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풍경들
이용한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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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이 되었다. 코로나19 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제하면, 삶의 질 혹은 삶의 방식이 정말 어마마하게 바뀌었다. 조금은 어렵고 불편했던 것들이, 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바뀌었다. 조금은 비싼 것들이 값싼 중국산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우리는 편리함과 저렴함에 둘러쌓인 삶을 살고있다.


내가 코흘리개 꼬꼬마시절, 외가와 친가, 양쪽 시골집은 정말 정겨운 옛날 집 그대로였다. 춘천에 있는 친가와 영광에 있는 외가는 전부 그 지방의 특색이 담겨있는 옛집이었다. 아궁이가 있었고, 광이 있었고,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온돌이 있었고, 마루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이든 부모를 위해, 자식들은 ‘편리’한 삶을 선물하였다.

기와가 올라가있던 옛집은 사라졌다. 마루도 없어졌고, 광도 없어졌고, 아궁이도 사라졌다. 많은 추억이 있던 내 시골집은 그렇게 사라졌다.

초가를 없애면서 서민의 주거문화, 세시풍속과 생활문화 또한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p 017

내 어린 기억속의 시골집. 흡사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기와지붕을 얹은 우리 시골집엔 대청마루가 있었다. 마루 위에 앉아서 강아지들과 놀았고, 마루를 뛰어다니다 넘어지기도 하였다. 할머니가 아궁이를 때면 그 옆에서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부채질도 했었다. 집집마다 외양간에서 ‘음메-’하는 소리가 울렸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밤중에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너무 무서워서 항상 할머니, 엄마랑 같이 가곤 했다. 가끔은 요강을 쓰기도 했다. 내가 사는 집과는 전혀 다른 시골집 모습은 어린 나에게 신기한 별천지였다. 내 기억속의 시골집은 그랬다.

시멘트로 지어진 우리집과는 너무 다른 모습. 명절이나 가족행사가 있을 때만 내려갔었던 시골집이기에, 우리집과는 다른 그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신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보는 물건이 많으니 매번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을 해대기도 했다. 우리집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이 가득하기에, 항상 신기했고, 재밌었고, 추억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시골집은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내 기억속에 있는 시골집은 우리동네에서 볼법한, 시멘트로 지은 주택이 되어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가장 많이 쓰이는 시멘트는, 완전히 굳을 때까지 보통 30~50년쯤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오랜시간을 쉴 새 없이 독성물질을 내뿜고 있는 셈이다. 또 도시가 열을 머금어 더워지는 ‘열섬효과’와 빗물이 땅에 스미지 않고 낮은 지대로 쏠려 일어나는 ‘도시홍수’를 일으키는 것도 사실상은 콘크리트 건축이 가져온 피해나 다름없다. p 037

새로 지은 시골집에만 가면 난 항상 코를 훌쩍였다. 워낙에 호흡기관이 예민했던 나였기에,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이런 현상은 몇년이나 지속되었더랬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 내가 시골집만 가면 코를 훌쩍였던 건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이 내뿜는 안좋은 물질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연그대로의 재료로 만들었던 옛 시골집에선 편하게 잘수 있었는데, 새로 지은 시골집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시멘트로 지은 신식주택이 된 시골집. 신식주택으로 지은지도 벌써 십여년을 훌쩍 넘겼다. 신식주택에서는 옛 시골집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기가 어려워졌다. 대청마루, 아궁이, 맷돌 등 추억을 떠올리던 매개체가 사라졌다. 밖에 있던 화장실은 집 안으로 들어왔고, 심지어 한겨울에도 따듯하다.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바뀐 시골집. 내가 사는 집과 다를 바가 없어진 시골집에서의 추억은..... 더이상 없다.

항상 흙냄새, 나무냄새가 나던 시골집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어렸을적 옛 집에서 지냈던 경험이라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런 옛 집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들에게 이런 옛 집과 옛 생활도구는 책이나 TV, 민속박물관이나 한옥마을을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와집이 무엇이고, 너와집이 무엇이고, 초가집이 무엇인지는 책속으로 배울 뿐이다. 아궁이, 요강, 맷돌등도 ‘글자’로만 배운다. 엄연히 우리의 삶에 스며들었던 생활방식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에겐 그저 옛날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갖가지 보일러 시설과 난방기구가 화로를 대신하고 있다. 화로가 우리 곁을 떠나면서 올망졸망 모여 앉은 그 옛날 추억과 정감의 불씨도 더불어 꺼져가고 있다. 몸은 따뜻해졌을지언정 마음은 어쩐지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p 049

옛날 생활방식은 요즘에 비하면 확실히 불편한 점이 많다. 간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도 오래걸린다. 하지만 그만큼 주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오랫동안 같이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 옛날 생활방식이 그랬다. 그때 가족들의 모습은 오순도순, 복작복작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흐른 시간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간단’하고 ‘편리’한 생활방식이 사회를 뒤엎었다. 지금 가족들의 모습은 ‘삭막’하고, 심지어 한 집에서 사는게 맞는지 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단절’되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콘크리트로 올린 아파트에, 스스로 갇혀 살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하고, 우리 엄마도 그러하며, 내 친구들도 그렇다.

편리함만 쫓는 사회는 우리의 생활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사용하기 불편한 옛날 것이 최신식으로 바뀌면서 생활방식이 변화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그 사라지고 생겨난 것들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만, 이 다양한 것들에도 공통점이 있다. 새로 생겨난 것들은 대게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고, 값이 저렴하며, 대체로 중국산이 많다.

이렇게 다양하고 긴요한 쓰임새 때문에 옛날에는 바가지가 깨어져도 태우지 않는 금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쓸모가 많았던 바가지도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플라스틱 바가지와 일회용 그릇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점차 바가지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단출한 초가지붕에 박넝쿨이 얹혀 있는 정겨운 모습도 덩달아 볼 수 없게 되었다. p 117

더구나 최근에는 복조리마저 중국산이 판을 치고 있다. 산청군 중산리 복조리마을에서 만난 이정구 씨에 따르면, 요즘 중국산 복조리가 대량으로 수입되는 바람에 복조리 마을에서 만드는 전통 복조리 값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복조리까지 중국산이 들어와 점령할 줄은 이들도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p 123

그러나 이 두 옷감은 지금 삼베나 모시보다도 훨씬 만나기 어려운 귀한 옷감이 되고 말았다. 기계로 마구 짜내는 면사와 비단에 밀려 베틀에 걸어 짜내던 옛날 방식이 이제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무명은 전남 나주의 ‘샛골나이’란 이름과 경북 성주의 ‘두리실’이란 이름으로 그 명맥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p 153

문제는 요즘 죽부인조차 중국산이 점령했다는 것이다. 중국산은 국내산에 비해 절반 이상 싸게 팔지만, 품질은 몇 배나 떨어진다. 최근에는 비단 죽부인뿐만 아니라 부채나 소쿠리, 대자리까지 중국산이 판을 치고 있다. p 160

많은 사람들이 편리함과 저렴함을 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불편한 옛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존재한다. 누군가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업을 잇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편리한 삶이 힘겨워져서, 다들 갖가지 이유로 옛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하지만 이런 옛 생활방식은 지금에 와서는 반쪽짜리가 되었다.

