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빵빵한 날들
민승지 지음 / 레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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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조금은 무거운 책들만 읽다가, 오랜만에 손 가볍고 마음 가볍게 에세이를 ☆PICK ★ 


다만....다만.... 손 가볍고, 마음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왜 내 위장은 무거워졌나! 마성의 펭수빵에 사로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흑흑흑. 이 책 덕분에 다시 빵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표지부터 빵집이라 ‘달달한 에세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책장을 넘겼는데. 왠걸! 차례부터 빵이라니! 심지어 종류별로 ? 거기다 맛있어보여!!


잠시 빵순이를 내려놨던 내 자신을 혼내고 싶을 정도로 빵 천국이라서, 나는 오늘도 빵을 먹어버렸다.......햄버거로 데헷★


그런데 뭐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그저 달달한 에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보다. 작가의 말에서도 나와있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전부 빵집에서 만난 빵을 보며 사람사는 달콤쌉싸름은 향을 맡은 작가가, 빵을 또 다른 ‘나’로 빗대어 한편한편 담담하게 써내린 글이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단순히 해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빵 쪼가리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말랑거리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요즘에서야 깨닫는다. p 029



‘더 이상 말랑거리지 않는다’완전 극공감인 문장이다. 분명 난 남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했다. 조금만 슬퍼도 울고, 조금만 웃겨도 웃고, 가끔은 조울증인가 싶을 정도로 감정변화가 격했다. 아? 이건 감수성과는 다른 장르인가(...) 뭐 여튼! 꽃밭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꽃 선물을 받고싶고, 감성있는 카페도 가고 싶고 막 그랬었다. 그런데 왠걸, 지금의 나를 보면 음...뭐랄까, 많이 메말랐다. 말랑말랑했던 마음이 딱딱해졌다.


요즘은 신랑한테도, 엄마한테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넌 감성이 너무 없어!’ 라고. 그도 그럴것이 꽃다발을 보면 ‘왜 저런데 돈낭비를?’이라거나, 인스타감성에 젖은 카페들을 보면 ‘저렇게 외관에 신경쓸 시간이 커피나 더 맛있게 내리지’ 라거나. 아, 내가 생각해도 조금 메말라보이긴 한다. 분명 예전엔 자타공인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였는데! 언제부터 내 감수성이 이렇게 메마르고, 말랑말랑 했던 마음이 딱딱해졌을까.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10여년에 걸친 사회생활 때문인가. 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말랑말랑한 마음은 언제나 이용당하고, 호구가 되기 쉽상이었다. 그래서 나를 보호하기위해 조금씩 조금씩 나를 다잡는 연습을 했는데, 왠걸. 나를 보호하려고 한 행동이, 내 마음을 딱딱하게 만들었나보다. 아..... 가엾은 내 마음.



-언니와 아빠는 사실 많이 닮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굽히지 않는 점, 

무언가 일을 시작할 때 굉장히 요란하다는 점, 생김새 등등. 

사실 ‘닮은 그 부분’이 발단이 되어 서로 부딪힌다. p 084



나는 엄마와 참 많이 닮았다. 나는 아빠와 참 많이 닮았다. 외형은 엄마 판박이고, 내형은 아빠 판박이다(내 동생은 외형이 아빠 판박이고, 내형이 엄마 판박이다 ㅋㅋ). 누가 뭐래도, 어딜봐도, 외국에 던져놔도 엄마아빠의 딸이다. 정말 너무 많이 닮았기에, 참 부딪히는 부분도 많긴 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내지르면 엄마, 아빠가 참아주는 편이었지만. 특히 아빠는 본인이 나서면 더욱 일이 커질 거라는 걸 알았기에 더 참으셨을 것이다.


중학생때였나? 아빠랑 정말 크게 부딪혔던 적이 있다. 그리고 장장 일주일이었나, 한달이었나 서로 대화를 안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불같은 아빠성미나, 아빠를 똑 닮은 불같은 내 성미나 도찐개찐이었다(정말 똑같은 부녀!). 얼마나 똑같았으면, 한 집에 살면서 대화를 안하는 지경까지? 그 사이에 있던 우리 엄마는 얼마나 맘 고생했을지, 에휴. 지금이야 내가 아빠 성격과 아주 똑같다는 사실을 아는지라,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갖는 주제는 아예 대화에 꺼내지 않는다. 예컨데 정치같은 것(경험상...가족끼리라도 정치/종교는 건들면 안된다)! 그 외의 대화라면 아빠와 내 의견은 언제나 일치. 가끔은 아빠랑 편먹기도 하고. 


난 아빠랑 닮았기 때문에, 이 험난한 세상을 나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내가 되었다고 언제나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포켓몬 빵이 한창 유행을 했었다. 

