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니스 - 잠재력을 깨우는 단 하나의 열쇠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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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스틸니스」는 무려 자기계발서다. 독서편식을 고치려 여러 장르의 책을 읽었던 나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손을 대지 않았던 장르가 바로 자기계발서다. 내가 생각하던 자기계발서는 도덕책에 나오는, 언제나 입바른 말만했다. 적어도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들은 그랬다. 그런 책들만 보면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있어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타인의 눈에 ‘루저’로 비치는 사람들이 정말 많지않나? 그래서 더욱 자기계발서는 읽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스틸니스」를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철학, 고전 해설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지리상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나 성격이 얼마나 다른지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고대 철학은 완벽하게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기원전 500년에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든, 그로부터 100년뒤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든,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앉아 있던 제자든지 간에 하나같이 침착함과 차분함, 평온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우뻬카(upekkha)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아슬라마(aslama)라고 부른다. 히브리서에서는 히쉬타부트(hishtavut)라고 한다. 힌두교 3대 경전으로 꼽히는 《바가바드 기타》의 2장은 전사 아르주나에 관한 서사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사마트밤(samatvam), 즉 ‘마음의 평정 또는 한결같은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스에서는 에우티미아(euthtmia), 헤시키아(hesychia)라고 하고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일컫는다. 기독교에서는 아이콰니미타스(aequanimitas)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로는 스틸니스(stillness). P 017




혼자 있는 시간, 집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혹은 침대에 누워본다. 분명 나 혼자 있고 TV가 켜있지도 않으며, 라디오를 틀지도 않았다. 분명 내가 있는 우리집은 조용해야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하지가 않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빵빵거리는 소음이 주기적으로 들려오고, 저 멀리서 아파트 공사장 소리도 들려온다. 분명 나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나와는 상관없이 외부 소음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온다. 정말 조용하게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도, 주변의 생활소음이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현대를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소음에 휘둘리며, 소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나를 괴롭히는 모든 상황에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상황은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시작되어왔다. 우리나라 문화로 치면 고대부터 우리가 잘 아는 가까운 역사까지, 많은 조상들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수련을 했다. 제일 쉬운 예가 바로 ‘선비’들이다. 공맹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심지어 조선의 왕까지도 되고자 한 ‘군자’란, 유교에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말로 하면, 옳고 그름을 정확히 알고,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군자’가 되고자 한 사람은 유교에만 있었던게 아니라, 불교에도 있었고, 기독교에도 있었으며, 힌두교에도 있었다. 그를 칭하는 말은 각기 달랐지만,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대표적인 방법이 내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즉 고요한 마음가짐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평정이랄까?


그게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고요, 즉 스틸니스 이다.



 이 책은 동/서양의 역사, 철학, 고전을 망라하며 스틸니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과거를 살았던 수 많은 인물중, 스틸니스를 끌어냄으로 나 자신을 찾고, 그들이 스틸니스를 끌어냄으로써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고요는 외부의 방해에 취약하므로 세상의 소란함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소음에, 우리 영혼과 육체의 소음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찰나의 고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가장 힘든 상황에서조차 일관성 있게 끌어어낼 수 있는 집중과 지혜다. P 113



일상에서 마주치는 갖가지 스트레스와 곤경은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면 우리는 하나를 닫으면 또 하나 열리는 온갖 정보 속에 사로 잡힌다. 거기에 앉아 그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할까? P243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수 많은 소음과, 수 많은 정보의 범람 속에 있다. 조용히 있어도 어딘가에서 소음이 들려오고, 정보를 취하고 싶지 않아도 tv만 틀면, 핸드폰만 보면 원하든 원치않든 수 많은 정보를 접한다. 심지어 그 정보들 중에는 가짜뉴스도 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폴레옹의 사례를 보자.​




나폴레옹은 우편물이 밀리는 상황을 즐겼다.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화나게 할 수도 있고 중요한 가십거리를 놓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사소한 문제들은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받아들일 게 아니라 나폴레옹처럼 여유를 갖는 태도, 유행에 한두 계절 쯤 뒤쳐지는 태도, 내 삶을 받은편지함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P 056  




나폴레옹은 밀려오는 편지들을 곧이 곧대로 읽지 않았다. 물론 정말 위급한 편지는, 특히 한 밤중에 자기가 자고 있을 때 도착한 위급한 편지는 자고 있더라도 본인을 꼭 깨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편지를 선별했다. 요즘말로 하면 정보를 선별한 것이다. 밀려오는 편지들은 몇일 뒤에 열어보면, 대게 상황 종료된 후이니 굳이 본인이 볼 필요가 없는게 대부분이라 했다. 나폴레옹은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본인 나름대로의 선별장치를 두고 있었다. 수 많은 정보에 휘둘리는 현대인이 한번 쯤은 곱씹어 볼 일화다. 



그렇다고 나폴레옹 처럼 극단적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름대로의 선별장치를 마련한다면, 내 자신이 그러한 정보 속에서 휘둘릴 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 뿐만인가? 수 많은 정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내면의 목소리는 듣기는 커녕 피곤함뿐인 현대인의 삶이었다. 하지만 정보를 선별하게 되면, 그 만큼 에너지가 비축되고, 비축된 에너지를 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나를 위해, 진정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자. 그리하면 알게 될 것이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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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 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취향수집 에세이
신미경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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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게 있어 내 하루는 더 충만해진다.”



나는 좋아하는 게 너무 많다. 이것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어떤 걸 더 좋아하는 지 꼽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 속에 문득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행동이든 좋아하는 게 없다면? 좋아하는 거 하나 없이 하루를 보낸다면?’. 좋아하는 게 너무 많은 나에게는 1도 상상할 수 없는 가정이지만, 그래도 한 번 상상해보니 그런 삶은 각박해도 너무 각박했다. 삶의 의욕이 없을 것만 같았다. 정말 즐거움이나 재미 없이, 태어난 김에 어쩔 수 없이 사는 인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나처럼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든지 부족하지 않고, 넘치지 않는, 적당한 게 제일 좋은 건데 내가 좋아하는 건 너무 넘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좋아하는게 넘쳐나다보니,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는 건지, 저걸 좋아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것도 좋아하는 게 맞지! 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척 하고 있는 건지. 내 스스로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좋아한다고 내 스스로 세뇌하고 있는 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미니멀리즘의 대표 주자이며, 말 그대로 최소한의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과거에는 이것, 저것 많은 것을 사들인 맥시멀리스트였다. 그러니까 내 어딘가에 있는 공허함을, 부족함을 채우는 방법으로 택한 게 소비였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손아귀에 넣는 순간 느끼는 성취감. 돈을 버는 건 언제나 어렵지만, 물건을 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견디며 돈을 벌 이유가 없었다. 지금의 나와 다른 생각이지만 그때는 그게 맞는 방향 같았다. 가장 손쉬운 기분전환, 수집인지 호딩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돈과 시간을 많이 썼고… P 041




과거 저자가 생각한 ‘물건을 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견디며 돈을 벌 이유가 없었다.’는 지금의 나와 동일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놀랐다. 각종 스트레스를 견디며 일을 하는 건, 월급을 받기 위함이다. 월급을 받으려고 하는 건 내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다.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돈 주고 사서, 내 눈앞에 두는거다. 어떻게 보면 정말 허망한 일이다. 죽어서 이 모든 것들을 싸짊고 저세상을 갈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나는 ‘내 삶을 윤택하기 위해서’라고 나를 속여가며, 말그대로 손 쉽게 기분전환을 하는 방법을 택한게 아닌가 싶어졌다.