옛 생활방식은 대부분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짚신, 면옷, 죽부인, 조롱바가지 그 모든 것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가성비를 쫓는 지금, 그 자리는 수 많은 중국산이 점령했다. 우리 손으로 만들면 워낙 오래걸리니, 제품가격이 비싸서 값싼 저품질의 중국산이 그 자리를 꿰찬것이다. 그렇게 우리 삶에는 수 많은 중국산이 점령했다. 끝까지 전통방식을 고수하던 사람들마저도 이 중국산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엄연히 따져보면, 아직 남아있는 종가집들 포함해도 우리의 옛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집은 없을 지도 모른다.

개발 앞에서는 모든 옛것이 진부한 것이 되었으며, 모든 자연이 거추장스러운 장애였다. 이런 현실은 지금껏 과거와 현재, 개발과 자연의 행복한 공존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사실상 해방 이후 우리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보수와 진보도 아닌 개발이었던 것이다. 개발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원하는 것을 버튼 하나로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런 세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세상에 이토록 발전했는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건 바로 그때문이다. p 216

우리는 편하게 살기 위해 개발을 택하고, 전통을 져버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나라들이 전통을 지켜가며, 우리보다 더 사회를 발전시킨 모습을 보면, 정말 우리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내가 옛 전통방식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탄식하는 건 어쩌면 모순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흐릿해진 추억이지만, 아직까지도 옛 시골집 기억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시골집에 있었던 성주신, 철륭신, 측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하고, 마을을 지켜준 서낭신은 어디에 숨었는지 궁금해 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어린 날 탔던 비료포대 썰매가 떠오르기도 하고, 빙판길을 보면 시골에서 논에 물을 가둬 빙상을 만들어 앉은뱅이 썰매를 탔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잊혀져가는 추억이 아닌, 다시금 내 앞에 현실로 펼쳐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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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고종 -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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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읽은 마지막 책,


내가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예스24에는 정말 좋은 기능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알림 설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딱 세명의 작가 신간 알림을 신청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박종인 기자님(기자님책은 이제 거의 다 모아가는듯? 뿌듯뿌듯). 그런데 불과 얼마전에 박종인 기자님의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이 온것이다. 늘 책에 둘러쌓여있지만, 이상하게 읽을 책이 없는 상황에 마주했는데. 이건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라며 책 구매를 합리화...ㅋㅋㅋ)! 그러니까 이 책은 정말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이 책의 제목은 「매국노 고종」. 제목부터 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제목을 보고 불편한 심기를 보일지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제목이 정말 딱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선왕조에서 제일 무능한 왕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이 선조와 인조를 꼽을 것이다. 정말 우열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능했던, 많은 백성들을 외적의 손에 도륙되게 만들었던 그 왕들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무능했던, 거기다 선조와 인조 못지않게 백성들을 도륙했던 또 한 명의 왕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게 바로 고종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자(순종은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말이다.

현 정부, 과거 정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국사 교과서에 실린 고종의 모습은 그야말로 ‘개혁군주’다. 개혁군주 고종의 모습은 이렇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 몰래 군자금을 모았다. 이위종, 이상설, 이준을 헤이그 특사로 보냈다. 독립협회를 지원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런 내용들이 잘 버무려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종을 개혁군주로 칭하고, 망국의 왕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 고종을 미화하고 있다.

헤이그 밀사는 바로 이 일본의 야만성을 고발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간 밀사들이었다. 그런데 이위종이 한 이 연설 첫머리는 우리 민족주의적 상식과 많이 다르다. 위 인용문 가운데 ‘(중략)’으로 가려진 부분을 열어보자.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p 015

(우리가 이 대목을 몰랐던 건)이 문장은 고종이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 개혁군주였다는 허황된 신화를 깨뜨릴수 있는 사실, 팩트이기 때문이다. p 016

독립을 위해 헤이그특사를 보냈다던 고종이었다. 독립협회를 지원했다던 고종이었다. 우리는 그렇게만 배웠다.

자신만의 왕정을 위해, 외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협회는 정말 좋은 카드였다. 하지만 독립협회 관민공동회에서 ‘입헌군주제’ 안건이 나왔다.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은 자신만의 왕정을 무너뜨리는 사안이었다. 고종은 본인의 자금과 인력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자신만의 왕정을 위해서.

외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카드 헤이그 특사는 어떠한가. 우린 헤이그 특사로 간 그들이 고종 정권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지 못한 인용문을 들여다보니, 왠걸. 헤이그 특사로 간 그들은, 자신들을 특사로 보낸 고종의 정권을 비판하였다. 고종이 통치하는 조선이 어떠한 나라였는지, 당시 조선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조선을 정탐한 일본인 혼마 규스케의 「조선잡기」에도 아주 적나라하게 나와있다(읽어보면 정말 고구마 오백만개를 먹은 느낌).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반성의 역사로 가르치면 참 좋았겠지만, 반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모르는 (현정부 포함)역대 정부들로 인해, 우리는 입맛에 맞게 선별된 역사만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내용을 모른다.

어쩌면 나 역시 학교에서 배웠듯, TV에서 말하듯 고종을 계속 개혁군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통이 커지면서, 고종시대에 대해 위화감이 생겨났다. 민씨 세력이 그렇게 활개를 치며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 고종은 대체 무얼했을까?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던 민씨 세력은, 바로 고종의 부인인 민비의 세력이었는데, 개혁군주라는 고종은 이걸 그저 보고만 있었던걸까? 분명 그 시대에는 부패하고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민씨세력 말고도, 개화를 하고자 했던 개화세력도 있었는데 왜 고종은 굳이 민씨 세력을 옆에두고 개화세력은 모른척했을까? 도저히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불쌍한 백성들이었는데, 왜 고종은 외국 군대까지 불러들여가며 학살했을까? 등등.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 실상을 알게된 순간, 지금까지 내가 배운 것은 그저 입맛대로 선택되고, 때로는 미화된 매우 ‘단편적이고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랍지 않은가. 망국의 원인은 분명 고종에게도 있는데,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친일파 내지는 세도정치를 자행한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만 욕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배운 고종은 언제나 망한 나라의 가엾은 왕, 개혁을 하려했으나 외세에 억눌려 결국 실패한 왕이었다.

조선은 국가였나. 고종은 그 국가의 지도자였나. 실질적으로 조선 왕국 최후 지도자로서 그는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가. 앞으로 부국과 강병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고종의 행적을 알아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 고종은 매국노다. p 013

고종이 왕위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궁궐의 제일 큰 어른이었던 조대비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당시 이하응은 왕족이었으나 왕족이 아니었다. 노론 안동 김씨가 좌우하는 그 시기를 살아오며,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바보’를 연기했던 사람이다. 바보를 연기하며 그는 삼정이 문란하여,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았다. 죽은자에게도 세금을 물렸고, 어린아이에게도 세금을 물렸다. 이하응은 그렇게 자기 뱃속만 채우는 노론 안동김씨 세력의 가렴주구한 행태를 보아왔다. 속으로 이를 갈고도 남았음이 틀림없다.

