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마스떼!

균형 잡힌 삶을 위해!"

"삶에서도 탄탄한 이 두 다리가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줄거에요!"

"정답 없는 게 인생이라도

나만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꺠달을 때 까지

잠자코 기다려줘요.

늘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네요"

"엎질러진 물을 오래 바라보던 예전과 달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속도가 빨라진 나를 발견했어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몸과 마음에 근육을 만들어주고 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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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아픈 것일 뿐이죠. 우리가 정신 질환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환자들은 좀 더 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자신의 병을 마주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곧 알게 되실거에요. 정실질환 환자들에게도 귀여운 구석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 한국어판 서문 中

그 길고도 조용한 시간을 함께 한 끝에 드디어 환자가 입을 열었다는 군요."당신도 버섯인가요?"

환자의 물음에 의사는 대답을 했죠. "네, 저도 버섯이에요." 그러고는 일어서서 한마디 더 건넸답니다. "전 이만 가야겠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물었습니다. "당신도 버섯이라면서 어떻게 걸을 수가 있죠?"

"버섯도 걸을 수 있어요."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의사가 약을 꺼내 들었답니다. "전 약을 먹어야겠습니다." "당신은 버섯이라면서 왜 약을 먹는거죠?"

"버섯도 약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환자는 의사를 따라 약을 먹었습니다. (중략)

몇 달 후, 병원 치료에 내내 응하지 않던 ‘버섯’은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었답니다. _P 008 〈서문 中〉

"네 말이 맞아. 의사는 병을 치료해주는 사람이지. 근데 치료는 약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마음을 써야지. 베푼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법,

초조해지지 마. 익숙해질꺼니까." _P 018 <기억도둑 中>

"내 생각엔 네가 우울한 감정과 우울증을 헷갈렸던 것 같다. 사업으로 충격을 받았을 떄, 초창기에 나타났던 건 부정적인 감정이 맞았을 거야. 네 생각대로 ‘기분이 안 좋았던 것’뿐이었겠지. 사람은 누구나 매일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데, 그중 일부는 약해지기도 하고, 또 일부는 없어지기도 해. 그런데 만약 이 감정이 제때에 씻겨 내려가지 않고 조금씩 쌓이게 되면,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면서 우울한 감정이 병이 되어버리고 결국엔 우울증이 되는거거든" _P 167 <우울한 새집2>

"우을증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병이다.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면서 뇌의 화학 구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좋게 생각하라’든가 ‘기분 풀어라’등의 말은 삼가야 한다. 그들은 즐거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이미 잃은 상태다." _P 170 <우울한 새집2>

우리는 신이 한 입 베어 문 사과처럼 누구나 결점을 갖고 있다.

만약 그 결점이 비교적 크다면, 그것은 신이 특히나 그 사람의 향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_P 217 <별에서 온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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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중국요리, 먹잘알들을 위한 책이다. 혹은 예비 먹잘알들을 위한 책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국 여행을 하려는 누군가에게, 중국 먹방여행을 찍고 싶은 누군가에게 그 어떤 여행 가이드북 보다 0순위로 필요한 책이라 생각한다.

단순한 이론서나 개론서를 넘어서 이 책을 따라 가시면 미식을 테마로 한 제대로 된 중국 여행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 맛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 먹은 음식이 중국 요리의 어떤 계보에서 발달했으며, 그 수준은 어떤지 척 하고 가늠할 수 있는 든든한 내비게이션을 곁에 둔 셈이 됩니다.

책에는 중국 8대 요리의 역사, 지리적인 특징, 식재료의 종류, 향신료의 쓰임을 기본적으로 정리하였고, 이에 곁들여 중국 명인들이 전수하는 정통 레시피를 어렵게 얻어 귀하게 공개합니다. 이 책 한 권이면 중국 요리 초보도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자신합니다.

음식은 예술이자 학문입니다. 단순한 끼니의 문제를 넘어 인류의 역사를 가능케 한 위대한 창조물이지요. 이 안에는 전통과 문화, 생활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음식을 중요시 여겨 "음식은 정교하고 섬세할수록 좋다"라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_P 014

무쉬는 계수나무 꽃을 이르는 말인데 계란 노른자를 부서지게 볶은 모양이 노랗게 핀 꽃잎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계란은 중국어로 ‘지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나 ‘딴은 모두 중국어의 욕설과 동음이므로 맛있는 음식에 이름으로 붙이기 꺼려 했지요. 그래서 계란이 들어가는 요리는 대부분 아름답고 향도 좋은 계수나무 꽃에 비유했습니다._P 049