빵보다도 빵 안에 든 포켓 몬스터 스티커 띠부띠부실을 모으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띠부띠부실을 종류별로 수집해서 많이 모을수록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 같은 스티커가 나오면 꽤 실망을 하며 빵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p 117



와, 이 책의 저자는 나와 동년배인가보다ㅋㅋㅋㅋ. 포켓몬 띠부띠부씰이라니!!! 이 책을 몇달 전에 읽었다면, ‘와 정말 추억돋는다’라고 했을텐데, 아주 소름돋게도 지금 나에게 이 상황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가 되었다. 펭수 띠부띠부실이 있는 펭수빵이 나오기 전까지만해도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콧물 질질흘리며 초등학교를 다닐 때 였다. 너나할것없이 포켓몬 띠부띠부실을 모으기 위해 매일 슈퍼에 발도장을 찍었다. 당시 선호하던 포켓몬 빵은 (아마도 저렇게 고오스가 그려져있던)초코롤이었다. 그 외 포켓몬 빵은 내 입에는 완전 별로! 하지만 띠부띠부실을 모아야 한다는 특명아래 안먹는 포켓몬빵까지 매일매일 쓸어왔다. 포켓몬빵 출시 초기에는 비닐을 쫙쫙 잡아당겨서, 어떤 띠부띠부실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사기도 했었는데! 이런 꼼수는 금방 들통나고, 띠부띠부실과 빵포장은 더욱 철저해졌다. 진짜 포켓몬 빵을 얼마나 많이 샀는지! 그 많은 포켓몬 빵 중 내가 직접 먹은건 반도 안되겠지만ㅋㅋ. 초코롤을 제외한 나머지 빵은 반 친구들 주거나, 가족들 주거나. 진짜 그때만큼은 내가 정말 모든걸 다 퍼주는 착한 사람이구나 했다ㅋㅋㅋ. 정말 생각만해도 즐거운 추억이었는데.



하.....그런데, 이 짓을 지금 또 하고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펭수 띠부띠부실도 모으면서, 빵도 사는 족족 먹고 있다. 나이들며 내 입맛이 달라진건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맛없던 공장빵들이 지금은 왜 이렇게 맛있는지?! 덕분에 펭수빵을 종류별로 다 먹고, 펭수 띠부띠부실을 모은다고 또 먹고, 계속 먹고 미친듯이 먹고 그러다가 펭수몸매가 되고, 하...ㅠㅠㅠㅠㅠㅠㅠ 



기술이 발전한건지, 요새는 공장빵도 정말 맛있게 잘 나와서 입은 행복한데, 내 위장은 슬..프....다.........ㅠ0ㅠ



와, 그저 가볍고 달콤한 에세이를 읽는거라 생각했는데! 읽고보니 내 인생 전반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내가 살아온 삶은, 아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은 달콤쌉사름한 빵같은 삶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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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괜찮아
니나 라쿠르 지음, 이진 옮김 / 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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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아, 이건 일상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주는 책이구나’ 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책이 이야기 하는 건 물론 ‘위로’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 이별을 하는 순간, 우리는 ‘상실’이라는 크나큰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마린도 할아버지와 이별하고, 상실이라는 감정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마린에게 상실이란, 극복하기엔 너무 큰 감정이었다.




마린이 겪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친구들, 마린의 친구 메이블까지. 마린의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불우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다....고 당시의 마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행복에 어딘가 모순이 있었다는 걸 깨닫기에는, 마린은 너무 어렸으니까. 그 모순을 깨닫기도 전에 마린은 할아버지를 바다에 빼앗겼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마주한 이별. 이별에서 오는 상실감. 마린은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을 마주할 수 없었고, 그렇게 마린은 주변 사람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메이블에게도 아무 말 없이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서 40시간이나 떨어져있는 뉴욕으로. 마린은 그렇게 도망쳤다.




“나하고 같이가자” p. 054



“난 내가 얘기할 때 억지로라도 네가 얘기하게 하려고 이 먼 길을 왔어” p. 061



“마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알아. 내가 친할아버지처럼 사랑했던 할아버지 손에 자란 애란 것도, 내가 대학으로 떠난 지 며칠 뒤에 할아버지가 물에 빠져 돌아가셨고, 그날 밤 이후 내 친구 마린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고향 사람 중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심지어 나조차도” p. 067



그런 마린을, 40시간이나 떨어진 뉴욕에 있는 마린을 찾아온 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메이블이었다. 마린이 할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으로 고향을 떠난 그 순간, 메이블은 가장 친한친구 마린을 잃은 상실감을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실감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도망을 선택한 마린과는 달리, 메이블은 마주했다. 자기에게 상실감을 안겨준 마린을 만나기 위해, 40시간을 달려왔다. 메이블이 그렇게 용기를 마린을 만나러 온 덕분에, 마린도 할아버지를잃은 상실감과 마주할 용기가 조금씩이나마 움트기 시작했나보다.



