떠넘겼듯이,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징비하지 못하여 국민들에게 그 아픔을 떠넘긴다. 물론 이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이쯤되면 박열을 비롯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아나키즘을 따라갔는지, 이해가 된다. 심지어 공감하게된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결국 징비하지 못한 정치인들이며, 징비하지 못하여 그들의 잘못을 눈감은 우리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먼저 징비해야, 정치인들의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으며, 바른길로 가도록 명령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이다.



그렇기에 난 박종인 기자님이 쓴 책 『땅의 역사』(동명의 연재기사 포함)가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야말로 현대판 징비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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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사토 겐타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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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제약회사를 다니는 사람이지만, 난 이런 질병이나 약 관련 교양서적은 읽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유독 올해들어서(!!) 약이나 질병 관련 교양서적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읽었는데 넘나 어려워서 리뷰 안쓴 것도 여러권ㅋㅋㅋ).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내 업무는 화학쪽이 아닌 지원부서쪽이라 이런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연말부터 추가된 일본어 번역업무(회사에서는 내가 잘해도 못한다고 해야하고, 잘하는게 있어도 알리면안됨..)덕분에 이런 기초지식이 필요해졌다. 아무래도 주로 번역하는 문서가 일본 제약관련 논문이다보니, 이런쪽 지식이 1도 없는 상태에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너낌적인 너낌.



타고나기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완전 오 백프로 문과생인 내가, 1도 모르던 제약, 화학쪽 논문을 번역하는 일은 뭐라고 해야할까. 원하지 않는 지식을 어거지로 머리속에 쳐넣는 느낌이랄까? 그나마도 일반적인 QA관련 교육이나 위험관리, 일탈 등은 어깨넘어 보아온 것이 있다보니, 나름 이해하면서 번역이 가능한데, 막 설비 나오고 무균포장 나오면 하 ㅋㅋㅋㅋ 이건 뭐......휴.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전문지식을 머리속에 쳐넣으면 대 혼란이 오는데, 그게 바로 지금 내 머릿속 상황. 그래서 대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위해, 그나마 내가 이해를 잘 할 수 있는 역사분야가 곁들여진 질병/제약 교양서적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놀란 사실 하나는, 내가 번역한 일본 논문이나 저널들에 나온 화학약품이 여기서 나왔다는 사실. 진짜 정말 일본놈들은 영어단어를 쓸때 알파벳으로 써주면 정말 고마운데, 꼭 카타카나로 변환해서 쓰니까. 이게 대체 무슨 단어인지 감이 안오는게 많다. 카타카나 그대로 읽으면 본래 영어단어와는 전혀 다른 단어가 되는게 태반이니까(할말하않ㅡㅡ). 카타가나대로 읽었을 때,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영어단어라면 나름 추리하기 쉬운데, 화학약품이나 제약쪽은 모르다보니 진짜 옆에 실험실 직원 붙잡고 최대한 비슷하게 읽혀지는 화학약품을 찾아녔던 과거의 나ㅠㅠㅠ



진작에 이런 책좀 미리 읽고 번역에 돌입했으면 나름 수월하게 번역했을텐데. 휴. 일년간 고생한걸 생각하면 진짜 ㅋㅋㅋㅋㅋ 아오.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번역 업무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므로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는, 팔자에도 없는 제약/화학약품 공부를 해야한다는 슬픈이야기.



뭐, 업무의 필요성으로 인해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아무래도 이 책은 이런 분야에선 매우 초급적인 교양서적이다. 그러다보니 이쪽을 1도 몰라도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고, 오히려 꽤 흥미진진하다. 