그 이하응이 조대비와 결탁하여, 자신의 둘째아들 이재황을 조선의 26대 왕으로 만들었다. 왕이 된 이재황은 어리다는 이유로 조대비가 수렴첨정을 했으나, 조대비 뒤에는 그의 부친 이하응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하응, 즉 흥선대원군의 세상이 되었다. 속으로 이를 갈던 흥선대원군은 망국으로 쓰려져가는 조선을 건져올리는 개혁을 시작했다.

왕권을 무시하는 노론 집단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원군이 날린 직격탄이 만동묘 철폐와 서원 철폐였다. p 042

인사부터 세금까지, 국가자원이 사적으로 낭비되던 기존 사회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정치권 내부에서는 인조반정 이래 250년 만에 처음으로 노론 독재가 무너지고 다양한 인재가 인력풀로 흘러들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문신 지시를 따라야 했던 장군들이 국가 의사결정 과정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북벌을 기획한 효종 이래 처음으로 부국강병책이 정책 차원에서 입안돼 진행되기 시작했다.

백성을 영혼까지 괴롭혔던 세금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대원군 정권은 조선왕조 역대 정권 최초로 양반 계급의 세제 특혜를 회수해 일반 서민에게만 부과되던 납세 의무를 양반계급으로 확대했다. 임진왜란 후 누적된 내부 모순을 정권 스스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p 049

우선 비정상이 정상이었던 시스템을 뜯어 고쳤다. 세도정치의 주된 세력인 노론을 와해시키기 위해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했다. 만동묘는 노론의 자존심이오, 서원은 노론의 지지세력이다. 노론이 쥐고 있던 인사권을 무너뜨려, 노론독재를 막고, 남인, 북인도 등용하였으며, 국방강화를 위하여 무신의 지위도 상승시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백성을 힘들게했던 세금제도를 싹 정비했다. 심지어 양반에게도 세금을 걷었다.

어쩌면 이때야말로 조선이 서양의 여느 나라처럼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바로 이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조선 왕국은 대량살상무기를 대량으로 적재한 군함이 대량으로몰려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고종정권 또한 조선을 에워싸고 벌어지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감에 대한 대책은 청나라 같은 개방정책이 아니라 한층 더 강화된 ‘쇄국’이었다. p 031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는 말은 청빈한 공무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는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될 말이다. 국가지도자라면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자 국가 ‘가오’를 앞세울 권리는 없다. 대원군은 그랬다. 가난한 나라 최고지도자로서 대원군은 가오를 택했다. p052

흥선대원군은 실책을 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경복궁 중건’, 그리고 ‘쇄국’이다. 경복궁 중건을 하기 위해 당백전을 마구잡이로 찍어내어, 조선의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는 폭락했다. 외국 범선들이 조선을 왔을 때, 개방이 아닌 ‘쇄국’을 택하여 결과적으로 많은 피를 부르는 한 수를 두었다.

동시대 일본은 외국 범선이 왔을 때, 외국의 발전된 사회를 알았고 개방을 했다. 무작정 개방을 한게 아니라, 외국의 문화를 수용할건 수용하고 자국의 문화를 지킬건 지키는 등의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하지만 조선은 건국때부터 5백년간 이어져온 그놈의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 함몰되어있었다. 주자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에서 서양문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인가? 그런 조선에서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 수 있는 상업과 과학은 천하디 천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만인의 어버이가 되어야 할 왕과 사대부라는 것들은 끊임없이 명나라를 부르짖었다. 백성들이 배곯아 죽어가든, 과한 세금으로 죽어가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나라가 조선이었다.

결국 흥선대원군도 그러한 조선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회를 개혁한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를 위함인 것이다. 개혁을 시작함에 있어서, 민생안전보다 왕권강화가 우선이었기에. 결국 흥선대원군의 이런 실책은, 그 자신을 몰락시키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철렴과 비공식적인 친정 선언까지 7년 9개월 동안 권력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그가 바로 대원군이다. 만 8년 가까이 고종은 허수아비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대원군은 ‘함여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재야 시절 목격하고 들었던 망국 일보 직전 나라 꼬라지를 갈아 엎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경복궁 공사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이에 따른 경제난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결정적인 무기로 작용했다. 권력욕에 불타던 아들 고종은 그 노론과 연합해 마침내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다.p 074

흥선대원군이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실책을 본 아들이었으니,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점은 버리면 될일이었다. 고종이 벽수가 아닌 이상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테니, 세계 정세에 발맞춰 조선을 바꿔가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고종은 더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어도 ‘민생안정’이라는 개념이 있기라도 했지, 아들 고종에게는 그것조차 없었다. 고종의 머릿속에 있던건 오로지 자기의 명예와 안위였다.

1874년 6월 20일 고종을 친위하는 궁궐 수비대, 무위소가 공식 출범했다. p 088

무위소는 한성에 흐르는 각 개천 준설공사를 주관하고, 돈을 발행하고, 군수품 제작용 대나무와 쌀, 돈, 나무, 옷감 상납을 관리하는 비군사적 행정에까지 개입해 그 관리들을 처벌하는 권한까지 행사했다. (중략) 영의정 이유원과 우의정 박규수가 의심했던대로, ‘맡지 않은 직임이 없고 기행하지 않는 일이 없는’ 괴물을 고종은 단독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p 092

고종은 본인의 친위대 ‘무위소’를 만들었다. 그 무위소에 고종은 막강한 권한과 막강한 권력을 주었다. 분명 고종의 친위부대로 만든 조직인데, 이 조직은 각종 행정/군사/형사 모든 일에 권한을 휘둘렀다. 각 분야별로 그에 맡는 전문가 집단이 있었으나 있지않았다. 모든 일을 권력을 등에 업은 무위소가 진행하니, 힘없는 전문가 집단이 무슨 힘으로 일을 하겠는가. 무위소는 그야말로 고종 본인만을 위한, 자기의 왕권 강화를 위한, 무소불위의 조직이었다.

도성 문세를 비롯해 각종 세금을 일거에 탕감하거나 제도 자체를 없애면서 재정은 더욱 힘들어졌다. 대원군이 그 세금을 신설한 이유는 강병이었다. 특히 강화도 병력과 무기 증강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조선은 사용처는 있는데 사용할 돈은 없는 막장 조세 행정국가로 전락했다. 그 재정을 메꾸기 위해 지방에서는 각종 잡세를 신설해 거둬들였다. p 115

나라가 파산 일보 직전에 있는데 그 고종이 한 동안 중단했던 경복궁 중건공사를 재게하겠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영의정이 말했다.

“현 재정 상태가 매우 궁핍하여 경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종의 대답은, 과연 고종다운 걸작이었다.