난 식성이 까다롭지 않았다. 단지 어느 날 불시에 무언가가 나를 덮칠까 봐 두려운 것 뿐이었다. 식은 커피, 네모난 미국 치즈들. 너무 덜 익어서 가운데가 허옇고 딱딱한 토마토. 가장 사소한 것들이 가장 끔찍한 것들을 불러올 수 있다. p. 084



“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곧 폐허 속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p. 117



“내가 예전에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과 지금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는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리고 책을 덮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에 울림이 있고 가시처럼, 종기처럼 도무지 떠날 줄 모른다.” p. 161



고향에서 도망친 마린은 일상적인 것 조차도 두려워했다. 일상적인 것에서 찾아오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그 추억과 함께 찾아오는 할아버지와의 이별. 그 아픔과, 상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향을 도망친 자신. 고향을 도망치고 나서도 마린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살았다. 최대한 기억하지 않으려고, 추억하지 않으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랬던 마린을 향해, 메이블은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고. 메이블 부모님조차도 마린을 기다리고 있다고. 마린을 위한 방을 만들어놨다고 말이다. 



“카를로스 오빠 방을 왜 치우는데?”​


“너 주려고. 방을 새로 꾸몄다고 얘기했잖아.”


“난 손님방 말하는 건 줄 알았는대.”​


“그 방은 너무 좁아, 그리고 거긴 손님이 묵는 방이야.” p. 177



할아버지와 이별한 아픔으로, 온 마음이 상실감으로 가득 찼던 마린. 모든 것을 끊어내면서 스스로 외로움의 길로 들어섰던 마린. 하지만 그 조차도 인식못했던, 아픔과 고통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마린에게 메이블은 상실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외로웠어” 163




사람은 살면서 숱한 이별을 한다. 물론 너무 오래되 기억이 안나거나, 그리 깊은 마음이 아니었던 이별도 있다. 반면 마린처럼 상실감을 느끼는 이별도 있을것이다. 이 책은 이별을 마주할 때, 상실감을 마주 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지 마린과 메이블, 두 사람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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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근대사 - 정동에서 부산까지 1887~1950
최석호.박종인.이길용 지음 / 가디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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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박종인 기자님께서 쓰신 책이 여러권 있다(흔한 기자님 더쿠1). 리뷰를 올린 책들도 있고, 안올린 책들도 있고(!!). 근데 막 이 책보다 출간된지 더 오래된 책들도 있는데, 왜 난 이런 책이 나왔는지 몰랐을까. 심지어 나름 최근 출간된 책이라니. 오롯이 기자님이 다 쓴 책이 아니어서 그런가..


뭐 여튼! 이미 품절된 책,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기웃, 어떻게 저렇게 해서 기어이 구매! 아주 조오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총 6챕터 (서울 정동, 서울 서촌, 서울 동대문, 목포, 부산, 신안)의 글 중 기자님이 쓰신 걸로 추정되는 건, 첫번째 챕터인 서울 정동 편 하나 인것 같다. 



애초에 박종인 기자님이 저자로 올라가 있던 책이라, 제대로 된 목차는 확인하지 않고(...) 믿고 구입했는데 목차를 보고 새삼 놀랐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6개의 골목길, 그러니까 6개의 지역 중 5곳을 이미 내가 걸어봤던 곳이었기 때문에. 역시 사람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느껴야 한다고 하더니만, 확실하 직접 다녀온 장소들이 많아서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 골목이,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서울 정동편

우리나라 근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서울 정동. 그런 서울 정동을 말 그대로 우리나라 ‘근대사’를 보기 위해 두 번이나 걸었다. 물론  두번 모두 길라잡이가 있었다. 첫번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현실 증강게임, 두번째는 무려 박종인 기자님(상상출판 다시한번 사랑합ㄴㅣㄷㅏ...!!!)



  1) 서울도시건축전시관 - 서울주교좌성당 - 덕수궁(+중명전) - 구 신아일보사 별관 - 경교장

  2) 덕수궁 - 고종의길(일명 아관파천길) - 구 러시아 공사관 - 덕수궁 중명전 - 덕수궁 돌담길(인화문 흔적)



이 두 번의 정동산책의 공통점은, 정말 치욕적인 우리나라 근대사가 들어있다는 점이랄까?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공사관에서 가장 좋은 방에 기거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모처럼 안색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개인은 평안했으되, 나라는 거널났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본이 잠시 후퇴한 사이 황실 인사와 외교, 경제 이권은 러시아가 쓸어갔다. 비등한 여론에 밀려 만 1년 뒤 경복궁이 아닌 경운공, 즉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10년 뒤 160미터 옆에 있는 중명전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꼴을 봐야 했다. p 033



그때 조약에 찬성한 자들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렇게 5인이다. 이들을 똑똑하게 기억하자. 이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p 031



개인적으로 고종이라는 왕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의 부와 안위를 위해 저질렀던 그의 수 많은 행동들이, 고종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동학농민들이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뿐만인가? 백성들이 입헌군주제를 논하자, 독립협회를 강제해산 시켰다. 백성들의 원성은 가뿐히 무시한 채,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 한 뒤 오로지 황제에 의한, 황제를 위한 대한제국 헌법을 선포했다. 본인의 40주년 즉위 행사를 위해 혈세란 혈세는 다 쏟아부었다. 이런 사람이 조선의 왕이었고, 대한제국의 황제였다. 이런 사람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거나, 나라의 개혁에 노력했다고 미화되는 요즘 드라마를 포함하여 각총 매체를 볼 때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매체들은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고, 심지어 지자체까지도 발벗고 나서고 있으니. 그런데 또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을 하지않는다. 뭐지? 왜지? 자본의 흐름이 만들어낸 현상인가? 음. 씁쓸하다.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사용됐다. 전후월남대사관으로 쓰이던 경교장은 1963년 경교장 뒤편에 들어선 고려병원의 원무실로 사용됐다. 안타까운가? 누구 하나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보존하기에는 아직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p 025