내가 오랫동안 고생했던 문제, 물질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고 부러움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노력한 끝에 소비중독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감정적 소비가 드물뿐더러 물질 자체에 큰 비중을 두고 살지 않는다. 물질이 채우지 못한 공허와는 다른 감각으로 여백은 여유로웠으나 삶의 재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욕구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내게 찾아온 부러움의 대상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P 193




소비를 해가며 손쉬운 기분전환을 택했던 저자도 결국에는 삶을 윤택하는 방식을 바꿨다. 손 쉽게 얻은 기분전환은 지출한 비용에 비하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저 잠깐동안의 쾌락일 뿐이다. 그런 저자가 공허함을 채우는 방법으로 선택한 건 지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 지적인 쾌락을 선택했다. 이건 비단 책을 보며 공부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 그 모든 것을 총칭한다. 예컨대 피아노를 배우거나, 혹은 배드민턴을 배우거나. 나의 시간을 들여가며 내가 모르는 부분을 채워가는 것.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소비생활을 절제하며,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무언가를 배워감으로써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했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저자는 자연스레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쯤에서 돌아본 내 삶, 내 삶은 어떠한가. 지금도 나는 좋아하는게 넘쳐나고, 좋아하는 것을 사기 위해 회사를 다니고 아등바등 돈을 번다. 분명 내 수입은 내 삶을 보았을 때, 그리 적게 버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이상하게 수중에 돈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러한가 따지고 보니, 좋아하는 굿즈가 나왔으니 사고, 좋아하는 책이 나왔으니 사고, 신기한 물건이 보이니 사고, 끊없이 소비하고 또 소비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무차별적인 소비를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소비 강도가 확실히 높아지고 있었다.



나름 내 소비에 대해 분석이라는 걸 해봤는데, 회사에서 년차가 쌓일 수록, 업무 스트레스가 커질 수록 소비강도가 높아졌다. 그러니까, 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좋아하는 물건’을 사는거라고 내 자신을 속이며, 기분전환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기분전환이 오랜 시간 지속되지 못하기에,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무언가를 사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한동안 유행하던 ‘X발 비용’ 내지는 ‘탕진잼’을 내가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알았다. 지금의 내 소비생활은 내 삶을 건강하게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진정한, 나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답을 찾는 건 이 책이 남긴, 나를 위한 숙제다.


내가 오랫동안 고생했던 문제, 물질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고 부러움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 노력한 끝에 소비중독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감정적 소비가 드물뿐더러 물질 자체에 큰 비중을 두고 살지 않는다. 물질이 채우지 못한 공허와는 다른 감각으로 여백은 여유로웠으나 삶의 재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욕구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내게 찾아온 부러움의 대상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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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의 시대 - 펭수 신드롬 이면에 숨겨진 세대와 시대 변화의 비밀
김용섭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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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의 힐링 캐릭터는 ‘펭수’다. 그 어떤 캐릭터를 좋아할 때 보다, 어쩌면 조금 더 광적으로, 혹은 한 연예인에 빠진 것 처럼 펭수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펭수 굿즈가 나오면 냉큼 지갑을 열고, TV를 키면 EBS로 채널을 돌린다. 그런 나에게 『펭수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은 당연히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책에 눈길이 가는 것과, 그 책을 집어서 읽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그저 펭수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은 펭수를 분석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펭수를 지지하는 수 많은 펭클럽, 그 중에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한다.


예전에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한 책으로 꽤 유명한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을 읽었었다. 책 전반을 메우는 밀레니얼 세대는 꽤 흥미있는 주제였고, 내 상황이나 위치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 선택한 경제/경영 도서 중에서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 기억이 있었기에, 『펭수의 시대』를 읽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나보다.


물론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책 판매를 위해 펭수 이용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도 있긴 했다. 펭클럽으로써 이런 걱정이 없었다면 그건 펭클럽자격도 없는 것일테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펭수를 이용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책을 판매하기 위해 나쁜 쪽으로 이용한 게 아니라, 정말 밀레니얼 세대분석과 시대분석을 펭수와 접목하여 영리하게 이용하였다.


자 이제 여기서 문제는, 내가 이 책을 읽은 후기를 쓰는 데에 있다. 나는 누가 뭐래도 펭클럽인데, 펭클럽으로써 후기를 쓴다면 그저 그런 펭덕의 감상문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 책의 후기를 쓰는 잠시 잠깐 동안은 펭클럽이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로 쓰려 한다.



펭수 ‘신드롬’. ‘신드롬’이란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쓰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펭수 신드롬은 가히 놀랄만하다. 현재 핫한 스타라는 BTS 조차도 이렇게 짧은 순간에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받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대체 사람을은 왜 펭수에게 이렇게 열광하는 걸까. 아,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잔소리하지 마세요. -펭수



일명 안티꼰대다. 이제 막 사회에 말을 디딘 밀레니얼 세대가 마주한 사회는, 일명 꼰대라 부르는 기성세대가 장악한 사회다. 능력이 따라 대우를 해주는게 아닌, 나이와 사회에서 구른 연차, 직급에 따라 대우를 해주는 사회, 그게 바로 지금의 사회다. 불합리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보기에, 이토록 불합리한 게 또 있을까? 나는 일을 하기 위해 회사에 들어왔는데, 이 회사에서 나에게 시키는 건 정당한 업무가 아니라 ‘명령’이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가. 그 ‘명령’에 견디지 못해서 퇴사를 하면 ‘이래서 요즘애들이란 쯧쯧’이라는 오명을 쓴다. 그렇게 기성세대가 보는 밀레니얼 세대는 그저 쉬운 일만 찾는 ‘요즘 애들’이 되었고, 밀레니얼 세대가 보는 기성세대는 ‘꼰대’가 되어버렸다.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이렇게 꼰대가 지배하는 사회는 당연히 지금의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았다. 헌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기성세대 역시도 20~30년 전에는 드럽게 말 안듣는 ‘요즘 애들’이었다. 요즘 애들이었던 그들이 불과 20~30년 만에 초심을 잃고, 꼰대가 된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꼰대 사회가 되어버린 건, 앞선 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에 그저 순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전 세대, 전전세대, 전전전세대 모든 기성세대들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반세기를 변화하지 않고 잘 흘러왔는데, 밀레니얼이라 불리우는 세대가 그 순응을 거부하고 변화를 선택했다. 아주 당연하게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기성세대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저 변화를 선택한 밀레니얼 세대, 그들은 잘못되었음에도 바로잡히지 않던 것들을 바로 잡으려 했을 뿐이고, 순응을 택한 기성세대들은 이에 발끈하여 꼰대가 되었을 뿐이다. 