“경비를 의정부에서 알아서 조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을 해나가겠는가”

공사는 자기가 명령하겠으니, 그 비용은 삼정승이 알아서 조달하라는 뜻이다. p 117

고종은 조선 경제에도 많은 타격을 입혔다. 그동안 조선에서 유통되던 청전을 폐지하였다. 국고에 있던 청전은 쓰레기가 되었다. 국가 예산으로 모아둔 돈이 순식간에 한낱 쇠붙이로 전락했다. 고종은 하고 싶은게 참 많은 왕이었다. 헌데 본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국고가 텅 비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돈은 신하들이 채워야하고, 백성들이 채우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고종이었다(현정부 포함 역대 정권에서 뭔가를 저지르고, 세금을 미친듯이 올려받는 모습이 오버랩된다면, 당신은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이다).

고종은 경제와 재정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벌인 언행에는 무능과 무식보다 더 심각한 이기심과 탐욕이 읽힌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작은 그림에 열중해 공동체를 위한 큰 그림을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는. 불행하게도, 그 정책 방향과 무책임과 이기심은 망국의 그날까지 스케일을 업그레이드하며 증폭됐다. 고종은 무능력한 지도자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는 사악한 지도자였다. p 120

우리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여, 조선이 피폐해졌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후에 고종이 다시 경복궁을 중건, 심지어 확장보수까지 한 사실을 배우지 않았다. 경운궁 중건도 배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평양에 360칸 궁궐을 짓는 공사를 진행한것조차 배우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실책이라 배웠고, 그래서 백성들이 고통받았다고 배웠는데, 그럼 고종이 한 행동은 뭘까? 본인이 말한 조세개혁으로 나라의 곳간은 비웠는데, 어마무시한 궁궐, 토목공사를 진행했다. 나라에 돈은 없는데, 그 막대한 공사비용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유원은 “최근 신문고를 치는 사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며 백성들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고 고종에게 우회적으로 눈치를 줬다. 그러자 고종이 말했다.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p 087

고종이 저지르는 수많은 일들을 위해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가니, 백성들이 살기 어렵다고 신문고를 치는 횟수가 잦았다. 이런 상황을 본 고종이 한 말은 가관이었다. 대궐문을 엄중히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백성을 지켜야 할 한 나라의 왕이 한 말이다. 왜 백성들이 신문고를 칠수밖에 없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뿐이랴? 심지어 고종은 살기 힘들다고 죽창들고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서양에서 수입한 개틀링건을 무참히 쏘아댄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부른 사람이다. 그 청나라군대를 뒤따라온 일본군도 뒷짐지고 바라본 사람이다.

조선의 백성을 지켜야할 조선의 군대가 조선의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고, 청나라 군대가 동학군을 죽이고, 일본군이 동학군이 죽이는 모습을 고종은 그저 바라보았다. 오히려 자기에게 반기를 든, 역적 동학군을 빨리 토벌하길 바라던 사람이다.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자기가 보호해야할 자국의 백성들을 토벌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로 모잘라서 외국군대까지 불러와 학살한 사람이다. 애초에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정말 만인의 어버이라는 왕이 맞았을까?

왕이 부정을 저지르면 신하된 자들은 어떻게든 바른 길로 인도해야하거늘, 고종 곁에는 고종과 함께 백성들의 피고름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바로 민비와 여흥 민씨일족이다.

나라가 거덜이 났는데, 저 황제는 무슨 생각으로 ‘대대로 충정을 돈독히 해 온’ 자기 사돈 집안에 국정을 맡길 궁리를 했다는 말인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개혁파가 득실대고 있는데, 고종은 그들을 외면하고 자기 혀와 같은 척족을 자기 옆에 앉히려고 애원을 하고 있었다. p 126

민씨 세력은 1885년 고종이 설치한 ‘내무부’시대가 되면서 급증했다. 내무부 수장인 독판은 민병석, 민응식, 민영상, 민영준, 민영소, 민두호, 민영환등이었다. 1880년대 중앙과 지방관직에 진출한 민씨는 260명 정도였다. 이들 민씨는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의정부가 아니라 국왕 고종이 중비(특채)를 통해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p 135

서양문물을 보고 배운 개화세력이 있었음에도, 고종은 민씨일족을 등용했다. 세계정세를 바로 보고, 민생을 생각하는 올바른 군주라면 개화세력이나, 제대로 정치를 하는 관리들을 옆에 뒀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직접 민씨들을 불러와 사회 곳곳에 배치했다. 주변에 인재가 없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민비의 일족인 민씨들을 끌여들어 사회 곳곳에 배치했다. 그렇게 사회 곳곳에 스며든 민씨들은 안동김씨보다 더할 정도로 백성들을 수탈하였고, 매관매직을 밥먹듯이 하였다. 이렇게 부정부패, 매관매직을 일삼던 민씨들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일본의 은사금을 받는 친일파가 되었다.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은 감시될 수 없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 부패를 유지하기 위하여, 독점된 권력은 변혁을 거부하고 현상 유지를 택한다. 권력을 사유화하면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민씨 척족 정권이 그러했다. p 138

고종과 민씨 척족들의 연합. 고종의 만행만으로도 민생이 죽어갔는데, 민씨척족까지 가세하니 조선은 망국행 특급열차에 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외부 한켠에 북묘비가 서있는데, 그 비석에는 우리가 모르는 고종과 민비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이야기속에 있는 고종과 민비는 한심 그 자체였다. 고종은 민비와 함께 무당 진령군에게 빠져있었다. ‘진령군’이라는 군호도 고종이 내린 것이니, 얼마나 이 무당을 믿었는지는 두말 하면 입아프다. 궁 한복판에서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 2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천냥, 무명 한필 씩 바치기도 했다. 백성들은 세금내느라 본인들 먹을게 없어 죽어가는데, 고종은 그 백성들에게 거둔 세금을 무당에게 몽땅 가져다주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을때까지, 고종과 민비는 무당 치마폭에 있었다.

고종과 민비가 무당에게 이토록 빠져있을때, 조선의 관리들은 뭘했을까? 당연히 “아니되옵니다” 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왔다. 하지만..

진령군을 참수하라는 안효제 상소를 ‘화를 내며’ 거부한 사람도 이 민영휘였다. 민영휘는 1889년과 1890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며 가혹한 세금으로 악명을 떨쳤다.

p 155

진령군을 탄핵하는 상소에 민씨 척족들이 맞섰다. 이쯤되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관리들이라 할지라도, 비정상의 정상화에 짓눌려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은 그렇게 망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웠던, 외세와 맞서기 위해 자주적인 황제국을 선포했던 그 유명한 ‘광무개혁’도 보자. 우리는 스스로 자주독립을 지켜나가고, 최초의 헌법을 반포한 이 광무개혁을 빛나는 역사로 배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도 독립협회나, 헤이그 특사만큼이나 반전이 숨어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그날, 우리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반포되었다. 총 9개 항복으로 이루어진 이 헌법의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게도, 백성을 위한 내용이 단 한개도 없다. 요컨데 이 헌법의 내용은 대한제국은 전제정치로 이뤄지며, 모든 권한은 황제에게 있고,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는 내용이다. 왕정이 대세였던 중세라면 모르겠지만, 이때는 이미 공화정이 대두되는 시대였고, 인권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서양에선 전기를 쓰고, 지하철이 다니는 그런 시대였다. 하지만 고종이 다스리는 조선은...? 곧죽어도 왕정이었다.