퍼킨은 여러번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조건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퍼킨은 시커먼 타르처럼 보이는 덩어리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실험에 사용한 플라스크를 설거지 하다가 세제가 엉뚱한 보랏빛을 띠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험삼아 거기에 천을 담그자 아름다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이 물질을 자주색염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직감했다. 퍼킨은 이 우연하고도 기적적인 발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염료회사를 세워 큰 돈을 벌었다. p 078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을 발견했다. 다만 이 퀴닌은 키나나무의 껍질에서 발견된 성분이다보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말라리아 환자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여러 화학자가 퀴닌 인공합성에 뛰어든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엉뚱한 결과가 나왔는데, 그 엉뚱한 결과로 때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퍼킨. 시작은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인공합성이었으나, 결과는 보랏빛 화학염료 개발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잭팟! 



약품합성이나 염료합성은 모두 화학식에서 시작한다. 뿌리가 같다고 해야하나? 어느 갈림길로 가느냐에 따라 염료가 되기도 하고, 약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각 지역 공단에 있는 회사들을 보면 제약공장과 염료공장등이 이상하게 지척에 있다. 뭐 여튼, 결과적으로 이과 만세!


이런 류의 실험을 해야 실패한 것을 대상으로 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뭐 그런 너낌적인 너낌... 



이런은 잭팟 확실히 문과보단 이과가 더 확율이 높은가보다. 2차대전 발명품도 그렇고... 하, 난 왜 실험따윈 개나줘버린 문과인가..



서양에서는 먼 옛날부터 널리 이용된 아편이 중국에서는 꽤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뜻밖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아편의 뛰어난 약효과 함께 그 끔찍한 해악과 독성을 중국인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p 101 (양귀비에서 모르핀을 얻어 아편을 만듬)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어찌보면 우리나라 역사에도 크게 영향을 준 이 전쟁. 분명 학교에서도 배웠을 이 전쟁은 결국 영국이라는 원조 섬짱깨가 중국에 양아치짓을 하며 시작한 전쟁이다. 



중국은 영국에 차(tea)를 수출하며 엄청난 무역흑자를 벌여들였는데, 이 말을 뒤집으면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엄청난 무역적자라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중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낼 수 있나 고심하던 영국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아편을 위험한 약품으로 분류하여 엄청나게 규제를 하고 있었다는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지들 나라에는 퍼지지 않게 규제하는 아편을, 중국에 대량수출하여 널리 퍼트린 영국! 결과는 뻔했다. 중국 전 대륙의 아편 중독. 뒤늦게 아편의 위험성을 깨달은 중국정부가 아편을 규제하자, 영국이 발끈해서 처들어온게 바로 아편전쟁의 서막이다.



전쟁의 결과는? 


당시 중국, 즉 청나라는 부패할대로 부패했기에 군대 역시 무쓸모. 결국 근대식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이 승리했다. 여기에 더해 영국은 중국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홍콩까지 할양하라고 한다. 이래서 영국을 원조 섬짱깨라고 하는것!!!!



자 그럼 이 전쟁이 어떻게 우리나라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일까?


아편전쟁 전까지 동아시아의 패자는 중국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중국에 조공을 하는 명실공히 황제국가였다. 하지만 그런 중국이 영국에 미친듯이 깨지면서 동아시아의 권력구조가 깨져버렸다. 영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권 나라들도 동아시아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본격적인 서구권 나라가 동아시아로 발을 뻗어나가는 서세동점 시작.



여기서 아쉬운 사실은 당시 조선 정부도 영국에 대패한 청나라처럼 뿌리까지 썩을대로 썩어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도 없었다. 반면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 문명을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암흑의 35년, 일제강점기.



근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아편’이란 성분이 그 오랜시간동안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는 워낙 오래전부터 알려진 아편, 알려진지가 너무 오래되서 그 위험성까지도 널리 알려진 아편이 중국에서는 생전 초면인 성분이라니. 그네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명의 화타는 침만 놓을줄 알고, 식물들의 약효는 잘 몰랐나보다.