평리원과 경성 재판소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 건물을 대법원 청사로 사용했다. 의미 깊은 판결들이 이곳에서 나왔다.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법원은 “이 건물만은 꼭 보존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런데 그 재판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문화적인 무식함이었는지, 아니면 타협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되, 현재 남아있는 옛 건물은 건물 전면부 외벽과 현관밖에 없다. p 041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다. 아쉽지만 이 책이 나온지 약 5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역사적 장소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쓸려나가고 있으니까. 당장 가깝게는 내가 사는 시흥 개발, 발견된 수십개의 고인돌이 갈려나갔고, 그 흔적조차 없으며 지금 남은 고인돌이라고는 딱 2기다. 그래놓고는 이제와 선사유적공원을 조성. 내참. 거기다 춘천 중도는 더 심하면 심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청동기 유적지가 발견되었지만, 레고랜드 따위를 만든다며 그 유적지를 훼손훼손훼손. 대놓고 ‘나 중요한 역사 유물이에요~’라는 것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괴하는게 현실이다. 





*서울 서촌&동촌(동대문)


이 책의 첫번째 챕터가 정동이라면, 두/세번째 챕터는 서촌과 동촌이다. 내가 참, 서울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서울은 동서남북중앙 곳곳을 자주 누볐기 때문에 정말 할말이 많긴 하다ㅋㅋㅋ. 물론 이 책에서는 정동과 서울 서촌과 동촌(동대문)만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다.



난 거의 해마다 경복궁에 출석체크를 하러 다녔다, 아니 지금도 해마다 출석체크 진행중이다. 거기다 소싯적에는 연극&뮤지컬 보러다니느라 주말마다 대학로도 출석체크 하곤 했다. 의도했던건지, 의도한게 아닌건지는 지금도 참 아이러니 하지만. 이 때마다 참 많이도 걸어다녔다. 경복궁이 메인이었을 땐 서촌, 북촌까지 꼭 올라갔다. 대학로나 창덕궁이 메인일 때는 역시 북촌이나 동대문(동촌)일대를 걸어다녔다. 거기다 한양도성 둘레길을 클리어 한다고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 흥인지문에서 숭례문까지, 그리고 정동 산책하며 돈의문(터)까지. 아주 그냥 열씸히 걸어다녔다. 어라? 이렇게 보니 내 두 다리로 한양도성 4대문을 다 찍었네? 어머나 세상에ㅋㅋㅋㅋ. 그래서 내 다리가 이렇게 튼실해졌나 흑흑.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타난 수성동계곡을 보면 중간쯤에 다리가 하나 있다. 기린교다.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다가 이 다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파트를 철거할 당시 생태공원을 조성하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수성동계곡을 복원했다. 현재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보존된 다리라고 한다. p 057



서촌을 처음 걸었을 때, 튼튼한 두 다리에 의존하여 이상의 집을 지나, 박노수 미술관도 지나고, 윤동수 하숙집도 지나서, 수성동 계곡까지 걸어 올라갔다. 한참 뒤에 또 다시 서촌을 찾았을 땐, 자본의 힘을 빌려(ㅋㅋㅋㅋ) 버스를 타고 석파정까지 갔다. 또 그 다음엔 통인시장 일대를 돌아다녔다. 서촌의 수많은 장소 중에서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는 곳은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이 그렸던 그림속의 계곡이, 눈 앞에 그대로 있다는게 너무 신기했었다. 심지어, 수성동 계곡 복원 과정도 신기했다.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기린교를 발견한 거나, 기존에 공원 조성할 계획을 취소하고 계곡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거나. 당시 책임자가 누구였는진 모르겠지만, 정말 훌륭하고 탁월한 선택!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곳을 찍으라면 역시나 석파정이 아닐까. 엄밀히 따지만 석파정은 경복궁의 북서쪽에 위치한,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다. 정확히는 안동 김씨의 소유였는데, 머리 좀 굴린 흥선대원군이 왕이 된 아들 고종을 이용하여 빼앗은 건 유명한 이야기. 뭐 여튼! 석파정은 경치가 정말 빼어난 한옥이다. 우리 한옥들은 정원을 조성할 때, 차경을 이용했다. 그만큼 한옥과 자연 그대로의 조화를 중시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와. 석파정을 보면 이건 뭐 자연속에 그대로 들어온 것 같다. 석파정이 인왕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한건지, 아니면 인왕산이 석파정을 산의 조화를 위해 이용한건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포목시장이 형성되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채소시장이 형성되는 등 흥인지문과 동대문 시장은 우리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변해왔다. 동대문시장과 흥인지문에 또 한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일제강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5만 5,000원을 들여서 2만 5,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성운동장을 만든다.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허문 성곽 석재는 남촌 일본인 주거지역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1925년 10월 15일 경성운동장 개장식과 함께 조선신궁에 신상일 안치하는 ‘조선신궁 진좌제’도 거행한다.군사적 지배에 이어서 종교적 지배를 단행한 현장 역시 동대문이다. p 090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서울운동장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차지하려고 하는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었고 (중략) 1985년 잠실운동장은 올림픽주경기장이 되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이 된다. p 091