고종은 정말 개혁군주이고, 불쌍하디 불쌍한 망국의 왕이 맞는걸까?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만으로도 고종은 조선의 왕이 아니었고, 개혁군주도 아니었으며, 불쌍하디 불쌍한 망국의 왕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명예, 부를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이다.

완벽한 정책은 없다. 완벽한 개인도 없다. 완벽한 권력도 없다. 정책 오류를 즉각 시인하고 대안을 준비하면, 그 권력은 장구하다. 진화하는 것이다. 권력의 진화와 함께 권력을 떠받치는 공동체 또한 진화한다. 완벽하지 않는 정책, 하물며 엉터리 정책을 끝까지 폐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면 공동체는 붕괴되고, 그 권력에 반기를 든다. p 102

고종의 행태를 보면 현 정권을 포함하여 역대 정권에서 자행한 대책없는 수많은 정책들이 보인다. 대책없는 그 정책들은 언제나 국민들을 수렁에 빠뜨렸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그렇다. 아주 소오름 돋게도 이 부동산 정책에 속앓이했던게 바로 나다. 몇년을 전세살다가 청약된 아파트로 이사가려 했더니, 바뀐 대출정책으로 전세자금대출조차도 1주택으로 보기 때문에, 주담대가 일정액 이상으로는 힘들다는 은행의 이야기. 전세라는게 내 집이 아니라, 남의 집에 얹혀사는건데 그 전세대출이 1주택이라니. 은행 상담사도 어이없어서 웃고, 듣는 나도 어이없어서 웃고. 결국엔 다른 여러 은행 상담을 받아, 겨우 주담대를 받아 이사를 갈 수 있었다. 난 다행히 운좋게 풀린 케이스. 결과적으로 현 정권이 만들어낸 부동산 정책은 집값에 최소 50%은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마음 편하게 이사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아니 근데, 나는 서민인데? 부동산정책은 서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나. 하 어이없ㅋㅋ). 뭐 여기까지는 지금을 사는 서민의 흔한 TMI(난 무엇을 위해 투표를 했나....).

뭐, 여튼! 한 정권에서 정책 헛발질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은 언제나 국민의 몫이었다. 무수히 많은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변치않은 사실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 책의 주인공인 고종이다. 그런데! 왜!! 어째서 !!! 현정권 포함 역대 정권들은 고종을 개혁군주로 미화하고 포장한단 말인가. 그래서 역대정권들이 이런 고종을 본받아서 계속 정책 헛발질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국민들을 도탄에 빠트리는 것일까. 하. 어차피 어떤 정권이든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게 한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큰 정부가 아닌 작은 정부가 나은건 아닐까 싶고. 대체 정부라는게 왜 있는건가 싶고. 올 한해는 유독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

래!

서!

우리는 반성의 역사를 배워야하는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류성룡이 「징비록」을 왜 썼는지 모르는 걸까? 수많은 매체에서 「징비록」에 대해 그렇게 다뤘는데도 이런 사회라니. 참으로 슬플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하게 반성의 역사를 알려주는 박종인 기자님의 글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적어도 나에겐 기자님이 쓰시는 글은 현대판 징비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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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20-12-30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종비판론자중하나입니다 명성황후와더불어 망국적상황을 포장하고자 과대평가되었다봅니다 그들에겐 무려 40년이상의시간있었습니다 망국으로부터요 최고권력자이자 최종결정권자로 면책이 어렵다봅니다 나라가아닌 황실만을 생각한면도 꽤크구요

피로 2020-12-31 11:40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른 매국노들은 계속 기억되고, 계속 배우는데 말이죠. 유독 고종만 동정론에 휩싸인다는게 참 어이가 없을 따름이에요..

거꾸로 2020-12-31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책이 왜 이제서야 나오는가 !

피로 2021-01-06 07:42   좋아요 0 | URL
이제 이런 책들이 많이 발매되길 기대하고 있답니다.
 
연봉이 쑥쑥 오르는 이직의 기술 - 몸값 제대로 받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프로 이직러의 커리어 수업
김영종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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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사에서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을 꾹꾹 채우며, 계속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 있다. 다름 아닌 바로 나다.  어쩌다 휴가를 쓰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전화와 문자 테러를 하는 회사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회사를 10년을 꾹꾹 채운채 다니고 있다. 심지어는 내 20대를 돌아보면, 이 회사를 빼고는 생각나는게 없을 정도로 나는 벌써 10년째 이 회사를 출퇴근하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 대체 나는 왜 이 회사에 10년째 묶여있나.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그러니까 파릇파릇한 사회초년생이었던 그 때, 나는 이 회사에 대해 1도 몰랐다. 근데 우리 엄마는 이 회사를 알고있었고, 심지어 다른 어른들도 이 회사를 알고 있었다. 그때, 아 꽤 이름있는 회사구나 했다. 그때만해도 어른들이 이름을 알고 있는 기업은 대기업이니, 당연히 좋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회사 이름을 말했을 때, “아~ 거기?” 라고 반응하는 회사. 그런 회사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내 나름대로 자부심이었다. 한해 한해 지나며, 점점 더해지는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로 회사를 욕할지언정, 회사 이름값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0년이나 다닐 수 있었다(이 10년 간 내 건강이 축나고 있었다는 건 생각못했다는게 함정).



각설하고, 한 회사에 오래 다니면 좋은 점도 많겠지만, 안 좋은점도 많다. 비율로 따지자면 4:6. 그러니까 안 좋은점이 6.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대체적으로 한 회사를 오래다니면, ‘아! 얘는 여기밖에 다닐 곳이 없으니 막 굴려도 되나보다’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역시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내 가치가 오르는게 아니라, 내 업무량이 늘어나고 스트레스만 늘어난다. 업무량이 늘고, 스트레스가 늘면 최소한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있어야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직을 생각할 수 밖에. 



<이직 타이밍 체크리스트>


1) 상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2) 자신의 분야에서 칭찬을 받고 있다.


3) 직장 내 자신의 업무에서 더 이상 새로운 기획은 없다고 느껴진다.


4) 일주일에 3회 이상 새로운 자리에서 오퍼가 온다.


5) 아침에 눈 뜨자마자 휴가 낼 궁리만 하는 날이 3일 이상 지속된다.


6) 부하 직원들에게 더는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


7) 연봉 협상에서 3차례 이상 실패했다.


8) 시장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9) 인생에서 ‘성공’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찾고 싶다.


10) 10년 뒤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비전있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당신에게 해당되는 문항이 다섯개 이상이라면 지금 속해 있는 조직에서의 미래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p 023~ 024



이 체크리스트에서 나에게 해당되는 문항이 몇 개인지 체크해보았다. 슬프게도 나에게 적용되는 갯수는 5개 미만이다. 하긴, 내가 원하는건 이직이 아니라 ‘퇴사’니까. 하하하하ㅠㅠㅠㅠㅠㅠㅠㅠ.