펭수를 2030 밀레니얼 세대가 적극 지지하는 것은 펭수의 외모 때문이 아니고 펭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거침없이 사회와 기성세대에 바른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P 028


2020년 1월 초, 펭수는 ‘펭수의 고향 남극으로’라는 에피소드에서 “새해를 맞아 고향에 감. 카톡 안받아요” 라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진다. 펭수를 찾아간 제작진이 다음 날 촬영인데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내일이 촬영이잖아요? 저 오늘 월차 냈습니다.”하며 당당히 휴일에는 카톡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휴일에 연락하면 지옥 갑니다.”, “일도 쉬어 가면서 해야죠.” 라며 사이다 발언을 이어간다. 이런 발언을 속 시원하게 여기는 2030세대가 많다는 것은 아직도 현실 직장에서는 이런 말을 당당히 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P 150


참 서글프지만 대부분의 직장이라면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린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휴가를 썼어도, 회사에서 최소 5회 이상은 연락이 온다. 심지어 주말에도 연락을 받는 게 빈번하다. 하지만 전화를 한 동료에게 펭수처럼 사이다 발언을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불이익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책에서 말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변화를 선택하고, 불합리한 것을 바로 잡는 세대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저 꼰대들에게 “넵-” 이라고 대답하는, 넵무새가 되어버릴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처럼 ‘이건 잘못된거에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 펭수라는 존재는 닮고 싶은 존재이며, 대리만족 하게 해주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펭수에게 열광한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른이고 어른이고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면 되는거에요. - 펭수


펭수가 이야기 하는 건 안티꼰대만 있는 건 아니다. 남극출신 펭귄 답게 환경/기후 문제를 이야기한다. 본인 스스로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복지부에서 펭수의 가족사진이라며 엄마,아빠,펭수,동생 4인 가족사진을 보내주자, 자기는 동생이 없다고 한다. 즉, 기존 우리나라에 뿌리내리던 고정관념들을 하나하나 깨트리고 있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펭수는 현 시대에 사회문제로 떠오른 모든 이슈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펭수가 글로벌 스타가 되려면 환경이나 젠더, 윤리 이슈에 좀더 투자해야 한다. 한국에서 펭수가 사랑받은 결정적 계기가 안티꼰대였다. 갑질과 꼰대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를 재미있게 풀어내며 공감을 샀던 것이 2030세대에게 사랑받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환경, 젠저, 윤리, 불평등 문제다. 오래전부터 있던 문제였지만, 기성세대가 상대적으로 외면헀던 이슈였고 그 결과 양극화는 더 심각해져갔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환경문제는 시대의 상식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면서 과거와 같은 시각으로 환경문제를 보지 않는다. 글로벌 10~30대, 즉 MZ 세대의 공감과 함께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라도 펭수는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동안의 펭수는 빨리 배우고, 적응하고, 변화를 받아들여 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펭수에게 기대하는 점도 이것이다. 펭수의 진화가 결국 글로벌 스타로서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 줄 무기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P 241


이 책의 저자는 펭수가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더욱 앞장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펭수의 인기가 더 길게 갈것이며,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 할 거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을 사는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써 본다면 이 의견에 매우 동감한다. 지금까지 유명한 스타들이 선한 행동을 하면, 일종의 선한 영향력이 생겨나 팬들 역시 선한 행동을 하고는 했다. 대표적인 예가 ‘기부’다. A라는 연예인이 기부를 하니, A의 팬들까지 따라서 기부를 하는 그런 현상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남극에서 온 펭수는, 남극 빙하가 녹는 것을 슬퍼하고, 남극 친구들을 도와달라고 한다. 펭수를 지지하는 펭클럽들은 그런 펭수를 따라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에코백을 사용하는 등 펭수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펭수가 이러한 사회 문제를 계속 이야기 한다면, 펭수를 지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은 펭수를 따라 동조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펭클럽으로써 본 이 의견은 펭수에게 조금 가혹하다. 이 모든 사회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 온 문제이다. 그렇기에 사회 문제는, 문제를 만든 우리가 해결하는 게 맞다. 누군가가 나서서 행동해야 하는거다. 그러나 아무도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 이건 기성세대를 포함하여 밀레니얼 세대인 우리도 똑같다. 누군가는 행동해야하는 데 아무도 하지를 않으니, 행동하는 그 역할을 펭수에게 강제하는게 아닐까? 그저 우리 만족하자고 그 족쇄를 펭수에게 넘기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펭수가 이러한 사회 문제들을 다루어야만, 지금 보다 더 글로벌한 스타가 될 수 있는걸까? 


지금까지 이런 사회문제를 침묵했던 사람으로써, 펭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써, 펭수에게 이런 족쇄를 씌워야만 한다는 의견에 동조해야만 한다는게 슬플 따름이다.



이 책이 펭수 신드롬을 현재 밀레니얼 세대에 접목하여 분석하는 책이란 건 위 이야기로도 확실히 알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무거운 이야기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경제/경영도서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펭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찰한다. 심지어 펭귄으로써의 펭수를 연구한다. 이 책에서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부분이다.


오디션 영상에서 펭수는 남극에서 저가 항공을 타고 스위스에 불시착해 요들송을 배웠고, 스위스에서 헤엄쳐서 인천 앞바다까지 왔다고 밝힌 바 있다. 스위스에서 인천공항까지 비행기로 직선거리가 9,000킬로미터 정도다. 하지만 물길을 따라오면 지중해와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지나고 홍해 ,아덴만, 아라비아해, 남중국해를 거치는 동선이 최적일 것이다. 이렇게 해도 1만 4,000~1만5,000킬로미터는 된다. 이 정도의 장거리를 헤엄치는 것이 가능한 펭귄은 황제펭귄이 아니라 아델리펭귄이다. 아델리펭귄은 이동기가 되면 약 1만3,000~1만 7,000킬로미터의 바닷길을 헤엄치기도 하고, 귀소본능이 탁월해 비행기를 태워서 4,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떨어뜨려도 10개월 후 원래 살던 곳으로 찾아간다. (중략)