이 요리는 얼굴이 곰보투성이인 진씨 아주머니가 만들었다 하여 마파두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862년 어느 날 유채기름을 파는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 요리를 시킬 수 없으니 이것으로 두부라도 지져달라"고 하며 유채기름과 고기를 내밀었습니다.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진씨 아주머니는 기꺼이 즉석 두부요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고 뜨겁지만 두부의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유채기름 장수는 배불리 먹고 기운을 차린 후 식당을 나섰습니다. 지금도 쓰촨 청두에 가면 인심 좋은 아주머니의 ‘진마파두부’라는 식당이 성업중입니다. _P 077~078

쓰촨의 요리에서 매운 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고추기름을 듬뿍 넣어 맛을 낸 홍유, 생선 향이 나는 위샹, 양귀비가 사랑한 과일 리치처럼 달콤하게 매운 리즈, 얼얼한 매운 맛 마라, 시큼하게 매운 맛의 솬라, 마늘을 넣어 향을 낸 쏸샹, 약초 맛이 강한 진피 등 그 종류만도 수십가지 이다. 매운맛이라는 것이 단순한 오미 중 하나요, 미각의 통증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맛으로 어우러지는 지 쓰촨에 가서야 비로소 느껴볼 수 있다.

차에 딤섬을 곁들이는 시간은 광둥인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1851년~1861년 사이의 약 10년간 제위한 청나라 9대 황제인 함풍제 시기에 광둥의 찻집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_ P 107

찻집의 꽃은 차보다는 딤섬입니다. 딤섬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로 모양과 조리법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_P 109

딤섬 문화는 중국 전역에 퍼져 있으나 지역마다 그 역할이 각기 다릅니다. 북방에서는 식후 간식으로 올라오고 저장과 장쑤지역에서는 차와 곁들이는 다과로, 광둥에서는 그 자체가 정식에 가까운 코스요리로 여겨집니다. _P110

중국의 정통 궈바오러우에는 찹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돼지고기 안심에 옥수수 저분을 입혀 여러 번 튀겨내고 식초와 설탕, 맛술, 생강, 파 등을 곁들인 소스에 볶아 나옵니다. 궈바오러우는 중국요리의 튀김 기술을 잘 표현한 요리입니다. 1차로 돼지고기 안심에 옥수수 전분을 고루 묻혀 약불에 오래 튀겨 고기를 익힙니다. 2차로 센 불에 빠르게 튀겨 색을 입힙니다. 한꺼번에 많이 넣고 튀기면 고기가 엉겨 붙기에 기름을 가득 부은 웍에 몇 회식 나누어 튀겨야 합니다. 그래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부드러운 식감의 고기튀김이 완성됩니다. 전분과 고기가 혼연일체를 이루지요. _P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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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시작부터 모순적이었다. 모순은 그 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들이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그들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우리가, 주변의 여러국가가 모순적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삶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정상적인 삶이었다. 그건 일년이 흐르든, 십년이 흐르든, 시간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은 그 모순을 들먹이며 이웃나라를 침략하였으며, 침략한 사유를 모순적인 가치관을 들어 정당화시켰다. 아니 지금도 정당화시키고 있다.

루스 베니딕트는 일본인들의 향후 행동을 미국 정부가 예측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했다. 일본이 전후 보다 자유민주적인 노선에서 재건될 수 있도록 계획했던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이 패전과 천황의 변화된 역할, 미 점령균의 신탁통치에 어떻게 반응할 지를 알아야 했다.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중 하나는, 죽음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던 일본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하고 우호적으로 변화한 사실이었다. - 서문 中

일본인이 사용하는 범주와 상징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일본인의 많은 행동적 모순은 이미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 할 것이다._ P 043

어떤 포로는 죽여 달라고 요청했고, "그러나 당신들의 관습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모범적인 포로가 되고싶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범적인 포로 이상이었다.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한 극단적인 국가주의자였던 그들은 탄약고의 위치를 알려 주고, 일본군의 병력 배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미군의 선전문을 쓰고, 미군의 폭격이에 동승하여 군사 목표로 유도해주기까지 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았다. 새로운 페이지에 쓰인 것과 낡은 페이지에 쓰인 것은 정 반대였지만, 그들은 새 페이지에 쓰인 구절을 한결같이 충실하게 실천했다. 물론 포로 전부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_P 071