이 606번째 비소 화합물 살바르산은 ‘구세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살바토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910년 살바르산은 훼히스트에서 발매되어 말 그대로 수 많은 매독 환자를 죽음의 늪에서 건져 올린 구세주로 자리매김 했다.(중략) 또 살바르산의 등장은 수없이 많은 다른 세균 감염증에 대해서도 같은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p 164



중세에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질병이 있다. 성병의 일종이라고도 알려진 매독. 지금이야 널린게 치료제니, 매독으로 죽었다는 사람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 한다. 더 소름돋는건 매독으로 죽은 사람보다, 매독을 치료하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떻게 치료했길래 치료과정에서 죽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치료제를 들어보면 수긍이 간다. 중세에는 매독 치료제로 ‘수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소기호 Hg 수은.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수은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떻게 위험한지, 중독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세사람들은 몰랐다. 그들에게 수은은 만병치료제와 같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수은으로 매독을 치료하다가 죽었다. 



그렇게 아주 오랜시간이 흐르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매독 치료제가 나왔으니, 바로 ‘살바르산’.


과거에는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처럼 자연물에서 성분추출로 약을 조제했었는데, 이 ‘살바르산’을 시점으로 비로소 순수 화합물로 약을 만드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처음 시작은 어렵지만, 누군가 시작한 길을 따라가는 건 쉽다. 이런 화합물도 그랬다. ‘살바르산’을 시작으로 화합물에 대한 발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다만 발전이 너무 빨랐기에 ‘살바르산’이 그 명성을 이어간 기간은 짧았다. 더 뛰어난 약제들이 줄줄이 나왔기 때문에! 뭐, 그래도 이렇게 순수화합물로 약을 조제할 수 있게, 그 시작점에 ‘살바르산’이 있다는 것 만큼은 중요하다. 저널이나 논문 번역할때, 살바르산 이름이 가끔 튀어나오는걸 보면.




아니 근데, 이 책도 일본인이 쓴 책인데?? 왠지 원서로 다시 읽어봐야할 거 같은 이 느낌은....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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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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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광해군이 공식 왕세자로 지명됐다. 그리고 선조가 선언했다. "마땅히 도망가지 않고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음 날 새벽 어영대장 윤두수가 끄는 가마를 타고 선조는 대궐을 떠났다. 다음날 선조 일행은 널문리(판문리)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으로 향했다. p 046 - P46

쇄환사를 통해 귀국한 피로인은 1607년 1400여 명, 1617년 321명, 1624년 146명이다. 합쳐서 사명당이 데려온 3000명에 못미친다. 돌아가면 천민으로 천대받거나, 북쪽 국경으로 가서 군역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0만 피로인 대부분이 귀국을 거부했다. 비겁한 군주가, 명분에 집착해, 하늘이어야 할 민(民)을 짚신짝 취급한 탓이다. p 051 - P51

청은 조선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청 태종이 소역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내가 큰길로 곧장 한양으로 향해도 산성에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들의 붓대로 우리 군대를 물리칠 것인가?" 군사력 열세를 빤히 알고 있는 군부는 화전을 주장했고 대명의라는 명분을 내세운 문신들은 전쟁을 주장했다. 목소리 큰 문신 세력이 승리했다. p 064 - P64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렸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p 073 - P73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누런우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p 075 - P75

진령군과 이유인은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쌀 한섬과 돈 10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계시를 내렸다. 왕(고종)은 그리 시행하였다. p 093 - P93

민영휘는 당장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를 찾아가 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원세개가 허락했으니 청나라 군사를 부르시라"고 청했다. 고종은 "여러 대신들 논의 역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p 100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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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에 간 고양이 - 고양이 배우들이 재현한 송나라 문화사 이야기
과지라 지음, 허유영 옮김 / 모모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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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간 고양이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송나라에 간 고양이는 어떨지 기대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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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형제가 겪어야 했던 수난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깝게는 60-70년대 산업개발 시대에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우리 부모형제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밥 대신 끼니를 때웠던 것이 붕어빵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었떤 세대에게는 구호물자로 나눠준 밀가루로 풀 반죽을 해서 풀빵 그러니까 붕어빵을 구어팔아 생계를 이어갔던 생존의 몸부림이 기억으로 담겨있다. 일제강점기 떄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의 붕어빵은 동전 한닢으로 따듯하게 허기진 속을 달래며 굶주린 배를 달랠 수 있었던 구원의 먹거리였다. p 020 - P20