하지만 일부 펭귄은 야생 상태에서도 50년까지 살았다는 기록도 있고, 동물원이나 사육 시설에 있는 펭귄의 경우 야생 펭귄보다 수명이 길다. 펭수는 인간 세계에서 살고 있는 설정이기에 야생 상태에서보다 수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한국의 미세먼지를 비롯해 환경오염 문제, 연예인으로서 펭수가 겪는 스트레스, 펭귄 무리와 떨어져서 홀로 살면서 겪을 외로움 등을 변수로 계산할 수는 있겠다. P 056 ~ 057


펭수는 자이언트 펭귄이기에 당연히 황제 펭귄이라 생각했던 펭클럽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드려 팬다. 저자는 펭수(와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기 위해서, 정말 펭수의 모든 것을 공부했다. 뿐만 아니다. 요즘 열일하는 펭수 과로를 지적하며 ‘번아웃 증후군’을 걱정하기도 한다. 어쩌면 저자도 펭수의 세계관에 흠뻑 빠진, 펭클럽이 된 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든다. 시작은 책 집필이었으나, 그 끝은 펭클럽이랄까.


느낌적인 느낌상, 이 책은 『90년생이 온다』 처럼 여러 회사의 독서통신 교재로 등장할 것 같다. 어쩌면 몇 달 이내에 우리 회사 북클립 도서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작년 한 해동안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한 책은 정말 많이 쏟아졌지만, 『90년생이 온다』 만큼 확 와 닿는 책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참으로 영리한 책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펭수가 이런 경제/경영 도서의 메인으로 설 만큼 돋보적인 존재가 되었다니, 펭클럽으로써 그저 뿌듯하고 또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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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일기 - 어느 독립운동가 부부의 육아일기
양우조.최선화 지음, 김현주 정리 / 우리나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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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즐겨 보는 방송 프로그램 중 하나인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배우 한고은님이 언급하면서 이다. 크게 보면 부모가 아이를 낳아, 아이를 기르며 쓴 육아일기지만, 이 육아일기를 쓴 부모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양우조, 최선화님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당시 중국에서 생활한 임시정부의 상황이, 당시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에 한국판 「안네의 일기」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


이 두분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양우조님은 상하이로 망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며 흥사단에 들어갔다. 이후 중국으로 다시 건너와 임시정부 요원이 되었다. 최선화님 역시 상하이로 망명한 뒤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였고, 한국애국부윈회 재건을 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은 상하이에서 열렸으며, 주례는 김구선생이 보았다. 이들의 삶은 중국에서 임시정부 가족들의 삶과 그 궤를 같이하였으며, 해방 이후 1946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책을 편찬한 건 이 책의 주인공 ‘제시’의 딸 김현주 씨다. 양우조&최선화님에게는 손녀인 셈이다. 그녀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당시 살아계셨던 할머니(독립운동가 최선화님)가 빛 바랜 일기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 일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신들의 첫 아이, 그러니까 김현주씨의 엄마인 제시를 기르며 기록한 육아일기 였다. 아니, 육아일기이자 임시정부 요인들의 일기였다.



일기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임시정부 요인분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참 많이 바꿔 놓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본인들의 삶을 희생했던 그분들의 삶이 참 가슴에 와닿앗다.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비전에 감탄했다. 나는 일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가족 식솔처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때 그곳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아 나간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출판하기로 했다. P 011



그동안 살면서 몰랐던, 국사책에서만 보았던 내용들이 할머니 일기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김현주님은 그렇게 할머니의 일기와, 중간중간에 할머니와 대화를 하며 이야기를 보충하여, 1999년에 출판을 했더랬다. 시간은 흘러 책은 절판되었고, 그렇게 잊혀졌다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맞춰 이 책이 다시 한번 세상에 나왔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의 존재를 몰랐고,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책의 존재를 알았다는 사실에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랬다. 



우리는 김구, 윤봉길, 이봉창 등 국사책에 실린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수십, 수백의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한 일부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라며, 스스로 만족한다. 그러는 새에 더 많이 빛을 봐야할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은 점점 더 잊혀지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이, 「제시의 일기」에도 그대로 반영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거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백범일지」 를 아냐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 안다고 하겠지만, 「제시의 일기」를 아냐고 하면 열 중 한명이라도 안다고 하는 사람이...과연 나올까싶은, 이런 상황이 그저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육아일기는 1938년 7월 4일, 호남성 장사(창사)에서 맏딸 제시를 얻으면서 시작한다. 이후 광둥성 광주(광저우), 광서성 유주(류저우), 사천성 기강(치장), 사천성 중경(충칭)을 거쳐, 1946년 부산항으로 통해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 오며 일기는 끝이 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경로만 보아도 알 것이다. 양우조, 최선화 부부가 다닌 이 경로는 임시정부의 피난길이자 고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그 경로라는 것을. 





1938년 7월 4일, 중국 호남성 장사.


내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내 딸을 가슴에 안았다. ‘상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정세가 중국에 불리해지자 중국 정부가 자리하던 남경 근처의 ‘진강’으로, 얼마 후 다시 지금의 ‘장사’로 자리를 옮겼다. (중략)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이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P 034



1938년 7월 22일, 광동성 광주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몰리고 있다 (중략) 제시가 태어났던 ‘장사’. 이른 새벽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장사’를 뒤로하고, 모든 임정 식구들은 중국 대륙 동남쪽에 위치한 광동성 광주행 월한철로 전차를 탔다. (중략) 그렇게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는 갑작스런 일본기의 공습도 만났다. 공습이 오자 기차가 멈추었고,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와 주변의 수풀 속에 숨어 적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P 037



1938년 10월 11일, 광동성 불산


철 없는 제시지만, 백일맞이라 해서 그런지 경쾌한 태도로 아주 기분 좋게 잘 놀고 있다. 그런 제시의 기분과 달리 바깥의 분위기는 스산하다. 매일 아침마다 포탄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있다. 적이 가까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오후엔 일본군이 광동, 담수 등의 지방에 상륙하여 물밀 듯 쳐들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산 거리에는 짐을 옮기는 황황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P 044



1938년 12월 5일, 유주


아침 열 시쯤 되어 공습경보가 났다. (중략) 후에 안 소식으로 우리가 피신했던 5호 동굴 좌우 쪽, 기타 여러 동굴이 폭탄 투하로 매몰되어 버렸단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 있지 않았던들 우리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1938년 12월 5일, 이날의 왜놈의 잔인한 행동은 인류 역사가 생긴 후, 세계 처음으로 꼽히는 참사였다고 한다. 동굴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산 주위 숲속, 나무 밑에 은신하고 있던 피난민들은 왜놈의 저공비행으로 기관총을 난사당하여 거의 다 죽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을 그렇게도 많이, 의도적으로 죽였던 일본의 잔혹한 행동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되리라. P 057



이 일기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내용들이 있다. 육아일기 인 만큼 ‘제시’에 대한 것은 당연히 나오는 것이니, 그것을 제외하고, 제시 만큼이나 많이 나오는 내용, 바로 ‘날씨’와 ‘일본의 공습’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열이면 열, 상공에 일본 전투기가 나타났고 무차별 공습을 했다고 한다. 양우조, 최선화님은 공습경보가 울리면 매번 제시를 안고 주변에 있는 숲이나, 들판, 동굴, 공동묘지 등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래서 그런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 두 분은 아침마다 날씨를 챙기는 게 습관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제시의 육아와, 날씨&공습, 그리고 임시정부가 들어있는 「제시의 일기」는 육아일기 이 전에, 한 권의 항일독립운동 사료였다.