동대문운동장이 떠난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돌아왔다. 포목시장이었던 역사성을 살리면서도 21세기를 선도할 수 있는 멋진 곳으로 거듭났다. p 092



책에서 동촌이라 말하는 동대문 일대. 내 기억속의 동대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일명 DDP다. 그 이전에는 동대문 운동장이었고, 또 그 이전에는 서울운동장, 또또 그 이전에는 경성운동장이었던 그 곳이다. 하지만 내 기억속에는 DDP. 내가 어릴 적 동대문 운동장이었던 시절도 있었겠으나, 어린 나에게는 전혀 관심밖에 것이었고, 동대문 운동장이 철거되었을 때도 역시나 어린 나에게는 관심밖의 것이었다. 그러다 2013년, 옛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신기한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게 바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DDP였다. 어쩌면 옛 동대문 운동장 처럼 내 관심 밖이었을지도 몰랐을 DDP는, 첫 개관 이벤트로써 유치한 전시가 있었으니, 바로 ‘간송미술전’. 간송전 때문에 나는 DDP를 알게되었고, 간송전은 주말에 나를 DDP로 향하게 만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한 나라가 저급한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은 꼭 독립한다.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 문호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 간송이 해야 할 일은 문화보국이다.” p 079



“천학매병 속의 69마리 학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날아올랐다. 불감 속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가 고맙다고 손을 잡았다.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일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 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p 082 (간송 전기작가 이충렬 씀)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이 사재를 털면서까지 외부로 유출될 뻔한 문화재나 화재로 소실될 뻔한 문화재들을 찾아와 보관한 곳이다. 실제로 그 안에는 국보급 문화재, 아니 우리 국보들이 꽤 많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간송이 아니었으면 한글의 원리를 몰랐을 것이며, 고려청자인 상감운학문매병을 못봤을 것이고, 겸재, 혜원, 단원의 그림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간송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이 빈 공백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간송이 끝까지 지켜낸 우리의 보물들을 DDP 첫 개관 이벤트와 함게 전시를 한다니, 이건 내 발길을 DDP로 이끌기에도 충분했다. 






*목포&부산&신안


목포, 부산, 신안편은 앞서 서울 세 편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특히 목포&부산도 저자가 말하는 골목들을 거의 걸어봤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다. 



​1897년 10월 1일 고종 황제는 목포를 개항한다. 부산, 원산, 인천, 경흥 등에 이은 다섯번째 개항이었지만, 외국과 별도로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개항한 첫 번째 칙령개항장이다. p 113



다순구미는 목포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고, 우리네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개항장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백열등을 밝혔고, 보란 듯 한껏 뽐을 내는 고관대작의 집은 아니지만 고단한 하루를 마치면서 지친 몸 편안하게 누이던 보금자리다. 이곳이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 없어지는 것 같고 목포의 뿌리가 뽑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이곳에까지 기어이 아파트를 지어야 하겠는가! p 121



목포의 근대사는 유달산을 기점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목표편 역시 유달산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달산에서 목포근대역사관, 다순구미, 이훈동가 정원 등 유달산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일제강점기 때 유달산이 어떻게 일제에 유린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웠달까.



​그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장기려 박사는 대안을 모색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다. 대공황기 미국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모델로 해서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조합원으로 첫 출범했다. 담뱃값이 100원이던 시절에 한 달 의료보험료 60원을 받고 조합원 진료비 40퍼센트 할인, 30퍼센트 보험료, 나머지 30퍼센트 본인 부담 방식으로 사실상의 무료진료를 이어갔다. 1975년 8월 4일에는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직영병원 청십자병원을 설립했고, 1976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로 개편했다.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하루 전날인 1989년 6월 30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p 159



부산은 우리 근대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으로 넘어가는 제일 가까운 도시이자, 해방 후 한국 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이기도 했던 도시다. 인천만큼이나 근대사에서는 절대 빼 놓을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도시가 부산이다. 다만, 정말 이야깃거리가 방대해서 그랬을까. 내가 생각하던 부분은 거의 생략되어 있었다. 대신 부산에 있던 의사 장기려 선생. 환자만 생각했던 바보의사 장기려. 우리나라 최초 의료보험을 만들었던 장기려 선생에 대한 내용이 풍부했다. 아마도 저자는 한정된 지면에, 한정된 이야기를 해야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은 그런 이야기를 지면에 실은게 아닐까? 즉 저자의 선택과 집중!