이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세 가지이다. 바로 목적, 목표, 기간이다. p 017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직’은 아직 먼 이야기. 목적, 목표, 기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은 현상유지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할 수 있는 ‘이직’이니까, 미리미리 준비를 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난 얼웨이즈 직장인이니까. 흑흑



퇴사가 이직의 선결 조건은 절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퇴사란 이직이 결정된 이후, 현재 다니는 회사와 풀어야 하는 숙제에 가깝다. 다만 아래 몇가지 사항을 고려해 먼저 퇴사하고 이직에 집중할지, 혹은 회사를 다니며 꾸준히 이직을 준비할지 결정하자.



1) 재직 중일 때 협상에 더 유리하다.


2) 현재 회사 상황을 보고 판단하라.


3) ‘퇴사한다’고 확정하고 준비하라.



퇴사는 생존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이므로, 무턱대고 그만두기보다는 스스로 확신하고, 정확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퇴사는 당장 오늘도 할 수 있다. 멈추고 스스로 돌아본 후 결정해도 늦지 않다. p 044



지금 회사를 다니며 이직에 성공한 동료들을 많이 보아왔다. 열이면 열, 전부 재직중에 이직준비를 했다. 퇴사후 이직준비를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때는 ‘왜 힘들게 재직중에 이직준비를 하지?’ 싶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퇴사 후 이직준비를 하면, 사람은 조바심이 나기 마련이다. 당장 내 통장에 꽂히는 월급이 없기 때문에. 분명 이직을 하는 대다수의 이유는 연봉인상인데, 퇴사 후 이직준비를 하면 조바심으로 인해 연봉인상에 아주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또 있다. 재직 중에 이직준비를 하다보면, 심지어 이직하려는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으면 말이다. 현 회사에 아주 당당하게 ‘이직’한다고 퇴사를 이야기하는데, 우리 회사 같은 경우에는 백이면 백 해당 사원을 붙잡는다. 왜나면 이직하려는 사람들은 대게 일을 제일 빡세게하는 실무자니까. 진짜 윗사람들이 일을 안하는 회사일수록, 실무자들이 퇴사할 때마다 그 타격은 어마무시하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퇴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고 협상을 한다. 물론 회사에 남을지, 선택 그대로 이직을 할지에 대한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중요한건, 이직을 할 때 중요한건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는 점이다.


회사는 바꾸되, 목표는 일관적으로!


1) 이직의 목표는 하나다.


2) 경력 단절의 이유는 타당하게


3) 오로지 돈 때문처럼은 보이지 않도록. 


4) 다섯 번 이상은 이직하지 마라. p 055



이 책을 읽으며, 느낀점은 하나다. 그저 사람 싫다고 ‘이직’을 생각하는건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것. 주변에서 이직에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봐와서 꽤 쉬울거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만반의 준비없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하기에는, 리스크가 정말 큰게 바로 이직이 아닐까 싶다. 



이유 없는 이직은 하지 말자


1) 이직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2) 정말 이직할 만큼 가치 있는 곳인가


3) 적응과 성공: 확실히 적응해서 성공할 수 있는 곳인가 p 082



이직을 하기 위해선 ‘준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그 준비에는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서류를 쓰는 법이라던가 면접을 준비하는 방법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이건 고작 이직 준비의 50%일 뿐이다. 이직을 성공한 뒤에는, 이직한 회사의 출근일과 다니고 있는 회사의 퇴사일 조율 등 정말 생각해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언해주는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없다. 그 누가, 직장동료에게 ‘나 이직하고 싶은데, 조언좀 부탁해’ 라고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예비 이직러들에게 이 책은 가뭄속의 단비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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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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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딱 2년만이다.




우리 집에는 책이 워낙 많다. 읽은 책도 많고, 아직 못 읽은 책도 많다. 이쯤되면 나는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사는게 아니라, 책을 ‘모으는’ 행위를 좋아해서 책을 사는 느낌이랄까? 아니 뭐, 어느쪽이든 결과적으로 난 사놓은 책을 읽게 되니, 좋은게 좋은거겠지만. 여튼! 책을 자주 사서 읽어야 할 새 책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뭐랄까?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안읽고, 새로운 책을 계속 읽게 되는 독서루틴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으로 정말 좋은 책은 다시 읽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다.




이 책은 사실 기자님이 조선일보에서 연재중인 기사 「땅의 역사」이기도 하고, TV조선에서 방영하는 「땅의 역사」이기도 하다. 




2년 전 나는 tv조선에서 방영하는 「땅의 역사」를 통해 박종인 기자님을 알게되었고, 본방/재방/삼방까지 보는 열렬한 시청자가 되었다. 방송이 종영된 뒤에는 출간된 이 책 『땅의 역사』를 읽으며 기자님의 팬이 되었고, 기자님이 쓴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에서 매주 한 편씩 올라오는 연재되는 기사 「땅의 역사」도 읽기 시작했다(연재기사는 지금도 ing). 



물론 나는 이 책을  처음 읽기 전까지 기자님이 「땅의 역사」를 기사로 연재하고 있는지 1도 몰랐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생각을 한다. 기자님이 연재하는 기사 「땅의 역사」를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껄’ 하는(「땅의역사」 연재기사를 안본 사람 없게 해쥬세욥).



조선일보라는 신문사 자체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나역시도 그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인 기자님의 기사만큼은 많은 이들이 혐오하는 그런 기사들과는 백프로 다르다.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하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얼마전 회사 동료에게 이 책을 빌려준 적이 있다. 그 동료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꽤나 관심이 있으신 분이었기에, 이 책도 흥미롭게 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왠걸? 사분의 일도 읽지 못한채 나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열불이 터져서 읽을 수가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땅의 역사』 1권의 주제는 “소인배와 대인배”였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그럼에도 잘먹고 잘 산 소인배. 반면에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희생했지만,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었던 대인배. 읽으면 읽을 수록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어찌 열불이 안날 수 있겠는가. 나라 판 놈은 죽을때까지 잘살고, 나라를 지킨 사람은 나라 판놈같은 나쁜놈들에게 죽고. 나 역시도 읽을 때마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고, 때론 눈물이 찔끔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아무리 화가나는 역사라도 우리의 역사이며, 잊지말아야 할 역사이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서문이다. 우리가 빛나는 역사가 아닌, 이토록 분통이 터지고 아픈 역사를 왜 기억해야하고, 알아야만 하는지 바로 그 이유다.




임진왜란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빛나는 역사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전투는 거의 모두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배워야하고, 잊지말아야하는 빛나는 역사가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역사일 뿐이다. 임진왜란을 통틀어보면, 열불이 나도 이렇게 열불나는 역사가 없다. 일본에 다녀온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선조에게 서로 다른 보고를 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 이미 그전부터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이야기가 조선에 파다했다. 하다못해 당시 바다건너 또다른 섬나라 류큐에서조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나라를 버렸다. 그 뿐인가? 자신이 버린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이 버린 나라를 지키려는 이순신 장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든게 분명히 기록된 역사임에도, 우리는 이런 내용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 혹시나 열성적인 국사선생님을 만나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내용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한반도를 유린한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빛나는 이순신 장군의 역사, 왕이 버린 나라를 지킨 의병장들의 역사였다.