 



1939년 2월 8일, 유주


제시의 부모로서의 역할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되는 것과 같다. 자식들의 모습을 미추는 거울, 부모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이 깨지면 그 속에 비춰진 모습도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에 대해 눈뜨게 된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를 그려본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거울이 되어 그 아이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또 깨닫게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P 065



1940년 1월 29일, 사천성 기강


갈수록 제시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따라하며 배워가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취하는 행동들이 제시에겐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두려워진다. 혹 내가 취하는 행동에 모자람이 있지는 않은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못난 모습이 눈에 뜨이는 건 아닌지. P 104



1941년 1월 4일, 사천성 중경


이제 이 아이가 세상에서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얼마나 많아질까? 생후 세 돌이 못 된 아이에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이 생겨난다. 내 것이란 이름으로 가지고 싶은 마음. 사물이나 사람이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함께 보고 나눌 수는 없는 것인가. 세상의 갈등과 괴로움을 단지 소유욕으로 단정 지을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오늘 우리가 갖는 많은 절망과 어둠이 욕심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P 148



1942년 6월 1일, 사천성 중경


마마는 제시의 교육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혼자 몸으로 살림을 하시느라 아직 제시의 공부에 적극적으로 착수를 못하셨다. 때로 창가나 가르치고 가정 교육에 그치고 있다. 둘째 제니는 아직 서서 걸어다닐 생각은 않는 양으로 앉아서 놀고 있지만, 눈치와 말귀는 장족의 진보를 하고 있다. 제니는 침착하며 퍽 능한 편이다. P 186



1942년 8월 4일, 사천성 중경


한 배속에서 난 아이들의 아래위가 서로 다른 성격과 모습을 보여주듯이, 한 아이는 여리고 상냥하고 잘 챙겨주는 모습을, 또 한 아니는 자기 고집이 세고 직선적이며 도전적인 모습을. 두 아이가 어울려 만나는 이 세상은 틀림없이 다른 모습일 것이다. 같은 강줄기에 우리가 만나는 일기가 다르듯이 부모가 지켜보게 될 두 아이의 세상살이 또한 다른 모습일 수 밖에. ​P190



1943년 3월 22일, 사천성 중경


저녁 식사 후, 저 멀리 산보를 몇 시간 하고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어린애들은 오래간만에 나가 다니매 좋다고 한다. 어떻게 가버렸는 지 모르게 가 버린 인생의 푸르른 시간들이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천진하게 자라고 있는 이 어린애들이 어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P 212



그 누구도 처음부터 부모였던 적이 없고, 부모교육을 받은적이 없기에, 좌충우돌 하고 매시간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독립운동가였던 그들도 역시 그랬다. 첫 아이 제시가 태어나 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또한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하게 되었고, 많은 생각을 했으며, 그 생각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건 그 누구도 반박못 할 사실일 것이다. 내 조국이기에 되찾으려 했던 대한민국은, 이제 내 아이가 자라나야 할 땅이기에 어떻게든 되찾아야만 했다. 조국을 되찾는 다는 건 쉬운일이 아닌걸 알고, 본인들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오로지 내 아이들을 위하여 그 희생을 감수하였다.  부부는 큰딸 제시와, 둘째 제니를 이야기하며 항상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했고, 걱정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통해 본인들이 위로를 받았다.



요즘의 육아일기와 다른 점이라면 ‘~가 힘들다’ 라는 말이 유독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요즘 부모가 되는 젊은 사람들은 이해 불가능한 육아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세대는 항시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저 당시의 삶은 결핍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이 결핍에는 조국이 없다는 것 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조국이 있는 우리가 이 시대를 100% 이해하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결핍이 넘쳐나는 삶에서 육아를 하는 게 어떤 일인지, 겪어보기 전 까지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이의 사회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번 쯤은 요즘 잣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1939년 1월 25일, 유주


요즘의 임정은 ‘한국국민당’과 ‘재건한국독립당’, 그리고 ‘조선혁명당’등 임시 정부 주변의 민족진영이 뿔뿔이 갈라져 있고,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 등 임시정보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는 있지만, 진전이 뚜렷하지 않다.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움직임이 발전되면 좋으련만. P 063



1940년 3월 14일, 사천성 기강


이동녕 선생님께서 어제 오후에 작고하셨다. 임시 정부의 제일 웃어른이신 분이 가심으로 한교들은 충격이 컸다. 돌아가시면서도 한교들의 화합을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한다. 우리 생전에 독립을 볼 수 있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애써 오셨던 이동녕 선생님께서 독립의 서광이라도 보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으리란 안타까움이 남는다. P 110



1940년 11월 29일, 사천성 중경


이층방으로 곧 필제네집(조소앙 선생 가족)이 이사오고 대청마루를 지나 바깥방에는 최형록씨와 조계림이 살고 있다. 일층에는 이청천 선생(지청천 장군)댁과 그 사위 심광식 씨 가족이 우리 방 아랫방에 살고 있더 모두 다섯 세대가 옹기 종기 붙어 있기에 적적한 느낌이 없어서 좋다. P 144



1943년 3월 7일, 사천성 중경


‘중경한국애국부인회’가 재건이 된 후, 엄마는 총무로 피선이 되어 회의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 보게 됐다. 제일처로 시작한 것은 홍보 활동.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세계 만방에 헤어져 살고 있는 우리 여성들과, 더욱이 국내에 있는 부녀자들에게 오늘 저녁 광파 방송을 했다. P212



1945년 5월 1일, 사천성 중경


오늘을 계기로 해서 오랫동안 운동 중에 있던 우리 광복군이 오늘부터는 완전히 ‘한국 광복군’으로 되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령부 안에는 상하 직원이 거의 다 우리사람으로 개편되고, 필요한 기술자로 중국사람도 얼마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도 오늘부터 광복군에 취직이 되신 모양이다. P237



1945년 8월 9일, 사천성 중경


오후 한 시에 오랫동안 문제로 걸려 있던 일소전쟁에서 소련이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세상은 미칠 듯이 좋아한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명이 된 미국의 원자폭탄 한 개가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지자 땅 덩어리 3분의 1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P 240



1945년 8월 10일, 사천성 중경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 시간)에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중경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 쯤이었다. 세상은 밤을 새워가며 미칠 듯이 좋아라고 야단을 한다. 그러나 웬셈인지 우리나라 사람들(한국 교포들)은 나와 같은 맘인지 다들 멍하여 가지고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이다.​ P 245



시시각각 변하는 중국의 상황, 임시정부의 상황이 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임시정부의 3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분열로 인해 힘들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이동녕 선생이 저런 유언을 남기셨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이동녕 선생의 유언이 있은 뒤 3당 합당이 되었고, 이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임정 식구들은 중경, 그러니까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최선화님은 애국부인회를 재건했고, 임정요인인 양우조님은 한국광복군에 몸을 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책 곳곳에 언급되었던 임정 가족들인 이시영 선생, 김구 선생, 지청천 장군, 조소앙 선생, 차리석 선생 등 그 모두가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헌신했다.