하지만 신안편은.... 아무리 저자의 선택과 집중이라지만 너무 특정 종교와 특정인물에 치우쳐져 있어서 정말 많이 아쉬웠다. 내가 신안에 대해 잘 몰랐다면, 신안에는 정말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전에 대한민국 도슨트 신안편을 읽었었기에, 신안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였기에, 신안편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특정 종교 및 특정 인물의 이야기는 좀. 신안에는 우리 근대사에 이름 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독립운동가 이야기도 있는데 말이다 ..ㅜㅜ..






전체적으로 신안편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지역은 전부 다녀보았던 곳이라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그 광경들이 떠올라서 너무 좋았다. 분명 집에서 읽었지만, 집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이 느낌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 오랜만에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역사나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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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음, 최용주 옮김, 로빈 모이어 사진 / 한림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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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그 날, 광주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하여 선교사들, 그리고 평화봉사단 의사들. 이들 중 한 사람,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의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폴 코트라이트. 그는 뒤늦게나마 광주에서 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을 출간한 최용주님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P 232



작년 겨울, 난 광주에서 5.18의 흔적을 따라 돌아다녔더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당시 들렀던 장소들, 당시 보았던 사진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얼마전 광주법정에 참석한 전두환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을 계속 부인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비롯하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건지. 시민학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왜 아직도 떵떵거리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는건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때로는 환자들의 수술을 위하여. 환자들과 함께 순천의 병원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일그러진 외모로 인해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나, 순천에 있는 병원을 가려면 밖에 나가는 건 당연하고 버스도 수차례 타야했다.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 033



아, 폴 코트라이트, 그러니까 저자는 정말 환자을 생각하는 참된 의사였다. 이런 사람이 40년 전 그날, 광주에 방문하게 된 건, 순전히 나병 환자들 수술을 위해 순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나주에서 순천까지 가는 버스는 광주 터미널을 경유했다. 5월 19일, 그는 환자들과 순천까지 가는 길에 광주 터미널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참상을 마주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P 056 (5월 19일)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 057 (5월 19일)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P 063 (5월 19일)



저자가 광주를 들렀던건 5월 19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행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시 광주의 상황은 이러했다.



5월 18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금남로,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시위대 진압을 실시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눈 앞에 있는 시민들은 전부 짓밟혔고, 맞았고, 죽어나갔다. 폴이 광주에 들렀던 5월 19일에는 11 공수여단이 추가로 증파되어 더 많은 광주시민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P 070 (5월 20일)



폴을 향한 할머니의 슬픔어린 이 말은, 폴이 회고록을 쓰고자 한 이유였다. 그렇게 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폴에게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P 085 (5월 21일)



폴은 외국인이라는 무기를 방패삼아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물론 광주 밖을 나오는 교통편은 끊긴지 오래였고, 모든 길목마다 군인들이 검문중이었지만. 5월 21일, 이날은 신군부가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한 날이다. 요지는 단순했다.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불순분자들이 바로 빨갱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날 공수부대에게 발포명령을 내리며 실탄을 지급했다.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P 097 (5월 22일)



광주를 짓밟았던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외곽에서 광주 진출입로를 원천 봉쇄하며, 이 곳을 지나려하는 시민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폴이 이 도로를 지나 광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P 105 (5월 22일)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P 113 (5월 23일)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P 124 (5월 23일)



폴을 비롯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브, 팀, 주디. 그들은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심지어 자국,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에도 분노를 표했다. 아마 이때부터 이들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광주에 들어온 또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 기자들을 만나자고.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P 134 (5월 24일)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P 136 (5월 24일)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P 146 (5월 24일)



폴 일행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렸고, 광주시민들과의 통역도 맡았다. 최대한 사실 그대로 독일기자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폴 역시 상상하지 못할 참상을 계속해서 마주했으나, 그럴 수록 폴의 마음속에는 더욱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만 불타오를 뿐이었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어난, 이 참극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팀은 계속해서 독일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폴은 광주를 떠나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알리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푸른 눈의 외국인이어도 광주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졌기에, 폴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인적없는 산을 넘어, 광주를 벗어나 나주까지 왔다. 본인의 ‘원래’ 근무지였던 나주 호혜원으로.




물론 나주에서도 서울까지 나오는 길은 힘들었다. 군인들은 광주 뿐만 아니라 전남의 길목을 막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광주보다는 덜 했는지, ‘푸른 눈의 미국인’이라는 무기로 겨우 겨우 서울까지 올라왔다.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구나 싶었던 폴이었다.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P 178 (5월 26일)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P 182, 에필로그