12세기 이래 쇼균이 실권을 박탈당한 천황의 이름을 가지고 이 나라를 통치했던 것이다. 어떤 시대에는 직능이 극단적으로 분할되어, 유명무실한 주권자인 천황이 세습의 세속적 수장에게 위탁한 실권이, 그 수장의 세습적 정치 고문에 의해 행사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본적 권력은 항시 이중 삼중으로 위탁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명백이 끊어지려는 최후의 시기까지도, 페리 제독은 일본 권력 구조의 배후에 천황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라지 못했다. _P 102

성조기에 대한 충성이 정당 정치를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황은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만일 그것이 인간이라도 온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국기를 정중하게 다룬다. 그런데 일본인은 더없는 상징성을 지닌 인간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국민은 공경을 다하고 천황은 거기에 응답했다. 그들이 천황이 ‘국민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황송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폐하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기 위해’ 온 몸을 희생했다. 일본처럼 완전히 개인적 유대 위에 입각한 문화에서는, 천황은 국기 따위는 감히 미치치 못하는 충성의 상징이었다. _P 178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은 끝났다. 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기 전에 강경한 반대자들은 궁성 주위에 비상선을 치고 정전선언을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그 선언을 일단 발표한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승복했다. 만주나 자바의 현지 사령관도, 일본에 있던 도조(도조 히데키, A급 전범)도, 누구 하나 그것을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미군은 비행장에 착륙하여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 한 외국인 기자가 서술한 바와 같이,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며 착륙했지만, 점심 때는 총을 치워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일본인은 이제 평화의 길을 따름으로써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해드렸다. 1주일 전까지 그들은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기 위해 죽창으로라도 오랑캐를 격퇴하기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했었다. P_181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한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 하여 절망에 자포자기하여 굴복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하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자살이 이름에 대한 의리에서 당연히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훌륭한 행동방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_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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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한국 토박이로서 지극히 평범하고 조금은 가난한 소시민 집안에서 자랐다. 10대 후반에는 TV나 인터넷, 책에서 "꿈은 이루어진다.", "말하는 대로 된다.". "하고 싶은 걸 하라" 등등의 희망적인 메시지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말들을 지심으로 믿었다. 그렇게 20대가 되었다. … 진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꿈이나 꾸면서 그 말들을 참 열씸히도 따르며 살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 말들과 판이하게 달랐고, 29살인 지금은 20살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백수가 되어있었다.

그 동안 나는 얼마나 일 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20~29살, 10년 (120개월) 동안 내가 일한 기간이 얼마나 될까? 나름대로 아르바이트는 열심히 했었던 것 같은데. 평생 이렇게 한량으로 지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대충 주말, 파트타임, 단기 아르바이트 등 전부 합쳐 55개월 (4년 7개월) 정도 일했더라. _P 021

30살이 가까운 성인이 돼서도 10대 때와 변함없이 부모님의 희생으로 살아간다는 게 참 비참한 거더라. 나이 먹을 만큼 먹어 놓고도 여전히 자기 인생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 사람을 참 초라하게 만든다. 어쨌든 나는 부모님의 삶을 지불하고 나의 편안함을 누리고 있다. _P 025

20~24살 조금더 놀고, 이 고민 저 고민 하면서 정신 못 차리고 흐지부지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오래 딴짓을 해도 여전히 20대 초반일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분득 내 나이가 몇인가 생각해 보니 어느새 20대 중반이 돼 있었다. … 20대 초반에 쌓았어야 할 스펙과 경력이 텅텅 비니까 20대 중반부터 줄줄이 안좋은 상황이 터지기 시작했다. _P 104

예전에 나는 20대 후반에도 20대 초반처럼 능숙하게 할줄 아는 일이 없어도 신입이어도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리고 특별히 좋아하는 일도 없고 전공으로 배운 것도 없다 보니 언제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직업을 가질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0~23살에 하는 공부, 하는 일들이 20대 후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뭔가 하나를 특별히 배워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_P 108

나는 지금 동갑 친구가 0명, 서로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은 1명이다. 대인관계가 1명이라는 소리다. 너무 심한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가치관 차이, 오로지 가치관의 차이로 하나 둘 멀어져 갔다. _P 198

주변에 꼭 이런 사람 있다.

1. 기승전결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어’인 사람

2. 심하게 부정적인 사람

3. 불행한 얘기만 하는 사람

그들은 일상에서 생긴 작은 스트레스부터 저 깊숙한 곳에 꾹꾹 눌러 있던 시커먼 고민까지 잔뜩 쏟아 놓고는 한다. _P 202

누구든 무조건 어른이 되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게 되어 있다.

그 책임이라는 게 별것 아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무엇이든

모두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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