하지만 독립은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왔다. 원자폭탄 두대 맞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 독립은 우리 힘으로 얻어낸 독립이 아니라, 남이 얻어준 독립이었기에, 독립 이후에 일어날 사태에 대해 임시정부 사람들은 우려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인정되지 않았기에, 개인자격으로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온 고국에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신탁통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1946년 4월 26일


아침에서야 배가 항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조국, 조선 땅으로 가는 배다. 며칠 후면, 그동안 그리던 산하와 가족들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P 266



1946년 4월 29일, 부산


삼천삼백여 명이나 되는 전체 선객들은 모두 고국 산천을 바라보며 반가워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중국 태생인 우리 애들은 별로 기뻐하는 표정이 없었으나, 엄마 아빠가 내 나라 땅에 왔다니 좋아하고 있다. P 267



개인자격으로 돌아온 조국이어도, 조국이었기에 돌아왔다는 기쁨이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 날이 불확실하긴 했지만, 중국 땅에서 임정을 꾸렸듯 그렇게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 했을거다. 양우조, 최선화님을 비롯한 임정 식구들 모두가 그랬을거다. 하지만 돌아오니, 친일파가 계속 권력을 잡았다. 이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를 좌파라 몰아세우며 잡아들였다. 나라는 두동강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 분들은 이 상황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1999년 4월 19일, 대한민국 경기도 분당


이제는 손주들에게 하는 옛날이야기의 한 가지 소재가 되어 버린 그 시절 우리나라의 독립을 바라던 시간들..


먼저 내 얘기를 소중하게 읽고 들어 준 내 손주, 현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 또한 그 시간들을 다시 이야기하며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지치고 힘겨웠던 기억이라기보다 소중하고 흥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린 그 시절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면서 마음은 어느새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사람마저도 찾을 수 없다. 


나도 어느새 기억이 가물거리고 눈앞이 침침하고, 다리, 허리가 아파 오는 것이 그 옛날 내가 봤던 노인들처럼 되어 가고 있다. 남은 건 그나마 내 머릿속에 남은 자꾸 흐려져 가는 기억들이고, 전해 줄 건 그 시절 이야기 뿐이 되어버렸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을 열심히 해결하려고 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그 시절을 남겨 둘 수 있어 기쁘다. P 271



담담하게 읽었다. 그렇게 책을 다 읽어가는 와중, 마지막 챕터에 최선화님의 회고를 보았다. 담담하게 읽고 있었는데, 짧은 회고를 보고 눈물을 흘려버렸다. 이분은 어떻게 이토록 헌신적일수 있는 것일까. 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동지들을 먼저 보냈을거고, 광복을 맞이한 뒤에는 친일파에게 동지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보았을거고, 스려저간 일부 동지들이 결국 북한으로 떠난 것도 보았을 거고, 한국전쟁도 보았을 것이며, 한국전쟁 중 대통령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자국의 국민들이 학살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이후 군사 독재 정치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후손들에게 독립된 조국을 넘겨준 것 만으로 기쁘다고 할 수 있다니.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눈물이 났고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고 그랬다.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이 분들에게, 정말 떳떳하게 보여드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길 원하고 또 원한다.


일기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임시정부 요인분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참 많이 바꿔 놓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본인들의 삶을 희생했던 그분들의 삶이 참 가슴에 와닿앗다.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비전에 감탄했다. 나는 일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가족 식솔처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때 그곳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아 나간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출판하기로 했다. - P11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사람마저도 찾을 수 없다.



나도 어느새 기억이 가물거리고 눈앞이 침침하고, 다리, 허리가 아파 오는 것이 그 옛날 내가 봤던 노인들처럼 되어 가고 있다. 남은 건 그나마 내 머릿속에 남은 자꾸 흐려져 가는 기억들이고, 전해 줄 건 그 시절 이야기 뿐이 되어버렸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을 열심히 해결하려고 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그 시절을 남겨 둘 수 있어 기쁘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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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1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3 골든아워 1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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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저 밑바닥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던 그런 책들이 있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이 그랬고, 박상식의 『동도일사』가 그랬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전후나, 조선 말기 때 집필된 책이나,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책을 읽으면 그랬다. 그 책들의 저자는 그저 담담하게, 본인들이 보고 겪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 뿐인데, 그 내용을 읽고 있는 나는 계속 분노했다.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간 당시 사회에 분노했고, 그런 사회를 만든 위정자들에게 분노했으며, 큰 일을 겪은 뒤에도 변함없는 사회에 분노했었다. 이 분노의 주체는 과거였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이국종 교수님이 집필하신 이 책, 『골든아워 1』를 읽고, 앞선 책들을 읽으며 느꼈던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분노와 답답함은 앞선 책들에서 느꼈던 것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국종 교수님이 겪은 이 참담한 현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지금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기록의 대부분은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진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에서 가려 뽑았고, 내 기억 속의 남겨진 파편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 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P 010



이 책에 나온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자인 이국종 교수님은 그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중증외상외과’에 대한 시스템을 세우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고, 그저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을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 원칙대로 치료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본인의 삶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환자를 살리는 사람에게 이런 참담한 현실만 놓여있는 것일까. 분명 사람 목숨 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배웠는데, ‘돈(비용)’, ‘관행’이 사람의 목숨보다 우위에 있는 것일까. 이국종 교수님이 맞닥드린 참담한 현실이, 지금 내가 사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너무 답답했고, 안타까웠고,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여기가 미국인 줄 알아?