다음 날 광해군이 공식 왕세자로 지명됐다. 그리고 선조가 선언했다. “마땅히 도망가지 않고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음 날 새벽 어영대장 윤두수가 끄는 가마를 타고 선조는 대궐을 떠났다. 다음날 선조 일행은 널문리(판문리)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으로 향했다. p 046



쇄환사를 통해 귀국한 피로인은 1607년 1400여 명, 1617년 321명, 1624년 146명이다. 합쳐서 사명당이 데려온 3000명에 못미친다. 돌아가면 천민으로 천대받거나, 북쪽 국경으로 가서 군역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0만 피로인 대부분이 귀국을 거부했다. 비겁한 군주가, 명분에 집착해, 하늘이어야 할 민(民)을 짚신짝 취급한 탓이다. p 051



그래서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이 중요하다. 이 책은 당대에 임진/정유재란을 겪은 사람이, 그 시대를 직접 기록한 책이다.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이기에 생동감마저 있는 책이다. 하지만 너무 생동감있어서, 그만큼 징비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고구마를 오백만개 먹은 기분이 들 정도로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정치를 하는 작자들이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대적하기는 커녕 계속 도망가고, 도망가고, 심지어 왕까지 도망가는 난리통이 그려진다. 일본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두었던 장군을, 참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조선이 일본을 상대로 얼마나 빌빌거렸는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을 쓴 류성룡 조차도, 당시 조선 정부에서 정치를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을 집필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 책은 류성룡 본인을 비롯하여, 당대 집권자들의 치부를 들추는 것인데 말이다. 『징비록(懲毖錄)』이 제 치부를 들추는 일이라는 것을 류성룡이 몰랐을리가 없다. 



류성룡은 본인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잘못을 알았기에, 미래의 후손들이 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다. 잘못된 역사일 수록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제 치부를 들추는 이 징비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여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을 유린했던 일본에서 징비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결국 잘못된 역사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시간동안 고통을 겪었던 건 지금 우리와 같은 서민들, 백성이었다.



청은 조선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청 태종이 소역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내가 큰길로 곧장 한양으로 향해도 산성에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들의 붓대로 우리 군대를 물리칠 것인가?” 군사력 열세를 빤히 알고 있는 군부는 화전을 주장했고 대명의라는 명분을 내세운 문신들은 전쟁을 주장했다. 목소리 큰 문신 세력이 승리했다. p  064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렸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p 073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누런우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p 075



1592년~1598년까지 지독하디 지독한 임진/정유년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1627년에 정묘호란이 터졌고 뒤이어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일본과 전쟁이 끝난 지 고작 30년만에 청나라와 전쟁이 시작했다. 정말 슬프게도 이 전쟁 역시 징비하지 못한 조선의 위정자들의 잘못이 컸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지 고작 30년 흘렀을 뿐인데, 다를게 하나 없었다. 전이나, 후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머리속에는 자신들의 안위만 있었다. 물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보통 이런 사람들은 힘(권력)이 없었다.



진령군과 이유인은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쌀 한섬과 돈 10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계시를 내렸다. 왕(고종)은 그리 시행하였다. p 093



민영휘는 당장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를 찾아가 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원세개가 허락했으니 청나라 군사를 부르시라”고 청했다. 고종은 “여러 대신들 논의 역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p 100



그로부터 이백여년이 지났다. 역시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때보다도 더욱 썩어들어갔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번에는 7년이 아닌 35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동안 일본에게 유린당했다.



이렇게 아픈 역사를 반복한 대한민국이, 어째서 무엇때문에 아직까지도 빛나는 역사만 고집하는 걸까? 



징비하지 못하여 한반도는 오랜시간 고통받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정과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도 똑같았다. 징비하지 않았기에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 징비하지 않았기에 친일경찰들이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빨갱이 딱지를 붙여가며 고문을 하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눈에 비치는 상황만 조금 달라졌을 뿐,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징비하지 못했던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 왕정에서 공화정이 된 것 말고는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징비는 커녕 제 뱃속 챙기기에 급급하고, 매번 알맹이 없는 정책만 꺼내놓기 바쁘다. 여야할꺼없이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렇다. ‘이 사람만큼은 조금 다를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내 한 표 행사하게 한 정치인들 조차도 똑같았다. 조선이 징비하지 못하여 백성에게 그 아픔을 떠넘겼듯이,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징비하지 못하여 국민들에게 그 아픔을 떠넘긴다. 물론 이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이쯤되면 박열을 비롯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아나키즘을 따라갔는지, 이해가 된다. 심지어 공감하게된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결국 징비하지 못한 정치인들이며, 징비하지 못하여 그들의 잘못을 눈감은 우리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먼저 징비해야, 정치인들의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으며, 바른길로 가도록 명령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이다.



그렇기에 난 박종인 기자님이 쓴 책 『땅의 역사』(동명의 연재기사 포함)가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야말로 현대판 징비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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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사토 겐타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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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제약회사를 다니는 사람이지만, 난 이런 질병이나 약 관련 교양서적은 읽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유독 올해들어서(!!) 약이나 질병 관련 교양서적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읽었는데 넘나 어려워서 리뷰 안쓴 것도 여러권ㅋㅋㅋ).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내 업무는 화학쪽이 아닌 지원부서쪽이라 이런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연말부터 추가된 일본어 번역업무(회사에서는 내가 잘해도 못한다고 해야하고, 잘하는게 있어도 알리면안됨..)덕분에 이런 기초지식이 필요해졌다. 아무래도 주로 번역하는 문서가 일본 제약관련 논문이다보니, 이런쪽 지식이 1도 없는 상태에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너낌적인 너낌.



타고나기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완전 오 백프로 문과생인 내가, 1도 모르던 제약, 화학쪽 논문을 번역하는 일은 뭐라고 해야할까. 원하지 않는 지식을 어거지로 머리속에 쳐넣는 느낌이랄까? 그나마도 일반적인 QA관련 교육이나 위험관리, 일탈 등은 어깨넘어 보아온 것이 있다보니, 나름 이해하면서 번역이 가능한데, 막 설비 나오고 무균포장 나오면 하 ㅋㅋㅋㅋ 이건 뭐......휴.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전문지식을 머리속에 쳐넣으면 대 혼란이 오는데, 그게 바로 지금 내 머릿속 상황. 그래서 대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위해, 그나마 내가 이해를 잘 할 수 있는 역사분야가 곁들여진 질병/제약 교양서적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놀란 사실 하나는, 내가 번역한 일본 논문이나 저널들에 나온 화학약품이 여기서 나왔다는 사실. 진짜 정말 일본놈들은 영어단어를 쓸때 알파벳으로 써주면 정말 고마운데, 꼭 카타카나로 변환해서 쓰니까. 이게 대체 무슨 단어인지 감이 안오는게 많다. 카타카나 그대로 읽으면 본래 영어단어와는 전혀 다른 단어가 되는게 태반이니까(할말하않ㅡㅡ). 카타가나대로 읽었을 때,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영어단어라면 나름 추리하기 쉬운데, 화학약품이나 제약쪽은 모르다보니 진짜 옆에 실험실 직원 붙잡고 최대한 비슷하게 읽혀지는 화학약품을 찾아녔던 과거의 나ㅠㅠㅠ



진작에 이런 책좀 미리 읽고 번역에 돌입했으면 나름 수월하게 번역했을텐데. 휴. 일년간 고생한걸 생각하면 진짜 ㅋㅋㅋㅋㅋ 아오.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번역 업무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므로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는, 팔자에도 없는 제약/화학약품 공부를 해야한다는 슬픈이야기.