폴을 비롯한 평화봉사단원이 ‘설마?’하고 의심했던 그 생각. 아니었길 바랬던 그 생각은 나중에야 사실로 밝혀졌다. 미국의 비밀해제 문건 중 미국이 신 군부의 무력진압을 용인한 내용이 남긴 문서들이 속속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폴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미국이 묵인했으리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릴 그 때를 기다렸고, 바로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을 했기에 이 회고록을 출간한 것이리라.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작년 겨울에 포스팅을 했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댓글들이 달린다. 포스팅을 했던 당시에는 그런 논란 댓글들은 바로 삭제했었는데, 이제는 삭제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앞서 제주 4.3항쟁에 관련된 포스팅에도 위와 비슷한 덧글들이 아주 자주 달리고 있다. 이런 덧글들의 공통점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과, 정부군에 학살된 피해자들을 ‘폭동, 폭도, 빨갱이’라고 지칭한다. 전두환이 발표했던 ‘광주사태 담화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독재 군사정권을 찬양하는 그런 사람들. 지금까지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미국을 찬양하고, 성조기를 흔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인이 쓴 이 회고록을 어떻게 바라볼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포스팅에도 위와 같은 논란을 일으키는 덧글들이 달리겠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말 좋아하는 미국인 조차도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의해 일어난 학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일이 빨갱이가 일으킨 폭동인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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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사냥꾼 - 집착과 욕망 그리고 지구 최고의 전리품을 얻기 위한 모험
페이지 윌리엄스 지음, 전행선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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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방사수하는 TV 프로그램 중 JTBC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방송이 있다. 이 방송에서 얼마전에 다뤘던 주제가 바로 ‘공룡’이었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봤는데, 세상에나. 차클로 공룡에 대한 호기심이 뿜뿜하는 상황에서, 흐름출판에서 출간 된 『공룡사냥꾼』 이라는 책을 읽을 기회가 주어졌다. ‘공룡’을 주제로 하는 책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책에 대한 기대감도 뿜뿜!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룡화석을 훔진 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한 남성’이다(심지어 논픽션, 실화!!). 여기서 중요한 사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정말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그저 공룡화석을 훔진 한 남성의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공룡 화석’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밀수·박물관·수집·화석 등을 시작해서, 전혀 연관이 없을 것만 같은 자본주의·민주주의·냉전시대·중국 천안문사태·할리우드·몽골의 정책, 거기다 경매와 행정적 규제까지. 와, 이건 정말 생각치도 못했던 부분들이 자꾸 등장해서, 집중력이나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화석사냥꾼으로 살아온 에릭, 그는 어릴 때부터 화석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아주 어릴 적 해변가에서 오래된 상어 이빨을 발견했을때, 이미 그때부터 에릭의 미래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릭은 명실공히 성공한 화석사냥꾼이 되었다. 그는 고생물학과 관련된 전문적인 길로 들어가 책상머리에 앉아있는게 아닌, 현장에 나가서 직접 발굴하고 만지는 것을 원했고, 그에 부합하는 직업이 바로 화석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에릭은 자기의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학계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 인류 역사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 말이다. 그래서 에릭은 발굴한 화석을 박물관에 대여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에릭은 그가 파낸 프룩스빌 화석 일부를 박물관에 대여했고, 1년 후에 그가 대여품을 찾으러 갔을 때, 그 물품에는 등록 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가 발견한 표본 하나는 다른 직업 사냥꾼 앞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에릭은 FMNH 과학자들이 그를 심각하게 위법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브룩스빌 현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에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에릭은 분노했다. P 102



화석사냥꾼이란, 화석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고생물학자같은 부류가 아니다. 말그대로 화석을 발굴한 뒤, 멋지게 복원하여 타인에게 파는 것. 화석발굴&화석판매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화석사냥꾼들을 향한 학계의 시선은 비판적이다. 화석을 연구가 아닌 상업적인 이유로 판매하는 것이나, 비과학적인 조건에서 수집하는 점, 불법적으로 발굴해서 소유하고 있는 점 등을 지적한다. 반면 화석사냥꾼들은 그런 학계에 이렇게 말한다. 화석사냥꾼이 발견한 화석 덕분에 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 것이며, 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것 이라고.



화석사냥꾼들이 화석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에 제일 분노하는 학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들 역시 화석을 ‘구매’한다. 그것도 화석사냥꾼들에게서. 본인들이 제일 극혐하는 ‘화석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석사냥꾼들을 비판을 하는게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었으면, 본인들 역시 상업적으로 구매하지 말아야 했다. 스스로 현장에 나가서 화석을 발굴하는게 옳았다. 하지만 그런 땀흘리는 행동은 하지 않고, 그저 화석사냥꾼들이 발굴한 화석을 ‘구매’하면서, 그러한 행위를 비판하는 모순. 적어도 ‘화석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유로 화석사냥꾼을 비판할 권리가, 현장에 나가지 않고, 직접 발굴하지 않는,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학자들에겐 없는게 아닐까.



 적어도 이 책에서 나온 몇몇 화석사냥꾼들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타인이 발굴한 화석을 구매하여 연구하는 학자들보다 더욱 고생물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화석사냥꾼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에릭을 비롯한 여러 화석사냥꾼들처럼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거나, 밀수도 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 맞으니까. 다만 한가지 면만 보고 화석사냥꾼은 범죄를 저지르고, 학자들은 연구를 한다고 보는 관점은 조금 위험하다고나 할까? 이런 상황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화석들이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상황을 만든, 자본주의가 만든 이런 사회를 비판해야하는 게 아닐까?