한국에 돌아온 후 주위 반응은 막막했다. 한국에는 한국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기껏 찾은 답은 쓸 수 없었고 현실적인 난관을 피해갈 수 없었다. P 053



외상외과 의사로서 교과서적으로 치료하면 환자가 살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원칠대로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증외상환자 치료 원칙은 환자의 생환에는 도움이 되어도 병원의 이익은 되지 못했다. 일할수록 폭증하는 적자규모는 내가 평생 구경도 못할 액수였다. 그 같은 손실이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불행을 치료하다 발생한다는 사실은 허무하고 허망했다. 나는 일해서 돈을 벌었고 일을 해서 돈을 잃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상외과’라는 말도 안되는 부서를 지키고 선 스스로가 무력했다. P 061



-이 선생, 여기는 영국이 아니잖아? 나도 미국에서 연수받았지만 거기에서 하던 걸 한국에서 다 할 수는 없어.


-이 교수가 이제 마흔인가? 적어도 마흔이지? 이제는 좀 적당히 해. 일단 수술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게 과의 입장이야. 어차피 전공의 배정도 없이 학생들이나 응급구조사들만 데리고 하는 것도 남 보기 좋지 않고. P 109



-아주대학교병원이 외상외과 운영을 포기하면 한국에는 더 이상 현황 파악을 할 곳조차 없습니다. 조금만 이 분야를 더 끌고 가주시면 국회 차원에서 병원 지원과 함께 중증외상 환자 치료에 대한 전국적인 체계를 잡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일행의 방문은 중증외상에 대한 국가의 지원 가능성으로 비쳤다. 보직교수는 그 자리에서 내게 수술 제개를 지시했다. P 124



새로 합류한 팀원들과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살려낸 환자의 수가 늘어날 수록 적자는 정비례해 커졌다. 괴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야 했고, ‘조직원’으로서 병원의 이윤을 도모해야 했으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상 ‘외상외과’에 적을 두고서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뜨거운 눈초리와 뒷말은 여전히 무성했다. P 146



누군가는 내게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일이라서 더 힘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심각함이 지나쳤다. 기존의 체계와 인사, 재정, 지원과 운영 모든 면에서 부딪혔다.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비아냥과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숨기고 있던 칼을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그 저열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제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덩달아 힘겨워졌다.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P 292



이국종 교수님은 미국, 런던, 일본에서 ‘중증외상외과’에서 필요한 시스템이 무엇인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몸소 배운 뒤, 아주대학병원으로 돌아왔다.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주대학병원은 이국종 교수를 소위 배척했다. 근데 이게 비단 아주대학병원의 문제인가? 아니다. 엄연히 한국 의료계의 문제이고, 우리나라의 문제였다.



응급실을 크게 열어놓은 수많은 대학병원들은 정작 환자가 수술 뒤 들어갈 중환자실이나 입원실이 없어 고생하면서도 중환자실 병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는다. 중환자실 병상 없이 응급실만 크게 만들어놓는 것은, 고속도로 정체를 해결한답시고 톨게이틈나 크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병원이 이 본질적인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한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급하고 절박한 것은 내 사정이었을 뿐이다. 나는 수술이 끝난 환자를 어쩔 수 없이 다시 응급실로 내려보내야 할 때마다 응급의학과 의료진에게 감사했다. P 083



2011년에야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제로 평가를 담당하는 의사, 간호사들과 대면했다. (중략)


-아니, 이렇게 확실한 문제가 있으면 저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오래 놔두셨습니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치솟는 불길이 머리끝에 닿았다. 긴 바늘이 머리를 쑤셔대듯 두통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가까이 내가 올린 수많은 자료들과 직접 작성한 ‘수혈 비용 삭감에 대한 이희신청서’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혔단 말인가. 일개 의사의 불만이라도 10년 동안 지속되면 한 번은 귀 기울여줄 만했다. 나의 절박함이 그들에게는 하찮은 모양이었다. (중략)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 306



2009년, 외상외과에 혼자 있을 때 1년간의 적자는 8억원을 넘는 수준이었다. 2010년 정경원이 합류해서 열심히 진료하고 수술하니 불과 8개월 만에 적자가 8억 원을 넘어섰다. 권춘식 등이 합류하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중증외상 환자의 집중도가 증가하자 적자는 더 늘어났다. 2012년에 기획팀장이 나를 찾아와 2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보이는 외상외과의 ABC원가분석 보고서를 내밀었다. 병원은 심평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료비 청구 삭감분을 각 교수별로 지급되는 진료성과급에서 차감하겠다고 통보해왔다. P 336



병원은 분명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장소이지만, 그 전에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병원은 아픈 환자는 치료하되, 그 치료로 수입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슬픈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하는 중증 환자들도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다. 이런 자본, 돈의 압박은 환자뿐 만이 아니라 의사들도 받는다. 의사들은 진료에 사용하는 약품의 수나, 약품의 용량, 장비 사용 등의 비용이 심평원에서 지급해주는 진료비를 초과하는 순간 손실이 된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헌데 이 진료비 기준이 일반환자 기준에 맞춰 있다보니, 중증환자를 진료하게 되면 너무 당연하게도 병원은 손실을 안게 된다.



아주대학병원에서 뼈와 살을 갈아가며 중증외상환자들을 진료하는 이국종 교수님은, 다른 의사들의 적이었으며 병원의 적이었다. 근데 이게 또.. 다른 의사들을 비난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국종 교수님이나 다른 의사들이나 환자를 살리는 건 똑같은데, 이국종 교수님이 환자를 진료할 수록 병원은 엄청난 적자가 되고, 그 적자를 메꾸는건 그 외 환자를 진료하는 다른 의사들이 몫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치료받기 위해선 돈을 생각하고, 의사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선 돈을 생각하는 사회, 정말 안타깝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 모습이다. 이국종 교수님이 바라는 선진국의 중증외상외과 시스템 도입도, 이러한 우리 사회 제도가 바뀌는게 선결되어야만 가능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제도가 바뀌길 기다리기엔, 우리 사회는 관료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기에, 솔직히 힘들다. 간혹 뉴스에서 나오는 이국종 교수님의 기사를 보면, 그것도 본인이 적을 둔 아주대학병원에서 핍박받던 그 기사를 보면, 우리 사회 제도가 과연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는 할까 싶다. 이국종 교수님 같은 분을 담기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아주 작은, 간장 종지만한 그릇인것이다.