뭐, 업무의 필요성으로 인해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아무래도 이 책은 이런 분야에선 매우 초급적인 교양서적이다. 그러다보니 이쪽을 1도 몰라도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고, 오히려 꽤 흥미진진하다. 



퍼킨은 여러번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조건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퍼킨은 시커먼 타르처럼 보이는 덩어리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실험에 사용한 플라스크를 설거지 하다가 세제가 엉뚱한 보랏빛을 띠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험삼아 거기에 천을 담그자 아름다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이 물질을 자주색염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직감했다. 퍼킨은 이 우연하고도 기적적인 발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염료회사를 세워 큰 돈을 벌었다. p 078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을 발견했다. 다만 이 퀴닌은 키나나무의 껍질에서 발견된 성분이다보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말라리아 환자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여러 화학자가 퀴닌 인공합성에 뛰어든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엉뚱한 결과가 나왔는데, 그 엉뚱한 결과로 때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퍼킨. 시작은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인공합성이었으나, 결과는 보랏빛 화학염료 개발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잭팟! 



약품합성이나 염료합성은 모두 화학식에서 시작한다. 뿌리가 같다고 해야하나? 어느 갈림길로 가느냐에 따라 염료가 되기도 하고, 약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각 지역 공단에 있는 회사들을 보면 제약공장과 염료공장등이 이상하게 지척에 있다. 뭐 여튼, 결과적으로 이과 만세!


이런 류의 실험을 해야 실패한 것을 대상으로 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뭐 그런 너낌적인 너낌... 



이런은 잭팟 확실히 문과보단 이과가 더 확율이 높은가보다. 2차대전 발명품도 그렇고... 하, 난 왜 실험따윈 개나줘버린 문과인가..



서양에서는 먼 옛날부터 널리 이용된 아편이 중국에서는 꽤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뜻밖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아편의 뛰어난 약효과 함께 그 끔찍한 해악과 독성을 중국인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p 101 (양귀비에서 모르핀을 얻어 아편을 만듬)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어찌보면 우리나라 역사에도 크게 영향을 준 이 전쟁. 분명 학교에서도 배웠을 이 전쟁은 결국 영국이라는 원조 섬짱깨가 중국에 양아치짓을 하며 시작한 전쟁이다. 



중국은 영국에 차(tea)를 수출하며 엄청난 무역흑자를 벌여들였는데, 이 말을 뒤집으면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엄청난 무역적자라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중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낼 수 있나 고심하던 영국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아편을 위험한 약품으로 분류하여 엄청나게 규제를 하고 있었다는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지들 나라에는 퍼지지 않게 규제하는 아편을, 중국에 대량수출하여 널리 퍼트린 영국! 결과는 뻔했다. 중국 전 대륙의 아편 중독. 뒤늦게 아편의 위험성을 깨달은 중국정부가 아편을 규제하자, 영국이 발끈해서 처들어온게 바로 아편전쟁의 서막이다.



전쟁의 결과는? 


당시 중국, 즉 청나라는 부패할대로 부패했기에 군대 역시 무쓸모. 결국 근대식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이 승리했다. 여기에 더해 영국은 중국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홍콩까지 할양하라고 한다. 이래서 영국을 원조 섬짱깨라고 하는것!!!!



자 그럼 이 전쟁이 어떻게 우리나라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일까?


아편전쟁 전까지 동아시아의 패자는 중국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중국에 조공을 하는 명실공히 황제국가였다. 하지만 그런 중국이 영국에 미친듯이 깨지면서 동아시아의 권력구조가 깨져버렸다. 영국을 포함한 다른 서구권 나라들도 동아시아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본격적인 서구권 나라가 동아시아로 발을 뻗어나가는 서세동점 시작.



여기서 아쉬운 사실은 당시 조선 정부도 영국에 대패한 청나라처럼 뿌리까지 썩을대로 썩어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도 없었다. 반면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 문명을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암흑의 35년, 일제강점기.



근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아편’이란 성분이 그 오랜시간동안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는 워낙 오래전부터 알려진 아편, 알려진지가 너무 오래되서 그 위험성까지도 널리 알려진 아편이 중국에서는 생전 초면인 성분이라니. 그네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명의 화타는 침만 놓을줄 알고, 식물들의 약효는 잘 몰랐나보다.



이 606번째 비소 화합물 살바르산은 ‘구세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살바토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910년 살바르산은 훼히스트에서 발매되어 말 그대로 수 많은 매독 환자를 죽음의 늪에서 건져 올린 구세주로 자리매김 했다.(중략) 또 살바르산의 등장은 수없이 많은 다른 세균 감염증에 대해서도 같은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p 164



중세에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질병이 있다. 성병의 일종이라고도 알려진 매독. 지금이야 널린게 치료제니, 매독으로 죽었다는 사람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 한다. 더 소름돋는건 매독으로 죽은 사람보다, 매독을 치료하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떻게 치료했길래 치료과정에서 죽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치료제를 들어보면 수긍이 간다. 중세에는 매독 치료제로 ‘수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소기호 Hg 수은.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수은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떻게 위험한지, 중독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세사람들은 몰랐다. 그들에게 수은은 만병치료제와 같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수은으로 매독을 치료하다가 죽었다. 



그렇게 아주 오랜시간이 흐르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매독 치료제가 나왔으니, 바로 ‘살바르산’.


과거에는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처럼 자연물에서 성분추출로 약을 조제했었는데, 이 ‘살바르산’을 시점으로 비로소 순수 화합물로 약을 만드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처음 시작은 어렵지만, 누군가 시작한 길을 따라가는 건 쉽다. 이런 화합물도 그랬다. ‘살바르산’을 시작으로 화합물에 대한 발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다만 발전이 너무 빨랐기에 ‘살바르산’이 그 명성을 이어간 기간은 짧았다. 더 뛰어난 약제들이 줄줄이 나왔기 때문에! 뭐, 그래도 이렇게 순수화합물로 약을 조제할 수 있게, 그 시작점에 ‘살바르산’이 있다는 것 만큼은 중요하다. 저널이나 논문 번역할때, 살바르산 이름이 가끔 튀어나오는걸 보면.




아니 근데, 이 책도 일본인이 쓴 책인데?? 왠지 원서로 다시 읽어봐야할 거 같은 이 느낌은....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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