맥도날드사와 월트디즈니가 시카고의 필드 자연박물관에 티라노사우루스 수를 구매해주기 위해 팀을 구성했다. 어느 신문은 시카고가 “‘다 베어스’와 ‘다 불스’에 ‘다 본즈’”를 추가하기 위해 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급하게 될지 궁금해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 대답을 알고 있다. 구매 희망자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가격은 전례없는 엄청난 금액인 836만 달러에 이르렀다. 윌리엄스는 세금을 대답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760만달러에 팔기로 했다. 나중에 스미스소니언의 커크존슨은 “그들이 수(티라노사우루스 수;공룡 뼈 화석)를 판매한 그날부터 화석은 돈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P 099



많은 공룡 뼈 화석이 발견되는 미국, 자본주의의 대표국인 미국에서는 사유지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개인이 직접 수집, 판매가 가능했다. 그래서 에릭같은 사람들이 생업으로 화석사냥꾼을 할 수가 있었다. 말 그대로 사회가 허용했기 때문에. 문제는 미국이 아닌 나라, 몽고였다. 뜬금없이 왜 몽고냐고 하면, 몽고 고비사막에서 공룡 뼈 화석들이 왕왕 나왔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이 책에서 주요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공룡 화석 ‘티라노사우루스 바타르’ 일명  T.바타르도 있었다.



미국 답사 대원들은 곧 고비사막이 3년간 연장 가능한 답사 계약을 맺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유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굴한 화석은 몽골의 재산이지만 연구를 위해 뉴욕에 가져갈 수 있다는 조항에 모두가 동의했다. P 216



몽골에서는 공룡 화석등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가 없었기에, 에릭을 포함한 많은 화석사냥꾼들이 몽골의 화석을 미국으로 들여오곤 했다. 물론 이게 또 완전 합법은 아니고, 흔히 말하듯 교묘하게, 우회적으로 들여온 것이다. 말 그대로 밀수라고나 할까? 합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법도 아닌, 하지만 그래도 뭔가 뒤가 구린? 뭐라고 규정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랄까. 이렇게 밀수인듯 아닌듯 애매한 부분을 몽골의 대통령 엘베그도로지가 지적했다.



“몽골 대통령은 몽골의 재산일지도 모를 T-렉스 화석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P 308



언뜻 보면, 자국의 문화유산의 밀수를 우려한 대통령의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실상 아니다. 당시 몽골의 정치 민주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 모든일, 그러니까 엥흐바야르의 수치스러운 체포, 인권에 대한 미국의 훈계, 고착된 부패, 광산업과 관련된 논란, 치솟는 인플레이션, 엘베그도로지의 당이 6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2013년에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력, 일부 서방 외교관들 사이에서 몽골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 등이 T.바타르가 경매에 나가기 직전에 일어난 것이었다. 엘베그도로지에게는 승리가 필요했다. P 335



엄밀히 따지면 공룡 화석의 밀수사건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의 시작은 몽골의 정치권이었다. 그렇다고 에릭이 몽골의 공룡 화석을 미국으로 가지고 와 판매하려고 한 것을 두둔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이 수면위에 올라오게 된 건 자국의 ‘문화유산 보호’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승리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공룡 뼈 화석 밀수(거래? 경매?)는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국 경매에서 판매되려 했던 공룡 뼈였기에, 미국 연방정부도 이 사건에 참전했다. 그렇게 에릭이라는 화석사냥꾼의 인생은 끝이났다(형량은 6개월 징역형) . 이후 에릭 프로코피라는 이름은 국제 화석 밀수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그의 유죄 판결에서 판사는 이런 말을 했다.​



“(에릭)프로코피 씨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따르지 않는 지식 분야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가 그 분야를 따르고 그것을 위해 시장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화석 연구에서 중요합니다. 또한 화석 연구는 지구에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근원에 관해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 점에 있어서 그는 칭찬받아야 합니다. ”


그러나 사회에서는 신뢰와 정직이 중요하다고 판사는 말을 이었다.


“그 점은 프로코피 씨가 평생 종사해온 분야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역사의 희소성으로 먹고살았고, 그 명성에 참여함으로써 실은 그 역사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제공하는 국가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도 자신을 헌신해왔습니다.” P 393




에릭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는 에릭이 밀수를 저질렀을지언정, 그의 행동 결과가 나쁘지많은 았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위에서 화석사냥꾼들이 이야기하던 ‘화석사냥꾼이 발견한 화석 덕분에 학자들이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는 자본주의의 논리처럼, 공룡 화석 역시 학자들이나 박물관, 심지어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까지 이러한 화석들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면 에릭같은 화석사냥꾼도 탄생하지 못했다. 어쩌면 화석사냥꾼인 에릭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일종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는 했다(물론 밀수를 옹호하는 건 절대 아님, 오히려 밀수 극혐!).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 나오는 수 많은 사람 중에서 문화유산으로써의 ‘공룡 화석’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본격적으로 화석사냥꾼 활동을 시작했던 젊었을 적 에릭이나, 1세대 화석사냥꾼인 메리-애닝 정도랄까. 그 외의 사람들, 내지 정부기관은 오로지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때로는 자본주의적으로, 때로는 학술적인 이유로 움직였다. 그래서 뒷맛이 조금은 씁쓸했다. ‘공룡화석’이라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둘러싸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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