외상외과를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길레 설명해야 했다. (중략) 실전에 투입되어 수많은 중증외상 환자를 치료해온 주한미군의 군의관들만이 외상외과 의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외상’이 몸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손상된 모든 것을 의미할 때, ‘중증외상’은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외상으로 반드시 ‘수술적 치료’ 및 집중치료가 필요한 상태를 뜻한다. 어딘가에 부딪히고 깔리거나 떨어져서 혹은 무엇인가에 관통당해서 사지와 뼈들이 으스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경우들이다. 이떄 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핼리곱터를 이용해서라도 이송은 신속히 해야하고, 이송 중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최종 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의료기관에 도달해야한다. P 046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린느 엠블런스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다.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로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20분 안쪽이면 충분하며 이송 중 응급처치까지도 가능하다. 그렇게 실어 온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런던에서 보고 일본에서 봤던 ‘사실’이었다. P 148



난 외상외과라는 의료기관에 대해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었다. 외과라고 하면, 그저 정형외과나 성형외과정도만 알았다. 이토록 생소한 외상외과는, 알고보니 우리 일상에서 제일 가까워야 할 의료기관이었다.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현장근로자들이 추락하거나, 설비에 낀 사고를 당했을 때, 우리를 살려주는 그런 장소인 것이다. 그니까, 외상외과는 상대적으로 서민들과 밀접한 의료기관이다(주 대상은 서민들이나, 외상외과는 정말 많은 진료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중증외상외과에 쓰이는 약품비용을 심평원에서 전부 메꿔주지 못하고, 메꾸지 못한 부분을 병원에서 감수해야 하기에, 결국 중증외상외과라는 의료기관은 우리들 사이에서 멀어졌다. 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다. 중증외상외과가 설립되는 설립되는 순간, 해당 병원은 엄청난 적자를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길거리에서, 또는 전혀 받을 필요 없는 검사를 받으며 죽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자의인 듯 보이나, 결국 타의로 아주대학병원 외상센터를 그만둔 이국종 교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피랍된 배의 선장은 고의적으로 선박의 항로를 지연시켰다. 최영함이 선박을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려 한 것인데,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해적들의 살기 어린 구타가 반복됐으나 선장은 버텼다. 전직 해군 부사관 출신이라는 선장은 도적들에 맞서 몸을 던져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해군은 다음을 준비했다. 본국으로부터의 직접 지원이나 근해에 배치되어 있는 연햅하군으로부터의 전력지원은 없었다. 최영함을 이끄는 조영주 함장은 피땀을 흘리며 고독한 싸움을 이어갔다. 해군의 진압에 분노한 해적 하나가 석해균 선장을 향해 AK-48 총탄을 쏟아부었다. 미군 해군항공대의 도움을 받아 오만 살랄라의 왕립술탄가부스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했다. 석 선장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1차 응급수술을 받아 가까스로 숨을 유지했다. P 209~210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그것을 아주 대학교병원에 요청할 수는 없었다. 석 선장 때문에 오만에 가야한다고 병원에 말했을 때 윗선의 화는 불같았고, 그들은 내가 어디에서 월급 받는 사람인지를 일깨워줬다. 나는 병원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 없었으며, 기대해서는 안됐다. 결국 내가 지급보증을 하겠다고 답했다. P 233 (에어 엠뷸런스)



병원 측에서 언론을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나는 언론과접촉하지 않았다. 보직교수는 인터뷰 중에 ‘아주대학교병원이 지난 19년간 중증외상 분야를 집중 육성해왔다’라고 했다. ‘10년’과 ‘집중육성’사이에서 나는 씁쓸해졌다. 내가 겪어온 10년과 병원이 말하는 10년은 같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P 249



몇몇 중간관리자는 앞뒤가 달랐다. 윗선에는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고 병원에서는 이 프로젝트의 지속여부에 대해 이죽거렸다. 소방대원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은 뒷전이고 보여주기식 헬리콥터 사업에 예산을 낭비한다고도 했다. 소방대원에 대한 처우가 열악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비난은 이해되었다. 다만 저쪽과 이쪽에서 보이는 다른 낯빛에 나는 속이 뒤틀렸다. (중략) 잡음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들려왔고 석해균 프로젝트는 흔들리며 나아갔다. 불안한 시작이었다 P 279



소방방재청과 맺었던 양해각서의 이행은 7월로 중단됐다. 석해균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넉달만의 일이었다. 산 자들의 안위에 죽어가는 이들이 밀려났다. 석해균 프로젝트로 분명한 변화들이 보였으나 그 변화는 상부에까지 가닿지 않았다. 사고 현장으로 헬리콥터가 출동하고 전원이 요구되는 환자들로 인해 경기 소방창공대 내부의 업무 부담은 급증했다. 실무잗르이 힘겹게 버틸 때 필요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달느 이들은 밖에서 입을 놀려 말을 만들었다. P 286



이국종 교수님을 일약 스타덤에 올렸던 사건이 바로 ‘아덴만 여명작전’. 일련의 상황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석해균 선장을, 생의 기로로 돌려놓은 바로 그 사건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새로 알게된 사실은, 이 작전에서 본국의 전력지원이 없었다는 것과, 이국종 교수님이 석해균 선장을 구하러 간다고 했을때, 왜 그런짓을 하냐고 반대했던 아주대학병원과, 석해균 선장을 살리기 위헤 에어 엠뷸런스 대여를 위해 이국종 교수님이 본인 명의로 대여비 지급보증을 했던 것, 그리고 석해균 선장을 살렸을 경우 그 공은 정부와 아주대학병원에 돌려야 했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썩은)정치의 나라라지만,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썩은)정치가 있다지만, 정말 토악질이 나온다. 언제나 중요 민생문제를 두고  돈, 예산이 없다고 이거 반대, 저거 반대, 반대만 외치는 정치권들을 보자면 참 황당할 따름이다. 그렇게 돈이 없다면서 본인들이 받는 수당은 어마무시한 금액이고, 쓸데없는 전시행정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예산 사용에 우선순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는 우선순위와, 정치권에서 보는 우선순위는 간극이 너무 컸다. 그로 인한 결과가 바로 이국종 교수님의 중증외상외과 시스템 도입 실패였고, 닥터헬기 운영 실패였다. 



이국종 교수님같은 분은 비단 이 분 한 사람이 아닐 거다. 자기를 희생하여, 누군가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지금 대구, 경북에 있는 의료진들이 그럴거고, 또 다른 위치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사람들도 그럴거다. 난 이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분들이 차라리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남을 도우는 일을 하는데..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하고 말이다.

누군가는 내게 시스템이 없는 곳에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일이라서 더 힘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심각함이 지나쳤다. 기존의 체계와 인사, 재정, 지원과 운영 모든 면에서 부딪혔다.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주시했다. 비아냥과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숨기고 있던 칼을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그 저열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제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덩달아 힘겨워졌다.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 P292

2011년에야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제로 평가를 담당하는 의사, 간호사들과 대면했다. (중략)



-아니, 이렇게 확실한 문제가 있으면 저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오래 놔두셨습니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치솟는 불길이 머리끝에 닿았다. 긴 바늘이 머리를 쑤셔대듯 두통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가까이 내가 올린 수많은 자료들과 직접 작성한 ‘수혈 비용 삭감에 대한 이희신청서’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혔단 말인가. 일개 의사의 불만이라도 10년 동안 지속되면 한 번은 귀 기울여줄 만했다. 나의 절박함이 그들에게는 하찮은 모양이었다. (중략)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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