단팥빵의 겉모습만 봐서는 내용물에 통단팥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팥앙금이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해서 통단팥을 넣은 단팥빵에는 겨자씨를 뿌려놓았고, 팥앙금을 넣은 단팥빵에는 참깨를 뿌려 놓았다. 먹는 사람들이 참꺠가 뿌려져 있는지 혹은 겨자씨가 뿌려져 있는지를 보고 입맛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도록 표시를 했던 것이다. p 034 - P34

지금 우리가 먹는 단팥빵을 보면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데 소금에 절인 벚꽃 열매를 놓기 위한 흔적이라고 한다. 또한 일왕이 단팥빵을 처음 먹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4월 4일을 단팥빵의 날로 기념한다. p 036 - P36

일본에서 다양한 일본식 빵이 만들어진 것은 빵이라는 낯선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지만, 서양음식을 통해 왜소한 일본인의 체형을 서구인처럼 키우려는 노력도 있었다. 아시아를 벗어난 일본을 유럽화 하려는 탈아입구의 일환이다. p 041 - P41

건빵은 한국군에서만 보급할 것 같고 한국군이 만든 독창적인 전투식량 같지만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만든 결과물이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건빵을 개발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빠르게 발전했으며, 태평양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 때 제국주의 일본군대에 전면적으로 보급되면서 전투용 비상식량으로 자리잡았다. p 053 - P53

크로켓은 고로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일본에서는 1872년 포테이토 고로케 만드는 법이 기록으로 나오니까 상당히 빨리 전해진 셈이다. p 064 - P64

(마시멜로는)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이집트 사람이 먹었다. 그러니까 4,000년이 넘는 유서깊은 과자다.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들에게 마시멜로를 제물로 바쳤고 파라오들도 먹었다. 그렇지만 과자라기보다는 의약품이라는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p 070 - P70

동양에서 순대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보인다. 기원전 11세기에서 8세기까지 중국에서 불린 시와 노래를 기록한 책인 시경에, "훌륭한 요리를 곱창과 순대를 준비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p 078 - P78

한편 우리나라 문헌에서 순대라는 한글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19세기 말 요리책인 『시의전서』다. 한글 이름은 그렇지만 한자로 동물창자를 요리했다는 기록은 17세기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 개 창자, 18세기 증보산림경제에 소 창자를 삶은 우장찜이라는 기록이 있다. p 078 - P78

우리나라의 실학자 이덕무도 닭발이 천하의 진미라는 사실에 동의를 했고, 서기 3세기 무렵의 문학가인 장협도 닭발을 산해진미라고 했지만, 역사서를 보면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임금이 닭발을 무척 즐겨먹은 것으로 나온다. p 135 - P135

엉뚱한 소리 같지만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반드시 약과를 놓는 것은 약과가 영혼을 부르는 음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p 273 - P273

고려 의종 때 팔관회와 연등행사에서 약과가 빠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 처럼 요란을 떠는 장면이 고려사에 보인다. (중략) 약과가 영혼을 부르는 음식이라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 때의 노래를 엮은 『초사』에 근거를 누고 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루는 초혼부라는 노래에 자신의 임금이었던 초나라 회왕을 그리워하며 ‘밀이’라는 음식을 차려놓았으니 돌아오라는 구절이 있다. p 275 - P275

양(羊)은 왠만한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는 한자로 네발 달린 가축인 양을 뜻하는 한자이지만, 갱(羹)은 왠만큼 한자 실력이 좋은 사람 아니면 읽기조차 힘든 글자로, 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양갱은 양고기 국이라는 뜻이다. p 280 - P280

일본에서 양갱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에도시대다. (중략) 중국에 유학을 온 승려가 귀국하면서 이 떡을 일본에 전했는데,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양고기 대신 팥을 넣어서 발전시킨 것이 지금의 양갱이 됐다고 한다. p 280~281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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